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마~린 생생 리포트!/홍보마린의 스토킹
1월 1일 저녁 9시 뉴스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2012년 올해. 대한민국 스포츠에 중요한 대회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바로바로바로~ "2012년 런던 올림픽 대회"입니다^^
<런던 올림픽을 2012년 주요 이슈로 알려주고 있는 1월 1일자 KBS 뉴스9>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모두 '태릉선수촌'에 입촌해서 구슬땀을 흘리며 금메달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태릉선수촌 박종길 촌장님이 해병대 출신이라는 사실! (두둥^^!)
이미 해병대지 40호에는 소개되었습니다만, 블로그 해병대 가족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보여드려요~
해병대 간부후보생 41기. 아시안게임 3연패로 이미 해병 부모님들께서는 누군지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해병혼을 올림픽 국가대표들에게 심어주고 있는 태릉선수촌 박종길 촌장님과의 인터뷰를 지금부터 함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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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길 촌장님과의 인터뷰 장면. 센스마린은 수줍게 뒷머리만 보이는군요 ㅋㅋ>
시간을 쪼개가며 선수촌 구석구석을 훑는 현장형 리더 박종길 촌장님과의 인터뷰는 정말 어렵사리 성사되었습니다. 직접만난 박종길 촌장님은 약간만 과장해서 말하면 여전히 현역선수의 느낌이었죠. 혈기 넘치는 얼굴, 당당한 체구, 그리고 그를 아시안게임 3연패로 이끈 투박한 손.. 그 어느것 하나도 은퇴한 선수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1974년인가요? 테헤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였습니다. 북한은 대한민국에 이어 금메달 1개 차이로 5위에 올랐고 남과 북은 이때부터 스포츠를 통해 치열한 대리 전쟁을 벌이게 됐습니다. 당시 아시아선수권자였던 촌장님은 이 대회 권총부문에서 내심 3관왕을 기대했지만 중국과 북한에 밀려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는데 그쳤죠. “해병대 장교가 적군에게 졌다”며 절치부심한 촌장님은 이후 아시안게임 3연패의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사격 전설과의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할게요~
"어딜가도 내가 해병대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빨간명찰의 혼이라는게 신기해서 지금도 흐트러짐이 없거든. 이 혼을 배워오라고 난 복싱팀과 레슬링팀을 캠프로 보냈어요. 거기서 일장연설을 했지. 기필코 해병혼을 몸에 가득 담아와서 어디가서든 이길 수 있도록 하라고 하죠."
첫 대면 인사가 끝나고 자리에 앉자마자 해병대 이야기부터 시작하시는 것을 보니 해병대 출신임이 입증되는군요 ㅎㅎ 촌장님은 해병대 간부후보생 41기으로 입대해 김포 2사단에서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옛날 선수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힘들때면 항상 ‘내가 해병대인데, 나 중대장 출신이야. 이것도 못하면 돼겠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항상 흐트러짐이 없다고 자부해요. 당시 월남전이 절정에 있을 때라 사격훈련 비중이 엄청났어요. 소총 4주, 권총을 3주 훈련했죠. 난 새벽구보를 소대원 전체가 크게 구령 붙여서 하곤 했는데 대대장님이 내 구령소리에 잠 깬다고 하셨어. 열정적인 장교생활이었죠. 후보생 1등, 초군반 1등한 것도 열정이었을 거에요. 난 머리보다는 열심히 했거든요. 내 생활 신조가 열정이니까. 하하”
<촌장님의 집무실 책상입니다. 업무도 열정적으로 하시더라구요^^;;ㅎㅎ>
촌장님의 사격신화는 해병대 장교로 입대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혀 사격과는 연관이 없는 삶을 살다가 군사훈련을 통해 자신이 사격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거든요.
“대통령 경호실장이 대한사격연맹 회장이 되더니 갑자기 아시아사격선수권대회를 유치했어요. 근데 그때 한국 체육계에 인프라라고 있나. 서울운동장, 장충체육관, 동대문 아이스링크가 전부였거든. 70년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었는데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어서 포기했을 정도였어요. 근데 덜컥 사격대회를 열게 된거지. 선수가 있나.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각 군에 사격 잘하는 사람을 불러올린거죠. 해병대도 난리가 난거죠. 전쟁준비로 정신이 없었는데 내가 거론이 된거에요. 그때 나는 월남전에 참전하려고 배 타고 출항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보다 더 큰 국가과업이 있다면서 올라갔죠. 경찰도 있었고 각 군에서 내노라 하는 총잡이들이 올라왔는데 내가 금메달을 닸어. 그 때부터 내 사격인생이 시작됐죠.”
그럼...훈련은 어떻게 했을까요? 군대에서 과연 체계적인 사격훈련을 할 수 있었을까요? 가볍게 물어본 질문에 엄청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는데요, 해병정신과 열정으로 가득한 촌장님의 훈련일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탄사를 내뱉을 수 밖에 없었죠.
“어떻게 훈련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그냥 무작정 남들보다 곱절로 했어요. 해병대에서 사격 잘 한다는 선배님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봤는데 이런저런 방법을 알려주시더라고. 그대로 그저 우직하게 했을 뿐이야. 균형감각과 신체조절능력이 좋아야해서 철길을 걸으면 좋다고 하시더라고. 그래서 걸었어요. 그때 열차도 잘 안 다닐때라 3~4킬로 정도 경춘선 철로를 출 퇴근삼아 걸었죠. 총쏘는 자세로. 나를 말리는 화랑대 역무원하고 싸우기도 하고 막무가내였지. 또 속사권총을 잘하려면 순발력이 좋아야 하니까 산을 달려서 오르라는거에요. 그래서 뛰었죠. 다만 나는 또 한술 더 떠서 총을 들고 나무사이를 지그재그로 통과하면서 뛰어다녔지. 그렇게 6개월 이상을 했더니 이제 좀 뭔가 보이더라고. 좌우간 현역시절 동안에는 잠자는 시간외에 손에서 총을 놓은 적이 없었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촌장님의 아시안게임 3연패의 신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요즘은 엘리트 교육이라는 명분으로 어릴 때부터 연습하고 재능을 길러오잖아요? 하지만 촌장님의 사격 이력은 해병중위부터 였습니다. 다른 선수들은 최전성기를 누릴 시기에 사격에 입문한 셈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권총 속사분야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르고 꾸준히 그 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같은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촌장님의 첫 아시안게임 무대는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아시아선수권자였지만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죠.
“금메달을 못 딴게 문제가 아니야. 북한한테 졌잖아요. 해병대 장교가 적군에게 진거지. 정말 이를 악물었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준비한 4년. 78년 방콩아시안게임에서 운명처럼 마주한 북한과 영화같은 이야기를 만들며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때..도 한국선수단 성적이 안 좋았어요. 개막 5일째였는데 금메달이 없었죠. 속사권총 결승이었는데 북한 선수가 먼저 쐈습니다. 당시 아시아 신기록이 589점이었는데 북한 서길산 선수가 2점을 갱신한거야. 591점이 나왔어요. 북한은 금메달을 확신하고 신이났죠. 우리 선수단에 와서 약을 올리면서 그럽디다. ‘동무들 우리는 금메달 6개째야요’ 그리고 내 차례가 됐는데 난 보기좋게 593점을 쐈지. 감독하고 코치진이 서로 얼싸안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감독이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내 마지막 사격이 10점에 명중하는 걸 봤다지 뭐야. 앞 선수가 갱신한 신기록을 깨고 또 신기록을 쏜 것만으로도 특종인데 그 대상이 북한이었으니 대한민국이 뒤집어진거죠. 거기다 첫 금메달이었고.”
이 금메달로 촌장님은 6개월동안 대한뉴스에 보도되면서 지금의 박태환, 김연아를 능가하는 스타가 됩니다.
“금메달도 정말 기뻤지만 내가 해병대 장교로서 적을 멋지게 해치웠다는 생각에 더 가슴이 벅찼어.”
환희의 순간을 회상하는 촌장님의 눈에는 자부심이 엿보였습니다. 목소리는 아직도 그때의 감독을 기억하는 듯 살짝 떨리기도 했구요.
<깜짝! 훈련에 몰두하던 레슬링 선수가 촌장님을 보고 놀랍니다. 불쑥불쑥 현장을 누비신다는 군요>
사격 영웅 박종길은 이제 화려했던 현역의 옷을 벗고 이제 대한민국 체육계의 예비역으로 또 열정을 담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농구인
김인건씨에 이어 태릉선수촌의 촌장이 된 것입니다.
“제가 있을 때만 해도 선수촌하면 엄격하고 상명하복의 꽉 막힌 훈련이 전부였죠. 하지만 지금은 선수들이 스스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유분방한 신세대 선수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선수촌이 즐겁고 흥겨워야 경기력도 향상되는거에요”
촌장님은 또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촌장은 감투가 아니거든요. 한 집안을 토닥이고 이끌어가는 할아버지일 뿐이에요. 자식과 손자를 돌보는 것처럼 선수들을 이끌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에게도 절대 선수들에게 고함치거나 짜증내지 말라고하죠. 이제는 선수들이 지나가면서 촌장님이 할아버지 같다고 그래요.”
신세대 선수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그들과 소통하는 ‘감성선수촌’과 ‘할아버지 촌장론’은 선수들에게 크게 어필하며 다가가고 있습니다. 선수촌을 이끌어가는데 해병대 중대장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군요~ ㅎㅎ
1948년 건국 이후 처음 참가한 올림픽이 런던 올림픽이었습니다. 그 후 64년만에 다시 찾는 런던에서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한 한국의 기량을 세계에 보여줘야 합니다. 이외에도 코 앞으로 다가온 동계아시안게임과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따른 동계선수 발굴과 육성도 촌장님의 몫이죠. 차후 한국 체육계의 성패를 좌우할 열쇠를 잡고 있는 촌장님의 각오를 들어볼까요?
“3회 연속 Top10을 달성해야죠. 금메달 13개 이상은 반드시 획득할 겁니다. 지금까지 각 종목 대표팀의 훈련을 꼼꼼하게 살피고 선수들과 많은 대화를 해봤는데 전망이 밝아요. 우리 신세대 선수들은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도 자신의 목표를 위해 굉장히 노력합니다. 외국인 코치 초청은 물론이고 해외 정보수집 비용도 배정해서 유력종목은 집중 지원할 겁니다. 런던의 시차와 기후 적응을 위해서 대한체육회가 직접 런던에 훈련캠프를 차릴 예정이어서 효과적인 훈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해병혼으로 정신력을 강화하라는 주문도 물론 필수적으로 하고있죠.”
<후배 해병들에게 당부할 말이 있다며 인터뷰 다 끝내고 돌아가려는 센스마린을 붙잡은 촌장님 ㅠㅠ>
인터뷰를 마무리하고 촉촉하게 젖은 태릉선수촌을 박종길 촌장과 함께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자유롭고 밝은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꿈을향해 진지한 땀방울을 흘리는 선수들을 보며 촌장님의 말씀대로 2012 런던올림픽의 전망이 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를 달리며 식지않는 열정과 해병혼을 불태우고 있는 자랑스러운 예비역 선배들. 대한민국 체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뿐 아니라 예비역 해병대위 박종길을 위해서라도 이번 런던 올림픽에 엄청난 금광들이 발굴되길 기원해봅니다.
촌장님은 1973년 해병대사령부가 해체되고 해군과 통합되면서 군복을 벗었습니다. 영원한 해병으로 남고싶었다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촌장님은 영원한 해병대 장교로서 후배들에게 덕담을 남기셨습니다.
“우리 해병대는 언제나 국가의 최선봉에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지켜야합니다. 삼군에 앞장 서 있다는 그 명예와 자부심을 절대 잊지마세요.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해병다운 해병이 되어주길 바랍니다. 지금 새겨넣은 해병대 정신은 평생 인생의 주춧돌이 되어 줄 것입니다. 참다운 해병대 정신을 길러주세요.”
글 / 해병대지 40호, 사진 / 해병대사령부 정훈공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