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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집에서 보내기 스크랩 (무릉계곡-5) 무릉의 전설 천년고찰 "삼화사"
청정심별 추천 0 조회 506 14.08.27 11:02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무릉반석 바로 위쪽 계곡 옆에 포근히 들어 앉아 있는 절 삼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서기643년(선덕여왕12년)에 자장선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무릉반석위에 절을 짓고 "흑련대"라는 다소 이상한 이름으로 개창하고 829년(흥덕왕4년)에 3선이 두타산에 와서 청련대. 백련대. 흑련대라 하였다가(또는 약사삼불이 서역으로부터와서 삼화. 지상. 궁방에 주지하였다고도 함) 864년(경문왕4년)에 범일국사가 "삼공"이라 현판하고 중창을 거치면서 사찰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삼공암이 ‘삼화사(三和寺)’라는 사명을 얻게 된 것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 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태조께서 임금이 된 후 이 절에 조칙을 내려 절 이름을 문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했다. ……신성왕께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로 고쳤다.

 

 

1369년(공민왕18년)에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임진왜란때 왜군의 방화로 소실되어 1592년(선조25년)에 무릉계 상류에 이건하고 "중대"라고 이름을 고쳐 중건하였으며, 1905년 의병()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다가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또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 다시 중건하였다.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약사전(殿)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 3층석탑 및 대사들의 비()와 부도()가 있다.

 

 

이상은 삼화사의 유래입니다. 아래 기술된 삼화사에 대한 고찰은 "삼화사" 홈페이지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불교에 대해서, 사찰에 대해서 문외한인 저도 아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병합하여 완전한 통일국가를 이루는 것은 고려를 세운지 20년(937)만의 일이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는 역사가 말해 준다. 이 통일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재산을 잃은 후삼국 유민들의 슬픔과 불만을 달래는 새로운 왕조의 무엇보다 큰 과제였다. 이에 태조 왕건은 개태사를 비롯한 전국의 인연 있는 사찰에서 천도제를 베푸는 등 민심수습에 총력을 기울였다. 부처님의 자비로 얼어붙은 민심을 달래고 국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노력이었다. 앞의 동국여지승람에서 인용한 짧은 기록도 당시의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태조 왕건이 삼화사를 민심위무의 근거사찰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초의 삼화사 사세와 관련해 중요한 시사를 주는 부분이다. 즉, 인근의 다른 사찰도 많은데 굳이 삼화사를 지목해 관심을 표시하고 사명을 바꾸도록 한 것은 이 무렵 삼화사가 고려 조정이 주목할 정도의 규모와 사세를 갖추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영동지방 최대 사찰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삼화사고금사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삼화사는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등 전각과 당우가 무려 24방에 이르고 있었다한다. 또 산내 암자도 적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대찰의 면모에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태조 왕건이 영동지방의 민심위무 근거사찰로 삼을 만하다. 태조 왕건에 의해 절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이 사찰이 고려왕실의 각별한 관심과 후원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승람의 기록에 “후사에 전하게 했다”는 표현이 이를 뒷받침한다.

 

 

삼화사의 건립연대에 대한 견해는 예전부터 그 논란이 많았던 듯하다. 삼화사 창건연대를 비정할 수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삼화사의 창건에 최초로 관여한 인물이 누구인가 하는 점은 그 추정이 더욱 더 곤란하다.
현재까지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인물로 가장 많이 거명되는 인물은 신라말 구산선문 가운데 명주 사굴산문의 개창자인 범일통효(梵日通曉, 810~889)이다. 범일국사가 삼화사 창건에 관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자료는 〈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자료는 앞에서 거론한 석식영암의 기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석식영암(釋息影庵)의 기문에 …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있었는데 각자가 거느린 무리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모여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옛날 제후가 회맹하던 것과 같았다. 오랜 뒤에 헤어져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삼공 (三公)이라 하였다. 뒷날 사굴산의 품일조사(범일국사)가 이곳에 와서 절을 세우고 ‘삼공’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후 태조께서 임금이 되자 이 절에 조칙을 내려 절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에 전하게 하시니 이상한 일이었다. 대개 신인(神人)이 그 자리를 일러주었다. 조사가 그 터에다 절을 지어 상서를 기록하였으며 신성왕(神聖王)께서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

 

 

범일국사의 이름은 〈삼화사고금사적〉을 비롯한 삼화사의 모든 사적기에 등장한다. 그리고 〈척주지〉·〈진주지〉·〈강원도지〉에도 예외없이 범일국사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범일은 삼화사의 개창과 관련짓지 않더라도 어떤 형식으로든지 간에 삼화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특히 영동지방의 중요한 사찰은 모두 범일이 개창한 사굴산문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삼화사와 범일의 관계는 이름만 등재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인물은 신라 선덕여왕때 대국통을 지낸 자장율사(慈藏律師)이다. 최시영이 쓴 <삼화사고금사적〉에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사실이 나타나는데,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적(古蹟)에 이르기를 “자장조사가 처음 당나라를 다녀온 후 본국의 오대산에 돌아와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력하다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지금의 삼화사)를 창건했다. 이때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11년이고,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 16년(642)이었다. 절은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각 24방이었다. 뒷날 10리 서쪽 중대로 12방을 지어서 옮겼다. 그러나 회양의 재난으로 옛날 삼화사의 연대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를 기록한 문헌도 다 증빙할 길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고적(古蹟)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앞서 살펴본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더 있다는 것인지 전해 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화사고금사적》이《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조사의 전기를 인용하여 창건의 내력을 밝히려 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자장율사가 이 절의 역사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은 버릴 수 없다. 아무리 사찰의 역사를 고승에게 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삼화사의 경우는 자장의 관여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우선 삼화사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자장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기에 따르면 말년을 강릉(지금의 평창, 신라 때에는 평창, 강릉, 삼척지역이 다 강릉 관할이었다) 수다사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문수대성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池,淨巖寺)에서 만나자” 는 약속을 한다.

자장은 문수를 만나기 위해 갈반지에 석남원을 짓고 기다렸으나 문수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나자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문수는 “아상(我相)이 있는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면서 사라졌고, 자장은 문수를 쫓아가다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이 문수대성을 만나기 위해 몇 군데를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장이 삼화사에서도 초막을 짓고 기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삼화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이밖에도 또 하나 검토해 볼 자료가 있다. 이는 자장이나 범일과 같은 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삼화사가 처음 터를 잡던 때의 설화에서 연유한다.

 


우선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이때가 범일국사가 굴산사로 오기 22년 전인 신라 흥덕왕4년(829)이라는 것이 《강원도지》의 기록이다. 《삼화사고금사적》은 이 설화를 좀더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이다.

고적에 말하기를 약사삼불은 본래 서역으로부터 동해를 지나 일편(一片) 석주(石舟)에 실려 와서 본국에 이르렀는데 가장 큰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지녔고, 두 번째는 푸른 연꽃을 지녔고, 세 번째는 금색 연꽃을 지녔다. 하나는 흑련대(삼화사)에 있고, 하나는 청련대(지상촌)에 있으며, 하나는 금련대(영은사)에 있었다. 혹은 이르기를 세 부처님이 탔던 용신이 변하여 암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즉 승람은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여기에 모여 회생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강원도지》는 이를 보다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화사고금사적》은 보다 구체적으로 삼선(三禪)과 삼불(三佛)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삼(三)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지에는 삼선이라든가 삼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승람에서는 삼신인(三神人)이 머물렀다 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했다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기보다는 하나의 설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사찰명이 삼화사로 바뀌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화사가 삼공암이란 이름 대신 삼화사로 개명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의 일로, 그 사연은 앞에서 인용한 그대로 “신성왕(神聖王, 고려태조)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화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

 


이와 같이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은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삼화사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이 절에는 보물이 몇가지가 있다고 하는군요. 궁금한데 알아보겠습니다.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보물 제1292호)

 

우리나라에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많은 철불이 제작, 봉안되었다. 현재까지 알려진 문화재급 철불은 모두 18점으로 국보가 2점, 보물이 12점, 지방유형문화재가 4점 등 이다. 국보급 철불로는 전남 장흥 보림사 철불(국보 제117호),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 철불(국보 제 63호)등이 있다. 이중 보림사와 도피안사 철불은 모두 명문이 나타나는 신라하대에 조성된 대표적 불상이다. 보물급 철불로는 남원 실상사 철불(보물 제41호), 충주 대원사 철불(보물 제98호), 광주 증심사 철불(보물 제 131호), 충남 청양 장곡사 약사철불(보물 제 174호), 남원 선원사 철불(보물 제 422호), 충주 단호사 철불(보물 제 512호), 영천 선원동 철불(보물 제513호), 평택 만기사 철불(보물 제567호), 예천 한천사 철불(보물 제667호), 상주 남장사 철불(보물 제990), 강화 백련사 철불(보물 제994호) 등으로 이 불상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이밖에도 남원 대복사 철불, 해남 은적사 철불, 서산 일락사 철불 등은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삼화사에도 오래된 철불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삼화사고금사적》에는 오래 전부터 이 절에서 봉안되어 온 사실을 적고 있다. 또 《진주지》를 비롯한 읍지나 군지 등은 이 철불의 수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선조 임진왜란 때(1592) 병화로 불이 났으나 약사전만이 타지 않았다. 현종이 즉위한 경자년(1660)에 중대사 구지로 이건했다……순조 계미년(1823) 9월 8일 불이 났으나 역시 약사전의 철불만 타지 않았다. 그러나 중간에 도둑이 팔을 잘라 도망가다가 숲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 절 스님들이 그것을 수습해서 다시 원래대로 복구했다(《척주지》).

 

 

이 기록은 삼화사 철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첫째는 이 철불이 개창 또는 그 얼마 후 부터 존재했으며, 둘째는 그 존명은 약사불로 알려져 왔으며, 셋째는 중간에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실제로 동해시 지가동에는 지상사가 있으며 이 절은 삼화사 철불과 비슷한 모습의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철불은 제작수법이 삼화사 철불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즉, 서역으로부터 왔다는 기록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지상사 철불과 동시대에 제작, 봉안됐음을 짐작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 불상이 조선 중기 이후 불가피한 사정, 예컨대 전쟁이나 화재로 상당한 수난을 겪었음도 확인된다. 불상의 보존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은 삼화사 철불이나 지상사 철불이 대동소이하다. 다행하게도 이 불상들은 근년에 이르러 다시 원형으로 복구되긴 하였으나 수난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철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 철불이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것은 신라오악학술조사단 태백산지구 조사반이 1967년 12월 제 7차 최종조사를 할때였다. 조사반원은 최순우, 진홍섭, 정영호, 김화영 이었는데 진홍섭은〈삼화사의 탑상(塔像)〉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이 철불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철불은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두 손도 없으나 상체, 특히 안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다.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 높이는 40㎝, 어깨 폭68㎝, 두께는 0.5~1㎝이다. 머리는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 오르듯 두드러져 있다. 이는 고려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이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융기된 것같이 보인다. 의문(衣紋)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화를 보였고 팔에 걸쳐서 늘어진 옷자락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앞가슴은 노출되어 가슴 밑에 결대(結帶)가 크게 표시되었고 끝이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들었음이 분명하나 손목 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
이 불상에는 목과 결대 위에 횡선이 있고 가슴 앞에 종선이 있다 이를 보면 여러 개의 틀에 의해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의 문제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꺾이면서 연장돼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존명에 관하여는 그것을 밝힐 아무런 근거도 없다. 끝으로 이 철불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적 특징 특히 안면 처리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삼화사 철불의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1967년 당시만 하더라도 훼손상태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 중기 이후로 여러 차례 화재와 인위적 훼손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한때는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려갈 뻔한 일도 있었다(삼화사 철불의 영험설화 참조). 뿐만 아니라 훼불의 상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그대로 법당에 안치하고 불자들의 귀의를 받게 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이 불상은 재발견된 이후 한동안 단칸불전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 마침내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를 받기에 이른다. 특히 1997년 4월 5일에는 이 절의 주지 자광 원행(慈光 遠行) 화상의 원력으로 복원불사가 추진되어 파불이 아닌 예배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원행화상이 이 불상의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자료는 다름 아닌 불상 배면에 돋을새김으로 남아 있는 명문이었다. 이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었는데, 이중 판독이 가능한 것은 모두 140자에 불과했지만 이로 인해 이 불상의 비밀 몇 가지가 밝혀졌다. 제작연대에 관해 지금까지 이 불상은 제작수법이 측면에서 고려시대 철불로 인정되어 왔다. 그리고 존상의 명칭은 창건설화의 기록에서 보듯이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새로 발견된 명문을 세밀히 분석해 본 결과 이 사실이 모두 뒤집혔다. 즉, 불상의 제작연대는 명문이 이두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게는 7세기, 늦게 잡아도 하한선은 9세기말로 추정된 것이다. 또 제작수법도 다시 정밀하게 관찰한 결과 신라하대의 철불들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들이 확인되었다. 나발 위에 솟은 육계라든가 원만한 상호, 뚜렷한 삼도와 통견법의 등은 보림사 철불이나 도피안사 철불과 흡사했다. 명문이 나타난 것도 신라철불로서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작 당시 이 불상의 존명이 밝혀진 것이었다. 삼화사 철불은 오래도록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이는 창건설화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명문에는 이 불상의 존명이 약사불이 아니라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존명 확인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나말여초(羅末麗初) 불교계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문화재급 철불의 자료에서 보듯이 이 시기의 철불상 존명은 대개 비로자나불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나말여초의 불교사상계가 구산선문이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엄교학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삼화사의 경우처럼 신라말에 이미 선종인 사굴산문에 편입된 사찰에서 노사나불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화엄교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삼화사 철불의 명문은 앞으로 귀중한 연구의 자료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파불상태에 있던 불상을 복원해 귀의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한 일로 평가된다.

 

 

새로 복원된 불상의 좌대는 철원 도피안사 철불의 좌대를 그 모형으로 제작해 1997년 10월 28일 준공한 적광전에 안치시켰다. 법당의 편액은 당연히 대웅전이 아닌 적광전(寂光殿)으로 걸었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고대로부터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할 만큼 탑이 많았다. 《삼국유사》3권 원종흥법조에 따르면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절들이 별처럼 늘어섰고 탑들은 마치 기러기가 날아가듯 즐비했다”고 한다. 이 묘사는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인 것이겠지만 사찰과 불탑이 매우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많은 불탑이 건립된 것은 곧 그 시대에 불법이 흥성했음을 뜻한다.

 


우리나라에 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삼국시대 말기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 때(632~646)인 7세기 전반에 분황사 모전석탑, 영묘사 탑, 황룡사 구층목탑 등이 건립되었다. 신라가 통일을 이룩한 7세기 후반부터는 불교가 크게 융성하면서 고선사 삼층석탑, 감은사 삼층석탑, 그리고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등이 건립되었다. 그뒤에도 수많은 석탑이 세워져 역사가 오래 된 사찰 치고 석탑 1기(基)정도는 남아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다.
옛 사람들이 이렇게 불탑조성에 열을 올린 것은 조탑공덕의 신앙에 따른 것이다. 《조탑공덕경》에는 탑을 조성하면 무한한 공덕을 쌓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경전에 따르면 조탑(造塔)을 할 때는 반드시 사리를 넣어야 하지만 여의치 못할 경우 경전을 넣어야하고, 최소한 경전을 요약하고 있는 사구게(四句偈)라도 넣으면 공덕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조탑공덕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법을 기둥삼아 바른 종교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불교가 흥성한 나라에서는 어디에서든 많은 불탑이 조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석탑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무려 399기에 이르고 있다. 이중에는 25기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급은 103기, 지방유형문화재는 271기나 된다. 과연 ‘석탑의 나라'다운 면모라 할 만하다.

 


천년고찰 삼화사에도 석탑이 없을 수 없다. 법당 앞에는 고색이 창연하고 이끼가 가득한 옛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범상치 않다. 규모는 3층으로 높이는 4.7m이다.
이 탑은 삼화사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소멸과 중건을 반복해 온 것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어느 절의 어떤 탑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탑의 구조와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地臺石)은 남북으로 장대석(長大石)을 놓고 동서로는 그 사이에 끼도록 된 4매석(枚石)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석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隅柱)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석(甲石)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 윗면 중앙에 4분원(分圓)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기단의 면석은 각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大基壇)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板石)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別石)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탑신을 살펴보면 옥신과 옥개(屋蓋)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초층탑신은 거의 입방체에 가깝고 4우주가 표시되어 있으나 약간의 손상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만 3층탑신이 크게 손상되었고 2층탑신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옥개석은 받침이 각 층마다 사단으로 되어 있으며 큰 면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들 옥개석의 배치는 초층이 2단이고 2층과 3층은 1단이다.
마지막으로 상륜부(上輪部)를 살펴보면 긴 찰주(擦柱)가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상륜의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보륜(寶輪)이 꽂혀있다. 또 따로 다섯 개의 철환(鐵環)도 남아 있는데, 이는 보륜과 보륜 사이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찰주 정상에는 보주(寶柱)를 나타내는 주물로 만든 철주가 꽂혀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특히 손상이 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 데 지장이 없다. 또 초층탑신 밑에 별석의 받침을 끼워 시대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신라석탑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삼화사 삼층석탑의 건립시기는 늦게 잡아도 신라말로 추정된다.
1967년 이 탑을 실측 조사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예술적·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탑은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급은 1997년 6월 이 탑을 중건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보다 높은 위상으로 재평가되었다.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모든 연대추정은 이 유물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삼화사 석탑은 그 증거들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신라시대에 조성된 탑임을 입증한 것이다.
삼화사 삼층석탑이 현재의 장소(중대사터)로 옮겨진 것은 1979년 12월이었다. 삼화사가 쌍용양회의 채광권 안에 위치함으로 해서 더 이상 사찰로서의 역할이 어렵게 되자 1977년부터 이전사업을 시작한 끝에 마지막으로 탑을 옮겨온 것이다. 이때 이 탑은 법당 앞마당이 아니라 화단 왼쪽에 세워졌다. 이 탑을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삼화사를 옛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는 자광 원행(慈光 遠行)화상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스님은 우선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천년석탑의 자리를 다시 선정했다. 당시 자문에 응했던 전문가들은 이 탑이 공양탑이 아니라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란 점을 들어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현재 삼화사의 가람배치상 중심이 되는 곳은 큰법당 아래 마당이다. 그리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건에 착수한 것이 1997년 4월초였다.
삼화사는 먼저 탑이 위치할 장소에 사방 3.2m, 깊이 1m의 흙을 파낸 다음 굵은 마사와 적심석으로 지반을 다진 뒤 기단은 지면보다 약간 높게 하는 기초작업을 했다. 이어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뜻밖의 소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초 관계자들은 이 탑을 이전한 지가 1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소장유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佛臺座片) 2개, 철편(鐵片)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이 탑이 1979년 이건될 때 발견된 것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었다.
삼화사는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이와 함께 원행화상이 봉안하고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顆)와 불자들의 공양물들을 사리함에 넣어 초층탑신 사리공내에 봉안했다. 이 이건불사가 완료된 것은 1997년 5월 4일이었으며 봉탑낙성법요를 거행한 것은 그 해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제 1277호(1998. 6. 7)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이 탑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부장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시 검토된 양식적 특성도 주목된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석탑을 이루고 있는 세가지 구성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구성과 특히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 그리고 각 탑신석과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이 매우 균정하고 단아하다. 이는 신라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탑의 조성 연대가 늦어도 9세기 중엽이라고 최종적인 단정을 했다.
삼화사 석탑의 조성연대가 이같이 상향조정된 것은 이절의 철불 제작연대가 명문의 발견으로 상향 조정된 것과 함께 삼화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동해 두타산 관음암에 내려오는 전설

두타(頭陀)라는 말은 원래 범어 ‘dhuta’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으로써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기도를 하기 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해야 함을 일깨워 주는 듯 동해 제일의 관음기도 도량 두타승(頭陀僧)처럼 엄격히 느껴지는 암자가 이 산에 있다. 삼화사에서 서쪽으로 가파른 길을 따라 50분쯤 올라가면 나타나는 관음암.

관음암의 원래 이름은 지조암(指祖庵)이었다고 한다. 921년(고려 태조 4)에 창건되었으며 항간에는 용비대사가 절을 지었다고 하나 용비(龍飛)는 임금이 등극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잘못해석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관음암의 중건은 왕실의 지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934년(태조 20) 태조 왕건은 통일 전쟁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삼공암(三公庵)을 삼화사(三和寺)로 이름을 바꾸면서 삼화사에 노비와 사전(寺田)을 하사하였다. 삼화사는 이를 발판으로 산내에 8개의 암자를 창건하는 등 급격히 사세가 신장하였는데, 이 때 관음암도 중건된 것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 불탄 것을 당시 삼척부사였던 윤청이 주선해 중건했다. 현재 남아 있는 삼화사의 유일한 산내 암자이다.

관음암은 작은 관음상을 모시고 있는데 예로부터 그 영험함이 소문나 동해 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기도도량으로 지금도 사시사철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1959년 이 암자를 중건하면서 아예 이름도 관음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관음암에 얽힌 영함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아랫마을에 심(沈)씨 성을 가진 총각이 늙고 병든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심총각은 얼굴도 잘 생기고 마음씨도 착했으나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결혼을 못해 노총각으로 늙어가고 있었다. 심총각이 장가를 못 든 것은 집안이 가난해 아무도 딸을 시집보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총각은 삼화사 뒤 두타산과 청옥산에서 약초를 캐서 늙고 병든 홀어머니를 봉양했다. 약초를 캐러 갈 때면 늘 산중의 작은 암자 앞을 지나갔다. 이 암자에는 스님 한 분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심총각은 매일 같이 암자 앞을 지나다 보니 어느새 스님의 염불소리를 조금씩 흉내내게 되었다. 깊은 산중에 들어가 있다가도 문득 목탁소리가 들리면 자신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어느날 심총각은 약초를 캐고 내려오는 길에 기도하는 스님한테 불쑥 물었다.

“스님, 관세음보살한테 기도를 하면 정말로 소원이 성취됩니까?”

스님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백일 동안 열심히 기도를 해도 소원이 성취되지 않으면 내가 자네 소원을 성취하게 해주겠네”

“스님, 정말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약속했습니다.”

총각은 그날부터 산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법당에 들려 관세음보살 앞에 세 번 절하고 돌아올 때도 그렇게 하며 기도를 했다. 어느날 점심으로 싸 가지고 간 강냉이를 관세음보살 앞에 공양으로 올리기도 했고, 또 어느 날에는 산나물을 뜯어 관세음보살 앞에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석 달 가까이 하다 보니 비록 말 없는 불상이지만 친숙함이 느껴졌다.
어느덧 백일이 다 되가던 어느 날 심총각은 산으로 들어가다가 암자에서 큰 비를 만났다. 총각은 약초를 캐러 갈 수도 없고, 다시 내려 갈 수도 없어서 법당 추녀 밑에 앉아 비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으려니 무료해져서 맨땅에 줄을 그어 놓고 혼자서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자서 두는 꼬니라 재미가 없었다. 총각은 문득 법당의 관세음보살을 바라보았다. 관세음보살은 입가에 미소를 보일락 말락 총각을 바라보고 있었다. 총각이 관세음보살에게 말을 걸었다.

“관세음보살님, 저하고 꼬니 한판 두시렵니까?”

관세음보살이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총각은 혼자말로 다시 말했다.

“우리 내기를 합시다. 내가 이기면 보살님이 제 소원을 들어주시고, 보살님이 이기면 내가 보살님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지요. 제 소원은 예쁜 색시를 얻어 장가를 드는 것이니 그렇게 해주시면 됩니다. 보살님은 무엇이 소원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말씀해주세요. 꼬니는 세 판을 두어서 두 판을 먼저 이기면 승부가 나는 것으로 합시다.”

총각은 혼자말로 약속을 하고는 꼬니를 두기 시작했다. 자기가 한 수를 두면 다음 수는 관세음보살의 수를 대신 두고, 그 다음은 다시 자기가 두곤했다. 첫 판은 총각이 이겼다. 둘째 판은 관세음보살이 이겼다. 셋째 판은 막상막하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선수는 관세음보살이 잡고 있었다. 장고를 하던 관세음보살이 드디어 결정적인 한 수를 두었다. 승부가 나는 수였다. 심총각은 한수 물리자고 억지를 부렸다. 관세음보살은 묵묵부답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총각은 벌떡 일어나 법당의 관세음보살한테 절을 세 번 하고 절값으로 한 수를 물리겠다고 했다. 심총각은 얼른 한 수를 물리고 다시 두자 이번엔 보살이 지고 총각이 이겼다. 총각은 찬을 쓸어 버리며 관세음보살에게 말했다.

“보살님, 제가 이겼습니다. 그러니 제 소원을 들어 주셔야 합니다. 제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죠? 예쁜 색시한테 장가보내 주시는 겁니다.”

총각은 관세음보살님한테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그 사이 비는 그치고 저녁노을이 들기 시작했다. 총각은 기분좋게 휘파람을 불며 산을 내려왔다. 그날 밤 총각은 꿈을 꾸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귀부인이 나타나 총각에게 말했다.

“나는 지조암에 있는 관세음보살이다. 오늘 너하고 꼬니를 두어서 졌으니 약속대로 예쁜 색시를 얻어 주겠다. 내일 약초를 가지고 장에 나가면 어떤 처녀가 약을 구하러 올 것이다. 그 처녀에게 약을 팔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꿈을 깨니 벌써 아침이었다. 총각은 약초를 들고 장에 나가 전을 펴고 앉았다. 조금 있으려니 처녀가 약을 사러 왔다.

“이 약이 두타산에서 캐온 것인가요? 지금 저희 아버지께서 몹시 위중하신데 이 약을 달여 먹으면 나을 수 있답니다. 저에게 이 약을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처녀는 약을 외상으로 달라고 했다. 급하게 나오느라고 돈을 가지고 오지 못했으나 반드시 갚겠다며 막무가내로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심총각은 할 수 없이 얼굴도 모르는 처녀에게 약을 외상으로 팔았다.

“나도 늙은 어머님을 모시고 있는 처지요. 사정이 그러하다니 약초를 외상으로 드리겠소. 그 대신 이 약을 드시고 아버님이 낫거든 꼭 찾아와 약값을 갚으시오.”

총각은 처녀에게 약을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며칠이 지났다. 날이 어둑어둑 지는데 문밖에서 사람 찾는 소리가 났다. 총각이 밖으로 나가 보았더니 며칠 전 장에서 만난 처녀와 아버지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죽을 사람에게 약을 공짜로 준 총각을 치하하며 약값을 갚으러 왔다며 약값을 물었다.

“약 값이 좀 비쌉니다. 노인장의 딸을 저에게 주시면 약값으로 받겠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노인은 약간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심총각을 찬찬히 살펴보니 몸도 건강하고 마음씨도 착해 보였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혼인을 승낙했다. 이리하여 심총각은 드디어 장가를 들게 됐다. 드디어 꿈같은 첫날밤, 심총각은 아내의 옷고름을 풀며 지나간 세월의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지조암 관세음보살하고 꼬니를 둔 얘기며, 그날 밤에 꾼 꿈 얘기를 털어 놓았다. 남편의 얘기를 들은 아내도 비슷한 사연을 털어 놓았다.

“사실은 저도 지조암 관세음보살님한테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했지요. 기도가 끝나던 날 꿈을 꾸었는데 어떤 귀부인이 나타나 장에 가보라고 해서 간 것입니다.”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무엇인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 날이 밝자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절을 찾았다. 법당에 들어가서 세 번 절을 하고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살펴보니 두 사람의 꿈에 나타난 귀부인의 얼굴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그제서야 지조암 관세음보살 앞에 무수히 절을 하며 소원을 이루게 해준 것에 감사했다.
그 후부터 이 암자에는 관세음보살님께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여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관음암의 옛모습)

 

지금 관음암은 개축이나 증축의 수준이 아닌 신축의 수준으로 일대 대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관음암으로 들어서던 저는 중장비를 동원한 너무도 엄청난 공사판에 놀라서 그만 발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공사 현장의 그 참혹한 사진을 차마 올리지 못하는 점을 양해 바랍니다.

 

(관음암의 옛모습)

 

속세의 자연을 파괴하면서 자행되는 무자비한 건축공사 기술이 절집에 도입이 되어 이렇게 깊고 깊은 심산유곡 조용하고 아름다운 암자를 거창(?)한 사찰로 거듭나게 하다니...

조용하던 암자에 우렁차게 울려퍼지는 포크레인 소리를 들으며 되돌리던 저의 발걸음.

아마도 비애감이 발자욱 자욱마다 묻어 있었을 것입니다.

 

(관음암의 옛모습)

 

이제 소박하고 아름답던 관음암의 모습은 영원히 우리곁에 없을 것입니다. 인간이 끝없이 편의를 추구하고 겉모습에만 치중하는 한 이제 몇 안남아있는 소박한 다른 암자들도 관음암의 전철을 밟게 되겠지요.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비좁게 느껴지더라도...

사람들은 때로는 소박하고 아늑한 고향같은 곳을 찾게 됩니다.

조용한 산사를 그리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요.

 

동해 두타산 무릉계곡에 자리한 삼화사와 관음암.

우리에게 가 보고싶은 고향같은 사찰로 계속 남아 있기를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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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4.08.27 11:05

    첫댓글 삼화사 검색하니 나와서 스크랩으로 모셔왔습니다 ..

  • 14.08.27 11:44

    아 !
    꼬옥 한번 가보고 싶네요. . .

  • 작성자 14.08.27 11:50

    소원이 이루워 지실듯 보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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