정호 빈첸시오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사무엘기 상 16,1-13
마르코 2,23-28
사람의 안식일과 하느님의 안식일의 차이
안식일.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주님의 날 이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왔습니다.
안식일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까닭은 ‘하느님이 정하신 날’이라는 이유가 가장 큽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6일 동안의 창조를 마치시고 하루 쉬신 것처럼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하루를 하느님 안에서 쉬어야 하는 것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만드셨다는 것만을 중요시하고,
그래서 왜 안식일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냥 지키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우리 생활이 바쁘면 그냥 안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하느님께서 정하신 날이니
이 날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을 무시하고 엄청난 재앙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사실 때 이미 이 안식일법을 정해놓고 철저히 지키도록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 외에는 굳어버린 장작들처럼
그날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안식일 법을 어겨버립니다.
배가 고팠는지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바리사이파들이 문제 삼은 것은
밀이삭을 잘라먹은 절도의 문제가 아니라 안식일에는 일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어기고
밀 이삭을 잘라낸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왜 저 사람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까?"
참 딱한 제자들이기도 합니다.
스승을 이런 궁지로 몰라넣었으니 말입니다.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이 어리석은 행동에 무슨 변명을 하셔야 하리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리어 그들에게 그들의 자랑스러운 조상 다윗의 이야기 한토막을
별안간 꺼내십니다.
그것도 어찌보면 다윗의 씻을 수 없는 죄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를 말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바리사이파의 눈으로 보면 절도범이요,
힘으로 하느님의 법에 대항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이야기를 시작하시며 ‘배가 고파서’라는 단서를 붙여
그들 조상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으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으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바리사이파의 입은 막혀버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굳은 마음에 예수님이 얼마나 얄밉고 분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재치를 따질 것이 아니라,
그분 말씀에서 안식일의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나 이야기 속의 다윗일행은 배고픔이라는 인간적 한계 속에서 살기위해
하느님의 법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적어도 예수님의 시각 속에 그들은 그런 이유로 죄라는 굴레를 벗게 됩니다.
이런 예수님의 시각은 우리에게 안식일이 사람들을 고정시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족쇄의 날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제자들이 그들 행동에 대해 죄인으로 내몰리지 않은 것은
배고픈 이가 안식일에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그들의 허기짐을 헤아리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사람을 참 사람답게 살게 하시려고 안식일 그 하루만큼은
자신을 위해 살기보다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만드셨고,
그래서 그 날 사람을 살리는 일은 정당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일 복음에서 이 뜻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마치 오늘 이야기 속에서 다윗이 자신의 일행을 위해 직접 하느님 법을 넘어서는 행동을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직접 안식일에 사람을 위해 법을 어기시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 그것이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정하신
모든 법의 근본정신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사람은 참으로 사람답게 주님처럼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안식일인 주일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는 이미 주일을 어떤 족쇄처럼 느끼며 살아가고 있진 않습니까?
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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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경국 신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사무엘기 상 16,1-13
마르코 2,23-28
안식일의 이유
십자고상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기시켜
그리스도의 죽음을 좀 더 쉽게 묵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고상 자체를 미신적으로 숭배하는 위험이 생길 수 있는데,
상징에 지나지 않는 십자고상이 차츰 그리스도와 동일시되어
결국에는 십자고상과 그리스도를 혼동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혼동은 비단 십자고상과 같은 성상뿐만 아니라 계명을 해석하는 데에서도 생겨납니다.
안식일 계명의 의미는 하루를 쉼으로써 우리들의 노동력을 회복시키거나
다음번의 노동을 위하여 몸의 상태를 조절하기 위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노동의 고역이 아니라 영원한 휴식의 기쁨을 인간의 목적으로 설정하신
하느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주인이며 세상의 창조주, 그리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연결되는 날이며 하느님의 손안에 창조된 인간이 머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은 인간의 구원과 직결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안식일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느님과 함께 머물면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드릴 수 있는
날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는 하느님의 거룩한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날보다 더 많이 이웃을 사랑으로 배려하면서 지내야 할 것입니다.
부산교구 구경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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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수녀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사무엘기 상 16,1-13
마르코 2,23-28
화려한 주말
“이번 주말엔 뭐해요?”
주말이 화려할수록 멋진 인생을 사는 것처럼 생각하며 으레 주고받는 인사다.
나의 안식일도 언제나 미리 스케줄이 짜여진다.
주일미사를 성대하게 드리고 고요히 하느님과 사귀는 날로 지내야지 하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무언가 스케줄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손해 보는 듯 무능한 듯 생각되어
강박에 쫓기듯 계획을 짠다.
밀린 일, 밀린 빨래, 방 정리, 수업 준비, 영화 구경, 가벼운 등산, 누군가와 미팅,
못다한 숙원 사업 등. 어쩌다 주어지는 연휴엔 더 많은 계획과 일거리를 미리 준비해 둔다.
계획으로 채워진 주말을 기다리다가, 지나간 주말을 못내 아쉬워하는 월요일엔
어김없이 만성 월요병 증후군에 시달린다.
사람을 위한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일을 위한 사람으로 전도되는 현실.
안식일의 주인이며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부담스럽게 모시고
재빨리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서는 우리의 주일.
어느새 우리가 안식일의 노동자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고 김남주 시인은 아들이 사는 시대에는 노동자들이 토요일·일요일에 안식을 취하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열망하며 아들의 이름을 ‘토일’이라고 지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풍요·이상을 누리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과연 그 옛날 의식주에 허덕이던 시절보다 무엇이 더 나아졌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이상을 희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 본다.
학창 시절에는 가족과 함께 곱게 차려입고 미사를 드리러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그래서 이런 꿈을 그리기도 했다.
화사한 봄날 주일, 온 가족이 말끔하게 차려입고 미사에 참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린아이들 손엔 풍선을 쥐어주고 들녘을 걸어가는 행복한 가정!
안식일에도 생계를 위해 일해야만 한다면 예수님은 그와 함께 안식일에도 일하실 것이다.
안식일에 주님을 예배하고 축복을 청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을 주실 것이다.
바리사이 같은 나의 안식일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밀 이삭을 뜯지 않겠니? 나와 함께 미사에 참석하지 않겠니?”
나는 이제 알 것 같다.
어떤 의사가 꾀병은 고칠 수 있지만 월요병은 고칠 수 없다고 했는지 말이다.
예수님이 바로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노틀담수녀회, 김현숙 수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