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2' 포스터
지난 8월29일 토요일 오전 토론토 블루제이스 류현진이 선발로 출전한 경기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승부치기로 치러진 연장 승부에서 10회초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한 점을 내주고 10회말 투아웃까지 몰렸다.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는데 끝내기 역전투런 홈런이 터져 극적으로 승부를 뒤집었다.
미국 시간 8월28일에 열린 이 경기에서 양 팀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는 모두 등 번호 '42'를 달고 나왔다. 나는 경기를 1회부터 보지 않고 중간부터 시청해서 처음엔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지 못했다. 조금 지나 '42'가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재키 로빈슨 기념일에 MLB 중계를 시청한 게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전에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류현진이 선발투수로 나온 날이 우연히 '재키 로빈슨 데이'와 겹쳐서 그 의미가 더 각별하게 다가왔다.
'재키 로빈슨 데이'는 그가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날을 기념하는 행사다. 원래는 4월15일인데, 코로나19로 시즌 개막이 늦어져 올해는 '8월28일'로 옮겨졌다. '8월28일'은 브루클린 다저스 브렌치 리키 단장이 로빈슨을 처음 만난 날이다.
그날 밤, 거실에서 스마트폰을 보던 딸이 말을 걸었다.
"아빠, '블랙 펜서'에 주인공으로 나온 배우가 죽었대." "그래?"
나는 금방 그 배우의 얼굴은 떠올렸지만 이상하게 고유명사는 혀끝에서 맴돌았다. 그가 가장 최근에 출연한 영화가 '21 브리지'다. 이 영화의 포스터가 내가 사는 동네의 버스 정류장 광고판에 몇 개월째 붙어 있어 산책할 때마다 마주치곤 했다.
'블랙 팬서'에는 부산의 여러 장면이 등장한다. '블랙 팬서'에서 그의 모습들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와칸다 포에버~'
지난 2018년 '블랙팬서' 홍보차 내한했을 당시의 채드윅 보스만
채드윅 보스만(1977~2020).
부음 기사에서 출연작들을 살펴보다가 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42'가 출연작 리스트 중에 있었다.
재키 로빈슨을 다룬 영화 '42'에 나왔던 배우가 채드윅 보스만이었구나! 나는 이 영화를 수년 전 유럽여행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보았다. 재키 로빈슨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42'를 보니 재키 로빈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그런데도 나는 배우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음날 한 신문은 채드윅 보스만의 부음기사에 이런 제목을 뽑았다. '재키 로빈슨 데이에 떠난 재키 로빈슨 배우 채드윅 보스만'
이번 주 '세계인문여행'의 주인공은 MLB 최초의 흑인선수 재키 로빈슨(Jackie Robinson 1919~1972)이다. 먼저 그가 야구 선수로서 이룬 최초의 기록부터 살펴본다.
• 1947년 4월15일 브루클린 다저스 데뷔 • 1949년 내셔널리그 MVP 선정 • 1949년부터 1954년까지 6년 연속 올스타에 선발 • 월드시리즈 6회 진출. 1955년 월드시리즈 우승 • 10년간 메이저리거로 활약. 통산 타율 .311, 도루 197 • 1962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 현역 은퇴 후 MLB 중계방송 해설위원 • 1972년 사망 후 의회골드메달‧대통령 자유메달 수상 • 1997년 MLB 등번호 '42'를 모든 팀에서 영구 결번 결정. • '42'를 모든 프로스포츠에서 영구 결번‧재키 로빈슨 데이 결정
보스만의 요절을 계기로 그가 연기한 로빈슨의 삶을 되짚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미국내 인종갈등이 과거완료형이 아닌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1945년 니그로리그 캔사스시티 모나크스 시절의 재키 로빈슨
동네 깡패에서 운동선수로
로빈슨은 1919년 미국 남부 조지아에서 5남매의 막내로 생을 받았다. 부모는 소작농을 하는 가난한 농부였다. 한 살 때 부모가 이혼해 그는 어머니를 따라 캘리포니아 패서디나로 이사했다. 10대 초반 그는 가난한 집안 환경을 비관해 한동안 동네 깡패들과 어울려 다녔다. 자칫,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지려는 순간 형 맥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형은 동생이 운동에 소질이 있는 걸 발견하고 동네 깡패들에게 떼어내 운동을 권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미식축구, 농구, 야구, 테니스, 그리고 육상. 구기 종목과 육상 모두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미식축구에서는 쿼터백, 농구에서는 가드, 야구에서는 유격수를 맡았다.
고교 졸업 후 패서디나 주니어 칼리지에 진학한다. 여기서도 그는 5개 종목 학교 대표로 뛴다. 1938년 주니어 칼리지 야구 지역대표로 선발되어 MVP가 되었다. 같은 해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와 말다툼을 벌인 혐의로 기소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인종차별에 비폭력으로 맞선 최초의 도전이었다. 1939년 UCLA에 진학해서도 테니스를 제외한 4개 종목의 대학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
1942년 군에 입대한 그는 자격을 취득해 장교후보생학교에 지원한다. 하지만 인종차별로 입학 허가가 지연되다가 간신히 장교후보생이 된다. 1943년 중위로 진급하면서 텍사스의 탱크대대 '블랙 팬서'에 배치되지만 여기서도 인종차별로 불이익을 받는다.
군에서 제대한 그는 1945년 월급 400달러로 니그로(Negro)리그 팀과 계약한다. 당시 미국프로야구는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 흑인만이 참여하는 니그로리그 3개가 있었다. 47게임 출전, 타율 3할8푼7리, 5홈런.
브루클린 다저스 시절 더그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재키 로빈슨.
내셔널리그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 브렌치 리키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서는 실력 있는 흑인 선수의 보강이 절실하다고 내다봤다. 리키는 니그로리그 선수들 중 로빈슨의 가능성을 높이 샀다. 로빈슨은 1946년 브루클린 다저스의 마이너리그팀과 계약을 맺고 MLB 생활을 시작했다. 1947년 브루클린 다저스는 시즌 개막을 일주일 앞두고 마이너리그에 있는 그를 불러올렸다.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는 모두 16개팀, 선수는 백인 399명이었다.
1947년 4월15일, 브루클린 다저스 홈구장 에베츠 구장. 스물여덟 살 흑인이 사상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에 섰다. 관중은 2만6623명. 역사적인 데뷔 경기에서 1루수로 출전한 그는 무안타에 1볼넷, 1득점을 기록했다. 이날 이후 미국 프로야구에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흑인들이 니그로리그를 외면하고 다저스 경기에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의 출현으로 다저스 클럽하우스는 어색한 긴장감이 돌았다. 급기야 백인 선수들이 로빈슨을 반대하는 연판장을 돌렸다. 사태가 확산하자 레오 드로쉐 감독은 "나는 피부색이 노랗고 검거나 얼룩말처럼 줄무늬가 쳐져 있어도 상관이 없다"며 "나는 승리에 도움이 되는 선수를 원한다"는 말로 선수들을 설득했다. 그래도 일부 선수들이 그 옆에 가지 않으려 하자 고참인 피위 리스(PeeWee Reese)가 나섰다.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 그러나 피부색이 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백인 관중들의 야유는 계속되었고, 다른 팀들은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냈다. 흑인을 출전시키면 경기를 보이콧하겠다고 사무국을 협박하기도 했다. 재키는 상대 팀의 집중 타깃이 되었다. 편파판정과 빈볼이 난무했고 스파이크에 정강이가 밟혀 7인치나 찢기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경기가 대표적이다. 필리스 감독은 덕아웃에서 나와 "깜뚱이"이라고 욕했다. 그에게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욕설을 퍼부었다. 이 장면은 영화 '42'에서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1950년에 나온 영화 '재키 로빈슨 스토리'의 포스터
실력과 인격으로 편견을 이기다
로빈슨은 '맞서 싸우지 않는 배짱'으로 갖은 모욕을 견뎌냈다. 데뷔 첫해 그는 151경기에 출전해 타율 0.297, 175안타, 12홈런을 기록해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실력이 있으면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실증했다. 로빈슨의 성공을 지켜본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1948년부터 실력 있는 흑인들을 하나둘씩 뽑기 시작했다.
MLB는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무대. 두 번째 시즌 타율은 .296. MLB든 KBO리그든 모든 타자의 꿈은 3할이다. 한계를 느낀 그는 타격왕을 두 차례 지낸 조지 시슬러를 찾아가 개인지도를 요청한다. 시슬러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타격에 눈을 떴다. 1949년 타율이 .342로 뛰어올랐다. 그해 내셔널리그 MVP에 선정되었다. 메이저리그 10년 통산 타율은 .311, 도루 197개(홈스틸 19개 포함).
그는 미국 프로야구에 60년간 그어져 있던 피부색 라인을 지웠다. 그의 '신사적 투쟁'은 미국 민권혁명의 기념비적 발자국이 되었다. 그동안 참고만 있던 흑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평등을 향한 투쟁의 불꽃이 타올랐다. 1963년 마틴 루서 킹의 워싱턴 대행진과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역사적인 연설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가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유는 야구 실력뿐만 아니라, 숱한 도발에도 불구하고 신사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종차별이 부끄러운 행위임을 인종주의자들이 스스로 느끼게 했다. 이 점에서 말콤 엑스와는 결이 달랐다.
뉴욕 메츠의 홈구장 시티 필드에 마련된 '재키 로빈슨 홀'
미국 사회는 재키 로빈슨을 다양한 형태로 기린다. 뉴욕 메츠의 홈구장인 시티 필드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재키 로빈슨 홀'이 있다. 그의 이름을 딴 야구장도 여러 곳 있다. 모교인 UCLA 야구팀 전용 구장은 ‘재키 로빈슨 스타디움’이다.
그의 삶을 조명한 예술작품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직접 출연한 영화를 포함해 수십 종의 전기와 평전, TV영화, TV시리즈, 뮤지컬 등. 가장 최근의 영화가 2013년에 나온 '42'다.
조성관 작가 / 뉴스1
첫댓글 나도 그런 재능이 있다면 흑인이어도 좋을텐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