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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겨울 제주도 탐사
현 종 헌
내가 소속된 야생화 동아리인 “들꽃마을”에서는 2009년 2월 16일부터 19일까지 3박4일간 제주도로 야생화 탐사에 나섰다. 성인 11명과 아이 5명, 모두 16명이 오전 10시 김포 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속엔 내 아내와 딸도 끼어 있었다. 내 고향이지만, 부모님들이 인천에 살고 계셔서 아내는 두 번째 딸은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6년 전에는 성산포를 중심으로 동쪽 코스를 돌았는데, 이번에는 그때 남겨 두었던 서쪽 코스 중심으로 돌기로 했다. 한겨울에 무슨 야생화 탐사냐고 하겠으나 겨울 탐사는 눈 덮인 산야를 헤집는 그 나름대로의 묘미가 있다. 전과 달리 이번엔 회장 자격이 되어 떠나는 첫 탐사여서 나는 더욱 꼼꼼하게 일정표를 짰고 회원들에게 알찬 추억을 남겨 주고자 노력했다.
2월 16일,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신제주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한라산으로 향했다. 무리한 산행을 피해 해발 1,169m의 야트막한 어승생 오름(御乘生岳) 코스를 택해 등산했다. 정상을 올라가는 좁다란 등산로에는 눈이 발목까지 쌓여 있었으나 길이 잘 정돈돼 있어서 부담이 없었다.
꼭대기에서 본 제주도의 설경은 하얀 카펫을 깔아놓은 듯 깔끔했고, 일부 돌출된 부분들은 눈발이 햇빛을 받아 눈부실 정도로 반짝거렸다. 30여 년 전 대학 시절에 단짝 친구와 함께 올랐던 백록담 정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와 있는 듯해 단숨에 올라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정상 한 귀퉁이에는 일제 강점기 시절 말기에 일본군들이 파놓았다는 참호가 있었다. 아름다운 환상의 섬이라는 제주도에는 어딜 가나 이렇게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목적지인 온평리로 가는 길 중간에서 아이들을 위해 1시간가량 승마 체험을 실시하고, 온평리 입구에 있는 혼인지를 한 번 둘러보고 나서 큰댁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큰어머님은 올레에 핀 새하얀 문주란 꽃보다 순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우리를 반겨 주신다. 일행 중 일부는 예전 1차 탐사 때 낯이 익었다고 나보다 더 반갑게 큰어머님 곁으로 다가선다.
처음으로 아빠의 고향땅을 밟은 딸은 별다른 감정 표현도 없이 무덤덤하게 인사를 건네 내 심기를 돋우었다. 아무리 핏줄 간에 정분이 두터워도 멀리 떨어져 살면서 이렇게 한 세대가 지나가면 남처럼 서먹서먹해지는가 보다.
첫날 저녁은 큰어머님께서 진수성찬을 미리 차려놓으셨다. 식사를 마치고 해안가로 나갔다. 초저녁의 붉게 타오른 하늘과 아득한 수평선에서 몰려온 파도가 검은 현무암 기슭에 부딪쳐 하얀 알갱이를 부챗살처럼 뿌리며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민물이 솟아난다는 괸물(고인 물 = 용천, 湧泉)은 여전히 연푸른 단물을 담은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도는 다공질의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빗물은 땅 밑으로 스며들고, 그 지하수가 흘러내려 괸물처럼 해안에서 솟아나는데, 취락은 용천대(湧泉帶)를 따라 발달하여 열촌의 형태를 띤다.
우연히 망인(亡人)의 삭망 기제사를 치르는 집과 만났다. “어떵덜 지냄수꽈? 천복이 아들이우다.(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현천복 씨 아들입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응, 서울서 선생질하는 큰아들 왔구나.” 하면서 누군가가 반갑게 맞아 준다. 그들은 판돈이 많이 걸렸는지 잠시 쳐다보곤 윷판으로 눈길을 돌린다. 검지손가락 반만한 윷 네 개를 조그만 도자기 소주잔에 넣어 던지는 모습이 신기한지 일행은 얼른 자리를 뜨려 하지 않는다.
이튿날은 서귀포 행이다. 꿈과 낭만이 출렁인다는 선입견으로 모두 들떠 있었으나 나에게 제주도는 어느 곳이나 슬픔과 아쉬움, 즐거움의 추억이 한데 공존해 있는 땅이다.
아침 10시에 느긋하게 출발했다. 제일 먼저 들른 이중섭 박물관은 그 유명한 황소 그림도 없이 소품 30여 점이 전시된 게 전부여서 실망감을 주었으나 막상 나오려고 하니 뭔가 모르게 끌리는 아쉬움이 있다. 아까 보았던 전시관 입구에 앉은 초가 한 채로 다시 간다. 고작 1년밖에 살지 않았다는 그 집이 큰 그림자처럼 한국 미술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했다.
그곳에서 서귀포항의 한가로운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범섬 너머 저 멀리 바다 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이어도를 생각했다. “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 … ” 하는 해녀들의 노동요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우리 부모님이 찾은 환상의 땅 이어도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곳 인천이었다. 화가 이중섭도 잠깐 이 땅에 살다 어디론가 이어도를 찾아 떠나갔으리라.
제주도민의 서정이 가득 묻어 있는 노란 유채꽃이 유난히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제철이 되려면 한 달은 지나야 했지만 한겨울임에도 이곳은 워낙 날씨가 따뜻해서 유채꽃이 사방팔방 피어 있었다. 한국의 봄은 서귀포에서 시작하나 보다.
나는 정방폭포 가다가 일행에서 이탈하여 서귀포시 등기소를 찾았다. 지난겨울에 돌아가신 아버지 명의의 제주도 땅을 어머니 앞으로 등기 이전하기 위한 서류를 접수하기 위해서였다. 서류를 인천 법무사사무실에서 미리 준비해 온 터여서 접수하는 시간은 짧았지만 아버지의 영혼이 되살아난 것 같아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정방폭포는 세월의 시차도 없이 끊임없이 물을 내리퍼붓고 있었다. 옛날에 나는 서귀포시에서 징병검사를 받고 혼자 쓸쓸히 이곳을 거닐며 외로움을 달랬었고, 해군에 입대했다가 진해에서 귀향 조치 받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1년 동안 습작 시절을 보낼 때는 그야말로 저 폭포수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쏟아냈었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부모님 없는 곳에서 생활하기란 도시에서 떠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정방폭포에서 소철나무 가득한 주상절리와 외돌개를 거쳐 1시간 남짓 걷는 코스는 세상 한시름 풀어 버리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그 근처 효돈리에 있는 쇠소깍도 마찬가지였다. 신선의 세상이 따로 없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푸른 물결을 보며 계곡을 따라 걸어가면 속세의 고뇌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것 같다.
서귀포 시내에 들어설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던 먼나무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특히 이중섭 미술관 근처의 조그만 구슬 같은 빨간 열매를 가득 매달고 서 있었던 먼나무 꽃이 인상적이었다. 먼나무는 4 ․ 3 사건 때 제주도민을 평정한 기념으로 한라산에서 옮겨 심어 와 1971년 ‘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34년 만에 퇴출된 비운의 나무이다. 오늘날에 그 평정은 양민 학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어 간 곳은 표선 민속촌이다. 우리는 성남에서 예비 모임 때 이번 제주도 탐사 기간 중에 제주도를 상징하는 곳들을 두루두루 코스에 집어넣자고 했다. 섬, 오름, 4 ․ 3 사건 관련, 폭포, 야생화 단지 등이 있었는데, 이곳은 그 중의 하나였다.
표선 민속촌은 생길 때부터 지켜봤는데, 지금은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는 듯 했다. 내부를 제주도의 옛 모습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재현해 놓았고, 이것저것 볼 거리도 풍성했다. 중간에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연주하고 춤추는 풍물 행렬은 한겨울에 오그라들었던 어깨를 펴게 하는 신명나는 장면이었다. 또한 그 안에 야생화 단지도 조그맣게나마 있어서 우리 일행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곳과 맞붙은 표선 해수욕장으로 나와 잠시 겨울의 백사장 정취를 맛보고는 귀갓길에 나섰다. 5분쯤 후에 표선상고 앞에 사는 막내 이모부네 집 앞에 내려 아내, 딸과 함께 인사하러 들어갔다. 이모부 내외가 거동이 불편하여 몹시 안 돼 보였다. 고등학교 때 보았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전쟁 영화였지만 우리네 삶이 전쟁 아닌가. 나는 어렸을 때 두 분이 사랑하는 장면을 몰래 지켜봤고, 결혼, 쌍둥이 순산, 이모와 이모부의 순차적인 병 투병, 그리고 생의 내리막길 등 그들의 극적인 모습만을 보아왔으므로 그 영화의 시적인 장면들이 모두 이모부 내외의 삶과 닮아 보였다. 제주도 전역에 빨갛게 핀 동백꽃은 이모부 내외의 삶이 어린 꽃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비가 조금만 내려도 툭 하고 꽃봉오리가 땅에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오후 5시 반, 온평리에 돌아와 예약해 둔 해안가 횟집을 찾아갔다. 그 집 여주인과 나는 통성명을 하고 보니 온평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내가 열 살 때인 3학년 때 육지로 전학 가 추억은 없었지만 어쨋거나 40년 만의 해후는 색다른 기쁨을 주었다. 여주인은 우리 일행을 의식했음인지 나랑 아주 친한 척하며 다가서는 대인관계 솜씨를 뽐냈다.
귀가하는 밤길에 해안가에 있는 환해장성 터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원나라의 끈질긴 침공에 저항하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둘러 세웠다는 이 돌 성은 이곳에 남은 100m 남짓한 터가 전체 중 가장 잘 보존된 상태라고 하는데, 한눈에 보면 바람찬 마을을 지켜주는 섬쥐똥나무의 방풍림 행렬 같다. 성은 일견 튼튼해 보이지만 외부의 적들을 막아내는 데 무력하여 제주도민들은 그들로 인해 마구 짓밟혔고, 하여 우리는 이 섬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외지로 떠나야 했다.
세 번째 날의 마라도 행 코스는 나의 음모가 숨 쉬던 곳이었다. 내가 꼭 가고 싶어 했던 곳을 “들꽃마을”의 야생화 탐사라는 이름을 빌어 일정을 짰다. 일행 중에서 마라도라는 말만 나와도 나는 죄책감에 양심이 찔리곤 했다.
10시 배를 타기 위해 아침 7시부터 부산을 떨었다. 일찍 조반을 해먹고 짐을 챙겼다. 제주시에 사는 기사가 약속시간에 맞춰 8시 30분까지 온평리에 왔고, 우리는 1시간 남짓 되는 거리를 가기 위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빠르게 움직였다.
드디어 꿈의 모슬포 항에 도착했다. 어렸을 때부터 모슬포 말을 하도 들어서 나는 꿈속에서나 보는 곳인 줄 알았다. 모슬포 제1훈련소 앞을 지날 때 기사가 안내 방송을 하자 나는 귀를 의심했다. 논산 제2훈련소만 귀에 익어 그게 독특한 고유명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일제 때 만들어진 제1, 제2 하는 순서를 알리는 고유명사였던 것이다. 6 ․ 25 전쟁 때 북괴군의 공격에 쫓긴 국군이 이곳에 제일 먼저 훈련소를 만들었던 곳이란다.
내가 어렸을 적,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제주도에서는 바깥나들이가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3다도(三多島) ․ 3무도(三無島)의 3무에 “도둑, 거지, 바퀴”라는 말도 있었을까. (바퀴 대신에 대문을 넣는 게 일반적이다.)
바퀴가 없다는 것은 이동 수단이 더뎠다는 말이다. 외지 나들이를 나라 방(邦) 자를 써서 “외방(外邦) 간다”고 했다. 마을을 나가기만 해도 외국 나들이 같은 먼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의 동과 서를 가르는 아랫녘 기준점인 모슬포는 나에게 먼 이국땅과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내가 제주도 서쪽을 가본 것은 10여 년 전에 한림으로 장가 간 4촌 동생 결혼식 때가 유일했다. 그때 같이 갔던 우리 측 사람들이 그쪽 풍습에 맞추어 사돈을 대하느라 쩔쩔매던 모습이 얼마나 낯설었던지 … .
“가도 그만 말아도 그만.” 나는 어렸을 때 놀이하다가 이런 말을 자주 들었었다. 마라도 빗댄 언어유희인 셈이다. 그만큼 마라도는 무슨 일을 하다 말아도 될 만큼 버려진 땅이었다는 뜻일까.
모슬포 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가는 중간에 왼쪽으로 가파도가 해온 일 없이 오래 살아온 내 인생처럼 가늘고 길게 바다 위에 붙어 있었다. 안내자가 네덜란드의 하멜이 처음 표류해왔던 곳이라고 했다. 나는 문득 대학교 축제 때 “하멜표류기”라는 판토마임을 무대에 올려 연기하던 내 모습을 떠올렸다. 인간의 원초적 의지를 잘 표현해 냈다는 평을 들었던 일인극, 그 배경을 지날 때 내 가슴은 왠지 모르게 콩닥콩닥 뛰었다.
30분 만에 도착한 마라도. 부두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밋밋한 언덕에 잔디로 깔린 사방엔 원주민 그림자 하나 안 보이고, 나는 지금 이어도의 무릉도원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부르짖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좋아.’ 1997년 겨울 첫 해외 여행지였던 일본, 부산에서 밤배를 타고 도착한 시모노세키에 첫 발을 내디딜 때도 그랬었다. 아버지도 2004년 인천에서 7순 잔치를 치르고 나서 그런 말을 했었다. 이제 죽어도 좋을 때 우리는 생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서쪽은 밋밋하게 경사지며 해안과 맞닿았으나 동쪽은 절벽이 가파르게 치솟아 있어 섬이 융기할 때 바닥의 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실그러진 것 같았다. 벌판엔 인공으로 심어놓은 소나무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안가를 거닐다 자세히 보니 섬 가장자리로 선인장이 가득하다. 본도와 지척의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라도는 완전히 이국적인 정서를 간직하고 있어서 신비스럽다. 일행들은 그 주변으로 난 갯기름나물 관찰에 정신이 팔렸다.
주민이라곤 100여 명밖에 안 사는 조그만 이 섬에 교회, 성당, 절이 대형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학생 두 명을 놓고 수업하는 가파초등학교 마라분교도 흥미롭다.
“여행은 많이 돌아다닌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닙니다. 천천히, 부담 없이 한곳이라도 꼼꼼하게 보고 가면 더 유익할 거예요.” 회장의 음모가 또다시 발동한다. 나는 회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이곳에 좀 더 머물다 가기를 유도한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이럴 때, 회장이란 직책은 자신의 의지를 살려 중지를 모으기가 편해서 좋다.
마라도는 배로 들어와서 4인용 전기자동차를 이용해 1시간가량 돌고 출항하는 게 일반적인 코스인데, 우리는 야생화 탐사가 목적이었으므로 시간이 더 필요했고, 거기다 나는 이상한 환상에 사로잡히면서 최대한 오래 머물렀으면 했다. 섬 한 바퀴 도는 데 두 시간, 그리고 이것저것 감상하는 데 한 시간 정도가 더 소요됐다. 마라도에서 반나절을 보낸 것이다.
나는 마을 풍경을 머릿속에 스케치해 두었고, 바람의 향훈을 가슴에 담았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한라산과 그 주위로 꿈틀거리고 있을 제주도민들의 추억을 기억 속에 꼭꼭 여며 두었다.
일행 중 한 여선생님은 그 귀한 시간에 마라도를 전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하여 입도를 거부하고 모슬포에서 사우나를 했다. 두어 시간 예정했는데, 우리의 지체 시간 연장으로 인해 4시간을 꼬박 수증기 속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여행이란 두 번 세 번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인 것을. 나는 그녀를 향해 속으로 ‘바보!’라고 외쳤다.
모슬포 항으로 나와 인근에 있는 알뜨르 비행장 터로 갔다. 이름만 들어도 평화로워 보이는 벌판에 단단한 시멘트로 만들어진 격납고가 드문드문 엎드려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으면 그곳에 뭐가 있는지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교묘히 숨어 있었다. 제주도민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시설물들이다. ‘알뜨르’란 제주도 사투리로 ‘아래쪽 들판’이란 뜻이다.
일본은 1926년부터 제주도에 대규모 비행장 건설을 시작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대정읍에 알뜨르 비행장이 완공됐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이곳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약 700 km 정도 떨어진 중국 난징(南京)을 폭격했다. 폭 20m, 높이 4m, 길이 10.5m 규모의 격납고가 총 20개 건설되었으며, 훈련기인 잠자리비행기(아카톰보, Akatombo)를 숨겨두었었다고 한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은 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있었고, 이제 곧 본토가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B29기가 연일 일본 본토를 공습해대고 있었다. 일본은 제주도를 마지노 선으로 삼고 본토 사수를 위한 ‘결7호작전’을 폈다. 정예병력 6만~7만 명을 제주도로 이전시켰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5만 명이었다.
특히 모슬포는 주요 전략 기지로서 전투기와 함정이 집결해 있었다. 태평양의 연합군 공격기가 일본을 향해 날아가면 이곳 레이더 기지에서 그 사실을 감지해 본국으로 무전을 보내 신속히 대응하곤 했다.
나는 알뜨르 비행장을 떠나 잠깐 송악산(宋岳山:84m) 휴게소에서 쉴 때 송악산 기슭 바위에 바람구멍처럼 송송 뚫린 일본 함정을 숨겨 놓던 바위도 관찰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남들보다 앞서 갈 수 있다며 그 광경을 몰래 관찰하고 사진 촬영한 것을 나 혼자만의 비밀처럼 즐거워했다. 아침에 모슬포 항에 도착하기 전, 사진 속에서만 보아오던 뿌연 안개 속에 우뚝 선 산방굴사의 황홀한 풍경을 보았을 때에도 아무 말 않고 감정을 자제했었다.
너무 피곤한 하루였다. 온평리에 오니 저녁 7시 반이 됐다. 마당에 숯불을 지펴 제주도 토종 흑돼지를 구워 먹으며 허기를 때웠다.
큰어머니는 낮 동안 바다에 가서 해산물을 따왔다. 문어 반찬과 성겟국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다. 어릴 적의 성게는 일본에 수출한다고 해서 입에 대보지도 못한 귀중한 먹을거리였었다.
요즘 물질해서 이런 조그만 새끼들을 잡아들이면 벌금을 300만 원이나 부과한다고 했다. 나는 벌금보다도 괜히 우리들 때문에 바다에 나갔다가 사고나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다시는 이러지 마시라고 했다. 차라리 일반 콘도에서 숙식을 해도 비용상으론 큰 차이가 없을 텐데 말이다.
엉뚱하게, 마지막 날 이번 탐사의 하이라이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 중에 비어 있는 하루 코스를 제대로 잡지 못해 설왕설래하고 있을 때 기사가 끼어들어 4 ․ 3 사건 기념관과 한림의 방림원을 추천했었다. 우리가 야생화 모임 단체라는 것을 알고 잘 알려지지 않은 야생화 전시장을 일러주었던 것이다.
드디어 3박4일의 일정을 마치는 마지막 날이 왔다. 아침부터 우리는 바빴다. 집에 한기가 스미고 좁은 느낌이 있어서 젊은 여자 두 명은 이웃 마을 번화가인 동남의 사우나 시설에 가서 잠을 자고 왔다. 옛날에는 먼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자장면도 시키면 온다고 했다. 지금 보면 7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그곳이 어렸을 때엔 왜 그리 멀게 느껴졌는지 …… .
패키지 여행처럼 동남 가서 장보기에 나섰다. 경인지역에서도 인기 끌었던 제주산 고등어를 한 집당 두어 박스씩 차에 실었다. 그리고 하천리 고모네 댁에 가서도 한라봉을 서른 박스 샀다. 우리는 싸고 싱싱한 것을 먹고 농어촌 가정에는 소득을 증대시키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기사는 제주도 내륙 깊숙한 곳으로 4 ․ 3 사건 기념관이라며 우리를 안내했다.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이곳에 올 때부터 하늘도 우리의 마음을 아는지 궂은비를 뿌려댔다. 웅장한 건물 속에 4 ․ 3 사건의 기념물들이 체계적으로 잘 전시돼 있었다. 나는 사건의 전말을 잘 알고 있었으나, 빨치산이 숨어 지내던 동굴 형상과 영상물을 실제 눈앞에서 대하니까 그때의 모습이 실감 있게 다가와 감동이 더했다. 그러나 4 ․ 3 사건에 대한 제주도 학생들의 시화전 ․ 사생대회 작품들이 전시된 것을 보면서 어린 학생들에게 또 다른 모습의 이데올로기를 심어주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했다.
근처에 있는 절물이라는 삼나무 숲 단지 앞에서 빵과 우유로 점심끼니를 때웠다. 우리 처지가 불쌍해 보였지만 그 음식물들 안에는 이번 알찬 여행에서 얻은 나그네의 풍요로움이 가득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어 제주시에 있는 자연사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제주도에 올 때마다 그곳엔 무엇이 있을까 하고 매우 궁금해 했는데, 막상 가보니 적당한 공간에 제주도의 삶을 알리는 적당한 물건들이 전시돼 있었다. 일행 중의 한 명은 일본 오사카에서 보았다는 대형 수족관을 들먹이며 이곳의 규모가 양에 안 참을 아쉬워했다.
마지막 코스인 방림원을 향했다. 한림 가는 데 약 40분이 걸렸고, 목적지는 한림읍에서도 20분가량 더 들어갔다. 차가 있어도 야생화 매니어가 아니면 가기 꺼릴 정도로 교통이 좀 험한 편이었다.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 우리 일행은 천국에 왔다는 느낌을 받았다.
꽃, 꽃, 꽃, 이곳저곳 둘러볼 때마다 사방이 죄 꽃 천지였다. 바위도 꽃, 건물도 꽃, 사람들도 꽃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지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 기분은 방림원 원장과 대화하는 시간에 절정에 달했다.
한 인간의 조그만 야심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일본 가서 철쭉꽃 축제를 보던 중 분재의 아름다움에 반해 야생화에 몸을 바치게 된 평범한 주부의 성공담이 우리 일행의 심금을 울렸다. 그녀는 꽃처럼 빙 둘러싸인 우리들에게 방림원 만든 과정과 꽃의 철학을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음이온이 발산된다는 방림굴 만드는 과정도 인상적이었다.
“주인이 놀면 일꾼들도 놀아요.” 나를 감동시키는 그 한 마디. 방한숙 원장님은 참으로 야생화를 사랑하고 아끼는 분이었다. 헤어질 땐 손수 집필했다는 “한국의 양치식물” 책 5권을 친필 사인을 한 후 선물했다. 무려 500쪽이 넘는 우리나라의 고사리 사전이었다.
나그네들의 시름을 덜어주느라 비는 투명한 음을 뿌리며 계속해서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모든 여정을 마쳤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번 일의 실무를 추진했던 부회장은 욕심이 많아 귀경할 비행기 표를 저녁 8시 것으로 예약해 놓았다. 한 시간이라도 더 제주도를 감상하려는 의지가 배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최선을 다한 여행 시간을 보냈으므로 더 이상의 여력이 없었다.
신제주에 다가가기 전,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호젓한 횟집에서 우리는 호식을 했다. 여행 와서 돈 아끼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호기를 부려보는 것도 좋아 보인다. 4일간 진종일 따라다니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던 5명의 어린이들이 이번에는 완전히 자신들의 시간이 왔다는 듯 호들갑을 피워댔다.
식당의 통창에는 바다 풍경이 담겨 있었고 그 위로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몽골군에 저항하던 삼별초의 화살 공격이거나 4 ․ 3 사건 때 민초들을 향해 빗발치듯 쏘아대던 총탄이라고도 생각했다. 아니면, 육지에서 힘든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 식구들을 몸서리치게 한 외부의 끊임없는 공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공항 가는 차에 오르기 전, 나는 회원 한 명과 대화를 나누었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비행기가 뜰까요?”
“바람, 안개만 없으면 뜨지요. 비행기는 먹구름 위를 날거든요.”
그리고 나는 덧붙였다.
“비행기가 하늘 속을 날 때마다 나는 유채꽃 꽃 이파리가 풀풀 날리고 있다고 상상해요. 그 속에는 지난겨울, 고향을 그리워하다 객지에서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의 영혼도 들어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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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에구구~~~~~~ 현선생님 아버님 승천 하시고 오랜만에 고향을 가시더니 .........
들꽃 회원이 되어 탐사에 끼고싶습니다만... 직업도 바꿔야할것 같아서 ㅠㅠ 세세한 묘사에 직접 본듯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