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리(廣石里)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에 있는 리(里).
뒤로 산지가 위치해 있으며 시가지가 발달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광릉말, 아랫광릉말, 민대머리, 뒷들 등이 있다. 광릉말은 너븐돌 서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아랫광릉말은 광릉말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민대머리는 뒷산에 나무가 없어 이름 붙여졌다. 뒷들은 평야의 들이 넓어 붙인 이름이다. 뒷골말은 뒤에 있는 마을이라 붙은 이름이다.
광석리(廣石里)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에 위치한 리(里).
넓은 들판에 자리한 농촌이다. 동구 앞에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광석이 있으므로 광석리라고 하는데 지금은 광석은 없어지고 한, 두 사람이 앉을 만한 작은 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속칭 "넓은돌이"또는 "나분돌이"라고도 한다.
광석리(光石里)
충청남도 계룡시 엄사면에 있는 리(里).
옛날 이 마을 한복판에 농번기에 마을사람들이 둘러앉아 점심이나 새참을 먹으며 쉬던 큰 바위가 있어 마을 이름을 '너분돌'이라 불렀다. 이를 한자로 광석(廣石)이라 표기하다가 광석(光石)으로 고쳐 쓰게 되었으며, 마을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연산군(連山郡) 식한면(食汗面)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사봉리(沙峰里)·내송리(內松里)·향한리(香汗里)·이동(梨洞)·화악리(花岳里)·유동(柳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광석리로 논산군 두마면에 편입되었다.
-이후 1996.3.1 논산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논산시 두마면에 속하다가
-2003.9.19 새로 설치된 계룡시 두마면에 속하였고,
-2006.3.20 새로 설치된 계룡시 엄사면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오공곡(蜈蚣谷)·합한리(合汗里)·산직말 등이 있다. 광석리 북쪽에 있는 오공곡은 지네의 입처럼 생긴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옹골이라고도 한다. 합한리는 합한이·화판이·학판이라고도 하며, 산직말은 산직촌이라고도 한다. 들판으로는 광석리 서북쪽에 하기들이 있고, 그 위쪽에 돌리들이 있다. 하기들 동쪽에 해발 118m의 호미산(虎尾山)이 있어며, 방죽안 동쪽에는 붉터마당이라고도 부르는 해발 144m의 마당모퉁이라는 산이 있다. 유적과 유물로는 원통사(圓通寺)가 있던 절터와 독립운동가 오진문(吳進文)의 묘, 김병희(金炳僖)의 공적비, 민속신앙으로 산제(山祭)를 지내는 산제당 등이 있다.
광석리(廣石里)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에 있는 리(里).
평지가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마을 남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위로 광석들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광석, 감정골, 앞거랑마을 등이 있다. 광석마을은 넓을 돌이 있어 너븐돌 또는 너븐들이라 불리던 것이 후에, 광석마을로 개칭되었다. 감정골마을은 전에 감나무가 많았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며, 앞거랑마을은 광석 남쪽 앞 거랑(내)가에 있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졌다.
광석리(廣石里)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에 있는 리(里).
평지에 위치하여 들판 가운데로 대곡천이 흘러나간다. 금마위소류지, 광석소류지 등 크고작은 못이 많으며, 벼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너른바우(광석), 곰실(웅곡), 뒷골, 북창, 새터, 아래북창, 웃북창, 장군바우 등이 있다. 광석은 마을에 넓은 바위가 있으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너른바우라고도 한다. 곰실은 지형이 곰의 형국이라 한다. 북창은 전에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뒷골은 북창 뒤쪽에 있는 마을이며, 새터는 곰실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다. 문화유적으로 하경완송덕비, 강씨효자문 등이 있다.
광석리(廣石里)
광석리는 현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의 1914년 이전 명칭이다.
광석리는 마을 뒷동산에 넓은 바위가 많이 있으므로 광석골 또는 광석리(廣石里)라고 한 데서 지명이 유래되었다.
1908년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양주군은 32개 면으로 되어 있고 노원면은 19개 리로 나뉘어 있는데 이 중 광석리는 현재의 중계동에 해당된다.
-1914.4.1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양주군 노원면은 해등촌면과 통합하여 노해면이 되고, 광석리는 은행리·납대동·전주리와 오목리 · 양재동 각 일부를 합하여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가 되었다. → 중계동 [법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