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25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 전라도
구릿골, 그 유토피아의 땅
모악산을 둘러싼 고을 전주와 완주에 인접한 김제시는 호남평야의 중심부에 있고 나라 안에서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다.
‘전라도 옥백미(玉白米) 맛이다’ 라는 말은 전라도 만경평야에서 생산되는 쌀로 지은 맛있는 밥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맛있는 쌀의 대명사였던 전라도 쌀이 그 명성을 여주, 이천 쌀에 넘겨준 지 이미 오래다. 들리는 말로는 전라도에서 수확한 쌀을 밤중에 여주, 이천의 정미소로 보내어 정미만 하면 여주, 이천 쌀로 둔갑한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 안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김제 만경평야다. 나지막한 산들이 들 가운데를 굽이져 돌아 이중환은 “두 줄기 물이 감싸듯 하여 정기가 풀어지지 않아서 살 만한 곳이 대단히 많다”라고 기록하였다. 1935년 9월 《동아일보》에 이병기가 연재한 「해산유기(海山遊記)」에는 김제의 호남평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무어라고 형용할꼬! 그 광활한 김제 만경의 평야며 백산평 궁안 3천 평 들이 삼면에 에두르고 한편에는 동진강 서해 그리고 점점이 건너다보이는 산과 산 그 빛들은 푸르고 희뜩희뜩 거뭇거뭇하고 또 그 무수한 변화되는 풍경은 잠깐 이렇게 해서 보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다만 가슴이 넓어지는 듯 이러한 호기가 난다. 저 들판이 무비옥토, 해마다 게서 나는 몇백만 석의 곡식, 그런데도 왜 헐벗고 주리고 이리저리 유리전전하는고.
백제 때의 이름이 벽골군(碧骨郡)이었던 김제군은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졌다. “인심이 순후하여 농사일에 부지런하였다”라고 기록된 김제군에 삼한시대에 축성된 최초의 저수지인 벽골제가 있다. 기축옥사로 희생된 이발의 시에 “성곽 둘레의 연꽃은 비를 재촉한다. 들에 가득한 벼이삭은 가을 하늘에 상긋거리네”라고 하였고, 옛 사람의 시에 “한 길 아득히 바다에 연하였고, 천가(千家)는 반쯤이나 산에 가려 있구나” 하였던 김제시 금산면에 모악산(母岳山)이 있다. 평지에 돌출된 산으로 ‘위대한 어머니의 산’이라고도 불리는 모악산에 미륵의 도량인 금산사가 있다.
모악산 © 유철상모악산(母岳山)은 전라북도 김제시와 완주군에 걸쳐있는 높이 793미터의 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모악산 꼭대기에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닮은 큰 바위가 있고, 김일성 조상의 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산사에서 미륵임을 자처했던 견훤은 역사 속에 패자로 사라지고 역사는 훌쩍 흘러 1100여 년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당시 민중들이 꿈꾸었던 미륵의 나라는 어떤 것이었을까? 석가는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에서 용화세계(龍華世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 세상에는 계두성(鷄頭城)이라는 커다란 도시가 생길 것이다. 동서의 길이는 12유순(由旬, 1유순은 40리 정도)이고 남북은 7유순인데, 그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여 많은 인구와 높은 문명으로 거리가 번성할 것이다. 향기로운 비를 내려 거리를 윤택하게 하고 낮이면 도시를 화창하게 하리라. 또 모든 것을 진리에 따라 움직이게 하고 올바른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섭화(葉華)라는 나찰 귀신이 있는데, 이 나찰은 사람들이 잠든 다음 더럽고 나쁜 물건들을 치워주고 향즙(香汁)을 땅 위에 뿌려서 온 도시를 지극히 향기롭고 깨끗하게 해서 아름답게 해주리라.
저때에 염부제(閻浮提, 인간 세계의 총칭. ‘현세’의 뜻)의 땅 넓이는 동서남북이 10만 유순이나 될 것이며, 산과 개울과 절벽은 저절로 무너져서 다 없어지고, 4대해(大海)의 물은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누어지느니라. 대지는 평탄하고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고 인구가 번창하고 갖가지 보배가 수없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에 잇달아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느니라. 아름답지 못한 꽃과 맛이 없는 과실나무는 다 말라서 없어지고, 추하고 악한 것 또한 스스로 다 없어져서, 달고 맛좋은 과실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만 자라느니라.
그때의 기후는 아주 알맞게 화창하며 4시의 계절이 순조로워서 108가지 질병이 없고,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의 탐진치(貪瞋癡) 삼독번뇌(三毒煩惱)가 크게 드러나지 않고 은근하여서 사람들의 마음도 어긋남이 없이 고루 똑같아서 만나면 서로 즐거워하고 착하고 아름다운 말만 주고받으며, 뜻이 서로 다르거나 어긋나는 말이 없어서 울단월(鬱單越, 극락세계)에 사는 것과 같으니라. 그때에 염부제 사람들은 사람마다 몸의 크기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으나 목소리에는 차이가 없으며, 대소변을 보고자 할 때는 땅이 저절로 열리고 일을 본 뒤에는 땅이 다시 합쳐지느니라.
또 그때는 논에 모를 꽂지 않아도 저절로 쌀이 생겨 나오는데, 껍질이 없고 향기로워서 먹은 뒤에 병들어 고생하는 일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른바 진귀한 보물이라고 하던 금, 은이며 자거, 마노, 진주, 호박이 길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주워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니라. 옛날에 사람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고 죽이며 잡혀가고 옥에 갇히고 무수한 고통이 있었는데 이제는 부귀가 쓸모없는 돌조각과 같아서 아끼고 탐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하더라(彌勒下生經).
저때가 되면 나라들의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며 좋은 집들이 즐비한 마을과 마을이 들어서 그 마을들에 닭 우는 소리가 접해있으리라. 우거진 숲에는 나무에 꽃이 만발하고 만다라의 꽃이 비처럼 내리는데, 이따금 바람이 불어 악한 것이 모두 사라지고······ 금은보화와······ 싸움도······ 고통도······ 쓸모없는 돌조각과 같다고 하리라.
국립지리원에서 나온 25,000분의 1 지도를 보면 만삭 여성의 성기 같은 형국으로 우뚝 솟은 모악산과 기슭의 협곡 속에 비좁은 평지가 있다. 종교학자들은 ‘지구의 특정 장소를 에너지가 충만한 성스러운 땅’이라고 여기는데, 영국의 소설가 제임스 힐턴(James Hilton)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은 지상의 선경이자 유토피아인 ‘샹그리라’를 배경으로 한다. 고비 사막 북쪽 톈산 지역에 있다고 알려진 샴발라(현대의 극락)에서 착안한 샹그리라를 티베트 사람들은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현존하는 곳으로 믿는다.
구릿골에서 금산사에 이르는 공간은 그런 의미에서 증산을 믿었던 사람들의 성지였다. 이곳 용화동과 청도리 일대에만 들어오면 살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향, 제임스 힐턴이 말한 샹그리라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던 이곳이 바로 청도리다. 그 한가운데에 용화동이 있다.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비산비야 엄택곡부(非山非野 奄宅曲阜)의 지형이다. 이곳에는 이상호, 이정립 형제가 세운 증산교 본부가 있다. 그 아래로 내려가 금평저수지를 따라 들어간 금산면 청도리 구릿골에는 증산(甑山) 강일순이 머물렀던 김준상의 집이 있다. 그 집 2평 남짓한 방에 마련한 약방 광제국(廣濟局) 앞마당에서 천대받는 민중이 한울님이라고 설파한 증산은 죽기 전에 천지굿판을 벌였다.
선천시대는 양의 시대였으나 후천시대는 음의 세계라며, 그날 자신의 법통을 고판례라는 여자에게 넘겼다. 남자도 아닌 여자에게, 그것도 그 시절엔 누가 업어가도 개의치 않을 과부였고 무당이었던 여자에게 법통을 넘긴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여인(고판례)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며, 이 여인이 먹으면 천하 사람이 다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 천하 사람이 눈물을 흘릴 것이요, 한숨을 쉬면 천하 사람이 한숨을 쉴 것이다. 이 여인이 기뻐하면 천하 사람이 기뻐할 것이요, 이 여인이 행복하면 천하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여인의 눈이 빛나면 천하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하면 모든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할 것이며, 이 여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온 세상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강일순의 말이다. 강일순이 고판례를 예찬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를 예찬하는 말이기도 했고, 남녀평등시대의 미래를 열어 보인 일종의 예언이기도 하였다. 그가 예찬했던 고판례는 차경석의 이종누이였는데, 증산의 제자인 차경석은 증산 사후에 보천교를 세워 자칭 차천자(車天子)가 된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던 뿌리 뽑힌 민중들이 증산교로, 보천교로, 원불교로 귀의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모악산 자락에서만 증산교 교파가 50여 개를 헤아릴 정도로 우후죽순 솟아나게 한 주인공 강일순은 죽기 전에 세상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절망을 자신이 다 짊어지고 가노라고 하였다. 그는 한 달여를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가끔 소주 한두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온갖 병을 다 앓으면서 피골이 상접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채 그렇게 갔다. 그의 관에는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느니라”라는 말만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동곡약방(銅谷藥房)이라고 쓰인 광제국 아래에는 증산의 외손자가 세운 청도대향원(淸道大享院)이 있다. 그 건너편 산이 제비산(帝妃山)이다. 조선 중기의 혁명가인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하여 천일기도를 드리고 제천문을 썼다는 제비산을 돌아가면 나오는 오리알 터에 증산의 외동딸 강순임이 세운 증산 법종교(法宗敎) 본부가 있으며, 강일순과 그의 아내가 이곳 시멘트 무덤 속에 안치되어 있다. 강일순의 추종자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법정 싸움까지 벌였던 증산의 유해가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다 팔 하나가 없어진 채로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귀신사 가는 길 옆에서 산길로 접어들면 1960년대 초 교주 서백일이 수십 명과 간음하고 옥살이를 한 후 피살된 사건으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용화교(龍華敎) 본부가 피폐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제비산 오리알 터제비산을 돌아가면 나오는 오리알 터에 증산의 외동딸 강순임이 세운 증산 법종교 본부가 있다.
제비봉 아래에는 정여립이 낙향하여 대동계를 조직했을 무렵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터가 있는데, 지금은 기와 조각들만 남아 있고 그때의 상황이 여러 기록들에 남아 전한다.
여러 번의 기축년이 지나갔어도 아직까지 미완의 사건으로 남아 있는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의 죽음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분명치 않은 의문사로 남아 있다. 다만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는 진안현감 민인백의 『토역일기』에 다음과 같이 그의 최후가 실려 있다.
칼을 가진 자가 말하기를 “전주의 1천 명, 1만 명이나 되는 군사들 속에서도 능히 몸을 피해 도망쳐 왔다. 지금 이곳의 군사는 불과 2백 명도 되지 않아 칼로 휘둘러 치면 탈주할 수 있다” 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은 “저들이 화살을 겨누고 있어서 탈주할 방도가 없으며, 어찌 무고한 양민을 죽일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이 자결하는 것만 못하다” 하며, 돌아서서 한 사람이 짚고 있는 칼을 빼앗아 턱 밑을 치켜 올려 살이 찢어졌다. 정여립이 그 자에게 다시 가까이 가자 그자는 목을 내어 칼을 받고 쓰러졌다. 칼이 번득일 때마다 한 사람씩 쓰러졌다. 정여립은 마침내 칼을 꽂고 목을 빼고 구부려 칼을 받았다. 바로 군사들을 독려하여 서둘러 가보니 정여립은 몸을 웅크리고 크게 부르짖기를 마치 소가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죽었다. 칼을 빼자 칼 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달빛은 없었다. 정여립과 한 사람은 완전히 죽었고, 나머지 두 사람은 아직 생기가 있었다.······ 바로 보고서를 작성하여 감사, 병사, 독포어사, 선전관에게 나누어 보고한 후 정여립의 시신을 검시한 결과, 정여립은 무명 겹저고리를 입고 익은 삼베 끈으로 묶고 있었다. 발에 신은 짚신은 다 떨어지고 버선도 떨어져 양 엄지발가락이 나와 있었다. 가슴에 사기 주발을 품고 있었으며, 주발의 입이 가슴을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이와 달리 『동소만록』에는 “정여립이 변숭복의 꾐에 빠져 진안군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라고 쓰여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에 일어난 기축옥사는 역사상 유례없는 시련과 위기였던 전란에 대처하기는커녕 도리어 정치와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각 당파의 처지에 따라 몇 편의 글이 나왔고, 3백여 년이 흐른 근현대에 이르러 몇 편의 논문이 발표되면서 기축옥사는 새로운 각도로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근현대 들어 정여립 사건의 재조명에 첫 번째로 불을 지핀 사람은 단재 신채호였다. 그는 정여립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였다.
역사의 개조에 대한 나의 우견(愚見)으로 이상에 대하여, 개인의 관계에 대하여 두 가지 결론을 지었느니, 이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매우 곤란하고 사회의 아직 정해지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쓰기 아주 쉽다는 것이다.
정여립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는다’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되는 임금은 죽이는 것도 가하고, 행의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 것도 가하다’고 하며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이미 주실(周室)을 떠났는데, 존주(尊周, 주나라를 존중함)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曹操)와 사마(司馬)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한구석에서 정통이 다 무엇하는 것이냐’고 하여 공자, 주자의 역사 필법에 반대하니, 그의 제자 신여성 등은 “이미 참으로 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말씀이다” 하고,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자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扶植)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선생의 존군모성(尊君慕聖)의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 지 오래이니, 이같은 엉뚱한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한 장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모두 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미 안정된 사회의 인물은 늘 전 사람의 필법을 배워서 그것을 부연하고 확장할 뿐이니, 인물 되기는 쉬우나 그 공이나 죄는 크지 못하며, 혁명성을 가진 인물(정여립 같은)은 매양 실패로 마칠 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여 한 말이나 한 일의 종적까지 없애 버림으로써 후세에 끼치는 영향이 거의 영도(零度)가 되고, 오직 3백 년이나 5백 년 뒤에 한두 사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이가 있어 그의 유음(遺音)을 감상할 뿐이요······ 인격적 자주성의 표현은 없고 노예적 습성만 발휘하여 전 민족의 항성을 파묻어버리고 변성만 조장하는 나쁜 기계가 되고 마나니, 이는 사회를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요, 인물 되기를 뜻하는 사람이 경계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신채호는 앞의 글을 통하여 정여립을 첫 번째 사례에 해당하는 인물로 바라보면서 혁명성을 지닌 사상가로 높이 평가하였고, 덧붙여 “사색당쟁 이후의 역사는 피차의 기록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시비를 분석할 수 없어 역사의 가장 어려운 점이 된다”라고 하였다. 또한 『단재전집』에서 신채호는 “정죽도(여립) 선생은 민중군경(民重君經)을 주장하다가 사형을 입으니······”라거나 “4백여 년 전에 군신강상론(君臣綱常論)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라 하며 정여립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가 대동계를 조직했던 제비산 자락은 금구현이었다가 김제에 편입되었는데, 그곳의 진산이 바로 봉두산(鳳頭山)이다. 산의 모습이 마치 봉황새가 나는 듯하다는 봉두산 앞에는 양시산(楊翅山)이 있다. 술가(術家)에서는 굴선산(掘禪山)에 개동사(開同寺)를 세워 날아오르려는 봉황의 기세를 눌렀다고 한다. 이곳을 찾았던 이행이 남긴 시 한 편이 있다.
오동나무 가지 시들어 떨어졌는데
대나무 열매는 누굴 위해 달려 있나.
봉황은 날아가고 헛되이 회상하니
높은 멧부리만 땅에 우뚝 솟았네.
한편 금구와 함께 김제에 편입된 곳이 바로 만경군이고, 그 만경을 두고 노래한 사람이 바로 조선 초기의 문장가인 김종직이다.
만경성가 만 이랑의 연꽃 길,
가던 손 고삐 잡고 푸른 연기 속에 서 있네.
정정하게 서서 비 받으니 참 일산 이루고,
깨끗하게 물결 위에 서 있으니 곧 신선이 되려 하는구나.
사향처럼 방심(芳心) 깊이 사랑하지만,
한 되는 건 배만 한 푸른 연꽃 줄기 없는 것일세.
경렴당(景濂堂) 아래에서 아득히 생각해보니
어느 때나 옥차고 있는 성현 대할까.
만경은 말 그대로 가없이 펼쳐진 들녘이란 뜻으로 만경평야는 동진강과 만경강가에 있는 기름진 평야를 말한다.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를 함께 일컬어 금만평야라고도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 평야를 두고 ‘징게맹경 외애밋들’이라고 부르는데, ‘징게맹경’은 김제와 만경, ‘외애밋들’은 너른 들, 곧 ‘김제 만경의 너른 평야’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호남평야의 핵심을 이루는 지역으로 봉산들, 봉남들, 죽산들, 청하들, 만경들, 백구들과 같은 비옥한 땅으로 이루어지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는 ‘징게맹경 들에 배를 띄우고 고기를 낚았다’는 이야기까지 생길만큼 너른 평야다. 또한 서해안에는 광활면 등의 간척지가 넓게 펼쳐져 있어 우리나라 제일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망해사김제평야와 바다가 만나는 진봉반도 끝자락에 위치한 망해사. 망해사는 만경평야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고 노을이 아름다운 절이다.
조선시대에 만경군에 딸렸던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있는 망해사(望海寺)는 만경강이 서해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절로,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백제 의자왕 때 부설거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엔 낙서전(樂西殿), 법당, 종루, 청조헌(聽潮軒) 등이 조촐하게 들어서 있는데, 낙서전이나 청조헌 등의 이름까지도 모두 바다를 보면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즐기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낙서전은 조선 인조 2년(1624)에 진묵대사(震黙大師)가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바다 쪽으로 한쪽이 튀어나온 ‘ㄱ’ 자 건물이다. 낙서전 마루에 걸터앉아 바다 건너 고군산열도를 바라보면 가슴이 활짝 열린다.
진묵대사는 이 절과 인연이 깊은데,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이라 불릴 만큼 법력이 높았던 조선 중기의 승려로 김제 만경 태생이다. 선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불경 읽는 일로 일생을 마친 그의 행적은 전설로만 남아 세상에 떠돌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은고(隱皐) 김기종이 전해오는 이야기를 모아 초의대사에게 전기를 쓰게 하였다. 진묵대사와 오랜 교분을 맺었던 봉곡(鳳谷) 김동준의 일기에 “이분은 중이기는 하나 유림의 행동을 하였으니 슬픈 마음 참을 수 없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진묵대사는 승려로서 불경뿐 아니라 유학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홀로 된 모친을 전주 왜막촌(倭幕村)에 봉양하였는데, 도술로 모기를 물리쳤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모친이 세상을 뜨자 애통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어머니의 태 가운데에 있던 열 달의 은혜를 어떻게 보답하랴······.
슬하에서 3년을 봉양해온 일 잊을 수 없도다.
오래오래 사실 줄 믿어 왔는데 자식 된 심정 원망스럽기만 하여라.
백 년을 다 살지 못하신 어머니의 짤막한 수명이신가······.
도시락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길에서 걸식하는 중이 된 신세로
아직도 시집을 보내지 못한 누이동생이 애처롭구나.
불단만 오르내리고 절간만 찾아다니는 중이 되어
첩첩한 산중을 헤매는 걸자 혼령은 어디 계신지,
아아, 슬프기만 하여라.
효성이 지극했던 진묵대사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만경 북면(北面) 유앙산(維仰山)에 장사를 지냈다. 오늘날의 성모암 옆자린데, 그 자리가 연화부수형으로 명당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어머니를 모신 그날 진묵대사는 목수를 불러 현판을 만들고 스스로 붓을 들어 이렇게 썼다고 한다.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출가 사문이 된 진묵일옥의 어머니를 모셨는바, 누구든지 풍년을 바라거나 질병을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지니라.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 대신 결초보은하리라.”
그 후 그 마을 사람들로부터 봉분을 사초하고 향화를 올리면 여러 가지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오늘날까지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진묵대사는 이런 게를 남겼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으로 요를 펴놓으니
산은 절로 베개로다.
달은 등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라.
바닷물로 술잔을 하여 거나하게 취한 끝에
일어서서 춤을 추고 싶은데
곤륜산에 소맷자락이 걸쳐지는 아니꼼이여.
또한 그가 임종 때 지은 게에는 “또한 정장로에게 소속되다(且屬靜長老)”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 보아 서산대사 휴정의 문파였다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찾을 길이 없다. 하지만 선(禪)의 경지에서는 서산대사를 능가한 승려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산대사가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맞아 직접 승병을 이끌고 현실에 뛰어들었던 것과는 달리 진묵대사가 깊은 산에서 수행에 전념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수련법을 택한 것은 두 사람의 대비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묵대사는 술을 곡차라 일컬어 즐겼으며 봉곡과 많은 수창(酬唱)을 남겼으나 오랜 세월에 흩어져서 전하지 못하고 있다.
“한 길 아득히 바다에 연하였고, 천가는 반쯤이나 산에 가려 있구나”라고 노래한 옛 사람의 시를 읊조리며 아득한 들녘을 따라가면 정읍이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에 대한 신앙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미륵의 명칭은 초기 경전에서 후기 경전까지 끊이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영향도 깊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