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역목사님! 정말 오랜만에 소식을 듣습니다. 저는 얼마전까지 감리교게시판에서 열을 내며 글을 올렸습니다. 이제 감리교회가 정상화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냥 침묵으로 지냅니다. 저는 감리교회가 공교회 영성을 회복하고 공교회제도로 돌아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체로 근본적인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감리교회 안의 아픔을 붙잡고 그 아픔에서 감리교사태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근본적인 개혁보다는 정성화의 길을 원하고 있어, 그냥 침묵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조희영목사님으로부터 목원신학에 관한 글을 올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요청을 받고 오래전에 정리해 놓았던 자료를 올려드립니다. 이미 오래전에 일이지만, 제가 정리해둔 목원신학에 관한 자료는 몇 가지가 더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자료는 1999년 8월 20일 / 목원신학 <사회선교훈련학교>에서 [목원신학공동체의 영성과 사회선교]라는 주제로 했던 발제문 가운데서 목원신학의 정신과 영성 그리고 교회개혁과 사회선교적인 사명에 관한 내용을 요약한 겁니다. 필요한 부분을 요약하다보니 거칠고 투박합니다.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한목사님이 궁금해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이 글을 올리면서 <목원신학>의 대한 이해를 감리교회가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특별히 오늘 감리교회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목원동문들이 이 글 정도는 한번 읽고 스스로 감리교사태과정에서 자신들의 처심을 성찰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목사님! 필리핀선교지에서 들어오게 되면 언제 한번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 안에서 내내 승리하시기를...저는 다시 침묵으로 들어갑니다. 혹 더 필요하시면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대전 빈들교회 남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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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원신학 태동의 역사적 배경
목원신학은 어떻게 해서 태동되었는가?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하다. 적어도 목원신학의 정체성을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이 질문을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왜? 무엇 때문에? 목원신학이 필요했으며 어떤 역사적인 소명이 목원을 세우게 되었는가.
1951년 11월 한국전쟁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개최된 감리교연합연회에서 「우리는 한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 광이를 들고 힘차고 억센 생활을 재건해야 할 것이다. 즉 농민들에게 신앙을 주고 생의 희망을 주고 일치단결하여 살도록 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헌의안이 제출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다음 대전감신은 1954년 5월5일 87명의 학생이 감리교대전신학원으로 문을 열고 1955년 3월 제1회 남부연회에서 처음으로 보고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51년 농민들을 위하여 목원이 세워지게한 역사적인 조건이 있었다. 그 역사적인 조건을 강제한 사건은 6.25 한국전쟁이다. 1950년 일어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53년 7월에 정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남한 사회 각 부문에서는 당연히 전쟁피해복구사업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엄청난 물적피해와 무수한 인명의 손실을 가져온 온 전쟁은 당시 민중들의 살이에 큰 타격이 되었다. 한반도의 분단모순이 불러온 이 전쟁은 물적․인적 피해 못지 않게 민중의 살이에 직접 깊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다.
당시 상황과 현실로 볼 때 민중들에게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많은 기층민중들이 교회를 통해서 아픔을 위로 받고, 불안을 씻어내며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기를 열망한다. 이러한 민중들의 열망은 교회성장으로 표현되었다. 종전 이후 감리교회는 매년 1백개여의 교회가 새롭게 생겨나는 호황(?)을 누리게 된다. 전쟁이 가져다준 좌절과 절망을 이 땅의 민중 가운데 상당수가 교회를 새로운 희망의 대안으로 생각하면서부터 한국교회는 이후 오랫동안 성장에 성정을 거듭하게 된다.
이러한 현실은 감리교회적으로 교역자의 수급에 심각한 문제를 낳았다. 1954년 3월 16일부터 22일까지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기독교대한감리회 총회에서 감독은 당시 감리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제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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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6.25 동난이래 청년교역자들과 신학교에서 나오는 졸업생들은 군목으로 군문에 들어가니 교회에서는 청년교역자의 얼굴도 볼 수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 감리교 군목이 74인입니다.
그리하여 현재 7백여 교회를 맡은 5백여명 남교역자중에 년회원이 3분지1도 못되고 기타는 타 신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그것은 오늘까지의 일이오 앞으로는 어떻할 것이냐 하면 군목은 계속하여 요구될 것이오 신학교를 나오는 적녕자들은 다 군목으로 나갈 것은 틀림없는 일일것입니다.
그러면 매년 백여 교회씩 늘어가는데도 서리 사역자는 구할 수 있겠느냐 하면 그도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그 반면에 현 사역자들도 늙어 노쇠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1년에 적어도 일백명 이상을 요구하는 남교역자를 어데서 구해내며 또 백5십명의 연역여전도인과 2백서리의 양성문제를 어찌하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한가지 해결책으로 지난 9월말에 신학교 전수과를 서울에서 시작했습니다. -54년 총회 감독의 <보고와 제언>중에서 -----------------------------------------------------------------------------------------------------------------------------------
감리교회의 이러한 목회자 수급의 불균형 현상을 원인으로 매년 1백여개의 새롭게 생기는 교회성장이 가장 주된 요인이었음을 감안해보면 당시 교회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대안이었음이 입증된다. 교회의 숫적 증가와 함께 목회자 수급문제가 교단적으로 난항을 겪게 된다. 전시상황에서 군목을 우선 지원하던 감리교회는 전쟁이 끝나고 급속하게 교회가 성장하자 이에 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
54년 총회 감독의 <보고와 제언>은 이유야 어찌 되었건 당시 목회자 수급문제가 교단 목회자 군목이 교단에 우선했음을 알게 해준다. 전쟁은 끝났어나 아직 전운이 남아있는 정세를 반영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래서 위 <보고와 제언>에서 우리는 1년에 1백여개의 교회가 새롭게 설립되는 교역자 절대부족의 상황에서도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오는 젊은 교역자들이 대부분 군목으로 배치되었음을 읽을 수 있다. 목회자 수급문제로만 볼 때 당시의 군목제도는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당연히 감리교는 목회자 안정적 수급 문제가 교단적으로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53년 서울 감신에 전수과의 설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목원신학 역시 당시 감리교회가 직면한 목회자 수급의 안정화라는 현안문제해결의 연장선 위에서 설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54년 5월 대전감신(목원신학 전신) 전수과의 설립은 53년 9월 서울감신에서 설립한 전수과와는 설립목적에서 분명하고 뚜렷한 차별성이 있었다. 서울감신에서 시작한 전수과가 목회자 수급문제에 1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다면 목원신학은 처음부터 농촌목회자 양성기관 그 설립목적을 분명하게 했다. 또 1954년 대전 목동에서 목원신학이 설립되면서 53년 9월 이미 서울감신에 설치된 전수과는 목원신학으로 통합된다. 설립 당시 학생 87명은 서울감신 전수과와 통합한 인원이었다.
2.목원신학은 50년대(전후) 사회선교에 대한 감리교회의 강한 열망의 소산이었다
목원신학의 설립배경에는 위와 같이 당시 감리교회가 직면한 목회자 수급문제가 원인이긴 했어나 이는 1차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목회자 수급이 문제였다면 이미 서울 감신에 개설된 전수과의 인원증가를 통해서 해소할 수 있었다. 본질적인 이유는 감리교회의 사회선교적인 열망이었다.
목원신학 설립의 보다 더 본질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은 전후 피폐해진 농촌재건과 농촌교역자 양성에 있었다. 목원신학의 설립은 당시 상황에서 감리교회에 요청된 역사적이고 사회선교의 과제에 대한 감리교회의 총합적인 응답이었다. 목원신학 설립문제가 농촌재건과 농촌지도자 및 교역자 양성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능동적으로 응답하기 위하여 감리교 차원에서 공식화 된 총회가 54년 총회였다. 동 총회에서는 대전 감리교 신학교 전수과 설립문제가 제안되었다. 그 결과 총회는 전후 농촌재건에 대한 감리교회의 강한 사회선교적 열망으로 목원신학을 태동시켰던 것이다.
당시 감리교회 내에서는 전후 사회적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한 인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피폐해진 농촌재건을 위해서 농촌지도력을 갖춘 농촌교역자를 양성이 시급하고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들이 주체가 되어 농촌교역자를 양성하는 별도의 신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해서 대전에 신학교의 설립해야한다는 입장을 가졌다. 이들은 1954년 감리회 총회를 앞두고 선교사 스톡스(Stokes)박사집에서 모임을 갖고 목원신학의 설립에 관하여 구체적인 논의를 한 다음 총회 청원서를 내기로 한다.
당시 도익서박사의 집에서 모인 감리교회의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용연(충북지방) 송득후(론산지방) 이형재(대전지방) 김창일(전라지방) 윤창영(당서지방) 김량환(원주지방) 이강산(충서지방) 김영배(천안지방) 도인권(제주지방)등 9개지방 대표들이었다. 이 도익서선교사택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전후 농촌재건과 농촌교회 목회자를 양성하는 농촌목회자 전문교육기관으로 대전 감신의 설립이 필요하다는데 인식을 함께하고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총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54년 총회에 9명의 각지방 대표들과 도박사가 연서로 제출한 청원서에는 농촌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대전에다 설치 해 줄 것을 요구했다(아래 청원서 전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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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서
한국의 사정과 교회의 실정을 볼 때 농촌의 부흥과 제건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으나 교회로서는 농촌교회 지도자 양성기관이 전무함으로 앞으로 한국의 농촌교역자로서 농촌교회 심영 지도뿐만 아니라 농촌의 실생활도 겸하여 지도하여야할 교역자 양성을 절실히 느끼어 팔지방 대표가 합의하여 1954년 3월 4일 오후 2시 대전 도익서 선교사택에서 이 추진 위원회로 모이어 죄기와 같은 이유로 결정하여 연서로 청원하오니 혜찰하시고 허락하시기를 앙망하나이다.
기
감리교회 신학교 전수과를 대전으로 이전하시고 농촌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한 특수한 과목을 넣어 주시도록 하여 주실 것 만일 이것이 불가한 경우에는 대전에 전수과 분교실을 두어 이를 성사하여 주실 것
리유
1.대전은 전국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인 동시에 각지방으로 보아도 중심지임으로 2.농촌교역자 양성기관 사업장소로써 적당한 환경을 구비한 것(실습지 지가가 저렴 사료 등 구입용이) 3.학생들의 학비도 절약될 수 있는 것 등
Bersieo. Oliren Charles Stokes 김용연(충북지방) 송득후(론산지방) 이형재(대전지방) 김창일(전라지방) 윤창영(당서지방) 김량환(원주지방) 이강산(충서지방) 김영배(천안지방) 도인권(제주지방) ---------------------------------------------------------------------------------------------------------------------------------
위 <청원서>에 의하면 목원신학은 서울감신의 전수과와 달리 처음부터 사회선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설립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목원신학은 전후 농촌재건이라는 감리교회의 사회선교적인 과제를 위하여 “한국의 농촌교역자로서 농촌교회 심영 지도뿐만 아니라 농촌의 실생활도 겸하여 지도하여야할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54년 총회가 목원신학의 설립을 공식화했다면 57년 11월에 열린 감리교 전도사업연구위원회는 감리교회가 대전감리교신학교를 농촌교역자 양성기관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공식으로 결의한 회의 였다. 57년 11월 6-7일 피켈감독과 함께 한 감리교 전도사업연구위원회는 총리원 이사, 중앙협의회원, 각 지방 감리사들이 참석하여 향후 감리교회의 중요한 정책을 논의하는 장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목원신학을 농촌교역자 양성기관으로 공식화하고 이 결과를 미국교회에 건의한다(감리회보 57년 12월).
이 후 목원신학은 오랫동안 농촌교회를 위해 일하는 교역자양성기관으로 기억된다. 67년 대학승격 축하예배 및 환영회가 그해 3월 13일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참석한 유형기柳褮基박사는 “겸손한 마음으로 농촌교회에 나아가서 농촌교회에 이바지해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하나되는 운동에 결심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축사를 한다. 이 축사내용 역시 목원신학이 농촌교회를 위한 신학교로 이미 감리교회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3.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한 목원신학
하나님의 선교는 종래의 선교개념을 새롭게 정의 내렸다. 교회와 세상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지금까지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서열과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 지금까지 교회는 세상→교회→하나님이라는 도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선교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 당신의 백성을 선택하여 교회를 세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보다는 우월한 자리에 있다 하는 선민의식이 가능했다. 세상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멸망의 자리일 따름이다. 여기에서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죽을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 가도록 하는 것이 핵심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선교는 많은 세상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여 교인화하는 것이 중요한 실천이었고 내용이었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서 선교의 개념은 전통교회와 같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세상→하나님이라는 도식(표2)으로 관계를 설명한다. 하나님이 직접 창조하신 것은 세상이었지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직접 창조하셨고, 세상은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는 장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이하 생략. 요1:16) 말씀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위하여 직접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역사에 출현한 교회는 그리스의 몸이다.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일한다.
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섬김의 자리에 있다. 세상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닌 세상을 섬기는 자리가 교회의 자리이다. 사람들을 교회로 끌여 들이는 것보다도 그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게 하는 것이 선교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은 이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직접 일하신다. 선교란 직접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일로 본다. 따라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거드는 하나님의 동반자들이다. 세상을 밝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고, 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는 당연히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야 한다.
목원신학은 농민의 친구들로 설립되었다. 목원신학은 농민을 위해서(for) 설립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하나(one of them)가 되기 위해서 목원신학은 세워졌다. 목원신학의 소명은 교회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위하여 불리움을 받았음을 다음의 글에서 잘 알게 된다.
........우리는 지역사회가 원하고 기대하는 영적 물질적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능하고 효과적인 일꾼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 졸업생이 가는 곳마다 그 고장 사람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그 고장 지역사회가 명랑해질 수 있게 만드는 일꾼을 길러야 합니다. 교회와 지역사회가 원하는 유능한 일꾼으로 빛나는 새 역사 창조케/<목산뉴스 제3호>
이런 목원신학의 설립목적을 위하여 목원신학은 교역자 양성기관이면서 또한 농촌지역사회의 지도력 훈련하고 준비하는 곳으로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한 신학교 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4.목원신학은 처음부터 이론(logy)뿐만 아니라 실천(Praxis)하고 행동하는 신학이었다.
한국의 농촌교역자로서 농촌교회 심영 지도뿐만 아니라 농촌의 실생활도 겸하여 지도하여야할 교역자 양성하기 위하여 목원신학은 농민 지도력을 준비하는 학교였기에 강의실과 함께 실습실로 농장과 목장을 두었다. 농장으로는 1000여평에 포도나무 800주, 960평에 복숭아 462주 과수원과 1000평의 채전과 목산아래 논 1500평을 두고 직접 농사를 가르쳤다. 성산목장은 축사 32평, 목장 3000평, 목야지 5000평에 젓소와 송아지를 키웠다. 또 재학생들이 졸업하기까지 표1처럼 상당한 농촌관련 학점를 이수해야 했다. 농촌 교역자는 심령뿐만 아니라 농업에도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는 실천적인 입장이 목원신학의 신학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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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관련 학과목 및 학점
@59년도-62년도 *농업실습(1) *농촌과 교회(3) *농업 학기당(2)-5학기까지 *농촌문제(2) *농촌사회학(4)
@63년도-66년까지 *농업개론(2/필수) *농업(2/필수) *농촌과 교회(2/선택) *포도(2/필수) *농업실습(1/필수) *양계(2/필수)
@67년도-68 *양돈(2/필수) *농업실습(P/필수) *원예학(2/필수) *농촌교회관리(2/선택
#####농업관련(63년-68년) 학점에서 실물농업관련학점은 <전공필수>이고 농업이론 련 학점은 전공선택이었다는 점은 목원신학이 단순한 농촌교역지 수급문제를 위한 신학교가 아닌 실질적으로 농업을 겸하는(현재 정주목회)를 지향하는 신학교육기관이었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
농촌교역자 양성을 위해서 설립된 목원신학이었지만 재학생들의 현장은 농촌만 아니었다. 목원신학의 전반적인 방향은 농촌선교를 지향하고 있었지만 학내에서 구성된 산업전도반은 현장실습을 통하여 산업선교를 준비해 나갔다. 재학생들로 구성된 산업전도반은 매 학기 방학 인천과 대전 등지에서 현장활동을 통하여 산업선교를 해나갔다. 농민과 노동자, 도시빈민의 현장에 그리스도가 있게하는 목원신학은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하는 신학이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 이후 피폐화된 농촌을 재건이라는 감리교회의 사회선교적인 열망이 목원신학을 설립하게 했다. 그러나 목원신학은 설립 처음부터 많은 신학교 가운데 또 하나의 신학교가 아니었다. 분명하게 당시 한국의 상황과 현실에서 가장 피폐한 민중이었던 “이 땅의 농민들을 위하여”라는 선교적인 지향점을 분명하게 가지고 출발한, 한국사회에서는 전무후무한 그런 신학교였다. 목원신학 설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와같은 사회선교적 지향에 대해서는 목원신학공동체가 큰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중략)아시다시피 저희 학교의 신학교육 이념은 생각만 하는 신학이 아니라 행동에 옮기는 신학을 지향해서 나가는 일입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깊고도 고매한 신학의 연구는 물론, 농민대중 속에서 복음의 꽃을 피게 하기 위하여 농촌을 이해하고 깊이 연구하여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려는 뜻에서 농업일반, 특수농업 등에 관한 연구와 실습을 거듭하고 있으며, 또한 신앙에서 신앙으로 일관되는 생활 경건을 위하여 교내에서도 학생들의 생활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지도하고 있습니다. <63년 8월 1일 목산뉴스 제2호>
목원신학의 설립이념을 보여주는 위 자료에 의하면 목원신학의 설립이념은 행동하는 신학이며, 농민 대중속에서 농민과 함께 하는 신학이다. 이러한 목원의 설립이념은 곧 민중신학과 상통한다. 아니 그냥 그대로 민중신학의 한 표현이다.목원신학의 지향은 민중신학이었다.
5.목원신학은 민중신학 이전의 민중신학교였다
민중신학은 신학적 자각이없이는 불가능한 신학이다. 이 땅에서 신학은 죄다 서구신학이 아니면 미국의 신학이었다. 왜! 이 땅에서 서구신학이 문제가 되는가? 서구신학에는 서구인의 역사와 문화와 의식이 녹아있다. 서구신학논리로 우리의 믿음살이를 재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서구신학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서구신학에 재단을 당하면서 그들은 탁월하고 우리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들은 앞서가고, 앞서가는 그들의 가치와 기준에 도달하기에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서구신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우리를 재는 그 기준과 가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적어도 목원에서는 서구신학보다도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서구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신학자들이었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에게는 대체적으로 공통된 모습이 있다. <모든 신학은 (아주 당연하게)서구신학으로 통해야 하고 서구신학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신학은 신학도 아니라고 한다.> 한국의 민중신학 그거는 신학도 아니다는 못된 오만이 문제이다. 정작 서구신학이 끼친 폐해보다도 이 얼치기 서구신학자들이 목원에서 끼친 악영향이 더 엄청났다.
서양의 문화와 삶의 양식과 의식이 선진적이고 우리의 그것은 후지다고 생각하는 신학은 신민지의 신학이다. 노예의 신학이고 자주성이 없는 병신짓이다. 서양의 고상하고 세련된 논리를 가져와 우리 신학을, 한국신학을 더욱 세련되게 만들어 내는 이가 신학적 자주성을 세운 한국신학자이고 그들이야 말로 참된 서구신학들이라 할 수 있다. 한국신학계에는 박순경, 안병무 같은 신학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민중신학은 신학적 자각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주체적으로 세운 한국신학이다. 민중신학이 세워지기까지 한국교회에 신학적 자각을 불러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바로 69년 11월13일 청계천 봉재공장의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사건이다. 전태일분신사건은 4.19와 함께 한국교회가 참회를 통하여 자신의 사명을 새롭게 자각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예수는 누구인가? 1969년 한국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1969년 한국상황에서 예수는 생존을 위해서 노동을 해야 하고, 노동하면서 자신의 뼈를 깍아야하고 또 생명을 담보로 잡혀야 했던, 청계천 피복공장노동자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또 69년 대한민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전태일이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는 한국상황에서 전태일의 모습으로 있다는 고백으로부터 민중신학은 출발했다. 한국사회아 교회에서 민중신학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신학의 한 영역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것은 1970년대였다. 아쉽게도 목원신학이 태동되는 1950년대에는 민중신학이라는 신학용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민중신학이 사용되지 않았다해서 민중신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민중신학이라는 신학용어를 사용할 줄은 몰랐지만 민중신학은 1954 이후 폭격으로 초토화된 농민들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를 보았고, 그 자리에 자신을 던지는 목원신학에서 실천해 나갔던 것이다. 목원신학은 처음부터 자신 안에 민중신학을 품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목원신학은 민중신학 이전의 민중신학교였다.
6.목원신학의 자리는 민중의 자리였다
목원은 천대받는 천덕꾸러기 민중으로 있었다. 민중을 위해서 민중지향적인 전망으로 세워진 목원은 천대받는 학교였고, 천덕꾸러기 민중이었다. 민중을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빼앗기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라 한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임에도 사람의 품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자이다.
전략)우리 대전신학대학의 오늘날을 보데 되기까지에도 여러 가지 험준한 길을 걸어야 했다. 그것은 교회 밖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무책임한 사람들이 우리 학교를 불필요하다고 했다거나 위협했다면 그냥 웃어버릴 일이지만 그만한 것은 알만하고 또 교회의 중요한 자리에 있고 책임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존재를 해롭게 여기고 별로 제구실을 못할 것으로 보아서 하지 못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한끝 놀랍고 한끝 섭섭한 생각이 든다. 우리 학교를 위해서 보조금을 주어야 한다고 했을 때 어느 중요한 자리에 있는 분은 줄필요가 없다고하고 나중에는 “자라지 못할 애는 미리 죽여 버리는 것이 좋다”고 까지 지독한 극언을 했다고 한다. 중략)병신자식 효자구실한다고 하지만 우리 졸업생들이 아니었더면 현재 우리 교파의 4분지 1의 교회 꼴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라.... 우리에게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속담에 “동량을 못주어도 자루는 찢지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 학교를 위하여 큰 도움은 못주어도 건드리지 말고 제절로 자라게 만 해주면 톡톡히 할 날이 쉬 오리라. 바쁘더라도 좀 기다리고 우리에게 기회를 달라.-우리에게 기회를 달라<1966년 9월 20일 대전신학보 제12호>
전후 농촌재건과 농민들에게 희망을 세우기 위한 감리교회의 열망을 안고 농촌교역자 양성을 위해서 세워진 목원신학이었지만 우리 목원은 제구실 못하는 병신이나 절뚝발이 취급을 받아야 했다. 목원신학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감리교회 안의 작은 자였고 단 한 번의 기회를 구걸해야했던, 동량자루를 들고 빌어먹어야 하는 거렁뱅이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도 민중은 “잊혀진 망각지대”에 서 있고 “상관없는 이방인 취급을 받는” “무척 외”로운 사람들이다.
죽을 쑤는지 범벅을 개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듯해서 섭섭하다. 잊혀진 망각지대요 상관없는 이방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무척 외롭다. 여러분의 기도 속에 신학교를 넣어두고, 여러분의 생각에 신학교를 간직해 주기를 바린다. 교계에 거는 기대/목산뉴스 제6호>
우리가 당한 위험과 고난은 안과 밖에 다 함께 왔다. 문교부는 우리 같이 작은 학교를 위하여 특별한 편리와 협조를 주지 아니하였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당 받아야할 기회도 주기를 반갑게 생각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무시하고 드는 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라도 교회 안에서 만이라도 탐탐히 여겨서 친절이 돌봐주고 맘먹고 걱정이라도 해 주었으면 한결 짐이 가벼웠겠지만 공연한 걱정과 생각없는 공론이 우리들의 마음을 상하게 해주고 갈길을 어지럽게 해주었다. 목산뉴스 제7호/고개를 넘은 우리 신학대학-1월 3일 대학승격이후 소회/5,6년동안 애써왔고, 30대일의 엄청난 경쟁에서 대학승격이 되었다.
학교운영을 책임지고 있던 이호운 학장의 당시 글로 보면 감리교회 내부에서 목원신학, 우리는 민중이었다. 우리의 자리는 민중의 자리였고, 민중 그 자체였다.
흑인신학자 제임스 콘은 예수는 흑인이라고 했다. 흑인신학은 백인의 모습으로 그린 예수를 거부했다. 예수는 흑인을 수탈하고 억압하던 백인이 결코 구원자가 예수가 될 수 없다, 구원자는 당연히 억압을 당하던 검은 예수여야 한다고 했다. 흑인신학에 비추어 민중신학은 어떤가? 제구실 못하는 병신이나 절뚝발이 취급을 받았던,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감리교회 안의 작은 자이고, 단 한 번의 기회를 구걸해야했던, 동량자루를 들고 빌어먹어야 하는 거렁뱅이로, 오늘도 “잊혀진 망각지대”에 서서 “상관없는 이방인으로 외로웠던 목원신학이었기에 우리 안에는 민중 예수의 모습이 내주하고 있다.
민중신학은 민중을 고난과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예수 역시 민중이라고 본다. 그리스도란 민중의 질고와 고난을 민중을 대신하여 대신 진 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희망이다. 흑인을 멸시하고 차별하고 억압하던 백인이 해방자 그리스도가 될 수 없듯이 병신취급을 당하고 멸시와 냉대를 당해온 역사였기에 우리목원은 한국 민중의 희망으로 설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민중이었다. 우리는 민중의 자리에 서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7.민중신학을 너머 감리교개혁공동체로
한국 기독교 1백15년의 역사 가운데 신학적으로 가장 큰 성과는 민중신학이다. 7,80년대 이 땅의 암울한 역사적 현실을 고발하고 불의한 권력으로부터 민중을 보위해온 신학이 민중신학이었다. 기꺼이 고난 당하는 민중의 편에 서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으로 해방해야 할 민중과 함께 해온 자랑스런 신학이 민중신학이었다. 이런 점에서 한국신학에서 민중신학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래서 민중신학을 근간으로 80년대부터 한국교회에서는 민중교회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80년대 민중교회운동은 노동현장에서, 빈민지역에서 산동네에서, 농민의 자리에서 제 각기 민중의 삶 속에서 민중과 함께한 예수운동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목회자 개인적인 결단으로 시작했던 민중교회는 교회공동체로 자생력을 확보하지 못한채 탈민중교회화 하거나 교회 문을 닫고 현장을 떠나는 교회가 많아졌다. 민중신학을 기반으로 출발했던 많은 민중교회가 탈민중교회화해 나간데는 민중교회로서 교회의 자생력이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생존을 위해서 새벽에 우유배달을 하거나, 건축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까지 민중교회를 지켜나가야 했던 민중교회의 현실은 너무 버거웠다. 결국 그들은 민중교회를 접고 생존을 찾아 떠나야 할 수밖에 없었다. 민중교회를 떠난 목회자들, 그들의 낭만적이고 미숙한 민중의식에 민중교회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을 묻게 된다. 그러나 이면에는 민중교회 목회를 목회로 생각하지 않고, 민중교회 목회자는 목회자로 생각하지 않았던 물량주의에 병든 오늘 한국 교회의 왜곡된 현실이 그들이 민중의 현장을 떠나도록 등을 떠밀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처럼 민중교회의 실패 원인에는 민중교회 목회자 개인의 문제와 한국교회의 구조적인 병폐가 상호작용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민중교회운동이 실패하게된 보다 결정적인 원인은 민중신학 자체에 있었다. 아쉽게도 민중신학의 중대한 결함은 민중신학이 교회공동체에 대한 ‘민중 희망적인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민중을 통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다는 민중메시아론은 민중의 정치경제사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낙관한 나머지 민중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구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방기했다.
민중은 교회를 원했으나 민중신학은 제도의 교회를 반민중성을 고발하고 폭로했을뿐 어떻게 하면 제도교회가 민중이 원하는 교회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전망과 상을 제시하지 못했다. 또 민중신학은 현실 교회의 부정적인 문제점을 열심히 비판했지만 어떻게 물량주의에 찌들은 한국교회를 민중이 주인 되는 하나님 나라 건설에 함께 일해야 할 동지로 견인해 낼 수 있는지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낙관적인 교회론이 없는 민중신학을 기반으로 시작한 민중교회운동의 실패는 예고된 실패였다.
이러한 민중신학의 한계와 문제점을 우리는 교회개혁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목원신학은 민중신학의 한계를 넘어 서서 감리교회개혁공동체로 우뚝서야 한다.
8. 목원신학의 꿈은 교회개혁의 산실이었다
오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출32장 시내산 밑 금송아지 축제를 떠올리게 된다. 오늘 한국의 교회가, 천만에 이른다는 기독교인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맘몬을 섬기고 있는지. 가끔 질문을 해보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해서, 불행하게도 오늘 한국교회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오늘 도대체 교회가 뭘하고 있는가!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던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굴복했던 제사장 아론처럼, 오늘 우리 교회는 돈이 우리를 구원하고, 황금이 우리의 혼과 정신을 이끌어가는 이 시대의 신이 되게 하라는 가진 자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하고 있지는 않는지. 오늘 많은 한국감리교회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맘몬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는지 분별해보는 눈을 가져야 하겠다.
1960년대 목산언덕을 떠나는 졸업생들에게 이호운 학장은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하나는 “하나님의 교회와 인간의 사회를 혁신 시키는 투사가 되라. 불의를 혁신시키고 부패를 밝히는 용감하고 참신한 개혁자가 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화산처럼 폭발하는 민중의 소리를 듣고 호수처럼 밀려오는 시대의 징조를 들어라”는 것이었다. 이미 1960년대 목원신학의 가치와 생명은 민족의 역사에 혁신자로 서고 한국교회의 개혁자로 외칠 때 있다는 것을 천명했다.
9.감리교회 개혁은 우리 소명의 본질이다.
교역자의 가치와 생명은 예언자와 같이 바른 말을 소신 껏하고 사는 일이다. 그런데 성직자가 그것을 못하거나 잃었다면 죽은 송장이다. -1967년 4월 28일 대전신학보 제13호/우리 교계에 새로운 기풍을 세우자
하나님은 왜 우리를 불러 당신의 사람으로 세우셨나?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불렀을때는 목회를 열심히 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가 되게 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는 사명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목회를 열심히 잘하는 것이 우리 소명(召命)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가? 분명 그렇다. 우리의 첫 번째 사명은 맡겨진 목양의 자리에서 신명을 다하여 목회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이 그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한 착각이다. 우리 소명의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의 교회를 온전히 하나님의 것이 되게 하여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데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가 온전해지시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우리 소명의 본질은 목회 하나만이 아니다. 감리교회의 개혁도 이 시대 우리를 부르신 주님의 간절한 소원이요 뜻이다. 감리교회의 문제점은 오늘 한국감리교회가 갖고 있는 총합적인 선교역량을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올바로 모아내지 못하게 하고, 교단의 정책이 감리교회의 공동체성과 생명력을 갖지 못하게 가로 막는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가 있다.<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이방원)>, <이 몸이 묵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정몽주)>-감리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우리의 생을 어떤 노래에 실어 하나님께 바칠 것인가.
10.목원신학의 학풍과 영성 그리고 사회선교
이상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목원신학은 사회선교․ 민중성․감리교개혁이라는 큰 주제들로 신학학풍을 근간 삼은 자랑스런 내용을 가진 신학이었다. 이호운 학장은 이러한 목원신학의 신학학풍에 대해서 “복음의 실제화와 민중화”로 정의했다. 이러한 학풍에서 나온 목원신학의 영성 또한 당연히 사회선교과 민중성, 그리고 감리교회의 개혁을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목원신학의 내용과 정체성 그리고 영성을 규정하는 사회선교․ 민중성․감리교개혁이라는 3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빠져서는 목원신학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교적 인본주의자 중의 하나이고 [우신예찬]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에라스무스는 영신발전을 꾀하는 이들에게 있어 객관적인 기준 또는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목원신학의 영성에서 객관성이란 바로 사회선교․ 민중성․감리교개혁이라는 내용이다. 에라스무스는 영신전쟁에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목원신학)을 알아야 하고, 둘째로 하나님의 뜻(우리 소명의 본질)를 알아야 하며, 세째로 교회의 공적인 가르침과 교부와 주석가들의 가르침(교회의 전통)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특별히 사회선교와 관련하여, 목원신학에서 사회선교의 영성은, 영성을 특정 개인이나 또는 특정 집단이 갖는 신비적이고 수덕적인 카리스마(은사적 능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선교의 영성의 본질은 세례자 요한이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대하여 증언한 바로 그 고백이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합니다"(요한:3,30). '나'(ego)는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은 점점 드러나는 영성이 목원이 지향한 사회선교의 영성이다.
불교의 십마(十魔) 중에 선근마(善根魔)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좋은(착한) 일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의 착한 일에 걸려 넘어진다는 말이다. 제 아무리 좋은 지향을 가지고 선행을 한다 하더라도 영성의 객관적 기준이나 가르침을 외면하게 되면 결국 마(魔)의 속임수에 빠져 사바세계의 번뇌에 빠지고 부조리를 낳게 된다. 사회선교를 준비하거나 실천하는 이들이 꼭 명심하고 새겨야 할 말이다.
11.마무리
아래 글은 목원(신학)공동체의 신학과 영성의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는 고 이호운 목사의 당부이다. 1965년에 발표된 이 글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이 설교 가운데는 목원신학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학풍과 설립목적뿐만 아니라 목원신학공동체의 영성과 사회선교에 임하는 태도 등을 읽을 수 있다. 이 설교를 인용하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오늘날 우리 대전신학교를 보고 “너는 무엇 때문에 세워졌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곧 학문의 상아탑을 꿈꾸는 얼굴이 창백한 골샛님을 기르는 것이 아니요, 정통·이단의 교리싸움을 하는 독선의 독주에 취한 정통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을 양성하려는 것도 아니며, 처세술에 능하고 기술에 익숙한 직업적인 밥벌이꾼을 생산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요, 맹목적인 동조자들과 어수룩하게 충성을 다하는 졸개들을 키워서 파를 짜고 땅을 지어서 교권을 휘두룰 세력을 배양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합니다. 우리가 소중히 지니고 실현시키려고 애쓰는 꿈은 복음의 실제화와 생활화이요 복음의 대중화와 민중화입니다.
··········“우리는 성직자로 초연하고 성별된 사람들이라해서 은근히 허세를 부리고 권위를 내 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교역자를 기르기 보다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사는 친구와 일꾼을 기르렵니다.
········중략·········· 갈릴리, 사마리아, 디베랴 호수, 변화산, 감람산, 가버나움, 수가, 예루살렘 거리에서 세리와 창기와 문둥병자, 사귀들린 사람들과 함께 느끼고 말하고 걱정하고 애타했으며 그들과 함께 사신 예수처럼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살며 주님의 말씀과 생활을 오늘날 생활 속에 번역해내고 살려 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자적인 기풍을 자랑하는 Clergy로서의 목사보다도, 죄인들을 대신하여 제사드리는 제사장으로서의 Prist 곧 사제보다도, 명령하고 주장하는 목자로서의 Pastor인 교직자보다도, 거리의 사람이요 땅의 친구로서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섬기는 Minister 곧 교역자, 봉사자로서의 일꾼을 기르려는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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