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五章 대남(大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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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감자(甘蔗:사탕수수) 뿐인 드넓은 벌
판이 이어졌다.
황함사귀와 한백은 어린아이처럼 연신 감자줄기를 씹어먹었
다.
호평(弧坪) 평야(平野).
벌판의 생김새가 시위를 잔뜩 당긴 활의 형상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족들은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
궁바[公]의 안식처.
호평평야는 조상들의 안식처다. 여족인들은 가족이 죽으면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시신을 둘러메고 호평평야로 모여들었
다. 그러나 호평평야에 발길을 들여놓지는 못했다. 벌판이 드
넓게 펼쳐지는 입구에서 가족들은 시신을 노인에게 넘겨주었
다.
노인은 특별히 선택받은 여족청년 두 명에게 시신을 운구
(運柩)하게 하고 호평평야로 들어선다.
그 때부터 시신은 완전히 썩을 때까지 호평평야에 방치된
다.
가족들에게 유골을 수습해가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노인이다.
그러나 그 때도 가족들은 호평평야에 들어서지 못한다.
한 달에 한 번씩 호평평야를 둘러본 노인이 청년 두 명과
함께 유골을 수습해오면 가족들은 시신을 넘겨줬던 그 자리에
서 유골함을 받아든다.
호평평야는 여족인들이 발길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금지
(禁地)였다. 전가무인들이 호평평야를 점거하고 농장을 개간
하기 전까지는 여족은 궁바의 안식처를 빼앗긴 다음부터 장사
지낼 곳을 잃어버렸다.
대안(代案)으로 떠오른 곳이 여모봉이지만, 성산(聖山)을
더럽힐 수는 없는 일. 결국 그 때부터 여족들은 아무 곳에나
조상을 모셨다.
여모봉 한 자락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모봉을 이용
했고, 그도 저도 안 되는 사람들은 뒷산에 모시기도 했다.
조상의 노여움을 산 것일까?
사자(死者)를 호평평야에 모시지 않은 다음부터 많은 여족
인들이 죽어갔다. 한족도 덩달아서 많이 죽었다. 원인 모를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의원이 손쓸 사이도 없이 시름시름 앓
다가 죽은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여족인들은 궁바의 분노를 샀다면서 겁에 질렸다.
해남도에 이주한 한족들은 곧 원인을 파악해 냈다.
시체는 부패하면서 많은 독성(毒性)을 뿜어낸다. 그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질병이다. 그렇지 않아도 질병이 유난히 많은
해남도이지 않은가. 질병이 만연할 때마다 많은 사람이 죽었
고, 그들의 시신을 묻지 않고 풍장(風葬)을 지냄으로써 질병
은 더욱 확산된다.
중원에도 풍장의 유래가 있기는 하다.
질병에 걸려 죽은 사람은 풍장을 시킨다.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을 바로 매장하면 신의 노여움을 사 더 많은 질병이 발생
할 것이라는 속설(俗說)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원의 풍장은 해남도와 많이 다르다.
시신을 아무도 볼 수 없게끔 인적이 닿지 않는 곳에 놓아둔
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일으키는 독성과 아직 육신에서 제거되
지 않은 질병이 옮길 틈을 주지 않는다.
사방이 바다로 고립된 해남도는 돌고 돌아야 제 자리다.
호평평야…… 여족인이 풍장 풍습을 이어가려면 호평평야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한족들은 매장 풍습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것만은 무력을 사용해도, 밥을 굶겨도, 죽음을 내
려도 고칠 수 없었다.
호평평야는 더 이상 궁바의 안식처가 아니다.
여족인들도 궁바의 안식처라고 부르고 있기는 하지만 진정
한 의미를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옛날에는, 아주 먼 옛날
에는 궁바의 안식처 때문에 거세게 반란을 일으켰고 많은 여
족인이 죽었지만, 지금은 그저 맛 좋은 감자 농장이 있을 뿐
이다.
"이거 무척 단데? 히히! 하나 씹어봐요."
황함사귀가 감자 줄기를 꺾어 유소청에게 내밀었다.
감자는 줄기의 부분에 따라 단 맛이 다르다. 중간 부분이
가장 달고, 위와 아랫부분은 그렇게 달지 않다.
한백은 그것도 모르고 윗부분부터 차근차근히 씹고 있지만
황함사귀는 빙그레 웃기만 할 뿐 가르쳐 주지 않는다.
유소청은 감자 줄기의 위와 아랫부분을 뚝 끊어 버리고 중
간 부분을 씹었다.
"무척 다네요."
"히히! 그렇습죠?"
한백이 그제야 뭔가 알아차린 듯 감자 줄기의 가운데 부분을
씹어본다. 그리고 고리눈을 뜨고 황함사귀를 노려보았다.
그라거나 말거나 황함사귀는 감자줄기를 베고 편하게 누워 연
신 단물을 빨아먹는다.
구름 한 점 없는 땡볕더위가 일행들 머리위로 쏟아졌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어른 키를 훌쩍 넘겨버린 감자줄기는 없는 바람까지 막았고,
후텁지근한 냄새마저 풍겨내 더욱 덥게 만든다.
그래도 일행은 감자밭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이구!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황함사귀가 옷 속으로 파고든 개미를 집어내며 중얼거렸다.
덥기는 모두들 마찬가지였다.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유소
청과 한백은 특히 더 더운지 땀을 비 오듯 흘려냈다. 그러나
아무도 덥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적엽명은 운공조식(運功調息)에 몰두했다.
그는 짬이 날 때마다 운공조식을 파고들었다. 길을 걷다 잠
시라도 쉬게 되면 틀림없이 운공조식을 취했다.
'천강십이검은 본능을 극대화시킨 검이다. 미미한 바람이
스쳐도 발작적으로 반응하는 검. 그렇기에 순간적으로 허점을
파악하게 되고, 검을 밀어 넣을 수 있다. 밀어 넣는다? 그렇
다. 천강십이검은 세검(細劍)이다. 동검(動劍)아 아니라 정검
(靜劍)이다. 능동적으로 공격하는 검이 아니라 공격을 맞받아
치는 수검(守劍)이다. 그런데 변했다.
일장검법을 익힌 다음부터…… 어디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적엽명은 해답을 운공조식에서 찾으려고 했다.
검은 검일 뿐이라고 전임 조가주가 말해주었다.
검은 검일 뿐이다. 예기(銳氣)는 다르지만 혼을 깃들여 만
든 파랑검이나 동전 몇 푼에 살 수 있는 청강장검(靑鋼長劍)
이나 사람을 벤다는 점에서는 똑 같다.
초식이 달라졌을 리도 없다.
초식은 몸의 움직임이다.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몸의 움직
임. 초식을 능숙하게 수련하면 신법이 빨라지고, 검로(劍路)
가 명확해지며 부드러워 진다는 장점이 있다. 허나 단점도 형
성된다. 초식을 숙련하면서 형성된 고벽(痼癖). 찌르기에 맛
을 들린 무인은 베기를 못한다. 베는 초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전과 같이 급박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무의식중에 찌르는
초식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실전을 수련과 같이 부드럽게 치르기 위해서 심법(心法)을
되뇐다.
부동심(不動心), 평상심(平常心)……
싸움을 여유 있게 하는 자는 몸의 움직임이 부드럽다. 부동
심, 평상심을 유지한 자는 이기기 힘들다. 자신이 익힌 모든
초식을 정확히 전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나 초식을 수련하면서 각인(刻印)되어버린 고벽이 사라
진 것은 아니다. 검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즐겨 사용하는 초
식이 따로 있기 마련이다.
천강십이검에는 애용하는 초식이 있을 수 없다. 천강십이검
은 감각의 검이기 때문에 순간적인 판단으로 공격하는 부위도
공격하는 초식도 달라진다. 매 순간, 매 초식이 다른 검법이
라고 말해도 좋을 게다.
천강십이검은 그 중에서도 유독 검로가 뚜렷했던 검법을 모
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검…… 그렇다. 천강십이검은 전검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게다. 해남도에 들어와서야 자신의 검이 전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사실 전검이란 말을 들었을 때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일장검법을 수련한 다음 변화가 생긴 부분은 진기
의 흐름일 수밖에 없다.
진기의 흐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한
다. 일정기간 이상 내공(內功)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인 무
인들은 진기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내관법(內觀法)이 이를 가
능하게 해준다.
엄밀히 말하면 내관법 또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혈도(穴道)를 타고 흐르는 진기의 흐름은 연속된 것이다.
물이 수로(水路)를 따라 흘러가듯 촘촘히, 빽빽하게 가득 차
서 흐른다. 흐른다는 동적 움직임만 없다면 통나무와도 같다.
무인은 진기가 흘러가는 과정을 본다.
임맥(任脈)을 흐른 진기가 독맥(督脈)으로……
가능한 것인가?
불가능하다. 진기는 돌멩이가 굴러가듯 한 점으로 뭉쳐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진기는 혈도 가득히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다.
가능하다. 운공조식을 행하면 코로 들이쉰 공기가 몸 안의
진기와 융합하여 전신을 휘돈다.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
인체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하다.
분명한 것은 인간이 극도의 수련을 통해 내공을 강화시킨다
는 자체가 바위산에서 조그만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격에 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엽명은 진기의 흐름을 주시했다.
칠 주야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부단히 관찰했지만 어
느 때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전가팔웅을 베면서 느낀 폭발적인 힘. 내기(內氣)가 폭사
(暴射)되는 듯한 강렬한 힘.
그것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검기가 강해졌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지만 제어할 수
없는 검기라면 곤란하다. 장소가 전장이라면 마음껏 검을 휘
둘러 볼 수 있지만, 그러다 보면 천강십이검을 만들어 냈듯이
또 다른 검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해남파 무인들을 상대로 확
인되지 않은 검을 사용하기는 싫었다.
해남파 무인들이 두려운 것도 아니고, 그들과 친밀해지고
싶어서도 아니다.
그들은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를 침범하는 무리, 나라의 안녕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무리 외에는 가급적 살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적엽명의 적은 명확했다.
삐익! 삐익……!
감자밭 사이에서 날카로운 풀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황함사귀는 즉시 풀을 뜯어 풀피리를 불었다.
삐익! 삐이익……!
이쪽이 부르면 저쪽이 화답하고, 저쪽이 부르면 이쪽이 응
답하고.
풀피리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적엽명은 운공조식에서 깨어나 풀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곳
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백도 누웠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분리해놨던 창을 다시 조립했다.
두려움은 없되 긴장은 한 얼굴.
유소청은 적엽명에게 다가가 조용히 앉으며 손을 잡았다.
"만약…… 우화를 죽여야 된다면……"
"소청."
"망설이지 말고 죽여. 내 염려는 조금도 하지말고. 이래봬
도 해남오지야. 신조(信條)대로 밀고 나가."
"고맙다."
유소청은 싱긋 웃었다.
"우화는 그냥 오지 않았을 거야. 황함사귀, 무자음사와 말
을 나눠봤는데, 감자밭에서 만나자고 한 것은 화공(火攻)을
노린 계략 같데."
"짐작하고 있었어. 소청, 하나만 약속해 줘."
"싫어."
"……?"
"화공이 펼쳐지면 몸을 빼란 소리 아냐?"
"……"
"바보. 말했잖아. 이제는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 간다고. 나
를 살리고 싶으면 먼저 살아. 그저 살기만 해. 그러면 나도
살아."
"고생을 시키는구나."
"언제는 안 그랬고? 나중에 갚아."
적엽명은 유소청의 손을 마주 쥐었다.
뼈가 없는 듯 부드럽고 작았다.
"우화는 살수를 불러들이면서 연노(連弩)를 사들였어."
"그래요?"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무인과 싸우려면 연노처럼 좋은 것
이 없지. 사방에서 불을 지르고 연노를 발사한다면…… 몸을
빼기 힘들 거야. 이렇게 해. 우화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면 지
체하지 말고 몸을 빼. 내 한 몸이라면 언제든지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풋! 아직 내 고집을 몰라? 그런 소리는 이제 하지마."
유소청은 마음을 홀가분하게 해주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
로 활짝 웃었다.
그녀의 마음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우화대원에게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우화다. 해남파가
그토록 잡으려고 애를 썼어도 그림자조차 밟지 못했다.
그런 우화가 만나자는 연락을 취해왔다. 수귀 탄이 중간에
서 노력한 점은 안다. 허나 그 정도로 모습을 드러낼 우화 같
았으면 벌써 잡혀서 개죽음을 당했으리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석두를 베면서 전검이란 검법을 세상에 알린 적엽명.
그는 전검을 누를만한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본
인의 무공이 전검을 누를 수 있거나, 전검을 이길 수 있는 조
력자가 곁에 있어야 한다.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무적의 병장기나 계략이라도.
적엽명이 우화를 죽이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
드디어 풀피리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이제는 풀피리를 불지 않아도 서로의 위치를 확실히 알만한
거리.
저벅! 저벅! 바스락……!
감자줄기를 헤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어우러졌다.
"네 명이야."
유소청이 말했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발자국 소리로 미루어보면 고수다운 사람은 없다. 모두들
발걸음 소리가 무겁고 투박하다. 그 중에는 조금 가벼운 발자
국 소리도 있지만, 그래도 무인의 발걸음이라고 하기에는 역
시 무겁다.
"수귀가 있다면……"
'수귀의 무공이 제일 높아.'
유소청은 하려던 말을 마저 끝내지 못했다.
감자줄기를 헤치고 사내 네 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에. 그 중에는 수귀 탄의 얼굴도 보였다.
"하하! 나를 보자고 했다면서요?"
우화의 음성은 범종이 울리는 듯 우렁찼다.
"적엽명입니다."
적엽명은 공손히 포권지례를 취했다.
"하하! 듣기와는 딴판이군. 소문을 들어보니 터지기 일보직
전의 화약 같은 사내라던데. 하하! 자, 앉읍시다."
우화는 형식적인 예도 취하지 않았다.
키가 작은 사내였다. 몸집이 가냘프고 손목도 한 손으로 꽉
움켜쥐면 으스러져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스런 사내. 나이는
사십은 넘었고, 오십은 안 되어 보였다. 그러나 성격은 생김새
답지 않게 호탕하여 범속한 예의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중원 전역에 명성이 알려진 해남파에 대항하는 사람치고는
무척 왜소한 사람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
첫 느낌이었다.
우화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손바닥에도 굳
은 살 한 점 없고, 육신에서 풍기는 기운도 평범하기만 했다.
허나 우화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그렇게 보니 그런 구석이 엿보이기도 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족인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
만 우화에게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꺾이지 않을 신념이 있
어 보인다. 활활 불타는 눈이 들끓는 분노를 폭출하고, 굳게
다문 입술이 처절한 저항을 말해준다.
우화는 저항아(抵抗兒)만이 가질 수 있는 기질을 가졌다.
"나보다 어리니 말을 놓지. 싫으면 싫다고 말해."
우화는 앉자마자 대뜸 말을 놓기 시작했다.
이상할 게 없다. 여족인은 상하의 구분이 엄격하다. 엄격하
다 못해 답답할 정도다. 한 살이라도 덜 먹은 사람은 윗사람
의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다. 해남율법이 살인을 최대 금기로
삼고 있다면, 여족인은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최대 규범인 셈
이다.
"싫소."
"……?"
"사적인 자리라면 얼마든지 응해줄 수 있으나, 공적인 자리
인 만큼 예의를 갖춰주시오."
적엽명의 음성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래? 하하! 어려울 것 없지. 그래 주겠소. 말을 올리든
내리든 그게 큰 문제는 아니지. 그래,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했소."
웬만한 사람은 기분 나쁜 인상이라도 지을 법 한데 우화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우화를 따라온 두 사내는 적엽명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
다.
한백이 매서운 눈길을 보냈지만 무공조차 익히지 않은 것
같은 두 사내는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만약 입을 열어도 좋
다는 허락이 내린다면 당장 욕부터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은 존경심에서 우러나온다. 가르치거나 강요해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
"이건 이야기가 다르잖아!"
적엽명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묵묵히 서있던 탄이 고함을
질렀다.
탄이 고함을 지른다? 적엽명에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색도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여차하면 검이라
도 뽑을 태세.
"탄…… 섭섭하구나."
"적엽명. 나야말로 섭섭해. 나는 우정을 버리지 못해서 우
화님과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내가 말하지 않았나?"
"……?"
"우화를 벨 지도 모른다고."
"나도 말했어. 나부터 베야 가능할 거라고."
"……"
"……"
둘은 서로를 바라볼 뿐 결정적인 말을 삼갔다.
지난 팔 년 간은 혈배를 나눈 사이도 갈라놓을 만큼 깊고
넓은 세월이었다.
이건 목숨을 달라는 것과 엄연히 다르다.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기꺼이 내놨으리라. 실제로 사귀는 비가의 재건이 내포
한 위험을 알면서도 비가에 합류했다. 적엽명이 나름대로 신
경을 썼다고는 하지만 목숨을 버릴 각오가 아니면 어림없는
일.
허나 우화와 관련된 일은 신념의 문제다.
사상(思想)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살아가는 목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구나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은 있는 법.
탄이에게 우화는 물러설 수 없는 지대한 존재임이 틀림없
다.
둘 사이의 어색함을 풀어준 사람은 우화였다.
"하하하! 둘이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고성(高聲)이 오가서야. 싸우자는 것도 아니고 둘이 이야기를
나누자는데 신경전을 벌일 필요가 있을까? 안 그래?"
"우화, 저 자는 감히 우화를 벨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불경(不敬)입니다!"
우화를 따라온 두 여족인이 대노(大怒)해서 소리쳤다.
"아니야. 나는 방금 묘한 말을 들었어. 사적인 자리가 아니
고 공적인 자리라…… 수귀, 자네도 비가 문제는 아니라고 말
했지? 개인적인 문제로 나를 만나자고 하고, 공적인 자리라면
남이 들어서는 안될 말이겠지. 모두 물러서도록 해. 십 장 밖
으로 물러가서 풀피리를 불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우화는 적엽명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탄을 비롯한 여족인은 우화의 말에 사족(蛇足)을 달지 않았
다. 입 밖으로 떨어진 말은 옳든 그르든 절대적인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게다.
"적엽명, 우리는 친구인가?"
탄이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간절한 소망이 묻어있었다.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내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악녀(惡女)라면…… 죽일
텐가?"
적엽명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약 네 가족을 죽인 여자라면?"
이번에는 대답했다.
"죽여야겠지. 하지만 너에 대한 도리로 나도 죽는다."
탄은 다짐하듯 말했다.
"우화는 여족인의 신이시다. 유일한 희망…… 나는…… 절
절이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 해도 우화를 거스른다면 죽일 수
있다."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일까?
알아들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너라면 충분히 그럴 것이라는
뜻인가.
삘……! 삘……!
단조로운 풀피리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십 장 밖.
음률은 필요 없었다. 자신들의 위치만 확인시켜주면 된다.
그들은 풀피리를 불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으리라. 적엽명
과 우화사이에 약간의 다툼이라도 있을라치면 번개같이 달려
들리라.
그들은 모두 안다.
적엽명이 죽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우화는 주머니 속에 든
목숨이나 다름없다.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
적엽명의 적이 우화가 아니기를 바랄 뿐.
"살수를 고용하고, 연노를 사들이고…… 어디서 그 많은 돈
이 생기는 겁니까?"
"하하!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길이 보이는 법이지."
"상세하게 듣고 싶소."
우화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본론을 꺼내기 위한 겉치레 말인 줄 알았는데…… 적엽명의
눈을 보면 빈말이 아니다.
"자네에게…… 자금원(資金原)을 밝히란 말인가? 처음 보는
자네에게? 우화대의 존망(存亡)을 걸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죠."
"……?"
"해남도에 세 명이 들어왔죠. 나와 무자음사, 그리고 일도
일사."
"한백과 화문이란 친구지."
"한백은 여기 있고…… 후후! 화문은 어디 있을까요?"
"……!"
"그 친구는 몸집에 비해서 몸이 무척 빠릅니다. 사람의 뒤
를 밟는 것쯤이야."
"수귀의 뒤를 밟았단 말인가? 하하! 수귀가 벗을 잘못 사궜
군. 벗의 뒤를 밟다니."
"그 정도 가지고 잘못 사궜다고까지야…… 여모봉을 쑥대밭
으로 만든 다음에야 하실 말씀을."
우화는 놀란 듯 했다. 그러나 우화의 표정은 곧 담담해졌
다.
"나는 자네를 만나러 나왔네. 왜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수
귀가 설득해서? 천만에."
"……"
"나는 자네의 목줄을 움켜쥐고 있어. 믿지 못하겠는가?"
"자세히 말해보시오."
"먼저 협박을 해야겠지. 내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
네도 무사하지 못해. 호평평야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있
지. 그들이 동시에 불을 지른다면, 아무리 몸이 빠른 무인이
라 할지라도 이 평야에서 타죽고 말 거야."
"협박이 안 되는군."
"아, 아…… 협박이 끝나지 않았지. 호평평야에서 불길이
치솟으면 그 순간부로 비가장은 끝나. 지금 비가장에는 황유
귀 혼자 있을 테지? 그가 아무리 싸움의 귀신이라 할지라도
겨우 네다섯 명쯤 당해낼 뿐 이삼백 명이 몰려간다면 어쩔
수 없지."
"어머님과 형님을 죽이겠단 말이군."
"누이를 빼면 안 되지. 뇌주반도로 시집간 큰누이까지 모두
변고를 당할 거야. 참! 그래도 황유귀를 믿는 마음이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그는 아무 힘도 쓰지 못해. 비가를 습격
하는 사람들이 죽은 아내의 가족들이거든."
"……"
적엽명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
을 짓지 않았다. 그런 표정은 내면을 읽을 수 없게 만든다.
우화가 협박하는 내용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다.
주위에 황함사귀와 한백이 있는데 그 정도 예상하지 못했다
면 말이 안 된다.
호귀 류…… 그를 믿을 수밖에 없다.
여족인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순간, 그도 미리 말해 두
었던 조치를 취해줘야 한다.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천추의 한
이 되리라.
"이제 협박이 되는가?"
"조금."
"조금? 하하하! 그걸 생각하지 못했군. 그대는 비가 식솔에
게 구박을 당하면서 자란 사람. 지금은 달라졌다고 수귀에게
들었지만 예전의 감정이 쉽게 사라질 수야 없겠지. 그럼 타협
을 해 볼까?"
"……"
"자네 같은 사람이 나를 도와주면 큰 힘이 되지. 강성오가
의 가주. 그들만 죽여주게."
"하하하!"
"그래야만 할 거야. 출신내력을 알고 싶으면."
순간, 적엽명은 우화의 멱살을 와락 움켜잡았다.
"무슨 소리냐!"
"효과가 있군."
우화는 멱살을 잡히고도 빙그레 웃었다.
"다시 한 번 말해 봣!"
"말해주지. 출신성분을 알고 싶으면 강성오가의 가주들을
죽여 달라고 말했어. 궁금하지 않나? 아버지가 누구인지?"
적엽명은 잡아먹을 듯 뜯어보았다.
눈길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쯤 우화는 갈기갈기 찢
어져 죽었으리라.
한참을 노려보던 적엽명은 멱살을 놓아 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말하는 게 좋겠군. 우화대가 쓰고 있는 막
대한 돈. 어디서 난 건가?"
적엽명의 음성은 냉담했다. 말투도 동등한 입장으로 바뀌었
다.
'포기했다. 출신성분…… 궁금하지만 알지 않겠다는 뜻……
대답하지 않으면…… 죽는다.'
우화는 위기를 느꼈다.
적엽명이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우화
는 뛸 듯이 기뻤다. 그렇지 않아도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적
엽명과 접촉할 기회를 노렸는데. 출신성분. 그것이면 어쩔 수
없이 검을 들 테고, 강성오가의 가주들 중 두세 명은 죽게 되
리라. 나머지는 명부객이……
틀렸다. 우화는 적엽명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자신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과 같이 목숨을
허공에 매달아 놓고 있는 우화대원들이 그렇지 않은가.
'이 자는 신념이 있는 자다.'
우화는 입을 열었다.
"그것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가?"
"없소."
"없다……?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하는군."
"자금원은?"
"여족인들."
"……?"
"여족인들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에게 동조하
고 있지. 그들이 한 푼, 두 푼 내놓은 돈들."
"그 돈이…… 그렇게 많은가?"
"티끌 모아 태산인 법이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여족인
이지만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얼마나 강렬한 지는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고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들이 내놓
은 한 푼, 두 푼은 돈이 아니라 마음이야."
적엽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족인들에게 헌금(獻金)을 받을 수 있는 암로(暗路)를 뚫
어놓았다면 막대한 자금을 형성하는 것은 간단하다.
해남파는 암로를 차단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잘 차단해왔다. 우화대와 내통한 여족인을 본보
기로 참수해 버림으로써 공포감을 형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족인들은 숨을 죽였고, 우화대와 내통하는 자는 점차 줄어
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에 불과할 뿐, 여족인들의 마음을 파
고든 우화대는 꾸준히 영역을 넓혀가도 있는 모양이다.
"하나 더 묻지. 그대가 데려온 사람들…… 무공은 어디서
익힌 것인가?"
"하하하! 무슨 말을…… 내가 데려온 사람들 중 무공을 익
힌 사람은 수귀 뿐이야. 수귀도 무공을 정식으로 익힌 것이
아니……"
우화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스르릉……!
적엽명이 검을 뽑아들었다.
쨍쨍 내리 쬐는 햇볕에도 반사 한 점 없는 묵빛 검.
"당신을 베는 것은 생각해 봐야 될 일이지만 이들을 베는
것은 망설일 필요가 없지. 어떻소? 나는 시험 해봐도 좋은데."
우화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결정을 못 내리는군. 열 명. 전가팔웅과 맞서도 될 만한 고
수들인데, 아깝게 됐군."
적엽명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잠깐!"
우화가 다급하게 일어서며 앞을 가로막았다.
"대력검이다."
"대…… 력검? 중오가 중 일가인 박가(博家)의 검인데?"
"맞다. 전에 옥로진인이란 자가 해남도에 들어왔었다. 그는
대력검보를 훔쳤지만 외관영 영주에게 잡히고 말았지. 해남파
는 모진 고문을 가했지만 대력검보를 찾을 수 없었어. 이미
우리 손에 들어온 다음이니까."
"……?"
"해남파의 천라지망에 갇힌 옥로진인은 검보를 땅에 묻어버
렸어. 그걸 본 사람이 있었고……"
들은 적이 있다. 외관영 영주인 석두가 마수광의를 죽이면
서 한 말이다. 박가에서 잃어버린 대력검…… 그게 우화의 손
에 있다니. 그렇다면 적이 아니다. 죽은 사람들의 몸에 난 흔
적은 대력검이 아니다.
"다른 검도 있나?"
"해남도에는 대륙의 무인들이 들어오지 못한다. 그리고 해
남파에서 잃어버린 검법도 대력검밖에 없지."
"……"
"물을 것은 다 물었나?"
적엽명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일행들이 있는 곳으
로 걸어갔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문득, 그의 걸음이 멈춰졌다.
"가서 우화에게 전하시오. 당신이 한 말을 조사해 볼 것이
고, 사실이라면…… 적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뭣이!"
"당신은 우화가 되기에는 담이 너무 작아. 우화 같았으면
열 명의 고수를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내 무공을 시험해 봤
을 거야. 정말 소문처럼 강한지. 강하다면 포섭했을 것이고.
한 마디 더해주지. 당신은 좋은 기회를 놓쳤어. 사실 나는 많
이 망설였어. 내 정확한 아버지가 누군지. 당신의 유혹은 엄
청났소. 알겠소? 우화 같으면 고수 열 명을 버리는 한이 있더
라도 나를 잡았을 거야. 미끼는 충분했으니까."
키 작은 사내는 잠시 휘청거리는 듯 했다.
충격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적엽명의 신형은 어느 새 감자 줄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
다.
적엽명이 떠난 자리에 여족인 열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허리에 검을 찼고, 눈빛은 암석이라도 뚫을 듯 날카
로워 고수의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수귀와 다른 여족인 두 명도 나타났다.
"해남파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멀었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대력검을 익힌 고수 열 명이면 아무리 전검을 익힌 적엽명
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망동(妄動)하지 못하리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적엽명은 그들이 은신해 있다는 것은 알아챘고, 서슴없이
검을 뽑았다. 그렇다면 해남파 고수들은, 진정한 강자들 앞에
서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져 버리리라. 여족 자
존의 길은 불가능한 것인가……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