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분 간증에 쏟아진 기립박수 --------------------------------------- 1992년, 나는 미국에 거주하는 신영교 장로의 초청으로 애틀랜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애틀랜타는 미국 남동부의 물류 중심지다. 신 장로는 내 간증 테이프를 듣고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간증해줄 것을 요청했다. 내 간증시간은 주일 오후 2시로 잡혀 있었다. 나는 신 장로에게 좀 일찍 교회에 가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자동차로 1시간을 달려 애틀랜타 제일장로교회에 도착했다.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목사님의 설교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목사님은 광고시간을 이용해 뜻밖의 제안을 하셨다. "지금 이곳에 아주 중요한 분이 계십니다. 오늘 오후 2시에 간증을 하기로 되어 있는 김광석 선생입니다. 마침 일찍 오셨으니 아예 지금 강단에 모셔서 10분쯤 간증을 들어보는 것이 어떨까요?" 나는 목사님의 소개를 받고 서서히 강단으로 걸어 나갔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건 아니었다. 한국에서 2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온 손님을 이렇게 홀대해도 되는 것인가. 간증 시간이 오후 2시로 잡혀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후2시에 다시 모이기가 귀찮으니 아예 지금 잠깐 간증을 해달라고? 이건 아니다. 먹다 남은 반찬으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강단으로 걸어가면서도 속으로 못내 서운했다. 그러나 어쩌랴. 목사님이 그렇게 하라는데.... 목사님은 한 술 더 떠서 단단히 못을 박았다. "김 선생님, 정확하게 10분입니다. 시간을 꼭 지켜주세요." 통로를 걸어가면서 속으로 계속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이건 홀대도 보통 홀대가 아니로군. 좋다. 딱 10분이다. 나도 더 이상은 못한다. 이 불쾌한 심정으로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십일조 간증만 짧게 하고 내려오리라. 나를 더 이상 붙잡아도 소용없다. 딱 10분이다. 강단위에 올라섰다. 교인들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십일조 생활이 가져다준 축복에 대해 정확하게 10분 동안 간증했다. "부자가 되고 싶은가요? 부자가 되고 싶으면 먼저 자신이 왜 부자가 되려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빚더미 위에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벌금 8억3천만원을 안고 사업을 시작했어요.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게 엄청난 축복을 부어주셨습니다. 저는 부자가 되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비결이 바로 십일조입니다. 지금부터 십일조가 가져다준 축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두를 꺼내는데 5분쯤 소요됐다. 처음에는 좀 피곤한 기색을 보이던 교인들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나는 것을 느꼈다. "저는 십일조가 아니라 십이조로 하나님을 시험한 사람입니다. 아, 정말 무섭더군요. 하나님께서 소나기 같은 복을 퍼부어 주시는데, 제가 감당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10분 동안 짤막한 간증을 하고 강단에서 뚜벅뚜벅 내려왔다. 고작 10분 간증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까지 날아왔던가. 더구나 예배 말미에 잠깐 시간을 할애한 것은 강사를 무시하는 태도다. 나도 더 이상은 안한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전 교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온 것이다. 내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답례하자 박수소리가 더 커졌다. 나는 약속대로 10분 동안 간증을 했을 뿐이다. 이제 내 자리로 돌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나를 다시 강단으로 부르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김 회장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10분 간증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주세요. 이렇게 은혜로운 간증은 처음입니다. 여러분, 오늘 점심은 좀 늦게 먹는 게 어떻겠습니까?" 교인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좋아요." 다시 강단에 올랐다. 목사님의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때 마음속에서 나지막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왜 너의 뜻대로만 하려 하느냐. 교인들이 너의 간증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느냐. 너의 혈기로 인해 복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라." 그 음성에 순종해 단 위에 올랐다. 나는 예수를 믿은 과정과 십일조가 가져다준 축복들에 대해 자세히 간증했다. 예배당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곳에 성령이 임했다. 어떤 교인은 통곡을 했다. 어떤 교인은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 간증은 무려 두 시간 동안 계속됐다. 주일 낮 시간이 통곡과 은혜와 감동으로 가득 찼다. 나를 초청한 신영교 장로는 가장 큰 은혜를 받았다. 신 장로는 내 손을 잡고 놓을 줄을 몰랐다.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김 회장님을 이곳에 보내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크리스천이 아니었어요. 오늘 비로소 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가 예수를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생각해보니 순 엉터리였어요. 저는 교인도 아닙니다." 신영교 장로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는 이천에서 태어나 성균관대를 졸업했다. 젊은 나이에 빈손으로 미국으로 이민 와서 애틀랜타에 정착하였고, 착실한 신앙생활과 식품사업으로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십일조를 착실히 드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업이 점점 번창하고 수입이 늘어나면서 시험에 들고 말았다. 십일조를 떼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사업이 점점 기울어지더니 거의 바닥을 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도 그의 사업은 여전히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간증을 들으면서 참 많은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집회가 끝난 후, 신 장로는 내게 커다란 식품마켓 건물을 보여주며 말했다. "제가 지금은 돈이 없어요. 그러나 이 건물을 제게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매입할 것입니다. 회장님께서도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우리는 돈은 없지만 기도가 있잖아요. 그것이 얼마나 큰 자산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나는 신 장로님의 꿈이 실현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물론입니다. 저도 기도하지요. 언젠가는 장로님께서 저 건물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저는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도 어찌할 수가 없어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이번 집회를 끝으로 나는 당분간 간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 열광적인 간증집회를 목도하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순수한 간증도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내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시험에 들게 할 수도 있고, 자칫 내 개인의 자랑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 집회 이후 간증활동을 중단했다. "하나님, 이제 제 간증은 스톱입니다. 이 정도면 저도 할 만큼 했잖아요. 이제는 그만합니다. 간증을 자주하다보면 자꾸 살을 보탤 수가 있어요. 또 미화될 수도 있고요. 그러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오간 데 없고 사람의 영광만 남게 된다고요. 그런 간증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낫잖아요, 저도 요즘 간증집회를 하면서 제가 너무 많은 영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자꾸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제 정말 당분간 간증은 스톱입니다. 아셨죠?" 가끔 나는 내 스스로를 생각해 본다. 참 유치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마치 일곱 살 된 아이가 어머니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처럼, 나도 하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참 많다. 그리고 할 말이 있으면 기도를 통해 어린애처럼 하나님께 모두 아뢴다.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진다. 기도는 영적인 호흡이라는 말이 참으로 옳은 것 같다. 사람은 호흡이 없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기도가 없으면 죽는다. 그날 이후, 나의 간증집회는 중단됐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들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짧은 세월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셨다. 너무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것을 한꺼번에 받아들고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던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좀더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고 싶었다. 1995년, 미국 애틀랜타의 신 영교 장로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미국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교분을 나눈 지 딱 3년만의 통화였다. "김 회장님,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들떠 있었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 듯했다. "신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어떤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나요. 좀 차분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그는 3년 전 내게 보여주었던 식품마켓 건물을 320만 달러에 계약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내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려준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기도의 힘이 정말 놀랍군요. 장로님께서 기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겠다고 하시더니, 정말 그렇게 됐습니다. 이제 간증을 하셔도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랍군요. 그런데 교회 건축은 어떻게 됐나요." 신 장로님은 사업가로 성공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있었다. 나는 교회건축이 어떻게 됐는지 참 궁금했다. "김 회장님이 다녀가신 후 교회 건축 운동이 일어났어요. 교인 몇 사람의 헌금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보다, 액수는 적더라도 전 교인이 십시일반 건축 헌금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전 교인을 대상으로 건축헌금 운동이 일어났지요. 그래서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전을 위해 기도했답니다. 지금은 아주 아름다운 성전이 완공됐습니다. 회장님, 아무리 바쁘시더라도 미국에 한 번 다녀가세요." 이처럼 기쁜 소식이 또 어디 있을까. 신 장로님의 전화를 받고 마치 내 건물, 내 교회를 얻은 것처럼 기뻤다. 내 간증집회로 인해 예배당이 쉽게 건축됐다니, 이보다 더한 기쁨과 보람이 또 어디 있으랴. 나는 그 전화를 받은 후부터 다시 간증집회의 초청에 응하기로 했다. 3년 만의 변화였다. 4. 새벽기도에 내리는 축복의 단비 - 내 삶을 완전히 바꿔버린 새벽기도 ------------------------------------- 1998년 12월 29일. 나는 이 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내가 처음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한 날이다. 곽선희 목사님은 나를 불러 한 가지 당부를 하셨다. "김 집사님, 제 목회 연한이 이제 5년밖에 남지 않았어요. 은퇴 전에 집사님이 장로가 되는 것을 꼭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교역자의 뜻대로 장로를 임명할 수가 없어요. 교인들이 장로를 선출합니다. 장로가 되려면 반드시 새벽기도회에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지요?" 참 곤란한 문제였다. 지금 한창 재미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새벽기도회까지 참석하라는 것은 좀 무리였다. "목사님, 말씀은 참 고맙습니다. 저는 집사로 만족합니다. 장로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그리고 저는 아침에 늦잠을 즐기는 타입입니다." 곽 목사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집사님 생각만 하시면 안됩니다. 이제 장로가 될 생각을 하시고 열심히 새벽기도회에 나오세요. 하나님이 곧 집사님을 부르실 겁니다." 고민이었다. 목사님은 왜 내게 이런 무거운 숙제를 주시는 것일까. 편안하게 예수를 믿고 싶은데, 하나님이 곧 부르신다니....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더구나 소망교회에서 장로가 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장로 후보자 중 교인들로부터 랭킹 20위 이내에 드는 표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투표자 60%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장로가 될 수 있다. 이것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몇 년씩 장로장립에서 고배를 들었다. 새벽기도는 기본이고, 교인들에게 얼굴을 알리기 위해 교통봉사, 장례봉사, 식당봉사 등에 나서지만 번번히 고배를 드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거의 초신자였다. 교인 들은 김광석이란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벽기도라니... 장로 장립이라니.... "좋다,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는 뜻에서 한번은 새벽기도회에 나가보자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목사님을 위해서...." 새벽기도회는 5시 30분에 시작됐다. 기도회 시작 40분 전에 교회에 도착해 맨 앞자리에 앉았다. 난생 처음 참석해보는 새벽기도였다. 새벽에 듣는 목사님의 설교는 꿀송이, 포도송이처럼 달고 은혜로웠다. 나는 노트를 꺼내 목사님의 설교를 열심히 메모했다. 그리고 그 날은 온종일 정신이 몽롱했다. 새벽잠을 설쳤기 때문에 피로가 엄습해왔다. "한번만 나가고 중단하는 것은 목사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내일 한번만 더 참석해드리자. 딱 한번만 출석하는 것은 너무 야박한 짓이야." 이튿날도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목사님 체면을 봐서라도 최소한 두세 번은 나가 드리자. 이렇게 시작한 새벽기도회가 한 달 두 달 이어졌다. 새벽기도 말씀노트가 점점 두꺼워졌다. 1년쯤 지난 후부터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다섯가지 복을 받았다. 첫째는 '평강'과 '희락'의 열매다.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마음속에 놀라운 기쁨이 찾아왔다. 그것은 세상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었다. '회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나는 지배인일 뿐이다. 지배인은 사장의 명령에 순종하면 그만이다. 책임은 사장이 진다. 지배인은 유한책임이지만 사장은 무한책임이다. 그러므로 사업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는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으로 사업을 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사업이 잘돼도 감사하고 안 돼도 감사했다.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두 번째 선물은 '가족의 안녕'과 '평화'다. 우리 직계가족은 51명이다. 내가 우리 집안의 첫 기독교인인데 지금은 직계가 모두 예수를 믿는다. 새벽기도를 드리면서 직계가족 51명의 삶이 아주 평탄하고 화목해졌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놀라운 선물들을 준비해놓으셨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것이다.
세 번째 선물은 '물질의 축복', 네 번째 선물은 '명예', 다섯 번째 선물은 '건강'이다. 나는 이것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기독실업인들에게 항상 십일조와 새벽기도를 강조한다. 처음에는 다소 부담스러웠던 새벽기도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것이다. 그 날 이후부터 새벽기도는 내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나는 사업에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다. 그것은 나의 경험을 통해 얻은 귀한 진리다. "사업이 어려우신가요. 그러면 새벽기도를 시작해보세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지혜와 건강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비교할 수 없어요.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세요. 우리는 단지 지배인일 뿐입니다." - '새벽기도 말씀노트'는 우리 집 가보 제1호 ------------------------------- 성공한 사람에게는 보통 세 가지 특징이 있다. 그들은 시간과 물질을 소중하게 여긴다. 성공한 사람들은 약속시간을 어기는 법이 없다. 한가한 사람들이 오히려 약속시간을 쉽게 어긴다. 성공한 사람들은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약속시간에 먼저 나가 대화를 준비하는 사람은 항상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그것은 테니스 경기에서 서브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과 같다. 성공한 사람들은 약속시간에 늦어 허둥대는 일이 없다. 성공한 사람들은 이웃을 위해 봉사한다. 남에게 대접을 받기보다 남을 먼저 대접한다. 그러나 물질을 함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마음을 먼저 준 다음에 물질을 준다. 마음이 없는 선행은 단호히 거부한다. 사람은 받을 때보다 줄 때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됐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모성애가 있어야 한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이웃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을 베푸는 후덕함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신다. 성공한 사람들은 매사에 감사한다. 잘못된 결과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법이 없다. 삶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앞이 막히고 뒤가 막히고 사방이 막혔을 때, 그때는 위를 보라. 위는 항상 열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람이다. '자살'이란 단어를 한번 거꾸로 읽어보라. 그러면 '살자'가 된다. '내 힘들다'고 탄식하는 사람이여, 그 탄식을 한 번 거꾸로 읽어보라. 그러면 '다들 힘내'가 된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들에게는 성공의 향기가 있다. 성공한 사람들은 잘못된 결과에서도 교훈을 얻는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18:1) 그 감사는 새로운 성공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이런 생각을 너무 기복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성공한 사람들의 세 가지 특징을 분명하게 보고 배웠다. 나는 고통의 순간마다 하나님께 항상 도움을 간구한다.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102:1~2) 나는 오늘 1650번째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새벽설교를 정리한 것을 묶어 책으로 엮었다. 보통 500일치 메시지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 현재 세 권을 만들었고, 이것은 내가 후손에게 물려줄 '가보 제1호'다. 곽선희 목사님께서 왜 내게 그토록 강력하게 새벽기도회 참석을 권유했는지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다. 내 모든 사업의 지혜, 내 모든 영적, 육적 건강의 비결을 새벽기도회에서 얻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잠이 많은 나를 완전히 변화시켜 놓으셨다. 그리고 새벽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는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 모른다.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평강과 희락의 무지개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성경은 말한다. 기도하는 백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마찬가지로 기도하는 가정은 망하지 않는다. 기도하는 기업은 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제게 넘치옵니다. 새벽기도는 인생의 금광임을 고백합니다." - 분당 예수소망교회에 역사하신 하나님 --------------------------------- 2003년 3월 31일, 그 날도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를 나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종 장로님이 내 곁에 다가와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김 장로님, 이제 분당 예수소망교회는 끝났습니다." 장로님은 분당 이마트 맞은편 1,200평 대지위에 교회 건축을 책임 맡아 2년 전부터 헌신적으로 일해 오셨다. 70이 넘은 연세에도 건강의 축복을 받아 50대로 보였다. 믿음의 본이 되는 원로장로님이다. 그리고 내가 평소 존경하는 어른이기도 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내용인즉 2002년 말에 100억원의 공사비를 들여 골조공사를 마치고 2003년 10월10일 입당예배를 드릴 일정에 맞춰 2003년 1월부터 내장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건축공사 예산이 바닥났다는 것이다. 시공사인 LG건설 측에 지난 1월 말까지 15억원의 기성고(건축한 부분만큼의 월말 계산하는 건축비)를 내야 하는데, 오늘까지 못 내면 공사를 중단하고 기술자들이 모두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한번 철수하면 돈을 줘도 새로 공사를 시작하는 데 3개월이 걸린다. 결국 10월10일 입당예배는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내 앞에 태산이 가로막고 있는 기분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냥 모른 척하면 그만일 수도 있었다. 그날따라 원주공장 견학 세미나가 있었다. 아침 9시에 회사에 출근해 원주공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15억원을 대납하여 성전 건축이 중단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제가 하겠습니다." 답답하던 가슴이 시원해졌다. 내 눈에서 감격의 눈물이 핑 돌았다. 즉시 본사 재경부의 이 부장에게 휴대전화로 연락했다. "잠시 후에 소망교회 이종 장로님이 오실 것이다. 현금 15억원을 준비하여 그분께 드려라. 그리고 회장이 15억원을 차용하는 것으로 회계처리 하라." 나는 곧바로 이종 장로님에게 휴대전화로 연락하였다. 감격하며 울먹이시는 장로님의 음성을 전화상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지금껏 하나님께 받은 태산 같은 은혜를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 건축비를 또 누군가가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래은행과의 적극적인 대출작업에 들어갔다. 대출금액이 120억원이나 되는 거액인데다, 미완성의 교회는 담보에서 제외된다는 것이다. 일반 담보도 시가 250억은 넘어야 본점 심사 후에 대출이 가능하단다. 순간 나는 또 한 번 주님의 오묘하고 위대하신 섭리에 감탄하였다. IMF 막바지인 2000년, 네 번씩이나 유찰된 경매물건을 하나 사놓은 것이 있었다. 강남 대치동 600m 도로변에 위치한 575평의 대지를 사옥부지로 준비해 두었다. 지금은 부동산 값이 올랐기 때문에 담보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때를 위해 나에게 남겨놓으신 것으로 여겼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담보를 제공했고 성전건축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03년 10월 10일, 예수소망교회 입당예배가 곽선희 원로목사님의 인도 하에 드려졌다.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지금 분당 예수소망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날로 성장해 성도 수가 이미 5천명에 달하고 있다. 대납했던 15억원도 돌려받았고 담보로 제공된 땅도 이미 풀려서 원상복귀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게 깜짝 놀랄 선물 하나를 마련해 놓으셨다. 외제 승용차 아우디 판매권을 참존에게 주신 것이다. 어려운 경쟁사들을 물리치고 판매권을 얻어낸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밀한 선물이다. 참존 모터스는 현제 송파구청 옆 전시판매장에서 성업 중이다. 언제나 과분한 상급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릴 뿐이다. - "형님, 복음이 방해를 받고 있어요." ----------------------------------- 부산 열방교회 김목사를 만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 나는 김 목사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달았다. 고향 후배인 그는 신앙생활과는 아주 무관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누나와 함께 참존화장품 부산 총판을 운영했다. 그런데 갑자기 연락이 끊겼고 그 바람에 나는 상당한 손해를 입었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았다. 오죽 상황이 어려웠으면 그랬을까. 그는 몇 사람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입히고 잠적해버렸다. 그런 그가 10여년 만에 갑자기 회사에 찾아왔다. "형님, 제가 참 죽을죄를 졌습니다. 지금은 주의 종이 되어 강도사로 사역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사역하는 교회에 옛날에 제가 빚을 진 사람이 출석하게 됐어요. 그 빚을 갚지 않으면 제가 목회를 할 수가 없어요. 1주일 동안 철야기도를 하다가 형님 생각이 났어요." 빚은 자신이 져놓고 왜 나를 찾아온단 말인가? 이미 내게도 상당한 금전적 손실을 입힌 사람이 또 무슨 낯으로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내게서 좋은 말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래서 어떡하란 말인가. 그리고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나는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그때까지도 내 마음 속에는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는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 "원금을 갚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한답니다. 결국 교회가 망신을 당하게 생겼어요. 제가 망신을 당하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하나님이 망신을 당하는 것은 참기 힘들어요. 상황이 아주 고약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기세가 등등했던 나는 교회가 망신을 당한다는 말에 다소 움찔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긴 했지만, 예수 믿는 사람, 그것도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망신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록 과거에는 실수를 했으나 지금은 분명히 주의 종이 아닌가. 부채 때문에 목회활동이 어렵게 됐다면 그건 참 큰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형님을 찾아올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기도를 할 때마다 형님이 생각났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제 목회는 끝장납니다. 형님이 저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후배의 태도도 당당했다. "그럼 기도 응답이란 말인가?" 즉각적인 대답. "그렇습니다." 나는 좀 생각할 여유를 갖고 싶었다. 정신이 아주 혼미해진 것이다. 부채를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빚을 내게 갚아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후배가 얄미웠다. "알았네. 돌아가게 나도 기도해봐야겠네." 그를 돌려보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나는 뭐라고 말해왔던가. 하나님이 사장이시고 나는 지배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주의 종이 목회가 어렵게 됐다는데 지배인이 그것을 외면할 자격이 있는가. 지배인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다. 주인의 뜻에 순종할 뿐이다. 나는 급히 돈을 구해 그에게 보냈다. 그제 서야 마음이 아주 평안해졌다. "내가 후배를 도와준 것은 참 잘한 선택이었어. 이렇게 마음이 편안하잖아."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5개월쯤 지난 후 그가 다시 나타났다. "형님, 정말 큰일 습니다. 형님이 보내준 돈으로 그 여자의 빚을 갚았는데요. 그 여자가 소문을 내는 바람에 옛날 빚쟁이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어요. 이번에는 전번보다 액수가 훨씬 많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사고는 자신이 저질러놓고 왜 또 나를 찾아와 해결하라는 것인가. 사실 나도 그에게 받을 돈이 있는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무슨 염치로 내게 부탁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목회를 못한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그는 정말 아주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 되어 있었다. 구습을 벗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를 도와주지 않으면 복음을 가로막는 일을 방관하는 셈이었다. "알겠네. 기도해보세." 나는 다시 어렵게 돈을 마련해 보내주었다. 1년여가 지났다. 이번에는 그가 누이와 함께 찾아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두 사람인가. 또 무슨 부탁을 하려고 찾아온 것인가. 그는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제가 드디어 목사안수를 받았어요. 누님도 모든 사업이 실패해 예수를 믿기 시작했어요.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겠답니다. 제가 누이랑 영주동에 교회를 개척하려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얻을 전세금을 마련하지 못했어요. 이번에도 형님이 좀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참 축하할 일이었다. 그 남매는 새사람이 되어 신앙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목사님이 된 것을 축하하네. 그런데...." 나는 좀 주저하다가 목사안수 기념으로 개척교회 전세금을 보내줬다. 이번에도 마음은 한없이 평안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 주의 종이 됐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998년 어느 날, 나는 책상 위에 봉투 하나를 놓고 반갑지 않은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봉투에는 꽤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 나에게 많은 아픔을 준 사람에게 건네줄 돈이었다. 그 사람은 약속한 시간에 정확하게 나타났다. 그런데 그와 나 사이에 그만 다툼이 생기고 말았다. 둘은 언성을 높였고 그는 화를 벌컥 내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속이 극도로 상했다. 나는 그를 위해 100만원권 수표 100장을 준비해 놓았었다. 그 사람은 다짜고짜 내게 말했다. "얼맙니까?" 그 어투에 속이 상했다. 내 대답도 부드러울 리가 없었다. "한 장일세." 그는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한 장을 1천만원으로 알았던 것이다. 나도 더 이상 그를 잡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부산 열방교회 김 목사가 들이닥쳤다. "형님, 제가 이번에 교회 건축을 시작했어요. 형님께 건축헌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나는 당시 매우 화가 나 있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을 요구하듯 당당한 그에게 나는 완전히 제압돼 버렸다. 이제는 아예 '도와달라'는 표현 대신에 '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손님과 거래를 위해 준비해둔 1억원의 돈 봉투를 그에게 줘버렸다. "가져가게." 김 목사의 표정은 아주 당당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헌금을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예비해놓은 것을 받으러 왔다는데 감히 그 뜻을 어떻게 거절한단 말인가.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교인들을 방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서울로 건축헌금을 받으러 간다고 했을 때 여러분은 나를 비웃었지요? 자, 이것 보세요. 김 회장님이 내가 올라올 것을 미리 아시고 봉투에 건축헌금을 준비해 놓았잖아요. 이래도 내 말을 믿지 않겠습니까?" 김 목사의 말에 나도 감동했다. 마음이 내키지 않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준비해놓은 돈을 교회 건축에 사용하게 됐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어쩌면 이렇게 절묘하실까. 만약 이 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김 목사를 향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묘한 사건과 절묘한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셨다. 교인들은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기도를 드렸다. 김 목사의 눈에 이슬방울이 맺혔고 내 눈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격적인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내 방이 순식간에 통곡의 기도실로 변했다. 직원들은 무슨 일이 터진 줄 알고 방을 기웃거렸다. 이것은 기도의 참맛을 아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은혜의 잔치였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 선수들끼리는 눈빛 하나로 통한다. 김 목사는 자신의 기도응답을 확인시키기 위해 교인들을 이끌고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또 세월이 흘렀다. 김 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김 목사가 갑자기 방문하거나 전화를 해오면 솔직히 가슴이 철렁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기분이 아주 상쾌했다. "형님, 드디어 교회가 완공됐습니다. 형님 교회나 마찬가집니다. 입당예배 때 꼭 내려오셔서 축하해 주세요." 정말 기분 좋은 전화였다. 그의 목소리에 흥분과 기대가 묻어났다. "축하합니다. 당연히 내려가야지요." 나는 아주 공손한 말투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입당예배 때 직원들을 데리고 부산에 내려가 아주 은혜로운 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의 설교는 은혜와 감동이 넘쳐났다. 그는 이미 훌륭한 목회자로 변해 있었다. 불교신도회 회장을 지낸 사람을 택하셔서 작은 힘이나마 교회 건축에 기여하게 해주신 은혜가 고마워 나도 눈시울을 붉혔다. 사울을 바울로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웠다. 불당을 지어 바친 사람에게 교회를 짓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 한없이 울었다.
3년 전 어느 주일에 우연히 부산 열방교회를 방문했다. 부산에 출장 갔다가 그곳에서 주일을 맞은 것이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까 생각하다가 열방교회를 떠올렸다. 열방교회는 이미 3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수십 명의 러시아 선원들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김 목사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교인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교회를 지어주신 분입니다. 김 회장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목회를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감동시키신다. 나는 지금도 기도를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기도를 드리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어찌하랴. 나에게 주책이라고 말한들 또 어찌하랴. 주책, 그것은 '주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열방교회 예배를 통해 가장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다. - "너의 꿈을 펼쳐라" ---------------------------------------------- 예수를 믿기 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사건을 잊을 수 없다. 내 마음 속에 늘 고통의 가시로 남아 있던 아픔이 하나 있었다. 그 아픔이 행복으로 승화되기 까지 참 오랜 세월이 흘렀다. 아픔을 행복으로 바꾸어놓은 힘도 물론 신앙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고통의 가시로 남아있을 아픔이었다. 1976년 12월 24일. 당시 피보약국을 운영하던 나는 평소 친분이 두터운 중앙정보부 조정관을 따라 나섰다. "요새 김 사장님 얼굴 보기가 대통령 보기보다 힘들어요. 내가 지금 아주 좋은 곳에 가는데 한번 따라와 보지 않겠소?" 조정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당시 신앙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아주 재미있는 곳에 가는 줄 알고 무작정 따라나섰다. "좋습니다. 같이 갑시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불광동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장에 들러 떡과 과일을 잔뜩 샀다. '연말을 앞두고 고아원 또는 양로원을 찾아가는구나. 참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로군. 역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저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어.' 그는 예상했던 대로 보육원으로 들어섰다. 광탄 보육원의 아이들은 마치 헤어져 있던 가족을 만난 듯 반갑게 그를 맞았다. 이 보육원은 아주 유명한 곳이었다. 광탄무궁화어린이합창단은 미국에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원생들과의 만남은 내 삶의 태도를 바꾸어놓았다. 사회의 음지에서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보람된 일인가를 알게 됐다. 그 후, 나는 혼자 보육원을 방문한 적이 많았다. 아무도 모르게 그들을 도왔다. 어떤 때는 아이들을 데려가 함께 봉사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 원장이 근심어린 표정을 내게 말했다. "김 선생님, 보육원은 만 16세가 넘는 아이들은 수용할 수 없어요. 이번에 두 명이 이에 해당되는데 한 아이는 갈 곳이 정해졌어요. 그런데 한 아이는 오갈 데가 없어요. 김 사장님께서 이 아이를 직원으로 채용해 주시면 안 될까요?" 직원 한두 사람 채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약국도 직원 몇 명이 더 필요했다. 현재의 인력으로는 수많은 고객들을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문제없습니다. 저에게 보내세요. 그건 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마침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구요." 나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냥 쉽게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몇 개월 후 한 아가씨가 원장이 보냈다며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찾아왔다. 취직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생활할 터전이 없는 아이였다. 현실에 적응할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이 사고무친의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원장과 약속을 해 놓았는데, 이제 와서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때는 단순히 취직만 생각했지, 지금처럼 짐보따리를 싸들고 아예 보육원을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이 아이를 잘 보살펴주는 것이 바로 선행이다. 오죽했으면 오갈 데 없는 아이가 내게 왔을까.' 나는 그 아이를 거두었다. 그리고 집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아침이면 약국에 출근해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지내도록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숙식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 중학교는 졸업했느냐?" 아이는 좀 머뭇거렸다. "아뇨, 중학교 1학년까지 다녔어요. 무슨 사정이 있어서 중간에 그만두었어요. 저도 계속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것이 제 소원이에요." 나는 아이를 곧바로 학교에 입학시켰다. 매사에 적극적인 아이는 고등학교까지 무사히 마쳤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그 무렵이 바로 내 인생 최대의 시련기였다. 그때 약사법 위반으로 8억3천만원을 벌금을 받아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에서 점을 보았는데, 그 내용을 아내에게 모두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여보, 오늘 어머니가 점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당신이 이렇게 시련을 겪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는 군요. 우리 집에 들어오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 줄 당신이 잘 알잖아요. 당신이 그 아이를 속히 내보내세요. 그 아이 때문에 하는 일마다 꼬인답니다. 점쟁이의 말을 결코 가볍게 듣지 말아요. 아주 용하기로 소문난 점쟁이랍니다." 나는 아이를 내보낼 수 없었다. 나를 아버지처럼 따르는 사고무친의 아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차마 못할 짓이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면 가족의 의견이 분열 돼 질서가 깨진다. 나는 아주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앞으로는 저 아이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 말아요. 만약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먼저 집을 나가주어야 할 것이오. 일단 함께 살기로 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이요. 저 아이를 우리 딸이라고 생각하시오." 아내에게 참 못할 말을 했다. 아내는 내 말이 매우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롭게 잘 참아주었다. 나는 도망을 다니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았는데도 아내는 아이를 잘 챙겨주었다. 빚더미에 앉은 상태에서도 그 아이는 학업을 계속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아내는 더 이상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아내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그 아이를 자연스럽게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자신의 꿈이 좌절되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그것을 바라보며 나도 마음이 아팠다. 아이가 권하는 것은 뭐든지 해주고 싶었다. 외롭게 살아온 한 아이에게 멋진 희망과 행복한 인생을 안겨주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해두었다. "걱정 마라. 대학에 못 가는 대신에 아주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 주겠다. 아빠를 믿어라. 너의 꿈을 활짝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마." 절망에 처한 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가장 절망적인 사람은 바로 나였다. 거액의 벌금과 구치소 생활.... 그 시련을 겪으면서도 아이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대학생활의 꿈을 접은 대신,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줄 것을 아이에게 약속했고, 나는 그 아이를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에 취직시켰다. -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다 -------------------------------------- 아이는 대한무역진흥공사에 입사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좋은 직장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 가는 듯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집안이 보통이 아니라 남들이 다 알 만한 대단한 집안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두 사람의 사귐이 길어지면서 드디어 결혼문제가 불거졌다.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그때는 나도 예수를 갓 믿기 시작한 때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 아이를 내 딸로 생각했다. 내가 취직을 부탁할 때도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이건 큰 낭패였다. 모든 것을 정직하게 털어놓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하나님, 남자의 집안사람들 눈을 가려주세요. 아니면 상처받지 않고 헤어지게 해주세요." 그러나 그 아이와 나는 성부터가 달랐다. 나는 김씬데, 그 아이는 성이 박씨였다. 아이는 남자친구에게 모든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했다. 사랑의 힘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다. 남자의 태도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너의 아픔까지도 내가 감싸주겠다. 부모 없는 것이 무슨 문제냐. 내가 우리 부모들을 설득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청년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쳤다. 딸아이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 번은 아침 일찍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청년의 친척이었다. 한번 만나서 두 사람의 문제를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그분들을 만났다. 그들은 아주 교양 있는 분들이었다. 난 그만 고개를 떨구었다. "할 말이 없습니다. 면목 없습니다." 친척의 표정에 잔뜩 힘이 실렸다. "물론 그럴 겁니다. 당연히 할 말이 없으시겠지요. 이제 두 아이의 혼사는 없었던 일로 하고, 저는 그만 돌아겠습니다." 그날, 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참 많이 울었다. 외롭게 자라온 아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남자를 만나 따뜻한 사랑을 느껴보기도 전에 이별이란 말인가. 아이가 한없이 가여웠다. "딸아, 미안하구나. 그러나 마음을 단단히 먹어라. 절망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더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 그것을 믿어라. 그것을 꼭 믿어라."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은 헤어지지 않았다. 마침내 청년이 부모를 설득해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이다. 예식장 입구에는 좀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신부 박순자의 아버지 이름이 '박 광석'으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떠나보내는 딸을 위한 양아버지의 마지막 배려였다. 최소한 하객들에게만큼은 친딸로 인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딸을 위해서라면 박 광석이면 어떻고, 최 광석이면 또 어떤가. 어차피 나는 누가 뭐래도 김광석인데.... 예수를 믿으면 한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뀐다. 그 아이는 예수를 영접했고, 아주 훌륭한 젊은이를 만났다. 지금은 부부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무역업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우리 부부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그 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의 사랑으로 저의 오늘이 있습니다. 이제는 안심하세요. 이제는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이제는 아버지의 도움과 사랑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 이제 제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세요. 과거의 아픈 상처에서 완전히 해방됐어요. 하나님께서 저를 치유해 주셨는걸요...." 우린 손을 마주 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 동안의 고통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감격의 눈물이었다. 나는 새벽기도를 통해 많은 복을 받았다. 새벽기도는 나를 '올빼미형'에서 '종달새형'으로 바꾸어 놓았다. 원래 나는 친구들과 밤늦도록 어울려 지내기를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새벽기도를 시작한 이후, 그런 것들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다. 보통 밤 9시가 되면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귀가한다. "나는 새벽기도를 드린다네. 그래서 저녁에는 일찍 자야 해. 그걸 이해해주게." 그리고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새벽기도는 '시간의 십일조'다. 새벽기도를 준비하는 4시부터 귀가하는 6시20분까지가 바로 하루 24시간에 대한 시간의 십일조인 것이다. 보통 밤늦게 이루어지는 교제는 삶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밤늦도록, TV드라마에 몰입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크리스천의 성결한 삶에 무슨 유익이 될까. 옛날 효자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부모님 침소를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 크리스천들도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 이것이 나의 새벽기도 철학이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부모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새벽기도를 드린다. 새벽기도가 없었다면 나는 세속의 탁류에 쉽게 휩쓸렸을지도 모른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였다. 그러나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성결한 삶에 대한 약속이었다. 주머니에 돈이 있고, 육신이 건강하고, 재미난 친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향락들을 억제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허물어지면 걷잡을 수 없다는 것, 하나님이 항상 불꽃같은 눈동자로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며, 세속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새벽기도는 세상의 유혹을 차단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 삶을 되돌아보면 온통 감사뿐이다. '내가 만약 예수를 믿지 않았더라면...' 이런 가정을 하면 몸이 오싹해진다. 예수 없는 인생은 한없이 공허할 뿐이다. 세속적인 기쁨은 움켜쥐면 쥘수록 허무하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내 젊은 시절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 그것을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는 감히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주님은 제 삶의 전부입니다.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께 순종합니다. 착한 종은 항상 주인의 말에 기쁘게 복종합니다. 제 삶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시옵소서. 주인의 뜻에 순종하겠나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인생,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예수 없는 성공은 공허할 뿐이요, 주님을 만난 실패는 성공의 통로가 된다. - THE END - |
첫댓글 긴글 6부작 마무리 하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