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창조적 역량의 온축과 행사 - 건(乾)
이성이 침묵을 지키는 자리에서 신앙이 싹튼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 만물의 정점에 조물주(신)의 존재를 상정하면서 그에게 귀의하려 한다. 인류 유사 이래 각종의 신화와 종교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한 신앙이 비록 과학 이론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크게 괘념하지 않는다. 조물주는 삶의 온갖 비애와 번민과 고통을 풀어 주고 죽음의 공포까지도 이기게 해 줄 구원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의 신비 앞에서 고개 숙여 침묵을 지키던 이성이 여기에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한다. 이성은 조물주의 뜻을 읽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길을 만든다.
이러한 사고와 신앙 형태는 우리의 조상에게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인간과 세계 만물의 근원으로 신앙하면서 그것의 이치를 헤아려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그들이 신앙했던 ‘하늘과 땅’은 물론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시공간을 뜻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것은 무한하고 무변한 시공간을 열어 신비롭게도 만물의 성장쇠멸을 주관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로 여겨졌다.
우리의 고전에서 그러한 사고(신앙)를 최초로 보여주는 책이 바로 『주역』이다. 그 책에서 공자는 말한다. “천지는 만물을 생육하는 위대한 역량을 갖고 있다.[天地之大德曰生]”
이후의 저작인 『중용』 또한 말한다. “천지의 도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만물을 신묘하게 생성한다.” 주역이 <건(乾)> 괘와 <곤(坤)> 괘를 책의 제일 앞머리에 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건’은 하늘을 뜻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하늘의 속성을 지시한다. 그 속성이란 만물을 생육하는 창조적 역량을 뜻한다. 공자는 말한다. “건은 하늘로서 만물의 아버지요, 곤은 땅으로서 만물의 어머니다.[乾 天也 故稱乎父 坤 地也 故稱乎母]”(「설괘전(說卦傳)」)
물론 이 인용문이 암시하는 것처럼 만물의 생성은 하늘(건)의 힘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땅(곤)의 또 다른 역할을 필요로 한다.
<건>괘는 상괘(上卦)와 하괘(下卦)가 모두 ‘건’으로서, 여섯 개의 양효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음양론 상 ‘양(陽)’은 강력하고 남성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는 <건>괘가 그 핵심적인 의미를 창조적인 역량에 두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선비들은 창조 정신의 최고 정점에 있는 ‘하늘’에서 삶의 지혜를 배우려 했다. 중국 송나라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은 말한다. “하늘을 모르면 인간의 본질과 삶의 이치를 알 방법이 없다.”(『주역절중』)
<건>괘는 인간 세계에서 사람들이 창조 정신을 어떻게 발휘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 말한다. 이 괘는 그것을 ‘용(龍)’으로 은유한다.
다 아는 것처럼 용은 구름과 비를 몰고서 온갖 조화를 부리는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로서, 창조적인 역량의 대표적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건>괘에서 용이 (여섯 효(爻)의) 상황에 따라 변신하는 모습은 사람들이 배워야 할 지혜를 함축한다.
괘사卦辭
하늘은 원(元)하고 형(亨)하고 이(利)하고 정(貞)하다.
乾 元 亨 利 貞 (건 원 이 형 정)
자연의 생명 활동은 결코 무질서하지 않다. 그것은 일정한 전개 양상을 갖는다. 우리는 그 모습을 만물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열매를 맺고, 자신을 완성하는 현상에서 일상으로 목격한다.
<건>괘의 괘사에서 말하는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은 이러한 자연 현상에 주목하여 내린 결론이다. 즉 그것은 만물의 생성 변화상 시작과 성장과 결실과 완성의 과정에 작용하는 섭리의 각 국면을 범주화한 개념이다.
사물의 생장 쇠멸은 아무런 뜻도 없이 다만 우연히, 또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가 부여하는 의미와 방향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원, 형, 이, 정이라는 섭리의 연속적이고역동적인 전개 속에서 만물을 영원히 생성하고 변화시켜 나간다.
공자는 말한다. “자연의 섭리는 역동적이다. 만물은 그 섭리를 제각각의 형식(본성)으로 받아들여 실현하면서 자연의 위대한 조화에 참여한다. 자연은 만물을 이렇게 결실하고 완성한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 乃利貞]”(「단전」)
'원'은 자연의 원초적인 생명 정신, 또는 자연의 생명 정신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것은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그들의 생명 활동을 지배하며 이끌어 나가는 자연의 근원적인 정신이다.
한겨울의 혹심한 추위를 견디고 새싹을 틔우는 봄의 정신은 이의 시적인 영상이다. 공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찬탄한다.
“위대하구나. 하늘의 원(元)이여. 만물이 그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얻나니, 삼라만상의 생성 변화를 이끌어 가는 도다.[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단전」)
“지극하구나. 대지의 원(元)이여 만물이 그로부터 생명의 질료를 얻나니, 하늘에 부응하여 만물을 생장시키는 도다[至哉 坤元 萬物資生 乃順承天]”(「단전」)
군자는 이와 같은 자연의 생명 정신에서 생명적인 사랑을 배운다. 그는 만물에게 예외 없이 생명을 부여하고 길러주는 자연을 본받아, 인류를 자신의 품에 깊이 보듬어 안으면서 그들의 생명을 보살피고 키워주려 한다.
그가 만민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천지의 생명을 체득하여 만민의 어른이 된다.[君子 體仁 足以長人]”(「문언전」)
“성인은 만민 위에 우뚝 나서서 세계의 평화를 이룩한다.[首出庶物 萬國咸寜]”(「단전」) 이는 군자(선비)의 핵심 정신이 사랑에 있음을 시사한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가 사랑을 버린다면 어떻게 군자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君子去仁 惡乎成名](『논어』)
'형(亨)'은 생명 형통의 정신을 뜻한다. 이는 생명을 길러 꽃 피우는 정신이다. 모든 생명은 발아에 이어 성장의 단계를 갖는데, 이때 작용하는 정신이 바로 '형'이다.
한여름 초목 무성한 모습이 이의 구현태라 할 수 있다. 공자는 말한다. ”구름이 흐르고 비가 내려 만물이 제각각의 모습으로 생명 활동을 펼쳐 나가는구나.[雲行雨施 品物流形](「단전」)
역시 군자는 여기에서 개체들의 생명 활동을 이끌고 모두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자연의 생명 질서를 읽는다. 그는 거기에서 자타 간의 아름다운 어우러짐과, 더 나아가 아름다운 사회 통합을 꿈꾼다.
그는 그것이 생명의 질서 있는 교류 속에서만 가능함을 깨닫는다. 예의는 자타 간 교류해야 할 생명 질서를 도덕 규범화한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의 아름다운 만남은 예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嘉會 足以合禮](「문언전」)
'이(利)'는 생명 결실의 정신이다. 만물은 이 단계에서 각각의 본성에 따라 생명을 성숙하고 결실한다.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계절, 가을이 이의 영상이다.
생명 결실의 계절인 가을에, 군자는 역시 인간의 삶을 결실시켜 줄 정신을 상념 한다. 정의(의로움)가 바로 그것이다. 만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각자의 본분을 올바르게 성취하는 삶 속에서만 그들의 생명을 훌륭하게 결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분의 방기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부실하게, 쭉정이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 나아가서 사회를 알차게, 생명으로 충만하게 해 줄 참다운 힘은 바로 이러한 정신에서 나온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는 이타(利他)의 이념을 정의에 부합시켜 펼친다.[利物 足以和義](「문언전」)
'정(貞)'은 생명의 결실에 이은 완성의 정신이다. 이는 추운 겨울, 이른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는 생명의 의지를 함축하고 있다. 이 완성은 생명의 개별적 성취를 뜻하지 않는다.
무릇 하나의 생명은 자신의 개체적 본질을 다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 생명의 씨앗을 남겨 종족의 무궁한 보전에 기여한다.
계절을 들어 말하면, 만물은 한겨울의 혹심한 추위 속에서도 생명을 굳게 지켜 새로운 생명 활동을 준비하고, 다가올 봄의 새싹을 꿈꾼다.
모든 생명은 거기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생명의 연속적 전개 속에서 자신을 그처럼 '완성'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섭리에 내재된 '정(貞)'의 정신이다.
군자가 평생토록 실현하고자 했던 도덕 정신 또한 이러한 뜻을 갖고 있다. 그는 아무리 험난하고 혹독한 시절에도 변절하지 않고 밝은 도덕 정신을 굳게 지켜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려 한다.
『중용』은 말한다. “군자는 무도한 세상에서 죽는 순간까지도 정절(貞節)을 변치 않나니, 강하도다, 그 굳굳함이여![君子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
『주역』이 모든 괘효사(卦爻辭)에서 ‘정(貞)’의 정신을 강조한 것도 이러한 인식에서 나왔을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의 굳건한 생명 정신은 만사의 근간을 이룬다.[貞固 足以幹事]“(「문언전」)
이상으로 살핀 원, 형, 이, 정의 관념은 선비들의 존재감과 삶의 철학이 일단을 드러내 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존재(생명)를 생(生), 장(長), 쇠(衰), 멸(滅)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삶은 태어남에서 시작하여 자라고 늙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춘추좌씨전』은 ”죽어도 썩지 않는(死而不朽)“, 즉 영원한 삶의 세 가지 유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상은 덕을 확립하는데 있고, 그 다음은 공적을 이루는데 있으며, 그 다음은 정론을 세우는데 있다.[太上有立德 其次有立功 其次有立言]
괘상卦象
하늘의 운행은 역동적이다.
군자는 이를 보고서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키워간다.
天行健 君子 以 自疆不息 (천행건 군자 이 자강불식)
군자는 “절실히 묻고 가까이서 생각하는” ‘절문근사(切問近思)’(『논어』)의 정신으로 연비어약의 풍경에 임한다. 그는 그런 하찮은 순간에도 조차 자연의 섭리가 활발하게 작용함을 직관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서 준행하려 한다.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그는 어떤 사물 앞에서든 자신의 온 존재를 기울여 “절실히 묻고”, 삶의 현장 “가까이서 생각”하면서 자아의 향상을 도모한다.
군자가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하늘은 새들이 날고 구름이 떠다니는 텅 빈 공간에 불과하지 않다. 그는 거기에서 만물의 생장을 주재하는 창조적 역량을, 구체적으로는 元, 亨, 利, 貞의 섭리를 읽는다.
우리의 일상적인 눈빛에는 만물이 아무런 뜻도 없이 제멋대로 생장 쇠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군자는 그 이면에 작용하는 하늘의 역동적인 생성 섭리를 직관하는 것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찬탄한다. “위대하구나, 하늘이여. 세계의 한 중심에서 창조적이고 역동적인 힘으로 만물을 바르고 진실되게 생성시켜 나가는구나![大哉 乾乎 剛健中正 純粹精也]”
그리하여 하늘(과 땅), 즉 자연을 자신의 존재 근원이요 삶의 요람으로 여기는 군자는 거기에서 역동적인 생명 창조의 정신을 본받으려 한다. 그는 삶에서 “자신의 힘을 끊임없이 키워 나가는” 자강불식(自彊不息)의 노력을 다한다.
『중용』은 군자의 그와 같은 정신을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대지와도 간이) 넓고 두터운 정신은 만민을 부양해 주고, (하늘과도 같이) 높고 밝은 정신은 만민을 감싸 안아 주고, (천지와도 같이) 무궁한 정신은 만민을 성취시켜 준다.”
효사爻辭
初九
물속에 잠겨있는 용이다.
아직 나서서는 안 된다.
潛龍 勿用 (잠룡 물룡)
'건'은 원래 용의 상징을 갖고 있다. 하늘의 섭리 작용의 신묘불측함이 용의 신령스러운 모습과 비슷하게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건>괘 대부분의 효가 용의 활동을 말하고 있다. 초구<初九>는 양효로서 괘의 제일 아래 위치하므로,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물속에 잠겨 있는 용"과도 같다.
공자는 말한다. “ ‘물속에 잠겨 있는 용이므로 아직 나서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은 양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潛龍 勿用 陽在下也 ]“(「상전」) 이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남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은유한다.
공자는 “물속에 잠겨있는 용”과도 같은 사람을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용과도 같은 역량을 갖고 있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숨어사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에 영합하려 하지 않고, 굳이 이름을 내서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세상을 피해 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만을 갖지 않으며,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다 해서 서운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고 우환을 자초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흔들림 없이 오직 진리와 도의만을 지키며 산다. 이것이 “물속에 잠겨있는 용”의 저력이다. [龍德而隱者也 不易乎世 不成乎名 遯世無悶 不見 是而無悶 樂則行之 憂則違之 確乎其不可拔 潛龍也](「문언전」)
九二
용이 들판에 출현했다.
현자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見龍在田 利見大人 (견룡재전 이견대인)
구이는 하괘의 가운데(중심)에 있으므로, 초구와 달리 “들판에 출현한” 용과도 같다. 이는 그가 드디어 무언가 활동을 시작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구름을 모아 비를 뿌려 주는 일이다.
공자는 말한다. “용이 들판에 출현했으니, 초목들이 널리 그의 덕택을 입으리라.[見龍在田 德施普也]”(「상전」) “용이 들판에 출현했으니, 사람들이 문명의 혜택을 입으리라.[見龍在田 天下文明]”(「문언전」)
다만 아직 하괘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그의 영향력은 한계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현자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고 충고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현자’란 괘효상으로는 구오를 가리킨다.
공자는 현자를 다음과 같이 칭송한다. "용과도 같은 덕을 올바로, 과불급 없게 실행하는 사람이다. 평소 그는 말을 신의 있게 하고, 행동을 사려 깊게 하며, 부정한 기운과 삿된 생각을 막아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세상에 나서 옳은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으며, 진리와 도의를 널리 행하여 사람들을 감화시킨다.[龍德而正中者也 庸言之信 閑邪存其誠 善世而不伐 德博而化]"(「문언전」)
군자는 학문을 통해 진리를 쌓아 나가고 사리분별의 정신을 키우며, 관용의 마음으로 삶에 처하고,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에 나선다.[君子 學以聚之 問以辯之 仁以行之](「문언전」)
九三
군자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저녁에까지 행동거지를 조심한다.
위태롭기는 하지만 허물거리가 없으리라.
君子 終日乾乾 夕煬若 厲 无咎 (군자 종일건건 석척약 여 무구)
구삼은 하괘의 제일 위에 있는 효다. 용으로 비유하면 그는 들판을 벗어나 위로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은 하늘까지 올라가 비구름을 얻지 못했다. 한편 하괘의 제일 위에서 양효로서 양의 자리에 올바로 있음은 그의 탁월한 역량이 드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크게 받음을 상징한다.
다만 그는 (구이처럼) 중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자칫 오만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그렇지 않아도 그를 질시하는 경쟁자들의 비판 거리가 되어 ‘위태로움’과 ‘허물’을 면하기가 어렵다. 그가 “종일토록 부지런히 노력하고, 저녁에까지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공자는 말한다. "구삼은 지나치게 강하여 중도를 얻지 못했다. 또 위로는 하늘에 있지도 못하고아래로 들판에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노력하면서 저녁에까지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면, 위태롭기는 하지만 허물거리가 없을 것이다.[九三 重剛而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 故乾乾 因其時而惕 雖危 無咎矣]"(「문언전」)
공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는 진리를 안으로 쌓고, 사회적 실천에 힘쓴다. 성의를 다하여 진리를 쌓고, 올바른 언행과 정성을 기울여 진리를 사회에 실천한다. 진리의 축적을 통해 세상사의 이치를 통찰하고, 진리의 실천을 통해 사회를 완성한다. 진리를 안으로 쌓고 체득하여 매사를 앞질러 헤아리고, 진리를 실천하고 사회에 밝혀 정의를 확립한다. 그는 높은 지위를 갖고 있어도 남들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지위가 낮다 하여 걱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종일토록 노력하면서 저녁에까지 행동거지를 조심한다면, 위태롭기는 하지만 허물거리가 없을 것이다.[君子 進德脩業 忠信 所以進德也 脩辭立其誠 所以居業也 知至至之 可與幾也 知終終之 可與存義也 是故居上位而不驕 在下位而不憂 故乾乾 因其時而惕 雖危 無咎矣]"(「문언전」)
九四
용이 연못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잠복하기도 한다.
허물거리가 없으리라.
或躍在淵 无咎 (혹약재연 무구)
九四는 하괘(下卦)를 벗어나 상괘(上卦)에 진입했지만 아직은 상괘의 제일 아래 위치한다. 이는 용이 (하괘의 땅을 벗어나) 하늘에 오르기는 했지만 완전한 힘을 아직 얻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구사는 양효임에도 음의 자리에 잘못 있다. 그래서 “용이 연못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잠복하기도 한다.” 이는 용이 변신의 시기에 신중하게 처신함을 암시한다.
공자는 말한다. “용이 연못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잠복하기도 하니, 이제 하늘의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或躍在淵 乾道乃革]”(「문언전」) “용이 연못 위로 뛰어오르기도 하고 잠복하기도 하니,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或躍在淵 自試也]”(「문언전」)
군자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역량을 본격적으로 시험해 볼 때가 다가온다. 그야말로 포부와 이념을 실현하여 삶의 도약을 꾀해 볼 시기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상황을 예의 주시하면서 진퇴 여부를 사려 깊게 판단해야 한다.
만약 사람들한테서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얻고 있다면 ‘뛰어오르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 ‘잠복하여’ 신중하게 때를 기다려야 한다. 권력이나 명예 등에 눈이 어두워져서 상황 판단을 그르치면 ‘허물거리’를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공자는 말한다. 구사가 강한 힘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중심의 자리를 얻지 못했다. 위로는 하늘에 있지도 못하고, 아래로는 들판에 있지도 않으며, 하늘과 땅 사이의 사람들 가운데에도 있지 않다. 그래서 “용이 뛰어오르기도 하고 연못에 잠복하기도 한다.”고 했다. 이는 회의적인 상황을 말한 것이다.[重剛而不中 上不在天 下不在田 中不在人 故或之 或之者 疑之也]“(「문언전」)
九五
용이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현자를 찾아보는 것이 좋다.
飛龍在天 利見大人 (비룡재천 이견대인)
대부분의 괘에서 구오는 이상적인 자리다. 원래 괘의 초효(初爻)와 이효(二爻)는 땅을, 삼효와 사효는 사람을, 오효와 육효는 하늘을 상징하는데, <건>괘의 구오는 상괘의 가운데 있으므로 하늘의 한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용으로 말하면 “하늘 위로 날아올라” 지상에 비를 뿌려 만물을 촉촉이 적실 시점이며, 사람으로는 성인의 자리다.
공자는 말한다. “용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음은 성인이 출현했음을 뜻한다.[飛龍在天 大人造也]”(「상전」) “용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니, 널리 생성의 사업을 펼칠 높은 자리에 올랐구나.[飛龍在天 乃位乎天德]”(「문언전」) 다만 자신이 그러한 ‘용’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현자’의 보좌를 받을 필요가 있다. 아무리 성인이라 하더라도 전지전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군자가 마침내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마음껏 펼칠 최고의 자리를 얻었다. 마치 구름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 요술을 부리는 용처럼, 그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호령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자리를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적인 역량을 가진 사람만이 그 자격을 갖는다. 역사가 잘 말해 주는 것처럼 권모술수로 자리를 취하는 용렬한 지도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결국 패망의 삶을 면치 못한다.
공자는 ‘용’과도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뭇사람들의 호응을 얻는 모습을 삼라만상의 이치로 여겨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한다.
"같은 소리끼리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서로 찾는 법이다. 물은 습한데로 흐르고, 불은 건조한 곳으로 번지며, 승천하는 용을 뒤따라 구름이 일어나고, 호랑이의 포효에 온 골짜기가 바람에 흔들린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출현에 만민이 우러러본다. 양기를 많이 타고난 동물은 머리를 (양기의 원천인) 하늘로 향하고 음기를 많이 타고난 식물은 뿌리를 (음기의 원천인) 땅에 내리는 것처럼, 만물은 동류끼리 공감 상통하면서 서로 따르는 법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 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 而萬物睹 本乎天者 親下 則各從其類也]"(「문언전」)
上九
용이 너무 높이 날아올랐다.
후회할 일이 생기리라.
亢龍 有悔 (항룡 유회)
상구는 구오를 지나 육효의 끝자리에 놓여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자다. 용으로 말하면 “하늘 위로 날아오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제 힘을 우주 밖으로까지 뻗치려는 오만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러한 용은 결국 구름을 일으킬 수 없어서 만물에게 비를 뿌려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용이라 해도 언젠가는 힘이 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용이 너무 높이 올라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니, 아무리 강성한 힘도 오래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亢龍有悔 盈不可久也]”(「싱전」) “용이 너무 높이 올라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니, 그 힘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亢龍有悔 窮之災也]“(「문언전」)
지도자의 자리는 사람을 달라지게 만든다. 그는 일단 자리에 오르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권력)을 최대한 행사하면서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처리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를 견제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멀리하고, 자기에게 충성하는 ‘예스맨’만 가까이 두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후회)을 자초하는 길이다. 그의 오만과 독선은 조직을 원활하게 이끌어 가지 못해 결국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한다. ”최고의 자리에 올라 자신의 직무를 올바르게 수행하지 않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아래의 현자들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서 후화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貴而無位 高而無民 賢人在下位而無輔 是而動而有悔也]”(「문언전」)
지도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또 하나 있다. 그는 자신의 힘과 자리에 도취된 나머지 어떻게든 그것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지상으로 내려올 줄 모르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기만 하려는 용이 이를 은유한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이치를 거부하면서 힘과 자리를 고집하는 모습은 추하기 그지없다. 힘과 자리를 끝까지 추구하지 말고 적절한 때에 물러나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용이 너무 높이 날아오른다.”는 말은 나아갈 줄만 알았지 물러날 줄은 모르고, 편안할 줄만 알았지 위태로운 줄은 모르며, 얻을 줄만 알았지 잃을 줄은 모른다는 뜻이다. 성인(聖人)은 어떠한가. 나아가면서도 물러날 줄 알고, 편안한 가운데에서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아 매사에 올바른 도리로 나서니, 성인만이 그러할 수 있다.[亢之爲言也 知進而不知退 知存而不知亡 知得而不知喪 其唯聖人乎 知進退存亡 而不失其正者 其唯聖人乎](「문언전」)
用九
용들이 머리를 감추고 있다.
보람을 얻으리라.
見群龍无首 吉 (견군룡무수 길)
<건>패와 <곤>패에서만 ‘용구’와 ‘용육’의 언급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건>, <곤> 각각의 여섯 효뿐만 아니라, 사실 나머지 패들의 모든 양효(九)와 음효(六)에 적용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용구’는 양효를 ‘용’으로 은유하면서 그것이 상징하는 강건한 성품의 자기 관리 방법을 말하고 있다.
뛰어난 역량이나 강건한 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은 흔히 어떤 일에서나 남들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강성과 지배 의식은 사람들에게 압박감이나 두려움, 또는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은 마치 시람들이 용의 머리 앞에서 갖는 공포와도 같다. 인간관계의 파탄과 일의 실패가 여기에서 초래된다. 그러므로 공자는 말한다. “강건한 정신은 우두머리 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天德不可爲首也]”(「상전」)
남들 앞에서 자신의 강한 힘이나 역량을 과시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는 “너무 높이 날아오르는” 항룡(亢龍)의 후회를 초래할 것이다.
그는 우두머리 의식을 갖지 말고 자신을 낮춰 사람들에게 부드럽게 다가가야 한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만물에게 비를 뿌려 주는 ‘용’과도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공자는 말한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나서면 천하까지 다스릴 수 있다.[乾元用九 天下治也]”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힘의 작용에서 하늘의 이치를 알 수 있다.[乾元用九 乃見天則]“(「문언전」) [周易 上 김기현 著 민음사 P.30-P.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