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질라. 조심해~"
나는 여전히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두툼한 가방을 멘 아빠 뒤를 따라 빙판 위를 걸었습니다.
"야~ 정말 좋다. 너도 좋지~?"
"좋긴 뭘 좋아. 춥기만 하고만."
버릇없이 똑 쏘아붙였지만 사실 강 위를 걸어간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 색다른 경험이었습니다.
퇴촌의 어느 강변.
잎을 다 떨군 강 양쪽 산의 겨울나무들이 그 잎들 대신 하얀 눈을 가득 매단 채 눈부시게 빛나는 그곳에는 전날 내린 눈 덕분에 모처럼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은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팔짱을 끼고 뭔가를 귓속말로 속삭이곤 까르르 웃어대는 젊은 연인들도 보였고, 눈을 치워 빙판 미끄러운 곳에서는 아이들을 끌며 신나게 달려가는 아빠들도 보였습니다. 더러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부축하며 함께 강 위를 걷고 있는 단란해 보이는 가족들도 보였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저는 화가 나있었습니다.
엄마는 오늘도 여전히 식당 일이 바쁘다며 아침만 차려두고 새벽같이 일하는 식당으로 나가버렸고,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평소보다 더 늦은 새벽까지 일하고 오신 아빠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날 기색도 보이지 않고... 제 중학교 1학년의 크리스마스가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는구나 생각하니 화가 날 수밖에요.
아빠가 왜 새벽까지 일하느냐고요?
네. 우리 아빠는 탭 댄서거든요. 아시죠?
챙이 박힌 구두를 신고 딱딱 박자에 맞추어 발뒤꿈치로 춤을 추는 거.
한때는 한국 제일의 탭 댄서로 알아주는 분이셨데요. 큰 무대에서 공연도 하시고 워커힐에서도 고정 시간을 가질 정도로 이름을 날리셨다는데, 그놈의 IMF가 휩쓸고 간 다음부터는 아빠도 많이 힘드신가 봐요.
하긴 요즘 누가 탭 댄스를 보러 가기나 하나요. 저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요.
나이트클럽 같은 곳에 간신히 자리를 얻어서 여기저기 바쁘게 발품을 팔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 엄마도 조금이라도 수입을 보태려고 식당 일을 하시는 것 같고...
"너희 아빤 춤쟁이라며?"
초등학교 시절, 하루는 제 짝꿍이 저보고 이렇게 물어봤어요.
"아냐~ 우리 아빤 탭 댄서이셔~"
"바보야. 그게 바로 춤쟁이래~ 우리 엄마가 그러던 걸?"
왠지 춤쟁이라는 그 말이 풍기는 느낌이 안 좋아 짝꿍과 한판 싸움을 하고 온 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다가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신 아빠를 붙잡고 따져 물었어요.
"아빠..."
"응?"
"아빠가 탭 댄서가 아니고 춤쟁이야?"
"........." 아빠는 놀란 표정으로 무슨 엉뚱한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날 보고 계셨죠.
"내 짝이 오늘 그러던 걸. 걔 엄마가 그러셨데. 아빤 춤쟁이라고... 엉엉~"
그 말을 하다 보니 괜히 설움이 복받쳐 올라 그만 엉엉 울어버렸어요.
"아니야. 춤쟁이랑 아빠는 달라. 아빠는 한국 제일의 탭 댄서야."
가만히 다가온 아빠가 저를 꼭 껴안으며 제 귀에 속삭여주던 그 말이 참 따뜻했었지만, 제 등을 토닥여주시던 아빠의 손은 약간 떨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다음부터는 누가 물어도 아빠가 탭 댄서란 말은 하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대답해야만 할 때는 고전 무용가라고 말했죠.
눈이 있는 곳을 걸을 땐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참 상쾌하게 들렸습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도 어느새 눈은 눈치채고 포옥.. 뽀.. 드.. 득... 소리를 내고는 내 발자국을 고스란히 뒤에 남겨 둡니다. 살금살금 걷다 보니 강 복판까지 오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때야 아침부터 화나 있던 마음이 풀어져, 날 따라 살금살금 걷는 아빠를 보며 환하게 웃어줄 수 있었어요.
강 복판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제가 마치 한 폭의 산수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요.
"영이야. 여기 앉아봐라~"
"왜요. 추운데...?"
"아빠가 선물 줄게 있는데..."
"응?? 아빠가 크리스마스 선물 준비했단 말이야?? 아... 등에 맨 가방에 내 선물이 들어있었구나..."
"응. ㅎㅎ. 앉아서 눈 감아~ 그래야 줄 수 있어."
아빠의 환한 웃음이 눈 감아도 눈꺼풀에 비친 환한 햇살 속에서 빛나고 있었어요.
"이제 눈 떠~"
잠시 기다렸다가, 선물이 뭘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눈을 살며시 떠보았습니다.
"어? 그게 뭐야?"
눈앞에는 아빠가 챙이 달린 모자를 쓰고, 은박으로 빛나는 옷을 입고, 은빛 지팡이까지 하나 손에 들고 환하게 웃으며 서있었습니다.
"이게 선물이야? 잉~ 뭐 이래~"
하긴 탭 댄스 복을 입은 아빠 모습을 처음 본 순간이었는데, 멋있어 보이긴 했지만 큰 선물 기대했던 마음이 산산 조각나니 다시 슬슬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아빤 부끄럽지도 않아~ 아빠 왜 그래. 정말??"
그러거나 말거나 아빠는 저를 보고 모자를 벗어 정중히 인사하고는 지팡이 한번 휙 돌리고는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탁탁 타 타탁! 타타 타탁 탁탁!"
아빠의 발은 얇게 눈 덮인 빙판 위에서 경쾌한 박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때 저는 어땠을까요?
저는 갑자기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들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근방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이쪽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더군요.
'아... 창피해... 아빠는 기껏 한다는 선물이 딸에게 창피나 주고... 아이 짜증 나~"
어쩔 줄 몰라 제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아마 홍옥처럼 두 볼이 빨갛게 변했을 거예요.
멀찍이 있던 사람들이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아빠가 뒤꿈치와 지팡이로 만들어 내는 리듬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빨라지고, 제 얼굴은 더욱더 붉어지고 있는데, 누군가 제 옆에 다가와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습니다.
"누나 아빠야?"
힐끔 보니 유치원을 다닐만한 남자아이였습니다.
"응..." 모기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누난 참 좋겠다... 이렇게 춤 잘 추는 아빠가 있어서..."
"왜? 너네 아빤 춤 못 추셔?"
"아니. 하늘나라 갔데... 와~ 누나 아빠 정말 춤 잘 춘다~ 멋있다~"
동생이 없는 저는 아빠가 멋있다며 박수를 치는 그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어느새 우리들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빙 둘러서 있고, 그 아이 엄마인 듯한 아줌마도 그 아이 등 뒤에 쪼그려 앉았어요.
다시 아빠를 보니 아빠가 마침 하늘을 향해 풀쩍 뛰어올랐어요. 지팡이를 위로 쭉 뻗으며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슈퍼맨처럼 날렵하게 뛰어오르며 발끼리 부딪혀 소리를 내고는 다시 땅으로,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시,
탁! 타타 타탁! 탁탁 타탁 타 타탁!
뒤꿈치로 얼음을 두드리니 잠든 얼음이 잠 깨우지 말라며 우는 소리가 얼음 위를 솟아올라, 빙 둘러선 사람들 사이를 한 바퀴 휘돌고는 부는 바람 따라 멀어져 가고, 새로운 소리가 그 뒤를 따르고....
아빠의 몸놀림이 더욱 격렬해지고 그에 맞춰 얼음도 열심히 울어대고 있었습니다.
타 라라라 탁탁탁! 타라 라라라라라 락... 딱!
일순, 아빠의 격렬한 움직임이 딱 멈추자 어느새 모여서 박자에 맞춰 흥겹게 박수를 치던 박수소리도 같이 멈추었고,
탁! 타탁! 탁!
멋진 포즈로 마무리를 한 아빠가 정중히 모자를 벗더니 나를 향해 정중히 그러나 멋있게 인사를 했습니다.
"큐트 레이디. 당신에게 바치는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에게도 정중히 인사를 하자,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자~ 여러분 절 따라 간단한 탭 댄스를 배워 보시겠습니까?"
빙 둘러선 사람들은 아주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아빠는 저와 제 옆에 앉은 꼬마를 아빠 옆에 세웠습니다.
"가까이 선 사람들끼리 어깨동무를 하세요. 자 그럼 시작합니다~ 절 따라 해 보세요."
빙 둘러선 사람들이 서로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는 아빠를 따라 발뒤꿈치를 들었습니다.
탁! (아빠 발소리)
투투 퉁! 하하하하~ (순서가 제 멋대로인 둘러선 사람들 발소리. 사람들의 멋쩍은 웃음소리)
"자~ 똑 같이 한 마음으로 한 순간에~"
탁!
쿵~~~~ 이번에는 제대로 된 사람들 발소리. 여운이 남을 정도로 강 위를 퍼져나갔습니다.
할머니도 얼굴 가득 함박웃음 웃으며 발을 찍고, 아저씨도 아줌마도 연인들도, 아이들도... 모두 어깨동무한 채 다 함께 한순간에 집중해서 아빠의 발을 따라 소리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때마다 놀라 잠이 깬 얼음판도 길고 묵직하게 울어댔습니다.
탁! 탁! 타 타탁!
쿵~~ 쿵~~ 쿠쿠쿵~~~
저도 제 옆자리 꼬마의 어깨에 팔을 걸고 열심히 아빠의 동작을 따라 했습니다.
아빠의 애마인 빨간 티코를 타고 돌아오는 길.
변속기어를 잡고 있는 아빠의 손위에 살며시 제 손을 얹었습니다.
"아빠..."
"응?"
"아빠......... 고마워. 오늘 선물..."
"그래... 아빠도 영이가 오늘 선물 잘 받아주어서 참 고맙구나."
아빠를 보며 정말 환하게 웃어주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울먹이고 있는 걸 아빠가 눈치챌까 봐, 입 끝에 맴도는 이 말은 그냥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아빠. 아빠가 무지 자랑스러웠어요. 아빠 많이 사랑해요..."
첫댓글 다음 주는 북캐롤라나를 다녀올 예정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돌아올 것 같아
미리 선물 두고 갑니다. ㅎㅎ
크리스마스 선물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두꺼운 은쟁반 빙판강을 만나면
마음자리님의 춤추는 탭댄서 아빠가
생각날 것 같아요. 어려서 한강물이 꽁꽁 얼때면
스케이트로 은색날을 휘날리며 얼음판 위를 씽씽 달리며 한겨울을 보내곤 했는데 흐릿한 옛동심이 스물스물 피어 오름니다. 해피 미리 크리스마스☆
북캐롤라이나 잘 다녀오세요.
또 글이 길었지요? ㅎ
대구 동화사 가던 길 중에
동화천이라는 물 깊은 계곡이 있었는데
그곳 얼음판은 너무 투명해서 얼음 아래
밑바닥에 물고기들 헤엄치는 게
보일 정도였지요.
은쟁반 빙판이라니 그곳이 떠오릅니다.
@마음자리 요즘은 마음자리님의 글을 우리끼리만 읽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널리 소개하고 읽혀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한국은 요즘 폭설 소식이 많습니다. 하얀 눈위에 구두발자국 뽀드득의 낭만보다 저 눈을 어찌 치우나..하는 걱정이 먼저 드니 제 감정도 메마르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산이 글보다 더 잘 읽어주시는
뜨락님들이 계셔서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쓴 글들 나중에 정리하면
아이들에게 유언처럼 남겨주고
싶은 바람은 있지요.
강 복판 얼음 위에서 딸을 위한 아빠의 탭댄스라니~
너무 멋지자나요~~ 울컥! ㅠㅠ
성탄주간에 아름다운 동화 선물 감사합니다.
이 주간만이라도 온 세상이 동화처럼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기를....♡♡♡
글로가 아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현장에 있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빙판위의 요정의 선물같은 아빠의 텝댄스...
크리스마스 선물...값진 선물 이었습니다.
값을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로 그려봅니다.
넘 멋져요.
메리 크리스마스!
라라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마음자리님의 가슴속에는 아름답고 착한 소년이 살고 있어요.
그 감성이 큰 자산이 되어 머나먼 타국에서도 마음자리님의 마음을 강하고 풍요롭게 잘 지켜드릴거라 믿어요
그렇게 되면 고마운 일이지요.
응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