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상과 생명의 전화
내가 생명의 전화를 만나던 때는 1985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몹시 힘들었을 때다. 일간신문에서 보고 찾아간 곳이 중부교회였다. 130여명의 낮선 얼굴들이 다 자신이 있어 보였고 당당하던 모습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그때도 밤 시간이었다.
원래 말이 없던 나는 움츠려들 수밖에 없었다. 하는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불편한 여건 속에서 3개월의 과정을 끝내고 수료를 했다. 그 당시 들은 강의가 너무 마음에 와 닿아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다. 누가 말했는지 ‘사람은 다 그럴수 있다’ 라는 전제하에 보면 용서 못할 것이 없다. 무슨 짓을 하건, 어떤 잘못이 있건 그 나름대로의 형편과 그럴만한 조건이 있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끝난다는 아쉬움과 섭섭함이 있었지만 그것은 곧 상담으로 이어져 늦은 밤, 평리동에서, 대구대에서, 지금의 사무실에서, 나는 늘 그곳에 있었다.
힘들고 지쳐있을 때 나를 바르게 붙들어 준 것이 생명의 전화다. 나만 불행한 것 같았던 것이 상담교육을 받으면서 많이 후회하고 뉘우쳤다.
이토록 자신 없고 형편없는 사람이 상담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도 했지만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아파 본 사람이 병 던 사람의 마음을 더 깊이 아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계대에서 실시하는 자기성장프로그램에 열다섯 번 정도를 참여했으며 좋은 강의는 찾아다니며 들었다.
많은 시간 상담을 해오면서 제풀에 젖어 주저앉고 싶을 때가 없었을까. 하소연도 하소연이지만 억지나 꼭 시나리오같은, 연극대본 같은 이야기를 듣노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잠 안 자고 이 자리에 앉아 있나 싶어 울화가 치밀다가도 한편 생각하면 생명의 전화가 없었다면 내담자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다 풀어놓을 수 있을까 하고 측은지심으로, 생각을 바뀔 때 내 인생은 조금씩 살이 붙는다고 생각했다.
자살도 마찬가지지만 터질 것 같은 빵빵한 감정주머니를 아주 가는 바늘로 서서히 바람을 빼는 것이 우리상담원이 하는 일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5년만 하고 다시 생각하자 했던 것이 10년을 넘기고 나니 고비가 왔는지 몸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한두 달을 쉴까? 이참에 아주 쉬어 버릴까? 망설이고 있는데
“밤에는 사람이 없지 않느냐 한번 쉬면 계속 쉬게 된다. 쉬지 말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해주는 말에 힘입어 계속 하게 된 시간이 25년째다.
남편이 상담실에 데려다 주고 아침에는 데리러 온 덕분으로 상담 약속시간을 단 하루도 빠트리지 않았다는 것에 조그만 자부심을 가진다.
가족의 이해가 있어서 가능했고 그에 병행해서 심신의 건강이 지켜주었기에 가능했다.
많은 세월동안 배운 것도 많다. 상담하러 간다하면 좋은 일 하러간다고 흔히들 말한다. 내가 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받아 오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계산이 어렵다. 내담자들의 고통스런 하소연에서 나는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고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거기서 거기다. 내일 또 내가 내담자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또 하나는 각계각층에 있는 많은 분들을 만나다는 게 나는 너무 좋다. 만날 때 마다 새로운 사연이 있고 새로운 인생이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어 야간상담을 택했고, 일이 많을 때는 낮에는 일하기 위해 야간상담을 원했다. 하다 보니 야간과 나는 뗄 수 없는 연인 사이다. 야간에는 쉽게 몰입될 수 있었고, 잊었던 일상사를 메모도 한다.
이제 남편은 이야기한다. 몸도 전과 같지 않은데 낮에 하라고... 나는 언젠가는 그럴 때도 있을 거라고 대답한다. 생명의 전화를 통해, 소록도를 알았고 그때부터 일금을 후원해 왔다. 어려울 땐 소록도를 찾았다. 그들을 보며 힘을 얻어 돌아왔다.
학생상담도 좀 더 전화를 잘 받기 위해 학생상담을 지원했고 십 년 동안 많은 도움을 얻었다.
시민회관에서 상담 사례를 발표하고 정무장관상을 받게 되었는데 전혀 몰랐던 북구자원봉사센터에서 봉사자 약 40십 명이 꼭두새벽에 서울에 올라와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가. 그 깊은 인연으로 음성꽃동네도 갔다. 15~6년 되었는데 적은 금액이지만 지금까지 후원하고 있다. 또 그들과 함께 복음 양노원에서 미용과 목욕을 시켜 드린 지가 10년이다.
30대에 동산병원에서 안구 기증을 했는데 기록이 없었졌다고 해서 얼마 전 안구 뿐 아니라 신체까지 모두 기증서약하고 돌아왔다. 오다 생각하니 세상에서 받은 것이 너무 많은데 다 쓰고 주는 것이 무슨 대순가? 새삼 잘 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줬다.
대구정보학교(소년원), 아름다운 가계, 혜림원, 여성의 전화, 전원복지교회, 로타리크럽, 합천원폭피해복지관, 선린복지관, 대구병원, 논공카톨릭정신병원, 서부노인변원. 자유재활원, 성요셉병원, 보훈병원, 영정사진 찍어 드리기, 소록도, 학생상담, 매일신문, 음성꽃동네, 복음양노원, 뱅글라데사 어린이 두 명을 도우고 있다. 현제 대구 작가 콜로퀴엄 문학도서관장으로 낯선시, 팔공신문 편집위원, 문협이사, 생명의전화지도상담원으로 있지만 모두가 나한테는 바람과 같다. 지나간 것도 있지만 앞으로 큰 폭풍을 몰고 올 것도 있을지 모른다. 시민상을 받던 안 받던 내가 하는 모든 일과는 별 상관은 없다. 그러나 그들로 인하여 내 생의 배는 빠르게, 지루하지 않게 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첫댓글 대단하신 가형님, 정말 귀한 상 받으셨습니다. 다시 한번 더 축하 드립니다.
옛날에 나도 하고 싶었던 '생명의 전화' 가형님께서 귀한 상을 받으심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묵묵히 실행하는 모습 아름다워 박수를 보냅니다.
선생님,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늦으나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자랑스런 시민상 축하합니다. 언제나 소외된 구석에서 누구보다 먼저 모범을 보이며 말없이 실천하시더니 아! 존경스런 가형님, 세계속의 자랑입니다. 건강하시길 기원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