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까지 그들을 17번 만날 수 있었다.
조엘 코엔은 1954년생, 에단 코엔은 1957년생이다.
2017년 120번째 영화
13.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 (2008) : 정리가 안되면 불태워주세요
격세지감! 제목의 'Burn'은 'CD를 굽는다'의 직역이 적확하겠지만, 전체 서사를 반영하자면 '하찮은 소멸'로 의역함이 마땅하다.
어차피 방점은 'Burn'보다는 'After Reading'에 놓여지는데, 여기서 문제는 과연 그것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가에 달려있다.
스파이 장르 비틀기로 호명하기에도 스스로 초라함을 인지하고 있는 본편은 중년남들의 폭망기라고 명명함이 오히려 어울린다.
장르적 도식상 스파이란 적진에 침투하고 위장하는 과정의 분열 캐릭터라는 면모가 영화적 매혹을 생성했음을 상기하자면
본편에서 이같은 스파이 캐릭터에 어울리는 이는 CIA에서 러시아 대사관에 잠입시킨 인물 뿐이지만, 그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본편 속 인물 중 누구를 스파이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의는 전술했듯 불구적이다. 즉, 누구도 스파이일 수 없어야만
서사는 성립한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 오프닝에 기괴한 방식으로 지령을 전달 후 자폭하는 장치 따위는 본편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 정도의 세계를 위기에서 구원할만큼의 무게감을 지닌 정보 따위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편은
그저 부인할 바 없이 난장 소동극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묵직한 질문은 제기되고 도무지 이 의혹의 무게를 버틸 수 없다. 만일
전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비롯한 코엔 형제의 세계 내에서라면 돈가방 주위의 인물은 모두 파멸됨은 일종의 운명이다.
그럼에도 본편에는 한 여자가 살아남는다. 물론, 그 전에 과연 본편에 돈가방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답변은 궁색하거나 모호하다.
오스본 콕스의 회고록이든 그의 재산을 아내 케이티가 목록화한 것이든간에 그것이 CD로 'Burn'된다해도 거의 무가치함은
불문가지다. 단지 그것은 이혼시 위자료 등 재산분할에나 유효할 것이지만, 본편은 <참을 수 없는 사랑>과 근거리가 결코 아니다.
실제 돈가방이 없었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본편은 <위대한 레보스키>보다 더욱더 하위의 위치를 점하지만, 전작에서 소통 배제된
도니(스티브 부세미 역)의 심장마비사와는 달리 직접적인 인물로부터의 총격으로 인해 채드가 살해된다는 간극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살아남은 한 여자, 즉 린다 리츠키(프란시스 맥도맨드 역)로 파고들어가기전에 관객은 채드(브래드 피트 역)에게
주목해야한다. 왜 채드는 죽어야하는가? 우선 그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의상, 헬스 코치로서도 무능력함을 열거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는 동료가 주워온 CD를 오독한 최초의 당사자로서 돈가방이라는 망상을 생산한 인물이자 주변 동료인
린다를 머니 환타지로 오염시킨 인물이다. 그럼에도 채드를 살해한 해리(조지 클루니 역)의 한방은 그야말로 느닷없거니와
윤리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변명은 해리가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스파이 장르의 포로로서 자기 인증에 있을 것이다.
과연 해리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인물인가를 탐색하자면 그의 소속은 물론 어떤 주변인들도 스파이 장르와 연관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수없이 많은 감시 시점 숏에 의해서 스스로를 중요 인물화하고 이를 경유하여 위기감을 고조시킨 채 준비태세를 취한
것이다. 그가 채드를 향해 공포탄이 아닌 곧바로 격발해버리는 순간의 속도감은 정지 화면 누르기를 하지 않는다면 잡아낼 수
없는데 이는 그만큼 해리의 당혹감에 근거가 없음을 반증한다. 해리가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자청하는 또다른 물증은 그가
공구를 직접 조립한 '남근 기계'에서도 발견되는데, 그가 스스로를 남근화함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는 이미 거세된 상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7893359AE7B6838)
해리에게서 본편은 남근을 사랑과 등식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누구에게나 매력발산으로 하룻밤 관계가 가능한 해리이지만,
이미 아내에게서 이혼 준비를 위한 사전 감시을 받고 있고, 그 스스로도 특별히 케이티(틸다 스윈튼 역)을 비롯한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같은 그의 내적 불구성은 그가 태드 살인 이후 심리적 위로를 받기 위해 린다를 찾아갔을 때 매몰차고
현실적인 관계의 차단막을 내리는 지점에서도 재삼 감지된다. 급기야 그는 린다를 오인하면서 다시금 자신을 중요인물로
좌표화시키는 망상을 반복한다. 해리는 베네수엘라로 망명하고 이를 CIA가 승인하지만, 이는 사실상 유사 죽음의 퇴출이다.
근거 부재의 머니 환타지의 왜곡화의 진범인 채드가 살해되어야할 다른 이유는 그가 헬스 트레이너 즉, 다른 이의 몸을 통해
먹고사니즘을 해결함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다른 이의 머리를 팔아치우겠다는 결심을 한 것에서도 비롯된다. 코엔 형제의
세계 내에서 <밀러스 크로싱>, <바톤 핑크>,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등의 작품에서 모자/머리/머리카락 등으로 반복 변주된
바 있는데, 본편에서는 직접적인 기호는 등장하지 않지만,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 역)와 테드(리차드 젠킨스 역)의 대머리를
통해 그들의 거세성은 진술된다. 이들의 반대편인 해리의 경우에는 오히려 남근에 너무 집착함으로서 진심이 거세된 경우다.
부언하지 않아도 본편의 남성들, 오스본-해리-채드-테드 등으로 이어지는 4인방이 각기 다른 면모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소멸에 이른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들 중 누구도 자신이 왜 그같은 살인 혹은 살해의 같으면서도 다른 죽음에
결부되는지에 대해 정확히 인식할 수 없음 역시 코엔 형제의 불가지론적 세계 내에서는 당연한 캐릭터의 내재성이다. 오히려
전술했듯이 본편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여성들은 보존되는가에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여기에는 별다른 타당한 근거가
부재하다. 가령, 오스본의 아내 케이티는 해리와의 불륜에 진실한 사랑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케이티가 의사로서 어린 환자의 치료를 위해 '입을 벌리라'고 주문함에도 전혀 응하지 않는 상황은 그녀의 캐릭터를 인증한다.
해리의 아내이자 동화작가로서 '의사당의 올리버'라는 작화로 저명인사가 되지만, 그 동화 내용에 자신조차 동화되지 않는다.
그녀가 TV에 출연해 동원된 아이들 앞에서 동화를 구연할 때의 낯빛과 방송진행자 남녀의 호들갑은 이같은 허위를 배가시킨다.
그녀들이 불륜으로 인해 남편과 이혼하는 것 자체를 문제삼을 이유는 없는 것은 그녀들이 남편들의 불구성을 구제해야할 윤리적,
법적 의무로부터 벗어나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두 사람은 전문직군으로서 남편들의 거세/무직과 확연히 대비된다.
문제는 결국 헬스 트레이너인지조차 모호한 린다에게 모여진다. 결국 그녀는 국가/CIA로부터 성형수술에 필요한 보상금을 받아
내고야만다. 즉 어떤 경로든간에 돈가방은 실현된 것인데, 이에는 그녀가 전문직군이 아니며 유부녀가 아니라는 점이 작용한다.
그녀가 CIA에 말한 '협조'가 무엇인지 모호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살을 깍아내고 변형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바 국가가 이를
승인한 것이다. 돈가방을 국가가 지급 보증한 것은 코엔 형제의 세계에서 거의 희박한 사례이지만, 그만큼 스파이 장르물로서
본편이 에필로그에서 정리하듯 '교훈'을 운운하는 자세부터가 국가로 상징되는 저 너머에 대한 조롱의 반어법으로 해제가능하다.
하지만, 국가조차도 등장 인물 사이의 사적인 애정 관계 전체를 조망 투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본편은 여전히 부분의 총합이다.
<번 애프터 리딩>은 남근이 결여되었거나 과잉된 남성들이 서로를 소멸되는 과정에 대한 가련한 자기 인증의 암투극이며
돈가방을 국가로부터 지불받는 최초의 당사자로서 여성이 보존되는 바, 희귀한 출구를 열어놓은 무의미한 암호풀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