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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암 처사(藤庵處士) 묘명(墓銘)
만력(萬曆) 말기에 나는 영남 여러 고을에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다가 거창(居昌) 객관(客館)에서 처음으로 공을 알았다. 공은 자신을 지킴이 엄격하고 주고받는 관계가 올바르며 군자의 풍류를 말하기 좋아하였으므로 나는 마음으로 존경하였다. 그후 한강(寒岡) 정 선생(鄭先生 정구(鄭逑))이 작고하자 같은 문생(門生)의 열에 서서 조문하였는데, 서로 소식이 끊긴 지 10여 년 만에 영남 선비 편에 전현(前賢)의 유적(遺籍)을 보기를 요구했더니, 그해에 상변사(앳ⓡ�)가 있어서 선량한 이들이 연루되었고, 공도 포박되어 서울에 들어왔는데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가져다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죽어도 저버리지 않겠다.”
고 하였다. 공이 이미 사면되어 고향에 돌아간 지 몇 해 후에 나는 영남으로 피난하여 어른들을 뵙고 새로운 것을 들어서 배웠다. 매양 공을 찾아가 노덕(老德)으로 섬겼는데, 몇 해 전에 공의 작고 소식을 듣고 침문(寢門) 밖에서 곡하였으며, 장사 때에도 공을 위하여 애사(哀詞)를 지었다.
이제 남긴 아들 둘이 있어, 삼년상을 마치고 선인의 묘소에 비석을 세우고자 1천여 리 길에 사람을 보내서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덕을 사모하는 정성으로 사양하지 않고, 공의 선행(善行) 가운데 드러난 것만을 논찬(論撰)하여 다음과 같이 돌에 적는다.
“공은 재식(才識)이 남보다 뛰어났다. 젊어서 한강 선생(寒岡先生)을 사사하여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공은 힘써 배워서 여러 번 공거(公車)에 뽑혔으나, 불행히도 선장군(先將軍)이 비명에 작고함을 만나서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고는 이름을 숨기고 힘써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린 동생이 하나 있었으므로 공은 마음이 더욱 괴로워 교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과실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종아리를 때리므로 학업이 날로 성취하여 그 이름이 남주(南州)에 들렸으니, 이가 곧 배상호(裵尙虎)로 자가 계장(季章)이다. 그는 태학(太學)에 올랐는데, 명이 짧아서 일찍 죽자 공은 지나치게 애통하여 마음에 더욱 인사(人事)를 즐기지 않고, 무흘산(武屹山)의 천석(泉石)을 따라서 늙었으며, 별호를 등암(藤庵)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가 그 어짊을 천거하면 공은 즐겨 돌아보지 않았으므로 끝내 추천하는 자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공은 평생토록 착함을 한없이 좋아하였으며, 남의 잘못을 보면 마치 수치가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 독실한 행실은 친족을 친히 하여 인자하고 사랑하며 나아가 소원한 데까지 미루어서 미쳤으므로, 일문(一門)이 다 가르침을 권면하여 가정이 엄하면서도 정이 있었는데, 중히 여긴 것은 관혼상제(冠婚喪祭)였다.
공은 휘가 상룡(尙龍), 자가 자장(子章), 성이 배씨(裵氏)로 성주인(星州人)이다. 조부는 사재감 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이요, 부는 영남 수군절도사(嶺南水軍節度使) 설(楔)인데, 부와 조부 모두 호조 참판에 추서되었고,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송씨(宋氏)는 관향이 야성(冶城)인데 충순위(忠順衛) 원(源)의 딸이다. 공은 명 나라 만력(萬曆) 2년 곧 우리 선조대왕 7년 갑술(1574)에 출생하여 효종 6년 을미(1655)에 작고하니 나이 82세였다. 부인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사재감 정 인서(仁恕)의 딸로 온공(溫恭)하고 독후(篤厚)하였다. 공이 부모를 섬기고 형제 자매와 사는데 각기 다 마음이 기뻤음은 역시 부인의 어짊이라 일컫는다. 공보다 23년 전에 작고하였는데, 공과 합장하여 그 묘소가 금물법(今勿法) 후리곡(厚理谷)에 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세유(世維)ㆍ세기(世紀)이고, 두 사위는 이유전(李惟銓)ㆍ김시수(金是燧)로 모두 사인(士人)이다. 공은 이미 작고하였으나, 그 유풍(遺風)과 여훈(餘訓)을 또한 자손에게서 볼 수가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 嗚呼
보배를 품고 세상에서 은둔하여 / 懷寶遯世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네 / 不見知而不悔
확고하면서 온화하며 / 確而和
성실하고 자만이 없었으므로 / 忠慤而無侉
향인이 두려워 복종하였으니 / 鄕人畏服
고상한 노덕이 있었네 / 尙有老德
[주]《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 한강선생께서 송 나라 학자인 정호(程顥. 명도), 정이(程頤> 이천), 사마광(司馬光. 군실), 장재(張載) 횡거), 주희(朱熹. 회암) 등 5인의 예설(禮說)을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첫댓글 한강선생 문인록을 뒤지다가 등암 배상룡 선생의 묘갈명을 발견하여 올립니다. 등암선생은 설산 배명숙 선생의 선조로서 한강 정구선생이 임종시에도 시중한 고제자입니다.
추석명절 뜻있게 잘 보내셨지요 고향땅이 더 그리워지고 부모님의 은혜와 수고로움에 대하여 마음이 쓰이는 때가 아닌가 합니다. 조상에 대해, 핏줄에 대해우리의 근본을 찾아나서서 선인의 발자취를 알아보는 일이 참으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한 모퉁이 이름없는 곳에서 미진으로 돌아가야하는 것이 사람인데 이렇게 뿌리를 확인하고 핏줄을 더듬어보면 무언가 가슴한켠이 찡해 옵니다. 건강하세요, 늘 고마워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셔요 (^-^*)
강황은 계속 먹고 있는데 효과 만점 퍼팩트합니다. 댕큐 !
미수 허목 선생은 늦은 나이에 조정에 출사하여 삼척부사로서 치적을 남겼고 정승까지 지냈으며 숙종조에 당쟁의 와중에 별 화를 입지 않은 훌륭한 선비였습니다. 한 때 같은 당인이었던 허적은 영의정 재임 중 조부의 시호 축하연에 임금의 허락도 없이 대궐의 유악을 반출하고 그 아들이 역모혐의를 받아서 부자가 모두 사형당하였습니다.
추석명절에 고향에 다녀오셨습니까. 제사상 차리는 기본 올려 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추석으로 이제 가을 자리를 매김하고 오늘 비가 내리니 더욱 날씨가 서늘해지는 데 단사선생의 깊은 학식은 끝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조상님의 은덕으로 더욱 발전이 있을 것을 예감하며 우리 조상 남의 조상 다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하늘아래 아비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배움이라는 그릇은 채워도 채워도 죽을 때까지 다 못채우리라는 것을 다시 새겨보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좋은 글 많이 올려주셔요 늘 고마워합니다.(^-^*)
보배를 품고 세상에서 은둔하여 / 懷寶遯世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았네 / 不見知而不悔
확고하면서 온화하며 / 確而和
성실하고 자만이 없었으므로 / 忠慤而無侉
향인이 두려워 복종하였으니 / 鄕人畏服
고상한 노덕이 있었네 / 尙有老德
시가 멋집니다
성주배씨가 그렇게 이름있는 가문이었군요 대구에도 배씨가 많이 삽니다. 성씨에 관하여 알게되니 참 흥미롭습니다.
글올리신다고 애 많이 쓰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건필하십시요
새 글이 올라와 있어 반가워 퍼뜩 읽어보았심더 ! 감사합니다.
경주시 탑동에 가면 양산재(楊山齋)라는 사당이 있는데 설명한 말미 이렇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 촌장들의 신라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 이름을 고치고 자기 성을 내리게 되니 바로 양산촌은 이씨(李氏), 고허촌은 최씨(崔氏), 대수촌은 손씨(孫氏), 진지촌은 정씨(鄭氏), 가리촌은 배씨(裵氏), 고야촌은 설씨(薛씨)이다. 이로써 신라의 여섯 성씨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
제가 이 나라의 토속 성씨 중의 하나임에 얼마나 자긍심이 생기던지 ㅎㅎ
동원쌤 감사합니다
더 깊어지는 공부에 참으로 뿌듯합니다.
그 여섯을 6부 촌장이라고 하지요. 설산 선생이 자기 가문에 대하여 잘 모르는 줄 알았는데 상당히 아시는군요.
모르는척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찾아 다닐 정도로 많이 정진하는 모습이 눈에 보입니다. ㅎㅎ 다향 가득한 설산선생이 묵향이 더해져 백리길 너머까지 전해집니다.
설산선생 글을 읽으니 성씨에 대한 뿌듯한 자긍심이 느껴져 좋습니다
다향에 묵향까지 더하여 우리카페가 고풍스런 멋으로 가득합니다
바쁜 일상으로 시간내기 어려운데 많은 활동을 하며 하루를 채우는 걸보면 대단하단 생각이 듭니다
차문화와 산행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뒤지지않을 분이지요^^♥♥♥
근간 얼굴 좀 봅시다
선생님 글을 읽으니 탑동이라는 곳에 가보고 싶어집니다
가을 시월에는 탑동엘 가고 싶어요
뿌리를알게되어 더욱 긍지가 생기니 얼마나 뿌듯하시겠습니까 좋은 조상이 있고 좋은 친구가 있어 사람살만한 세상입니다. 감사합니다.강추
신도비명, 묘지명, 묘갈명, 묘비명은 모두 다 같은 뜻입니다.
사정이 있어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지만 등암선생 사후에 당시 좌의정이었던 미수 허목선생이 묘갈명을 지어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친분이라고 봐야 되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3대 반촌인 칠곡 석전에 있는 광주이씨 석담 이윤우 선생과 함께 한강선생 사후 유적을 만들고 현창사업에 지대한 역할을 하신 고제자입니다. 가문의 현달과 부귀 영화를 위해 서로 줄을 대는 시기에 표시없이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은 일을 하신 훌륭하신 선비입니다.
문화관광해설사를 같이 공부하신 칠곡문화원 부원장 이택 씨도 광주이씨라고 하던데 이른바 오극(이극배, 이극증, 이극감, 이극돈, 이극균)이후로 칠곡에 내려와 세거하게 되었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종가에 방문도 했었지요 하회마을, 양동마을에 이어서 석전(돌밭)은 조선3대 반촌으로 이름날렸으며 오대가 한림벼슬을 했다고 이택 영감님의 자랑이 대단했지요ㅎㅎ 석담선생은 어린시절 율곡선생문하에 있다가 율곡 사후에 한강문하로 들어왔답니다.
영남, 그 중에서도 경상북도는 조선의 3대 반촌이 있기도 하지만 조선의 5대 서원 모두가 있는 대단한 고을 입니다.(소수서원,도산서원,병산서원,옥산서원,도동서원) 또한 양반문화의 수도는 영주,안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종가, 반촌, 서원,, 그런 곳에 가보고 싶습니다. 우리 문화를 느끼고 보고 배우고 싶어집니다. 선생님들의 글을 읽고나면 제가 참 초라하고 모자라는 것 같은 마음도 들고요 ,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강추
종가의 며느님이 친가가 류성룡일문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하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차를 대접하는 품에서 아아 양반은 그냥되는 것이 아니로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었지요 (^-^*)
성주의 수륜면 윤동마을에 서애 류성룡의 후손이 시집와서 종부를 하고 있었지요.
오늘 읽어보니 대단합니다 여러 선생님들의 깊은 학덕에 놀라워합니다 저만 무지한것 같습니다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옛날 선비 대유께서들 모여 계시는 누각같습니다. 그냥 글이 짧아서 읽기만 합니다. 명절 잘 쉬셨는지 모여 막걸리도 한잔 하고 그러면 좋은데 이렇게 간단하게 인사드리고 물러갑니다.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만사형통하시길 빕니다. 꾸 ~~~벅
이 카페가 누각입니다. 역사와 문화와 국학(명리학)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는 강 언덕에 높다랗게 올린 멋진 누각이지요 이 누각에 올라 갑론을박 토론하시는 분들은 모두 강호의 쟁쟁한 고수들이십니다. ㅎㅎㅎ
이 누각에 오르시는 분들은 선유와 같아서 맑고 드높은 기품이 달빛처럼 빛납니다. 흐뭇(^-^*)
감사합니다. 흐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