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수
도대체【都大體】,
뭐가 그리 못마땅한 걸까. 고개를 갸우뚱대는 듯싶더니, 내내 응그린 표정이다. 이내 오른쪽 윗입술에서 불퉁거림이 삐져나온다. 엄색 띤 얼굴에서 영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이 뭉근하다.
노악산露嶽山자락, 남장사南長寺 오르는 어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로테스크한 벅수의 인상이 다분히 야릇하다. 길머리를 지키고 앉아 드나드는 사람들을 부릅뜬 퉁방울눈으로 쳐다본다. 뭉뚝한 주먹코는 삐뚜름하고, 악다문 입술 위로 뾰조록이 선각線刻한 송곳니를 내보인다. 일그러진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듯한 표정을 보니, 불만저의가 이만저만이 아닌 성싶다.
이 벅수는 자연적 형태의 화강암을 실박하게 다듬어서 만들었다. 콧날도 없이 펑퍼짐한 코와 불거진 눈망울에서는 원초적 소박함마저 묻어난다. 위로 치켜 올라간 갈고리눈과 삐져나온 송곳니로 섬뜩함을 표현하려 했지만, 무섭기는커녕 수수한 표정이다. 험상궂게 조각한 벅수들에서 묻어나는 억세고 사나운 생김새와는 달리, 외려 추연한 기색이 풍기기까지 한다.
장승은 보통 2기가 한 쌍을 이루지만, 이 벅수는 외따로 서 있어서인지 여간 얄궂은 표정을 짓는 게 아니다. 아랫도리 부분에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란 명찰을 달고 있는 것으로 봐서 여장승이 분명하다. 맞선자리에 나온 총각이라면 새침스러워 말 붙이기도 뭐할 것 같다. 표정이 여간 쌀쌀스럽지가 않은데다 불평한 심사를 금방이라도 토해낼 것 같기 때문이다. 나란히 있어야 할 [상원당장군上元唐將軍]이 곁에 없다고 새치름한 표정으로 투덜대는 건 혹여, 아닐까.
저수지 둑에는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봄물 가득 머금고 바람에 다팔거린다. 벅수는 40여 년 전, 바로 길 아래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태어난 곳을 떠나와 지금 자리에 뿌리내렸지만, 눈망울은 여전히 저수지 쪽을 응시한다. 다시 친정으로 돌아갈 순 없어도 마음만은 떠나온 곳을 잊지 못하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새로 자리한 이곳이 마뜩찮은 표정인 것으로 봐서 시집살이의 우우함이 얼핏 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청상과수의 고스란한 심사가 이런 표정이 아닐까.
바로 옆에는 우직한 소나무가 혹심한 풍설 참아낸 어엿한 자태로 벅수를 내려다본다. 대지에 뿌리박으면 온갖 풍상을 견뎌야 하는 팔자다 보니, 짐짓 아는 게 병이라는 눈짓이다. 벅수도 발목쟁이를 땅에 묻고 무수한 흙속 벌레며 박테리아의 침식을 견뎌냈지만, 잔뿌리를 깊숙이 내릴 수 없다는 취약점이 있다. 게다가 풍우와 눈서리에 씻기고 깎이며, 성한 살점을 애처로이 뜯기는 와중에 만성적 속병까지 얻은 상태다. 그래도 벅수는 다부지게 몸뚱이를 추슬렀다. 세월
탓,
일까. 이제 고색이 짙어간다. 이마와 콧잔등에 거뭇한 검버섯이 볼품없는 꽃처럼 피어나고, 누르께한 얼룩은 옻 탄 듯 온몸으로 번진다. 자꾸만 늙어가는 몰골을 훑어보며 귀먹은 푸념도 푸지게 했을 게다. 또 욱욱한 성격 탓에, 노발하는 바람에 안면 근육은 일그러진 상태로 뻣뻣이 굳어버렸다. 이제 펼 수도 없을 만큼 빳빳해진 얼굴에 닭 볏 같은 주름이 하나둘 오목새김 된다. 여태껏 지켜본 청청한 소나무가 동병상련이라고 살랑바람에 나풀거리며 다독여준다. 그러나 뾰로통한 표정을 여전히 고수하는 걸 보면 왕고집이 그리 쉽게 풀릴 성싶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이 고집통이 밉지 않아 보이는 건 영악스러움이 태무하고, 몸체의 바탕이 된 돌처럼 투박스럽기 때문이다.
장승 모양은 석수장이의 손끝에서 나온다. 석수장이는 장승 얼굴을 우악스럽게 표현하지 않고, 약간 바보스럽게 조각하였다. 무엇에 골똘히 빠진 것 같은 표정이 친근감을 자아낸다. 매섭고 독한 기운이 감돌아야 잡귀를 물리칠 것 같아선지, 여타 장승의 몸속에는 아무래도 시퍼런 냉기가 도사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벅수는 따스한 피를 품고 있을 것만 같다. 꾸밈새 없는 석수장이가 돌을 쪼고 낫낫하게 어루만지며 시름시름 혼기를 불어넣진 않았을까. 분명히 몸통에서 맥박이 뛰고 혼혼함이 감돌 것처럼 보인다. 치켜뜬 눈망울 위로 파상波狀으로 구부려놓은 눈썹엔 신경선이 꿈트럭거리고, 콧구멍은 파내지 않아 막혀 있지만 금방이라도 긴 숨을 몰아쉴 듯하다. 또 삐죽이던 입술을 한껏 벌리며 금방이라도 떵떵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낼 것만 같다. 그러하기에 감히 잡귀들이 범접하여 시망스레 굴 일은 아마도 없을 성싶다.
비탈길을 오가는 사람들은 벅수의 시퉁한 고갯짓에 한 번쯤 걸음을 멈칫하게 된다. 정묘한 도량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벅수는 드나드는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며 누구나 청정해지기를 바랄 게다. 세속에서 절은 때를 벗겨내기를 바랄 게다. 그러한 바람을 알고 무구해지기를 바라건만, 찌들고 묵은 때를 그리 쉬이 벗겨내지 못한다. 그러기에 수문신守門神처럼 지키고 선 벅수의 인상 찌푸림을 짐짓 느끼며, 태도와 매무새를 바로 하고 흐트러진 마음에 잡도리하게끔 으르는 건 아닐까. 늘 달갑잖은 표정으로 노려보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이 쓴「큰 바위 얼굴」이 떠오른다. 어니스트는 예언이 깃든 바위를 쳐다보며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간다. 세상에 정말 위대한 것은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성찰과 자각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란 걸 일깨워주는 이야기다. 간절히 소망하고 노력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를 얻게 된다. 비록 테베 입구를 지키는 스핑크스처럼 기묘한 수수께끼는 던지지 않아도, 오가며 이 신장神將을 보고 마음 추스르면 의식이 보다 새로워지지 않을까. 그 각려 부추기려는 심사가 인상 한번 펴지 않는, 정말
어깃장
놓을 표정으로 조각된 것이리라. 점자 더듬듯, 조심스레 어루만져본다. 석수장이가 손끝으로 전하려던 뜻이 비로소 도드라진다.
벅수의 팍팍한 안면 근육에 해거름 볕살 한 줌이 차랑거린다. 여전히 혀를 끌끌 차고 눈썹 양단兩端을 추켜올리며 고개를 갸우뚱댄다. 늘 변함없이 이렇게 추궁하듯 엄색 띤 얼굴로 사람들을 기다릴 게다. 실그러진 근육의 긴장을 잠시나마 풀어줄 바람이 산기슭에서 불어온다. 울근불근한 낯꽃에 괸 땀이라도 시원히 식혀줬으면 싶다.
첫댓글 이동희 선생님^.^ 반갑습니다
우리 카페는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사오니 실명제로 활동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계속 많이 올려 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