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07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2014 - 제22회 동계 올림픽 개막 (2.7~2.23, 러시아 소치) 제22회 동계올림픽경기대회 [XXII Olympic Winter Games, 第二十二回冬季-競技大會] 2014년 2월 7일부터 2월 23일까지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소치에서 열리는 동계올림픽대회이다. 15개 종목(98개 세부 종목)에 약 90개국에서 250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개최지인 소치의 명칭을 따서 소치동계올림픽이라 통칭한다. 러시아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휴양도시 소치는 2007년 7월 4일 과테말라의 과테말라시티에서 열린 제119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한국의 강원도 평창,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경쟁 끝에 제22회 동계올림픽경기대회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2013 - '토끼와 원숭이' 등 만화 3편 등록문화재 등재 '고바우영감' 등 만화 3편 등록문화재 됐다 한국 최초 만화 '토끼와 원숭이', 최초의 만화 베스트 셀러 '엄마찾아 삼만리', 최장 기간 신문에 연재된 '고바우 영감' 등 3편의 만화작품이 등록문화재가 됐다. 경기도 부천시 산하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은 문화재청이 7일 심의위원회를 열어 이같이 결정했다고 8일 밝혔다. '토끼와 원숭이'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원작을 고 김용환 작가가 만화로 옮긴 것으로 1946년 5월 1일 간행된 단행본이다. 의인화된 동물들을 통해 일제의 부당한 식민지 통치를 풍자적으로 고발하고 자주독립 국가에 대한 염원을 비유와 상징으로 담았다. 고 김종래 작가의 '엄마찾아 삼만리'는 1958년 발표된 고전 사극 만화로 1964년까지 10판까지 출간됐을 정도로 대중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국전쟁 전후의 피폐한 사회상과 부패상을 조선시대에 빗대 고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 작품의 원본은 만화영상원에 보관돼 있다. 김성환 화백의 '고바우영감'은 1950년부터 '사병만화'에 처음 수록된 이후 1955년 이후에는 동아·조선·문화일보 등에 연재됐으며 총 1만4천139회의 연재기록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최장수 시사만화로 현대사연구에 학술적·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등록문화재는 비지정문화재 가운데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돼 지정되며 보존과 활용에 중점을 둬 관리된다. 반면 지정문화재는 엄격한 보호 규제를 바탕으로 보존에 역점을 둔다. 만화영상원은 이들 작품을 국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영인본을 제작할 예정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 등록은 만화가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는 것을 인정받은 것"이라며 "만화의 발전과 저변확대를 위해 작가 지원, 귀중 작품 발굴, 우수 만화 추가 문화재등록 등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부천=연합뉴스) 김창선 기자 = changsun@yna.co.kr /연합뉴스 2013/02/08 11:55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3/02/08/0906000000AKR20130208100700065.HTML
2012 - 창덕궁 측우대, 지워진 한 글자의 비밀은? [앵커멘트] 창덕궁에 있는 측우기 받침, 측우대에는 368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지워져서 무슨 글자인지 확인할 수 없었던 한 글자를 국내 연구진이 찾아냈는데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고 합니다. YTN 사이언스 정현상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창덕궁에 남아 있는 정조 때 제작된 측우기의 받침 측우대의 복제품입니다. 측우대의 네 측면에는 368자의 한자로 된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정조 6년, 1782년에 심한 가뭄이 들어 왕이 기우제를 지냈는데 금새 24mm의 비가 쏟아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인터뷰:전영신, 기상청 황사연구과장] "현재까지 남아있는 측우기는 5대가 있습니다. 그중 기록의 관점에서 가장 우수하다고 볼 수 있는 게 창덕궁 측우대인데요." 그런데 이 가운데 한 글자는 거의 지워져 무슨 글자인지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는 단에 올라 제사를 올리는 정조의 모습을 표현한 문장 중 한 부분인데 학자들은 이 글자를 '직물 직'으로 추정했습니다. 병직개, 즉 제단을 천으로 감싸다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는 과정을 표현한 것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런데 국내 연구진이 이 문장의 탁본을 최초로 찾아냈습니다. 그 결과 이 글자가 ‘직물 직'이 아닌 햇볕을 가리는 '양산 산'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 경우 병은 물리칠 병으로 개는 왕이 행차할 때 햇빛을 가리는 일산 개로 뜻이 달라집니다. 결국 왕이 양산과 일산을 물리쳤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전문가들은 정조가 가뭄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한 마음이 이 글귀에 담겨 있다고 풀이했습니다. 이번 연구의 가장 큰 성과는 창덕궁 측우대에 새겨진 368글자를 모두 찾아낸 것입니다. 이로써 10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측우대에 기록된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게 됐습니다. YTN사이언스 정현상입니다. /YTN 2012-02-08 01:11 http://www.ytn.co.kr/_ln/0105_201202080111242442?ems=13954
- Gift Card
2009 - 김연아,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 우승 4대륙 선수권대회 우승 김연아 "韓 팬들 응원 덕" 인터뷰 "한국 팬들의 응원때문에 편하게 경기할 수 있었다" 김연아가 7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7일 열린 '2009 국제빙상경기연맹(ISU) 4대륙 선수권대회' 프리스케이팅에서 김연아는 116.83점을 받아 지난 5일 열린 4대륙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받은 72.24점과 합계 189.07점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날 김연아는 우승 직후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갖고 "밴쿠버에도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한국 팬들이 많이 와서 응원해줬다"며 "편하게 경기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김연아는 "지난 시즌에서는 부상 때문에 월드 타이틀을 거머쥐지 못했지만, 이번 시즌에는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다행히 해낼 수 있어 너무 기분 좋다"고 덧붙였다. 한편 김연아의 동갑내기 라이벌 아사다 마오(19, 일본)는 주특기인 트리플 악셀도 한 차례 실수하는 등 합계 176.52점을 확보해 3위에 그쳤다. < 스포츠조선닷컴 인터넷뉴스팀> /조선닷컴 2009.02.07 15:12
지난해 공개돼 심의과정을 거친 유관순(1902~1920) 열사 영정(사진)이 새 표준영정으로 확정됐다. 문화관광부는 7일 윤여환(54·충남대 미대) 교수가 그린 유 열사 초상이 동상영정심의위원회를 통과해 새 표준영정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표준에서 해제된 기존 유관순 열사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86년 그린 것으로, 옥살이하며 고문 당한 수형자 기록표 사진을 참고해 얼굴 모습과 나이 등이 실제와 다르다는 지적과 함께 작가의 친일 행적을 놓고 논란이 불거져왔다. 이번 영정은 청순하고 진취적이며 애국심에 불타는 항일 민족 소녀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한겨레 2007-02-07 오후 06:42:10
2003 - 인간 對 슈퍼 컴퓨터 체스 대결 무승부로 마감 세계 체스챔피언인 게리 카스파로프(39)와 슈퍼 컴퓨터'딥 주니어(Deep Junior)'간의 '인간 대 기계' 체스 대결이 최종 무승부를 기록했다.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117120
2001 - 삼성전자 4기가 디램 첫개발 신문용지 3만2천장을 한개의 칩에 저장할 수 있는 차세대 첨단 디램 기술인 4기가 디램 반도체 제품기술이 삼성전자에 의해 세계최초로 개발됐다. 이번에 발표된 기술개발 내용은 고집적도 대용량 메모리의 특성을 소화해 낼 수 있도록 하는 미세증폭회로 및 안정화 회로 관련기술과 저전력화와 고속동작을 가능하도록 하는 복합설계 기술 등이다. 4기가 디램반도체는 용량이 총 42억9천만비트로 1개 칩에 영문글자 5억개, 신문지 3만2천장, 단행본 640권, 정지화상 1600장, 64시간의 음성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으며 현재 상용화되고 있는 64메가의 60배 정도에 해당한다. 삼성전자는 이번에 개발한 0.10미크론 기술을 기흥공장에서 양산중인 256메가 및 128메가 디램 제품에 적용할 경우 60% 이상의 원가절감 효과가 예상돼 반도체원가 경쟁에서도 확고한 우위를.... Submitted by 김태중 on 금, 2001/02/09 - 10:47am. /KLDP
2000 -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 집권당인 사민당 출신인 현직 외무장관 타르야 할로넨이 그 주인공이다. 할로넨은 2000년 2월 7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당의 에스코 아호 전 총리를 누르고 임기 6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할로넨의 대통령 당선은 1994년 여성 국방장관이 대통령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뒤를 이은 도전에서 성공한 것이었다. 할로넨은 "이번 선거결과는 남성이나 여성이나 어느 자리에서도 동등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며, 여성들의 사기를 높여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짧은 머리에 다소 큰 체격의 할로넨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진지함과 친근함을 느끼게 했다. 정통 사회민주주의자로 동성애자협회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사회 소수세력들의 권리를 적극 옹호해 온 할로넨은 1979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법무-보건-외무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현실주의적 시각도 잃지 않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개인적인 매력과 함께 핀란드가 여성들의 정치 참여가 매우 활발한 나라라는 점도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는 배경이었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공직 진출권을 인정한 나라로 2000년 당시 여성의원수가 스웨덴, 덴마크에 이어 세계 3위였다. 할로넨은 3월 1일 취임식을 가졌다. /조선
- Jordan, 1/2 Dinars (1959, Banknote)
후세인 요르단 국왕 사망 요르단을 46년간 통치해 온 후세인 이븐 탈랄 국왕이 1999년 2월 7일 오전 11시43분 타계했다. 시신은 수도 암만의 하셰미트 묘소에 안장되었으며 요르단 정부는 40일간의 공식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8일 열린 영결식에는 한국의 김종필 총리를 비롯, 클린턴 미국 대통령,옐친 러시아대통령 등이 참석했다. 후세인 국왕은 46년간의 통치기간동안 뛰어난 외교수완으로 `화약고` 중동의 평화를 이끌어 온 거인이었다. 1953년 17세에 왕위에 오른 후세인은 냉전과 40년에 걸친 아랍-이스라엘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약소국 요르단의 발전을 일궈냈다. 그의 왕위 등극은 험난한 인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1951년 조부 압둘라 국왕은 한 회교사원에서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에 의해 암살됐다. 후세인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로부터 1년 만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최대 시련은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집트 편에 선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참패하는 바람에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잃게 된다. `평화의 중재자`로서 후세인의 면모는 1998년의 중동평화협상에서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후세인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후세인은 아픈 몸을 이끌고 중재에 나서 와이리버 협정을 성사시켰다. /조선
1998 - 제18회 동계 올림픽 개막 (2.7~2.22, 일본 나가노) 제18회 동계 올림픽 경기대회 [The 18th Olympic Winter Games] 1998년 2월 7일부터 22일까지 일본의 나가노[長野]에서 열렸으며, 경기는 7개 종목, 68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20세기의 마지막 동계 올림픽이자 제11회 삿포로[札幌] 대회 이후 26년만에 일본에서 다시 개최되었으며, 72개국의 임원·선수 3,500여 명이 참가했다. 날씨가 나빠 경기가 여러 차례 연기되고 약물복용 파동, 지진 등 악재가 겹치기도 했으나 첨단 하이테크 기술과 환경보존이라는 2가지 개념이 조화를 잘 이룬 대회로 평가되는데, 일본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대회준비를 위해 시설에 100억 달러, 경기운영에 10억 달러를 투자했다.
1992 - 마스트리히트조약 조인 유럽공동체(EC) 12개 회원국이 1992년 2월 7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에서 1991년 12월 EC 정상들이 합의한 EC 단일시장 및 단일통화-정치통합 실행을 골자로 한 유럽통화조약을 정식 조인했다. 마스트리히트 시청에서 거행된 이날 조인식에는 자크 들로르 EC위원장과 에곤 클렙시 유럽의회 의장을 비롯, 1992년 의장국인 포르투갈의 아니발 카바코 실바 총리, 1991년 하반기 의장국 네덜란드의 루트 루베르스 총리, 차기 의장국 룩셈부르크의 자크 상테르 총리와 각국 외무·재무장관들이 참석했다. 3백13페이지에 이르는 본문과 부속문서로 돼 있는 EC 통합조약은 늦어도 1999년까지의 역내 단일통화 도입을 규정하고 있으며 유럽의회의 권한증대, 외교안보 분야에서 회원국간 결속 강화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각국의 이견과 덴마크의 비준거부 등으로 비록 당초목표인 1993년 1월보다 10개월 늦은 1993년 11월 조약이 발효됐으나 EC 12개 회원국 3억4천6백만 유럽인들의 정치-경제적 운명은 이제 역사상 그 어느때 보다도 긴밀히 묶어지게 됐다. 발효와 함께 EC는 유럽연합(EU)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1999년까지 EU 회원국이 단일통화를 채택하고 정치적인 권한의 상당부분을 통합기구에 위임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어 각국의 반대가 심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0월 독일이 마지막으로 비준해 실효를 보게됐다. /조선
- Corazon Aquino
필리핀의 미래를 결정할 대통령선거가 1986년 2월 7일 실시됐다. 마르코스(Marcos, Ferdinand)로서는 대규모 반정부운동과 공산게릴라의 준동, 미국무성의 압력 등으로 마지못해 실시한 선거였다. 투표부터 개표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은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민간 선거감시기구와의 개표결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예상대로 마르코스는 재선됐다. 그러나 아키노(Aquino, Corazon)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양측의 대립이 심각해져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22일에 이르러 사태가 급반전됐다. 마르코스의 측근이었던 엔리레 국방장관과 라모스 참모총장대행이 마르코스에 반기를 들었고 가톨릭의 신추기경도 반정부입장을 표명했다. 24일 마르코스는 필리핀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언했지만 아키노를 지지하는 흐름은 막을수 없었다. /조선
제14회 동계 올림픽경기대회 [The 14th Olympic Winter Games] 동구권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대회로, 제1차 세계대전의 근원지인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Sarajevo)에서 동계 올림픽 사상 최대인 49개국의 선수·임원 1,5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984년 2월 7일부터 19일까지 13일에 걸쳐 열렸다. 경기는 10개 종목, 39개 세부종목이 실시되었다. 비동맹국에서 열린 대회답게 한국과 북한, 중국과 타이완이 함께 출전했으며, 동독이 소련과 북유럽 3국을 누르고 처음으로 세계정상에 섰다.
[역사속의 오늘] 인류 최초 우주유영 성공 부착식 인간조종장치 혹은 유인이동장치 MMU(Manned Maneuvering Unit)는 1984년 2월 7일 미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의 비행사 브루스 맥캔들스 2세가 인류 최초로 사용하는 영광을 안았다. 등에 상자처럼 짊어진 MMU를 탄 맥캔들스는 생명줄 없이 자유롭게 우주를 유영했다. 암스트롱의 달착륙 이후 인류 최대의 이벤트, 맥캔들스는 과연 어땠을까? 4천만 달러를 들여 개발한 대당 1천만 달러짜리 MMU에 의지해 90분 동안 97m까지 유영한 그는 “아름답다, 멋지다, 최고다”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검은 색의 우주와 푸른 색의 지구를 경계로 떠있는 그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십분 이해가 가는 얘기다. MMU는 좌우에 달린 팔같이 생긴 조정기를 이용해 움직인다. 왼쪽 조정기로는 전후·좌우 방향 운동을, 오른쪽 것으로는 회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운동을 한다. 이를 조합해 모두 729가지의 동작이 가능하다. 2개의 연료탱크에 질소가스가 5.9kg씩 들어있고, 은·아연전지를 동력원으로 해서 6시간 동안 우주유영이 가능하다. 과학의 힘으로 벗어난 인간의 한계는 놀랍기만 하다.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매일신문 2006.02.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106&yy=2006
1981 - 서양화가 이종우(李鍾禹) 사망 이종우 [李鍾禹, 1899.12.22~1981.2.7] 한국의 서양화가. 호 설초(雪蕉). 황해도 봉산(鳳山) 출생. 평양고보를 졸업 후 17년 도일, 1923년 도쿄[東京]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중앙고보(中央高普)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 《자화상》과 《추억》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데뷰하였다. 1925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파리에 유학하여 슈하이에프연구소에서 수학, 1927년 살롱 도톤전에 《모부인(某婦人)의 초상》 《인형이 있는 정물》 등을 출품하고, 1928년 귀국하여 제l회 개인전을 가졌다. 그 후 한동안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삭성회(朔星會)회화연구소, 다시 중앙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1934년 선전(鮮展)에서는 《추억》으로 3등상을 받았다. 1945년 조선미술협회 회장, 1951년부터는 홍익대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1960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 대통령장, 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작품경향은 초기의 고전적 사실화풍과 후기의 정감적이고 자연관조적인 동양적 취향으로 대별된다. /네이버
김은호 [金殷鎬, 1892.6.24~1979.2.7] 김은호(金殷鎬, 1892년 6월 24일 ~ 1979년 2월 7일)는 한국의 동양화가이다. 인천 출신이며 아호는 이당(以堂)이다. 인천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인흥학교에서 측량을 공부했다. 측량기사의 조수로 일하고 고서를 베끼는 일을 하다가 이왕직에서 운영하는 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에 편입하여 화가가되었다. 서화미술회 편입에는 사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김교성의 도움이 있었다. 뛰어난 인물 묘사 실력으로 송병준, 대한제국 순종 등의 얼굴을 그리면서 점차 이름을 얻게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적도 있으나, 1920년대 후반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식 채색화 기법을 익히면서 친일본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즐겨 그린 그림은 〈승무도〉 연작으로 대표되는 미인도와 신선도, 화조도 등이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에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하여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에게 증정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조선미술가협회의 일본화부에 참가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뚜렷한 친일 경력 때문에 대부분의 미술인들이 망라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제외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술계의 중심에 복귀했다. 김은호는 일찍부터 후진 양성에 관심을 보이고 후소회를 통해 제자를 많이 배출하여 동양화단에서 단단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운보 김기창이 대표적인 김은호의 제자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고 문화훈장을 수여 받았으며 , 3·1 문화상(1965)과 예술원상(1968)도 수상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미술 부문에 선정되었다. 문화예술계 인사를 많이 선정하지 않은 2002년 발표 친일파 708인 명단에도 미술 분야에 심형구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두드러진 친일 이력과 일본풍으로 의심받는 화풍과 관련하여, 김은호가 그린 논개와 춘향의 영정을 철거하자는 주장과 논란이 있었다. /위키백과
- V.V.Gorbatko, Y.N.Glazkov, Soyuz 24 Rocket
소유즈 [Soyuz] (발췌) 1967년 4월 23일 소유스 1호가 첫 발사된 이래 소유즈호는 살류트(Salyut)와 미르(Mir) 우주정거장에 연결되어 우주비행사를 전송하거나 귀환시키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우주정거장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최초의 우주정거장으로서 326일 동안 우주공간에 체류한 기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첫 발사된 이후 지금까지 수십 차례에 걸쳐 꾸준히 우주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네이버
그레나다 독립 1974년 2월 7일 그레나다(Grenada)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처음 발견된 그레나다는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카리브 해 동부에 자리잡은 서인도제도 최남단 섬이다. 아라와크족이 원주민으로 거주하던 그레나다를 가장 먼저 지배한 것은 1498년 남아메리카에서 이주해온 카리브 인디언들이었다. 1650년에는 프랑스 총독 마르티니크가 프랑스 회사로부터 이 섬을 사들여 세인트조지에 주거지를 세웠다. 1672~1762년은 프랑스 국왕의 지배를, 이후 18세기 후반과 19세기 동안에는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885∼1958년은 영국령 윈드워드 제도 정부의 본거지였다가 1958∼62년에 서인도제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1967년 영국과 연합하여 자치주가 되었고, 1974년 2월 7일에는 독립주가 되었다. 독립헌법에는 영국 국왕이 임명하는 그레나다의 총독과 양원제 국회에 관한 조항이 마련되었다. 1984년 12월 총선거를 통해 민주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브리태니커
앤더슨 [Anderson, Charles A., ?~1973.2.7] [책갈피 속의 오늘]1973년 4H운동 보급 앤더슨씨 사망 Head(두뇌) Heart(마음) Hand(손) Health(건강)의 첫 글자를 딴 4H 운동은 일종의 실천적 사회교육운동이다. 창의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행동을 통해 청소년을 미래의 주역으로 키우고 농어촌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207/8272810/1
[향토예비군 연혁](발췌) 1961.12.27 - 향토예비군설치법 제정 공포(총 6개 조항) 1968.02.07 - 박대통령, 경전선 개통식에서 250만 향군무장 천명 1968.02.20 - 각의에서 향토예비군설치법 시행령 의결 1968.03.31 - 예비군편성 및 조직완료 1968.04.01 -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박대통령 임석하에 (향토예비군) 창설식 1968.04.05 - 전국지역 및 직장예비군에게 무기지급 1968.05.29 - 향토예비군설치법 개정 공포(전면기정:총 6개 조항16개 조항) 1968.06.24 - 공비 소탕작전에 최초로 참가(강원도 고성군 현내작전) 1968.07.24 - 국방부 인력차관보 산하에 예비군국 창설(예비군계획과, 동원관리과) 1968.11.02 - 울진, 삼척지역 공비소탕작전 참가 /향토예비군-연혁 yebigun1.mil.kr/homepage
역사속 오늘[1968년 2월 7일] 경전선 진주-순천 구간 개통 1968년 오늘, 진주-순천 80km 구간 철도가 착공 44개월 만에 완공됐다. /YTN 2011-02-07 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2052341395779&s_mcd=0422&s_hcd=
[어제의 오늘]1967년 신민당 창당 ㆍ역대 ‘최고의 야당’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은 ‘노풍’을 점화시킨 노무현 후보가 ‘대세론’을 업은 이인제 후보를 꺾음으로써 대박을 터뜨렸다. 2007년 한나라당의 대선 경선에서도 이명박·박근혜라는 상품성 높은 두 후보가 치열한 접전을 벌여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경선의 승자인 노무현·이명박 후보는 본선에서도 승리해 각각 16대, 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정당의 대통령후보 경선이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최초의 사례는 바로 1971년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의 전당대회였다.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걸출한 두 스타 정치인이 격돌한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1차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이철승의 지원을 얻은 2차 선거에서 역전승을 거두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역전승이 연출되고, 패자가 승자에게 깨끗이 승복한 이 전당대회는 신민당의 역사에서 하이라이트였다. 손동우 사회에디터 /경향신문 2009-02-06 18:01:31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2월 7일부터 18일까지 12일간 말레이시아를 비롯, 태국과 자유중국 등 동남아 3개국을 공식 순방하고 상대국간의 우의증진과 경제협력문제 등을 논의했다. 박 대통령은 2월 9일 첫 순방국인 말레이시아의 국회의사당 귀빈실에서 라만 수상과 공식회담을 하고 월남사태와 관련된 자유 아시아의 공동방위문제와 양국의 경제협력문제 등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 박대통령은 4일간의 태국방문 중 타놈수상과 한 정상회담에서 태국은 통한에 대한 한국정부정책을 지지했다. 또 월남을 지지할 필요성을 재확인하고 문화교류에 관해서도 협의했다. 박 대통령은 마지막 순방국인 자유중국에서 장개석총통을 만나 자유아시아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긴밀한 협조를 통해 유대강화에 최선의 길을 모색할 것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조선
미국, 베트남 북폭 개시 [년도별 각종 10대 뉴스] /Shutterstock Stock Images 2008.10.25 (12:37:29) http://www.subkorea.com/xe/54875
한국은 1963년 8월 15일 주(駐)케냐 대한민국총영사관을 개설하고 12월 12일 케냐 승인 후 1964년 2월 7일 양국간 외교관계 수립과 함께 총영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하였다. 1989년 12월에는 주한 케냐명예총영사관이 개설되었다. (케냐 대한민국대사관) /네이버
1964 - 영국 그룹 비틀스 첫 미국 방문 [오늘의 역사] 64.02.07 비틀즈 미국 상륙. 비틀즈 열풍 시작 1964년 2월 7일 낮 1시 30분, 미국 케네디 공항에서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청춘문화의 상징이 된 비틀스가 미국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공항에는 비틀즈를 보기위해 3,000여 명의 소녀들이 몰렸으며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는 7,3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포크송과 트위스트에 식상해 하고 케네디 암살 후 새로운 영웅을 원하던 미국은 비틀즈에 열광했다. 영국 가수는 미국에서 성공 할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며 2월 첫 주에 전미 히트 차트 1위에 오른 비틀즈는 4월 4일의 빌보드 차트 랭킹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 상륙한 1964년에만 18주동안 전미 차트 1위를 독점한 비틀즈는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헤어스타일, 인형, 기타 등을 유행시켰다. 비틀즈는 1956년 고등학생인 존 레넌이 '퀴리멘'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존 레넌은 곧 폴 매카트니(1957년), 조지 해리슨(1958년)을 합류시켜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았고,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류해 멤버가 갖춰졌다. 19~22살의 더벅머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데뷔 싱글 'Love Me Do'를 발표하며 등장했다. 1970년 4월 10일 해체하기까지 9년간 공식적으로 211곡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과 흥분으로 몰아간 비틀즈는 해체와 함께 전설로 남게 됐다. 앨범 판매량은 20세기 최대 음반판매 기록인 1억 6,000만장이었다. /문화일보 11.02.07
1960 - 제4대 대통령 선거전 돌입 1960년 오늘 3.15 부정선거로 유명한 제4대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됐다. /YTN 2011-02-07 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2052343074097&s_mcd=0422&s_hcd=
1959 - 남아프리카 연방의 총리 다니엘 F. 말란(Malan, Daniel F.) 사망 말란 [Malan, Daniel François, 1874.5.22~1959.2.7] [역사 속의 인물] 남아공 인종차별의 기수, 다니엘 F. 말란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폐지했다. 1948년 다니엘 프랑수아 말란 수상이 공식 채택한 지 46년 만이었다. 말란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6년간 수상으로 집권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의 근간이 되는 정책들을 시행했다. 백인과 흑인 간 혼인을 금지하고 인종별 거주 지역을 따로 정하는 집단지구법 등을 만들었다. 말란은 17세기에 종교 박해를 피해 남아공으로 이주한 프랑스 위그노(신교도)의 후손이었다. 1874년에 케이프타운 근처에서 태어난 그는 네덜란드계 보어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 개신교 성직자가 됐다. 그의 청년 시절부터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용어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으며 뿌리가 되는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었다. 흑인의 백인 구역 출입을 제한하고 이동할 때 통행증을 발급받도록 하는 통행법 등이 그것이다. 말란은 이런 환경 속에서 '아프리카너(남아공 태생 백인) 국수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가 됐고 아프리칸스(보어인 공용어)의 열렬한 지지자로 활동했다. 40세인 1914년에 정계에 입문, 국민당의 지도자로 큰 후 남아공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길을 걸어갔다. 수상직에서 물러난 지 5년 후인 1959년 오늘, 85세를 일기로 숨졌다. 김지석 논설위원 /매일신문 2013년 02월 0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388&yy=2013
1948 - 미군정 시기 2·7 사건 발생 2·7 사건은 1948년 2월 7일에 훗날의 대한민국 영역에서 일어난 파업 및 봉기 사건이다. 비판하는 측에서는 2·7 파업이나 2·7 폭동, 옹호하는 측에서는 2·7 구국투쟁으로 부른다. 개요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을 앞두고 미군정 지역에서 단독 선거가 실시되어 단독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하여 총선에 반대하는 흐름이 형성되었다. 남조선로동당이 이같은 여론을 선도했고, 이 사건 이틀 후인 1948년 2월 9일 백범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한다〉라는 제목으로 단선단정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는 등 이승만 계열 외에는 이에 동조하는 파벌이 적지 않았다.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총선 일정이 발표되자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2월 7일을 기해 전국적인 대규모 파업을 일으켰고, 이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 되어 경찰과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두 달 뒤에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제주 4·3 항쟁의 전초전이 되었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등 더 규모와 파급 효과가 큰 사건이 연이어 터졌기 때문에, 대한민국 현대사 학계에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깊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개 1948년 2월 5일에 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틀 후에 발생했다. 남로당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 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지하며 통신 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는 방식을 통해 미군정을 압박하며 이루어졌다. 이에 호응한 농민들의 가두 시위와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더해졌다. 이들의 주장들은 다음과같다. 1. 조선의 분할 침략 계획을 실시하는 유엔 한국 위원단을 반대한다. 2. 남조선의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한다. 3. 양군 동시 철퇴로 조선 통일 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우리 조선 인민에게 맡기라. 4. 국제 제국주의 앞잡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파를 타도하라. 경상남도 밀양군에서는 2월 7일 이른 아침에 농민들이 지서 두 곳을 습격하여 경찰이 발포로 맞서면서 10여 명이 사살되고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합천군에서는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농민들이 지서를 공격하여 역시 1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와 유사한 충돌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나면 2월 20일까지 2주 동안 진행되었다. 약 전체 참가 인원은 약 200만 명이며, 이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100여 명, 투옥된 사람은 8,5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의의 및 영향 2·7 사건은 자연발생적이며 우발적인 요소가 많았던 대구 10·1 사건과 달리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미군정 지배 하에 있던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시에 사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단선단정 반대'라는 이해와 공감이 쉬운 구호와 함께 투쟁의 목표 또한 분명히 통일되어 있었다. 2·7 사건을 계기로 미군정 지역에서 미국에 반대하는 세력은 지구전 태세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각 지역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조선인민유격대의 초보적 형태를 구성하면서 결국 제주 4·3 사건이라는 무장 봉기로 이어졌다. /위키백과
1928년 오늘, 호주의 비행사 버트 힝클러(Bert Hinkler)가 사상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서 호주로 가는 단독(solo)비행을 시작했다. 힝클러는 영국을 이륙한 지 15일 만에 호주 포트다윈에 도착한다. /YTN 2011-02-07 월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201102052345333810&s_mcd=0422&s_hcd=
He flew the first solo flight between England and Australia, departing England on 7 February 1928 and arriving in Darwin on 22 February 1928 and back in his hometown of Bundaberg, Queensland on 27 February 1928. This reduced the England-Australia record from 28 days to just under 15½ days. The aircraft used was an Avro Avian, registration G-EBOV. He is quoted as telling Australian Prime Minister Stanley Bruce at this time You know, one day, people will fly by night and use the daylight for sightseeing. (In 1998 Australian Lang Kidby recreated this flight in a similar 1927 Avro Avian). After visiting the principal cities of Australia and returning to England, he was awarded the Air Cross for the finest aerial exploit of the year. http://en.wikipedia.org/wiki/Bert_Hinkler
- Vladimir Komarov, Konstantin Feoktistov, Boris Yegorov
페옥티스토프 [Feoktistov, Konstantin Petrovich, 1926.2.7~ ] 세계 최초로 여러 명을 태운 보스호트 1호(1964) 우주비행에 V. M. 코마로프, B. B. 예고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보로네슈가 점령당했을 당시 16세였던 그는 정찰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독일군에게 체포된 뒤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총알이 목을 관통했으나 그는 죽지 않고 죽은 체했다가 시체 매장 구덩이에서 탈출했다. 나중에 모스크바의 바우만 고등기술학교에 입학했으며, 한때는 공장의 기사로도 근무했다. 1955년 박사학위와 동등한 자격을 얻은 뒤부터 소련의 우주계획에 참여하여 우주선과 우주장비를 설계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1957. 10. 4)한 뒤 노동 적색기 훈장(Order of the Red Banner of Labor)을 받았으며, 1961년 4월 12일 Y.A. 가가린이 유인 우주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한 뒤 이 훈장을 다시 받았다. 1964년 10월 12~13일 보스호트 1호에 타고 이전의 우주비행사들이 할 수 없었던 여러 과학 실험 및 관측을 수행했다. 보스호트 1호는 최초로 1명 이상 태운 우주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전문가(의사와 공학자)들을 태웠고 최초로 지상에 연착륙(軟着陸)했다. 그후 공학자로서 샬류트 우주정거장의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브리태니커
푸이 [溥儀, 1906.2.7~1967.10.17] 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광서제(光緖帝)의 동생 순친왕(醇親王) 재풍(載灃)의 아들. 1908년 3세로 아이신줴뤄가[愛新覺羅家]의 제12대 황제가 되어 선통제(宣統帝)라 하였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1912년에 퇴위하였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에게 쫓겨 베이징[北京]을 빠져나와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피하였으며, 나중에 톈진[天津]의 일본 조계(租界)에 한거(閑居)하였다. 만주사변(滿洲事變) 때 일본군에 의해 몰래 끌려나와 1932년 만주국을 집정(執政), 1934년 왕이 되었다. 1935년과 1940년에 일본을 방문하였으며, 1945년에 만주국이 붕괴됨으로써 퇴위하였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하바로프스크에 억류되었으며,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하였다. 1950년 공산정권하의 중국에 송환되어 수감되었다가,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로 일했다. 1964년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全國委員)이 되었으며, 저서 《나의 전반생(前半生)》을 출판하였다. 1967년 10월 16일 사망 후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현[易縣]에 있는 청나라 황릉(皇陵)으로 이장되었다. 이로써 사망한 지 28년 만에 청나라 황제로 복권되었다. 한편, 그의 저서 《나의 전반생》이 감독 B.베르톨루치의《마지막 황제》로 영화화되어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네이버
오일러 [Euler(-Chelpin), Ulf (Svante) von, 1905.2.7~1983.3.9] 스웨덴의 생리학자. 1970년 영국의 생물리학자인 버나드 카츠 경과 미국의 생화학자인 줄리어스 액설로드와 함께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는데, 이 3명의 학자는 모두 신경충격의 메커니즘을 독립적으로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오일러는 1929년의 노벨상 수상자인 한스 폰 오일러 켈핀의 아들이다. 스톡홀름에 있는 카롤린스카 연구소를 졸업한 후 오일러는 1930~71년 이 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생리학·의학 분야의 노벨 위원회에 참가했고 1965~75년 노벨 재단의 책임자였다. 오일러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교감신경계의 중요한 신경전달물질(충격전달체)인 노르에피네프린을 알아낸 것이다. 또한 노르에피네프린이 신경섬유 자체 안에 저장되어 있음을 밝혔다. 이러한 발견들은 액설로드가 신경활동에서 효소의 역할을 밝히는 데 기초가 되었다. 노벨상 이외에도 오일러는 고혈압 및 동맥경화증과 관련된 연구로 스웨덴 북극성훈장과 스투퍼상을 받았다. /브리태니커
루이스 [Lewis, (Harry) Sinclair, 1885.2.7~1951.1.10] [역사 속이 인물] 미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루이스 북미 대륙은 전통적으로 노벨문학상의 불모지였다. 지난해 캐나다 출신의 앨리스 먼로가 캐나다 국적의 첫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1993년 이후 20년간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초창기에도 마찬가지여서 노벨문학상이 시상되기 시작한 1901년 이후 29년 만인 1930년에야 미국에서는 첫 수상자가 나왔다. 바로 싱클레어 루이스였다. 1885년 2월 7일 미네소타 주에서 태어난 루이스는 예일 대학교를 졸업하고 기자와 출판사 편집자 등으로 일했다. 직장 생활 중에도 진지한 소설가로서의 열정을 버리지 않고 소설 작업을 계속했다. 1920년 미국의 물질주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메인 스트리트’을 내놓으며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 후 개성이 고갈된 속물적 미국인을 그린‘배빗(1920)’ 의료직을 파헤친 ‘애로스미스(1925)’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한 ‘앨머 갠트리(1927)’ 등 다양한 소재의 풍자소설을 썼다. 작가로서는 명성을 날렸으나 개인적으로는 알코올 중독, 두 번의 이혼을 겪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말년을 거의 해외에서 보내다 1951년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홍헌득 특집부장 /매일신문 2014.02.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761&yy=2014
블레이크 [Blake, Eubie, 1883.2.7~1983.2.12] 본명은 James Hubert Blake. 미국의 피아니스트, 래그타임·쇼 음악 작곡가. 블레이크는 6세 때 가정용 펌프 오르간을 연주하여 건반악기에 천부적 재능이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10대 시절 카페와 유흥가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1899년 그의 최초의 래그타임 음악인 〈아프리카의 소리 Sounds of Africa〉를 연주했고, 그것을 1919년 〈찰스턴 래그 Charleston Rag〉라는 제목으로 음반을 냈다. 1915년 작사가 겸 가수인 노블 시슬리와 만나 오랫동안 함께 활동했다. 이들은 분장 없이 무대에 섰던 첫 흑인 연예인이기도 했다. 이들의 쇼 〈셔플 얼롱 Shuffle Along〉(1912)은 흑인들이 작곡·제작·감독한 최초의 뮤지컬 가운데 하나였다. 이 뮤지컬에는 블레이크의 노래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I'm Just Wild About Harry〉가 나오며, 훗날 유명해진 폴 로베슨, 플로렌스 밀스, 조세핀 베이커가 출연했다. 1925년 시슬리와 결별한 후 작사가 앤디 라자프와 팀을 이루어 〈1930년의 검은 새 Blackbirds of 1930〉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유명한 노래 〈Memories of You〉가 포함되어 있다. 이후 블레이크는 계속 연예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으며 피아노 곡도 만들고 음반 녹음도 하며, 연주회에도 출연했다. 세련되고 섬세하며 위트 넘치는 음악으로 활동하는 동안 내내 인기를 얻었다. 그는 63세에 작곡을 공부하여 자신이 만든 노래를 악보로 옮기고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기 위해 은퇴했다. 그러나 1969년 다시 복귀하여 새 앨범을 제작했다. 이후 계속 연주활동을 했으며 1982년 6월 청중을 위한 마지막 연주회를 열었다. 그의 노래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유비 Eubie〉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어(1978) 최고의 명성을 얻었으며 1981년 자유의 메달 훈장을 받았다. 1973년 로버트 킴벌과 윌리엄 발콤에 의해 사진으로 된 자서전 〈시슬리와 블레이크의 추억 Reminiscing with Sissle and Blake〉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와일더 [Wilder, Laura Ingalls, 1867.2.7∼1957.1.10] 미국의 아동소설가. 미국 중서부지방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시절을 토대로 한 작품을 썼다. 그녀는 12년 동안 〈미주리 루럴리스트 Missouri Ruralist〉지를 편집하다가 딸의 성화에 못이겨 글을 쓰기 시작했다. 와일더의 작품은 1800년대 중반의 개척자들을 다루면서 남자들의 동요와 여자들의 인내심에 초점을 맞추는 동시에, 개척자들이 보인 미국 정신과 자립정신을 찬양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커다란 숲속의 작은 집 Little House in the Big Woods〉(1932)·〈소년 농부 Farmer Boy〉(1933)·〈초원의 집 Little House on the Prairie〉(1935)·〈플럼 강변에서 On the Banks of Plum Creek〉(1937)·〈실버레이크 기슭에서 By the Shores of Silver Lake〉(1939)·〈긴 겨울 The Long Winter〉(1940)·〈초원의 작은 마을 Little Town on the Prairie〉(1941)·〈행복한 황금기 These Happy Golden Years〉(1943) 등으로 엮어져 나왔다. 1970년대 중반에는 그녀의 작품들을 토대로 한 텔레비전 연속극 〈초원의 집〉이 방영되어 인기를 모 았다. /브리태니커
메이벡 [Maybeck, Bernard (Ralph), 1862.2.7~1957.10.3] 미국의 건축가. 그가 1889년부터 캘리포니아에 지은 건물들은 20세기초에 유행했던 건축양식의 다양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파리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했고(1880~86), 잠시 뉴욕 시와 미주리 주에 있는 캔자스시티에서 일한 뒤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1894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교 건축제도담당 강사가 되었고 1898년~1903년 이 대학 최초의 건축학교수를 역임했다. 이 대학에 있는 건물인 허스트 홀(1899, 1922년의 화재로 소실)을 설계하면서 처음으로 합판재로 된 아치를 도입했다. 또한 내민 목재 코니스를 두른 벽돌건물인 타운 가운 클럽(1899)과 스페인 미션 양식을 자유로이 구사한 남자교수단 클럽(1900) 건물을 설계했다. 공공건물로는 고딕 양식을 자유로이 사용한 버클리의 ' 크리스천사이언스 모교회(母敎會)'(1910)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 퍼시픽 박람회 때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미술궁(1915)이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맡은 대형 작품은 1938년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일리노이 주 엘사에 있는 프린시피아대학 캠퍼스이다. 그가 설계한 저택에서는 높이가 강조되었고, 목조가옥의 지붕은 대개 경사가 급하다. 1907년부터 철근 콘크리트 주택을 짓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외부 마감재용으로, 성긴 천에 콘크리트를 입힌 가볍고 싸고 내화성이 강한 버블 스톤을 실험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 Peru 10 Intis (Banknote)
팔마 [Palma, Ricardo, 1833.2.7~1919.10.6] 페루의 작가. 스페인계 중남미 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집의 하나인 식민지 페루의 전설집으로 유명하다. 20세 때 페루 해군에 들어갔지만, 1860년 정치적 긴급 사태 때문에 칠레로 도피해야만 했다. 칠레에서는 언론계에 종사했으며, 6년 뒤 리마로 귀국하여 스페인에 저항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또한 태평양전쟁(1881)에도 참여했고, 칠레가 페루를 점령했을 때는 칠레 군대가 유명한 페루 국립도서관을 악랄하게 파괴한 것에 용감하게 항의했다. 전쟁이 끝난 뒤, 팔마는 국립도서관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고 죽을 때까지 국립도서관장으로 일했다. 1887년에 페루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팔마는 젊은시절에 가벼운 운문과 낭만적인 희곡을 쓰고 빅토르 위고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로 문학생활을 시작하여 〈리마 종교재판 연대기 Anales de la inquisición de Lima〉(1863)에 이어 여러 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주로 솔직담백한 문체로 쓴 〈페루의 전통 Tradiciones peruanas〉(1872)으로 명성을 쌓았다. 이 책에 수록된 짧은 산문에는 식민지 페루의 허식과 음모에 대한 사실과 공상이 뒤섞여 있다. 그가 모은 자료는 민간 설화, 전설, 연장자들에 대한 통쾌한 험담, 국립도서관에서 주워 모은 역사적 단편 등이다. 이 총서의 처음 6권은 1872~83년에 출판되었고, 이어서 〈낡은 옷 Ropa vieja〉(1889)·〈좀먹은 옷 Ropa apolillada〉(1891)·〈나의 마지막 전통 Mis últimas tradiciones〉(1906)·〈나의 마지막 전통의 부록 Apéndice a mis últimas tradiciones〉(1910)이 출판되었다. /브리태니커
더글러스 [Douglass, Frederick, 1817.2.7~1895.2.20] 미국의 노예폐지운동가. 도망 노예 출신으로 연설 솜씨와 문필력이 뛰어나 미국 노예폐지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미국 정부 고위직에 임명된 최초의 흑인 시민이며, 19세기 인권운동의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노예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어머니와도 아주 어려서 생이별한 뒤 메릴랜드 주의 농장에서 할머니와 살았다. 8세 되던 해에 볼티모어로 보내져서 휴 올드 집안의 하인으로 지냈는데, 올드 부인은 주(州) 법을 어겨가면서 그에게 읽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올드 씨가 배우는 것은 노예 신분에 걸맞지 않다고 하는 바람에 길거리에서 어린 학생들의 도움으로 몰래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주인이 죽자 16세에 원래의 농장으로 되돌아가 농장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고, 얼마 후 다시 볼티모어에서 뱃사람이 되었다. 1833년 다른 3명의 노예와 함께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에 발각되었다. 5년 뒤에 뉴욕 시로, 그리고 매사추세츠 주의 뉴베드퍼드로 탈출, 그곳에서 3년 동안 노동자 생활을 했다. 이때 노예 사냥꾼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더글러스로 성을 바꿨다. 1841년 매사추세츠 주 낸터킷에서 열린 노예제 반대 집회에서 더글러스는 노예로서의 체험과 느낌을 말하도록 초청받았다. 그때 한 연설이 매우 통렬하고 감동적이어서 그는 매사추세츠 노예제반대협회의 운동가로 활약하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그때부터 줄곧 야유와 조롱, 모욕과 폭력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노예폐지운동에 헌신했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노예였을 리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이에 대한 반박으로 자서전을 써야겠다고 생각하여 1845년에 쓴 자서전이 1882년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생애와 시대 Life and Times of Frederick Douglass〉라는 제호로 개정·보완되어 다시 출판되었다. 이 자서전은 미국 문학의 고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노예의 입장에서 노예제를 묘사한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작품에서 전 주인의 이름과 거처를 밝혔기 때문에 다시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2년 동안 영국과 아일랜드로 강연 여행을 떠났다. 해외 여행에서는 새로 사귄 많은 친구들을 노예폐지운동에 참여시켜 아메리카와 유럽 사이에 인도주의적 개혁의 유대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이 여행에서 많은 기금을 모아 돌아와서 자유를 되찾았고, 1847~60년에는 직접 뉴욕 주 로체스터에서 노예제 반대 신문 〈노스 스타 North Star〉(후에 〈프레더릭 더글러스 신문〉으로 개칭)을 창간했다. 노예폐지운동의 지도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은 독자적인 흑인 신문의 필요성에 대해 반대했고 도덕적 권고를 정치적 행동으로 보완하려는 더글러스의 입장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했다. 그리하여 1851년 이후로 더글러스는 제임스 G. 버니가 지도하는 운동 그룹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폭력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특히 1859년 10월 버지니아 주 하퍼스페리 무력기습에 반대했다. 남북전쟁 기간(1861~65)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자문위원이 되었는데, 예전의 노예들을 북군으로 무장시켜 노예제에 반대해서 직접적으로 대결하는 전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부의 주들을 미합중국으로 재통합하던 기간(1865~77)에는 해방 노예의 완전한 시민권 획득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성의 권익 운동을 강력히 지원했다. 산토도밍고 위원회의 간사보(1871)로 일하기도 했으며, 재통합기 이후에는 워싱턴 D. C.에서 연방재판소 집행관(1877~81)과 공훈기록관(1881~86)으로 공직생활을 했다. 마지막에는 아이티 주재 미국 공사 겸 총영사(1889~91)로 임명되었다. /브리태니커
디킨스 [Dickens, Charles (John Huffam), 1812.2.7~1870.6.9] [책갈피 속의 오늘]1812년 찰스 디킨스 출생 “그 어떤 충고도, 격려도, 위로도, 도움도 나에게 줄 사람은 떠오르지 않는다. 신이시여. 나를 구하소서!” 20대에 이미 셰익스피어의 명성에 비견됐던 찰스 디킨스. 그의 10대는 불우했다. 철저히 밑바닥 인생을 훑었다. 디킨스는 채무관계로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대신해 열두 살 때에 공장에 나갔다. 런던의 구두약 공장에서 하루 10시간씩 육체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세기 전반 번영을 구가하던 영국 대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었던 빈곤과 노동착취의 그늘은 그의 소년기와 그대로 겹쳐진다. 런던의 뒷골목에서 ‘구두를 닦으면서 희망을 닦았다’는 그에게 소설은 구원의 빛이었다. 빈민가에 버려진 아이들을 그린 ‘올리버 트위스트’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수전노의 대명사이자 성탄절의 상징인 스크루지 영감을 세상에 내보낸다. 소설의 역사에서 디킨스만큼 인기를 누린 작가는 흔치 않다. 빅토리아 여왕에서부터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두루두루 사랑을 받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그의 작품이 출간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는 위대하기도 하고 대중적이기도 하다거나, 대중적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이기 때문에 위대한 극소수의 작가에 속한다.”(아널드 하우저) 그의 소설은 그대로 ‘고발(告發)’이었다. 시대의 빈곤과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따스한 시선을 간직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귀족의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는 익살맞다 못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디킨스의 소설을 읽을 때는 경련이 이는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얼음장 같은 가슴을 갖고 있어야 한다.”(오스카 와일드) 악(惡) 중에서도 가장 흔한 인간의 이기심이 어떻게 전파되는지를, 얼마나 음울하게 거인으로 자라나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디킨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진정한 문호였다. “그의 대담하고 왕성한 창작력에서 셰익스피어를 느끼고, 언어 자체가 주제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조이스를 연상한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2-06 19:01: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206/8027299/1
- 'Napoléon on the field of Eylau' by Antoine-Jean Gros
1807 - 나폴레옹의 아일라우 전투 (2.7~8) 아일라우 전투 [Battle of Eylau] 나폴레옹 전쟁중 러시아의 제3차 대(對) 프랑스 동맹 때 벌어진 전투(1807. 2. 7~8).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남쪽으로 37㎞ 떨어진 도시 아일라우(지금의 러시아 바그라티오노프스크)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고전한 전투이다. 러시아군이 기습적인 겨울 공세를 벌인 직후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이 이끄는 7만 6,000명의 러시아 - 프로이센 동맹군은 나폴레옹군 7만 4,000명과 맞섰다. 첫번째 전투는 2월 7일 갑자기 벌어져 양쪽이 각각 사상자 4,000명 정도를 냈을 뿐 성과없이 끝났다. 2월 8일 아침 나폴레옹은 병사 4만 1,000명만 거느린 채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지연작전을 쓰면서 러시아군 6만 3,000명과 싸웠다. 나폴레옹은 기병대의 공격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눈보라로 앞이 안 보여 제1차 공격은 엄청난 손실을 입고 실패했다. 한편 러시아군 3개 대열이 프랑스군의 취약한 방어선으로 진격해오자 프랑스군은 심각한 위험에 빠졌다. 나폴레옹은 조아생 뮈라가 이끄는 기병 예비병력 1만 700명에게 진격해오는 대열과 러시아군 중심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기병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으로 꼽힐 만한 돌격전을 벌여 러시아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2개 대열로 나누어 러시아 전열의 중앙을 돌파한 뒤 러시아군 후미에서 단일 대열로 재편성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러시아군을 향해 다시 쳐들어갔다. 이 공격으로 나폴레옹은 중앙부대를 지키고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다음 6시간 동안 양쪽 모두 증원군을 받아 오후 10시경 서로 지칠 때까지 전투를 계속했다. 양쪽은 각각 병사 1만 8,000~2만 5,000명 가량을 잃었고 밤이 되자 베니히센은 퇴각했다. /브리태니커
디어 [Deere, John, 1804.2.7~1886.5.17] 미국의 농기구 제작자. 17세 때 대장장이의 견습공으로 들어가서 나중에 자신의 대장간을 세웠다. 1837년 일리노이 주 그랜드디투어에서 앤드러스와 함께 강철쟁기를 개발·제조하여 크게 성공했다. 1847년 가게의 소유권을 앤드러스에게 팔고 일리노이 주 몰린으로 이주하여 1868년 디어사(Deere & Company)를 설립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 회사의 사장으로 지냈다. /브리태니커
1801 - 폴란드 태생의 독일 화가, 판화가 호도비에츠키(Chodowiecki, Daniel) 사망 호도비에츠키 [Chodowiecki, Daniel Nikolaus, 1726.10.16~1801.2.7] 폴란드 태생의 독일 풍속화가, 판화가. 독일 중산층의 생활 및 풍습을 그린 작품들이 빼어나다. 주로 독학으로 미술을 배웠으며 그뢰즈의 영향을 보여주는 감상적인 그림인 〈장 칼라스와 가족의 이별 The Parting of Jean Calas From His Family〉(1767, 베를린 달렘 박물관)로 처음 인기를 얻었다. 1758년에는 판화를 시작하여 7년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새긴 연작 판화와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History of the Life of Jesus Christ〉를 제작했다. 프로이센에서는 그의 작품의 도판이나 비네트를 이용하여 많은 책을 출간했다. 2,000여 점에 이르는 그의 에칭은 쾌적한 실내의 18세기 생활상을 보여준다. 그 자신은 부인했지만 때때로 윌리엄 호가스의 작품과 비교되었는데, 호도비에츠키의 작품은 호가스의 신랄함 대신 온화한 유머가 특징이었다. 1797년 베를린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 /브리태니커
1477 - 영국의 인문주의자, 정치가, 대법관 토머스 모어(More, Thomas) 출생 모어 [More, Thomas, 1477.2.7~1535.7.6] 토머스 모어(영어:Thomas More, 1478년2월 7일 - 1535년6월 6일)는 잉글랜드 왕국 시기의 법률가, 저술가, 사상가, 정치가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그는 평생 스콜라주의적 인문주의자로서 덕망이 높았으며, 1529년부터 1532년까지 대법관을 포함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모어는 1516년에 자신이 저술한 책에서 묘사한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지닌 상상의 섬나라에 주었던 이름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그는 주로 헨리 8세가 주장한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령을 받아들일 것을 거부한 죄로 정치 경력이 끝남과 동시에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죽은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교황 비오 11세는 토머스 모어를 시성하였으며, 이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정치가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성인력에서 토머스 모어의 축일은 존 피셔와 같은 날인 6월 22일이다. 모어는 1980년 영국 성공회의 성인력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는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 투표 조사에서 37표를 받았다. 토머스 모어는 종교개혁을 부정하고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한 평화와 사회정의를 주장하였다. 생애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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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