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년전 데이비드 호킨스 선생님의 "의식혁명"이 내 안에 들어올때
나의 의식수준은 정확히 "175 자존심, 자부심"레벨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부처님, 예수님을 마음에 담아 존경할 수 있었고
나의 낮은 수준을 높이기 위해 몸부림칠 수 있었다.
리더십트레이닝으로 행동주의 심리학으로 변화하기
높은 의식수준의 책 읽고 실천하면서 변화하기
에니어그램, mbti 무의식적 선호 알아차리며 변화하기(나는 5w4유형, intp 유형이었음)
마음챔김 명상
단월드 명상, 힐러과정
최면탐구
생체역학적 몸탐구
지난 3년동안 몸탐구(400)에 몰입하면서 나의 의식수준은 낮아져가고 있었다.
기초가 바위처럼 단단해져가는 과정이라고 믿는다.
몸 탐구에 대해서도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것같다.
이제 다시 놓아버림을 통해 새로운 전환점을 맞고 있다.
2015년 9월 18일 놓아버림 두번째 탐독
앞으로 다시는 놓아버림을 놓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영적의도를 갖고 선택하고 받아들이기
2016년 7월
놓아버림으로 500을 넘어가고 있다.
2016년 8월 17일
대박 드디어 자부심 놓아버림의 지점을 찾았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자부심, 자만심의 지점, 알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
끝이 없을것 같던 놓아버림의 어려운 지점 드디어 찾았다.
감사합니다
2020년 10월 21일...
여전히 의견을 갖는 허영을 자주 알아차림 중!!!
의식수준 검사 513...
2021년 9월 .... 묵상 중
자부심이라는 말은
대개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사용한다.
그러나
자부심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논의한
다른 부정적 감정과 마찬가지로
사랑이 전혀없다.
그래서 자부심의 본질은 파괴적이다.
자부심이 취할 수 있는 형태로는
과대평가, 부인, 동정을 사려 순교자인 척하기,
독선, 오만, 뽐내기, 허세, 우월감, 고결한 척하기,
허영, 자기중심적 태도, 자기만족, 냉담, 의기양양, 속물근성, 편견,
경건한 척하기, 경멸, 이기심, 가차없음, 버릇없음, 엄격함,
잘난체하기, 자주 비판하기 등이 있고,
자부심의 가벼운 형태로는
"대충 속단하는 태도"가 있다.
지적 자부심은
무지를 낳고,
영적 자부심은
영적으로 발전하고 성숙하고자 하는 이들 누구에게나
큰 걸림돌이 된다.
자신만이 올바르고 유일하게 참된 길속에 있다는 종교적 자부심은 모든 종교전쟁과 대립, 중세 카톨릭의 종교재판같은 음울한 사건을 일으키는 요인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화근은 종교적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특정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을 죽일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태도다.
우리는
모두 "나는 답을 안다"는
자부심에 찬 기분탓에,
성장하거나 발전하지 못한다.
'마음의 독선적인 부분이
독선을 위해 그 사람의 나머지 모든 면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한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사람들은
잘못을 인정하느니,
목숨마저 포기해
생명의 모든 것을
에고의 재단에 바치려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마음속 프로그램에 대해
남자들이 갖는 자부심은
그들의 내면에서 감정발달이나 정신발달에 걸림돌이 된다.
이제 일부 여성이
성별 우월주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는 것도
문제를 악화시켜
성별간 다툼이 심화되고 있다.
자부심의 취약성
자부심에 찬 사람이
끊임없이 방어적인 것은
허세부리고, 부인하는 태도는
상처를 쉽게 받기 때문이다.
역으로
겸손한 사람이
굴욕감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자부심을 놓아버린 덕에
자부심에 상처받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자부심 대신 안도감과 자존심이 있다.
자부심으로
진정한 자존감을 대체해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부심을 포기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존감이 생긴다.
에고를 키운다고
내면이 강인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처에 더욱 취약해질 뿐이며,
공포의 정도가 커질 뿐이다.
자부심 상태에 있으면
자신의 생활방식이며
직업, 주변사람, 차림새, 자가용의 연식과 제조사,
조상, 국가,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념 등에
끊임없이 집착하며
그것을 옹호하는데
에너지를 낭비한다.
대개 겉모습에 사로잡혀 있고
남이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쓰는 탓에
남의 의견에 상처받기 쉬운 상태가 계속된다.
자부심과 허세를 포기하면
어떤 안도감이 내면에 들어선다.
더 이상 자신의 이미지를 지킬 필요를 느끼지 못하면,
타인이 가하는 비판과 공격이 줄어들다가
결국 멈춘다.
옳다고 확인받거나
증명할 필요를 놓아버리면
도전받을 일도 서서히 줄어든다.
여기서 의식의 기본 법칙 하나를 알 수 있다.
"방어적 태도는
결국 공격을 자초한다"
"자부심 뒤에 몰락이 따라온다"
자부심은 살얼음과 같아서
용기나 받아들임, 평화뒤에서 나오는
바위같이 단단한 진짜힘을 대체하기에는
너무나 빈약하다.
건강한 자부심이 있을까? 있다. 건강한 자부심은 자존감 즉 나는 진정으로 소중하고 가치있다는 내적자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내적자각은 자부심의 에너지와 다르다.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자각하면 방어하는 태도가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 존재의 참모습,
즉 내면의 자아는
진정으로 결백하고 위대하며
인간 영혼의 고귀함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
의식이 미치면,
자부심은 더이상 필요치 않다.
그저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뿐이며,
이러한 자기인식 이외에
더 필요한 것은 없다.
우리가 참으로 알고 있는 바에 대해서는 방어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이장에서 논의할 자부심의 에너지와 다른 것이다.
우리에게 주입된 자부심 프로그램 몇가지를 살펴보고 그렇게 파헤친 후에도 프로그램이 남아있을지 보자.
우리에게 주입된 자부심
# 집안에 대한 자부심
# 국가에 대한 자부심
# 성취에 대한 자부심 등이 전형적인 예로 떠오를 것이다.
"자부심이
인간의 감정으로서
가장 고귀한 것이 분명할까?
옹호하는 태도가
자부심의 특징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렇지 않음을 증명한다.
소유물이나 자신이 속해있다고 여기는 조직에
자부심을 가지면, 방어해야겠다는 의무감도 생긴다.
자기의 발상과 의견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면
논쟁과 갈등, 비애가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자부심보다 높은 감정상태는
사랑하는 상태다.
가족, 국가, 성취 등
위에서 언급한 전부를 사랑하면
마음속에 가치의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방어하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어진다.
의견 주장도
자부심의 일면인데,
진정으로 알아보고
알아주는 마음이 의견을 대체하면
논쟁을 벌일 여지가 없어진다.
어떤 것을 순전히 사랑하고
감사하게 여기는 입장은
견고하기 때문에 공격이 불가능하다.
자부심은
상처받기 쉬운 것이라,
해소될 필요가 있는
어떤 의아한 점이 자부심 속 어딘가에 있기 마련이고,
상대방은
재빨리 그 의아한 점에
집중한다.
의아한 점이
모두 없어지면
의견과 자부심도 사라진다.
자부심에는 마치 자부하려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는 인정받을 만하지 않은 양,
인정해달라고 양해라도 구하는 듯한
미묘한 인상이 있다.
사랑과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에는
옹호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
자부심은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미묘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그 대상의 가치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실로 사랑해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은
그것이 본디 완전함을 알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실 결함 자체가
어떤 것의 완전성에서
핵심적인 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주에서 보이는
만물이 무언가로 되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는
완벽한 상태인 채
차츰 나아가는 것 자체가
완전성의 일부다.
따라서
반쯤 핀 꽃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꽃이 피는 과정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정확하고도 완벽하게 진행된다.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각 개인은
모두 그와 같은 완벽성을 펼치고 기르고 있고,
배우고 있고, 삶에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점진적 과정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정밀하게 펼쳐진다고 할 수 있다.
자부심이라는 입장의 결점가운데 하나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상처받기 쉽다는 점이다.
상처받기 쉬우면
공격을 자초한다.
사회에서 목격하듯이
자부심에 찬 사람들은
비판을 끌어들인다.
또한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자부심뒤에 몰락이 따라온다라는 속담도
등장했다.
성경을 보면 루시퍼는 위상이 대단했는데도 자부심이 아킬레스 건이었다.
최초의 천사인 Lucifer (타락하기 전 Satan은 Lucifer 또는 Satanel로 불리웠다)에 대해 알아보자.
루시퍼는 최초의 천사이자 제일 아름답게 창조된 천사였으나 이러한 자만심이 그를 타락시켰다. 인간 창조 이전의 어떤 시점에서 루시퍼는 자신은 최상의 존재이며,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왔으며, 인간이 창조될 무렵엔 이미 하나님의 보좌와 권력을 강탈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러한 기이한 존재가 바로
성경에 사탄, 루시퍼, 용the Dragon, 마귀 the Devil로 불리는 자이다.
겸손 - 자부심의 해독제
죄책감때문에
자부심을 억제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자부심의 에너지에
죄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그 죄책감때문에 마음속에서 자부심을 억제하거나 감추는 것
또는 자부심을 느끼지 않는 척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자부심의 에너지가
감지하기 힘든 새로운 형태를 취하는데,
이를 "영적 자부심"이라고 한다.
자부심에 찬 사람과 함께 있으면
느낌이 편치 않다.
자부심에 찬 상태는
사랑의 소통과 표현을 방해한다.
우리는
성취를 자부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이 자부심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지,
자부심때문에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자부심을
영적인 죄로 보고
죄책감을 느끼면
자부심에 고착될뿐,
앞서 말했듯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진짜 해결책은
자부심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를 파해치는 방법으로
자부심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자부심의 본색이 보이면
자부심도 쉽게 항복할 수 있는
감정이 되어버린다.
먼저 이렇게 자문한다.
"자부심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
"자부심이 주는 이득은
어떤 것일까?
"나는
왜 자부심을 추구할까?
"자부심으로
무엇을 보상받으려는 것일까?
"상실감없이 자부심을 놓아버리려면
나의 실상에 대해
어떤 점을 깨달아야 할까?
그 답은 상당히 명백하다.
속으로
자신을 왜소하게 느낄수록
무능하고 별볼일없고 무가치하게 느낄수록
우리는
그런 느낌을 자부심의 감정으로 대체해
더 크게 보상받으려고 한다.
부정적 감정을 항복할수록
자부심이라는 목발에
의지하지 않는다.
자부심 대신
이른바 겸손이 들어서고,
주관적으로는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한다.
진정한 겸손은 공개석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겸손을 자부하는 모습이나, 거짓된 겸양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거짓된 겸양'이란 자부심이 지나치다 보니 내놓고 떠벌리지는 못하는 자기 업적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깎아내리는 척하는 것이다.
참된 겸손은
겸손하다는 말을 듣는 사람 스스로는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참된 겸손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진정으로 겸허한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없다.
굴욕에 면역이 되어 있다.
방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상처받지 않으므로
타인이 가하는 비판적인 공격을
경험하지 않는다.
타인이 가하는 비판적 언사는
비판자 자신의 내면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여길 뿐이다.
예를들어 누가 '넌 네가 꽤난 잘났다고 생각하지?'라고 하면 진정으로 겸허한 사람은 질문자에게 남을 시샘하는 문제가 있을 뿐 질문 자체에는 애당초 현실적 근거가 없음을 안다. 기분 상할 것이 없으므로 반응할 필요가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부심에 찬 사람은
이런 질문을 모욕으로 여겨 상처받기도 하고
말로 되받아치기도 하며
폭력으로 끝맺는 경우도 있다.
환희와 감사
자부심은
때로 성취할 동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높은 수준의 대체물은 어떤 것일까?
환희가
답이 될수도 있다.
성공적인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자부심 대신
환희를 얻는다면
문제가 될까?
자부심에는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따르기 때문에
조만간 인정받지 못한다면
분노와 실망으로 상처받기 쉽다.
만약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동기가
기쁨과 즐거움, 성취에 대한 사랑,
성취가 안겨줄 내적 환희에 있다면,
타인의 반응에 상처입지 않는다.
어떤 선택과 행동의 유형으로
타인의 반응을 끌어내려는지를 살펴보면
자신이 어떤 아픔에 고통받기 쉬운지도,
깨달을 수 있다.
이런 선택과 행동에 포함되는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버릇, 표정, 옷입는 스타일,
선호하는 소지품의 종류,
자가용 브랜드, 살고 있는 집의 종류,
집 주소지, 자신이 다닌 학교,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구입하는 제품의 상표 등이 있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펴보면
이런 것에서 얻는 자부심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알 수 있다.
이제는 상표가 아예 옷이나 개인 용품의 거죽에 붙어 있는 경우가 많다. 갈퀴와 삽 상표까지 자랑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머지않아 그럴수도 있다. 아직은 아무도 착안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디자이너 이름을 선명하게 새긴 갈퀴와 삽까지 보란듯이 들고 다닐지도 모른다.
이런 사실은 자부심이 지닌 또 다른 문제점을 시사한다.
즉
우리는
자부심 탓에 이용당하기 쉽다.
자부심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아주 쉽게 조종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리섞음의 댓가로
막대한 돈을 뜯긴다.
얼마나 큰 돈을 갈취당했는지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낀다는 점에서
현재의 상황은
꽤 우스꽝스럽다.
요즘은
어떤 것에 얼마나 큰돈을 썼는지 떠벌리는
특정부류의 사람들에게
지위의 상징이 된다.
이런 것에서
매력이란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보면,
그렇게 돈을 쓰는 이들은
어리석다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속아 넘어가는 것 내지는
너무 순진하며
뭘 모르는 것이다.
속물적인 자부심이
거만한 측면에서는
제일이다.
자신을 과시하면
과연 깊은 인상을 줄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물론 누군가가 매료되는 반응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피상적이 매력에서
흥분을 느낄 뿐
속으로는 존경하지 않는다.
참모습이 어떨지
알기 때문이다.
과시하는 형태의 자부심에 만족한다면
아무에게도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나는 이같은 심리역동을 캐나다 어느 부자의 자택을 방문했을 때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엄청난 소유물이 얼마나 비싼지를 은근히 흘리곤 했다. 방문중에 넘칠만큼 가득 찬 대형곡물 창고에 갔는데, 그 주변에는 영양실조 상태의 캐나다 인디언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그곳에 곡물을 쌓아둔 것은 곡물 부족사태를 인위적으로 일으켜 세계 곡물가격을 높게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자가 자기 소유물을 자랑하고 있을때, 마르고 작은 다리를 한 아이들이 마음에 스쳤다. 그가 이룬 부에서 깊은 인상을 받기는 커녕 그의 가치관에 슬픔을 느꼈고, 자아 존중감이 없다는 사실에 연민을 느꼈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애처로울 만큼 피상적으로 보상받으려 할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값비싼 소유물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말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자부심이다.
값비싼 소유물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소유물에 대해 자부심,
강한 소유욕,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마음가짐이 문제다.
자부심에 찬 마음가짐으로 인해
공포가 들어설 여지가
생긴다.
위에서 얘기한
캐나다 부자는 값비싼 도난 경보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자부심은
다른 부정적 감정들처럼
죄책감을 낳는다.
죄책감은 공포를 낳는다.
공포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릴 가능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자부심에 차있다는 것은
곧 마음의 평화를 잃었음을 뜻한다.
자부심에 찬 물욕과 반대되는 마음이
소박함이다.
소박함이
소유물의 부족을 뜻하지는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소박함은 마음 상태다.
수백억 재산이 있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토지와 재물을 소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개인으로서의 그녀는 완전한 소박함의 상징이다. 소유물은 그녀가 세상에서 얻은 것을 보여줄 뿐이고, 그녀는 아름다움을 즐긴다. 그래서 단 한마디 비판을 들을 일도, 시샘을 받을 일도 없다. 무엇을 갖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어떻게 갖고 있는지, 즉 자신의 의식속에서 어떤 틀안에 갖고 있으며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중요하다. 여자의 사유지에는 도난 경보장치나 경비원이 없었다. 사실 누가 이를 지적했을때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아이고!
누가 도둑질할 만큼 꼭 뭐가 필요하다면
가져가도 돼요'
아무도 그녀의 것을 훔쳐간 적이 없다는 사실은 그녀가 자신이 가진 것을 타인과 기꺼이 나누고자 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녀가 소유물을 도둑맞지 않는 것은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자부심에 차 있지 않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소유욕과 애착은
자부심의 결과로 생긴다.
따라서
애착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애착이 있으면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생기고,
잃어버림과 함께
무의욕, 우울, 비탄의 수준으로 되돌아 간다.
차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차를 도둑 맞는다면 우리는 비통과 고통을 경험한다. 그러는 대신 느슨하게 차를 보유한 채로 차의 아름다움과 완성도를 즐기면서 차를 가진 것에 감사한다면 차를 잃어버려도 가볍게 낙심하게 될 뿐이다.
감사는
자부심의 해독제다.
높은 지능지수를 타고 났다면
자부심을 갖는 대신
감사하면 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신이 주신 재능에 큰 노력을 더해
이루어 낸 일에 감사한다면,
항상
평화로운 마음상태에 있으면서
아픔에 상처받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내것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마다
인간의 마음이
자부심을 느끼는 모습을 관찰해 보면
우습고 흥미롭다.
사람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도
터무니 없는 자부심을 갖는다.
그래서
그런 코미디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그와 관련된 자부심을 놓아버리는 일이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모순되게도 거꾸로 된 속물 근성에 빠져 있다. 그들은 싸게 산 물건이나 중고가게 섭렵에 자부심을 갖는다. 물건에 지나친 값을 치르는 사람들을 보고 털을 깎이는 양같다고 하면서 "바보는 머지 않아 돈과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말을 되뇌인다. 이 중고가게 속물집단 안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싸게 산 물건이 지위의 상징이다. 그들은 가장 싸게 파는 물건을 누가 찾아낼지를 두고 서로 경쟁할때가 많다.
관찰해보면
중고가게에 걸려 있던 옷 한벌은
우습게도
누군가의 내것이 된 후에야
비로소 값어치가 생긴다.
그 즉시 대단한 값어치가 그 옷에 붙는다.
어떤 사물에
내것이란 단어를 붙이면,
주인의식에 자부심이 따르게 되어
곤란하다.
자부심때문에
내 것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이라면
죄다 방어해야할 것처럼 느끼게 된다.
소유하려는 욕망을 놓아버리면
그런 취약성을 줄일 수 있다.
내것이라는 말 대신에
하나라는 말을 쓰면 된다.
나의 생각에 대해서도
하나의 의견이라고 여기면
어조가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때문에 얼굴을 붉힌다.
내것이라는 느낌 탓이다.
하나의 의견일뿐이라고 보면,
자부심에 찬 분노로
상처받을 일이 없어진다.
의견
의견을 살펴보면
정말 흔하디 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마다 수많은 주제에 대한
수많은 의견을 갖고 있지만,
그런 의견들은 시시각각 바뀌고
변덕이 죽끓듯 하는 유행과 선전에 항상 휘둘리는 것이다.
오늘은
"이런" 의견인데,
내일은 "저런" 의견이다.
오늘 아침에 내놓은 의견이 점심에 구식이 된다.
이렇게 자문해보자.
스치는 생각마다
"내것"이라고 여기고
입밖에 내서 상처받을 수 있는 여지를 넓히고 싶은가?
만인이
만사의 의견이 있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런 의견들이
질적으로 과연 어떤지를 잘 살펴보면,
의견에 더이상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삶을 되돌아보면
의견에 더이상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들은
모두 어떤 의견에 근거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생각이나 발상, 믿음은
모두 의견의 일종이라
각기 새로운 맥락에 놓고 보면
상처를 한결 덜 받는다.
각각을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생각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생각들은
내게 기쁨을 주기 때문에
나는 그런 생각을 좋아한다.
오늘
그런 생각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생각을 위해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다.
어떤 개념이 내게 도움이 되며
그것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한,
나는 그 개념을 좋아한다.
물론
더이상 기쁨의 원천이 되지 못한다면
아주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생각이다.
"자신의 생각에
자부심을 느끼는 대신에
생각을 그냥 사랑하면 어떨까?"
"어떤 개념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그 개념이
아름답거나 영감을 주거나
유용하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생각을 그런 식으로 보면
옳다는 자부심은
더이상 필요없다.
자신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그와 같이 여기면,
더이상 따지려 들지 않는다.
예를들어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사랑한다면
그의 음악을 더이상 방어할 필요가 없다.
친구도 같은 음악을
사랑하길 바랄 수는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기껏해야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어떤 것을 나눌수 없다는 사실에
가벼운 실망을 느낄 뿐이다.
이렇게 해보면,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나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더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내게서 방어하는 태도 대신
감사하는 마음을 느낀다.
내가 어떤 것에 감사를 느끼는 것이
그에 대해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리고
더이상 비판하거나 공격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농담을 던지거나 재미있다는 태도를 보일 뿐이다.
자부심이 없는 곳에는
공격도 없다.
이런 관점은 정치나 종교같은 영역에서 특히 가치가 있다.
정치나 종교는
예로부터 논쟁을 일으키기 쉬워
점잖은 자리에서는 짐짓 피하는 주제다.
자신의 종교를 사랑한다면
그 종교가 무엇이든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주제 자체를 피해야 한다.
자부심에서 비롯된 부산물로서
곧 분노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이 모욕당하지 않도록
하늘높이 들어 올려
논쟁의 사정거리 밖으로 두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아끼고 받드는 것은
그렇게 받듬을 통해 보호받는다.
어떤 일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하면
누구든 그에 대해 별로 할말이 없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 '
옳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는
내색을 비추면
즉시 눈에 쌍심지를 켜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상대방도
의견이 있기 때문이다.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선호하는 것이다.
즉
내가 어떤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고 즐기며
그것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치있게 여기면
평화로이 즐기게 된다.
자부심이 공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 낫다"는 암시 탓인데,
이 "더 낫다"는 암시는
자부심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자기가 하는 식이요법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자부심의 결과로 그들은 자신들의 식이요법과 영양학적 견해가 옳은지를 놓고 끊임없이 논쟁을 치른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이요법을 가족과 친구에게 강요하면서 도덕적으로나 건강면에서나 다른 어떤 방법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같은 식이요법을 하되
요법을 따르는 일 자체가 즐겁거나,
요법대로 하면 느낌이 좋거나,
어떤 영적 규율을 지키려는 이유가 있어서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결코
논쟁할 일이 없다.
방어할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식사법을 즐기기 때문에
그렇게 먹는다고 하면
그에 대해 별로 할말이 없지 않겠는가.
반면에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 식사법이 옳고,
우리 식사법은 잘못되었다고 암시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들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므로
틀림없이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자기의견에
자부심을 세우지 않을 때
의견을 바꿀 자유도 있다.
어떤 의견에
바보같이 자부심을 세운 바람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꼼짝없이 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바꾸거나 가던 방향을 바꾸고 싶었지만
자부심에 찬 입장을 취했던 탓에
꼼짝 못했던 경험 또한 너무 많다.
그렇다면 이제 자부심 항복에 대한 저항 중 하나인 자부심 그 자체라는 점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자부심에 찬 입장의 근본문제 중 하나로
공포가 있다.
우리는
어떤 사안에서 입장을 바꾸면
남들이 나를 보는 견해에 좋지 않은 영향이 있을 것을
두려워 한다.
자기 의견에 대해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주제나 상황에 더욱 깊이 파고들수록
의견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 살펴볼때는
어떠 어떠한 것으로 보이던 것이,
정말로 깊이 들어가면
아주 다른 것으로 밝혀질때가 많다.
어떤 일이 가능하리라는 공상에 근거해
공약을 내세운 정치인이
나중에 경악을 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지면서
문제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문제란 것은
원래 훨씬 복잡하다.
어떤 상황은
사회속의 다양하고
강력한 힘들이 합쳐진 결과로
결정된다.
정치인들이 할 수 있는 참된 약속은
각 문제에 깊이 들어가면서
모두의 이익을 위해
최선의 판단력을 발휘하겠다는 것이
전부다.
누구나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삶은 점차 발전한다는 점뿐이며, 자신에 대해서도 이점을 이해하면 나중에 환상이 깨지는 아픔을 면한다. 이것이 열린 마음의 입장내지 선가에서 말하는 "초심자의 마음"을 가질 때 보장받는 안전이다.
마음이 열려있다는 것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며,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기꺼이 의견을 바꿀 태세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잃어버린 대의를 방어하느라
꼼짝 못한채로 고통받는 일이 없다.
이런 점은
과학처럼 엄정한 사실에 입각하고
관찰가능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과학에서 다루는 것은
사실 가설이며,
이런 과학적 입장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속에 있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매우 놀랍겠지만
과학적 견해라고 하는 것도
일시적 유행이나 인기에 휘말리고,
기존 패러다임에 눈이 멀어 볼것을 못보고,
정치적 압력마저 받는다.
예를들어
과거에는 정신의학 분야에서
영양, 혈중화학수치, 뇌기능, 정신질환 간의 관계를 다루는 주제는
인기가 없었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과학자와 임상의는
자신이 비주류 집단에 속한다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주제가 가치있는 연구분야로 입증되자
다수가 공유하는 과학적 입장이 바뀌었다.
중요한 발견이 이루어졌고,
영양과 뇌기능 사이의 관계를 밝힌
기초연구 결과를 활용해 제품을 내놓는 일에
산업전체가 달려들었다.
이제 이 분야를 연구하는 임상의와 과학자는 "주류"집단으로 인정받고 있다.
자부심은
과학의 진보를 지연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자부심으로 인해
우리는 엄청나게 이로울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할때가 많다.
자부심에 찬 마음이 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면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우리의 내면은 강할수록
더욱 유연해지고
모든 이로운 것에 마음을 연다.
자부심이 눈을 가리면
전적으로 명백한 것을
보지 못한다.
자부심때문에 죽는 사람들
자부심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그들은
말 그대로
건강과 생명 그 자체를 포기한다.
마약 중독자와
알콜 중독자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자부심에 내재하는 부인"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가 있는 것이지
나는 아니야!라는 것이다.
자부심으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알아보지 못하며
극복에 필요한 도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부심에 찬 상태때문에
우리는 고립된다.
자부심을 놓아버릴 때,
고전중인 문제를 해결해 줄 도움이
삶에 나타난다.
이런 원리의 진실을
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어려움을 안고 있는 분야 하나를 골라
그와 관련된 자부심 전체를 철두철미하게 항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자부심을 놓아버리면
내게 가장 이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이 열린다.
"이제 자부심을 기꺼이 놓아 버려
남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자부심이 주는
가짜 안도감을 기꺼이 놓아버릴 때
우리는 용기, 자기 받아들임,
환희와 더불어 진정한 안도감을 경험한다.
첫댓글 자부심이 취할 수 있는 형태로는 과대평가, 부인, 동정을 사려 순교자인척하기, 독선, 오만, 뽐내기, 허세, 우월감, 고결한 척하기, 허영, 자기중심적 태도, 자기만족, 냉담, 의기양양, 속물근성, 편견, 경건한척하기, 경멸, 이기심, 가차없음, 버릇없음, 엄격함,잘난체하기, 자주비판하기 등이 있고, 자부심의 가벼운 형태로는 "대충 속단하는 태도"가 있다.
지적 자부심은 무지를 낳고, 영적 자부심은 영적으로 발전하고 성숙하고자 하는 이들 누구에게나 큰 걸림돌이 된다. 자신만이 올바르고 유일하게 참된 길속에 있다는 종교적 자부심은 모든 종교전쟁과 대립, 중세카톨릭의 종교재판같은 음울한 사건을 일으키는요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화근은 종교적 자부심으로 말미암아 특정 신앙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을 죽일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보는 태도다.
"자부심은 어디에 쓰는 것일까?
"자부심이 주는 이득은 어떤 것일까?
"나는 왜 자부심을 추구할까?
"자부심으로 무엇을 보상받으려는 것일까?
"상실감없이 자부심을 놓아버리면 나의 실상에 대해 어떤 점을 깨달아야 할까?
자부심이 주는 가짜 안도감을 기꺼이 놓아버릴때 우리는 용기, 자기받아들임, 환희와 더불어 진정한 안도감을 경험한다.
자부심을 놓아버릴때, 고전중인 문제를 해결해 줄 도움이 삶에 나타난다. 이런 원리의 진실을 실험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어려움을 안고 있는 분야 하나를 골라 그와 관련된 자부심 전체를 철두철미하게 항복하는 것이다.
자부심보다 높은 감정상태는 사랑하는 상태다. 가족, 국가, 성취 등 위에서 언급한 전부를 사랑하면 마음속에 가치의 문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방어하는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어진다. 의견 주장도 자부심의 일면인데, 진정으로 알아보고 알아주는 마음이 의견을 대체하면 논쟁을 벌일 여지가 없어진다.
자부심은 때로 성취할 동기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보다 높은 수준의 대체물은 어떤 것일까? 환희가 답이 될수도 있다. 성공적인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자부심 대신 환희를 얻는다면 문제가 될까? 자부심에는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욕망이 따르기 때문에 조만간 인정받지 못한다면 분노와 실망으로 상처받기 쉽다. 만약 어떤 목표를 이루려는 동기가 기쁨과 즐거움, 성취에 대한 사랑, 성취가 안겨줄 내적 환희에 있다면, 타인의 반응에 상처입지 않는다.
자기의견에 자부심을 세우지 않을때 의견을 바꿀 자유도 있다. 어떤 의견에 바보같이 자부심을 세운 바람에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꼼짝없이 했던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마음을 바꾸거나 가던 방향을 바꾸고 싶었지만 자부심에 찬 입장을 취했던 탓에 꼼짝 못했던경험 또한 너무 많다.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선호하는 것이다. 즉 내가 어떤 것을 가치있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사랑하고 즐기며 그것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가치있게 여기면 평화로이 즐기게 된다. 자부심이 공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더 낫다"는 암시 탓인데, 이 "더 낫다"는 암시는 자부심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어떤 것을 정말로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이 모욕당하지 않도록 하늘 높이 들어 올려 논쟁의 사정거리 밖으로 두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아끼고 받드는 것은 그렇게 받듬을 통해 보호받는다. 어떤 일에서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그 일을 한다고 하면 누구든 그에 대해 별로 할말이 없지 않을까?
정치나 종교는 예로부터 논쟁을 일으키기 쉬워 점잖은 자리에서는 짐짓 피하는 주제다. 자신의 종교를 사랑한다면 그 종교가 무엇이든 아무도 공격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주제 자체를 피해야 한다. 자부심에서 비롯된 부산물로서 곧 분노가 생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으아!!
드디어 자부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놓아버림의 지점을 찾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신의 생각에 자부심을 느끼는 대신에 생각을 그냥 사랑하면 어떨까?"
"어떤 개념을 사랑하는 것이 단지 그개념이 아름답거나 영감을 주거나 유용하기 때문이라면 어떨까?"
자부심 - 의견을 갖는 허영을 놓아버림!! 1개월 이상 화두로.....
의견을 갖는 허영 놓아버림!! 지속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