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터가 한 개인과 관계하는 시간은 이제 더 이상 길지 않다. 담배와 불가분의 관계였던 라이터. 금연 문화가 유행처럼 번지며 흡연을 혐오행위로 간주하는 사회 도처의 시선 속에서 담배에 불을 댕기는 라이터 역시 억울하게 자신이 설 곳을 잃어버렸다.
금연 중인 당신이 가장 열렬히 추구하는, 가장 탐욕스럽게 가 닿던 곳은 어디일까? 원통형 부싯깃이 회전하면서 부싯돌을 마찰시켜 불꽃이 타오르던 그 순간? 완전한 불꽃 형태에 천천히 다가가던 입술에서 연장된 담배의 끝? 이윽고 목젖이 움직이며 볼이 설핏 줄어들며 입술 근육이 조여지며 본격적인 연소가 일어나기 전 바람 빠지듯 품어져 나오는 첫 연기? 그러니깐 아직 흡연자의 폐를 통해 걸러지지 않고 담배종이만 타들어간 푸른색 빛이 도는 연기? 그 강력한 첫 담배 연기의 냄새를 잊기란 힘들다. 대체로 그것을 잊기 위해 꽉 쥐고 있을 튼튼한 라이터가 필요하다. 언제든 그 연기를 복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위한 든든한 도구.
라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을 소유한다는 고차원적인 문화적 행위다. 무인도에 툭 버려졌을 때 주머니 속에 일회용 가스라이터를 발견한 당신은 젖어 있는 부싯돌을 말린 후 두 배는 빠르게 삶에 대한 투지를 불태울 준비가 된 것이다. 그것도 없다면 생식에 익숙해지거나, 추위를 버텨야 한다는 둥 멘탈의 영역을 갈고닦아야한다. 라이터의 유무가 문화적 차원에서 종교적 차원으로 강제 이동을 결정한다.
라이터는 사념을 위한 시간을 준비해준다. 담배와 연기는 그 전후를 장식하고 라이터의 중계로 짧은 상념은 사유의 한가로운 흐름에 뒤섞여 당신의 내면을 흐린 연기 위에 홀로그램처럼 투사해준다. 이때 라이터는 때로는 단단하고 차가운 질감을 손바닥에 찍으며, 때로는 미끈거리고 스크래치가 많이 생기는 플라스틱 표면을 손톱에 긁히며 자신의 존재감을 잠시 동안 뒤로 미룬다.
아직도 헷갈리는 게 나는 과연 아버지의 첫 담배 냄새를 동경했던 것인가?
시간이 흐르고 난 뒤 던힐 라이터 카피 형태였음을 알게 된 표면에 작은 격자무늬가 새겨진 일산 마루만 라이터를 동경했던 것인가? 사물의 가능성은 곧 행위로 상징화된다. 의지와 기억은 사물의 도움으로 공고해진다. 묵직하고 반복적인 습관이 인간의 취향을 더는 바꿀 수 없는 쪽으로 조금씩 이동시킨다.
라이터 켜지는 소리로 그가 누구인지 등장하기도 전에 알아맞힐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담배 냄새로 누가 옆에 있는지 알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불을 빌리기 위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때만큼 사람이 반가울 때가 없지만 “담배 안 피는데요!” 라는 말만큼 절망적으로 되돌아오는 단어도 없다. 마치 “저 남자 친구 있는데요.” 라는 말보다 더 절망감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라이터의 종류에 따라 담배의 첫 모금 또한 달라지는데, 지포 라이터 같은 오일라이터는 축축한 휘발유 향을 머금고 있고, 성냥의 불꽃은 연소된 적린의 분말들이 담뱃잎 분말과 결합된 듯 짙은 흙먼지 맛을 머금고 있으며, 가스라이터는 가장 미약하게 하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의 대답처럼 간결하게 불꽃을 들어 세우는 듯하다. 밋밋하기 때문에 담배의 맛에 밀려 순식간에 하강한다. 때문에 혹자는 성냥을 켜서 이산화항의 지독한 향이 날아가고 성냥머리가 고개를 숙일 때까지 기다려 불을 붙인다고 허세를 떨다 손가락도 떨고 물집만 잡히곤 했다.
대부분 사람들의 첫 라이터는 대량으로 생산 판매된 중국산 가스라이터일 것이다. 마른 핏자국처럼 짙은 빨강, 뭔가 비릿한 파란색, 어중간해서 눈에 띄는 초록색과 자줏빛 투명 플라스틱 속 액상 가스는 반으로 나눠진 칸막이 턱을 작고 좁은 파고를 가진 물결 형태로 쉴 새 없이 타고 오르고 다시 물러가곤 했다. 흔들흔들 보이지 않는 배가 위험천만한 항해를 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가스가 반 토막 났을 때 배는 예전만큼 쉽게 칸막이를 넘어 가진 못하리라. 좌초된 형태로 어느 한편에 누워 거뭇거뭇한 해초류의 층으로 한 때 그곳에 바다가 있었음을 암시해주는 말라버린 해변을 만들기 위해 우리의 엄지손가락은 쉴 새 없이 불을 피웠고 연소했다. 광대한 바다의 미덕을 소모시키고 해저 심층부에 깊이 빨대를 꽂아 고갈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위험한 것은 첫사랑처럼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았던 손가락과 라이터의 무의지적 헤어짐이거나 기억이 그 흔적의 순서를 헷갈려하는 겉옷 주머니 또는 금방 위에 놓고 다른 자리로 이동해버리는 반복되어 발생하는 비극적인 삶의 우연성이다.
라이터의 부재는 이산가족처럼 절망적이진 않지만 총알이 아까워 죽이기 싫은 좀비처럼 끈질기게 고작 건망증으로 되살아나곤 하는데 일단 한 번 불을 켠 후 살아났다가 토막 난 시체처럼 어디론가 굴러 떨어진다. 텅 빈 주머니에 짤랑하고 동전 소리가 불꽃처럼 켜지지만 손을 집어넣으면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당신은 라이터만 사기보다는 담배 한 갑을 더 사는 완고한 친자본주의적 소비자가 되고자 한다. 그렇게 중독은 스스로 양산하고 빚을 대신 갚게 하고, 당신을 환청으로 인도해 근처 편의점으로 경로를 바꾸게 한다.
잃어버린 라이터의 아련한 정서를 잃어버린 우산이 슬그머니 꿰찼다.
그것은 담배를 피우는 행위가 숭고한 행위임을 다시금 역설해준다. 건강 염려증, 니코틴 중독, 저질스런 폐활량, 지속적인 건망증, 아니 당신은 도저히 그것을 떠나서는 살 수 없기에 간혹 자기 자신임을 확인하는 용도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이 글을 쓰느라 잠시 잊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돌아가는 팽이가 꿈이 아닌 현실임을 표지해주는 토템이라면 흡연가 에겐 저마다 소리를 내는 라이터가 그 역할을 한다.
언제부턴가 주머니 속 짤랑거리는 작은 사물이 사라지고 넙대대한 스마트폰이 비죽거리며 주머니 밖으로 터져 나올 듯 위태롭게 우리와 함께 걷고 있다. 이제 할리우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아무도 외딴 집을 급습하거나 동굴을 탐험할 때 지포 라이터를 횃불처럼 밝히려 들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led 플래시가 그 모든 어두운 장면과 주인공을 완성해준다. 일렁이는 따뜻한 불빛은 환영처럼 사라지고 환하고 차가운 플래시 빛이 어둠 속에 왕좌를 트고 지포 따위 흡연용품을 밀어내 버린 지 오래.
생각해보면 피젯 스피너라는 마치 그전에 그 비슷한 게 없었던 것처럼 떠들어대는 과도하게 포장된 손-장난감 대신에 우리는 늘 라이터나, 담배케이스, 회중시계 또는 열쇠고리에 달린 작은 스위스나이프 같은 적절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믿음직한 사물들에 둘러싸여 같이 존재했었다. 공존에서 개별자로 떨어져 나가면서 우리의 손은 뜨듯 미지근한 터치스크린에 정전기를 공급하는 시각의 욕망에 봉사하기 위한 생체 전지의 촉수정도로 전락했다.
사실 나도 선물 받은 라이터 하나쯤은 있었다. 지금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잃어버렸을 것이다. 지포 라이터 형태에 탈착 가능한 시계가 달려 있는 카운테스 마라라는 상표가 붙은 라이터. 사용을 하건 안하건 코팅이 벗겨져 마침내 흉측하게 변해버린 외장을 한 라이터. 그 부싯돌을 빼서 사용하던 라이터에 교체용으로 쓰곤 서랍에 넣고 잊어 버렸다. 라이터를 선물한다는 게 따로 의미를 내포했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뭔가 특별한 심상도 책 속에 꽂아놓고 잊어버린 코팅된 책갈피처럼 있었을 것이다.
늘 현재에만 오직 그것이 필요한 순간에만 유용한 사물의 일반 속성 탓에 일단 손에 집히지 않는다면 유용성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런 식으로 라이터가 쌓여갔지만 나는 사용할 기회를 주지 않음으로써, 분실될 가능성도 제공하지 않았다고 변명을 늘어놓아 본다. 이게 다 담배 때문인가? 흡연의 적폐? 아니 이사의 편리한 유실물 법칙을 닮은 기억의 따로 떼어놓기 법칙. 타오르지 못한 기억을 가진 라이터. 편리한 산문처럼 유용한 일회용 라이터.
일회용 라이터는 심각한 건망증의 폐해를 절대 의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인류의 소중한 발명품이다.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데도 없고, 그래서 판매처가 존재한다. 고유한 세상의 법칙을 흩트리지 않고, 순응하게 한다. 판매처가 존재하면 소비자는 늘 주변을 떠돈다.
지포 라이터에 그려진 만화 주인공 때문에 라이터를 사고 싶어 하던 교복을 입은 학생이 기억난다. 옆에 있던 친구가 "얘는 선도부니깐 안심하셔도 되요."라고 지원사격을 했다. 학생에게 라이터를 파는 것은 현행법 위반이다. 반면 부싯돌과 부싯깃을 판매하는 것은 법 위반이 아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부싯돌이 고장 났다고 부실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기름을 넣지 않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아쉬워하며 문을 열고 나갔지만 금방 사복으로 갈아입고 돌아와 다시 사고 싶다며 생각해낸 핑계다. 그렇지, 불꽃이 생기지 않으면 라이터라고 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불꽃은 탄생하고 만다. 너와 내가 괜찮아도 생기는 게 의혹의 불꽃. 파도를 타고 넘어오는 의심의 불꽃. 마침내 부싯돌과 솜이 들어 있는 내부 부속을 빼고 케이스만 팔기로 한다. 그렇게 하니 사지 않는단다. 라이터가 아닌 걸 왜사냐고. 요즘 젊은 친구들이 콘텐츠와 상관없이 분위기만 소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무엇이 오래된 사물인가 구별하는 법을 배운다. 라이터의 분위기는 정상 작동하는 불이 잘 켜지는 라이터에서 온다. 바로 그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불꽃이 줄어들면 기쁨도 줄어든다. 부족한 기름을 채운다. 라이터는 다시 환하게 켜진다. 유의미한 반복의 작은 만족감. 라이터를 켜고 라이터를 끈다. 그 전의 나는 그 후의 나와 다행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첫댓글 죄송하지만 제목부터가 짝퉁 느낌입니다..ㅎㅎ
괜찮아요 정신병자님은 그래도 되요 레트로풍 칼럼이에요
이 부분이 - 라이터의 분위기는 정상 작동하는 불이 잘 켜지는 라이터에서 온다' 기분 좋았는데, 제게 그것이 소설문학의 본래 기능을 상실한 소설들의 새로운 분위기를 독자는 알아서 (설령 그들이 미성년일지라도) 굳이 구매 행위를 통해 소비하지 않는다는 국내 도서시장의 현실을 소환하는 방식으로도 읽히는 소재 기능성을 가지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고 무려 이런 확대해석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