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평야의 곡창을 뒤에 업고 서해와 남해의 각종 생선들이 포구로 모여들던
목포는 일제가 강점하기 이전에는 인심 후하고 인정 뜨거웠던 항도였다.
유달산이 북풍을 막고 고하도와 화원반도가 풍량을 막고 있는 淸湖(목포 앞 바다)는
그 옛날 여인들이 밥을 짓다가 찬거리가 없으면 국수조리나 바구니를 들고 나가
고기를 퍼내어 생선국을 끓였다는 황금 어장이었다.
더욱이 詩와 노래로 전해오는 삼학도는 마치 세 마리의 학이 바다에 앉은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三鶴島란 이름이 붙은 곳이다,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밤이면 시객들이 유달산에 올라 사람들의 마음을 끝없이 유혹하는
은파연월(銀波煙月)을 바라보며 저마다 詩想을 고르기도 하였고,
달빛과 정답게 속삭이며 즐거운 한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호남평야를 굽이굽이 누비며 청호로 흘러드는 영산강 물결 위에 꽃구름이 비끼던 봄날과
단풍이 곱게 물들어 수면에 어리던 가을의 풍광은 또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러나 서해 남단의 절경을 안고 있는 이 명승(名勝)의 항도는 일제침략자들이
강점하면서 눈물의 대명사로 변한다.
노래의 흐름 속엔 그 무렵 사회의 시대상과 생활상.표정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엔 바로 항일(抗日)하기엔 힘이 없고 눌러있자니 억울한그런
시절엔 피안(避岸)의 대상으로 ‘바다와 항구’를 설정하여 멀리 나가는 뜻의 노래가 많았다.
즉 ‘항구’, ‘떠난다’는 노랫말들이 다 그런 뜻이다. 아마 항구를 떠나 바다로 나가면 뭔가
다른 유토피아가 있겠지 하는 막연한 그리움과 기대감 때문에 그랬다.
‘김해송 작곡과 장세정 노래의 ‘연락선은 떠난다’가 그랬고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의
‘항구의 청춘시’, 손목인 작곡, 이난영 노래의 ‘해조곡’ 등이 그렇다.
그러면 그때 시대상황을 좀 더 조명해보자
1931년에 부임한 총독인 우가키 가즈시게의 농촌진흥운동과 다음 1936년에 부임한
그 유명한(?)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내선일체’운동 등으로
한국말로는 노래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939년에 실시된 창씨개명과 1940년도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은 국가
전체에 식민지라는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하였고 모든 문화활동이
회색 빛을 띨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눈물젖은 두만강〉같은 노래도 금지
당하는 시대가 되어 결국 모든 지식인과 예술인들에게 숙명처럼 부여된
비극적인 삶이란 것도 어쩌면 호사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는 그런 시기였다.
김해송과 이난영의 음악과 노래도 이 시대에 일반 서민대중들이 처한 시대적인
배경을 알면 더 이해가 깊고 공감이 갈 것이다. 이들의 노래는 바로 시대의 아픔이었고
서민의 울분이었으며 하소연이자 화풀이였다.
요즘 말로 한다면 스트레스 해소용이란 뜻이다. 비록 노랫말은 ‘님’이고 ‘이별’이지만
서민적 정서가 담뿍 배여 있는 공출, 징병, 징용에 대한 항거였다.
대중가요에 대한 금지는 그만큼 살벌한 정책이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1934년 조선일보사는, 日帝의 갖은 탄압속에서 위협받던 우리 민족의 고유정서를
북돋우기 위한 문화사업의 하나로, OK 레코드와 손잡고 향토 노래가사를 공모했는데,
여기서 목포의 무명시인 문일석(本名 윤재희 1916년생)의 작품 "목포의 노래" 가
3천여편의 응모작 중 영예의 1등으로 당선된다.
윤재희는 일본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살고 있었는데 마침 목포를
주제로 하는 노랫말 가사를 공모한다기에 24세때 습작으로 지어 응모하였는바,
당시 집안에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아 문일석이라는 필명으로 응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윤재희씨는 아깝게도 단명하여 28세때(1944년) 작고하였다.
애절한 이별의 한을 담은 이 "목포의 노래"를 OK 레코드 사장 이철은 "목포의
눈물" 로 제목을 바꾸어 손목인에게 작곡을 의뢰, 목포 출신의 어린 가수인
이난영(李蘭影 1916~1965)이 부르게 된다.
이 노래가 우리의 가슴을 후리는 까닭을 노래 행간에 서려 있는 민족적 정서의 애절함이다.
이 애절한 情調( 정조)를 작곡가 孫牧人이 그의 작곡상의 세련된
솜씨로 한껏 고조시켰으며 , 이를 이난영이 鼻飮(비음) 섞인 목소리로 흐느끼듯 불러제켰다.
모두가 자신의 신세 같아서 부르고 또 부르고 생활이 고달프면 늘 입에 달고
나즈막이 부르면서 위안을 찾았다.
이 노래를 음반으로 만들어 일제의 검열을 받으러 갔을 때 2절의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검열 담당자는 노랫말에 나오는 원한이 필시 日本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란을 피웠다.
이때 이철 사장은 기지를 발휘, '원한'은 인쇄과정에서 착오가 일어나
'원앙'을 잘못 표기한 것이며 원컨대 삼백연(三栢淵)의 바람이 사이좋은
원앙새처럼 노적봉으로 편안하게 분다는 뜻이라고 둘러댔다.
이 때문에 윤재희는 일본경찰에 끌려가서 호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감시와 징용을 피해 함경남도 함흥의 산골 공사장에서 숨어살다,
결국 이질에 걸려 스물 여덟 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밑에'의 가사는 3백년전 정유재란때 명량대첩과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일본이 그때에는
꼼짝도 못했던 곳이었다는 점을 담은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상 <목포의 눈물>은 가사 그대로 한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분노를 노래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코드사에서는 황급히 歌詞紙(가사지)를 다시 인쇄하여 들고 갔다.
거기에는 「삼백연(三栢淵) 원안 풍(願安風)은 노적봉 밑에」
로 바뀐 내용이 들어 있었다.
목포의 눈물 [취입당시 원본가사]
1절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 삼학도 파도깁히 숨어드는 ㅅ대
부두의 새악씨 아롱저진 옷자락 리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서름
2절
삼백련 원안풍은 로적봉밋헤 님 자최 완연하다 애닲흔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절
깁흔밤 ㅅ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엇지타 엣상처가 새로워진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맷는 절개 목포의 사랑
-계속--
참조--민족 수난기의 가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