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이 끊겨도, 서서 봐도…영화 한 편이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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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처음 좌석수가 1900석을 넘어섰던 서면 대한극장 (1970-1999). |
서면에 극장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47년 광복 직후였다. 서면로터리 전차 정류소 입구에 세워진 북성영화극장을 시작으로, 단관극장 16곳, 소극장 18곳, 멀티플렉스극장 5곳 등 모두 39개 극장이 운영을 해왔다. 그러나 단관, 소극장들은 시대의 변화를 이기지 못한 채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멀티플렉스 극장 5개만 남았다.
서면 극장가는 1960~197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북성극장(1947~75)은 외국영화 상영을 독식하다시피했다. 중앙로변에 특별히 높은 건물이 없던 시기에 서면로터리를 중심으로 나란히 자리잡은 3층 높이의 동보극장(1957~93)과 태화극장(1962~82), 대한극장(1970~99) 등은 휴일과 주말이면 관람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그 시절 서면 극장가는 요즘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화려했다. 극장의 메인간판이 거리의 분위기를 압도했는데 특히 영화의 명장면을 부각시킨 대형 간판 속 남녀 주연배우의 얼굴은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은 극장의 간판을 보고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지 극장마다 간판을 크고 화려하게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메인간판은 중앙에, 왼쪽은 다음 프로그램을, 오른쪽은 다다음(차주) 프로그램을 예고하여 극장 전면은 말 그대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였다.
매표소 입구에는 당일 상영작의 하이라이트인 흑백스틸사진 안내판이 설치되어 관객의 눈길을 끌었다. 사이좋게 이웃해 있던 서면 인근 극장들을 한 바퀴 돌고나면 영화를 모두 본 것처럼, 안 보아도 마음의 배가 부를 정도였다. 만원사례 푯말이 붙여지면 암표상이 기승을 부려 눈살을 찌푸리게 했으나 모처럼 나들이 나온 기분을 깰 수 없는 연인들은 비싼 입장료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옛 추억을 되새기며 북성극장(현. NH투자증권)이 자리했던 곳을 찾아가보니, 고층빌딩이 우뚝 솟아 있을 뿐 극장의 흔적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발길을 돌려 대현 프리몰 지하상가를 건너가 보니 동보극장은 동보프라자로, 태화극장은 쥬디스 태화로 몰라보게 변했다. 대한극장도 복합 상가로 바뀌었다. 건물 입구에는 CGV대한 매표구가 설치되어 입장권을 사려는 청춘 남녀 몇몇이 서 있을 뿐이었다. 단관 시절 꼬리를 물고 줄지어 서 있던 옛날의 관람객 행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멀티플렉스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서면극장가의 모습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다. 요즘은 영화관 건물의 해당 층에 도착해야만 영화관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뿐, 건물 외관에는 홍보간판 같은 것들이 사라져 극장 건물 느낌을 찾아보기 어렵다.
북성극장을 내 집같이 들락거렸다는, 자칭 할리우드 키드를 자처하는 부산상고 출신의 70대 노관객을 통해 그 때 일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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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서면로터리 주변. 왼쪽 아래 북성극장을 중심으로 중앙대로변의 동보극장과 태화극장이 개관하면서 서면 일대는 활력이 넘치는 거리로 변했다. 부산진구청 제공 |
■ 남포동 극장가와 맞짱붙기
"의자가 철제여서 오래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팠지. 하지만, 워낙 어려웠던 시절이라 시설이 그래도 그려려니 했어요.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아랑 드롱, 헨리 폰다, 커크 더글러스, 비비안 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멋진 서부의 사나이들과 고혹적인 여배우들. 요즘 그런 미녀는 없어요. 내로라 하는 외화는 모두 북성에서 봤다 아이가~ '자이언트' '무기여 잘있거라' '콰이강의 다리' '황야의 무법자' 등, 어지간한 영화는 미성년자 관람가여서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직행했지만,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보고 싶은 맘이 굴뚝같아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 단속 임검과 선생님들의 눈을 교묘히 피해 몰래 들어가곤 했지요. 어두컴컴한 극장 안이었지만 선생님은 직감으로 학생들을 귀신같이 찾아냈고 적발된 학생들은 다음 날 교무실로 불려가 혼난 적이 한두 번 아니었지. 그래도 그 때 그렇게 영화를 보았던 쾌감! 우리 친구들 모두가 공감한다 아이가~."
그랬다. 롯데백화점 자리에 위치했던 부산상고와 주변학교 학생들은 공부보다도 북성극장 영화관람을 선호했을 만큼, 영화감상은 멋진 일탈이었었다. 당시 학생들의 극장 출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학교에 자체정화반과 지도선생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은 영화가 드물 정도로 영화를 즐긴 매니아들도 더러 있었다.
북성, 동보, 태화, 대한극장은 위치, 시설, 규모면에서는 서면극장가의 왕좌임을 인정받았으나, 속사정은 달랐다. 그것은 모두가 재상영관으로 등록된 재개봉관이었다. 하지만, 부산진구 주민들은 이들 극장이 개봉극장인줄 알고 출입했다. 남포동의 일류 개봉 극장으로 불리었던 부산, 제일, 대영, 동명, 현대극장보다는 한 등급 아래였던 셈이다. 재개봉관은 개봉관에서 상영이 종료된 영화를 15~20일이 지난 후 요금을 한 단계 낮추어 상영했다.
그러나 서면 극장가가 남포동 극장가와 맞장붙기를 한 것은, 도시 광역화로 중심지화 되어가는 서면극장가의 지리적 이점을 영화 제작사가 예의주시하면서부터였다. 북성극장은 570석으로 시설은 노후한 편이었으나 위치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906석의 동보, 1100석의 태화, 1947석을 자랑하는 대한극장까지 서면에 세워지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대작이나 화제작의 경우 동시개봉 시스템으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한 영화 제작사가 서면 지역에서 동시개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부산진구 주민들은 개봉작을 보기 위해 남포동까지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었다.
서면은 북성극장이 동아극장과 동시개봉을 했다. 1965년 '세라자드' '리오콘쵸스' '침략전선', 1966년 '비밀대전쟁' '용장 로모로' '국제첩보국 1급비밀' '댄디소령' 등 태화극장은 1965년 부산과 '대석굴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1966년 제일과 '압록강아 말하라' 부산과 '유정' '대폭군', 대영과 '요화배정자', 동보극장은 1966년 제일과 '말띠신부'대영과 '잘 있거라 일본땅' 1967년 대영과 '빙우' '팔도강산' '보은의 기적' 국제와 '하얀까마귀', 대한극장은 1970년 대영과 '별난여자' 부영과 '주차장'국도와 '일등사장' 등이 동시상영 되었다.
■ 필름 헐레벌떡 운송하던 시절
부산 극장가는 남포동과 서면지역의 '동시개봉'으로 두 지역이 골고루 발전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필름이 한 벌뿐이던 시절이어서 동시개봉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가까운 거리는 문제가 없었으나 먼 거리로 배달할 때에는 필름 운송 사고가 종종 발생했다. 보통 A극장에서 먼저 상영이 끝나자마자 극장 직원이 전차를 타고 B극장으로 필름을 전달하는데, 전차 운행 중 사고라도 나면 직원은 필름깡통을 들고 서면에서 남포동으로, 남포동에서 서면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고 또 뛰어야만 했다.
필름이 제 시간에 당도하지 못하면, 극장 내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명색이 개봉관이라면서 시간에 맞춰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는데 대한 불만이었다. 관객들은 필름배달 사고인 줄도 모르고 "영사기사가 화장실 갔나" "밥 먹으러 갔나" 등을 시작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런 시끌벅적한 소란도 어느 순간 사르르 영사기가 돌아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과 멘트 한마디 없어도 그냥 잠잠해져 버렸다.
퇴장 때 환불소동이나 환불같은 요구는 아예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저 재미있고 즐겁게 영화 한편 감상한데 만족하며 극장 문을 나설 만큼 관객들이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필름 운송에 문제점이 드러나자 택시까지 동원됐으며, 차가 흔치 않던 시절 자가용까지 등장하곤 했다. 필름 배달은 극장의 말단인 급사 몫이었다. 헐레벌떡 필름이 도착하면 화가 난 영사기사는 급사에게 분풀이를 해댔다. 이런 일자리마저 놓칠 수 없었던 급사는 울분을 삭여야 했다.
필름사고가 가끔 일어났던 그 때 극장풍경, 시계바늘을 1969년, 46년 전으로 되돌려 그 현장으로 가 본다. 신정프로 'CIA리오작전'은 서면 북성극장에서 9시 매표에 들어가 9시30분 상영, 남포동 동명극장은 11시 첫 상영이다. 연소자 관람가, 중고생 100원, 일반 150원(현재 입장료 1만 원과 비슷하다). 설 명절 프로는 2월 12일부터 이미 동명극장에서 개봉된 '007산다볼 작전'을 "드디어 양대극장 동시상영 결정! 연일완전 매진, 중고생 관람가!". 추석은 왕유 주연의 '대협객'을 동명과 동시 개봉, "암표 방지책으로 표는 1인당 2매까지만 매표, 고교생 이상 관람가." 북성은 남포동 시외버스터미널 옆 동명극장과 연계해 흥행대박 영화만 족집게처럼 골라 상영하면서 특수를 누린 해였다.
북성극장은 최고 성수기인 명절에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썰렁할 것 같았던 동보, 태화극장도 매진을 이어갔다. 그것은 명절이 아니면 영화보기가 어려웠던 관객은 물론 고무신 관객까지 합세했기 때문이다. 고무신 관객은 일제강점기 이후 한글 해독이 어려웠던 문맹자들로서 외국영화 자막 읽기를 꺼려하던 관객을 일컫는다. 그들이 우리말 영화를 선호한 나머지 남포동의 부산과 제일극장은 한국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소문나기도 했다.
■ 곳곳에 들어선 3번관들의 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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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 동시상영관이었던 3번관 신도극장(1968-1990). |
북성극장 등이 서면지역 극장가 문화를 선도해가는 과정에 곳곳에 들어선 3번관의 약진과 기여가 만만찮았다. 양정동 평화극장(1956~59)을 시작으로 신도극장(1968~90), 당감동 반도극장(1957~85, 후일 천일극장), 부전동 태평시네마(1961~79)와 노동회관극장(1962~87, 1987년 현대극장으로 재신축), 이성극장(1962~75), 범천1동 부일시네마(1963~80) 가야동 대명극장(1969~92), 부암동 성지극장(1970~85)이 각각 개관했다. 이들 3번관은 재상영관과는 달리 프로 배급격차가 매우 컸기 때문에 주변과 경남 지역 극장상영이 모두 끝난 후에야 필름이 배정되는 바람에 일부극장을 제외하고는 2편 동시상영 형식으로 운영되다시피 했다. 3번관이 경영되고 있던 주변에는 신발과 관련된 하청업체는 물론, 경공업 중심의 다양한 업체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들 업체 종사자들은 부산경제의 산파역을 맡았던 산업역군들이었다. 비록 쥐꼬리만한 급여를 받으면서도 쉬는 날에는 이들 3번관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들 극장은 시설과 환경면에서 수준이 낮았다. 극장 내에 들어서면 화장실의 악취부터 담배연기, 무적자들의 일탈행위까지 눈감아주어야만 했지만, 영화 보는 즐거움에 좌석이 없을 때는 서서보는 고통까지도 기꺼이 감내했다. 거기에 오랫동안 돌고 돌아온 필름 상태가 양호하지 못해 비가 주룩주룩 내리거나, 필름이 끊기는 사고도 흔하게 일어났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장면과 장면 사이가 끊기는 경우는 보통 영사기사가 임의로 1권을 몽땅 빼버린 채 상영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였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넘어가기가 다반사였다.
3번관의 고질적인 문제는 홍보에 항상 말썽이 뒤따랐다는 점이다. 극장과 가깝게 있던 초등학교 담벼락에까지 외설스러운 문구와 그림의 포스터가 붙여지면 신문 고발난을 통해 사회여론이 떠들썩해졌다. 해당 관청은 광고물 정비를 강화하며 단속에 들어가는 듯하지만, 단속이 느슨해지면 또다시 반복되면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서면(부산진구) 극장가의 70년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구민들과 애환을 같이하며 그 시대를 품어주었던 대중문화공간인 극장은 지금은 추억 속 공간으로 남아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늦었지만 제1호 극장인 북성극장이 자리했던 곳에 작은 표지석 하나라도 세워진다면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한다.
홍영철 한국영화자료연구원장
첫댓글 지는 작은집이 범일동에 있어서, 시장근처의,
삼성, 삼일극장을 많이 찾았습니다.ㅎㅎㅎ
좋은 추억이지요. 그때의 경험들이 지금 살아가는 영양분이 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