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영혼
- 다니엘 스틸 장편소설
1
한 줄기 햇살이 길다란 프랑스식 창문으로 비춰들자 집안의 모든 것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거의 완벽한 솜씨로 잘 새겨진 장미꽃과, 여인의 흉상이 새겨진 마호가니 장식물이 반들반들하게 윤이 날 정도로 곱게 손질되어 있었다. 방 한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길다란 탁자 또한 그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보물들로 말미암아 잘 드러나진 않았지만 최상의 품질인 것임에 틀림없었다.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비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쟁반들, 레이스가 달린 테이블보, 최고급 크리스탈 식기 두 세트, 그리고 은으로 만들어진 양념통, 은촛대 14개가 그 탁자 위에 쌓여 있었다.
여봐란듯이 탁자 위에 진열되어 있는 그 값진 물건들은 모두 결혼 선물로 들어온 것들이었다. 테이블 한쪽 모서리에는 선물을 보낸 사람의 이름과 품목을 적을 수 있도록 그래서 나중에라도 신부가 시간이 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종이와 까만색 만년필 한 자루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녀 중의 한사람이 매일같이 그 물건들의 먼지를 털어내는 역할을 맡았으며, 하인의 우두머리가 은제품에서 그 집안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윤이 나고 있는지를 검사했다. 결코 의식적으로 과시하려는 것 같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의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는 듯했다.
육중한 대문과 잘 손질된 울타리, 혹은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무겁게 드리워진 비단 커튼 또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끌게 했다. 드리스콜의 그 저택은 마치 무슨 요새와도 같아 보였던 것이다.
한 여인의 목소리가 계단을 통해 홀 안으로 울려 퍼졌다. 뒤이어 조그만 히프와 늘씬한 다리, 그리고 어깨의 곡선이 유난히도 아름다운 젊고 키가 큰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비단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쪽두리를 얹은 그녀는 기껏해야 2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선 드레스 자락의 부드러움 말고는 전혀 부드러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 선물 더미를 한번 죽 훑어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로 몇 걸음 더 다가가서 종이에 적힌 이름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스터, 튜더, 반 캠프, 스터링, 플러드, 왓슨, 크락커, 토빈...... 그들은 모두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의, 아니 이 나라의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유명한 이름들에 유명한 사람들, 게다가 하나같이 훌룡한 선물들이었지만, 그녀는 그다지 기쁘지도 않은 듯 담담한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가서 정원을 물끄러미 바라다보았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래왔듯이 정원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해마다 봄이 오면 정원에 심곤 하던 현란한 색채를 머금은 튜울립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꽃 뿐만 아니라 정원 전체를 그녀는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그녀는 그날 하루 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천천히 숨을 한번 내쉰 다음 몸을 돌려 선물 더미가 쌓인 테이블을 힐끗 쳐다보았다. 확실히 훌륭한 선물들이었다. 그녀 역시, 마음만 먹으면 훌륭한 신부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오드리 드리스콜은 자신의 가느다란 팔목을 들어 올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다이아몬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조그만 루비가 다이아몬드 사이에 박힌 그 시계를 무척이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 집에는 세 명의 하녀와 청지기 한 명, 윗층의 침실들을 청소하는 하녀, 주람의 요리사와 그 조수, 정원사 두 명, 운전사 한 명, 이렇게 모두 열 명의 하인이 있었다.
오드리는 하와이에서 돌아온 이후 14년 동안 이 저택을 꾸려오고 있었다. 호놀룰루에서 양친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오드리는 열한 살이었고, 여동생 아나벨은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기 말고는 있을 곳이 없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들이 이곳에 처음 도착했던 안개 낀 어느 날의 아침을 마음 속에 떠올려 보았다. 아나벨은 그때 그녀의 손을 붙잡고 겁에 질린 채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렸었다.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내내 멀미에 시달렸던 자신과 아나벨을 위해 가정부를 보내 주어 어려움을 덜어 주었지만 그로부터 십년 후엔 오히려 오드리 자신이 결국 독감으로 숨을 거둬버린 가정부 밀러 부인을 돌보아야만 했다.
하지만, 밀러 부인은 오드리에게 이런 훌륭한 고가를 꾸려 나가는 방법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던 바였고, 오드리 또한 밀러 부인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던 덕분에 이 저택을 완벽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 드리스콜이 식당으로 들어가는 동안 텅 빈 방안에서는 드레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밖에 들려 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식탁에 혼자 걸터앉은 그녀는 의자 옆에 달려 있는 루비와 비취로 장식된 벨을 눌렀다. 그녀는 항상 여기서 아침 식사를 하곤 했지만, 그녀의 동생은 정갈한 아침상을 봐 오도록 하여 이층에서 아침을 먹었다.
금방 앞치마와 머리 수건을 두른 하녀가 나타나 언재나 그렇듯이 꿋꿋한 자세로 자리에 앉아 있는 그 젊은 여주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부르셨어요. 드리스콜 아씨 ?"
"아침 대신 커피 한 잔만 갖다 주겠어요. 매리?"
"네, 드리스콜 아씨."
파란 눈 빛의 그녀에게서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드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그녀를 잘 알고 있는 하인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하인들은 오드리를 무척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 매리라는 하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리는 오드리 나이 또래의 처녀였는데, 오드리에 대해서는 그녀의 매서운 손과 강한 고집, 그리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약간의 유우머 감각 정도 밖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오드리의 모든 것은 그 깊고 파란 눈동자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단지 드리스콜 아씨이며 노처녀일 뿐 이였다.
하인들은 모두 오드리를 아씨라고 불렀다. 아나벨은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항상 공공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나벨의 머리칼은 천사와도 같은 부드러운 금발이었는데 30년대에 한창 유행하던 푸석푸석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오드리는 아직도 그들의 양친이 보라보라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숨을 잃고 난 후, 아나벨이 자신의 팔에 안겨 슬피 흐느끼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모험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었고, 어머니 또한 남편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곤 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남편이 영영 자신을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급기야 그녀는 바다 밑바닥까지 그를 쫓아 들어가고 만 것이다.
유해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들이 탔던 배는 거센 태풍에 난파되었던 것이다. 어린 딸들은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 그들에게 남은 혈육이라곤 할아버지 한 분밖에 없었는데, 가련한 아나벨은 그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무서워했었다. 할아버지가 한 번 쳐다보기라도 하면 아나벨은 겁에 질려 오드리의 손을 꼭 움켜쥐곤 했던 것이다.
오드리는 그때 생각을 하며 혼자 미소를 떠 올렸다. 여전히 그들에게 있어서 할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고, 특히 아나벨에게는 더욱 그랬다.
하녀가 은 주전자를 가지고 와서 오드리에게 커피를 따라 주었다. 상아로 된 손잡이가 달린 그 주전자는 그녀의 부모가 물려 준 다른 보물들과 마찬가지로 호놀룰루에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런 보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따라서 어머니가 사들인 물건들의 대부분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세계 각지를 돌아 다니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값진 보물들보다는 여행 때 찍은 사진들을 정리해 놓은 앨범을 더욱더 소중히 여겼다.
오드리는 지금까지도 그 앨범들을 자기 방의 책꽂이에 꽂아 두고 있었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괜히 잃어버린 외아들 생각만 자꾸 불러 일으키는 그 앨범들을 싫어했다. 그것들을 볼 때마다 '바보 같으니라구...' 이렇게 중얼거리기 일쑤였다. 할아버지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헛된 인생이었고, 그로 인해 어린 두 손녀만 자신이 떠맡게 되어 버린 셈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나벨에게 자수와 바느질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했고, 아나벨은 할아버지의 말씀에 충실히 따랐지만, 오드리에게는 어떤 요구를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바느질이나 그림에는 전혀 취미가 없었고 그렇다고 원예나 음식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림이나 시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박물관이나 교향악 같은 것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오드리가 좋아했던 것은 사진이나 모험집, 혹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 들이었다. 그녀는 황당무계한 연설을 들으려고 쫓아다니기도 했고, 해변에 나가서 눈을 감고 바다 냄새를 맡으며 파도가 밀려 오는 태평양 저쪽 끝을 떠 올려 보기도 했다.
그리고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위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갔으며, 하인들을 훌륭하게 다스리기도 했고, 매주 할아버지가 볼 책들을 장만하는가 하면 할아버지의 재산을 불려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아마도 그녀가 무슨 사업을 했더라면 커다란 재능을 발휘했을 테지만, 불행히도 그녀에게는 에드워드 드리스콜의 저택 말고는 꾸려갈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홍차 준비됐어, 매리?"
오드리는 시계를 보지 않고서도 8시 13분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곧 할아버지가 언제나 처럼 정장 차림으로 마치 출근할 사무실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아래층으로 내려올 것이다. 오드리를 화난 듯이 한두번 쳐다보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준비된 홍차를 마시고 신문을 본 다음 반숙한 계란 두 개와 토스트 한 조각을 먹고, 영국제 홍차를 한 잔 더 마시고 나서야 그녀에게 가벼운 아침 인사를 건넬 것이다.
할아버지의 존재를 거의 의식조차 하지 않는 오드리로서는 그러한 할아버지의 행동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열두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신문을 읽기 시작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심각하게 할아버지와 함께 토론을 벌이곤 했다. 할아버지는 처음에는 단지 그런 오드리를 재미있어 했을 뿐이었으나, 차츰차츰 그녀가 꽤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스스로의 참신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열세 번째 생일날, 할아버지와 손녀는 최초의 정치적 의견 대립을 보였으며, 그 후로 일 주일 동안 오드리는 할아버지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부터 그녀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 다음부터 그녀는 자신의 조간 신문을 따로 받아 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다시 오드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을 때, 그녀는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지는 모든 분야에 걸쳐 토론을 벌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국제 정치에서 조그만 동네 소식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친구들이 연 저녁 파티에 대해서까지 열심히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경우란 거의 없었고, 따라서 이것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먹는 것을 아나벨이 싫어하게 된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네, 준비되었어요."
회색 제복을 입은 하녀가 마치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먼지 한 점 없이 잘 손질된 구두가 보였다. 그는 식당으로 들어와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아서는 오드리를 한번 힐끗 쳐다본 다음, 살며시 신문을 펼쳐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하녀가 따라 준 홍차를 역시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그때쯤이면 오드리는 자신의 구리 빛 머리칼 위에, 신문을 들고 있는 손등에 부딪혀 흩어지는 한 여름의 햇살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신문을 읽느라고 완전히 정신을 빼앗기고 있기 마련이었다. 잠시 동안 할아버지는 손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 보았으나, 오드리는 그것조차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잘 잤느냐?"
꼬박 30분이 지나고 나서야 할아버지의 말문이 열렸다. 단정히 손질 된 하안 수염은 말을 할 때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팔순 노인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파란 두 눈동자는 빚을 발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입을 열자마자 하녀가 튕기듯이 달려 왔다. 아나벨이 할아버지와 함께 식사하기를 꺼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녀도 할아버지의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오직 오드리만이 할아버지의 무뚝뚝한 태도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할아버지가 미소를 띄우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춰 주고, 매일 아침 그녀의 이름을 다정스럽게 불러 준다고 해도 오드리의 그런 태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사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자신의 부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렇게 불러 본 적이 없었지만, 그의 부인은 이미 20년 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 이후로 더욱더 무뚝뚝해진 것 같았다. 그는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훤칠한 키에 아직도 꼿꼿한 허리를 유지하고 있었고, 멋있는 하얌 수염과 머리칼,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고 있었다. 걸음걸이 또한 조심스럽고 신중했으며, 타인으로 하여금 강인한 인상을 느끼게 하는 갈색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다녔다.
"너도 신문을 보아서 알겠지만, 그자가 지명이 되었더구나. 바보 같으니라구!"
에드워드의 찌렁찌렁한 목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지자 젊은 하녀는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오드리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 파란 눈동자를 들어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관심을 가지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관심이 있고 말고 !" 마치 고함을 지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자에게 기회가 돌아가서는 곤란하지. 후버가 다시 당선되어야 하니까 말이야. 그 바보같은 녀석 대신에 스미스를 지명해야만 했어."
에드워드는 시카고의 민주당 대회에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지명되었다는 기사를 리프만의 칼럼에서 읽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 해의 미국 경제가 최악의 불경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버트 후버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에드워드는 그런 불경기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온 나라에 굶주린 실업자들이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후버를 훌룡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불경기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후버의 정책은 오드리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녀는 이번에는 민주당에 표를 던지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며,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지명된 것에 대해 매우 흡족히 여기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루즈벨트는 안돼. 그러니 괜히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말아라."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신문을 덮으면서 정말로 화가 난 듯한 표정이 되었다.
"될 거예요. 그는 틀림없이 될 거예요."
지금 현재 미국이 처해 있는 경제적인 위기를 생각해 보는 듯이 오드리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심각한 불경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할아버지는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잘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것은 곧 후버의 정책적인 오류를 표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나벨은 할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오드리는 달랐다.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조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할아버지로부터 되돌아올 반응이 어떠할 것인지 까지도 충분히 계산에 넣고 하는 말이었다.
"어떻게 할아버지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실 수가 있어요? 올해 1932년에, 민주당 대회가 열리기 직전에 시카고와 수많은 은행들이 문을 닫았다구요. 온 나라에 실업자가 들끓고 기근이 거리를 휩쓸고 있잖아요? 어떻게 그런 사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릴 수가 있단 말이에요?"
"그건 그의 잘못이 아냐 !"
할아버지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그의 두 눈은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게 아니 라니까요 !"
오드리도 꽤 흥분한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말투는 무척 침착했다.
"오드리 !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
오드리는 사과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잘 알고 있었고, 손녀 또한 할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정치적인 견해가 어떻든 간에 할아버지를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드가 험악한 눈초리로 오드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할아버지를 향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당선될지 안 될지 지금 당장 할아버지와 내기를 할 수도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평생 동안 공화당을 지지해 온 그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당선에 5 달러를 걸겠어요."
그러자 할아버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그렇게도 타일렀건만 아직도 그 트럭 운전수 같은 말투를 고치지 못했구나."
오드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귀에는 조그만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차고 있는 시계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물려 준 귀걸이였다.
오드리는 이 두 가지 물건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오늘은 뭐 하실 거예요. 할아버지?"
사실 에드워드가 별달리 하는 일은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거나 그가 자주 나가는 퍼시픽 유니온이라는 클럽에 가서 점심을 먹는 것이 고작이었다. 오후에는 집에 돌아와서 거의 매일같이 잠깐씩 낮잠을 자기도 했다. 한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은행장을 지내기도 했지만, 10년 전에 정년퇴직하고 난 이후로는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함께 생활하는 두 손녀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곧 그의 곁을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나벨인 이상, 며칠 전 친구에게도 이야기했듯이 그렇게 서운해서 못견딜 정도의 심정은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이 인정한 미인이었지만, 오드리에게는 확고한 신념과 정신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에게는 오드리가 필요했다. 그와 아나벨은 한번도 진정한 친구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항상 오드리가 서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어린 동생을 보호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했다.
아나벨은 어머니가 오드리에게 물려 준 아기였고, 그래서 그녀는 결코 동생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지 않았다. 지금 오드리는 동생을 위해서 성대한 결혼식을 계획하고 있는 중이었다.
에드워드 드리스콜과 오드리의 눈이 마주쳤다.
"나는 클럽에나 나가 봐야겠다. 너와 네 동생은 오늘도 내 돈을 축내기 위해 랜소호프로 나갈 생각이겠지 ?"
할아버지는 돈이 다 떨어졌다고 엄살을 떨곤 했지만, 사실은 그 혹독한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할아버지의 모든 재산은 안전하게 투자되어 있어서 경기가 아무리 나빠도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돈을 아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구요."
오드리는 다정스런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들이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나벨에게는 아직도 사야 할 혼수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메그린이 아나벨의 웨딩 드레스를 만들었다. 고대 프랑스식의 우아한 레이스와 조그만 진주로 장식되어 있는 그 드레스는 아나벨의 고운 얼굴과 잘 어울릴 듯했다. 그녀의 금 빛 머리칼에 씌워질 망사 역시 우아한 레이스가 달린 아름다운 것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오드리는 아나벨 만큼이나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에 무척 흡족해 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는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결혼식은 앞으로 3주일 후에 세인트 루크의 성공회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녁 식사 때 하코트가 이리로 올 거래요."
오드리는 이런 이야기를 항상 아침에 할아버지한테 들려 주려고 했다.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낯 선 사람이, 아니 비단 낯설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호통을 치곤 했기 때문이었다.
장래의 손주 사위가 될 하코트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할아버지는 언제나 오드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오드리라고 해서 전혀 질투심이 없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나벨은 스물한 살이었고, 오드리는 스물다섯 살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결혼 순서가 뒤바뀐 것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오드리는 항상 자신의 겉모습을 검소하게 보이고자 했다. 머리는 언제나 수수하게 뒤로 빗어 넘겼으며, 진한 마스카라나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지도 않았다. 멋을 부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청년들이 그녀에게 구혼을 해 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오드리의 할아버지가 그들을 쫓아 버리곤 했었다. 오드리 자신도 그러한 할아버지의 행동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은 모두 현실에 안주하려는 냄새가 강하게 풍겨서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때때로 오드리는 자신의 아버지와 같이 천부적으로 모험심을 타고 났거나 낯선 장소에 대한 동경을 끊임없이 품고 있는 남자를 그려보기도 했었지만, 그런 사람은 커녕 그와 비슷한 사람조차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하코트 역시 마찬가지였고, 따라서 동생의 남편으로는 적합할지 몰라도 자신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사람 꽤 괜찮은 사람이더구나."
할아버지가 오드리를 보며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사실은 오드리가 동생보다 먼저 하코트를 만났다 하더라도, 흑은 그가 오드리를 한두 번 무도회에 데리고 간 적이 있더라도 결코 오드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 하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를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을 하건, 그런 자신에 대해서 전혀 후회같은 것은 없었다. 하코트는 결코 오드리의 영혼의 양식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은 못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는지 조차 의문이었다.
그녀가 갈망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찍어 놓은, 흑은 아버지가 물려 준 너덜너덜한 앨범에 보관되어 있는 사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였다. 오드리의 마음속에는 그녀의 아버지와 같이 심오한 그 무엇인가가 깃들어 있었다.
"하코트는 아나벨에게 딱 어울리는 좋은 남편이 될 거야."
할아버지는 항상 오드리를 놀리려는 듯, 혹은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려는 듯 그렇게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는 아직도 오드리가 하코트를 동생에게 양보한 것은 커다란 실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여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은 그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드리는 아무도 모르게 혼자만의 꿈을, 그리고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가슴속에 키워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때문에 그가 그렇게 좋은 남편이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오드리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었다.
"그 사람 역시 할아버지처럼 공화당을 지지하기 때문인가요?"
에드워드 드리스콜이 막 대답을 하려는 순간, 그들 뒤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파란 비단 옷과 크림색 레이스를 곱게 받쳐 입은 아나벨이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헤어 스타일을 하고는 오드리를 원망스러운 눈 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언니보다는 조금 작은 키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와진 듯 손을 조그만 새의 날개처럼 흔들어대고 있었다. 오드리가 보기에 아나벨은 언제나 우아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다. 아나벨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오드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래서인지 항상 침착하고 똑똑한 자신의 언니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자 했다.
"아침부터 벌써 정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가요?"
아나벨은 괴롭다는 듯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말했다.
오드리는 웃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정치적인 토론에 할애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저 즐기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그들은 서로 격렬한 논쟁을 나누면서 기운을 얻곤 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나벨에게는 정말로 싸우는 것처럼 보여 무척 무서워했다. 아나벨은 사실 정치라는 주제 자체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이는 논쟁이 하잘 것 없는 정력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어젯 밤의 시카고 민주당 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되었단 말이야. 너도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오드리는 그런 문제가 무척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벨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언니를 가만히 올려다 보며 물었다.
"왜?"
"그분이 알 스미스와 존 가너를 물리쳤기 때문이지."
오드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아나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물은 것은 내가 왜 그런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느냔 말야?"
"왜냐하면, 그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지 !"
오드리의 두 눈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좀처럼 그녀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오드리는 자신의 동생이 그렇게 멍청한 질문을 한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도 그런 걱정이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나벨은 자신의 얼굴과 옷 외에는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우리나라의 다음 대통령이 될 분이란 말야, 아나벨. 그런 일에는 너도 좀 신경을 써야지."
그녀는 될 수 있는 대로 동생을 부드러운 태도로 대하려고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꽤 격앙된 어조로 쏘아붙였다.
오드리는 항상 동생이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 췄으면 하고 바랐지만, 아나벨은 여전히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이 서로 얼마나 판이한 생각을 갖고 있는지를 알면 깜짝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때때로 그들이 같은 부모의 자식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경우조차 있었다.
"하코트는 여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그랬어."
아나벨은 머리를 흔들며 반항적인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에드워드 드리스콜도 자신의 손녀딸을 눈부신 듯이 쳐다보았다. 정말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 엄마를 꼭 빼어 닮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드리는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자기 아들과 비슷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만 않았더라도....>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들은 해마다 사모아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세상 어느 곳이든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래서 좋을 것이 뭐가 있었단 말인가?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나벨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침부터 정치 이야기를 하면 소화에 지장이 있을 것 같다구."
오드리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잠시 등을 돌려야만 했다. 에드워드 드리스콜은 정말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드리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 빛에는 아나벨에 대한 진한 사랑이 감추어져 있었다.
"저녁 식사 때 다시 만나자. 하코트도 함께 말이야."
그는 교묘하게 그 자리를 피해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오드리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작년보다는 허리가 약간 굽은 듯 했지만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존심과 정력이 강한 노인이었다.
오드리는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그에게 빚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역시 그녀가 그의 집의 살림을 꾸려 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동생을 돌아다보았다.
아나벨 역시 살림살이에 관한 한 상당한 부분을 배울 필요가 있었지만, 그녀는 언니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하나도 배우려 들지 않았다. 하코트가 말하기를 다른 것은 모두 자기가 책임을 질테니 아나벨은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는 일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에만 신경을 쓰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하코트는 여자가 너무 많은 책임을 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웨딩 드레스를 맞추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돼."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서재에 문이 닫히자마자 아나벨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클럽으로 나가기 전에 잠시 혼자 서재에 앉아서 담배를 한 모금 피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아득히 먼 곳에 눈길을 두고 젊었던 시절을 회상해 보거나, 친구들로부터 온 편지를 읽고 오후에 답장을 쓰기 위해 머릿속으로 생각들을 정리해 보고 있을 것이었다.
동생의 결혼식 대 590명에 가까운 손님들을 맞아야 하고, 또한 모든 것을 언니에게 의존하고 있는 동생을 둔 오드리와는 대조적으로 에드워드는 거의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시내에 나가고 싶지가 않아, 언니. 날씨가 너무 덥고 따가워서 골치가 아프단 말야."
"그래? 나가기 전에 아스피린을 한알 먹으면 되잖아. 결혼식까지 3주밖에 안 남았어. 어제 들어 온 선물들은 다 살펴 봤니 ?"
그녀는 동생의 팔을 가볍게 잡아 끌고 홀로 데리고 나갔다. 긴 테이블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선물들이 쌓여 가고 있었다.
"어휴, 세상에......" 아나벨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휴, 저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 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
"저 예쁜 선물들을 좀 봐 ! 그런 불평을 하기 전에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지."
오드리는 아나벨의 언니라기보다는 차라리 어머니에 가까운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14년 동안 어머니 이상의 따뜻한 보살핌을 언니로부터 받아 온 터였다.
오드리는 동생 곁에 가까이 있을 수 있기 위해 대학도 근처의 밀즈에서 다녔다. 아나벨은 학문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모두 오드리는 두뇌를, 아나벨은 미모를 타고 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말로 오늘 꼭 시내에 나가야 하는 거야?"
그녀는 오드리를 바라보며 거의 애원조로 칭얼거려 보았지만, 오드리는 벌써 그녀를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가 옷을 갈아 입으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10시 30분이 되어 그들의 외출 준비가 끝나자, 할아버지가 마련해 놓은 파란 팩카드 자동차를 운전사가 몰고 왔다. 마침 6월 첫째 주의 아름다운 여름 날씨가 펼쳐져 있었으며, 하늘은 그들이 하와이에서 보았던 하늘 만큼이나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너도 그게 아직 기억나니, 아나벨?"
오드리는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면서 그녀에게 물어보았지만, 하얀 드레스에 그림같은 모자를 눌러 쓴 예쁜 아가씨는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녀가 조그만 소녀였을 시절의 기억들은 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앨범 속의 사진들과는 달리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오드리에게 과거를 떠 올리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그 앨범밖에 없었지만, 아나벨은 그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앨범들을 지루하고 낮설고 약간은 두렵기까지 한 것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지만, 오드리의 경우에는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에 그 앨범들에 더 애착이 갔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 앨범 속에 들어 있는 중국의 산이나 일본의 강들을 찍은 사진을 보게 되면, 머나먼 이국 땅의 냄새를 아련히 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이 우스광스럽게 생긴 조그만 손수레를 밀고 가는 모습이나 강 건너편에서 고기를 낚으며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 사람들이 그들의 언어로 당신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때때로 어린 시절의 오드리는 그 앨범들을 품에 안은 채 잠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런 날 밤이면 자신이 그런 이국 땅에 가 있는 꿈을 꾸게 마련이었다. 요즘은 그녀 스스로 비일상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면을 사진에 담아 두기도 했다.
"언니 ?" 차가 메리린의 가게 앞에 도착하자 아나벨이 이상하다는 듯이 오드리를 쳐다보았다. 오드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동생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잠시 그녀의 마음은 환상의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항상 무척 바쁘게 움직였고, 특히 요즘엔 아나벨의 결혼준비 때문에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방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도 모르겠어."
오드리는 동생의 눈길을 피하며 겨우 대답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20년 전에 중국에서 찍었던 한 장의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것은 오드리가 유난히 좋아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조그만 당나귀를 타고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무척 행복해 보이던 걸."
아나벨이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드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동생에게로 돌리며 대답했다.
"네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지, 아니면 결혼식 생각을 했거나....."
그녀가 아나벨을 따라 차에서 내리자, 길을 가던 행인들이 그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 펙카드 자동차를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그런 차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도 이런 불경기하에서는 팔아 치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나벨은 가게로 들어서면서도 사람들의 그런 눈초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는 아나벨을 따라 가게로 들어가면서 갑자기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신이 머나먼 어느 이국 땅에서, 아까 차안에서 생각했던 그 사진의 풍경 속에서부터 이 소름 끼치도록 이기적인 세상으로 이끌려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무척이나 아름답고 값비싼 모자들, 실크 블라우스, 장갑들이 눈앞에서 스스로 춤을 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갑자기 오드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살아나가야 할 인생에는 확실히 그런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한겨울에도 아이들에게 입힐 따뜻한 옷 한 벌 제대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고, 살아갈 집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거리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 대학 등록금보다 더 비싼 사치스런 옷을 사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언니, 괜찮아?"
아나벨은 한참 동안이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드리의 얼굴색이 병자로 보일 만큼이나 창백하다고 느꼈던 것이었다.
"괜찮아, 여기가 좀 더워서 그런가 보지."
두 명의 가게 종업원이 그녀에게 냉수를 떠다 주기 위해서 달려갔다.
그들은 물을 떠 오며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수군거렸다.
"안됐어. 언니가 동생의 결혼을 질투하고 있나 봐. 그녀는 노처녀니까."
물론, 오드리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그런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오던 터였다. 이제는 그런 소리에도 패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날 저녁, 하코트 웨스터브룩 4세와 대화를 나누며 아나벨이 윗층에서 내려오기를, 그리고 할아버지가 클럽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릴 때에도 그런 심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날 따라 할아버지는 평소와는 달리 여지껏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아나벨 역시 예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얼른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오드리가 옆에 붙어서 이것저것 챙겨 주지 않으면 언제나 꾸물거리며 동작이 느렸다.
"신혼여행 계획은 다 짰어요?"
그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결혼에 대한 것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였더라면 민주당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오드리는 여자가 남자에게 정치에 대한 화제를 꺼내는 것을 하코트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오드리는 갑자기 예전에 그와 함께 무도회에 갔을 때 어떤 얘기를 나누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혹시 그는 그런 화제 역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웃음이 터지려고 했지만, 그가 신혼여행 계획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바람에 금방 진지한 얼굴 표정을 지어 야 했다.
먼저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갔다가 비행기로 프랑스까지 날아간 다음, 칸느에서 며칠 머무르고 로마와 런던을 거쳐 배를 타고 돌아온다는 계획이었다. 약 두 달 동안의 그 계획은 제법 훌륭한 여행이 될 것으로 들리기는 했지만, 만약 오드리 자신이 계획을 짠다면 그것과는 약간 차이가 날 것 같았다. 그녀는 먼저 베니스를 여행하고, 다음에는 거기에서 이스탄불까지 오리엔트 특급열차를 이용하는 계획을 짜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오드리는 약간 과장된 동작으로 반갑게 달려나가 할아버지를 맞았다. 그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사나운 눈 및으로 하코트를 노려보았다. 미리 자기한데 알리지도 않고 손님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막 나오려는 찰나였다. 그런 눈치를 알아챈 오드리가 재빨리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꼬집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 하코트가 올 거라고 말씀드린 것 기억나시죠?"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그녀가 아침에 무슨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하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그게 그 바보같은 루즈벨트 이야기를 하기 전이었나 후였나?"
그는 몹시 난처해 하는 표정이지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하코트가 놀란 표정을 짓자 오드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뭔가 잘못 되었어요."
"그렇긴 하지만 그다지 심각한 문제는 아닐세. 어차피 후버가 다시 당선될 거니까 말야."
"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가 나타난 것이다. 오드리는 언잖은 표정으로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는 우리나라를 온통 다 망쳐 버릴 걸요."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 !"
할아버지가 고함을 질렀으나, 마침 아나벨이 나타나는 바람에 잠시 그들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파란 실크 가운을 걸쳐 입은 아나벨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하코트가 완전히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닐성 싶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있던 그는 겨우 그녀에게서 눈을 떼고 오드리를 돌아보며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루즈벨트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물론이죠. 하지만 올해에 몰아친 이 최악의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마땅히 후버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확고한 신념이 깃든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아나벨이 그녀를 못마땅한 듯이 쳐다보더니 하코트의 팔을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오늘 밤에 또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커다란 푸른 눈동자가 마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빛나고 있었다.
"물론이지."
역시 할아버지의 눈에서도 빚이 번뜩이고 있었다. 오드리는 아무래도 그가 오늘 클럽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그들의 대부분은 할아버지와 같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항상 남자들 사이의 대화가 여자들 사이의 대화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자와는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는 하코트 같은 남자만 아니라면 말이다. 오드리는 아나벨처럼 저녁내내 웃고 떠드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코트가 떠날 무렵이 되어 그녀는 완전히 지쳐버렸지만, 아나벨은 천사처럼 사뿐히 이층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오드리는 천천히 할아버지와 팔짱을 끼고 침실을 향해 올라갔다. 언제나 처럼 그는 위엄을 갖춘 그런 모습이었다.
그녀는 언잰가 할아버지를 닮은 남자를 만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면 무척이나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그는 명랑한 심성과 강건한 사고력을 여지껏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사람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편안하기 까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행복하게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드리와 노신사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혹시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오드리?"
오드리는 그가 그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우락부락함이라든지 허세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가슴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하코트에 대해 딴 생각을 품고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무슨 후회 말인가요. 할아버지?"
"흠.... 그 하코트라는 젊은이에 대해서 말이야, 네가 먼저 차지할 수도 있었잖아." 그는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봐 두렵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 사람은 너를 먼저 마음에 두었었어. 네가 아나벨보다 나이도 많고 더 좋은 신부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고 아나벨이 나쁘다는 게 아니고 아직 어려서 말이지...."
그는 여전히 오드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전 아직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걸요.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아무래도 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도 하구요."
"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냐?"
그는 지팡이에 몸을 기댄 채 어두운 홀에 그녀와 마주 서 있었다. 사실 그는 무척 피곤했지만, 지금 오드리와 나누고 있는 대화가 그로서는 무척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참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는 할아버지의 질문을 되씹어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결혼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 없어요."
그렇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을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여행을 다니고 싶었던 것이다. 사진을 찍어서 아버지처럼 훌룡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게 어떤 일이냐?" 그녀의 대답을 듣고 그는 무척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옛날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랐던 것이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던 자신의 아들이 결국은 목숨을 잃고 말았던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너 설마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테지 ?"
"그럼요. 할아버지."
설사 내심은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할아버지를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많은 신세를 지고 있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이제 완전히 나이든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제가 뭘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는걸요. 하지만 하코트 웨스터브룩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알고 있어요. 적어도 그것만은 누가 뭐라해도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그는 만족스러워 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렇다면 됐어."
그렇지 않다면 또 어떡할 것인가? 만약 그녀가 하코트를 원하고 있다면 말이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그런 의문이 들었다.
잠시 후, 할아버지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드리는 자신의 방문 앞에 멍청히 서서 자기가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자기가 왜 그런 말들을 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들이 결코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녀는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다. 어디엔가 가야만 할 곳이 있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었다. 이름모를 산과 강, 냄새와 향기와 그리고 낮선 음식들...... 그녀는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으면서 자기는 결코 하코트와 함께, 아니 세상의 그 누구와 함께 한 곳에 정착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영혼을 살찌우기 위해서는 더 커다란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 멀지않아 자신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신비로운 기차를 타고 마치 시간을 거슬러가듯 아버지의 앨범 속으로 찾아 들어가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