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구나! 생명을 가진 것이란 결국---
프랑스의 화가로 장프랑수아 밀레(Jean François Millet)가있다.
우리에게 보통 밀레(Millet)로 알려져 있다.
밀레(Millet)의 그림 가운데에서도 “만종(晩鐘The Angelus)”과
“이삭줍기(The Gleaners)”가 눈익다.
한국의 면(面) 단위 정도의 작은 마을,
서양문명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시골동네의 다방이나 이발소 미장원에서도
위의 두 그림중 하나는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서양화(西洋畵)중에 왜 이 두 그림이 한국 사람의 생활 속에 가까이 있을까
아마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요즘은 쉽게 들을 수 없지만 전라도 하면 “예향(藝鄕)”이라고 하였다.
※예향(藝鄕)-예술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이 많고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고을.
필자가 전남광주에서 6년을 살아봐서 잘 아는데
전라도에는 작은 음식집이든 큰 사업체든 개업을 하면 제일먼저 눈에 보이는 것이
벽에 그림 한 폭이나 붓글씨 액자다.
오막살이집의 흙벽 신문지 벽지위에도 그림 한 폭 붓글씨 한 폭은 쉽게 보인다.
이것은 전라도만의 특별한 분위기다.
경상도 쪽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한국화중 남종화(南宗畵)를 발전시킨 진도 운림산방 (珍島 雲林山房) 주인
소치(小痴) 허련(許鍊)으로 인(因)함이 크다고 생각한다.
호남인의 생활 속에 자연이 예술(藝術)로 녹여있다는 생각이다.
서양 그림중에서도 만종(晩鐘)”과 “이삭줍기”가 있다.
서양화에서는 이 두 그림의 전원풍경이 너무나 한국의 그것과 흡사하다는 것이
정서의 공감대를 이루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나라 농촌(農村) 산촌(山村)의 해질 무렵(夕陽時)에는 인근 산사(山寺)에서 꼬리가
가늘게 흐려지는 은은한 종(鐘)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꾸짖거나 시장에서 물건을 사면서 시비를 하다가도
절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동안은 꾸짖음이나 시비를 멈추는 것이 풍습이었다.
이 같은 석양(夕陽)때에 경건(敬虔)이 울리는 만종(晩鐘)을 들으며 일손을 멈추고
대자연의 조율(調律)에 순응(順應)하는 “만종(晩鐘)”의 그림에서 한국인의 정서가
공감(共感)했음직하다.
밀레(Millet)는 프랑스 철학자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인간의 자연회귀”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동양의 노자(老子) 사상을 연상케 한다.
밀레(Millet)가 직접 농부생활을 했던 프랑스 일드프랑스 주에 있는
퐁텐블로(Fontainebleau)의 농촌에서 이삭줍기는 노인(老人) 아니면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삭(落穗)은 프랑스 농촌에서 노인을 위해 남겨놓은 일거리라 한다.
“이삭줍기”의 주인공들이 노인인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노인(老人)을 위로하는 경로풍습의 하나다.
우리 농촌에서도 이삭서리라 하여 마을 아낙들이 틈을 내어 이삭을 주워 다가
떡을 빚어 마을의 고독한 노인이나 홀어미·홀아비·고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삭줍기는 가난한자와 노인에 대한 위로다.
노인이 되면 부자(富者)든 고관대작(高官大爵)이든 자식이 많아도 외롭다.
별것 아닌 작은 일에도 그냥 슬프고 외롭다 !
오늘 아침에도 항상 걷는 거리를 걸었다.
다리가 무거워 벚나무 밑에 잠깐 섰는데 벚나무 낙엽(落葉)하나가 발앞에 떨어진다.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앙상한 나뭇가지들일뿐 그 낙엽이 마지막 잎이다.
그렇구나 !
생명을 가진 것이란 결국---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