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눈물
나이 50줄에 서면 자식들 군에 안보낸 아버지 몇이며 힘든 군생활 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아버지는 몇이나 될까?
난 다행인지 불행인지 딸만 하나둔 아비로서 지난 군생활시절 아버지께서 아들을 군에 보내고 훈련소에 면회오셨을때의 생각이 아직 뇌리속에서 날 흥분하도록한다.
왜일까?
그건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하고 지난세월을 회고하며 몇자 적어본다.
1.입영
35년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인생을 다시 되돌아보는 기회를 맞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직장을 일곱 번이나 옮기며 이런 저런 일을 하다 아! 이제는 나도 뭔가 새로운 미래로 향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때다 하고 직감적으로 뇌리를 스쳐갔다.
그 생각이후 나의 행동은 급격히 변해 갔고 군 입영 통지서를 받아 논 상태라 빨리 군에 가서 군복무를 마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구상을 했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광주로 올라가 천일버스 정비사업소에 근무하던 0현이한테 갔다.
고참과 한판 싸움을 하고 아직 분이 덜풀린 0현이랑 나는 0현이의 자취방에서 합판에 전기코일을 감아서 만든 전기 장판위에 소주 두어병과 마른 안주로 깡소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고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2. 연무대
잠이 오지 않아서 이리뒤척 저리 뒤척하며 밤을 지세우다 아침에 일어나 해장국 한그릇하고 기차에 몸을싣고 남창에사는 0민이 0권이 0남이 0일이 0욱이랑 연무역까지 이동해서 저녘무렵에 연무보충대에 들어가자 내무반을 편성에 대기소에서 대기했다.
대부분 장정들은 머리를 사전에 깎고 들어 왔지만 나는 스포츠머리를 하고 깔끔한 점퍼에 기지 바지를 입고있어서 대부분 기간병은 나를 방첩대로 오인하고 있어 이틀동안은 자유스럽게 오가며 연무대를 활보하고 다녔다.
아직 머리를 깍지 않은 장정은 머리도 깎고 특기 분류가 되지 않은 장정들은 특기분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동안 대기하다 공수특전사 지원한 장정들은 별도로 분류하여 장정내무반에서 그들 특유의 특권을 주어 장정들 사이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을 의도적으로 유도하였고 철없는 그들은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다.
3.육군 제2하사관학교로
빵과 과자로 끼니를 때우고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수 있던 연무대 생활을 마치고 우리는 하사관 지원을 하여 행정 보급 통신으로 분리되어 내무반을 배치 받고 우리는 그 날 오후 늦게 이른 저녘 식사를 마치고 연병장에 집합했다.
모두 대열을 맞추어 창고 앞 연병장에서 차례대로 군복 등 개인 지급 피복을 기준수 만큼 나누어주고 한 벌은 갈아입고 나머지는 더블빽에 모두 집어넣고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은 포장하여 자신의 집주소를 써 소포로 보낼 준비를 했다.
모두 소포를 보낼 준비가 끝나자 군사우체국 소포함에 쌓아두고 우리는 어디론지 한밤중에 걸어서 이동했다.
더불빽 울러 메고 몸에 맞지도 않은 군복과 딱딱한 군화에 발이 까여 절룩거리며 우리는 끝없는 행군을 하는데 이때부터 고생은 시작됐다.
저녁 6시부터 출발해 강행군을 한 끝에 우리는 여산면에 있는 황산벌 육군제2하사관학교 정문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정문옆에 있는 강당에 집합하여 각종 주의사항과 특기별 중대를 배치하고 앞으로 어떤 자세로 훈련을 받아야 할 것인지 등 정신교육 후 입교신고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4.신고
고통을 즐기고 자신의 자존심을 버리는 날은 이때부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애가 주의집중을 하지 않아 불려나가더니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모두들 보는 가운데서 군화발로 걷어차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쓰러지면 발로 밟고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줄을 잘 맞추지 못한다고 턱조가리를 주먹으로 올려치자 한애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져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는 서너명의 조교들이 그 애를 사정없이 걷어차고 발로 밟고 한다.
이때부터 우리는 겁을 먹고 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신고를 위해 우리는 특기별 중대편성에 들어갔고 나와 0민이 0욱이 0남이는 2대대 13중대로 0권이와 0일이는 3대대 20중대로 배치를 받았다.
일단 신고 연습은 긴장과 겁을 먹은 상태에서 목이 쉬도록 하고 새벽5시에야 내무반에 들어가 자신의 위치를 배치 받고 관물대에 관물을 하고 5시 30분쯤 취침에 들어갔다.
스팀이나 난로도 없는 내무반에서 피곤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아 누워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후회를 해봐도 소용없다.
이제는 부딪히자 하고 결심하고 있는데 강릉이 고향인 최0영하사가 내무반장이며 들어와 기상을 외치며 점호집합을 명했다.
아직 적응이 되지 않은 우리는 원위치 위치로를 반복하기를 열 번쯤 했을 무렵 고참 내무반장 서울출신 방0준하사와 김0인하사가 나와서 이제는 집합하라고 하여 중대사전에 집합하여 뛰어나가니 얼음이 얼어있는 황토마당에서 좌로 취침 우로취침에 이어 좌우로 굴러를 몇 차례하고 우리는 인원보고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점호를 마치고 바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에 가자 우리는 잘 몰라서 옆 전우들하고 이야기하며 두어 수저를 뜨자 동작 그만 식사 끝 하면서 식당 밖으로 내보낸다.
이때 0남이가 한 입 더 먹다 불려나가 한참동안 최0영이의 센드백이 되었다.
식기 세척장에 가다 순천매고출신 0옥식이가 몰래 밥을 한술 더 뜨다 내무반장들한테 걸려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았고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식사시간이면 거의 동물적인 수준으로 걸신들린 듯이 앞뒤좌우 눈치볼 것 없이 입으로 퍼 넣기 바빴다.
5.자갈밭에 마차 굴러 가는 소리
밥 한술 먹지 못하고 허기진 상태에서 하사관학교 기행 269기 입소 신고를 그렇게 마쳤다.
그리고 내무반에서 학과백을 지급 받고 도배할 때 쓰는 초배지로 만든 휴지를 200장씩 지급 받아 한 달을 써야 하는데 이 휴지를 30장씩 집어들고 볼펜 한 자루로 일단 군가와 이론적인 기초교육을 받기 위해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식장으로 군가를 부르며 뛰어갔다.
이제는 좌우 눈치를 보는 것도 못하게 하며 자갈밭에 마차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며 우리를 혼내기 시작했다.
아마 지금 아이들이 군에서 이런 정도의 교육훈련을 받는다면 모두다 탈영하거나 자살 아님 사고치고 말 것이다.
오후에는 군가와 제식훈련에 관련된 사항과 각종 암기사항을 휴지조각에 적고 저녁식사를 하로 갔다.
[M1소총들고 총검술]
식당에서 우리기수 짭방을 뽑는데 0욱이가 뽑혔다.
오는저녁부터 0욱이는 방한모를 덮어쓰고 짭통 앞에서 주걱과 국자를 들고 배식을 하는 것이다.
오른손에는 밥 양재기를 들고 왼손에는 0욱이가 퍼주는 국양재기를 들고 시멘트로 만든 차디찬 식탁에 앉았다.
8명이 다 자리를 맞춰 앉자마자 식사에 대한 감사의 묵념 소리에 맞추어 일제히 고개를 숙이자 식사개시 하고 구령하며 옆으로 이동하는 최0영을 겯눈질로 보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목이 터져라 외친 후 식사를 시작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
6.폭탄밥
그 밥이야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 잘 아리라 생각되지만 잠시 거론하면 우리 스텐 밥그릇만 한 양재기에 밥을 살랑살랑 흔들어 가득 주는 척하다 얼굴한번 처다 보며 씩 웃으면서 주걱으로 싹 깎아 버리면 말 그대로 폭탄 맞은 흔적처럼 되어서 폭탄 밥이 되는데 우리는 매일 이런 식사를 해야 했다.
쌀을 남겨 간부들이 집에 가지고가서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부실한 저녁을 먹고 나니 아직도 허기가 진다.
한창 젊은 나이 자갈도 소화시킨다는 나이에 주먹밥 한뎅이도 안되는 분량의 밥을 먹고 어느덧 이틀째가 되어간다.
내무반에 들어가자마자 통일화 끈을 풀고 침상에 올라가서 야전잠바를 벗고 일선에 정렬했다.
최0영이 지나가면서 혁대를 자신의 배가 최대한 들어갈 때까지 조이라고 한 다음 우리의 혁대를 1센티 정도의 여유를 남기고 잘라버린다.
이것은 배가 나오면 안되기 때문에 일부러 배나오지 않고 조금의 식사로도 허기를 지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7.팬티바람
매일 아침 10키로 구보에 제식훈련 분열과 열병 등 힘든 훈련속에 야간이면 근무에 군진수칙, 육군복무신조, 각종 암기사항 등을 외우며 한달이 지나갔다.
어느정도 훈련생활에 적응을 하게되자 토요일이면 외박가는 내무반장의 외박비를 거두어 주어야 토요일과 일요일이 편하고 또 일주일이 조용히 지나가는것을 터득하고부터 금요일만 되면 일인당 500원씩 갹출하기 시작했다.
외박비가 없는 날이면 우리는 최0영이의 무식하기 짝이없는 기합이 시작된다.
우선 초저녁이면 팬티바람으로 중대사전에 집합해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팔은 좌우로 쭉 뻗어 큰대자모양으로 서게한다.
그리고 조교에게 세숫대야에 물을 떠오도록 하여 해제기로 만든 비(볏짚의 목을 잘라 만든 비)에 물을 적셔 가슴과 등골에 좍 좌~~악 뿌리면 우리는 위아래이빨이 부디치는 소릴을 내며 덜덜 떨어야 했다.
영하의 날씨에 한번 당해보라 그 고통이 어떤지는 당해보지 않으면 모를것이다.
8.연단
제2부로 내무반의 침상 끝선에 선착순 집합하여 엠원소총 노리쇠후퇴 손잡이를 이빨로 물고서있기에 이어서 반합뚜껑을 뒤집어서 침상 1선에 정렬시기고 그 위에 양무릎을 올려놓고 손에는 엠원소총을 쭉뻣어 들고 있다가 몸을 움직이면 그대로 날아가 이단옆차기와 마구잡이 걷어차기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기합을 끝내주는 척하며 관물을 원위치 시키도록 한뒤 동작이 뜨다는 이유로 엠원소총 을 침상 1선에 정렬시키고 노리쇠후퇴손잡이에 머리박아(일명원산폭격)을 시킨다.
그러면 참지 못하고 여기서 쿵 저기서 쿵하며 쓰러지는 전우들을 마구잡이고 두둘겨 패는 이런 훈련은 지옥을 방불케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기가찰 정도의 기합으로 연속된 교육을 받아야 했기에 외박비를 거둘때면 싫어하는 전우는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조금이라도 편한 훈련과 내무생활을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함께 동조 할 수밖에 없는 때였기에 우리는 그 생활에 만족해하며 하루하루을 훈련에 전념했다.
9.소원수리
그러던 어느날 소원수리를 받는다 하여 개념없는 전우들이 금전을 거두어 내무반장 외박비를 준다고 써서 한동안 혼난적이있다.
일단 돈을 거둘때는 회식을 위해 돈을 거두고 거기에서 회식비는 새발의 피만큼 쓰고 나머지는 실질적으로 내무반장의 외박비 였다.
김0국 중대장이 직접 우리에게 기합을 주며 눈물을 흘릴정도의 강한 뺑뺑이가 시작되고 조사를 나와서 물어보면 다 회식비이고 훈련후 빵과 우유를 사먹는 것으로 모두 이야기 하도록 사전에 내무반 서무를 통해 우리에게 교육이 있었기에 모두는 그렇게 대답할수 밖에 없었고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결국 중대장도 한통속이었다.
10.후송
국방색의 유화염료 군복이 비와 눈 그리고 황토밭에 뒹굴러 그 색이 누리끼리한 카키색으로 변하였다.
군화굽틈에 박힌 못까지 바늘로 파고 광을 내며 내무생활에 적응하며 3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추운 겨울 난로당번인 서울의 김0수는 요령의 극치를 보이며 광산의 광부같은 얼굴로 분탄난로를 피우고 내무반은 먼지투성이에 날마다 불이 꺼질락 말락하여 담요 뒤집어쓰고 잠자던 정0조가 아침 기상시간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후송을 갔다.
11.모포부대
낭산 사격장에서 주야간 사격을하고 각개전투를 하면서 있었던 모포부대와의 일은 참 기상천외 했다.
야간 각개전투 훈련을 가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포부대 아줌마들 행군중인 우리옆으로 다가와 한번에 1000원이라며 집요하게 따라와서 각개전투 쉽게 받는 방법을 알려주기로 하고 교장옆 숲속에서 운우를 맛보는 전우들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운우를 맛보고 온 전우들은 잠시후 열외로 하여 한쪽에서 화랑담배 일발장전을 하고 남아에 끓는피 조국에 받쳐를 부르며 악을 바락마락쓰며 견학을 하도록 해 주었는데 이 또한 모포부대 아줌마와 교관들이 한통속이 아니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때당시 1000원이면 엄청 큰돈이었기 때문에 반타작정도 했지 않았나 유추해본다.
12.생일이 두번
그런일이 있은 몇일 뒤 도로보수작업을 한다고 우리는 야전삽 울러 메고 정문앞 마사토산을 긁어내어 차로 실어 나르는 작업을 했다.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긴 때라 우리는 서로를 감싸며 적응을 잘했다.
20명의 전우들이 3개조로 편성해서 차량을 하나씩 맡아 마사토를 채취해서 실어주므로 잘못하면 한참을 혼날 수 있는 빌미를 줄수 있었다.
왼쪽에 화랑상회 오른쪽에 정문상회가 있는데 일부 전우들은 화랑상회와 정문상회를 마사토를 실어 보내고 짬을 내어 과자와 편지봉투를 사로 간 애들과 망을 보는 전우들을 빼고 10여명이 겨울에 얼어있는 산을 깎아 마사토를 채취하다보니 옴팍하게 파인 홈 속에 옹기종기 모여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었다.
이때 다른 조보다 한 명이 적게 편성된 우리조는 6명으로 채취량이 부족하여 나는 야전삽을 들고 우리조는 빨리나와 마사토를 채취하자고 하면서 바닥의 마사토를 채취하려 허리를 굽히는 순간 꽝 소리와 함께 나를 흙더미가 치는 것이었다.
몇 덩이의 흙을 맞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아수라장이었다.
방금 나와 화랑담배를 피우며 있던 전우들이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마사토 더미에 깔려있는 것이었다.
나는 빨리 50미터쯤 전방에 있는 정문에 신고를 하고 마사토 더미에 깔려있는 전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현장에서 사망한 전우는 충청도가 고향이며 독자였다.
다른 한 전우는 앰브런스로 이동 중에 사망했고 한 명은 허리부상으로 하반신 마비가 되었다는 전언을 들었다.
한참 후 차량 선탑을 하던 내무반장들이 돌아와 우리하고 사고 수습을 하고있는데 어떻게 들었는지 내무반에서 다른 작업을 하고있던 0민이와 0남이 그리고 0욱이가 들것을 들고 내가 마사토 더미에 깔려 죽었다고 나를 들것으로 옮긴다며 뛰어와서 마사토더미에 깔려있는 전우들을 파내고 있는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0춘아~~~~! 0춘아~~!
나는 0민이와 0남이 0옥이 세명이서 부른 소리를 못 듣고 있다 함참 후 나를 발견한 세명은 나를 부통켜안고 0춘아 너는 생일이 두 번이다 하면서 황소눈만한 0민이의 두눈에서 닭구똥같은 눈물이 그렁거렁하자 나는 그래 맞아 나는 생일이 두 번이여 하면서 사고처리 후 내무반에 복귀했다.
13.아버지의 눈물
몇 일뒤 토요일 오후 면회 왔다고 행정반에서 나와 0민이 0남이 0욱이 네명의 이름을 부르자 우리는 일계장을 꺼내 입고 행정반으로 갔다.
당직내무반장에게 신고하고 정문에 있는 면회소로 가보니 아버지와 0민이 어머니 0권이 아버지 0남이 0일이 0욱이등 모두의 부모님들이 오셨다.
면회실에 모여앉아 오실 때 아버지께서 사오신 통닭 두 마리와 찹쌀떡을 펼쳐놓고 우리모두는 모여앉아 면회오신 부모님들보고는 드시라는 말도 없이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평소 고기국만 끓이면 밥을 먹지 않거나 밥만 먹던 나는 3개월 동안 식성이 변해 군에서 나오는 고기는 다 먹게 되었다. 다 배고픔을 몸소 체험해봐야 먹는 걸로 투정을 하지 않게 된다.
아버지가 사오신 통닭 두 마리와 찹쌀떡을 아버지께 드셔보시라는 인사치레의 말도 한마디 없이 다 먹어 치운 것이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화제를 내놓으시면서 한 알만 먹어라 주신다.
아버지로부터 소화제를 받아먹고 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하며 같이 훈련을 받던 고향의 친구들과 부모님이 함께 한 자리에서 잠시 보내고 내무반의 전우들을 위해 참쌀떡을 들고 복귀하려하는데 아버님의 두 눈엔 눈물이 고여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님은 우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려 했지만 아들의 고생한 모습과 면회시 가지고온 음식을 먹는 것을 보시고 는 차마 발길을 떼지 못하고 계셨다.
아버님도 6.25한국전쟁당시 군 생활을 하시고 전투에 참가하시어 두만강근처까지 가셨다 1.4후퇴 때 힘든 고생과 설악산 전투에서 부상당하시고 부산통합병원까지의 25년 전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으리라 짐작된다.
14.단풍하사
석달 쯤 지나자 군의 일반적인 공통과목에 대한 교육을 받았지만 아직 두려움이 앞서는 때였다.
하지만 우린 훈련을 마치고 후반기 교육을 받으러 간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교장으로 이동을 하면서 또는 식사를 하러 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고참의 티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홍 0춘이를 만났다. 신홍 0춘이도 기행과정의 훈련을 받고 있었다. 우리 모다 두달 정도 늦은 기수였다. 그때 헤어진후 아직 신홍 0춘이와는 만나지 못했다.
수료전 우리는 여산 대야리 유격장으로 출발하여 신나는 유격을 1주일 받고 배낭에 반합 달고 반합 속에 숟가락 넣어 칠흑 같은 밤 딸가락 딸가락 하는 반합 속의 숟가락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산 넘고 물 건너 대야리 유격장에 도착하니 아직 겨울 기운이 다 가지않아서 인지 엄청 춥고 눈발까지 날렸다.
[대야리 유격장에서 : 왼쪽이 보성 송00, 오른쪽 제주 허00]
눈이 오는 유격장에서 무사히 유격을 마치고 오는길에 다음주면 수료하고 행정학교로 간다며 오순도순 이야기 나누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간다간다 육군하사 집에를 간다~
단풍하사 때버리고 육군하사 집에를 간다~
육개월동안 조팽이 치고 육군하사 웬말이요~~
하늘한번 쳐다보고 땅을 한번 처다봐도
원통해서 못살겠네 ~~에~~~~
15.후반기 특과병과학교로
3월19일 수료를 하고 연무대까지 트럭을 타고 우리는 후반기 교육을 출발했다.
0권이는 통신학교로 0일이는 병참학교로 나와 0민이 0남이 0옥이는 행정학교로 갔다.
간다간다 육군하사 집에를 간다
단풍하사 때버리고 육군하사 집에를 간다 를 연방 외치면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때 아버님의 눈물입니다.
군대가기 전에 알아야할 11가지도 모르고 군대에 갔던 시절..
하나.
당신이 군대를 가지 않았다면 4계절 일 것이요.. 군대를 갔다면 2계절 일 것이다 -_-;;
군대엔 봄과 가을이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뜨거운 여름과 추운 겨울만이 기다릴 뿐이다. -_-;;
둘.
군대에 가게되면.. 저울이나 불빛따위가 없어도.. 정확한량의 배식을 할수있게되고
시계따윈 필요없다. -_-;;
배꼽시계가 핸드폰시계보다 12.435643636배는 더 정확하다 -_-;;
셋.
잠이 많다고 걱정하지 마라.
군대에 가게되면 자면서도 건빵을 씹어먹을수 있는 고급스킬과 -_-;;
졸면서도 달릴 수 있는.. 또는 눈을 감고도 텔레비젼을 정확히 시청 할 수 있는 엄청난 스킬을 터득하게 될것이다 -_-;;
넷.
사회에 있을땐 비오는날이 매우 짜증스러웠겠지만..
군대를 가봐라-_-;; 맑은날 보다는 비오는 날이 훠~~~얼씬 기다려진다.
단.. 화이트 크리스마스땐.. 조용히 담배하나물고 삽질을 하게될 것이다 -_-;;
가끔 구석에서 우는 후임병도 볼수있다 ㅡ_ㅡ;;
다섯.
남자가 태어나서 3번운다고 누가 그랬는지.. 대리꼬와라-_-;
적어도 4번은 울어야 정석이다.
태어나서 한번... 부모님이 돌아가셧을때 한번... 나라가 망했을때 한번...
그리고........ 내 바로 윗고참이 많을때 한번 -_-;; 거의 죽음이다..;;
여섯.
군대가기 전엔 가수중에 누가 노래 잘부르더라.. 혹은 어떤 탤런트가 연기를 잘하더라..
이런말이 상당히 많다..
군대가봐라 -_-;; 노래를 잘부르는것 보다는 섹시한게... 연기를 잘하는 것보단
가슴 큰여자가 왓따다 -_-;;;
일곱.
군대를 가게 되면 백두산이 높다하되 유격장아래에 있는 뫼일뿐이요...
태평양이 넓다하되... 그보다 더 넓은 곳이 잡초와 돌맹이가 무성한 연병장이다.-_-;;
여덟.
음치라 걱정하지마라. 애인 없다 걱정하지마라.
고참과 근무를 같이 서게되면... 못부르던 노래도 저절로 술~~~술 흘러나오고
없던 애인과 영화 같은 러브스토리가 펼쳐질테니 -_-;;
아홉.
표창장을 한번도 못탓다고 서러워 마라.
군대가봐라.. 그딴 표창장 다 갓다 버리라고 해라 ...
오로지 병장이란것 하나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_-;;
또한 상사병과 심장병을 두려워마라... 그보다 더 두려운게 헌병이다 -_-;;;;;;
열.
몸이 허약하다 한탄하지마라-_-;; 또한 건강하다고 나대지도 마라 -_-;;
군대가면 제일 부러운 놈이 환자 놈이요... 그다음으로 불쌍한 놈이 축구 못하는 놈이다..
제일 위대한사람은........ 예비군이다 싯팔 -_-;;
열하나.
너무 애인만 챙기지 말아라...
힘든 유격훈련을 받으면 가장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어머니요...
얼차려를 받으면서도 생각나는 사람은 어머니... 오직 어머니뿐이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0권이도 우리중대에 사고났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확실한것을 몰라서 새벽에 일찍 식당으로 달려가 0옥이 한테 내 소식을 물어보고 우리는 이상 없다고 하니 안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하는 군부대와 교육기관은 없음을 첨언합니다.
첫댓글 하느 씨(님) 좋은 회고록 감사합니다. 훈련시절을 아주 구체적으로 잘 기록했습니다. 구구절절 옛날 생각이 절로 나네요. 전 육하교 기행 218기였는데 그때 내무반장 딱까리를 약 한달 했는데 여름에 모기가 기성을 부릴때 내무반장이 잠자리 들면 모기를 쫒는데 한시간정도 하고 잠을 잤지요. 그리고 그다음날 아침 세면도구 챙겨드리고 야간점호시는 또 내무반에서 군기빠졌다고가슴에 구타당하고 그때 맞은 가슴이 지금도 가끔 비오면 절리고 아파요. 정말 님과 같은 동시대에 태어나 동시대에 함께 군대생활 한 사람으로서 님의 글 이해가 가고 그리고 동감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리고 건필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아................!!! 옛날이여 추억에 거리...................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좋은글 감명 깊게 잘 보구 갑니다.
지금은 이런이야기는 아마도 엣날이야깃꺼리라고들 할꺼여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제 아덜이야기들으면 이런 대목을 없드라구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고생많이 하셨습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하느님![!](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30여년전 추억을 떠올리게하는 이야기이네요!!! 그 시절 누구나 다 겪었던 일이지만 하느님의 글 읽다보니 그 시절 힘들었던 추억이 스크린처럼 스치네요.
네 ~ 30년전 함께 군생활 추억이야기 ~고생많이 하셨읍니다요 ~ ㅎ 동감하면서 잘보았네여 ! 앞으로 자주 오시길 희망합니다 캄솨함돠 ^^*
35년전이면 딱 제가 훈련받고 자대배치 받아서 쫄병생활 할 때네요. 어쩌면 똑같아요.ㅎㅎㅎ 병장보다 더 무서운게 바로 윗 선임 맞습니다. 추억의 한페이지~~! 멋지게 써 주셨네요. 자주오셔서 군대이야기 풀어 놔 주세요. 요즘 아이들 이 정도 훈련 받으라면 다 탈영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부모님 극성에 국방부 홈페이지가 다운될거구요. 암튼 그땐 그랬습니다. 시범케이스에 걸리면 바로 죽음~! 해병훈련소 소대장 조교는 아직도 잘 살고 있는지? ㅎㅎ 한번쯤 보고 싶긴합니다.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부에서.......이빨을 빠드득 빠드득 갈던 하리마오조교~~! 엄청 무서웠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저도 79년9월부터 88년 2월 까지 군생활을 한 아줌마 입니다. 입대한 지 한달만에 1026 사태! 격동기의 군생활을 했죠. 군에서 막내딸에게 항상 위문편지를 써 주신 울아빠는 작년92세로 엄마곁으로 가시고 님들의 글을 보니 50넘은 아줌마가 아빠가 그립네요.
박예진님 반갑습니다. ㅎㅎ 여군출신이시군요? ㅎㅎ 까시김님은 여군상사출신이구요. 의리에여자님 중사 암튼 여군출신이 많이 계시니 방이 훤해 졌습니다. 군대이야기방에 오신 기념으로 우수회원 등업합니다. 머무시는동안 늘 행복하세요. 글 고맙습니다.
감사드려요!!!!!
군 ! .... 대한민국 군 ....~촣은 추억입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남편은 해병출신 난 그에활동하는 해병부라보........
좋은글 감명있게 읽었슴니다...저두 군생활..힘든데서 했는데....격동 의 시기에....27..707..그 전우들은 모두 잘있는지...^*^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멋집니다
저는 75년11월부터 82년2월까지 군생활을 한 기행263기(보병교육11주)입니다 수료1주전 보병105기(24주 교육)먼저 수료하고 106기는 후임 이여서 기행이 학교 최고기수 였습니다 그해 폭설로 유격훈련이 취소되어 1주일 내내 기초유격만 받았던 기억이 새롭군요 하느님두 저와 비슷한시기를 보내셧군요 행복하세요
2010. 12. 22 동짓날 아버지의 눈물을 가슴에 영원히 새기는 아들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