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씀 여호수아 5장 1-12절
제 목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백성들[8]
모든 인간은 사탄의 종으로 태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으므로, 그의 자손들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에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된 사람들이, 그 형상을 훼손하자 본능대로 살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죄인들의 종말은 영원한 사망이었습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속량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으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화목제물로 바치셨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직접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구원을 막기 위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인간의 정욕을 이용하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육에 매여 있을 때, 욕심도 함께 일하기 때문에 세상을 향한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면 사탄은 일하지 못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 성도는 부귀영화를 바라는 육이 없기 때문에, 사탄이 아무리 유혹을 해도,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길로만 갈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성도들은, 예수님 없이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영원한 세계를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길을 걷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빛을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나면, 자신의 의와 세상의 소유를 자랑하며, 살아왔던 그 시간들이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생각은 믿음이 성장할수록 더 크게 들 것이고, 하나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그 죄 된 시간을 버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할례를 행했던 것처럼 죄의 시간을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들에게는 마음의 할례입니다.
2절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할례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가나안이 어떤 곳인지, 지금 자신들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무모한 행동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사람들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공격할 것인지 방법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적을 앞에 두고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전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에 들어 오자마자 할례를 명하신 것일까요?
할례를 하면 군사들이 삼일 동안 전혀 움직이지 못해서, 가나안족속의 공격을 받는다면, 꼼짝없이 죽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수치가 물러가는 방법이 할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기 직전까지 가졌던 인간의 의를 끊지 않으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확신이 없이는 가나안족속과 전쟁을 할 수 없고, 그들의 땅을 빼앗을 수 없기 때문에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성도보다 더 능력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그들과 맞서기 전에, 먼저 인간의 의를 버리고, 자존심과 정욕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래야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와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있는 아낙자손들과,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백성들이 상대할 수 있는 적수가 아닙니다.
사탄이 그들을 능력과 힘으로 무장시켰기 때문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먼저 무장해제 시키시는 것입니다.
무장 해제 된 백성들은 성령안에 안전하게 숨어 있어야 하는데, 만약 혈기와 정욕과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들이 흉기가 되어 성도들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품에 보호하신 다음,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을 상대하신 후에 백성들에게는 승리의 기쁨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품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물론 백성들이 아낙자손과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기신 전쟁이라는 것을 믿고, 전쟁에 임한다면 크게 승리할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 놀라운 은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불평하는 백성들을 담대하게 책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하여 육신의 할례를 받은 것처럼, 성도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아 인생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한다면, 크신 은혜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자손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할례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제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에게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적이 와도 싸울 능력이 없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을 향해서는 죽은 자로, 하나님을 향해서는 산 자로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살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죽어야만 살 수 있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호자가 되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연약함이 바로 믿음의 충만함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함으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창세기의 말씀을 기록한 때는 BC1450경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할례를 명하셨는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193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타민K 가 하는 역할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비타민K가 결핍되면, 혈액응고에 필요한 프로트롬빈이 부족하게 되어 결국 혈액이 응고되지 못해서 사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입니다.
혈액응고에 필수 요소인 프로트롬빈의 양은 생후 3일이 되면 성인의 30%에 달하고, 그 이후 계속 증가하여 생후 8일째에는 성인의 110% 를 유지한다고 했습니다.
생후 8일이 될 때 최고의 농도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고통이 덜할 것으로 생각해서 아기를 낳자마자 할례를 행한다면, 혈액응고가 어려워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과학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는 것을 창조과학회에서 기록한 것을 보았습니다.
진화설을 주장하는 과학자들이 성경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내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결국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것을 증명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아무런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난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길갈에 도착한 이스라엘백성들이 명령대로 할례를 행하자, 하나님께서‘오늘날 애굽의 수치가 너희에게서 굴러갔다’고 하셨습니다.
한 민족을 만드시기 위해서 400년의 시간이 필요했고,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에서 할례를 행했기에 지난날 수치가 모두 물러간 것입니다.
그들이 노예로 살아온 수치가 굴러간 것이고, 눈물과 한숨으로 자신들의 미래가 없다고 부르짖던 아픈 시간들이 굴러간 것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광야에서 40년을 돌아야 했던 수치 역시 굴러갔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지나온 시간 중에 어떤 수치가 굴러가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멀리하며, 불평했던 시간과, 축복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온 시간이 부끄럽다면, 그 수치가 굴러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숙해야만, 지난 날 하나님을 멀리했던 시간들이 바로 수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할수록 자신이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11-12절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라 또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전에,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재앙을 만났는데, 죽음의 사자가 넘어갈 유일한 방법은,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이 유월절이 이스라엘백성이 지킨 첫 번째 유월절입니다.
두 번째 유월절은 시내광야에서 시내산을 떠나기 직전에 지켰습니다.
그 후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명의 정탐군 사건이 있었고, 불신앙을 보인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그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길갈에서 40년 만에 지킨 유월절이 세 번째 유월절입니다.
이스라엘백성에게 유월절은 생명이고 구원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야곱을 통해 12아들을 허락하셨으며, 요셉이 애굽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자, 모세를 연단하셔서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는 지혜자로 키우셨고, 바로 왕과 대면하여 장자가 죽는 마지막 재앙으로 심판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어린양의 피로 살리신 것입니다.
이렇게 귀중한 유월절을 평생 기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가나안 땅에서 유월절을 지킨 것입니다.
신명기 1장 2절에 호렙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11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를 40년 만에 도착한 것입니다.
믿음만 보여드리면 며칠만에 갈 수 있는 길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던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백성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가나안으로 향했다면 그들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면 분명히 회개하여 축복을 받겠지만, 이들처럼 40년 동안 연단을 받는다면, 헌신할 기회가 적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할 수 있기 때문에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면,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 의심하며 한걸음 전진했다가 후퇴하기를 반복한다면, 일찍 깨닫고 순종하는 사람보다 상급이 적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영접하든, 아니면 의심하면서 하나님을 배척하든 그것은 그들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천국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이스라엘 곧 성도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과 성도들에게 가나안이라는 땅을 주셨고, 그 땅에서 살게 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주셨기 때문에, 순종해야만 영생을 받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고, 기적을 보았으며,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도록 충성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언제부터 교회를 다니셨습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딱딱한 것을 먹을 정도로 성장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나서, 삶의 변화는 있습니까?
저의 질문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며,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보혈이 두려워서 사탄이 공격하지 못하고, 도망가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야의 생활을 청산해야 하고, 죄의 강물인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옛 것을 단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월 14일에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현주소가 애굽인지, 광야인지, 가나안에 있는지를 분명히 아셔야 할 것입니다.
유월절 이튿날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그 땅의 곡식을 먹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출애굽에서부터 가나안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었던 만나가 그쳤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시는 만나를 볼 수 없을 것이며, 먹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주신 하늘의 양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을 수 있게 되자, 만나가 그친 것입니다.
만나가 끊어졌다는 것은 아직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이스라엘지파에게는 어쩌면 위기입니다.
많은 백성들과 짐승에게 양식을 매일 공급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주셨을 때는 다른 음식도 달라고 불평했지만, 만나가 그치자 귀한 양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에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물이나 공기 그리고 늘 편하게 대했던 사람과 물질을 잃었을 때, 그 모든 것이 큰 축복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항상 쓸 돈이 있고,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며, 행복한 가정과 건강이 있을 때는, 그것이 언제까지나 여러분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라도 잃어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적은 것을 받았을지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그것을 아끼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적은 것을 크게 받으므로 늘 행복한 것입니다.
만나는 언젠가는 끊어져야 할 양식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머물러 있는 가나안에 들어온 이스라엘백성에게는 더 이상 만나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바로 만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살아가는데 불편이 없도록, 만나를 날마다 주고 계시지만, 다른 음식을 달라고, 내가 더 풍요롭게 살게 해 달라고 불평하기 때문에 행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불평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는 마음으로 메추라기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메추라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만나가 아닌 메추라기를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그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임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내가 지금 무엇을 받았고, 또 무엇에 감사하고 있는지 자신을 살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작은 감사를 놓칠 때, 가나안에서 심고 자란 그 땅의 양식을 먹을 수 없는 것이며, 축복을 받고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9-10절, 12절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가 부분적으로 깨닫고, 알던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셔야만 깨닫기 때문에 부분적이지만,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재림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처럼, 알기 때문에 그 때는 만나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님을 만나는 그 날까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나를 내려 주셨을 때, 기뻐하며 감격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만나에 대한 감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은혜를 날마다 받고 누리자, 첫사랑을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하나님을 배신하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에, 기꺼이 만나를 주고 내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유월절 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가는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백성처럼,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은 우리는 자족하는 믿음과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거두셨을 것입니다.
그 하늘의 만나를 매일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감사하여, 마음의 할례를 하는 것이 두렵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만 의지하며, 할례를 행한 것처럼,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세상을 향한 욕심과 정욕을 잘라버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소유는 가질수록 더 큰 욕심을 부르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많이 가질수록 평안해지며, 늘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나는 곡식과 열매를 먹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자리에서 언제나 은혜로 살아가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15,11,18/조춘숙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