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재검증 한다
본지가 기독교텔레비젼에 안식일교회가 주주로 참여한 사실과 관련 이단배격 이라는 입장에서 강한 비판보도를 하자 많은 독자들이 안식일교회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다는 문의가 쇄도하여 본지는 지난해 11 월부터 개신교문제연구소와 함께 안식일교회에 대한 집중연구를 해오고 있으며 그 연구내용을 일부 긴급진단 형식으로 11 회에 걸쳐 비판과 변증형식으로 편견없이 연속 보도합 니다. 특히 비판은 박영관, 탁영환, 안토니훼케마. 플주이트(美플러신학신학조직신학교수) 등의 견해를 주로 인용하였으며 아울러 변증은 신계훈목사 (삼육대학총장)및 안식일교회측에서 주장 하거나 제공하는 자료들을 근거로 하였습니다. 추후 공청회동을 개최하여 신학자들의 폭넓은 연구결과를 게재할 예정이며 안식일교회가 과연 이단인가? 아닌가를 재진단코저 합니다.
율법과 복음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 . 예수 그리스도
(비평 : 일반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기본적으로 율법을 강조하며, 특별히 새로운 결신자들이나 초신자들에게 교리의 기본으로 율법적인 면을 많이 교육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가 가려지고 율법과 행함을 상대적으로 높이고 있다.
(변증 : 안식일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모든 선교활동이나 교육 과정에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가르치며 강조하고 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신앙이란 단순히 어떤 체계적인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교제이며 경험이라고 믿는다.
신앙이란 한 살아있는 인격체 곧 우리 인류의 복된 구주시요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관계이며.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체험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정 생활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가족들을 안다. 장점과 약점 그리고 품성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리스도교는 지식적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을 아주 많이 안다 하더라도 체험적으로 실제적으로 그분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지식적으로 알기를 원할 뿐 아니라 체험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주신 진리 곧 구눤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다. 또한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도 오로지 그분의 거저 주시는 은혜이며 선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동시에 31절의 말씀도 그대로 믿는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는 말씀도 그대로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통하여 값없이 구원 받은 사람은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요 구원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결과요 열매라고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대한 사랑의 반응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 :7). 우리는 구원은 결코 우리의 행함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임을 믿는다. 그 노력이 아무리 신실하다 할지라도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한다(갈 2:21 참조).
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교회에 주어져 있으며, 그 사명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깝다는 것이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고,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은 두려운 경고가 아니요 구원하시는 영원한 복음이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시며,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우리의 죄가 씻어졌으며, 믿음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이 복된 소식을 온 세상에 널리 전하여 영광스러운 재림을 준비하도록 사람들에게 기별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주목하여, 모든 생활의 가장 위대한 주제로 증거하며 높일 뿐 아니라 복음의 능력과 구원을 건전한 가정과 사회 생활을 통해 실물교훈으로 보여야 한다고 믿는다. 긍휼과 진리가 서로 만나고 공의와 화평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가임을 믿고 멸망해 가는 세상에 하늘의 도를 전하는 것이 우리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나 찬미할 때나 언제나 예수님을 높이고 그의 사랑을 강조하며 죄악과 질병의 무거운 부담 가운데서 방황하는 세상을 향해 생명의 빛되신 그리스도를 높인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를 소개하면서 복음과 율법의 의미와 역할을 분명히 제시하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우리 죄를 위해 못박히신 그리스도 죽음에서 일어나신 그리스도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배우고 가르쳐야 할 구원의 학문이며, 우리가 받는 모든 복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이다. 어떤 설교에서도 복음의 기초인 그리스도와 또 그 십자가를 빼놓지 말아야 한다. 강단에서 실제적인 믿음이 더욱 강조되면 신자들의 감동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가 우리의 신앙의 기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의 생명이요 길이다. 죄의 속제물로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은 가장 위대한 진리이며 나머지 모든 진리들은 여기에 기초하고 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를 이해하고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갈바리 십자가로부터 흘러 나오는 빛을 통해서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의 복음의 기별은 교회를 향해 그리고 세상을 향해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제시되어야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며,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이며 믿음으로 구원을 값없이 은혜로 받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심이라”(엡 2:8,9)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 20) 이것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 고백이다.
은혜와 행함과의 관계
(비평 : 일반교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들이 참 종교의 핵심이요 전부요 하늘 가는 통행 중인 것처럼 그것들을 순종하고 지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설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만 산다.
(변증 : 안식일교회)
구원은 율법이나 행함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구약 시대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더욱이,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구원이 인간의 행위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었던 때는 결코 없었다.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 그가 이룩한 어떤 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행위(혹은 행함)는 구원의 수단은 아니지만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의 생애가 하나님의 성령의 지도를 받고 있을 때 , 즉 죄된 자아가 성령께 온전히 굴복될 때 가능한 것이다. 요한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하는 글을 쓴 것은 바로 이런 신자들에게였다(요일 3:22 – 24: 5:2,3) 이러한 관계(關係)와 순서(順序)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관계를 오해하거나 그 순서가 뒤바뀌는 일이 매우 흔한 심정이다,
구약 시대에도 사람들은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선지자 하박국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3:4 롬1:17 갈 3:8,11 빌 3:9 히 10:38과 비교하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의롭게 되라고 요구하시지만, 인간은 선천적으로 불의(不義)하다.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인간은 의롭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일이다. 그는 부정(不淨)하고 불의하다. 그가 일(행함)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의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는 자신의 마음의 불의를 더 많이 드러낸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으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 밖의 힘, 외부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일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만 이루어진다.
은혜와 율법(십계명)사이에는 실로 충돌이 있을 수 없다. 은혜와 율법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각기 다른 특별한 목적과 용도로 기능을 한다. 그와같이 은혜는 하나님의 의의 표준인 율법과 대립(對立)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 각기 그 특정의 기능(機能)이 있으며 서로의 기능을 침해하지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자신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어떤 행함도, 율법의 어떤 행위도, 그것이 아무리 칭찬할 만한 것이라도 - 그것들이 많든지 적든지 희생적이든지 아니든지 – 죄인을 조금도 의롭게 해주 못한다고 매우 확고하게 믿는다(딤 3 :5 롬 3:20)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로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욥 4:4,5 엡 2:8).
태초에 인간은 의롭게 지음을 받았다(전 7:29). 창조주께서 그를 만드셨을 때에 그에게는 죄의 얼룩이 조금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의 품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의 원칙들과 조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했다. 이제, 복음 안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 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 속에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사람은 본래는 죄가 없었으나 이제는 죄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마음 속에서 작용할 때, 죄인에게는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 옷입혀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轉嫁)된다. 이것이 바로 칭의(稱義)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나누어진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그리스도,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영광화(榮光化)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 특히 새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시작한 지 얼마 안되는 자들이 특히 경계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 조화되고자 자기의 행실과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행위를 거룩하게 되고 애쓰고 있는 사람은 전혀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행하는 모든 일은 이기심과 죄로 오염이 된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오로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다.
이와 정반대 되면서도 그못지 않게 위험한 잘못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행함)는 우리의 구속(救贖)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그런 오류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순종은 그저 외적인 순종이 아닌 사람의 봉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의 품성의 표현이요 위대한 사랑의 원칙의 구현(具現)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하늘과 이 땅 모두에서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에 심기워지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생애에 실천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의 원칙이 사람의 마음에 심어지고 사랑이 창조주의 형상을 좋아 새로워지면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하신 새 언약이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 마음에 기록되면,그것이 생애를 꼴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봉사와 충성 그런 순종이 바로 제자도(弟子道)의 참된 증거이다.
레이 스테드먼은 1953년 9월호 우리의 희망지에서 은혜와 율법의 관계, 그리고 몇가지 일반적인 오해들을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율법과 은혜는 적대적인가 라고 오늘날 복음주의 교단의 대표급 신자 등에게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은 확신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심지어 보수적인 성경 연구소들과 세미나리의 학생들과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 조차도 이 질문에 “그렇다”고 힘있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 틀렸다는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들이 눈을 둥그랗게 뜨고 놀랄 것이지만, 실은 그런 입장은 성서적으로 틀려도 한참 틀린 것이다. 아주 철저히 틀린 것이다.
다른 점에서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문제에서는 혼동을 일으키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오늘날 이 율법 대(對) 은혜의 문제만큼 요란스럽게 가르쳐지고 있는 신학적 문제는 없다. 율법주의 진영과 은혜의 신봉자들의 진영을 가르는 이 문제보다 더 명확하게 선이 그어진 문제는 없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율법과 은혜 사이의 관계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논쟁에서 일반적으로 못보고 지나치거나 별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문제는 은혜와 율법, 이 두 원칙 사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율법의 오용(誤用), 다른 편으로는 은혜의 오용 사이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은헤의 원칙과 충돌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구원의 수단으로 삼아질 때에만 그렇다. 그밖의 다른 모든 상황에서 그 둘은 충돌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은 결코 인간을 구원하도록 의도하지 않았다. 율법은 그 본질적으로 원칙상 은혜에 적대적이 될 수 없다. 구분되는 독립된 분야에서, 그리고 광법위하게 다른 목적을 위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은혜는 죄로부터 구원하도록 의도되었다. 은혜와 율법, 이 둘 사이에 어떤 충돌도 존재할 가능성이 없다.
그 차이는 “율법의 계명 대(對) 계명에서 해방된 은혜의 생활”에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또한 그 계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계명”(command)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항상 “율법”이라는 단어를 연상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계명 (혹은 명령, command)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의 갈망의 표현이 아닌가,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생애의 주(主)시라면 그럴진대 그분은 우리의 생애에 권위를 가지고 계시며 그분의 요구는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계명(명령)이 된다. 이것이 은혜의 계명들이다. 그것과 율법의 계명들 사이의 차이는 그 동기에 있다. 왜 율법을 순종하는가? 두려움 때문에! 왜 은혜의 계명을 순종하는가! 사랑때문에 !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 계명은 그 어느 경우에서든지 동일할 것이다. 오로지 동기가 다른 것이 그 차이이다. 율법이 짜증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압박감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하기 싫은 것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 동일한 계명이 은혜의 관계 속에서는 우리가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속하고도 자원하는 순종을 우리에게서 이끌어 낸다. 소박같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은혜가 율법을 대체할 때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 표현된 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이 변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보다 더 심화되었고 강력하게 되었으며 단순히 외적이라기 보다는 내적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변했는가? 인간의 마음의 동기가 변한 것이다. 한때 우리는 다가올 진노에 대한 두려움에 자극되어 의로운 율법을 순종하려고 헛되이 애썻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학자들로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면서 큰 기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율법을 이룬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야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 :3,4) 그 마지막 절(節)은 은혜가 우리로 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법정에서 교회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며 그분의 생명의 피로 구속의 값을 치르어 주신 이들을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아무리 세기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갈지라도 이 대속하는 희생의 효력은 결코 줄어들 수 없다. 그분의 은총의 복음 기별은 세상을 향해 분명하고도 명백한 음성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는 율법, 율법만을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가르치거나 믿지 않는 그런 교회가 아니다.
한 기독교 시인은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나는 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일하지 않으리 이는 내 주님께서 그 일을 해주셨기 떄문이라네 그러나 나는 노예처럼 일하리 하나님의 귀한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계명
(비평 : 일반교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을 주셨다. 1500년이 지난 후 그리스도께서도 계명을 주셨다. 제칠일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갈바리에서 폐지된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계명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 교인들은 십계명과 그리스도의 계명이 동일하며 둘다 동일한 구속력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누가복음(16: 16)에는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가르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십계명이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가르친다(롬 7: 1 ~ 7 엡 2:14,15 골 2: 14, 16 참조).
(변증 : 안식일교회)
십계명이 폐지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은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만, 십계명이 폐지되었을 경우에 인간 사회, 특히 기독교계에 파급되는 대 혼란을 생각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를 단번에 알게 될 것이다. 우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을 생각해 보자. 그것이 폐지 되었다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다른 신을 섬겨도 된다는 말인가? 정말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믿어도 구원을 받는가?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는 둘째 계명이 과연 폐지될 수 있는 법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 중에서 어느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그리고 인간 사회에 불필요한 율법인가?
성경에 나타난 법칙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법칙들이 있다. 천체의 움직임과 관련된 법칙들, 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주어진 법칙들, 어떤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법칙들 , 한 나라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필요한 민법 등 여러가지 다양한 법칙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법칙들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든다면 이스라엘 민법, 제사 제도 규례, 십계명 등이 있다.
이 중 이스라엘 민법은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 법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민법을 지킬 필요는 없다. 제사 제도와 관련된 의문의 율법은 구약의 성소 제도,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구속 사업을 예표하는 각종 제사가 이루어지던 성소의 의식들과 그것에 관련된 절기들을 규정하는 법칙들이었다.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희생 제도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체로 오셔서 십자가에 단번에 돌아가심으로 성취된 이후 더 이상 이해할 필요가 없는 법칙이다. 바울이 에베소서 2장 15절에 예수께서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제사제도 법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십계명은 도덕적인 법으로서 하나님과 그리고 동료 인간들과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삶의 대헌장이다. 결코 폐지될 수도 없고 폐지되어서는 안되는 법이다.
십계명의 폐지를 주장하는 딱한 사정
그 내용을 하나씩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무사하거나 없이할 수 없는 십계명을 일괄적으로 폐지되었다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의 딱한 사정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십계명에는 안식일을 지키라고 되어 있으나 안식일 대신 주일을 지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제도와 환경이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변경될 수 있다면 성경 말씀에 기초한 진정한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일요일 예배를 성서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으나 동일성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이유들이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에는 부활한 날을 지켜야 마땅하다.요일을 월요일부터 계산하면 일요일이 일곱째 날 안식일이 된다. 성경상 안식일은 토요일이 맞지만 현실적으로 그 날에 예배할 수가 없으니 공휴일인 일요일에 예배할 수 밖에 없다.
일요일 예배에 대한 이러한 여러 이유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된 설명이다. 예수께서 부활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대한 사건이며 어떤 면에서 신앙의 중추를 이루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건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 사건이 일어난 날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뚜렷한 명분이 되지 않는다. 성경에는 부활일에 예배를 드리라고 했거나 예배를 드린 사례가 전혀 없다. 종종 “안식 후 첫날”과 관련된 몇 가지 기록을 근거로 일요일 예배를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그러한 성경절의 전후 문맥을 면밀히 그리고 양심적으로 살펴보면 예배를 드린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일요일 예배가 성경에 근거 하지 않은 것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솔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킬 의무의 예를 들어 보자. 이는 물론 신자의 가장 중대한 의무의 하나이지만 성서에서는 그에 대한 명백한 구절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에서는 그에 대한 명백한 구절을 찾아볼 수 없다. 성서의 안식일은 토요일이지 일요일은 아니다”(교부들의 신앙, 1990년판. 108).
십계명 그 심오한 원리
성경 전체를 통해서 흐르고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사랑”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가르치고 있으며 서로 사랑할 것을 호소한다. 그리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이고 실천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이웃에 대하여 실천할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방법으로 십계명을 선포하신 것이다. 성경의 다른 내용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인간 기자들이 기록했지만 십계명만은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셨다. 이 사실은 십계명이 인간의 신앙과 삶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인지를 뒷바침하는 증거이다.
십계명의 명령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웃을 나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첫째 계명부터 넷째 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고 다섯째 계명부터 열째 계명까지는 이웃에게 대한 사랑을 실질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혹자는 십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율법주의를 지킨 후 그것을 자기의 의로 간주하고 그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후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기준으로 십계명을 주셨듯이 십계명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후에 관련된 것이지 구원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순교자의 표본인 주기철 목사가 목숨을 걸고 신사 참배를 거부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십계명 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가지고 율법주의라고 비난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 이유에서,십계명에 명시된 안식일을 지키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주의자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신앙인들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며 구원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롬 8:4)하신다.
하나님의 존재와 직결된 십계명
시편 97편 2절에 보면 “구름과 흑암이 그에게 둘렸고 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보좌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의 기반을 상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와 “공평”이 하나님의 성품과 역사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의”는 무엇이고 “공평”은 무엇인가? 원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의”(체데크)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나 법칙을 말하는 것이고 “공평”(미스파트)이라는 말은 기준에 의하여 치우침없이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불변의 기준에 의하여 치우침이 없이 공의롭게 통치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공의의 기준인 “체데크”는 하나님의 존재와 직결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의 기초가 된다고 하는 그 “의”(체테크)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시편 97편 7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늘이 그 의(체데크)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 영광을 보았도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출 20:18~21 신 4:11 ~14). 시편 97편에서 말하고 있는 “의”란 십계명이 분명하다. 이를 뒷바침하는 상징이 성소 제도에 나타난다. 지성소에서 “세키나”라고 하는 영광의 형태로 하나님이 임재하고 계셨는데 그 위치가 법궤 위 속죄소였고 그 아래 기초에는 십게명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하늘 보좌에서나 이 땅에 지어진 지성소의 보좌에서나 십계명은 하나님의 임재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이 폐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거부하는 일과 같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이 십계명 폐지를 운운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참으로 심각한 도전이요 반역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위한 사랑의 계명
십계명, 이것은 인간을 지극히 사랄하시고 우리와 함께 살고싶어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마련해 주신 사랑의 원칙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지면서 지속적인 행복을 누리며 사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예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과 다시 연합되어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용서와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연결된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며 성령께서 그 일을 도와주시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하며 다윗이 지은 시 한편(시 19:7~8)을 생각해보자.
“여호와의 율법을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케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전하여 눈을 발게 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