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성지순례 후기 나눔터 - 터키·그리스 |
저는 첨으로 성지순례를 간답니다. 터키의 오랜 폐허와 지평선, 사도들이 오갔을 뜨거운 땅, 유년의 제 영혼을 사로잡은 그 풍경 속으로 마침내 걸어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저를 만날 수 있을까요? 저는 무엇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실래요? 오히려 마음이 아주 깊이 쓸쓸해집니다. 이 쓸쓸함 너머 제가 도달할 마땅한 곳이 있기를 기도하며 다녀올게요. 뵐 때까지 건강하세요!
▷ 01일차 : 6월 13일(서울→프랑크푸르트→이스탄불)
이미 시간과 공간은 낯선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기내의 모니터는 21세기 창공에서의 인터넷 Flynet을 홍보하고 있다. 우리는 새가 아니지만 하늘을 날고 있다. 긴 비행. 사람들은 아주 힘들어 한다. 나도 힘들다. 과거의 탐험가들 혹은 선교사들의 험난한 수고를 생각하면 이 힘듦 정도는 안락한 엄살일 뿐이다. 모든 것이 참 쉽고 쾌적하게 발전(?)해 왔다. 우리는 급속히 그 변화에 익숙해져 버렸다.
Franziskaner Weissbier 프란치스칸의 맥주, 아주 오래된 냄새가 난다. 9시가 지나도록 해는 빛나더니 10시가 다 되어서야 서쪽하늘에 엷은 오렌지빛 구름이 드리운다. 아직 푸르고 고요한 프랑크푸르트, 참 긴 낮이었다. 10시 40분 마침내 이스탄불을 향해 이륙한다. 이제 밤은 내리고 시가지는 검은 벨벳 위의 비드 자수 같다.
▷ 02일차 : 6월 14일(이스탄불)
신부님은 순례에 나서는 우리에게 베르나르도 성인의 조언을 주신다. “모두 함께 들어가라. 혼자 머물라. 떠날 때는 ‘다른 사람’이 되어 떠나라.”
블루모스크
성 소피아성당
낯선 터키, 천년의 고도 이스탄불의 곳곳. 화려했던 역사일수록 그 뒤안길은 가눌 길 없는 슬픔의 길이겠지.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예쁘다. 지친 마음 한 켠에 내려두고 쉬고 싶은 고즈넉한 마을과 도로들, 카페와 공원. 내 눈이, 내 귀가 호사를 한다. 포도나무와 뽕나무와 체리나무. 그랑바자르에서는 거의 천만 원에 육박하는 에메랄드 목걸이와 팔찌의 모델이 되었다. 참으로 심한 호사를! 그랑바자르는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 03일차 : 6월 15일(이스탄불→아다나)
금구요한 성인이 주보인 세인트스피릿(Saint Spiritus) 성당에서 미사. 천년이 넘은 성당, 천상을 향해 고양된 정신의 표현으로 가득한 성당은 이미 고향같다. 수많은 모스크의 도시에서 기독교도의 귀한 성소(聖所). 우리를 맞은 본당신부님은 너무나 반가운 말씀들로 당신의 사랑을 열심히 전하고자 하신다.
세인트스피릿 성당의 외관과 본당
마음을 채운 우리는 세속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돌마바흐체 궁전에 들어섰다. 경찰들의 엄호 속에서 관리되는 유적지. 궁전은 영화 속 장면들보다 더 호사스럽고 거대했다. 수많은 크리스털들, 샹들리에들, 상아, 자기 등 각종 진상품들. 세월의 더께로 깊이 어두워진 은 화병들과 촛대들.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다보이는 왕의 목욕탕과 화장실, 여인들의 공간인 하렘. 궁전 안의 시계는 1938년 9시 5분, 터키의 초대 대통령으로 숭앙의 대상인 무스타파 케말의 임종시간에서 멎어 있었다. 크리스털 난간이라니. 크리스털로 장식된 계단을 올라 왕의 기도실과 세정실, 그리고 여인들을 위한 블루살롱 등을 들여다본다. 여전히 샹들리에들이 각 방을 지키고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선물인 4.5톤짜리 샹들리에가 압도하는 대연회실은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천장화와 원근법을 이용한 왕좌 등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상상력과 능력에 압도되고 이미 보이지 않는 역사의 영욕을 잠시 되짚다가 체리가 열린 골목을 지나 점심을 먹는다. 케밥과 맥주 한 잔. 우리는 맛있게 밥을 먹는데 밖에서는 무슬림의 기도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울려퍼진다.
보스포러스 해협
바다를 뒤로 하고 세인트게오르기오스(st. Georgios) 교회에 간다. 동방정교회의 소박한 정경. 그에 비해 본당 안은 지나치게 장식적이다. 거의 사람 키만큼 내려오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제단 전면을 채운 이콘들. 수위권과 필리오케(filioque). 우리를 갈라지게 한 이유들. 본당을 나와 작은 정원으로 접어들자 여기저기 고양이들이 오수를 즐기고 있다. 성당 건물의 벽들에는 부조 성상들이 천 년의 시선으로 낯선 순례객을 내려다본다. 꽃잎 뚝뚝 떨어뜨리는 붉은 베고니아가 우리를 배웅한다.
세인트게오르기오스(st. Georgios) 교회의 벽과 작은 정원
▷ 04일차 : 6월 16일(아다나→안티오키아→다르소→가파도키아)
베드로 암굴성당
타우로스 산맥
데린구유를 나와 그 집시를 만난 곳
네부셰르를 지나 호텔 가파도키아 인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는다. 호텔의 기념품 가게에서 아뿔싸, 아까 집시 여인이 들고 있던 인형을 본다. 아마도 터키에서는 전혀 낯설 것이 없는 토속적 인형이었던가보다. 나만 혼자 은비학적이라고 흠칫 놀라 돌아섰던 게 다시 걸린다. 그녀와 아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고, 하얀 옷을 입고 셰마춤을 추는 메블라나 신비주의의 데르비시 인형도 만난다.
1) 『산책』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쓴 표현이다.
▷ 05일차 : 6월 17일(가파도키아→안탈리아)
가파도키아
안탈리아로 이동하는 중에 캐러벤 사라이, 즉 ‘대상들의 궁전’에 들른다. 이미 폐허다. 제법 규모가 컸음을 짐작케 하는 곳곳에 흰 들꽃만 무성하다. 숙소의 뒤쪽에는 운석이 떨어져 생겼다는 푸른 호수가 있었다. 그리고 먼지를 온통 뒤집어쓴 집시 아이들이 이방인을 경계하며 놀고 있다.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를 뒤로 하고 가다가 콘야(이고니온)를 스친다. 터키 안에서도 가장 이슬람적이라는 도시. 주류판매가 제한되고 차도르 쓴 여성이 가장 많은 도시. 콘야는 무엇보다도 루미와 메블라나 신비주의로 잘 알려진 도시다. 어딜 가도 소박하게 가꿔진 꽃밭들, 터키사람들의 정성이 느껴진다.
▷ 06일차 : 6월 18일(안탈리아→파묵칼레)
포도나무와 장미가 있는 작은 농가들, 참 가난한 집들도 많다. 엷은 인디언핑크 지붕과 많은 창과 창살. 해발 1500m 고지대를 지나 수심이 190m인 살다호수를 뒤로 하고 점심을 먹는다.
파묵칼레에서 발을 담그고
▷ 07일차 : 6월 19일(파묵칼레→에페소→아이발륵)
밝은 아침, 파묵칼레를 떠나고 있다. 11년 전 6월 19일도 참 밝았다. 결혼기념일, 그에게 감사한다. 주님은 에페소 교회에 말씀하신다. “너에게 나무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되짚어보며 에페소의 흔적들을 걸었다.
성모성당
성요한성당 유적
▷ 08일차 : 6월 20일(아이발륵→트로이→카발라)
트로이 유적
트로이 마찻길
납세키로 이동한다. 구름도 터키의 광활한 대지에서는 뛰어가고 있다.
터키에서의 마지막 점심을 먹는다. 43도 터키소주를 마신다.
그리스로 가는 배 갑판 위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가 들리는 듯하다. 서늘한, 서글픈, 서러운. 왜 그리스는 이런 느낌일까. 조르바의 나라, 카잔차키스의 나라. 버림받은 뜨거운 나라. 오르페우스와 디오니소스와 헤르메스의 나라로 간다.
국경에서 꽤 오랜 시간을 지체한 후 그리스에 접어들었다.
헬라 인이 아닌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정교인이 아닌 것은 용서할 수 없다는 종교국가 그리스. 터키에서 숱하게 미날렛을 본 만큼 그리스에서는 십자가를많이 보겠지. 이따금 미크리에클레시아2)를 스치며 달리는 그리스의 하늘에 그리스로의 여정을 축복하듯이 가득 덮힌 구름들 사이로 몇 갈래의 빛이 쏟아지고 있다. 그리스에서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 경자 님이 그리스에 대한 촌평을 소개한다. 처음 와 본 사람은 별 거 없다고 하고, 두 번째 오면 살고 싶어 하고 세 번째는 ‘백조처럼’ 여기서 죽고 싶다고 하는 나라. 그럼 나는 별 거 없다고 생각할 것인가? 자못 기대가 된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리스에 열주가 늘어선 것, 그들의 제스처가 큰 것, 그리고 그들의 건축에 ‘열려진 곳’ 예컨대 광장문화가 발달한 것은 기후로 인한 옥외생활 때문이라는 소개도 듣는다. 자연환경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네스토스 강을 통과해도 터키에 피어있던 유도화는 여전히 많다. 강. 그리스는 터키보다 물이 많이 흐른다. 미크리에클레시아 공장을 지난다. 오후 6시 반이 됐는데도 해는 아직 서쪽과 멀다.
비굴하지 않은 그들. 빵 한 조각과 올리브 열매만으로 살 망정 손을 벌리지는 않는다는 그리스 인들에게 400여 년의 터키 점령시기는 얼마나 굴욕적이었을까. 그리스의 붉은 흙이 자신들의 정체와 정서를 지키려던 그들의 투쟁을 닮았다. 길 가의 풀꽃조차도 그들의 정서를 담고 있다.
다시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바다. 바오로 도착 기념 성당을 들러 필립비를 위한 항구도시였다는 카발라(네아폴리스)로 들어간다. 순례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 바닷바람을 쐬다.
카발라
바오로 도착 기념 성당
2) 교통사고가 났던 곳에 세워놓은 이콘과 불꽃함. 죽은 이를 애도하고 운전자의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한 것이다.
▷ 09일차 : 6월 21일(카발라→데살로니카→메테오라)
리디아 경당
성문 밖 여인 리디아, “제가 주님을 믿는다고 판단하시거든 제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청한 여인. 바오로가 유일하게 필립비 인들의 ‘물질’을 받은 것은 아마도 리디아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그들이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고린토 인과는 상반된 사람들이었다. 그 여인이 살던 지각테스 강 가에서 미사를 봉헌한다.
알로이시오 공사가의 축일. 어린 소년이던 어느 날 공놀이를 하고 있던 성인에게 누군가 물었다. 만약 지금 세상이 끝난다면 너희는 무엇을 할 거니? 여러 대답들 속에서 소년은 “계속 공놀이를 할거예요”라고 답한다. 지금 이 순간, 너는 왜 이 자리에 와 있는가? 이 순간 세상이 끝난다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각테스 강의 게 한 마리가 미사 내내 물에서 나와 서성인다.
리디아 경당 바오로 성인
리디아 경당 천장화
인적 드문 리디아 경당을 뒤로 하고 필립비로 향한다. 필립비는 알렉산더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기원전 360년에 건설한 도시다. 로마가 가는 곳에는 길이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필립비에는 에냐시오 국도가 펼쳐져 있었다. 필립비의 법원과 김나지움과 상가와 공장터, 바실리카와 남성전용 화장실 터. 화장실은 당시 로비의 장소였단다. 그리고 노예들에게도 책을 대여했다는 도서관과 고린토 신전, 세라피스 신전. 그리스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다만 자유가 없었을 뿐 군사 이동 이외의 모든 것은 자유로웠다. 로마가 요구한 것은 수세였다. 민란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결국 예루살렘의 빌라도도 민란을 우려해 예수의 죽음을 방조했을 뿐이다.
바오로에게 봉헌된 최초의 성당 터도 있었다. 334년 사르디카의 귀족이 봉헌한 성당의 제대 아래로는 세례를 위해 물이 흘렀단다.
신부님은 오늘 여기 있게 된 것은 은총이라고 단언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고통’을 의미하며, 전제하며, 요구한다.
필립비 유적
암피폴리스를 지난다. 마케도니아의 수도였던 암피폴리스에는 알렉산더의 동문인 라오메돈의 용맹을 칭송하는 거대한 사자상이 있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엄마에게 “저 사자는 왜 혀가 없어?”하고 물었다. 혀가 없으면 이빨도 소용이 없다. 결국 사자의 용맹은 무용하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조각가가 그 자리에서 자살을 했단다. 꼭 그랬어야 하나? 그러나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생각했을 장인 정신 혹은 예술혼, 그도 아니면 책임감이라도 높이 사게 된다.
암피폴리스의 사자상
바닷바람이 상큼하게 오가는 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스파게티, 양파와 토마토 샐러드, 감자와 오징어 멸치 튀김, 막 떨어진 듯한 못나고 쪼끄만 사과. 자꾸만 먹어도 나오는 음식의 양에 항복한다. 맛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건가? 맛은 참 무미하다. 터키 음식이 진했다면 그리스 음식은 아무 맛이 없다. 그렇다고 정성을 들였다는 느낌도 없다. 쓱쓱 뚝뚝 그렇게 가볍게 뜯고 튀기도 해서 방금 나온 듯한 신선함, 그리스에는 원초의 냄새가 난다.
아폴로니아로 가고 있다. 성서시대의 정보교환지. 로마로 가는 중간 통과지인 곳에 바오로가 강론했다는 나무와 돌이 있다. 베마.
데살로니카 외곽을 지날 즈음 경자 님이 CD를 넣는다. 나나 무스크리. 파두(fado)가 아니고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아닌 게 다행이다. 이 이국의 땅을 지나며 감성을 깊이 자극하는 어쩔 수 없는 감정 위에 가눌 길 없는 파도까지 밀려온다면 참 감당이 어렵겠다. 다행히 지독하게 맑고 투명하기만 한 나나 무스크리는 나에게 별 자극이 없다. 심지어 ‘카트린느로 가는 기차는 8시에 떠나네’조차 그가 부르면 가슴이 덜 메인다.
무스타파 케말의 출생지인 데살로니카는 키케로의 망명지였다. 이 도시를 타고 에냐시오 국도가 헬라로 들어가게 되어 있어서 로마시대의 정치적 망명지였단다. 데살로니카의 푸른 돌로 된 성벽을 지나 데메트리오스 성당에 들어선다. 데메트리오스는 4세기 초에 순교한 분으로 데살로니카의 수호성인이다. 5세기에 지어졌다가 1917년 화재 이후 194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된 성당 안에는 인간의 지극한 정성으로 빚어낸 성화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리스 현지 가이드가 없다는 이유로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본당에서 나와야 했다. 잠시 에게 해 시원스런 물을 보다가 데살로니카 박물관에 갔다. 기원전 4세기 경의 장신구들이 말 그대로 찬란한 인간의 영욕을 간직한 채 박제되어 있었다.
데메트리오스 성당
확실히 그리스인들, 오만방자하다. 터키는 무장해제하고 단순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땅이었다. 문명의 이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인간다움이 보다 귀하게 드러나는 곳. 사람들은 조용하고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소박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랐다. 도시들은 눈에 띠는 곳마다 작은 꽃들을 가꾸고 꽃집에 장식된 꽃들도 상품이라기보다 선물 같은 정성과 감각으로 도시를 꾸몄다.
그러나 그리스에 들어서자 낯익은 풍경들이 되살아왔다. 이제 소음과 번잡함 속으로 다시 들어섰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척 콧대가 높다.
2910m 올림푸스 산이 드러나고 있다. 18개 봉우리를 거느린 신들이 사는 곳. 우리는 그 성스러운 장소를 최소한 시속 8, 90킬로미터로 달리고 있다. 장엄하다. 결국 올림푸스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올림푸스 산
시리게 다가오는 올림푸스를 지나 오사 산의 장관을 마주보며 달린다. 가는 곳마다 자귀나무가 풍성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성가를 위해 태어나셨다는 수녀님의 인도로 묵주기도를 드리고 우리는 테제의 노래로 입을 모은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집중해서 반복하는 노래는 참 좋은 기도다.
테살리아 평원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고 있다. 트리칼라를 지난다. 성당 꼭대기에 학이 둥지를 틀고 있다.
메테오라, 고양된 영혼의 땅에 들어서 호텔 오르페우스에 묵는다.
▷ 10일차 : 6월 22일(메테오라→아테네)
스테파니 수도원
본당 안은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무수한 성화와 성물들로 넘친다. 난 자꾸만 그 거룩한 상징들에 압도되어 도리어 존재를 느낄 수가 없다. 그 안에서 난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지독하게 비천하기만 한 죄인일 뿐이며 너무 왜소해서 감히 숨조차 쉬기 송구한 벌레 같아진다. 오히려 봉쇄구역 저편으로 보이는 작은 이콘들과 그 주변의 화분들이 인간의 소박한 정성을 느끼게 한다. 비로소 사람의 냄새가 나는 듯하다. 수도자들의 무수한 번민과 갈등과 통회와 시련의 눈물이 뒤안길의 소담한 화분들에 꽃으로 아롱져 피어난 것 같다.
주님변모 수도원
주님변모 수도원을 나와 메테오라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위치에서 사진을 찍는다. 수도원이 세워진 벼랑들 틈으로 아득히 칼람바카 마을이 보인다. 길이 잘 다듬어진 산을 내려와 버스에 오른다.
메테오라 수도원들
고린토 아폴론 신전 대단한 절벽들의 위용을 감상하며 다시 사람의 마을로 들어선다. 하얀 벽과 엷은 테라코타 지붕과 제라늄들, 메테오라를 떠나고 있다. 이제 아테네로 갈 것이다. 그 전에 레스토랑 ‘바쿠스’에서 ‘미토스’ 맥주를 마시며 점심을 먹는다. 아, 그리스. 신화의 땅에 있다. 파르나소스 산을 지나고 또다시 에게 해를 바라보기도 하며 아테네에 진입하였다. 일곱 개의 언덕 위에 건설된 아크로폴리스. 직물과 공예와 전쟁과 지혜의 신인 아테나에게 봉헌된 도시에 들어선다. 멀리 솟아있는 언덕에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호텔에 짐을 푼 뒤 처음으로 사람들과 아테네의 밤공기 속에 나선다. 작은 공원 곁의 노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이국의 밤을 느끼다 온다.
▷ 11일차 : 6월 23일(아테네→고린토→아테네)
아폴론 신전을 마주한 잣나무 아래 간간이 울리는 망치소리를 들으며 미사를 봉헌한다. 번성한 도시이던 고린토는 지금처럼 가볍고 맑은 대기를 마실 수 없었다.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를 위해 끊임없이 동물을 태우는 냄새로 온통 진동했었다. 그날처럼 우리는 기도를 했다. 그날처럼 우리는 제사를 올렸다. 낡은 땅, 파리한 돌무더기 과거의 흔적 위에서. 하지만 21세기의 우리는 더 이상 냄새를 피워올리지 않는다. 하느님은 번제를 즐기지 않으시고 ‘사랑의 완전한 제사’를 원한다.
순간, 시공을 벗어버린 자유가 날개를 단다. 마치 파우스트처럼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고린토 아폴론 신전
아크로 고린토스 산
시지프스가 바위를 밀어올렸다는 아크로 고린토스 산을 뒤로 하고 고린토의 길을 따라 걷는다. 이제 떠난다, 안녕!
다시 에게 해를 보며 달리다가 바오로 사도가 나지르인 서약을 한 켄크레아 해변에 내린다.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해수욕을 하고 있다. 잠시 바오로의 자취를 느끼며 무좀인가에 효력이 있다는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다시 아테네로 돌아간다. 오모니아(여덟 개의 길)를 지나 아크로폴리스에 접어든다. 그리스에 들어서면서부터 줄곧 집시에 대한 경계가 강조됐다. 그리스의 집시들은 능수능란하단다. 때론 금발미녀이기도 하고 때론 근사한 신사일 수도 있는 소매치기 집시들은 목표물을 정해 집요하게 접근해서 목적을 달성한다. 더욱이 파르테논 신전은 집시들의 온상으로 악명이 높아서 조심에 또 조심을 해도 부족하다.
쥐엄나무를 지나 파르테논 신전의 꼭대기가 보이는 입구에서 사진을 찍다가 일행과 10미터쯤 떨어졌는데, 순간 돌바닥에 사정없이 미끄러졌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멎더니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이구 이런. 사람들이 곳곳에 있어줬더라면 이 황당한 모노드라마의 시추에이션이 조금은 덜 적나라했으련만. 멀찌감치 있던 사람들조차 소리에 놀라 다 돌아다보고 있을 터였다. 얼마나 다쳤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주섬주섬 괜찮다고 털고 일어나 짐짓 말짱한 척 했지만 여전히 눈 앞에선 별이 핑핑 돌았다. 160년 전의 공연장을 둘러보는 둥 마는 둥하고 화장실에 가서 봤더니 팔꿈치며 무릎이며 종아리까지 이미 멍이 들고 새빨간 피가 흥건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붉은 피를 보니 문득 어린아이처럼 서글퍼지면서 울음이 차왔다. 맙소사. 참 부끄럽기도 하고 신경 쓰이게 하는 게 싫기도 하고 암튼 다행히 연고와 밴드로 응급처치를 한 채 파르테논에 올랐다.
이제야 넘어지다니 용하다. 얼마나 자꾸 사방을 돌아보며 아쉬워하느라 발길이 무거웠던가. 여기저기 남아있는 내 아쉬움이 내 발길을 잡아당겼나보지. 암튼 여정의 끝에 이르러 다쳤으니 참 다행이다. 더욱이 손에 들고 있던 디카와 팔찌묵주와 가방 안에 들어 있던 선그라스 등이 무사한 것도 고마운 일이었다.
파르테논 신전
에레크테이온 신전
햇빛이 부시고, 대리석 바닥은 수많은 인파의 발길에 씻겨 맨들맨들 미끄럽고, 곳곳이 공사중이라 번잡하기까지 한 계단을 올라 마침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1호인 파르테논 신전 앞에 섰다. 기원전 5백년 쯤 아테나에게 바쳐진 신전 또한 공사중인데다 사람이 많아 사진에서 보던 순결한 장관을 감상할 순 없었다. 게다가 다시 넘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을까 염려하느라 잔뜩 신경을 쓰며 걷느라고 다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토록 말을 듣던 집시들이 있었다. 아마도 몇 명이 팀인듯 한 사람은 전혀 적절하지 않은 곳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추고 있고 몇몇은 수다를 떨며 타깃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들을 의식하며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들어가 아테나 신과 신화 속의 여러 장면들과 마치 잃어버린 양을 찾은 예수님 같은 ‘송아지를 어깨에 짊어진 청년’ 등의 작품들을 본다.
다시 파르테논 신전 쪽으로 올라와 조금 아래쪽에 선 에레크테이온 신전(Erechtheion)과 만난다. 건축미로는 파르테논 신전이 단연 앞서지만 시민들의 신심은 에레크테이온 신전을 더 가까이 섬겼다. 이 신전은 6개의 돌기둥 처녀가 육중한 신전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데 지금 있는 것은 다 모조품이고 진품 4개는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있다.
조심스럽게 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 아레오파고가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바오로가 뜨거웠을 언덕에서 제논의 스토아를 내려다본다. 요즘 사람들도 아레오파고에서 열띤 고뇌를 표출하는지 사방이 담배꽁초 투성이였다. 아득하다. 이천년 전, 이천 오백년 전. 그때도 있었던 자연의 품 안에서 문득 아테네가 부연 빛 속에 아득해진다.
소크라테스가 갇혔다는 바위 감옥을 보고 시내로 내려온다. 가로수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좁은 길을 따라 순례지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먹는다.
넘어져 생긴 상처에 약사자매님의 정성어린 처치를 받고 마지막 밤이 아쉽기만 한 우리의 발길이 아테네를 밟는다. 또다시 맥주 한 잔씩을 앞에 두고 이 귀한 순례의 소회들을 나눈다. 순간은 달콤한 잠처럼 쏜살같이 떠난다. 모두들 함께 한 시간에 감사한다.
아레오파고에서 내려다본 스토아
소크라테스가 갇혔다는 감옥
▷ 12일차 : 6월 24일(아테네→프랑크푸르트→인천)
안녕, 그리스!
그리고 일상......
꿈길 같은 여정을 가능하게 해준 분들과 동행이었던 분들께 가진 거 없는 가난한 마음 한 조각씩 매달아 화살 팡팡팡 쏘아 보낸다. 모든 것이 고마웠다. 주여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 생애 즐겁고 기쁘게 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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