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7월 로스토프 함락
7월 23일 본격적인 시가전이 개시되었다. 22장갑사단의 204장갑연대는 시 외곽으로 침투하고 14장갑사단은 노보-췌르카스크로 들어갔다. 22장갑사단의 우익에는 투라네크(Turanec) 장군의 슬로바키아쾌속사단은 소련군의 제1, 제2 저지선을 돌파하여 시 북쪽 외곽을 장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른 아침 14, 22장갑사단은 로스토프의 북단에 위치한 여름정원으로 밀고 들어갔다. 뷔킹과 13장갑사단은 이제 시 중심부에서 시가전을 펼쳐야 했고 125보병사단은 예비로 대기했다. 대부분의 소련군들이 싸우기보다는 강을 건너 도주하는데 더 많은 신경을 쓰는 것으로 보였던데 반해 9공산당내무위원회(NKVD)차량화소총병사단의 8,700 장병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시 공략의 중점은 프리드리히 키르흐너의 57장갑군단이었다. 13장갑사단의 올브리히와 크리솔리 전투단은 아침 5시 40분 술탄 살리(Sultan Saly)-로스토프(Rostov) 국도의 양익에서 공세를 개시하고 그에 앞서 정찰대는 언덕의 공장지대에 도달했다. 우익에 93장갑척탄병연대 1대대와 좌익의 66장갑척탄병연대 1대대를 둔 올브리히 전투단은 테메르니크(Temernik)에서 발원되는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다. 4장갑연대 1대대가 정면으로 나가되 13장갑포병연대 2대대가 대공포부대와 함께 신속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타격점을 포착했다. 시 최초의 교량은 소수의 특공대가 폭발물을 제거하고 손상된 교량은 공병대가 수리작업을 끝냈다. 이로써 66장갑척탄병연대 3중대와 43모터싸이클대대는 최초의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좀 더 구체적인 이 작전의 전개상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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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장갑사단 66장갑척탄병연대 1대대장 알베르트 브룩스(Albert Brux) 소령 -
13장갑사단 66장갑척탄병연대 1대대장 알베르트 브룩스(Albert Brux)는 22일부터 개개의 건물을 일일이 탈취해야 하는 고단한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던 중 위험요소를 발견하자 2중대장 봘데마르 폰 가젠(Waldemar von Gazen) 대위에게 외쳤다. “조심해라, 가자(Gaza : 폰 가젠의 애칭).....오른쪽! 대전차포 2문!.....내가 엄호하겠다. 적진을 돌파해 강을 넘어 육교를 장악해라” 폰 가젠의 2중대가 살벌하게 빗발치는 건물 사이를 치고 나가자 브룩스는 4장갑연대의 지원을 받아 2중대의 측면을 확실하게 엄호해 나갔다. 오전 10시 50분, 13장갑사단의 66장갑척탄병연대 1대대는 방비가 삼엄한 NKVD차량화소총병사단의 본부와 중앙우체국 주변 구역에서 교전을 벌이는 동안 폰 가젠 대위가 이끄는 2중대는 적진을 돌파해 돈 강 바로 옆의 테메링크(Temerink)라는 작은 강을 넘어 들어갔다. 완벽한 기습을 시현한 폰 가젠의 1중대는 다행히 소련군이 장착한 폭약이 터지지 않아 목표로 한 육로를 안전하게 장악하고 4공병대대는 곧바로 수리작업에 들어갔다. 폰 가젠은 이때의 결정적 공헌으로 기사철십자장에 서훈되었으며 후에 13장갑사단 유일의 검부백엽기사철십자장을 받는 최고의 전사로 거듭났다. 66장갑척탄병연대의 소대장 프릿츠 쉘호른(Fritz Schellhorn) 원사 역시 로스토프 정복을 위해 최전방에서 분투한 공로를 인정해 9월 8일 기사철십자장에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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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중대장 봘데마르 폰 가젠(Waldemar von Gazen) 대위 -
교두보가 확보되자 43모터싸이클대대는 4장갑연대, 66장갑척탄병연대 1대대 및 93장갑척탄병연대 3중대와 함께 적군 방어진을 붕괴시키면서 공세의 템포를 늦추지 않았다. 장갑척탄병들은 일부가 전차에 올라타고 나머지는 도보로 움직이면서 적군이 설치한 장해물을 제거하고 야포진지들을 제압해 나갔다. 13장갑사단은 선봉부대 뒤에 두터운 제파를 구성해 적군의 저항을 차례로 분쇄하고 주변도로에서 반격을 가해 온 적군들을 극복하면서 마치 배가 물살을 가르듯 영역을 화대해 나갔다. 모든 장병들이 진격의 성과에 고무되어 열이 올라 있었다. 43모터싸이클대대는 시를 가로질러 오후에는 돈 강변에 도달했다. 그들이 여기까지 온 최초의 부대였다. 너무 정력적으로 적을 추격하여 쫓아온 나머지 이들은 동쪽으로 다소 치우쳐 있었으며 강을 건너는 육로는 그보다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일단 대대의 선견대가 다시 교량 쪽을 향해 이동해 상사 한 명이 바지선 하나를 징발하고 도하에 필요한 장비들을 챙기는 기민한 동작을 과시했다. 43모터싸이클대대장 하랄트 슈톨쯔(Harald Stloz) 중령은 사단장의 추천에 의해 9월 1일 기사철십자장에 서훈되었다.
뷔킹은 이날 40-45도에 가까운 유난히 더운 날씨에 NKVD 병력들과 시가전을 펼쳤고 125보병사단은 지원 형식으로 뷔킹의 진격을 엄호했다. 소련 공병부대와 공산당 광신도들은 꽤 잘 짜여진 수비막을 형성하고 있었다. 가가호호 소총들이 자리를 틀었으며 주택 입구에는 수많은 부피트랩을 설치하고 발코니에는 기관총좌를, 집 창문에는 모래주머니를 쌓아올려 독일군의 침투에 시간을 연장시켜 보겠다는 지연전술로 맞섰다. 숨어서 저격하는 스나이퍼도 문제지만 수백 개의 몰로포트 칵테일을 들고 광신적으로 달라 드는 적병을 퇴치하는 것은 대단한 집중력과 인내를 필요로 했다. 이런 방식의 전투는 독일군이 좋아하지 않지만 소련군의 특기가 잘 발휘되는 전형적인 동부전선 공수 난타전의 풍경을 장시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동력이 제한받는 전차도 별 소용이 없었다. 독일군은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재빨리 로스토프를 가로질러 남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뭔가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다. 23일의 공세는 대성공이었다. 이 격전의 와중에 뷔킹 사단 전체는 겨우 3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4명의 인명 피해가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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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예비로 쳐져 있던 125보병사단이 전면에 나설 시간이 왔다. 알프레드 라인하르트(Alfred Reinhardt) 대령의 421보병연대는 1대대와 3대대를 각각 3개의 중대로 돌격조를 구성해 기관총, 대전차총, 야포, 경곡사포 등으로 지원을 제공받아 시가에 펼쳐진 바리케이드를 극복하면서 소련군을 소탕해 나갔다. 예비로 있던 2대대는 1, 3대대가 자리를 확보하면 총 6개의 돌격조를 파견해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도록 했다. 125보병사단의 제대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A, B, C, D, 4개의 서로 연결된 라인을 형성하여 우군들이 단계적으로 해당 라인을 장악하여 적군에게 측면을 드러내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적군격멸과 구역장악을 반복해 나갔다. 이는 대단히 효과적이면서 우군의 피해를 줄이는 이점이 있었다. 즉 각 중대병력이 시간적 차만 정확히 조절만 한다면 적군의 측면공격을 회피하면서 정해진 목표점을 향해 체계적으로 접근하면서 적군을 제거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소탕전은 잔인한 전제조건들이 있었다. 시차를 두고 움직이는 중대병력이 지나친 구역에서 살아남은 적군들에 의해 등 뒤에서 당하지 않으려면 개개의 구간에서의 교전 후 확실하게 쓰러진 적병을 확인사살할 필요가 있었다. 거기다 각 건물에 거주하는 여자와 어린이들은 재빨리 소개시켜 따로 격리수용할 수 있는 장소로 이송시켜야 했으며 건물의 아래쪽에서 위쪽까지 철저히 훑어 스나이퍼들을 없애버리는 일도 잊어서는 곤란했다. 그러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소탕전은 마치 스위스 시계처럼 정확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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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보병사단 421연대장 알프레드 라인하르트(Alfred Reinhardt) 대령 -
온 사방에 포연과 연기자욱으로 시계가 불투명한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독일군은 바람을 등지고 있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한 접전을 전개할 수는 있었다. 1대대장 칼 오르틀리브(Karl Ortlieb) 소령은 포장도로를 따라 정면의 큰 바리케이드가 쳐진 구역으로 다가갔다. 오르틀리브 소령은 신호를 보내 대전차포와 야포들을 포격라인으로 유도했다. 소령은 굴뚝, 지하실 입구, 모래주머니가 쌓인 건물 발코니 등 적군이 숨을 만한 곳은 모조리 관찰하기 시작했다. 연대장 라인하르트 대령도 직접 현장에 도착해 쌍안경으로 적진을 살피자 그 순간 포장도로를 향해 소련군의 막심 기관총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뷰징!” 라인하르트는 13중대장 뷰징(Büsing) 중위를 부르자 뷰징은 낮은 포복으로 다가와 대령의 지시를 기다렸다. “잘 봐라, 뷰징, 저기 건물 2층 오렌지색 상자가 놓인 발코니다. 지금 연기가 가시니 보일게다. 저기가 소련군이 숨은 자리다. 발코니를 날려버리자!” 라인하르트 대령이 직접 타격목표를 지정해 주었다. 뷰징 중위는 포대로 가 사격을 명했고 두 번째 탄이 발코니에 명중하는 직격탄이 되었다. 기관총좌가 부서지고 혼란에 빠진 적병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13장갑사단 소속 수대의 전차들이 보병을 지원하면서 지그재그 운전을 하면서 시가로 들어갔다. 물론 전차들 앞에는 주포사격을 방패삼아 적진 중앙을 파고드는 돌격조들이 당차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제는 백병전이었다. 독소 양군 병사들이 서로 대화하는 소리와 숨소리까지 들리는 최근접한 거리에서 육박전투를 치르는 시간이었다. 건물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데는 상상을 초월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기관단총을 다시 한 번 단단히 쥔 독일보병들은 문 입구로 들어가 난사를 가함과 동시에 몸을 뒹굴어 작은 엄폐물이라도 찾아 다음 사격 자세를 취하는 숨 가쁜 동작을 되풀이해야 했다. 거리의 다른 구역에서는 화염방사기와 수류탄 투척이 난무하는 가운데 의무병을 찾는 고함과 총상의 고통에 따른 비명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이 경우는 들것을 들고 부상병에게로 접근하는 것 자체도 자살에 가까웠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421보병연대가 최종 D라인에 도달하자 125보병사단은 수로의 북쪽 제방을 장악하고 있던 57장갑군단의 선봉과 불과 수백 미터까지 좁히는 진전을 이루었다. 24일, 완전한 밤이 되자 11중대의 리트만(Rittmann) 상사는 야간공격을 개시했다. 헛간에 몸을 숨긴 이들은 소련군이 또 다른 헛간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공격을 가해오자 단 3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돌진해 들어갔다. 헛간의 기관총좌를 제압한 이들은 좌우로 번갈아 수류탄을 던지면서 돌격해 들어가 밤 11시에는 돈 강 제방에 당도하여 호를 파고 들어앉았다. 이날 시가전은 주간으로 이처럼 대단히 격렬하였으나 밤이 되자 22장갑사단도 시 중앙에서 3장갑군단 및 57장갑군단의 선봉부대와 연결되는 성과를 얻었다. 로스토프는 24-25일 밤 소련군 후방경계부대가 시를 빠져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종료된 것으로는 되어 있지만 주변 지역에 산재한 모든 병력을 소탕하는 데는 27일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이로 인해 로스토프의 함락일자는 문헌에 따라 서로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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