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들이 지난 천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한사람을 선정하였는데
단연 정도전이었다 한다.
그만큼 정도전이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이성계가 조선 태조이지만 사실은 정도전의 기획과 제의로 이성계의 무력을 빌려
500년 지속된 고려를 망하고 조선왕조를 열었다.
고려는 모순이 쌓일대로 쌓여 스스로 자정능력을 상실했다고 보고
민본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나라를 개창한 것이다.
또한 개국후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나라 운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성계가 하드웨어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면
정도전은 소프트웨어의 역할을 한것이다.
이성계가 정도전없이 조선개국을 생각하였을까
결단코 아니다.
정도전 없는 조선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정도전은 위대한 학자이며 사상가요 실천가요 혁명가이다.
그 정도전이 多侍 백동(옛이름 居平部曲)에서 2년간 유배생활을 하였다.
거기서 도탄에 빠진 기층농민들의 삶을 직접보고
부조리한 기존 질서을 개혁하고자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
그래서 백동은 한민족사에서 역사성 깊고
귀중한 문화유적을 간직한 곳이라 말할 수 있다.
多侍 사람으로 그런 중요한 역사현장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어 정도전이 유배생활했던 현장을
들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42B65154C99C1B8CF)
옛지명 소재동(消災洞)은 백동 서쪽에 있었다.
지금은 민가도 없고 한적한 곳이다. 바로 앞까지 차로 갈 수 있도록 포장해 놓았다.
여말(麗末)에는 이곳에 민가가 꽤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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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안내판이 있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썼다. 도올도 이곳을 직접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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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바라 본 현장
산 바로 아래에 초막과 비석으로 현장을 복원해 놓았는데
이렇게 중요한 인물을 최근에야 기렸다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多侍의 소중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도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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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나주정씨 문중산이다.
그래서 나주정씨와 봉화 정씨 문중에서 최근 정도전을 기리는 신도비를 세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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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뒷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다가,
그 서쪽 한 곳이 좀 평평하고 그 아래로 넓은 들이 펼쳐 있는 것이 좋아
드디어 종에게 명하여 묵은 숲을 베어내고 띳집 두 칸을 지었는데,
풀을 가지런히 하지도 않고 나무를 깎지도 않은 채 흙을 쌓아 뜰을 만들고 갈대를 엮어 울타리를 만드니, 일이 간략하고 힘이 적게 드는데도 동리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어서
며칠이 못되어 완성되었다. 그래서 편액을 초사(草舍)라 하고 곧 거처했다 -소재동기-
그 초사(草舍)를 복원해 놓았는데 소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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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두자미(杜子美)는 성도(成都)에 있을 적에 초당(草堂)을 짓고 산 것이
겨우 한 해를 지냈을 뿐인데, 초당의 이름은 천년을 전한다.
내가 이 초사에서 얼마나 살 것인지, 내가 이곳을 떠나간 뒤에
이 초사가 비바람을 맞아 무너지고 말 것인지,
들불에 타거나 썩어 흙덩이가 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후세에 알려질지, 알려지지 않을지, 모두 알 수 없는 일이다. - 소재동기-
정도전이 이 초사(草舍)를 짓고도
이게 얼마를 갈 것인지
두보는 한해를 겨우 살았는데도 천년을 전하는데
이곳을 후세 사람들이 과연 기억이나 해 줄 것인지 염려한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625년이 지나
한 나그네가 들러 혁명가요 사상가인 정도전을 생각하니
그 염려에 조금이나마 보답을 한 것 같아 위안이 된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202B65154C99C1BDD5)
유적비 앞에서..
625년이 지났어도 백성을 생각하는 그 사상이 살아 있고
후세 사람들이 흠모하여 기념하니 정도전이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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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에 이런 귀중한 역사 현장이 있는데도 보존을 못했던것 같아 못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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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마을 노송이 멋있다.
아마 백동마을의 상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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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동마을은 마치 학이 품고 있는 것처럼 명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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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룡산을 올라가기 위하여 입구를 찾는데 용문이 저수지 비탈길 왼편에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32B65154C99C1C0DA)
입구가 이렇게 생겼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52B65154C99C1C1DB)
안내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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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풍경
수종은 소나무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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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는 주위가 모두 산인데 그 북동쪽에는 중첩된 봉우리와 고개들이 서로 잇달았으며,
서남쪽에는 여러 봉우리가 낮고 작아서 멀리 바라볼 만하다. -소재동기-
정도전이 거평부곡인 백동의 산세를 설명해 놓은 구절이다.
백룡산 정상에서 바라보니 과연 그러하다.
사구실쪽은 봉우리들이 잇달아 있으며 서남쪽은 낮은 구릉으로 멀리까지 보인다
꼭대기 올라 가는 곳에 정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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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아래 유황촌에는 어르신네 옛집 있던 곳도 보이고.. 지금은 김영진 친구네 집 !
멀리 영산강도 보인다
소재동기에는 영산강이 려말(麗末)에는 금강(錦江)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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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올라가니 이런 안내판이 있었다. 정상은 헬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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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에 정자도 아담하게 있다 다시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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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이 저수지 위 청정리 쪽 풍경.. 들판이 막 누렇게 익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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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가면서 중학교 앞을 지나는데 교문이 이렇게 바뀌어 있었다
첫댓글 선산이 있어 가끔은 백동가지만 이리자세히 보진않았었나봐 세로운동네를본듯하여......
나락이 누렇게 익어서 숙이는 고개처럼, 가실남자 님의 식견과 경륜과 배우고자 하는 뜻이 가히 삼봉 선생을 닮은 듯 하오... 때로는 손해를 보는 것처럼, 때로는 배려하면서 살아가는 그대를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구려....... 늘 처음처럼, 늘 오늘같이 ~~~~~~~~~~~~~~~~~
과찬의 말씀! 다시에 그런 역사 유적이 있어도 제대로 활용을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회진현도 복원해서 다시가 과거 큰 고을이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홍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친구님들
친구분들 덕분에 고향 풍경을 눈으로마 담을수 있어 좋네요 황금 들녃과 한들한들 코스모스가 도로옆에 한챵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