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부 豆在釜泣(두재부읍)
2절. 가련한 완산 아이(可憐完山兒)
- 일귀하처(一歸何處), 오지오편(五之五篇)
"어머님, 수레에서 내리소서."
왕건이 사망한 후 1년 후, 서기 944년, 혜종 왕무의 재위 1년.
능예(能乂)가 모친 고비녀를 뫼시고 한주(漢州)를 나서 처음으로 성묘에 나섰다.
당시 고려 조정은 서경대총관 왕식렴과 시중 왕규(함규) 간 갈등이 격화되면서 혼란해지고 있었다. 먼저 안착했던 신라 황실은 고려 황실과 인척 관계로 결속하면서 상부 김부(경순왕)를 중심으로 이 갈등에 엮이면서 천하의 주목을 받고 있었으나,
상대적으로 나라의 멸망과 상부 견훤의 훙서로 백제 황실에 대한 경계가 풀어지고 있었다.
이번 성묘도 그 틈을 타 나선 것으로 주목받지 않고자 매우 소탈한 차림으로 나섰으니, 따르는 이들도 완산경에서 잡혀온 옛 내관들과 김총이 보낸 사병 몇 명 뿐이었다. 고비녀는 능예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내렸고, 딸 쇠복(衰福)은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뒤따랐다.
"태자(월광)는 어찌 오시지 않았누?"
"시중(왕규)이 관병(官兵)을 붙여두고 있어 운신이 어렵다고 하십니다."
다만 신검의 장남이자 적자(嫡子)인 월광은 여전히 고려의 감시 하에 있었으며,
- 전 백제왕 견훤 묘(傳 百濟王 甄萱 墓)
그로 인해 덕은군에 모셔진 견훤의 능원은 돌보는 이 없이 풀이 무성하여 몇 시간 동안 고생하여 벌초해야 했다. 오직 묘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마저 없었다면 작은 동산처럼 보일 정도였으니 -
"폐하, 어찌 이리 초라하게 계십니까?"
이들이 이처럼 쇠락하게 된 것은 성산(城山, 거창군 분산성)에서 백제의 수뇌를 잡아들인 왕건의 단호한 조치 때문이었다.
투항한 후 백제왕이었던 신검은 견훤의 전례에 따라 품계와 벼슬을 받았지만*,
* < 고려사 >와 < 고려사절요 > 모두 신검이 부득이하게 왕위를 받았다 하여 벼슬을 내린 것으로 기록한다. 다만 학계는 '이후 어떤 기록에서도 출현하지 않는다'며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자리를 옮겨 사사했다는 식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본 소설처럼 받은 지 얼마 후 자연사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점에서 바른 해석으로 보기 어렵다. 견훤도 이 원정 후 바로 와병이 심해져 사망했고, 신검도 패배로 홧병을 얻었다면 견훤과 비슷하게 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끌려나온 양검은 이미 생포된 용검과 함께 모두 정주(貞州)*로 압령한 뒤 사사되었고, 포로가 된 모주 정승 능환과 상대장군 신덕은 함께 진중에서 참하였다. 그때 왕건은 특히 능환의 죄를 크게 질정(叱正)하며,
* < 고려사 >와 < 고려사절요 > 모두 '진주(眞州)'라고 기록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근거를 남겨두지 않고 있다. 다만 한 블로거의 주장에 따르면 정주 이씨의 시조 이세화(李世華)의 묘지명에 "세계가 진주에서 나왔다(系出眞州)"라는 기록이 보이는 점, < 삼국사기 > 권제36 (잡지 제5) '지리/신라/웅주/황산군' 편에 '진(眞)은 정(貞)이라고도 썼다'는 예가 있으며, < 포은문집 > 권1의 한 시에서도 진주는 물가에 있고 양자진(楊子津)이 있는 곳이며, 양주(지금의 서울)에서 개경으로 가는 노정상에 있는 곳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진주는 정주임을 알 수 있다.
"처음 후주(신검)를 세우고자 하여 형제와 더불어 주인(견훤)을 가둔 것은 바로 너의 잘못이다. 너는 본디 상부(견훤)를 추대하고 거병하여 서남해를 취하고 훈신(勳臣)에 올랐거늘, 이해에 따라 하루 아침에 표변하여 주인을 임의로 갈아치웠으니 신하된 자의 의리가 이래서야 마땅하겠는가!"
하고 신덕과 함께 그 목을 취한 뒤 목함(木函)에 담아 견훤에게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상부께서 훙서하셨더냐?"
백제의 완산경을 취하러 가던 참에 탕정군 별궁에서 돌연 급보가 오므로, (왕건은) 신강이 올린 주문(奏文)을 받아 꼼꼼히 살핀 뒤,
"상부의 유지(諭旨)대로 한 치의 어김없이 거행하되 한 나라의 왕에 걸맞게 예우하도록 하라."
그의 시신을 잘 처리하여 오늘날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위치한 덕은군(德殷郡) 서남변에 묻히게 하였던 것이다. 왕건이 이처럼 조치를 취함은 바로 (견훤이) 완산경을 그리워하다 운명하였다는 신강의 글귀를 보고 조치한 것이었고,
이후 견훤의 모토(茅土)는 막내 아들 능예(能乂)에게 물려주고 좌승(佐丞), 개국현백(開國縣伯)으로 삼았으니 거짓말처럼 송경으로 올라온 뒤 신검마저 병을 이기지 못하고 훙서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의 향년은 46세였다.
그 사이 왕건 역시도 수 많은 고굉(股肱)들을 잃었다.
백제를 멸한 그 해 음력 12월 완산경 함몰과 상귀 참수의 주역 백옥삼(白玉杉)이 죽으니, 왕건은 이를 비통하게 여기고 사성으로 배(裵)를 내린 뒤, 그 이름도 현경(玄慶)이라 하고, 무열(武烈)이라는 시호를 내려 충의를 기렸다. 또 그 아들도 은우(殷祐)라는 이름을 내려 중용하였으며,
2년 뒤 7월, 벽진군 태수인 이총언이 사망하니, 왕건은 일찍부터 귀부한 공을 치하하여,
- 삼중대광고려개국원훈벽진장군(三重大匡高麗開國元勳碧珍將軍)에 봉하노라.
가장 높은 품계와 더불어 개국원훈임을 인정하는 조서를 내려 주었다. 또 1년 뒤,
서기 937년 음력 3월에 상국진과 더불어 뒤늦게 고려로 돌아온 좌승 공직도 사망하였다.
왕건은 이 소식을 전한 함서(咸舒)를 공직의 후임으로 삼고, 항복 당시 구출했던 금서(金舒)와 투항한 영서(英舒)를 중용하였으며, 공직을 정광(政匡)으로 삼고 시호로 봉의(奉義)를 내렸다가 얼마 뒤 다시 삼중대광(三重大匡), 사공(司空)으로 승차하였다.
마지막으로 왕건이 죽기 얼마 전인 서기 941년 음력 4월, 대광 유금필이 사망했다.
왕건은 유독 공이 컸던 그의 죽음을 애닮게 여겨 몇 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으며, 그를 평소 쫓았던 여진 추장들도 마치 주군의 죽음처럼 6년을 시묘 살이하였다.* 왕건은 그의 시호를 충절(忠節)이라 하고, 그의 아들인 유긍(庾兢), 유관(庾官), 유유(庾儒), 유경(庾慶)을 척신(戚臣)의 예로 중용하였다. 이후 그 후손인 유방(庾方)은 시중에 오르며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 자로는 3년 간 공자를 시묘살이한 뒤, 심상(心喪)을 3년 간 더 지냈다. 여진의 추장들도 유금필을 주인처럼 따랐으므로 응당 이런 중한 예를 받들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반면 오래 살아남은 이도 있었다.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는 왕건으로부터 좌승, 밭 1천 경(頃), 역마 35필(匹)을 받았고, 얼마 후 스스로 삼중대광으로, 부인 견씨는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으로 높임을 받았다. 또한 왕건에게 자신의 첫째 딸을 바쳐 부인이 되게 하고(동산원부인 박씨), 이후 둘째와 셋째도 그 아들 정종 왕요에게 시집 보내(문공왕후, 문성왕후) 연이어 척신을 지내니,
백제의 멸망 후 남은 세력을 보전하며 가장 큰 영향력을 쥐게 되었다.
또한 류윤겸은 왕건에 의해 좌승(佐丞)에 제수되고 전주호장(全州戶長)을 겸하였으며, 왕건 재위 말년에 겸악과 더불어 당상(堂上)으로 아상(亞相)의 지위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류윤겸의 아들 류방헌은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광종 이후 조정에 출사하니 -
이들 세 사람은 고려 조정 안에서 견훤의 후손과 백제 유신들을 지키는 데도 기여한 반면,
상국진은 투항 후 순응했던 공직과 달리 백제 멸망 후 상애(尙哀), 상달(尙達)을 유인하여 대록군 일대에서 재차 거병하여 그의 외손인 청구를 백제왕으로 삼고 후백제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보수설한(報讐雪恨)의 기치를 들고 견훤과 신검의 복수와 좌승 능예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이에 대록군 인근 호족의 다수가 가담하여 한때 큰 세를 이루며 서원경과 중원경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므로,
왕건이 대노하여 그 가담 세력의 성씨를 모조리 짐승의 이름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그로 인해 웅천(熊川)이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내 유긍달이 이끄는 한산 세력과 함서와 용개의 상주 세력, 그리고 중앙에서 파견하여 웅주 일대 호족을 영솔(領率)한 홍유에 의해 진압되니,
이것은 홍유 생전 최후의 전공이 되었다.
상국진과 청구의 목을 함에 담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송경(松京)으로 오던 도중 홍유가 졸서하므로, 왕건이 이에 크게 아쉬워하면서 충렬(忠烈)이라는 시호와 더불어 홍씨(洪氏)를 사성하고 이름으로 유(儒)*를 지어 내리니,
아들 은열(殷悅)*과 딸인 의성원부인 홍씨가 그 후손이었다. 홍은열은 이후 부친의 후광으로 고려 조정에서 중용되어 원나라 침공 이전까지 거성대족(巨姓大族)으로 남게 되니 -
* < 남양홍씨밀직공파보 >는 홍유가 초명이고 은열(殷悅)로 소개하며 태사공(太師公)에 제수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록에 홍유로 남은 점에 비추어 초명이 술(術)이었던 것으로 보는 게 맞으며, 홍은열은 그의 아들로서 가문을 개창하게 된 주역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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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고려와 백제의 후예들이 왕건의 통일 과업 전후로 다른 방식의 삶을 이어나갈 즈음,
백제의 왕경이었던 완산경은 그야말로 커다란 부침을 맞이하였다.
왕건은 백제 멸망 후 일시적으로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두고 백제의 왕성과 궁을 관리하게 하였으나 죽기 직전(서기 940년) 이를 폐지하여 지방의 일개 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후 고부와 낭주(낭성)으로 떠돌던 안남도호부는 현종 때인 서기 1018년 다시 완산주로 돌아왔지만,
곧바로 4년 뒤 폐지되어 서기 1150년, 지금의 부천인 수주(樹州)로 옮겨진 뒤 충렬왕 때인 서기 1308년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거기 머물게 되었으니,
동경(東京)과 계림부(鷄林府)로 제법 큰 고을의 명망을 유지한 신라 왕경 서라벌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이는 곧 고려 황실의 백제 홀대로 이어졌다.
신라 황실 출신들이 6두품과 귀족 등과 더불어 고려 조정에서 상당한 정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반면, 백제 황실인 견씨들은 이후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몰락하여 가문을 보전한 일부 백제 귀족과 비교해,
개국현백이었던 능예 역시 그 후손의 이름이 남지 않았고,
고려의 중소 귀족과 혼인한 쇠복 역시 그 자손의 이름을 찾기 어렵게 되었으며,
견훤과 함께 항복한 고비녀 역시 박영규 일가임에도 그 무덤조차 찾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이들은 송경을 벗어나 영동(永同)과 남원(南原) 등, 전주 부근의 지방으로 숨어들게 되었으니,
뿌리를 알 수 없는 견윤(甄胤)*이 그 시조였다.
* 견씨가 본디 전주(全州), 황간(黃磵), 남양(南陽), 경주(慶州), 청양(靑陽), 남원(南原), 선산(善山)의 7개 본관을 지녔다고 하나, 이후 < 세종실록지리지 >에서 황간과 남원의 토성(土姓)으로 기록된 점에 비추어 대부분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현재 황간 견씨와 전주 견씨만 등록되어 있다. 아마도 능예의 현손(玄孫)인 견윤이 식읍으로 받았던 한주를 버리고 옛 터전으로 숨어든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정된다.
그들이 이후 고려와 조선 양조에 걸쳐 그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아마도 출사하여 다시 지배층으로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
"이 쯤이 좋을 것 같소."
이 얘기의 끝은 바로 능예의 현손, 견윤의 이야기이다.
일찍이 선대에서 한주 식읍에 있던 토지 대부분을 팔게 된 뒤, 견윤은 남은 재산과 일족들을 이끌고 전주로 돌아왔다. 그때 그의 숙부인 견성(甄成)*이 몹시 위중하여 황간현에 남게 되었으므로,
* 일각에서 신검의 원래 이름이 '성(成)'이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는 확실치 않은 것이고 그 근거도 찾기 어렵다. 만일 실제 이런 인물이 있었다면 견윤처럼 후대 인물이었을 것이다.
"후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씁쓸하게 인사를 여쭙고 옛 조상의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무렵 전주는 크게 쇠락하여 있었다.
그나마 도호부(都護府)마저 철수하고 일개 지방으로 남게 된 전주는 꾸준히 인구가 줄어들면서 그 남쪽의 광주(光州, 무주)나 나주(羅州)보다 더 작은 도시로 전락하였다. 이 시기 광주는 도독부가 있었고, 나주도 황실의 후광으로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백제 멸망 후 너른 농지 대부분을 이 지역의 토호(土豪)들이 쥐고 있었으므로,
그곳에 두었던 기대를 저버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남원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곳은 백제의 척족이었던 강수(康壽)와 희연의 고향으로, 고룡궁주의 칭호를 버린 희연이 다시 돌아와 그의 오라비와 함께 일으켰던 곳이었다. 이미 신검마저 훙서한 뒤라 송경에 머물 수도 없었고, 백제 황족 대부분도 쇠락하였기 때문이었으니,
그 무렵 강수의 손자 우(雨)가 호장으로 지키고 있었다.
강수의 일가는 그즈음 이씨(李氏)로 개성(改姓)하고*, 도경(度景)의 아들 우는 이우(李雨)가 되었는데, 부친이 사망한 뒤에도 남원부(南原府)**를 다스리고 있었다. 견윤은 관아로 가서 신고한 뒤 본읍(本邑)에 거주하니***,
* < 세종실록지리지 >에 따르면 남원의 속성(續姓, 내주한 성씨)로 이씨, 임씨, 송씨를 지목하며 향리(鄕吏) 출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토성(土姓, 원 거주인의 성씨) 11개 중 벼슬을 지낸 양씨, 정씨, 진씨(晉氏)를 아전(人吏)이라고 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 향리는 호장 계급 중 여말선초 이후 사대부로 지배층에 포함되지 않고 지방에 머무르며 쇠락한 경우를 지칭한다.
** 태조 23년인 서기 940년에 바뀌었다. 이는 견윤의 등장 시점이 적어도 태조 말년 이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구 행정구역에 왕지전면(王之田面), 또는 왕치면(王峙面)이 있었던 점을 이용해본 것이다. 새만금일보 2019년 9월 19일자 기사 '김정길의 호남명산 순례 : 금남호남정맥 천황지맥의 남원 왕묘산(322.9m)'을 보면 왕지전면, 또는 왕치면의 지명은 신라 통일 전쟁에 참전한 당나라 장수 왕유후(王儒候)의 제전(祭田)에서 유래했으며 이 위치가 현재의 내척동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왕으로 예우 받은 자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는 설명인 셈인데, 이는 '왕'이 들어가는 다른 지명이 왕과 관련된 설화와 연계된다는 일반적 특징과 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지명의 출처가 된 왕묘(王墓)도 과연 당나라 장수의 묘인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
이것이 바로 전주 견씨의 남원 내주(來住)였다.
그는 왕묘산(王墓山) 아래 머물면서 일족과 더불어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사람들이 차차 그의 유래에 관해 알게 되었으므로 존귀하게 대하였다. 이는 견훤이 쫓겨나 와병으로 사망한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
이후 견윤이 사망하자 사람들도 왕손(王孫)임을 기려 세거지 근방에 묻어주었으나,
"백제의 후손임을 남기면 반드시 파묘(破墓)당할 수도 있으니 숨기는 편이 나으리라."
백제가 고려의 오랜 적이었기에 후일 어찌 될런지 알 수 없으므로 당나라 때 삼한에 왔던 설인귀의 부장으로 감추었으나,
그가 묻혔던 산이 후일 '왕묘산'이 되고,
그 아래 옛 세거지에 만든 땅은 제전(祭田)처럼 '왕지전(王之田)',
그리고 그곳에 들어가기 위한 고개를 '왕치(王峙)'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후손들은 이름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매우 한미하게 되어 백성(百姓)에 속하게 되니, 한 동안 그의 성씨로도 불리지 않을 만큼 낮아지게 되었으나,
견윤의 6세손인 순직(順直)은 이후 인주(仁州, 인천)로 자리를 옮겼고, 그 아들(7세손)인 소선(沼善)은 장단(長湍)에 자리를 잡아 17세손까지 기호(畿湖)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무신정변과 원나라 침공 등으로 18세손 때 광주로 자리를 옮겼고, 나라가 다시 평안해진 이후인 22세손 이후부터 팽성(彭城, 평택)과 백성(白城, 안성) 등지로 옮겼으니,
이후 주로 경기(京畿) 일대에 머물게 된 것이다.
한편 견윤의 숙부 견성 일가는 황간현에서 그 세력을 보전하였으나, 이들 역시 그 가세가 크게 번창하지 못하여 차차 신라와 백제의 고토인 경주, 청양 일대로 퍼지게 되고,
일부는 상주도독 용개의 후손과 결합하여 정착하기도 하니,
아자개의 후실인 남원부인으로부터 낳은 후손들도 이후 거성대족에 이르지 못하여 쇠락하게 되므로, 옛 위세를 잃게 되어 창업 초기 견훤이 이뤄놓았던 기반조차 남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견씨의 위업이 크게 쇠락한 일을 두고 후인은 안타까운 마음에 고인의 시를 함께 기록하여 두었으니,
이것이 사가(史家)가 남긴 이무기(土龍) 전설의 종막(終幕)과 세평(世評)이었다.
- 江南有丹橘, 經冬猶綠林.
강남에 붉은 귤이 있으니, 겨울 내내 여전히 푸른 숲이네.
豈伊地氣暖, 自有歲寒心.
여기 강남의 날씨가 따뜻해서랴. 추위를 견디는 마음 지녀서이지.
可以薦嘉客, 奈何阻重深.
귀한 손님에게 올려져야 하건만, 어찌 그리 험하고도 먼 것인가?
運命惟所遇, 循環不可尋.
운명이란 만남에 달려 있을 뿐, 천도(天道)의 순환은 헤아릴 수 없네.
徒言樹桃李, 此木豈無陰.
그저 복숭아와 오얏만을 말하니, 이 나무라고 어찌 녹음이 없겠는가?*
* 장구령(張九齡), 감우(感遇, 과거에 대한 감회)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