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생태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다섯 가지 꿈 - 황광우(2001.1.15)
1-1 나는 개 치는 소년
요즘 나는 소원을 이루었다. 한 10년 전부터 그렇게도 시골로 들어가 버리고 싶어했던 염원을 이렇게 어엿하게 이룬 것이다. 지금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는 곳은 지리산하고도 남원의 조용한 시골 마을, 뱀사골의 계곡 물이 흘러 흘러 모이는 섬진강 한 켠 두동 마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만발하고 왼 종일 뻐꾸기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자리, 멍청한 정부가 버려버린 학교를 주어다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을 세운 자리이다. 밤이면 칠흑의 어둠을 에워싸는 고요가 사람을 죽여준다. 진정한 고요는, 마치 바다가 강물의 어지러운 것들을 감싸안듯, 사람들이 지질대는 소란마저 포근하게 감싸 안아준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매일 노동을 한다. 조그만 아파트 서재에서 담배나 뻐끔뻐끔 피우며 몸 놀리기를 싫어하던 내가, 하는 수 없이, 1만평에 달하는 이 넓은 공간의 이곳 저곳을 어슬렁거리는 노동을 하고 있다. 아침엔 개밥을 퍼주고, 낮에는 복도 청소를 하고, 저녁엔 요리를 한다. 특별하게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아니나, 워낙 육체 노동을 멀리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낸 탓이라, 저녁 8시만 되만, 시골 사람들의 풍습대로 그냥 골아 떨어진다. 함께 사는 기표는 출신이 용접공이어서 그런지, 제법 철 구조물을 잘 만진다. 이틀 전에는 장터에 가서 6m 자리 쇠파이프를 사왔다. 우리는 이 쇠파이프를 자르고 붙이고, 땅 속 깊이 구덩이를 파고,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 붓고 하여 마침내 축구 골대를 세우는 일에 성공하였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운동장마다 자연발생적으로 기립하여 있는 축구 골대 하나 하나에 인간의 노고가 깊이 박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공업 노동의 고마움을 체감하는 사건이었다.
어제는 고추 모종을 심었다. 삽으로 흙을 파고, 심고, 물을 주는데, 고작 50 묘종 심으니 허리에 통증을 느꼈다. 일은 천천히 하는 것이어, 하는 어른들의 말씀을 떠올리며, 담배 한 대 꼬나 물고, 들바람 쏘이면서 게으름을 피웠다. 이어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이번에는 30 묘종 심고 나니,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 엉터리야, 겨우 두 시간 일하고서, 일을 그만 두려고 하는 것이야? 온 몸에 땀이 적시니, 한편으론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이 엉터리 몸에 대한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그러던 차에 교문 앞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만 나를 찾는 것이다. "먼 데서 친구가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를 읊조리며, 일손을 놓았다. 농업 노동의 고역스러움을 체감한 하루였다.
아무래도 이곳에 와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목축 노동인가 보다. 진돗개 두 마리에 일본 토종견인 아끼다 두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하루만 보지 않아도 걱정이 되고 보고 싶어진다. 순돌이라고 이름지어준 이제 세달박이 새끼 진돗개가 유달리 사랑스럽다. 밥을 줄 때도 먼저 순돌이를 부르고 물을 줄 때도 순돌이를 먼저 부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진 삽살개 "벅구"에 대한 애절한 추억이 나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인가, 순돌이는 지금 나의 마음을 설레이게 한다. 나는 개치는 소년, 그래도 한 가지 즐거워하는 노동이 있어, 이 몸이 자랑스럽다.
1-2 나의 행복관
IMF 사태를 치르면서 나는 실업의 비극을 가까이 목격하였다. 외국어를 4개나 구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한 친구가 느닷없이 황당한 퇴직을 당한 것이다. 친구는 하루걸러 나를 찾아와 술을 얻어먹었다. 나 역시 술을 마다하지 않는 취향이기에 친구에게 술을 사주고, 친구의 주정을 들어주는 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친구 스스로가 자신의 미래를 자포자기하더라는 것이다. 실업이 어떻게 인간성을 파괴하는지, 일자리를 잃고 6개월만 술 먹고 다니면, 누구나 영등포역의 노숙자들이 보이는 휑한 눈빛을 띠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실업자에게 그토록 소중한 일자리, 하지만 과연 오늘 우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들이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지에 대해서 나는 무척 회의적이다. 나의 자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 선택한 직업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한 직업일 경우, 직업이 가져다주는 것은 밥을 비롯한 몇 가지 필수품일 뿐,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는 듯 보인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행복관을 갖고 있다. 나에게 중요한 행복의 제1 가치는 창조적 활동이다. 하루 내내 환자들 만나 진단하고 면담하고 처방전을 써주면서, 글쎄, 의사들이 얼마나 자신의 노동에 대해 보람을 느낄지 의문인 게다. 법조인들의 직업에 대해서도 별 부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도둑놈들을 취조하는 검사, 도둑놈들을 수발하는 변호사, 도둑놈들 앞에서 망치질하는 판사, 사람들은 이들 법조인들을 영감님이라 존칭하지만, 이들 법조인들이 과연 <하루의 노동>을 뿌듯하게 느끼는 날이 평생 며칠이나 될까.
창조적 활동이 주는 기쁨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의사 판사보다야 차라리 농부나 목수 혹은 작가나 교사의 직업이 더 나아 보인다. 농부는 벼를 심고 가꾸고 거두는 활동 속에서 단지 먹고 살 쌀을 얻을 뿐 아니라 대자연의 섭리를 느끼고 자신이 흘린 땀방울의 의미를 확인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목수는 나무를 자르고 못을 박고 집을 짓는 노동을 통하여 자신의 생계수단을 확보할 뿐 아니라, 이 활동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 열정을 구현하고 완성된 한 채의 집을 보면서 노동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글을 씀으로써 그날 그날의 생계 수단을 벌 뿐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사상과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자아실현의 기쁨을 누리며, 선생님 역시 비록 아이들을 가르침으로써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생계를 꾸리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속에서 생명의 경이를 느끼고, 제자들의 성숙해 가는 몸짓, 언어를 보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에게 중요한 행복의 제2 가치는 사회 봉사 활동이다. 사람들은 사회봉사라고 하면, 먼저 거창한 종교적, 도덕적 계율을 떠올리는데, 제발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이 태어나 하나의 인격체로 성장하기까지, 먹는 것, 입는 것을 비롯한 모든 물질적 생계 수단을 사회로부터 빌려 온다. 뿐만 아니라 말하는 능력, 생각하는 능력까지 사회로부터 배워온 것이라고 한다면, 장성한 이 몸과 이 몸 속에 내재된 정신적 활동 능력을 가지고 이웃을 위하여 나아가 사회의 발전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런 일이지 않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사회의 발전과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는 활동을 통하여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다. 비록 일신상의 안일을 희생하더라도 민족과 인류의 행복에 커다란 기여를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 없는 행복을 맛보게 된다는 교과서 이야기를 나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1-3 분업 노동의 소멸을 위하여
"하나의 인간을 세분하는 것은 만약 그가 죽을죄를 지었다면 사형에 처하는 것이며 만약 그가 죽을죄를 짓지 않았다면 암살하는 것이다. 노동의 세분화는 국민의 암살이다."
--어콰트 D.Urquhart, <상용어>, 런던 1855 --<자본론>에서 재인용
우리말로 번역되는 <분업>은 <일을 나누고 배분하는> 의미로 전달되는데, 영어 원어로 읽으면 느낌이 달라진다. 라. 마치 사람을 토막내어 죽이듯, <잘게 잘게 썰어 버린 노동>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 번역되는 분업은, 예컨대 너는 밥하고 나는 김치 담고 하는 정도의 일의 분담을 의미하는데, 영어 원어로 씌여 있는 <노동의 분할>은 예컨대 갑은 파만 썰고 을은 배추만 씻고 병은 소금만 뿌리고 정은 젓갈만 손질하는 것처럼, 하나의 통일된 노동과정을 미세한 기능으로 분리, 분할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분업 노동>을 비판적 맥락에서 접근할 때, <노동의 분할>이라 쓴다.
토인비는 그의 <역사의 연구> 어디에선가, 서구 문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 두 비결을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상의 분업>이라고 요해한 바 있다. 서구 문명이 지구상의 수많은 문명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민주정치와 분업에서 나왔다고 하는 그의 견해는 독창적인 것은 아니나, 나름대로 주목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민주정치가 대중적으로 확산되지 않았더라면, 자본주의는 진즉 혁명으로 전복되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업이다. 분업이야말로 생산력 발전의 기제였고 이를 최초로 정식화한 이가 아담 스미스였다. 금과 은의 축장이 국부의 원천이라고 보았던 중상주의적 견해를 뒤집어엎고, 제조업 분야에서 급속히 확대되어 가고 있던 분업이야말로 국부 증진의 원천이라고 보았던 아담 스미스의 견해는, 당대의 제조업자들 이른바 부르주아지의 경제 활동을 이론적으로 엄호해 준 막강한 화력이었다.
"부르주아지들이 돈을 벌어 어디다 쓰든, 그들의 탐욕이 하늘을 찌르든 말든, 그들의 생산 활동에 무한대의 자유를 보장하라. 제조업자들이 공장을 많이 짓고, 그 공장 속에서 노동의 분할이 확대될수록 영국 경제는 강성해지는 것이다. 나머지 모든 문제는 시장에 맡겨 둬라. 시장이 다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이런 게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하고 싶은 주장이었다.
그렇게 하여 자본주의는 선대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생산력의 혁명적 발전>을 가져왔는데,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보아야 할 것은, 부르주아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 그 밑에서 희생되었던 수많은 노동자, 희생되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동자, 그리고도 앞으로도 수 억 명의 노동자가 치러야할 희생인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의 변화 없는 생활의 단조로움은 자연히 그의 정신적 용기를 타락시킨다. 그것은 심지어 그의 육체적 정력까지도 파괴하며 그로 하여금 그가 익숙해져 있는 부분 작업 이외의 어떤 일에서도 활기 있게 지속적으로 자기 힘을 사용할 수 없게 한다. 특수한 직업에서의 그의 기능은 이와 같이 그의 지적 사회적 자질과 용감한 자질의 희생 위에서 얻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반적으로 인간으로서 가장 우둔하고 무지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발전되고 문명화된 사회에서 이것은 근로빈민이 필연적으로 빠지게 되는 상태다."
나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하루 종일 손을 흔들며 웃는 아가씨들을 볼 때, 가슴이 미어진다. 어린것이 돈 몇 푼 때문에, 왜 저런 일을 해야만 하나. 택시를 탈 때마다, 사납금을 제대로 벌었나 만 원짜리 몇 장, 천 원짜리 몇 장 세어 보는 기사의 돈 세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언제나 이 소외된 노동이 사라지려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하루 종일 운전대에 매여 있어야 하는 것은 누가 내린 저주의 운명인가. 식당에서 밥을 사먹을 때마다 배식대의 뒤 켠에서 왼 종일 설거지만 하고 있는 하얀 옷을 입은 아주머니 노동자들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저게 산업화고 저게 자본주의라면, 저런 산업화, 저런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그 무슨 위대한 선물을 가져다 준다 할지라도, 이런 삶의 양식은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아실현을 하고 그 가운데에서 참된 행복을 영위하는 것인데, 그 노동이 상품으로 팔려, 기계의 일부가 되어, 의미 없는 짓들을 반복하게 만드는 것이 자본주의라면, 자본주의는 부정되어야 한다.
<노동을 분할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자본주의, 하지만 노동을 잘라 죽이고 그렇게 하여 노동자의 생명을 죽이는 자본주의라면, 이 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창조적 노동과 사회 봉사 속에서 노동이 기쁨의 원천이 되는 생산 양식으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1-4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리프킨은 이렇게 말한다. "문명은 태초부터 주로 노동의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노동은 구석기 시대의 사냥과 채집, 신석기 시대의 농부, 중세의 장인, 현재의 조립 라인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오늘의 인간으로 성장해온 오랜 역사를 리프킨처럼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리프킨에 의하면, 이 <노동이 추방되는 시대>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노동은 현재 처음으로 생산 과정으로부터 체계적으로 제거되고 있다. 100년 이내에 시장 부분의 대량 노동은 사실상 세계의 모든 산업 국가들에서 사라져갈 것이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미국 전체 노동력의 13%에 해당하는 약 1,600만 명이 실업 혹은 잠재적 실업 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 한국도 만성적인 고실업의 시대로 접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산업 국가들의 사람들은 ??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고대해왔던 풍요와 레저라는 꿈의 실현이 다름 아닌 바로 정보화 시대의 여명인 지금 왜 더욱 더 멀어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의아해 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리프킨은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의아함에 대해 맑스는 어떻게 말했던가.
"결국 기계는 그 자체로서는 노동시간을 단축하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일을 연장하고, 그 자체로서는 노동을 경감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의 강도를 높이고, 그 자체로서는 자연력에 대한 인간의 승리이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인간을 자연력의 억압 아래 두고, 그 자체로서는 생산자의 부를 증대시키지만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생산자를 빈민화한다."
어쩌면 이렇게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인지 맑스의 통찰력은 늘 보아도 부럽기만 하다. 그의 관점을 오늘에 대입하면 이런 것이다. "정보화 그 자체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레저를 약속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적으로 사용되면 노동자를 실업의 비극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역사에서 참으로 목격하기 힘든 희귀한 사태가 목하 벌어지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노동자의 손에 딸려 다니던 <노동 도구>가 <기계>로 전화하면서, 노동자를 자신의 부속품으로 사용하더니만, 그렇게 하여 살아 있는 노동의 피를 마음껏 빨아먹고 비대해진 기계 문명이 이제는 노동 그 자체를 추방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고역의 소외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유의 개시>를 의미할 수 있는 기술 혁신이 오히려 대량 실업과 전 세계적인 빈곤과 사회적 불안 및 격변이라는 암울한 미래를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기계에 의한 노동력의 대체, 노동자의 대량 해고만큼, 자본주의의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도 없다. 자본에게 노동력은 오직 이윤을 증식시키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자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노동력이 이윤을 증식시키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지 못하고, 오히려 생산의 비용 부담으로 작용하는 순간, 자본은 늘 그러했듯이, 아주 냉정하게, 노동을 내버린다.
자본이란 생산수단의 집합에 지나지 않은 것. 죽은 노동의 결집체에 불과한 이 자본이 왜 산 노동을 지배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던지는 노동자들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노동자가 겪는 비극의 원천이 아닐까. 자기가 키운 자식에게 살해당하는 부모는 자기의 부덕을 탓하기라도 하는데 우리의 노동자들은 이 현대적 비극을 불가사의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치 벼락을 맞고 쓰러진 농부처럼.
1-5 실현 가능한 우리 시대의 꿈 주3일 노동제
"누구는 하루 8시간 일하는데 누구는 하루 0시간을 일할 필요 없이 모두 하루 4시간 일을 하면 된다."는 주장은 초등학생도 펼칠 수 있는 상식적인 주장이다. <구조조정--정리해고>의 불가피성을 떠드는 보수세력의 주장 보다, 위와 같은 방식대로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 백배 합리적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래서 위와 같은 방식을 굳이 영국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러셀이 주장하였다면서, 러셀의 권위를 빌지 않아도 될 일이다.
한스 피터 마르틴과 하랄드 슈만이 함께 쓴 <세계화의 덫>을 보면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띈다. 전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브레인 집단이 모였다는 샌프란시스코 페어먼트 호텔 회의에서 무역귀족 출신 워싱턴 시싶은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 없다"고 선언하였다. 전 세계의 노동력 중 20%만 가지만 모든 재화를 다 생산할 수 있으므로 나머지 80%야 죽든 말든, 앞으로의 세계는 이 20%의 노동자들과 자본이 엮어나가는 세계가 될 것이라고 호언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참 재미있게 읽었다. 만일 경제활동인구의 20%만 가지고도 재생산을 감당할 수 있다면, 10명 중 2명만 일하고도 10명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발전하였다면, 인류는 <주5일 노동제>가 아니라 <주1일 노동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업 노동이 강제하는 소외된 노동, 고역의 노동은 1주일에 하루만 하고 나머지 6일은 자유로운 노동, 창조적 활동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노동의 성과물을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근로대중 모두가 누릴 수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오랜 전부터 어떻게 하면 인류가 분업 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이 생산력을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만 가동하는 부르주아적 소유를 철폐하거나 제압하는 것이 사회를 합리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부르주아적 소유를 사회화한다고 해서 분업 노동이 일거에 소멸되지는 않을 것이다. <현대 자동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현대 자동차>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장악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현대 자동차>에 형성되어 있는 분업 노동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업 노동을 철폐하는 유일한 길은 <분업 노동의 날수>를 줄여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주5일 노동제>를 <주4일 노동제>로, <주4일 노동제>를 <주3일 노동제>로 줄여 나가는 길만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노동해방의 구체적 경로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많은 자료들을 뒤져왔는데, 나는 나의 꿈인 <주3일노동제>를 입증하는 번거로운 수고를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자본가 시싶의 호언대로라면, <주1일 노동제>도 가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1-6 공동체 운동을 위하여,
일하고 누리는 가르치고 배우는 자유로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자본주의적 체제를 넘어서는 길을 찾기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는 이 공동체의 현실성을 거부한다. 하지만 인간의 선구적 실천이 전제되지 않는 한, 경제적 필연성만으로는 결코 새로운 사회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봉건적, 농업적 삶을 대체하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을 끊임없이 분화하고, 분화된 노동의 성과를 상품화하고, 상품화하는 과정에서 이윤을 증식시키고, 이 증대된 자본을 가지고 새로운 분업 노동을 창출하면서, 부르주아지는 인류의 어느 세대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생산력의 발전을 연출하였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에게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들의 지배 하에 묶여 있는 것은, 다른 생산 수단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삶의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의 사회주의 진영은 근로대중의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기여를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그들 역시 부르주아지의 하수인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부르주아지적인 가치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고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유럽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지에게 무릎 꿇은 사회주의이다.
자본주의 경제가 모든 근로대중에게 강요하는 경쟁 대신에 협동을, 그 경쟁을 추동하는 소유에 대한 집착 대신에 봉사를 내걸 수 있다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해 버린 분업 노동의 희생자들을 노동이 기쁨의 원천인 창조적 활동자로 전환시킬 수 있다면. 모든 인간 관계를 개인이라는 감옥 속으로 집어넣는 것에 대항하여 만나 돕고 동고동락하는 공동체적 마당을 창출할 수 있다면. 조직의 상관의 눈치를 보고 사는 분들에게 자유로운 운명의 결정권을 주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자유로운 공동체가 현실의 대중 운동으로 전개된다면. 이것이 사회주의 운동이 아닌가?
맑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배를 목표로 하는 모든 계급은,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해야만 한다. 심지어 그들 계급의 지배가, 모든 구태의연한 사회형태와 지배 형태의 폐지를 가져오는 때조차도 마찬가지이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모든 운동이 권력 장악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포위된 고립된 섬으로 끝날 것이다. 지리산의 청학동처럼 부르주아지에 의해 이용당하는 관광지로 전락할 따름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만이, 공동체 운동은 대중화할 수 있고, 대중화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얻는다.
따라서 모든 공동체 운동을 꿈꾸는 자들이 먼저 해야할 일은 진보적 정당을 성장 강화하는 일이다. 진보정당은 의회 진출의 도구이기 이전에 공동체를 꿈꾸는 자들의 현실적 힘이요, 거점이어야 한다. 이전의 혁명가들이 보여주었던 놀라운 헌신, 불굴의 정신, 무소유적 태도를 물려받아야 한다. 모든 공동체 운동은 진보정당운동으로 모여야하며, 진보정당운동은 공동체 운동의 모범이어야 한다.
노동운동의 역사적 사명은 근로시간의 단축에 있다. 이는 지난 200 년간 진행되어온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걸어온 길이다. 문제는 오늘의 노동자들이 근로시간의 단축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개인적 이해, 부르주아지적 가치관에서 접근하는 데 있다. 근로시간의 단축은 분업 노동의 소멸이라고 하는 세계사적 필연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보아야 한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모든 노동운동 진영은 노동 시간의 단축을 통해 획득되는 자유로운 시간을 공동체적 문화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
진보정당이 장악한 국가권력, 교육 문제와 의료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이것은 작은 혁명이다. 우리 서민들이 자식들의 교육문제와 노후의 의료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서민들의 삶은 많이 여유로워질 것이다. 여유로운 삶은 여유 있는 인심을 만들어 낼 것이고, 여유로운 인심은 봉사하는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서 공동체 운동은 대중화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확보할 것이다.
첫댓글 雨香님께, 일전 황광우 씨에 대해 궁금한 점 말씀하셨는데, 제가 보관하고 있던 그의 글을 찾아 올려 봅니다. 그는 맑스, 특히 노동문제에 관한 한, 아주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입니다.
감사합니다. 대충 읽어보았는데.. pc에 저장해놨다가 다시 읽겠습니다. 일단 황광우씨의 철학콘서트를 구입했는데 당장 읽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체게바라님 덕분에 황광우씨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정인 지음.황광우 선생이 쓰시던 가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황광우 씨가 노동운동으로 수배 시절에 세상에 발표한 글쓰기에서의 저자명이 '정인'이었습니다
만일 경제활동인구의 20%만 가지고도 재생산을 감당할 수 있다면, 10명 중 2명만 일하고도 10명이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이 발전하였다면, 인류는 <주5일 노동제>가 아니라 <주1일 노동제>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 이렇게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지 않을까요. 일을 한(하도록 선택된?) 2명이 10명분의 생산물을 이용해서 권력을 휘두르겠죠. 지나친 낙관론이란 생각이 듭니다. ^^;; //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새로운 자극을 주는 글이네요.
마르크스가 생산 측면에서 주장하는 것은 인간이 쓸데없이 생산하는 과잉 생산물이 문제라고 진단합니다. 이 논리의 근거는 Garian님 집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우선 옷의 경우 내가 자주 입는 옷, 한두번 입다가 그냥 방치한 옷, 한번도 안입은 옷 등으로 구분해 본다면, 아마도 첫번 째의 경우가 60%, 두번째가 30%, 마지막이 10%정도 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즉, 인간은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구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실제 사용은 구매 충동과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죠. 집안에서 발생시키는 음식물을 생각해 보면, 사찰의 공양처럼만 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먹고 남기는 음식의 20% 이상은 최빈민층에게 돌려도 무방한
과잉 생산된 음식물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생리는 눈굴리기의 양태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업의 경우도 이 눈굴리기와 진배없습니다. 어느 기업이라도 신년도 사업계획서를 기획할 때, -성장을 목표로 잡는 기업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1%건, 10%건 혹은 50%건 반드시 상승된 수치를 목표로 제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장에서 선택되지 못한 과잉 생산된 재화는 어떻게 처리됩니까? 덧붙여 고객이 구매를 하였더라도 전자의 경우처럼 그 사용 용도가 폐기되는 제품이 부지기 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맑스의 주장은 과잉 생산을 위해 노동자를 쥐어 짜지 않고, 오히려 생산을 감소시켜도 인간은 필요 충분한 재화를 획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 필요한 재화만을 생산한다고 전제한다면 일주일에 5일 근무가 아니라, 4일, 아니, 3일정도로 족하며 나머지 일수는 창조적 노동과 공동체를 위한 봉사에서 노동이 자체로 기쁨이 되는 사회를 꿈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체게바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저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필요와 충족이 최적으로 맞아떨어진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죠. 문제는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만 소비하는 동물이 아니라는 데에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남에게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 필요 없는 옷을 사는 게 인간이죠(저는 그런 소비행태를 혐오하는 편입니다만). 경제학에서는 그런 욕구까지 '필요'에 포함시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닌가요? 그런 인간에 비해 자연은 철저하게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자는 먹을 게 필요할 때만 사냥한다 - 는 말 처럼. ^^ 이 경제체제가 과잉의 욕구를 부추김으로 해서 사람들에게
그렇죠. '욕구'야말로 인간 진보의 매개물이지만 역지사지로 인간 황폐의 원인이라는 것.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과 인간정신의 본원적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것에의 딜레마 - 이것은 마치 인간에게 있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결코 해답이 아니며, 양자의 장점의 융합만이 해답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의 공동체 활동, 낮은 곳으로의 연대, 봉사의 생활화, 쓰고 남을 재화의 先 사회기부, 가리안 님께서 지적하신 필요한 만큼의 선이 지켜지는 사회가 자연의 사회인즉, 이를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집단이 인간이라는 것, 그에는 이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욕구를 극대화,
현실화 시킬 수 있는 제도로 보증되어 있다는 것이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유한성을 끝까지 끝장(그렇습니다. 소위 대안없이 인간은 후손들이 사용하여야 할 자산까지 앞당겨서 흥청망청하고 있습니다)을 보자는 이데올로기인 이 '자본주의'의 변화나 개선없이 인류의 미래가 담보될 수 있을까요?
- 소유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 환상을 심어주고 있지만, 저 이스터섬의 멸망 처럼 과잉 생산과 소비에 제동이 걸릴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 세계 석유 매장량이 앞으로 100년도 못 간다죠. //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건, 위의 계산은 쉬웠지만 인간의 욕구를 채우는 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백 명 모두가 4시간씩 일하면 충분히 먹고 살수 있다고 해도, 그 중 일부는 그 짧은 시간 일하는 게 싫어서 바둥대기도 하고 일부는 좋아서 더 열심히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다양성, 비획일성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바로 자본주의의 종착역에 다다른 것같은 작금. 그래서 160여년 전 맑스의 주장이 다시 설득력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우리에게 <민노당>에서 주장하는 교육, 의료및 노후를 위한 연금정책만 보증될 수 있다면 우리가 현실생활을 '전쟁치르 듯'이 할 필요가 전혀 없겠지요. 그래도 인간 욕구의 무한성이 문제가 되겠지만 이는 공동체 운동과 창조적 노동 등으로 완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요?
다시 돌아가서 과잉생산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잉소비- 일단의 사회주의적 경제학자들은 이 비율이 40%정도가 된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사용하지도 않을 재화 40%의 과잉생산과, 실생활에서 소비되지도 않는 40%의 재화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잘산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포탈 뉴스에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세계 102위로 나왔던가요? 다시, 티벳과 방글라데시의 민중들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제가 볼 때 2,000여년을 지나면서 인류는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점도, 이를 타개할 해결책도 나와있고 또는 이미 인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실천입니다. 또는 형이상학자들이 비웃는 200년 전의 계몽이 다시 필요한 시간입니다.
저는 종교야말로 그런 계몽에 앞장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을 파해쳐서(어쩌면 철학의 의무인지도..?) 현세계에 필요한 메시지를 전할 의무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유명세를 타는 종교는 모두 그런 과잉 생산&소비를 묵인하거나 부추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막으면 기득권층을 거스르게 되고, 결과적으로 현 사회에서 힘을 잃게 되니까요. 그래서 종교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저도 좀 더 탐구해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또 얘기해 보죠. ^^
언제 이렇게 많은 댓글이.... ^^ 저도 Garian님과 비슷한 생각인데요. 종교와 교육이 (계몽이라고는 그렇지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사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가끔씩 종교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기는 하지만, 사실은 종교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역할이 많기 때문에 안타까워서 올리기도 하고, 종교인들이 각성을 해서 소속된 종교를 하나씩 변화시키길 바라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그런데 댓글을 보면 의도와 다른 반응에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예전에 어떤 글을 읽다가 서문에 '인간적인 사회주의'라는 말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인간적인 게 된다면... 하고 고민해보는데 눈앞이 깜깜하죠
예, '휴머니즘적 사회주의' 라는 용어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나왔구요, 특히 허버트 마르쿠제가 즐겨 사용하였지요. 일테면 '수정 사회주의' 쯤으로 말할 수 있겠네요. 그러나 휴머니즘이 접두사로 반드시 붙어야 하는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입니다. '휴머니즘적 자본주의', 그리고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이데올로기'는 이 땅의 무정부주의자 이병주 선생께서 쓰시던 용어지요.
지리산의 저자 이병주 선생을 말하는 것인지요?
그렇습니다. 문학가, 저널리스트이었으며 동서양의 사조에 두루 능했던 자유인, 그러나 그를 관통하고 있던 신념은 '니힐리즘'이었습니다. 그 '허무'를 넘어서는 것, 혹은 허무뒤에서 나를 맞이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리사을 읽다가 책을 요따위로 쓰기도 하는구나 했습니다.현장 취재는 거의 안보이고 자료만 들추어 인용하면서 그 장편을 만드는 잔머리에 아주 질리더군요.
무슨 말씀을, 그는 경남 하동 출생으로 지리산을 자기 품처럼 알고 있고, 그만큼 이 땅의 자생적 파르티잔에 대해 잘알고 있는 지식인도 드물었죠. 다만 그의 공인으로서의 삶의 약점이란 저 질곡의 60년대와 70년대에 대하여 침묵하였다는 '묵시적 동의의 부역의 죄'를 꼬집을 수 있습니다. 그는 당대 동, 서양의 고전과 교양에 대한 지식의 깊이에 대하여 군계일학이라 알려져 있죠. 따라서 님의 이병주가 단순한 책상물림으로서 상상력과 천학적 자료에만 의존하여 '지리산'을 썼다는 것에 도무지 동의 할 수 없으며, 더구나 '장편을 만드는 잔머리(?)'라는 수식어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또한 '지리산'을 지칭하여 참칭하신'요따위'라는
수식어는 작가 이병주에 대한 심한 모독이며, 그에 대한 정보나 지식없이 뱉아낸 저잣거리식의 욕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허니, 이병주에 대해 더 알아 보시고 사시적 편견을 완화하심이 어떠신지요.
특히 작가로서의 이병주는 평소에 자신의 글쓰기에 대하여 '2/3는 사실적 자료로, 1/3은 허구'라고 공언했을 정도로 철저한 고증을 원칙으로 했으며, 그의 대표작이라 할 <관부 연락선>, <현해탄은 알고있다>, <지리산>은 그의 직접적 체험과 고증이 오롯이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그런 찬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짜증만 나던 기억이 있습니다요.책을 읽으면서 특별한 생각이 안들더군요.더 배울 것이 없다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