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개 소대가 이뤄낸 대승!
34명의 소대원 중 12명만 무사했던 치열한 혈전!!
승리했지만 어처구니없게 휴전선 북쪽으로 편입되어야 했던 통한의 베티 고지!!
![한국전쟁](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3048_5%3F1247573243.jpg)
![베티 고지 전투도](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3048_1%3F1247573243.jpg)
베티 고지 전투 상황도
이 전투는 한국군 제1 보병사단과 중국 인민해방군 제1 보병사단이 맞붙은 그야말로 양측 1 보병사단의 대결이었다.
![김만술 소위 흉상](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3048_0%3F1247573243.jpg)
단 1개 소대 병력만으로 압도적인 중공군의 맹공을 격퇴시킨 베티 고지의 영웅 제1 보병사단 11 보병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 김만술 소위
당시 24세의 나이에 소위로 임관해 다소 늦은 장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사실 그는 오늘날이면 고등학교 2학년생이라 할 수 있는 18세의 나이에 이미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있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고참이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벌어진 치열한 고지 쟁탈전은 양측에 지속적인 소모전을 강요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유발시키고 있었다.
앞서 서술한 제5 보병사단 "열쇠부대"와 미 제2 보병사단의 피의 능선 전투도 그러한 경우다.
그러나 참으로 치열했던 고지전 중 바로 57주년을 바라보는 기적과도 같은 승첩을 거둔 전투가 있으니 바로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11 보병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의 베티 고지 전투다.
◀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인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개전 초부터 이끌며 치열한 혈전을 치렀던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오늘날에도 전방사단으로서 언제라도 남침을 감행할 북한의 야욕에 맞서 철통 경계와 훈련에 전념하고 있다.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베티 고지 전투는 단 1개 소대 병력만으로 압도적인 규모의 중공군을 격퇴했다는 점에서 수적인 열세 하에서도 굳건한 방어 의지만 있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전진부대의 감투정신을 보여준 전례다.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3048_3%3F1247573243.jpg)
"제2의 한국전쟁은 어림도 없다!"
개전 초반 전차 1대 보유하지 못해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퇴각해야 했던 제1 보병사단은 이제 K-1 전차를 장비한 강력한 정예 보병사단으로 탈바꿈했다.
◀ 제1 보병사단의 대표적인 지휘관이라 할 수 있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육군참모총장을 2회나 역임하는 등 한국군 최초의 4성 장군으로서 오늘날에도 추앙을 받고 있는 참 군인의 표상이다.
1953년 7월에 접어들면서 휴전 회담이 점차적으로 기정 사실화되는 가운데 공산측과 UN군측은 유리한 고지를 하나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혈전을 반복했다.
김동빈 준장의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역시 이 치열한 고지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간단히 부대 소개를 하자면 제1 보병사단은 1947년 12월 1일, 통위부 일반명령 69호에 의거해 서울 남산에서 조선 경비대 제1 보병여단으로 창설되었다.
이후 1949년 5월 12일에 제1 보병여단 국방부 일반명령( 육 ) 15호가 발령됨으로써 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고 이듬해 6월 25일, 백선엽 준장이 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개전을 맞이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제1 보병사단은 초반의 패전을 극복한 후 참혹했던 다부동 전투 등 총 112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해 적 82,000여명을 사살하고 6,900여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뒀다.
휴전 이후 전두환 소장이 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제3 땅굴을 발견해 북한의 남
침 기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등 9회의 대간첩 작전을 통해 북한군 24명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웠다.
제1 보병사단의 명칭인 전진부대는 고 이승만 전대통령이 1950년 10월 20일, 제1 보병사단의 평양 선봉 입성을 기념, "계속 전진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라"는 의미로 부여한 것이다.
◀ 38 도선을 돌파해 평양으로 진격하는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
백선엽 준장은 평양 입성에 목이 매어 있었고 제1 보병사단 장병들은 고난의 강행군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제7 보병사단 "칠성부대" 8 보병연대와
더불어 평양 점령에 성공했다.
이렇듯 개전 초부터 휴전 시까지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북한군과 중공군을 격퇴시킨 제1 보병사단이 이번에는 고지 사수전에 투입된 것이다.
◀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고 있는 제6 보병사단 "청성부대" 장병
제1 보병사단은 압도적인 중공군의 인해전술 속에 고전을 거듭했지만 베티 고지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진부대의 감투정신을 만방에 떨쳤다.
1953년 7월 중순이 되면서 중공군이 공세를 감행할 것이라는 첩보가 속속 입수되자 제1 보병사단장 김동빈 준장은 일선 예하부대에 경계태세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 중 본 포스트에서 다룰 베티 고지 역시 긴장감이 팽배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베티 고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방에 위치한 고지로 주변으로 임진강이 허리띠와 같이 둘러 흐르는 작전상의 요충지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특히 이 고지를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휴전을 맞이할 경우 현재의 주 저항선으로부터 남방으로 2km 후방까지 비무장지대로 확정돼 그만큼 아군이 임진강 남부로 물러나야하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생하기 때문에 제1 보병사단은 더욱 이 고지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1953년 7월 중순이 되면서 고지 북방의 중국 인민해방군 제1 야전군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는데 우선 일선에 배치되어 있던 예하 제1, 7 보병사단 중 제7 보병사단이 예비로 있던 제2 보병사단과 교대함과 동시에 제1 보병사단이 한국군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의 전면으로 공세를 감행할 조짐을 보인 것이다.
![중국 인민해방군](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0b%2F0e%2Fpershing11111%2Ffolder%2F37177%2Fimg_37177_1383048_8%3F1247573243.jpg)
《 백전노장 김만술 소위! 》
1929년 경상남도 함안군 출생인 김만술 소위는 일본 오사카 공업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불과 18세 나이에 조선경비대에 입대, 제5 보병연대로 배치되어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여수-순천 제14 보병연대 반란사건으로 실전에 투입된데 이어 공비 토벌 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전하는 등 약 6년에 걸친 실전 경험을 통해 단련된 역전의 용사이자 고참 부사관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그는 제1 보병사단 "전진부대"에서 탁월한 무훈을 발휘했고 그 결과 베티 고지 전투가 발발한 1950년 7월 15일자로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진급했으니 그의 나이 24세였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자면 24세는 일반적인 초임 장교의 평균 연령이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꽤 늦은 초임 임관 연령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만술 소위는 동기 초임 장교들에 비해 6년에 걸친 실전 경험으로 단련된 고참 부사관 출신이었고 자연 소대원들의 신망을 받을 수 있었다.
갓 임관하기가 무섭게 김만술 소위에게 내려진 임무는 바로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던 베티 고지를 사수하는 일이었다.
《 중공군 2개 대대의 치열한 파상공세, 단 1개 소대만으로 사수해내다!! 》
1950년 7월 13일, 김만술 소위가 아직 임관하기 2일 전을 기해 중국 인민해방군은 일제히 제1 보병사단이 사수하고 있던 베티 고지를 향해 공세를 감행했다.
◀ 1953년 7월의 장맛비는 전차의 기동조차 어려울 정도로 주변의 지형을 질퍽거리게 만들었다.
이 공세는 단순히 제1 보병사단 지역만이 아닌 금성천 일대에 걸친 한국군 제2 군단의 방어선에 해당되는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한 대공세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최주종 대령의 제1 보병사단 11 보병연대는 예하의 2대대를 배치해 베티 고지를 사수하고 있었는데 함성을 지르며 꽹과리와 징의 파열음이 요동치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대공세를 맞이한 것이다.
김봉건 중령의 제2대대는 7월 13일부터 15일까지 3개 소대 병력을 교대로 투입하며 저지했지만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할 때마다 소대 병력의 태반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 사실상 재편성을 요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베티 고지는 제1 보병사단 11 보병연대에서 죽음의 고지로 통하게 되었고 자연 병사들은 고지에 오르는 부대를 바라보며 "오늘은 저 부대에서 몇 명이 죽어나올까?"라며 한숨을 쉴 정도였다고 한다.
더욱이 7월의 장맛비로 인해 고지 일대에서 병력과 장비의 기동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난관도 김만술 소위의 제2 소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신임 2소대장인 김만술 소위의 첫 실전이었지만 6년 간에 걸친 실전으로 단련된 그의 입장에서도 이 전투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베티 고지를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탈취당하는 순간 향후 전황이 너무나도 아군에게 불리했기에 그는 제2 소대원들과 목숨을 걸고 고지를 사수하기로 다짐했다.
김만술 소위의 상관인 제6 중대장 정대선 대위로서도 이 위험천만한 임무( 하필이면 김만술 소위의 2소대와 교대할 제7 중대의 1개 소대 생존
자가 겨우 10명에 불과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에 부하들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1953년 7월 15일 14시를 기해 김만술 소위의 제2 소대가 베티 고지에 도착해 진지를 인수했을 당시 3개의 봉우리 중 중앙과 동쪽은 제1 보병사단이 장악한 상태였지만 서봉은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탈취당한 상태였다.
"모두 잘 들어라. 적이 저 서봉을 장악한 상황에서 현재의 방어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특히 지금까지 다른 소대들이 일방적으로 적의 공격을 방어만 했던 터라
사상자 역시 무시못할 수준이고 우리 소대가 적을 막아내더라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것이고 차후 교대할 다른 전우들의 피해 또한 클 것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저 서봉의 적은 우리가 감히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소대가 녀석들을 놀래켜주고 서봉을 탈환한다. 알겠나?"
"예!!"
눈앞의 가시나 마찬가지인 서봉을 예의주시하던 김만술 소위는 중국 인민해방군이 방심하고 있을 것이라 결론을 내린 뒤 지금까지의 수동적인 방어태세를 적극적인 공격태세로 전환, 아군의 사기를 증진시키고 방심하고 있을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한 수 가르쳐주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바로 6중대장 정대선 대위에게 서봉 공격을 허가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대장님, 2소대장입니다. 지금 서봉을 장악한 적이 그간의 전황으로 방심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따라서 제 소대가 서봉을 기습 공격한다면 수월하게 탈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격을 허락해주십시오"
"그러한가? 음, 알겠다. 2소대장! 대대장님에게는 내가 보고할테니 즉시 서봉을 탈환하도록"
6중대장 정대선 대위는 자신감 넘치는 김만술 소위의 요청에 기꺼이 기습 공격을 승인했고 이에 김만술 소위는 즉시 2소대원들에 공격 준비를 명령했다.
"잘 들어라. 아무리 적의 포화가 치열하더라도 민첩하고 침착하게만 행동한다면 죽지 않는다. 일단 적들을 격퇴시키면 즉시 방어축성으로 야습에 대비하고 주변 시계를 정비한다!"
6년 동안 전장을 누빈 고참 부사관 출신의 김만술 소위였기에 소대원들은 그의 자신감에 찬 주의사항을 숙지하며 마침내 서봉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소대원 전원이 의기투합한 덕분에 제2 소대의 기
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김만술 소위의 제2소대는 순식간에 서봉을 수비하던 중국 인민해방군 5명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진격해 마침내 서봉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 당시 한국군의 주력 기갑차량이었던 M36 "잭슨" 구축전차
90mm 주포를 이용해 T-34/85를 압도하는 위력을 보유했지만 구축전차의 한계로 인해 무개 포탑을 채용, 적 박격포탄이나 야포 파편으로 인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2소대원들은 점령과 동시에 즉각 교통호를 더욱 깊게 파는 한편 유무선 통신을 세밀하게 점검하는 등 방어축성에 돌입했다.
그리하여 7월 15일 19시 30분을 기해, 김만술 소위의 제2소대는 중국 인민해방군 1개 대대 병력의 야간 공격을 받았
다.
선봉에 선 중국 인민해방군 2개 중대는 박격포와 야포의 지원 포격을 받으며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 들어왔고 치열한 포격으로 통신이 두절되어버린 2소대는 수류탄과 소총으로 저지하다 종국에 가서는 치열한 백병전을 벌였다.
이에 김만술 소위는 즉시 전령을 후방으로 투입해 자신들의 위치는 개의치않고 진지 내부로 포격을 퍼부어줄 것을 요청했다.
이른바 "브로큰 애로우"( Broken Arrow )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러자 즉시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제1 보병사단의 M36 "잭슨" 구축전차들이 달려와 90mm 주포와 M2HB 중기관총탄을 서봉으로 퍼부었다.
순식간에 90mm 포탄과 12.7mm×99 탄막이 형성되자 중국 인민해방군은 그야말로 피떡이 되어 쓰러졌고 제1차 공격은 막대한 사상자만 낸 채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중국 인민해방
군은 즉시 증강된 1개 대대 병력 전체를 투입시켜 인해전술로 2소대를 강타했다.
이번에는 워낙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인해 도저히 백병전까지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김만술 소위는 즉시 전 소대원들에게 유개호로 대피할 것을 지시한 후 진지 내부 포격을 요청했다.
◀ 당시 워낙 치열한 베티 고지의 격전으로 인해 제1 보병사단은 기갑대대 외에도 연대가 동원할 수 있는 화력은 총동원해 김만술 소위의 소대를 지원했다.
M30 4.2" 박격포는 그 중 하나로 현재도 5,650문이라는 상당한 양이 운용되고 있으며 보병연대에 12문, 기계화 보병사단 및 기갑여단 예하 기계화 보병대대에 4문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자 제1 보병사단은 이번에는 M36 "잭슨" 구축전차 외에도 4.2인치 박격포와 105mm 곡사포까지 끌고 와 포격을 퍼부었고 이런 식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를 격퇴시킨 것이 무려 4차례나 되었다.
그야말로 사선을 넘나드는 대혈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거듭되는 제1 보병사단의 연계 작전에 격분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아예 포격 지원이 불가능하도록 제파 공격을 감행했고 13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무려 19차례나 진지를 탈취하고 탈환하는 격전이 반복되었다.
제2소대원들은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전우들과 일치단결해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소
총을 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며 종래에 가서는 개머리판과 철모, 야전삽 등 타격할 수 있는 장비란 장비는 전부 동원해 치열한 백병전까지 벌여가며 고지를 사수했다.
그렇게 치열한 격전이 이어진 후 7월 16일 동이 트자 가까스로 살아남은 김만술 소위 이하 12명의 잔존 2소대원들은 자욱한 포연과 화약냄새 속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시체들과 엉켜있는 전사자 23명의 시신을 잡고 절규했다.
그들 역시 고지를 사수해냈지만 그 대가로 20명이 넘는 전우들을 단 하루만에 잃었던 것이다.
아직 이름조차 다 외우지도 못했고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보기도 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전우들을 보자니 그야말로 목이 메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제1 보병사단은 예하 1 보병연대의 2개 대대 1,400명을 동원해 350명이 전사하는 등 약 964명에 달하는 사상자
를 내었다.
하지만 김만술 소위의 제2소대 역시 34명의 병력 중 23명이 전사했다.
◀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며 사수한 베티 고지를 휴전선 북방에 빼앗기는 통한을 뒤로한 채 오늘날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제1 보병사단 전차대대의 사격 훈련
7월 16일, 김만술 소위의 제2소대는 6중대 3소대 병력과 교대해 베티 고지를 내려왔고 7월 23일, 소대 생존자 중 이강로 하사에게 충무무공훈장이, 김순구 중사와 김흥규 중사는 각각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소대장인 김만술 소위는 1954년 2월 21일에야 서울 운동장에서 UN군 총사령관 테일러 대장으로부터 미국의회로부터 최고훈장인 십자훈장을 한국인 최초로 수여받고 9월 25일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김만술 소위는 대위로 전역했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2소대원들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가며 사수한 베티 고지는 휴전회담에서 휴전선 북쪽에 포함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맞이했다.
34명 중 23명의 희생을 치른 끝에 사수한 고지가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2009년 7월 15일은 이 베티 고지 전투를 치른지 57주년이 되는 해이며 바로 내일 실시되는 57주년 기념식에는 현재 해당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제28 보병사단 "태풍부대"와 제6 군단장 이홍기 중장 등이 참석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적비가 하필 베티 고지가 아닌 휴전선 남쪽에 세워진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1991년 63세로 운명을 달리한 김만술 대위의 한이 풀리지 않은 것도 참으로 측은한 일이라 하겠다.
P.S : 소위 계급은 전투 이후 진급한 것으로 원래는 상사였으나 전투 이후 작성된 것이라 소위로 통일했음을 밝혀둔다.
상사가 일선부대 소대장을 하던 시절이 한국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