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사람
영국의 한 청년이 뒤늦게 하나님을 만나 큰 회심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회심을 하고 나니 오히려 이전의 삶보다 신경 쓰고 노력할 것이 많았습니다.
회심 후 1년간의 삶을 돌아보며 청년은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더 노력해야 할 결심문을 70가지나 적었습니다.
다음은 그중 일부입니다.
- 결심문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다시 돌아와 회개하고 시작하자.
- 하나님의 영광과 나 자신의 유익, 기쁨에 최상의 도움이 되는 일들을 평생동안 해내자.
- 한순간의 시간도 낭비하지 말고 유익하게 사용하자.
- 다른 사람의 실패와 죄를 정죄하지 말고 나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자.
-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평소에 찾아보자.
이 청년은 영국의 영적 대각성을 이끈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입니다. 모두가 쾌락을 좇으며 세상을 따라 살아가고 있을 때 세상에서 떨어져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주님은 목사님을 통해 한 나라의 영적 상태를 일깨우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깨어있는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나라를 변화시킵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한 사람이 바로 내가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아멘!!
주님! 언제나 말씀으로 깨어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결심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2천 원의 헌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도시 샬럿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헌금을 정산하던 위원들은 이상한 내용이 적혀있는 작은 봉투를 발견했습니다.
편지 한 편에는 “금액이 적다고 화내지 말아주세요”라고 적혀있었고 다른 쪽에는 “저는 노숙자라 돈이 많이 없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편지봉투 안에는 10센트, 5센트짜리 동전들이 수북했는데 한국 돈으로 약 2천 원 정도의 금액이었습니다. 아마도 구걸로 모은 것 같았습니다.
교회에서는 매주 주일에 노숙자들을 초청해 무료로 식사를 대접하는데 그 식사에 고마움을 헌금으로 표시한 것 같았습니다.
노숙자의 마음씨에 목사님과 성도들은 큰 감동을 받았고, 비록 적은 돈이지만 다시 노숙자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데 헌금을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사연은 노숙자가 보낸 편지를 찍은 사진과 함께 SNS를 통해 퍼져나갔고, 많은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주며 노숙자들을 향한 구호의 손길이 늘어나게 만들었습니다.
마음이 담긴 작은 헌금은 주님께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감동이 됩니다.
주님이 주신 큰 복을, 주님이 주신 감동에 따라 선교를 위해, 구제를 위해, 교회 건축을 위해,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릴 믿음을 갖게 하소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헌금을 드립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걱정을 이기는 무기
말씀을 분명히 믿고 따르는 데도 마음에 염려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까요? 두려움을 이겨낼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이 말한 ‘그리스도인의 염려를 막을 수 있는 8가지 안전장치’입니다.
1. 기도 - 문제를 마음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 내어놓으라.
2. 여유 - 문제를 제대로 파악해야 제대로 기도할 수 있다.
3. 행동 - 고민하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해결을 위한 행동을 하라.
4. 정리 - 걱정 목록을 만들어보면 대부분 생각보다 별일이 아닐 것이다.
5. 측정 - 어떤 분야의 걱정이 가장 많은지 알아보고 집중적으로 기도하라.
6. 집중 - 하루를 책임져주시는 주님을 믿고 최선을 다해 하루를 살아가라.
7. 전파 - 동역자들에게 기도의 도움을 구하라.
8. 만족 -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라.
무엇 때문에 걱정하고 계십니까?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계십니까?
주님이 해결하실 수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으며, 나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고민하지 말고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을 믿으니 근심하지 않게 하소서.
걱정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사랑을 전하라
몇 년 전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규모 7이 넘는 강진이 일어났습니다.
폐허가 된 카트만두를 위해 전 세계의 많은 곳에서 구호물품과 자원봉사단이 찾아왔는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난 뒤 수많은 티베트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개종을 결심한 숫자는 티베트의 전통 불교인 ‘라마교’의 승려 60여 명과 대략 20만 명의 티베트 국민이라고 합니다.
대참사가 일어난 폐허를 찾아 사랑을 보여준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이들은 종교를 가리지 않고 힘든 사람들을 위로해주고 함께 기도해줬다고 합니다.
구호가 끝나고 사람들은 돌아갔지만 그들이 뿌린 사랑의 씨앗이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평생 라마교를 믿었던 한 승려는 개종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다른 종교인들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에 힘을 쓰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을 세상에 조건 없이 전하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주변의 힘든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도웁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주께 부르짖으라
내전을 피해 중동에서 보트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오던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작은 보트에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타 있어서 보기만 해도 위태로운 보트들이 에게해를 건너 그리스를 향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날이 어두워지며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여기저기서 보트들이 뒤집히기 시작했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데 한 보트에 탄 난민들이 다가오는 폭풍우를 보고 주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인이었던 그 보트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을 크게 외치는 다른 보트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거짓말처럼 폭풍이 사라지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기도를 하던 난민 중 몇 사람은 폭풍 속에서 빛이 나는 어떤 형체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기적적으로 사라진 폭풍 때문에 난민들은 무사히 그리스에 도착하게 됐고, 당시 이 장면을 목격한 난민들은 폭풍우가 사라진 것이 기도 때문이며,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는 것을 느꼈다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일화는 그리스에 무사히 도착한 난민들의 간증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기적과도 같은 일들로 구원하십니다.
암흑 속에서 길을 잃을지라도, 망망대해에서 거친 풍랑을 만날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짖으십시오. 아멘!!
주님! 모든 사망의 손에서 건지는 주님의 능력을 믿게 하소서.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수록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하나님을 찬양하라
조니 에릭슨은 다이빙을 하다가 스프링보드에 척추를 다쳐 전신 마비가 됐습니다. 목아래가 마비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1주일에 한 번씩 어떤 목사님이 병실을 찾아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며 전도지를 주고 갔습니다. 사고가 나서 손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한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게 괘씸했던 조니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내가 이렇게 됐나요? 그러면 차라리 내버려 두라고 전해주세요. 당신의 그 잘난 하나님한테 말이에요!”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이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아주 놀랍게 쓰임 받을 겁니다.”
목사님의 이 한 마디가 조니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도 최선을 다해 감사하며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조니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유명한 화가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고 그녀가 그리는 그림에는 “주님만을 찬양하라”라는 뜻의 ‘PTL(Praise the Lord)’이라는 싸인이 쓰여 있습니다. 그 후 그녀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고, 영화화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모 방송사 TV를 통해 방영돼 전도에 크게 쓰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내 인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막힌 담도 허물며 길을 만들어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아멘!!
주님! 성도의 본분인 감사와 찬양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소서.
감사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감사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모든 영광을 주님께
예전의 한 영화에 기도와 관련된 이런 장면이 나온 적이 있습니다.
로또를 산 사람들이 모두 1등에 당첨됐는데 그 결과 1등 당첨금액이 복권을 구입한 금액보다 적었습니다.
로또를 산 사람들이 1등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스포츠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유머가 많이 존재합니다.
“한국과 미국이 경기를 할 때 양쪽 성도들이 똑같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줄까?”와 같은 내용들입니다.
미국 프로농구 NBA의 슈퍼스타인 스테판 커리는 매 경기마다 기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비슷한 질문을 남긴 팬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이기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든 지든 경기를 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생기는 모든 영광들을 주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의 바람을 이루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과 안위를 위해 구하는 잘못된 기도를 멀리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일들을 구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며 열매 맺는 나의 삶의 모든 것이 주님께 영광으로 드려지기를 소망하십시오. 아멘!!
주님!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올바른 기도로 올바르게 주님께 구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은혜로운 시험
미국의 신학대학인 한니발 라그레인지 대학의 교육 관련학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마지막 시험시간에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뒤 직접 시험지를 나눠줬습니다.
잠시 뒤 눈을 뜬 학생들은 시험지를 보자마자 눈을 의심했습니다. 모든 문제에 답이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험지의 마지막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게 제 강의의 마지막 시험이고 여러분 모두는 A학점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학생이 A학점을 받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제가 그렇게 되도록 시험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노력과 자격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리는 것이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여러분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주세요.”
시험이 끝나고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기고 강의실을 떠났습니다.
“모든 사역을 할 때 은혜를 더하십시오. 특히 청소년들을 말이 안 통한다고 막 대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그들을 돕다 보면 자연스레 아군이 되어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저의 강의는 성공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내가 아닌 전적인 주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모든 것을 주시고, 모든 것을 용서하신 주님의 귀한 은혜에 감사하며 평생을 섬기며 사십시오. 아멘!!
주님! 모든 은혜가 주님의 도우심임을 깨닫게 하소서.
주님께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베푸는 삶을 살아갑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아주 특별한 크리스마스
『우리 가족은 크리스마스 때면 항상 함께 시간을 보내왔다.
아이들이 많이 자라 대학 입학 등을 앞두고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가족들과 성지 순례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가족과도 같았던 칼 파워스가 생각나 그에게도 성지순례를 함께 하자고 초청했는데 그는 ‘빌리가 나에게 침례를 준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함께 하겠다’고 했다.
1978년 12월 25일 성탄절, 칼 파워스는 막내 아들 김요한과 함께 이스라엘 요단강에 들어와 침례를 받았다. 그 때의 감동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후에 칼 파워스는 수필집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나는 언제나 빌리와 트루디를 물질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대로 힘껏 도울 것이며, 나의 마음에 빌리가 떠오를 때면 1초든, 5분이든, 1시간이든 기도할 것이다. 빌리는 내가 지금까지 자신을 도와준 것에 대해 ‘하늘의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나는 결코 보상을 위해서 고귀한 삶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내가 빌리를 위해 한 일은 진실하고 변치 않는 사랑, 내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태어나서 이뤄졌던 것이다.’
늘 겸손하게 베풀고 사랑을 전해 주었던 칼 파워스,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성탄절에 침례를 한 그 감동은 지금까지 잊을 수 없다. 이제 그는 하나님 곁으로 가서 이 땅엔 없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한다.』 - 김장환 목사 3E인생에서 발췌
크리스마스의 가장 놀라운 기적이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가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잊지 말고 성탄을 맞아 아직도 이 기쁜 소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십시오. 아멘!!
주님! 성탄의 기쁨이 매일 내 안에 머물게 하소서.
성탄기념 예배에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합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진리의 기준
아랍의 한 왕이 이웃 나라와 전쟁을 준비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떨지 궁금했던 왕은 나라의 모든 예언자들을 불러 전쟁을 해야 되는지를 물었습니다.
400명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승리를 허락했다며 당장이라도 전쟁을 시작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한 선지자만은 ‘하나님이 전쟁을 원하시지 않으며 만약 전쟁을 일으켰다가는 죽고 말 것’이라며 경고했습니다.
왕은 어느 말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없어 무작정 많은 예언자들의 말을 따라 전쟁을 일으켰지만 반대한 한 선지자의 말에 따라 전쟁에 크게 패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열왕기하에 나오는 미가야 선지자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의 욕망을 따라서,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법으로 인정되고, 또 어쩔 수 없다는 핑계 아래 묵인되고 있는 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기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잘못된 의견을 따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인 성경 외에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바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설령 온 세상 사람들이 다 거짓의 편에 선다 해도 변하지 않는 성경만을 믿고 따르는 제자의 삶을 지키십시오. 아멘!!
주님! 말씀이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인생의 기준을 언제나 주님의 말씀으로 삼읍시다.
<김장환 큐티365/나침반출판사>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아’를 성경에 기록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억되게 하셨습니다. 헷사람 우리아는 다윗의 용사였습니다.(대상 11:41) 그러나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취하고, 요압 장군을 통해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게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아의 인생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사무엘하 12장에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우리아를 가난한 사람,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를 가진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아의 아들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역대상 3장 5절은 ‘시므아와 소빕과 나단과 솔로몬 네 사람은 다 암미엘의 딸 밧수아의 소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솔로몬의 형은 태어난 지 이레 만에 죽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위로 세 명의 형이 기록돼 있는데, 이 세 명의 아들은 우리아의 아들이라고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게 하셨습니다.
이렇듯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부족할지라도 기억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됩니다.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교회에서 독특한 존재
교계에는 아주 독특한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목사의 아내입니다. 사모라고 불리는 목사의 아내는 분명 교회의 직분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마치 직책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면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명시된 지위와 역할이 있지만 목사 아내인 사모는 막연한 전통에 의해 정의되는 경향이 있기에 교회마다 그 역할이 다릅니다.
제 아내를 볼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아내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할 때 스스로 정의할 수 있을까. 혹시 목사인 남편으로 인해 타의로 정의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이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는 관계 속에 존재하고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때때로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목회자의 아내로 사는 것은 일종의 소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다운 이름을 얻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 속에서 존재의 애매함이 짐을 더욱 무겁게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런 면에서 누구에게나 삶이 가벼운 건 아니지만 특히 목사의 아내로 사는 모든 분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떨기나무 인생
지난주 영성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충북 제천의 ‘세계기독교박물관’ 방문이 첫 일정이었는데, 이스라엘 지형을 5000분의 1로 축약해 놓고 성서 속 지형과 사건, 동식물과 풍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떨기나무에 눈길이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처음 부르실 때 나타났던 그 떨기나무입니다. 마치 가시덤불처럼 볼품 없는 나무였습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서 있고 떨기나무는 불은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는 놀라운 광경을 모세는 목격합니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바짝 말라서 태양 빛이 내리쬐면 자연 발화해서 순식간에 사라지곤 한답니다. 애굽의 바로 치하에서 노예로 힘겹게 살다가 스러져가는 히브리 노예들을 닮았습니다. 바로(파라오)는 태양신의 아들이라지요. 떨기나무를 순식간에 태워버리는 태양 빛은 바로를 상징하겠군요. 그런데 모세가 본 놀라운 광경은 바로로 상징되는 태양이 아무리 내리쬐도 하나님께서 지키시면 태워 없앨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떨기나무 같은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야 합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세상에는 참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은 칡 갈(葛) 자와 등나무 등(藤) 자로 되어 있지요. 갈등이란 칡과 등나무 같다는 말입니다. 칡은 다른 나무를 오른쪽으로 돌면서 타고 올라갑니다. 반면에 등나무는 왼쪽으로 돌며 올라가지요. 그래서 칡과 등나무가 함께 자라면 뒤엉켜버립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것이 적대하며 충돌하는 것이 갈등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이 참혹한 전쟁의 밑바닥에는 유대교와 이슬람의 뿌리 깊은 갈등이 있지요. 그런데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그들은 한 핏줄이요 형제자매가 되는 것 아닙니까. 사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은 누구나 아담의 자손이요 형제자매입니다. 형제자매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시편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시 133:1, 새번역)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형제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평화를 빕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어떤 죽음
지난해 9월 19일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200여 국가와 지역을 대표하는 해외 귀빈 500여명이 참석한 금세기 가장 큰 규모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장례식 당일에는 무려 100만명이 운집했고 방송과 유튜브를 통해 수억명 넘게 현장을 지켜보며 여왕의 마지막을 깊이 애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기다렸던 죽음도 있습니다. 1715년 루이 14세는 72년간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경제를 파탄시켰습니다.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는 말을 남겼지만 국민은 냉담했고 역사는 그의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기록합니다.
장례식에 가보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잘 사는 것만큼 어렵고도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유익한 삶이고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루하루 멋진 죽음을 만들어 가며 승리하는 하루 보내시길 축복합니다.
안광복 목사(청주 상당교회)
서사의 위기
독일 베를린 예술대학 철학 교수인 한병철 교수는 저서 ‘서사의 위기’에서 오늘날 스토리 중심의 사회는 서사를 잃어버린 정보의 시대라고 비판합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되는 이야기는 서사를 상실한 개인의 정보에 불과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아닌 커뮤니티로, 공감이 아닌 정보교환으로 변질하고 있음을 우려합니다. 삶은 떨어진 정보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연결된 오늘이어야 합니다. 또한 한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내 인생보다 더 큰 서사에 연결될 때 삶의 의미가 생깁니다. 스펙보다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 스토리도 단지 개인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여전히 거대한 하나님 나라의 서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서사와 나의 개인 이야기가 만날 때 비로소 삶의 의미가 생깁니다. 개인 스토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서사와 만나야 합니다.
고상섭 목사(그사랑교회)
예배자의 길
다윗은 목동이요 시인이요 음악가이자 최고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의도적으로 밧세바의 남편이자 충신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또 인구조사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때, 자신의 고통은 피하면서 백성을 전염병으로 죽게 한 왕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내 마음에 맞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인즉 다윗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답을 구하면서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배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예배는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다윗이 바라는 한 가지 소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에서 규가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떠나지 않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유다 지파에 허락한 왕위의 언약을 다윗을 통해 열어주셨습니다. 다윗은 예배자로서 주님과 마음이 하나 되는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지성호 목사(서울이태원교회)
칸막이가 있는 삶
우리는 대개 닫히지 않은 오늘을 살아갑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일이 올 걸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은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고 말씀합니다.
현실적으로 하루에 끝낼 만한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가정이나 회사, 그리고 어떤 공동체든 미래에 대한 설계가 있고 발전을 위해 적합한 계획을 세우는 건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을 전제하지 않고 오늘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경이 본래부터 오늘만 살라고 가르치는 건 아닐 겁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우리에게 시간적 의미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분리하라고 말씀하는 듯합니다. 오늘의 부정적 영향력이 마음에 남아 그 영향력으로 내일을 해석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 칸막이 역할을 하는 필터 하나 껴 둬서 넘어가야 할 것과 차단해야 할 걸 적절히 구분하는 지혜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조주희 목사(성암교회)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은 늘어간다~.” 1980년대 한국교회에서 널리 불리던 복음성가의 가사입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세계에는 평화의 소식보다는 전쟁의 소문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 이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하마스 간 전쟁의 확산 움직임이 전 세계를 공포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가자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주민에게는 대피 경고가 내려졌습니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피란갈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은 이집트 접경지역인 시내 광야 쪽이라는 것입니다. 이집트가 이들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더욱이 광야요 사막 지역이라 대피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래서 피란을 가지 않고 현재의 거처에서 이스라엘 공격을 피해 보겠다는 이들도 적지 않나 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던 약속의 땅과 그 땅을 향해 가는 통로였던 팔레스타인, 시내 광야의 북단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에 가슴이 아픕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의 평화(샬롬)가 조속히 임해서 전쟁의 소문은 그치고, 아름다운 평화의 소식이 전해지길 기도합니다.
김종구 목사(세신교회)
내 뒤로 물러가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참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싹 잡아당기고 항의했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막 8:33, 새번역)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막 1:17)고 말씀하셨지요. ‘나를 따라오라’는 말과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오피소 모우’라는 그리스 말을 각각 다르게 번역한 것이지요.
따르는 것은 곧 뒤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뒤로 물러가지 않고서 어떻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마땅히 예수님의 뒤로 물러가야 합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에 서서 나대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 사탄입니다.
서재경 목사(수원 한민교회)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영화를 보면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하나하나 캐릭터로 묘사했습니다.
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 등 감정이 ‘라일리’라는 주인공의 머릿속에 본부에서 협업을 합니다.
이 다섯 감정은 바쁘게 일을 하는데 어느날 실수로 기쁨과 슬픔이 본부를 이탈하는 상황이 생겨버립니다. 그러자 주인공의 마음속에 버럭, 까칠, 소심만 남아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됩니다.
기쁨과 슬픔이 엄청난 기억의 미로 속에서 본부로 돌아가는 여정입니다.
모든 감정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다름이 하나가 되어서 바로 한 사람을 형성한다는 것인데요.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쁜•우울한•슬픈•화내는•까칠한•협력적•화평한•소심한 사람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나와 성격이 다르다고 해서 선을 긋거나 차별하는 행동은 주의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예로들면 자동차 부품 하나만 가지고 자동차라고 하지는 않지요. 모든 부품들이 설계도에 맞게 잘 조립되어 시동을 걸게 되면 모든 부품들이 하나가 되어서 움직일 때 비로소 자동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성격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서 상처를 싸매고 하나가 된 교회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나타낼 때에 비로소 ‘교회’라는 단어가 완성 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명사인 동시에 '동사'입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움직여야 자동차입니다. 하지만 교회(성도)가 교회 안에서만 교회라면 진정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온 처음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은 어땠습니까?
다양한 계층, 지역이 있었지만 복음으로 하나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영향력을 성도들과 성도들을 넘어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증거가 우리 자신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를 넘어서서 주변에까지 교회의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목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다양한 계층을 복음으로 하나되게 하는데 힘이 있습니다.
4.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에베소서 4:4,7,16
한 공무원 기관장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간부들의 자세에 따라 청렴도는 결정된다.
간부들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면 청렴도가 급강하한다.
살다보면 돈과 양심을 선택해야 순간이 오는데
돈을 선택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끝난다.
하지만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고 공무원으로서 깨끗하게 하겠다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평생을 깨끗한 공무원으로 끝을 보게 된다.
언젠가 100억을 줄테니 미국으로 떠나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그 때 100억을 받았으면 골프 치다가 벼락맞아 죽었을 거다.
공직을 택하는 순간 돈하고는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 되어 버렸다.
공직을 택하고도 돈과 친숙해지려고 하면 공직생활 감옥생활로 변한다.
불안하게 사느니 없더라도 마음 편안하고 떳떳하게 사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비단 공무원 뿐만 이겠습니까?
모든 직종 특히, 더욱 양심적인 책임이 있는 크리스찬에게는 매우 심각하게 적용해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을 지지하는게 아니라,
그의 말이 주는 메시지가 깨달음을 주는게 있어서 나누어 봅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잠22:1
심리학자 롤로 메이(Rollo May)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용기에 대해 말합니다.
첫째로 타인의 도움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건강을 바탕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신체적 용기입니다. 이 용기가 있어야 나를 둘러싼 환경과 싸울 수 있고 더 나아가 위급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을 돕거나 의로운 일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 강도 만난 자를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준 선한 사마리아 인이 보여준 용기입니다.
둘째로 악을 거절하고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도덕적 용기입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지갑을 주웠는데 그 속에 2천 달러가 있었습니다. 파출소로 가서 주인을 찾아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돈주인은 한 푼도 사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신 방송국에서 이 선행을 방송했더니 10만 불의 성금을 보내왔고 취직도 할 수 있게 도와줬다고 합니다. 도덕적 용기를 발휘하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셋째로 윤리를 지키는 사회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성경에서도 눈을 속이는 저울, 물 섞은 포도주를 팔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넷째로 과거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창조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실패와 실수에서 벗어나 새로 시작하는 데 필요한 용기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조들도 모두 용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던 골리앗을 향해 담대히 맞서 싸운 다윗.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꿈이 이뤄질 것을 믿어 결국 성취한 요셉. 신앙의 변절을 요구했던 권력자들의 협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켰던 다니엘.
이들의 놀라운 용기와 담대함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신학자 폴 틸리히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용기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감하고 담대하라. 시31:24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 하는지 예수님이 아십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이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앞으로 베드로 너는 네 마음대로 할 수있는 것이 없고, 네가 가기 싫은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21:18)
그러자, 여기서도 베드로는 자신에 대해서는 순종했지만 '비교의식'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앞으로 힘든일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같이 있던 요한과 비교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조금 비약해서 말하면
"예수님, 앞으로 저는 그렇게 힘든 일을 겪게 되는데 그럼 요한은요? 요한도 같이 도망쳤잖아요?"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한마디로 손절해 버리십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내가 시킨 일에나 집중해라"
우리는 자신은 순종했다 하면서 그 순간 다른 사람도 나와같이 똑같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기를 바라는 '비교의식'이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계획은 나를 위한 것이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에 걸쳐 묵상을 나눈
<직면>의 과정은 나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자유로움으로 완성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22
꿈을 꾸었다.
꿈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 가운데 가운데 배낭이 있었는데, 아무도 그 배낭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한 눈에 봐도 무거워 보여서 꿈 속의 나에게 말했다.
“야, 오지랖 부리면서 그 배낭 짊어질 생각 하지 말어라”
하지만, 꿈 속의 나는 웃옷을 벗고 런닝 차림으로 배낭을 짊어졌다. 다행히 걱정한것 보다는 그렇게 무겁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꿈을 꾸고 있는 상황에서도 꿈 속의 내가 영 못마땅했다.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성도분을 모셔다 드린뒤,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데 갑자기 밀려오는 중압감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 오늘은 데리러 가기 싫어요”라는 말이 툭 튀어 나왔다. 순간 깜짝 놀라서 골목길 옆에 차를 세우고 멍하게 서 있었다.
속으로는 ‘진심이 아니야’라고 외면했지만, 생각해보니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데리러 갔지만 진심은 ‘할 만큼 한 것 같은데 관둘까?’라는 생각이 있었나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데리러 가기 싫다는 말을 입으로 직접 하다니....
목회자로서 그런 말을 한 내가 너무 싫었다. 그 순간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싶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하나님께 기도로 여쭈어 보았다.
‘하나님, 제 진심은 가기 싫은데 억지로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거라면 그만 둘래요’
동시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세미한 응답을 주셨다.
‘무거워서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니가 나를 향해 오는 걸음을 멈춘다면 나도 니가 멈추어 있는 동안 너를 향한 걸음을 멈출거야’
나는 아이들을 향해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였다... 아이들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고, 내 걸음에 맞추시면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중이셨던 것이다...
그렇게 세 아이들을 태우고 교회로 출발하는데, 세 아이중 막내가 운전하는 나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물어본다.
“Pastor, why is your voice so different today? Are you sick? Are you tired?”
“전도사님, 오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달라요? 어디 아파요? 많이 힘들어요?”
요즘 물이 오를대로 오른 요 꾸러기 녀석에게 챙김을 받는 소리를 듣다니..^^;;;
순간 눈물이 날 뻔 했다. 그 말이 꼭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너 힘드냐? 내가 너를 믿고 맡겼는데 힘내야지!”
아이들은 교회에 오는 차 안에서도 질문이 많았다. 영어를 잘 못알아 듣는 전도사를 위해서 친절하게 어플로 번역도 해주었다.
아이들을 태우고 오는 차속에서 회개하고 감사했다.
내가 뭐라고, 호의를 베푼다고 착각을 했는지...
부족한 나를 믿어주셔서 한 가정을 통째로 맡겨 주신 것 만해도 감사할 따름이지...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10~11
요21:15-17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찾아 가신 장면이 나옵니다.
그 유명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3번의 질문을 하십니다,
원래 이름인 시몬을 베드로라 바꾸어 주신후(마16:18) 다시 원래 이름인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을 베드로(반석)라 바꾸어 주셨지만,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이름만 베드로였지, 아직 내면은 시몬 그대로 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베드로인척 했지만, 예수님이 안계시자 원래 시몬의 모습 그대로 였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신 날 새벽 빌라도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화내면서 부정했던 자신을 직면한 것입니다.
마28:10 갈릴리에서 만나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듣고 고향 갈릴리로 가서 예수님을 기다리던중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첫 모습으로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처음 다짐했던 마음을 유지하는게 힘듭니다. 환경이 바뀌고 내 상황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를 공동체에 부르신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순종해서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것인데... 지금 그 목적에 맞는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셨나요?
저른 포함한 여러분의 도움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데 피곤함, 바쁨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나요?
목적을 상실하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베드로를 향한 이 질문은
"시몬아 너 (자아가) 죽을 준비 되었니?"
"뒤집어질 준비 되었니?"라는 질문인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하려면 반드시 내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뒤(집어)져야 합니다.
원색적이지만 그냥 뒤지세요.. 그래야 살고 살릴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6
빌딩을 세우는 공사를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터파기입니다.
포크레인으로 암반층이 나올 때 까지 계속 흙을 파냅니다.
암반층이 나오지 않으면 암반을 대신할 대신할 콘크리트 파일이라는 기둥을 엄청 때려(?)박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됩니다.
특히, 삶의 굴곡이 있는 큰 일들이나 상처를 겪으면 흔한말로 단단해 진다고 합니다.
단단해 진다는 것은 내 자아중 외적 요인에 영향을 받는 영역이 깎여나가 원초적인 나를 객관적으로 직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상담용어로 '직면'이라는 과정을 통해 고평가 되거나 저평가된 나의 본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겪으면 웬만한 일에는 감정적으로 휩쓸리지 않고 소위 쿨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휩쓸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내고, 실수조차 쿨하게 인정하는 멋지고 부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믿음의 반석을 찾을 때까지 자신을 부인하는 기약없는 “삽질”에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지요.
하지만, 믿음의 반석을 덮고 있는 흙들을 걷어내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만, 시기, 질투, 부, 명예, 사업, 건강 등등 사람마다 가지각색입니다.
각자 삶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삽질의 분량도 다릅니다. 흙의 종류도 다릅니다.
파도파도 계속 그대로 쌓이는 모래같은 교만...
삽조차 잘 들어가지 않는 자갈같은 시기와 질투...
반석도 아니고, 걷어내야할 바위같은 부와 명예.. 등등
끝도 없을 것 같은 삽질에 눈 앞이 캄캄하죠^^;;
그런데, 아십니까?
여러분이 ‘삽질’이라고 폄하하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과정인지 말입니다.
여러분 안에 숨겨진 믿음의 반석을 찾는 그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삽질’을 많이 할 수 록 반석에 가까워 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롬11: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기독교 변증학자 오스기니스는 역사적인 실증을 통해 서구를 몰락시킨 세 가지 물결을 이야기 했습니다.
첫 번째 ‘레드 웨이브’
공산주의를 말합니다.
두 번째 ‘블랙 웨이브’
이슬람을 말합니다.
세 번째 ‘레인보우 웨이브’
동성애를 말합니다.
우리 사회도 비슷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범신론, 평등의 이름으로 포장한 비진리가 절대진리를 밀어내는 사회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말 편가르기 같아 불편하시죠?
불편하다는것은 벌써 비진리가 우리 생각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오늘은 변증법(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을 통해 신앙의 시대적 흐름에 깨어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 진짜행복
내면에서 스스로 행복의 조건을 만들고 행복의 조건이 없는 상황조차 행복의 샘물을 길어 올리는 것
* 가짜행복
조건이 있고, 상황에 의지하고. 대상이 있어야만 행복하고 그 상황과 대상이 사라지면 행복도 사라지는 최면의 행복
복음이 약해지는 시대의 사회적 뚜렷한 문제중 하나는 "중독"입니다.
안정과 행복을 내 안에서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의지한 일시적인 쾌락으로 행복과 안정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최면이고 최면에서 깨어나면 무기력한 나를 발견하며, 다시 그것을 찾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참된 행복은 예수님안에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진짜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로 꾸미지 않아도 예수님이 진짜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엊그제 누군가에게 오래전 일로 사과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서로 일면식도 없고 상황상 제가 잘못한 것도 없었고 시간도 꽤 지나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일 후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있고, 그 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전도사라는 것을 밝히고 사과를 했습니다.
문자를 보내면서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오지랖 떠는건 아닌가?' 생각도 했지만 주신 감동에 순종하면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마음은 편안해 졌지만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았던 사과라 머릿 속은 좀 복잡했습니다.
저녁 기도 시간에 문자가 들어와 있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었고, 얼굴조차 기억도 안났는데 이런 경우까지 사과를 하시는게 참 감동이고, 오히려 감사하다는 답이 왔습니다.
헬라어는 일상적 시간을 '크로노스', 특정한 시간 곧, 기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우리의 삶은 지금도 흘러가는 크로노스 속에 잡아야 하는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공부, 취직, 연애, 결혼 등 기회가 지나면 잡을 수 없는 것들이 많지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용서와 사과를 해야 할 순간이 있는데요. 그것만큼 '때'가 중요한 것도 없습니다.
제때 용서하지 못해 상대방과 내가 죽고, 제때 사과하지 못해 헤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크로노스는 계속 돌아오지만 카이로스는 언제 다시 돌아올 지 모릅니다.
놓쳐버린 기회의 자리에는 후회만 남습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용서하고 사과하는 용기가 있길 바랍니다. 그것이 복음을 위해서라면 더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용서의 카이로스
사과의 카이로스를 잡으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