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화, 고난주간)
* 시작 기도
(요 16:2-3)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주님...
바울이라 하는 사울이 바로 이런 자였지요.
자신이 율법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그 외 사람들은 우습게 보였던 게지요.
스데반 같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는 것이 당연한 듯 여기며 그 일에 찬성하며 증인으로 서기도 했습니다.
자신은 율법에 열심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였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행 8:1).
나 역시 하나님을 잘 아는 자처럼 살아왔지만 복음을 알고 보니 나야 말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죄인 중에 괴수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고난주간 둘째 날을 맞아 화인 맞은 것 같은 나의 양심을 주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아들과 아버지를 진정 잘 아는 자로 서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려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은혜로 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눅 22:39-53
제목 : 일어나(아니스테미) 기도하라.
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40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7 말씀하실 때에 한 무리가 오는데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라 하는 자가 그들을 앞장서 와서
48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49 그의 주위 사람들이 그 된 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 하고
50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51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2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경비대장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53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
* 나의 묵상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성만찬을 행하셨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당신의 죽으심을 결정적으로 이야기 하셨다.
떡과 잔을 나누실 때 그 떡은 곧 주님의 살이며 잔은 주님이 흘리실 피를 예표한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새 언약을 언급하시면서 바로 이 잔이 주님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임을 천명하신다.
그리고 너희를 위하여 이 흘리는 피이며 그것이 영원한 생명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제 주님은 성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신다.
감람산으로 가신 목적은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함이다.
그 전에도 늘 기도하러 감람산에 가셨다.
그것이 주님의 일상의 루틴(routine)이었다.
(눅 21:37)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주님의 쉬심은 곧 아버지와의 기도요 교제였다.
이렇게 주님은 습관을 따라서 감람산에 가셨다.
이에 제자들도 함께 주님을 따라갔다.
병행본문인 마 26장이나 막 14장에는 제자들 모두가 함께 따라갔으며 겟세마네 동산에 그들을 머물러 두고 그들 중에서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좀 더 가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요청하신 후에 돌 던질 만큼 떨어진 곳에서 주님께서도 기도하신다.
주님이 하신 기도의 내용은 이것이다.
(42절)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듯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완전한 사람이시다.
그렇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아신다.
그래서 그 고통의 잔이 지나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면 그렇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신다.
하지만 아들은 그 기도를 바로 바꾸신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바꾸신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온 힘을 다하여 기도에 전념하실 때 천사가 하늘로부터 와서 힘을 더한다.
그리고 진액을 쏟는 기도를 하신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주님은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그들을 보니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아마도 성만찬에서 주님으로부터 들은 죽음의 이야기 때문에 절망과 번민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이런 슬픔과 피곤으로 인하여 어딘가에 기대고 졸고 있거나 잠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주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46절) 너희가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마태나 마가는 ‘깨어 기도하라’고 기록한 반면 누가는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였다.
‘일어나’로 번역된 헬라어 ‘아니스테미’는 ‘깨어’라는 단어보다 훨씬 강력한 의미를 가진다.
이 말은 ‘일어서다, 깨어나다’라는 뜻으로 죽은 자가 다시 일어나 생명을 얻는 부활을 묘사하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의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은 마태와 마가가 사용한 ‘깨어 기도하라’는 말보다 그 의미를 한층 더 심화시켜서 기록한 것이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일단의 무리들이 온다.
그들은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속들과 성전경비대들이다.
그들의 맨 앞에서 가룟 유다가 그들을 이끌고 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그가 예수니까 그를 잡으라고 한 것이다.
아마도 한 밤중이어서 깜깜하니까 누가 누군지 식별이 안 되므로 유다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때 예수님은 유다에게 네가 입 맞추는 것으로 나를 파는구나,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되어질 일을 간파하고 우리가 이들을 칼로 칠까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떨어뜨린다.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면서 그의 귀를 만져 낫게 하셨다.
예수님을 잡으러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배대장들 그리고 장로들(실은 이들이 보낸 군관이나 하속들)에게 일갈하신다.
그것은 내가 너희들과 날마다 성전에 있을 때에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희 때이며 어둠의 권세가 힘을 발휘할 때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감정으로 일을 대하지 않으신다.
자신을 잡으러 온 무리들을 보면 심경이 변화되고 흔들릴 법도 한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이들을 칼로 무찌를까요, 하는 질문에도 이를 말리시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셨다.
무엇보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주신다.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이는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힘과 능력도 있고 게다가 제자들이 다 옆에 있지 않은가?
그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당신을 잡으러 온 그 무리를 물리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 예수님 한 분만으로도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요한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한다.
(요 18:6) 예수께서 그들에게(군관들과 성전경비대원들)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내가 그니라’라는 그 말씀 한 마디에 그들은 다 뒤로 나자빠졌다.
하지만 주님은 당신의 손을 그들에게 내어주신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거나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스스로 내어주신 것이다.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나는 과연 주님과 같이 대범하게 행할 수 있는가?
아니 나는 감히 주님의 그런 대범한 행동에 범접할 수 없는 자이다.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나는 진짜로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한 자이다.
기회만 닿으면 언제라도 그런 위기 상황을 벗어나려 애쓰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연약하고 부정한 자일지라도 우리 주님은 그런 나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것은 나 또한 창세전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 곧 자녀로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약함과 피로감으로 인하여 자빠져 자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시고 주님은 오히려 그들을 권면하시고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신다.
나 또한 셀 수 없이 넘어지고 자빠져 여기저기 깨지기도 하고 슬픔에 빠져 졸거나 잠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아니스테미’ 곧 일어나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갖는다.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힘인 것을 안다.
지금은 어둠의 권세가 힘을 발휘하여 그들이 장악할 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에 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록 곤고하고 힘든 삶일지언정 그 안에서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파레시아 곧 담대함을 이룬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도 일상의 루틴으로 낮에는 복음을 가르치시고 밤에는 아버지와의 기도 곧 교제를 가지셨습니다.
그 교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압니다.
나는 연약하여 잘 넘어지지만 오늘도 아들을 힘입어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는 담대함으로 일어섭니다.
오늘이 새 생명으로 일어나는 부활의 때임을 알기에 말씀으로 더 교제하게 하소서.
주님이 주시는 환난이라면 그것을 거부하는 자가 아니라 기꺼이 수용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서게 하옵소서.
그것이 주님의 뜻을 이루는 복음인 줄 믿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생명이 나의 생명으로 온전히 드러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