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1/30 무역의 날, 세계 사형폐지의 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3 - 이상화, 여자 500m 6연속 '금빛 질주’ ‘빙속 여제’ 이상화(24·서울시청)가 ‘금빛 질주’를 이어갔다. 이상화는 11월30일(한국시각)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열린 2013~2014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3차 대회 여자 500m 디비전A 2차 레이스에서 37초32 만에 결승선을 통과해 예니 볼프(독일·37초66)와 올가 파트쿨리나(러시아·37초81)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이날 이상화는 첫 100m 스타트를 10초26에 끊어 5번의 레이스만에 초반 기록에서 1위를 기록하지 못했지만 전매특허인 막판 질주로 여유있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전날 1차 레이스에서도 우승을 차지한 이상화는 이로써 올 시즌 3번의 월드컵 시리즈에서 6번의 레이스에 출전해 6번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갔다. 이상화는 앞서 캐나다 캘거리에서 열린 1차 대회와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2차 대회에서 4번의 레이스 모두 금메달을 차지했고, 그 중 3번이나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상화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감기몸살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이상화의 질주를 막지는 못했다. 한편, 남자 500m 디비전A 1차 레이스에 출전한 모태범(24·대한항공)은 35초09의 기록으로 9위에 머물렀고, 이강석(28·의정부시청)은 35초46으로 17위에 그쳤다. 모태범은 이어진 남자 1000m에서 10위(1분9초56)에 자리했다. 허승 기자 raison@hani.co.kr /한겨레 2013.12.01 16:21 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613440.html
구 소련에서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가 발생했던 1986년 4월. 당시 기자는 어린 초등학생이었지만 '체르노빌'과 '산성비'라는 말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체르노빌 사건 이후 비 오는 날이면 "비를 맞으면 방사능에 오염되어 죽거나 산성비에 머리가 다 빠진다"며 친구들과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다. 사상 최악의 원자로 사고인 체르노빌 사건을 다룬 러시아 최초의 영화 <아브로라>(www.aurorakino.com, 러시아어)가 지난 11월 30일 러시아에서 개봉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1986년 4월 26일 1시 23분 44초 구소련의 우크라이나 공화국 키에프시 북방 약 130km 떨어진 체르노빌의 핵발전소 제4호기가 폭발했다. 이로써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보다 100배나 많은 방사능이 유출됐다. 정인고(smolin) / 오마이뉴스 2006-12-11 18:00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9348
국회 행정자치위원회는 30일 법안심사 소위를 열어 한글날을 국경일로 승격시키는 내용의 국경일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global&uid=27495
서울과 평양이 2000년 11월 30일 또 다시 오열의 바다로 변했다. 남과 북의 이산가족 200명은 이날 분단 반세기동안 헤어져 살아온 가족-친척과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서울의 강남 센트럴시티 밀레니엄 홀과 평양의 고려호텔 2~3층에서 이뤄진 단체 상봉에서 이산가족들은 이름과 번호가 적힌 명찰을 확인하기도 전에 달려가 부둥켜 안고 흐느꼈다. 100세의 할머니, 81세의 할아버지도 백발이 성성한 아들의 손을 잡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1차 상봉때와 달리 이번 상봉에는 북측의 가족들이 '장군님 만세' 등의 체제선전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 분위기가 한때 어색해지기도 했다. 또한 북한은 공동취재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조선일보 사진기자를 3시간동안 억류해 필름을 압수한 후 우리 대표단의 항의를 받고 풀어주기도 했다. 이산가족들은 2박3일간 눈물의 밤을 지새고 12월 1일 다시 헤어져 기약없는 이별의 순간을 보내야 했다. /조선
1995 - 검찰, 12·12사건과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 12·12사건은 전두환과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재임한 1993년 초까지 혁명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 상황은 반전되었다. 1995년 11월 30일 검찰은 12·12사건과 5·18사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재수사에 착수하였다. 12월 19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1996년부터 전두환·노태우 피고인에 대한 12·12사건, 5·18사건 및 비자금 사건 관련 공판이 진행되었다. 1997년 4월 17일 재판부는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내란목적살인 행위였다고 단정했다. 이로써 폭력으로 군권이나 정권을 장악한 쿠데타는 성공하더라도 사법심판의 대상이며 형사책임을 배척할 수 없다는 판례를 남겼다. (12.12사건) 전대양(관동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2007. 12. 01 /국가기록원-나라기록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4405
1989 - 한국의 쇼트트랙 선수 이정수(李政洙) 출생 이정수 [李政洙, 1989.11.30~ ] 이정수(李政洙, 1989년 11월 30일 ~ )는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이다. 이정수는 광문고등학교 재학 중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뽑혔다.고등학교 3학년 때인 2008년 주니어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 500m에서 금메달, 종합 2위에 오르며 두각을 나타낸 이후 성인 무대에서도 실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2010년 밴쿠버 올림픽을 앞둔 2009-2010 시즌 컨디션을 끌어 올렸다. 대표 선발전에서 2위, 월드컵 4차 대회에서 1위에 오르는 등 꾸준히 상위권에 들며 1000와 1500m 월드컵 순위 1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2010년 밴쿠버 동계 올림픽 남자 1500m와 10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2008년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입학하였다. 주요 성적 수상 * 2010년 제21회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0m 계주 은메달 * 2010년 제21회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000m 금메달(올림픽 신기록) * 2010년 제21회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1500m 금메달 * 2009년 쇼트트랙 세계 팀 선수권대회 남자팀종합 1위 * 2009년 쇼트트랙 월드컵 6차 대회 5000m계주 2위 * 2009년 쇼트트랙 월드컵 5차 대회 남자1000m 2위 * 2009년 쇼트트랙 월드컵 5차 대회 1000m 3위 * 2009년 쇼트트랙 월드컵 4차 대회 남자1500m 1위 경력 * 2010년 제21회 밴쿠버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국가대표 * 2006년 - 2008년 주니어 쇼트트랙 국가대표 /위키백과
정일권 박준규 문익환씨 등 정치활동 피규제자 84명에 대한 3차 해금조치가 1984년 11월 30일 단행돼 이날부로 정치활동이 가능해졌다. 이들은 1,2차 해금에서 제외되었던 인사 99명 중 15명을 제외한 인사들이다. 지난 1980년 11월 5일 공포된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정치활동을 규제받았던 5백67명 중 2백50명은 1983년 2월 25일에 단행된 1차 해금에서 풀려났으며, 202명은 1984년 2월 25일 2차 해금으로 풀려난 바 있다. 규제대상자 중 16명은 규제 기간중 사망해 피규제자로 남아 있었던 사람은 99명이었다. 이번 3차 해금조치는 정치적 비리와 혼란으로 정치활동을 규제 받아온 극소수의 인사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유로운 정치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으며 정치풍토 쇄신법에 의한 피규제자 5백67명중 97%가 4년전의 `자유`를 회복함으로써 그동안 계속되어온 정치적 과도기가 종식됐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었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씨 등 15명은 이번 해금에서 제외됐다. /조선
1977 - 수출 100억불 달성 발표 박정희는 정책적으로 육성해야 할 업종만을 골라 선별적으로 개발하도록 지시하고, 6대 업종을 선정하여 1973년부터 1981년까지 9년간 구체적 연차계획을 수립토록 하였다. 또한 규모에 맞는 경제개념을 도입하고, 공업구조의 고도화를 추진하였고, 국토종합개발계획에 근거를 두고 산업기지를 설정하는 등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들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이성우 (lsw1203) 2006-08-11 /조인스 토론방 http://assembly.joins.com/content.asp?tb_name=d_politic&board_idx=36502&page=1
1980년대부터는 주요 수출품목이 경공업제품에서 자동차 등 중화학 공업제품으로 점차 바뀌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1995년 11월 세계에서 열두번째로 수출 1천억달러를 돌파했다. /YTN [무역의 날 연혁] 1964.11.30 - 수출 1억불 달성, 수출의 날 제정 1964.12.05 -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 거행 1973.03.30 - 중소기업의 날(5월 1일)과 상공인의 날(10월 31일)이 수출의 날로 통합 1977.11.30 - 박정희 대통령,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수출 100억불 달성 발표 1987.00.00 - 무역의 날로 명칭 변경 1995.11.00 - 수출 1000억불 달성 2005.12.23 - 전자산업 수출 1000억불 달성
몰디브(Maldives)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67년 11월, 북한과는 1970년 6월에 수교하였으며, 1970년 이후 한국은 물자의 원조·기증을 계속하고 있다. 1993년 외무장관 자밀이 비공식 방한하였다. 양국간에는 문화협정(1984), 경제·기술협력협정(1984), 항공협정(1990)이 체결되었다. 1999년 현재 대(對) 한국 수입은 101만 7000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섬유류, 기계류, 전기기기, 플라스틱 등이다. /naver
아라비아 반도 남단에 위치한 항구도시 아덴!
1967 - 아일랜드의 시인, 소설가 패트릭 카바나(Kavanagh, Patrick) 사망 카바나 [Kavanagh, Patrick, 1904.10.21~1967.11.30] Patrick Kavanagh (21 October 1904 – 30 November 1967) was an Irish poet and novelist. Regarded as one of the foremost poets of the 20th century, his best known works include the novel Tarry Flynn and the poems Raglan Road and The Great Hunger. His work can best be categorised as accounts of Irish life and achieved a universal appeal through reference to commonplace.
서인도제도의 남쪽에 있는 영연방에 속하는 독립국 바베이도스(Barbados)는 1838년 노예 해방법이 통과되었고 유색인종으로는 처음으로 새무얼 잭먼 프레스코가 상원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유색인종들의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1886년 흑인인 콘래드리비스 경(卿)이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1937년 부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폭동이 일어났으며 그랜틀리 애덤스(Grantley Adams)와 같은 교육받은 흑인들은 진보연맹, 바베이도스 노동자동맹과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1947년 선거에서 바베이도스 노동당(BLP)이 승리하여 집권하였고, BLP는 나중에 민주노동당과 1989년 국민민주당으로 나누어졌다. 1954년 그랜틀리 애덤스가 총리가 되었고 1958년 서인도 연방의 일원이 되면서 그랜틀리 애덤스가 이 연방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66년 11월 30일 339년 만에 영국령에서 독립하였고 초대총리로 민주노동당의 에롤 배로(Errol Barrow) 경이 취임하였다. 1966년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회원국이 되었고, 1971년 선거에서 에롤 배로 경이 승리하여 다시 총리가 되었다. /naver
1964 - 수출 1억 달러 달성 (수출의 날 제정, 12월 5일 기념식) 상공부당국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연말을 꼭 1개월 앞둔 11월 30일, 우리나라의 수출이 사상 최초로 1억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11월말 현재의 수출실적은 1억 139만 2천 달러. 12월 2일, 이 감격적인 순간의 발표는 김정렴 상공부차관이 맡았다. 박충훈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에 앞서 11월 6일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서독에 파견됐기 때문이었다. 상공부는 12월 2일 장관담화를 통해 "수출실적이 1억 달러를 돌파함으로써, 우리가 염원하던 자립경제의 확립과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점이 마련됐다"고 밝히고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을 12월 5일 거행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http://ceoi.org/7ceoi(text)/7ceoi(text-11).htm
1961 - 유엔사무총장에 미얀마의 UN대사 우탄트(U Thant) 임명 우탄트 [U Thant, 1909.1.22~1974.11.25] 미얀마의 교육가이자 정치가. 판타나우 출생. 양곤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의 국립고등학교 교사 ·교장을 지냈다. 1947년 반(反)파시스트 버마인민자유연맹(BAFPFL)의 교육선전부장을 역임하다가, 아웅산의 권유로 정부의 정보성에 들어가, 총리부에서 근무하였다. 1948년 미얀마 독립 후 주미대사 ·UN대사로 활약하였다. 1961년 11월 임시 사무총장에 임명되었다가 1962년 2월 정식으로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콩고 ·쿠바 ·베트남 문제 해결에 노력하였는데, 1966년 9월 UN의 약체화와 사무총장의 무력화를 이유로 재선 사퇴의사를 밝혔으나, 미국 ·소련을 포함한 각국의 재임 간청으로 1971년 12월까지 재임하였다. 1974년 뉴욕에서 암으로 사망한 후 시신은 양곤으로 옮겨졌다. 저서에 《세계평화를 위하여 Toward World Peace》(1964) 《유엔에서 본 관점 View from the UN》(1978, 유고집) 등이 있다. 1965년 네루상을 수상하였다. /naver 1954 - 독일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Furtwängler, Wilhelm) 사망 푸르트벵글러 [Furtwängler, Wilhelm, 1886.1.25~1954.11.30] 독일의 지휘자. 낭만음악의 보급에 위대한 선구가 되었으며 열정적·낭만적 스타일로 유명했고, 특히 베토벤과 바그너의 작품 연주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고고학자 아돌프 푸르트벵글러의 아들이며, 뮌헨에서 공부하면서 지휘자 펠릭스 모틀의 보조 지휘자로 일했다(1907~09). 1915년 만하임 오페라단의 감독이 되었고, 1920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후임으로 베를린 오페라단의 지휘자가 되었다. 1922년 아르투르 니키슈의 후임으로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콘서트의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밖에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22),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30), 바이로이트 음악축제(1931~32), 베를린 국립 오페라(1933) 등의 지휘자로 일했다. 이어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과 영국 전역을 순회공연했다. 나치 통치기간 동안 대부분 독일에서 지휘했다. 1936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자리를 수락했지만,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들어가지 못했다. 그의 나치 협력으로 인한 죄과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무죄방면되었으나, 1949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임명 때도 또다시 대중의 감정때문에 계약을 취소해야 했다. /브리태니커
미국의 군사행동은 중국의 위기의식을 더욱 크게 했고, 마침내 중국은 1950년 10월 말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중국 홍군의 최고 지도자 중의 하나인 팽덕회를 사령관으로 하는 인민지원군 약 60만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북한 쪽에 유리하게 기울어 한때 다시 서울이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은 다시 수복되었고 원래의 경계선이었던 북위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마이 데스크-중국사 100장면 2
- Marshal Carl Gustaf Mannerheim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적군(붉은 군대)이 핀란드를 침공했다. 핀란드는 오랫동안 스웨덴과 러시아 등 강대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1917년 12월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39년 가을, 소련은 핀란드에 일부 영토 합병을 요구했다. 핀란드가 이를 거절하자 약 100만에 이르는 소련 군대가 핀란드로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핀란드인들의 노련하고 효과적인 방어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40년 2월 소련군은 핀란드 남부에 대대적인 폭격을 퍼부으며 북진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데 실패한 핀란드는 결국 1940년 3월 12일 소련과 강화조약을 맺고, 서부 카렐리야를 소련에 할양하는 한편, 항코 반도에 소련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 전쟁을 '겨울전쟁'이라고도 한다. /브리태니커
[지금 이곳에선]양동칠/'핀란드 첨단산업' 선진국도 견학 동아일보 : 1999/12/14(화) 글:양동칠 전 핀란드주재 한국 대사 /재핀란드한인학생회 http://www.suomikorea.com/kosafi/report/2915/page/14
- Queen Victoria and the Crystal Palace 1936 - 런던 '수정궁' 화재로 소실 [역사 속의 인물] 런던 '수정궁' 설계한 조셉 팩스턴 1851년 5월 1일 런던박람회가 열리면서 영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빅토리아 여왕이 박람회장을 열다섯 번이나 방문할 정도로 영국인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런던박람회의 최고 명물은 '수정궁'(Crystal Palace)이었다. 길이 563m, 너비 124m, 높이 33m에 이르는 수정궁은 벽돌 한 장 사용하지 않고 철골과 유리로 지어졌다. 수정궁은 당시 건축기술로는 너무나도 혁신적인 건물이었다. 수정궁을 설계한 이는 조셉 팩스턴(1803~1865)이다. 팩스턴은 건축가가 아니라 정원사, 온실 설계자였다. 식물에 조예가 깊었던 팩스턴은 남미산 열대 수련의 꽃을 피워, 당시 빅토리아 여왕에게 바치기도 했다. 열대 수련은 잎의 지름이 150㎝를 넘는데 어린이를 올려놓아도 될 만큼 튼튼했다. 팩스턴은 지붕의 서까래처럼 서로 연결돼 있는 엽맥 때문에 열대 수련이 튼튼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이를 건물 설계에 응용했다. 그 성과물이 수정궁이었다. 만국박람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진 뒤 수정궁은 1852년 해체돼 교외로 옮겨져 재조립됐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쇼, 전시회, 음악회 등이 열리는 명소로서 사랑받던 이 기념비적 건물은 1936년 오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김해용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2년 11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730&yy=2012
1918 - 여운형, 한국독립 요청서를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전달 [1918년 독립운동기 약사] 1월 17일, 고등고시 및 보통고시령 공포. 18일, 총독부, 《조선어사전》 편찬, 간행(1910~). 11월 15일, 신한청년당원 여운형,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과 회견. 20일, 미주 교포단체들, 윌슨 미국대통령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 제출. 30일, 여운형, 파리강회회의와 미국대통령에게 보낼 한국독립 요청서를 크레인에게 전달 12월 5일 영친왕과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미사코와 혼인을 발표.
민영환 [閔泳煥, 1861.7.2(25)~1905.11.30] 계정 민영환 선생이 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에 항거하며 이완식의 집에서 유서 3통을 남기고 45세의 나이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민영환은 1861년 서울에서 병조 판서 민겸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17세의 나이로 정시 문과에 급제한 뒤 예조·병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거쳐 1895년 미국주재 전권대사에 임명됐다.
- '1948-C' 1904 - 미국의 화가 클리포드 스틸(Still, Clyfford) 출생 스틸 [Still, Clyfford, 1904.11.30~1980.6.23] 미국의 화가. 노스 타코다 주 그란딘에서 출생, 뉴욕에서 사망. 스포켄 대학, 워싱턴 주립대학 대학원에서 수학. 처음에는 어두운 표현주의적인 구상의 작품이었으나 1940년대 말부터 미국의 자연을 상기시키는 색상으로 추상적인 작품을 만들어 뉴만, 로드코등과 같이 추상표현주의의 한쪽 기수의 역할을 함. 대표작 『회화』(1951, 뉴욕 현대미술관). /미술대사전(인명편)
- Oscar Wilde(1882) - Oscar Wilde by Toulouse-Lautrec
와일드 [Wilde, 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1854.10.16~1900.11.30] 역사속의 오늘-극작가 오스카 와일드 사망 “남자는 권태를 느끼기 때문에 결혼하고 여자는 호기심 때문에 결혼한다. 그리고 양쪽이 모두 실망한다.” “남자와 여자와의 사이엔 우정이 있을 수 없다. 정열·정의·숭배·연애는 있다. 그러나 우정은 없다.”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인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말의 일부이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900년 11월 30일 오스카 와일드가 신부와 친구, 하숙집 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사인은 뇌막염이었다. 유명한 안과의사·고고학자인 아버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와일드는 17세 때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입학한 뒤 장학금을 타고 그리스어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괴테, 보들레르 등의 저작에도 통달했을 정도로 교양도 많았다. 시대를 풍미했던 유미주의를 표방하며 인기를 끌었지만 1891년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과 만나면서 비운의 운명을 살게 됐다. 동성연애 관계는 와일드의 시간을 빼앗았고, 결국엔 그로 인해 감옥에 가게 하였다. 서서히 그를 파괴했던 것이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년 11월 29일
- Gibraltar, 50 Pounds (Banknote)
처칠 [Churchill, Winston Leonard Spencer, 1874.11.30~1965.1.24] [역사 속의 인물]처칠 어머지 제니 제롬 영국을 2차대전 승전국으로 이끈 윈스턴 처칠이 1874년 오늘 어머니 제니 제롬에게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말썽꾸러기 낙제생이었던 그가 대영제국의 총리에까지 오른 것은 어머니의 살뜰한 보살핌 때문이다. 미국의 투기꾼 거부(巨富) 레너드 제롬의 딸이었던 제니는 원조 '달러 공주(dollar princess)'로 불린다. 달러 공주란 유서깊은 가문의 유럽 귀족과 결혼하기 위해 막대한 지참금을 싸들고 영국으로 건너온 미국 졸부들의 딸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단한 미인이었던 그녀가 처칠의 아버지인 랜돌프와 결혼한 것은 치밀한 각본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랜돌프는 영국 최고 명문가로 꼽히는 말버러 공작 처칠 가문의 둘째 아들로, 달러 공주의 주요 표적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지참금 5만 파운드로 '레이디 랜돌프 처칠'이란 명예로운 호칭을 얻은 그녀는 타고난 미모를 바탕으로 단번에 영국 사교계의 꽃으로 떠오르며 랜돌프가 하원의장, 재무장관으로 오르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육군사관학교 입시에서 두번이나 낙방한 아들 윈스턴이 세번째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제니가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다. 역시 훌륭한 어머니 밑에 훌륭한 아들이 나오는 법이다. <정경훈 논설위원>/매일신문 2009년 11월 30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338&yy=2009
몽고메리 [Montgomery, Lucy Maud, 1874.11.30~1942.4.24]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 1874년11월 30일 - 1942년4월 24일)는 캐나다의 소설가이다. 유명한 《빨간 머리 앤(Anne of Green Gables)》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는 그녀가 남긴 일기, 원고 등이 있는데, 그녀의 생가는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생애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태어났고, 2살때 어머니가 죽었다. 그래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손에서 자랐으며, 15살때 시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의 재능을 보였다. 첫 작품은 1908년 발표한 《빨간 머리 앤》이며, 500달러라는 헐값의 인세가 지불되었다. 하지만 낭만적인 소설내용에 매료된 애독자들이 생겨서 《에이번리의 앤》등의 후속작품들을 발표, 나중에는 친구 길버트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둔 중년부인으로서의 앤까지 만들어냈다. 1942년 그녀가 토론토에서 죽은후, 장로교 목사이자 남편 R.E 맥도널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위키백과
달렌 [Dalén, Nils (Gustaf), 1869.11.30~1937.12.9] 스웨덴의 발명가. 가스등의 자동태양 밸브 장치(솔벤틸)를 발명하여 그 공로로 191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솔벤틸은 햇빛의 작용에 따라 새벽에는 꺼지고 저녁이나 어두울 때는 자동적으로 켜지는 편리한 발명품이다. 이후 이 장치는 급속도로 전세계에 퍼져서 바다에 띄우는 부표(浮標)나 무인 등대에 널리 이용되었다. 1906년에 아세틸렌 가스를 판매하는 가스용기회사(Gas Accumulator Company)의 수석기사가 되었고, 가스와 터빈을 연구하면서 열공기 터빈 기관과 드 라발(de Laval) 증기 터빈을 편리하게 개량했다. 1909년에 그 회사의 전무이사가 되었고 그해 아세틸렌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진 아가마산(Agamassan)을 발명해서 폭발위험 없이 가스를 농축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1913년 실험중에 폭발사고로 장님이 되었지만, 죽을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브리태니커 - The 150th anniversary of the Battle of Sinop 1853 - 시노프 해전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30일] <1563> 시노프 해전 1853년 11월30일 오후1시 오스만튀르크 북부 시노프(Sinop)항. 11척으로 구성된 러시아 함대가 정박 중인 오스만 함대를 덮쳤다. 싸움은 불과 1시간 만에 끝났다. 러시아의 완벽한 승리. 단 한척도 잃지 않고 오스만해군의 12척 전투함 중 11척을 침몰시키고 해안포대까지 잠재웠다. 크리미아전쟁에서 패배해 흑해를 통한 대양진출이 막힌 러시아는 부동항을 찾아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시베리아 개발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새화도 이런 맥락에서다. 부질없는 상상이 떠오른다. 시노프해전이 없었다면? 러시아의 동방진출도, 조선을 둘러싼 구한말 열강의 대립도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을까. 권홍우편집위원 /서울경제 2009/11/29 17:37:43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911/e2009112917374297490.htm
트웨인 [Twain, Mark, 1835.11.30~1910.4.21] [오늘속으로] 마크트웨인 1835년 11월 30일, 뒷날 마크트웨인이라는 필명으로 '톰소여의 모험'(1876), '미시시피강의 생활'(1883), 허클베리핀의 모험'(1884)등의 소설을쓸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가 미국 미주리에서 태어났다. 1910년 몰(歿). 트웨인의 부모는 가난한 개척민이었다. 네살때 가족을 따라 미시시피 강가의 해니벌로 이사를 간 트웨인은 열 두살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가 책을 접한것은 아버지르 여읜뒤 인쇄소의 견습공이 돼서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0036935
- 'Innocence' - 'Late Afternoon'
- 'Cupid and Psyche' - 'The Three Marys at the Tomb' (detail) 1825 - 프랑스의 화가 부그로(Bouguereau, William-Adolphe) 출생 부그로 [Bouguereau, William-Adolphe, 1825.11.30~1905.8.19] 프랑스의 화가. 1825년 라 로셸(La Rochelle)에서 태어났다. 1843년부터 1850년까지 에콜데보자르에서 공부했으며 피코(Picot)의 문하에서 작업했다. 50년 동안 해마다 파리 살롱전에 작품을 꾸준히 출품했다.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은 완성하지 않은 스케치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여 살롱에 전시되는 것에 반대 입장을 표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그의 작품은 새로운 조명을 받으며 1984년 파리와 몬트리올 등지에서 주요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대부분의 작가와 마찬가지로 그도 형식과 기법면에서 매우 엄격하고 신중했으며 고전주의적인 조각과 회화를 깊이 있게 탐구했다. 또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를 완전하게 익힌 다음에야 작업에 착수했다.
몸젠 [Mommsen, (Christian Matthias) Theodor, 1817.11.30~1903.11.1] 독일의 역사가, 작가. 1817년 11월 30일 슐레스비히 가르딩에서 출생하였다. 역사가 빌헬름의 조부이다. 1838~1843년 킬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였다. 1848년 혁명 이후 라이프치히대학교 민법 교수로 있었으며,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여 교수직이 박탈되었다. 1852년 취리히에서 법률학 교수직을 맡았다.
말피기 [Malpighi, Marcello, 1628.3.10~1694.11.30] 이탈리아의 생리학자. 크레발코레 출생. 1645년 볼로냐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의학을 수학, 1653년에 졸업하였다. 1656년 피사대학, 1660년 볼로냐대학, 1662년 메시나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나, 4년 후 다시 볼로냐대학으로 돌아가 25년간 교수로 재직하였다. 1691년 로마로 가서 교황 이노켄티우스 12세의 시의가 되었다. 개구리의 폐와 방광을 현미경으로 관찰하여, 1661년에는 모세혈관 내의 혈행을 발견하고, W.하비 사후 4년 만에 동맥에서 정맥으로의 이행을 관찰하여 혈액순환론을 완성하였다. 신체 내장의 미세 구조에 관한 중요한 연구가 있고, 곤충의 배설기관인 말피기관(管)과 신장의 신소체(말피기소체)를 발견하였다. /naver
1667 - 아일랜드의 풍자작가, 성직자 스위프트(Swift, Jonathan) 출생 스위프트 [Swift, Jonathan, 1667.11.30~1745.10.19] 영국의 풍자작가, 성직자, 정치평론가. 아일랜드 더블린 출생. 유복하였으나 아버지가 그의 탄생 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백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더블린의 트리니티칼리지를 졸업한 뒤 은퇴한 외교관으로 정치인이었던 W.템플의 비서가 되어, 그 집에 기식하였다. 그 때까지의 생활이 후년의 풍자작가 스위프트의 성격 형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694년 한때 템플가(家)를 나와 아일랜드에서 영국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나, 곧 템플가로 되돌아갔다가 템플이 죽자 다시 아일랜드로 가서 성직에 복귀하였다. 그 후부터 정치에 야심을 갖고, 이따금 런던을 왕래하였고, 당시 2대 정치세력이던 휘그당과 토리당 양쪽에 접근, 팸플릿을 써서 논전(論戰)을 폈다. 1730년대 말엽부터 정신착란 증세가 나타나, 1742년에는 발광상태에 빠졌다. 스위프트의 이름과 함께 반드시 연상되는 2명의 여성, 스텔라라고 불리는 에스터 존슨과 바네사라고 불리는 에스터 바넘리의 어느 쪽에 대해서도 정상적인 애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관계는 전기상 흥미깊은 문제이다. 주요저서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1726)를 비롯하여, 정치 ·종교계를 풍자한 《통 이야기 A Tale of Tub》(1704) 《책의 전쟁 The Battle of the Books》(1704), 스텔라 앞으로 된 일기적 서간집 《스텔라에게의 일기 The Journal to Stella》(1710∼1713) 등이 있다. /naver
- Andrea Palladio - 'Villa Rotunda' 1508 - 이탈리아의 건축가 팔라디오(Palladio, Andrea) 출생 팔라디오 [Palladio, Andrea, 1508.11.30~1580.8.19] 이탈리아의 건축가. 비첸차 출생. 처음에는 석공 ·조각가로 활약하였으나 동향 시인 토리체노의 비호를 받아 로마로 유학하고,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와 로마의 유적을 연구한 후, 고향에 돌아와 수많은 궁전과 저택을 설계하였다. 이 기간의 대표작으로 빌라 로톤다(1550∼1553)가 있다. 1546년 이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산 지오르지오 마조레(1566 착공:사후에 스카모치에 의해 완성)와 이루 레덴토레 등 그 도시의 뛰어난 건축물의 조영에 공헌하였다. 만년의 작품으로는 비첸차의 테아트로 올림피코(사후 스카모치에 의해 완성)가 중요 작품이다. 《로마의 유적 Antichita di Roma》(1554) 《건축 사서(四書) I Quattro Libri dell’ Architettura》(1570) 등의 저서도 있으며, 18세기 영국의 신고전주의 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naver
- 'Leaving from the Hunt' from 'the Book of Hours' of duc de Berry'
베리 [duc de Berry, Jean de France, 1340.11.30~1416.6.15] 프랑스의 손꼽히는 예술후원자. 선량왕 장 2세의 셋째 아들로, 백년전쟁 중기에 프랑스 영토의 1/3 이상을 다스렸다. 선량왕 장 2세의 셋째 아들로, 백년전쟁 중기에 프랑스 영토의 1/3 이상을 다스렸다. 1356년 푸아티에 백작작위를 받았으며 아버지가 잉글랜드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국왕 대신 오베르뉴·랑그도크·페리고르·푸아투를 통치했다(1358). 그리하여 그는 형인 샤를 왕세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영토 가운데 넓은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1360년에는 새로 공작령으로 승격한 베리와 오베르뉴를 아버지로부터 하사받았다. 1364년 이래 형 샤를 5세의 재위기간에 그는 국방을 위해 토지에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결국 그의 억압적인 정책 때문에 샤를이 죽은(1380. 9. 16) 후 농민반란(1381~84)이 일어났다. 새로운 국왕 샤를 6세가 너무 어려서 직접 통치할 수 없었던 기간에 그는 섭정위원회의 일원으로(1380~88) 왕권을 공유했다. 그는 프랑스 통치를 돕기 위해 자신의 도움으로 창설된 12인위원회의 구성을 도왔으며 이에 참여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는 이 위원회에서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과 협상하고 교황에게 중재를 요구하며 잉글랜드에 대한 공격을 연기하도록 함으로써 잉글랜드와의 화평을 위해 노력했다. 1405년 부르고뉴 공작 장과 자신의 형제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사이의 분쟁에서 일시적인 화해를 주선했으나 1410년 후에 아르마냐크파로 불리게 된 오를레앙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1412년 부르고뉴파의 공격을 받은 후, 오세르 협상(1412)과 퐁투아즈 협상(1413)에서 중재자 역할을 다시 맡았다. 또한 샤를 6세의 계획(1명의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 2명의 교황들이 은퇴하는 것)이 아비뇽에 있는 대립교황 베네딕투스 13세에게 전달되도록 도왔으나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아르마냐크파). 일생 동안 예술을 장려하기 위해 돈을 아낌없이 내놓았으며 그림·태피스트리·보석세공품·금박사본 등(그중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리 공작의 부유한 시절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이 포함되어 있음) 귀중품에 재산을 투자했기 때문에 그가 죽었을 때는 장례비용도 부족했다. /브리태니커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