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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토라 스쿨 3강
3강
창1-2장은 사실 창세기라기 보단, 성경 전체의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담아논 장이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창세기는 3장부터 시작한다. 1-2장만 제대로 알아도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이루실지 다 알 수 있다. 어떡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아 그 기업을 이을수 있는지가 나와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 공부했다. 나머지 창세기 공부를 안하고 출애굽기로 넘어온 것은 오늘날의 시급성 때문인것 같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구원을 이야기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얻은 구원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그러면 그 구원이 도데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고 이루어가는 것이 도저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그림이 명확하지 않아 매우 힘든 상황가운데 있다. 그 구원에 대한 가장 정확한 그림을 가지고 있는 것을 출애굽기라고 한다.
창세기에는 사실상 구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출애굽기를 공부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깊게 볼 수 있다. 출애굽기에는 총 10개의 토라포션이 존재한다. 다음 남은 4주 동안 이 나머지 토라포션을 다 공부할 것이다.
* 토라포션 :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굉장히 오래된 성경읽기 방법.
- 주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성경을 읽으셨다... 등은 다 토라포션을 읽은 것이다. 토라포션은 모세오경을 일 년에 한 번 읽게 되어있는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우리는 한 주, 한 주가 그냥 별 의미가 없이 진행되는 것 같지만, 사실 한 주, 한 주에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무의미하게 똑같은 시간으로 두시지 않으셨다. 흔히 카이로스의 시간이라는 것인데, 어떤 시간도 똑같은 시간은 없다. 하나님에게 있어 시간은 반드시 무엇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왜 필요한가? 시간은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 시간이 없으면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다. 어떤 것을 시작하고, 과정을 겪어서, 완성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 시간이다. 무언가가 시작되었으니까 시간이 존재한다.
- In the beginning(태초에) :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완성될 것이다. 시간은 완성되고 나면 어떻할까? 완성 되었는데도 시간이 필요한가?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이 길게 늘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생의 개념이 길게 살아진다라고 생각한다. 완성이 되면 영원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내 개념을 초월하는 어떤 곳으로 들어간다.
* 첫째 영원 -> In the beginning -> 둘째 영원
- 이 두 영원 사이에서 한 것이 토라의 신비이다. 이 중간에 도저히 무엇을 하시는가? 이 시간의 하나님이 무엇을 시작하셨고 무엇을 완성하셨는가?
우리의 인생에서 중요한 질문이 What이 있고, Why가 있다.
- What : 뭘 먹고 사냐? 어디 사냐? 우리는 주로 이 What의 개념으로 산다.
Ex ) 애플과 삼성의 차이점을 분석한 사람이 있다. 삼성은 What을 잘 만든다고 한다. 그런데 애플은 Why를 잘 만든다. 우리가 이것을 왜 만드는가? 너희의 편리함, 성취를 위해서이다. Why속에서 무엇을 만들고, 삼성은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고 What에서 만든다. 그래서 애플은 Why라는 가치때문에 매니아 층이 많다. What에 좀 문제가 생겨도 괜찮다. Why가 있으니까다.
성경은 What보다 Why를 중요시 여긴다. What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뭐가 더 중요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이 Why에 관한 질문이다. 시간은 Why에 관한 질문이다. 너는 도데체 왜, 무엇을 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은 시간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날 때 시간의 하나님을 만난다고 한다. 하나님이 무엇을 주었고,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보다도 하나님의 이유, 목적의 부분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토라, 하나님의 말씀은 다 이것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모든 날들이 달력에서 보면 7일밖에 없다.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밖에 없다. 모든 날들은 여기에 다 속해있다. 그리고 첫째 날 부터 일곱째 날을 한 주라고 한다.
שָׁבוּע 샤부아 : 한 주, 이것은 7이란 뜻이다.
- 일곱개의 날들이란 뜻이다(= Week )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이 칠칠절 이시다. 이것은 Weeks, 한 주, 두 주 할 때의 주의 날이다. 칠칠절은 7주가 지났다는 것이다. 성령님이 왜 칠칠절에 오시냐? 유대인들이 절기를 중요시 여기냐면, 절기 속에서 시간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열린다.
우리는 별로 절기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이방인들은 절기보다 뭐가 오느냐가 중요하다. 오는 것만 오면 끝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기를 중요시 여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계속 절기를 이야기하신다. 절기를 회복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회복하면 뭐가 왕창 오는 줄 안다. 아무것도 안 온다. 유월절을 한 번 지키면 뭔가 와구와구 올 것 같다. 아무것도 안온다. 쓴 나물만 먹는다.
그런데 주님은 영적 여정 가운데 중요한 것을 깨닫고 나면 또 절기 티칭을 하신다. 이번 주에도 금송아지, 인류가 짓는 가장 최고의 죄이다. 그것을 다 처리하면 또 절기 티칭이다. 이게 하나님이다.
싯딤 광야(사탄광야)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음행해서 다 죽을뻔한다. 비느하스가 이때 시므리(지므리)와 고스비(미디안 여인)를 꼬챙이로 꿰어 죽였다.
זִמְרִי 지므리 : 시므리, 나(י)를 찬양(זָמַר)하는 것, 내 자아가 나를 향하는 것,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하는 것.
- 그것 때문에 다 죽을뻔 한다. 주님은 이것을 비느하스 때문에 다 살리신 후 또 절기 티칭을 하신다.
안식일 이야기, 맨날 또 이야기하신다. 성전 반 세겔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면서 또 안식일 이야기하신다. 왜 그것을 이야기하냐면, 하나님은 우리가 Why, 도데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 하나님의 이유와 목적이 뭐냐는 것을 아는 자는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기업을 유업으로 얻는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아들이나 무엇을 받으려고 한다.
נָחַל 낰할 : 기업
기업이라는 것은 Life, 생명(ח)이 있다. 삶을 훈련(ל)하는 것이 기업이다. 이것은 뭔가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을 훈련하는 것이 기업이다. 아버지의 생명을 훈련하는 것은 그분의 의도, 목적이 뭐냐는 것에 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시간의 구성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배우게끔 되어있다. 성령님도 왜 일곱의 날, 칠칠절에 오셨는가? 성령님이 뭘 시작하고 완성하느냐를 설명하기 위해 성령님이 오신다.
שָׁבוּע 샤부아, 그래서 모든 샤부아에는 이름이 있다. 모든 샤부아는 그냥 진행되지 않는다.
토라는 In the beginning이다. 창세기가 시작되었으면 그 중간은 반드시 다 과정이고, 마지막에 완성이 온다라는 것이다. 토라는 그냥 하나의 책이 아니라, 시작을 해서 완성까지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일 년이라는 기간을 שָׁנָה 샤나라고 한다. 일 년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샤나는 다 Transformation이다. 1년 단위로 인간은 계속 바뀐다.
Ex ) 학년을 일 년 단위로 넘어가는 이유가(1,2,3학년), 일 년 단위로 인간은 Transformation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 일 년 동안 이 시기에는 무엇이 진행되고, 이 시기에는 무엇이 진행되는 것들을 토라포션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인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되야 하는지 계획되었다. 우리는 일 년 계획을 우리가 세운다. 그러나 일 년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작했다면, 우리를 어떻게 완성하실지는 이미 하나님에게 계획이 있으시다. 그러면 일 년마다 Transformation되야하면, 일 년 계획은 하나님이 세우셨다.
내가 원하는 너희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것을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토라를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일찍부터 이것을 알았기에 일 년의 시간들을 절대 그냥 보내지 않고, 일 년의 시간을 하나님의 타임 스케줄대로, 하나님이 원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살았다.
이번 주간에는 금송아지 사건이다.
Ex ) 금송아지를 처리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또 발견한다.
하나님이 이것을 진행하면서 이 일 년, 해를 만들었다. 이것을 넷째 날에 만드신다. 넷째 날에 광명체를 만들어서 이 광명체를 통해 징조와 계절(모에드)과 날과 년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 해라는 것을 넷째 날에 만드신다. 광명체, 크고 작은 광명체는 사랑과 진리이다. 주님이 사랑과 진리로 하는것을 넷째 날 만드신다.
מוֹעֵד 모에드 : 계절, "절기"인데, 이것은 다 때가 있다. 하나님이 때를 만들었다. 날을 만들었다는 그것이다.
אוֹת 오트 : 징조, 알렢(א)과 타브(ת), 시작과 완성. 무엇을 시작하고 완성하는 지이다.
절기는 때를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절기 말씀을 계속 하시는데 아직 눈치를 못 챈다. 때는 너무너무 중요하다.
cf ) 오늘날엔 사실 농경 사회를 잃어버리면서 사람들이 혼동스럽고 교만해졌다. 농경사회 때 왜 하나님을 섬기기 쉬웠냐면, 때를 모르면 농사를 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열매맺고 하나님의 완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때를 알아야한다. 아무 때나 씨를 뿌리면 안 된다.
- 그래서 우리가 흔히 철없다라고 하는 것이, 꼭 씨 뿌릴 때 자기 추수한다고 낫들고 나타나는 것이다. 추수할 때 씨 뿌린다고 나타나는 아들이다.
씨 뿌릴 때를 지나면 뿌리고 싶어도 못 뿌리는 것이다. 씨 뿌릴 때는 하나님이 정해놨다. 다 하나님의 Plan과 때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하나님이 절기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너희가 철이 없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딱 바꾸면, 토라포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된다.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 그리스도의 형상과 모양을 닮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면, 이것이 반드시 질서를 가지고 때를 맞춰서 훈련을 받아야지, 아무때나 내가 원하는때 Feel 받으면 왕창 훈련시켜주시고 아니면 안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0-30년동안 많이 훈련해봤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 뽑고 다 해봤다.
사람도 훈련받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냥 날들이 아니다. 한 주에도 첫째 날에 하는게 있고, 둘째 날, 셋째 날에 하는 것이 있다. 봄 철에, 가을 철에 하는게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나눠놓은 것을 토라포션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주가 다 이름이 있다.
사람이 어떻게 훈련받아야 하는지 그 단계별로 토라가 나눠져 있는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이다. 뭔가를 가르쳐본 사람은 안다. 아무때나 눈에 좋아보이는거 끌어다가 이것저것 하겠다고 하면 절대 못 배운다. 겉멋만 든다. 영성이라는 것이 도저히 발달할 수가 없다.
이 토라 자체는 사람이 어떻게 훈련되고 변화되어지는 하나님의 코드가 다 적혀있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코드를 해석하지 못하는데가 문제다. 그래서 그것을 배우는 것이다.
토라포션 읽기는 이와 같이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은 그냥 주(Week)로 살게 되어있다. 주의 사이클, 7의 사이클로 살게 되어있다. 한 주가 모여서 달이 되고, 달이 모여서 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주, 일 년에 있는 54개의 토라포션은 철저하게 구조와 단계를 이루고 있고, 그것을 통해서 완성을 향해서 나가게 되어있다.
שְׁמוֹת 쉐모트 : 출애굽기
쉐모트는 우리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이스라엘 자손의 애굽 땅에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새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한다. 특히, 이스라엘의 남자 아이를 다 죽이기 시작한다. 그 때, 모세가 태어나서 모세가 여자들의 도움(산파, 미리암, 엄마의 용기, 바로의 딸)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그가 히브리인을 돌보려고 하다가 애굽인을 쳐 죽인다. 그게 알려지면서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서 십보라를 만난다. 그리고 그녀와 결혼하고 장인의 양 떼를 친다. 양 떼를 몰아 호렙 산으로 갔다가, 광야 뒤편에서 떨기나무의 꺼지지 않는 불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사자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친히 만난다. 거기서 신을 벗고 미션을 받는다. 그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야훼라고 당신을 알리신다.
거기서 모세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라고 한다. 내 백성을 네가 이끌어내라. 그랬더니 모세가 말도 안된다고 한다.
주님의 많은 역사는 우리가 도망치기 원하는 그곳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모세 심정이 확 느껴진다. 그 때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주님이 제시하신다.
- 방법 : 지팡이 <-> 뱀 / 나병 걸린 손의 회복 / 나일 강 물이 피로 변하는 기적
모세는 그런 돌아가는 길을 택하게 된다. 가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구속하시겠다고 바로에게 이야기했더니, 바로가 더 핍박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때 모세에게 항의한다. 그래서 모세도 하나님에게 가서 항의한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진짜 모습과 계획이 드러난다. 이것이 전체 쉐모트의 개관이다.
출1:1 야곱과 함께 각각 자기 가족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הַבָאִים 하바임 : 애굽에 이르다, 애굽에 왔다가 아니라, Coming이라는 현재형을 쓰고 있다.
- 사람이 왜 애굽에 Coming하는 일이 발생되는가?
사람의 영혼 자체는 완전한 자유와 행복이 있다. 그런데, 사람의 영혼이 육체 속으로 들어오면 제한을 받는다. 우리는 지금 완전히 자유한가? 뭔가 제한과 한계를 느낀다. 뭔가 힘들다. 뭔가 해보려고 하면 피곤하다. 피곤없이 24시간 토라공부만 하면 너무 좋을거 같은데, 왜 자야하고, 자고나도 또 피곤한가? 다 육체 때문이다. 내 영혼은 피곤을 느끼지 않고 완전히 자유하다.
그런데, 이 영혼이 육체를 입은 것이다. 영혼이 육체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 출애굽기의 시작이다.
[ 육체 -- (영혼) -- ]
왜 출애굽기를 통해 구원을 배우게 되냐먄, 사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들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니고데모가 한 밤 중에 주님을 찾아온다. 한 밤 중에 주님을 찾아왔다라는 것은 니고데모의 상태가 어둡다는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은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다.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냐고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니고데모를 꿰뚫어보신 것이다.
니고데모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어디가서 물어볼수도 없다. 교회를 너무 오래 다녔다.
- "사실, 내가 하나님 나라가 안 보여, 하나님을 모르겠어.."라고 어디 가서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는 수 밖에 없었는데, 예수님은 위로부터 태어나야한다. 물과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면서 니고데모를 혼내킨다.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님이면서도 이것을 모르냐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사람이 이것을 모르면 내 이스라엘은 어떡하느냐?
사람은 다 영으로 나야만 한다. 영으로 태어나는 것을 통해서 사람은 자유, 행복, 그것을 통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영이 태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출애굽기는 잉태의 과정이다. 육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 육체 때문에 제한되고 한정을 받는것 같지만 영이 태어나기 위한 것이 육체이다. 영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자유하다. 그런데 그것이 내 것이 되기 위해서는 육체에 들어와서 다시 태어나야한다.
Ex ) 하나님에게 가서 잘 살거면, 왜 여기서 태어나서 살다 가야하냐? 이런거 없이 당신과 같이 살면 좋지 않냐라는 질문을 해본적이 있다. 그래서 태어났다고 치는데, 다시 태어나면 빨리 데려가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엉뚱한 생각을 품고있는지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창세기) : 개인의 부르심
그러면 이스라엘이 태어난다. 창세기의 전체 과정은 내 속에 이스라엘이 생겨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결국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을 완성하는 것은 이삭이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완성한 것을 한 그릇에 담는것이 야곱이다.
토라에서는 3의 원리가 계속 나온다. 모든 시작과 과정과 완성의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뿌리와 가지와 열매. 그래서 이 야곱이 결국은 이스라엘이 된다. 한 개인, 사람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으면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굉장히 자유하다. 건드릴 자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한다.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다. 주님은 또 이스라엘로 오신다. (주님이 한국으로 왔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다. 유타주, 메카로 온 것은 다 거짓말이다). 이 이스라엘로 주님이 초림하신 이유가 뭐냐? 다시 태어나야한다. 이스라엘이 되었을지라도 이 이스라엘은 다 애굽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출애굽기라는 것은 창세기, 아브라함이 없이는 안 된다. 모든 이스라엘은 다 애굽으로 들어간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는 단계이다. 그때는 이스라엘의 영혼이 태어나는데 애굽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애굽으로 들어가면 거기서 이 영혼을 태어나게 하고 해산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완전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출애굽기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모든 아들들이 애굽으로 들어갔다고 하며 시작한다.
이 영원의 상태는 고통스럽다. 애굽에서 새 왕이 나타나서 고통스럽다.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 말이다.
실질적으로 우리의 구속과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의 영혼은 이스라엘인데, 자아라는 존재가 이스라엘을 자꾸 핍박한다. 이게 고통스러운 것이다. 내가 어떤 것을 교정하고 새롭게 하려고 해도 이 자아가 영혼을 자꾸 누르고 핍박한다.
- 육체 : 자아
- 영혼 : 이스라엘
그래서 나의 자아에서 탈출하는 것,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가장 큰 핵심이다. 하나님의 구속과 구원의 가장 큰 핵심이다. 우리의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혼을 자꾸 억누르고 핍박한다. 그래서 벽돌을 쌓는다고 한다.
벽돌 : 악과 거짓으로 바벨탑을 쌓는 것. 이스라엘 백성에게 악과 거짓을 받아들이게 한다.
- 이게 출애굽기의 시작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모세가 출현한다. 사실 인간은 자아에서 나간다는 생각을 품을 수가 없다. 원래 육체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아에서 나간다는 생각을 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육체를 생명이라고 생각하고, 이게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그래서 여기서 인간은 모든 육적인 개념을 발달시킨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산다. 인간이 사는 모든 목적은 죽지 않으려고 산다. 그래서 이 자아라는 것, 우리가 보통 옛 자아라고 하는 것은 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목적을 갖는다.
Ex )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금강산 구경하다가 굶어죽으면 뭔 소용있냐? 그것처럼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것이 옛 자아의 가장 큰 목적이다. 나를 살리는 것이 목적이기에 자아라고 한다.
내가 죽으면 다 끝장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이라고 하는 것의 특징은 나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영은 곧 의지를 만들어내는데, 이 의지는 사랑의 삶을 산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영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의지를 만들어 낸다.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이게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돌아오지 않고 준다는 것은 비즈니스맨에겐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이게 결국 자아라는 놈은 이스라엘을 핍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요셉 때문에 돈 좀 벌었다. 보디발도, 바로도 돈을 벌었는데, 이제 더이상 안 되겠다는 것이다. 너 계속 있다가는 날 죽이겠다는 소리이다.
그래서 인간이 어느정도 신앙생활을 하면 이 신앙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주고 이러니까 삶이 굉장히 달라진다. 그러나 어느 때가 오면 분명 바로의 번영신학이 오게 되어있다.
- 하나님의 자녀면 너도 누려야지...?
니가 먼저 살고 누려야된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네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며 피라미드를 만든다. 그리고 반드시 이스라엘은 찌그러져 있어야한다. 이게 더 출현했다가는 내가 죽는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이면 하나님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한다. 그런데 자아는 이 영을 용납할 수가 없다. 토라스쿨에 출애굽기를 택한 이유는, 오늘날의 우리는 육으로 난 육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야기하는것은 이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나는 출애굽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육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육체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육체는 애초에 이스라엘을 인정할 수가 없다. 육체는 태어나면서 부터 죽음을 전제로 해서 모든 개념을 발달시킨다.
Ex ) 불 속에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가 죽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 속에서 단련시킨다. 나는 소멸하는 불이다. 죽음을 전제로해서다. 질병은 나쁜 것이다.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른다. 진리를 훈련하는 삶을 질병이라고 한다, מֲחַלָה 마할라. 진리(מ)를 훈련(ל)을 하지 않으니까 질병이 오는 것이다. 그 훈련을 안 받으니까 훈련을 받고나면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 뭐가 좋다 안 좋다라고 한다. 이게 선악과이다. 어릴 때부터 죽음을 전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주면 악이고 아니면 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도 나에게 분명 선을 줘야한다. 그 선은 내가 결정한다. 그럼 내가 하나님이다. 이게 금송아지이다.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맘에 안들면 훼까닥 바뀐다. 그런데도 어쩔수가 없다. 하나뿐인 생명이니까 이거 죽으면 큰일난다는 것이다. 이게 절대적이다.
Ex ) 친구 : 나 죽지 않도록 지켜주는 자들.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들이 훼까닥 하면 자주 바꿔줘야한다. 이게 절대적이다. 사망이 왕 노릇한다. 이 생각을 가지고선 토라를 읽어도 다 나 살려고 이다. 주님도 나 살려주는 자이다. 구원자란 나 안 죽고 영원히 오래살게 하는 것이다. 나 지옥가면 죽으니까 안 된다. 그러니까 안 죽는대로 간다. 그러고선 구원받았다고 한다. 이게 아니다.
이게 출애굽기를 선택한 이유다. 이 망상에서 벗어나야한다. 그런데, 죽음을 전제로 한 생각, 모든 단어가 죽음을 전제로 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야기를 하기만 하면 죽음을 전제로 한 개념으로 알아듣는다.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애굽은 더 공고해진다. 이게 안 통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떡해야할까? 이게 기가막힌 것이다.
하나님은 이 속에 이스라엘을 집어넣으신다. 이것을 한 분을 요셉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을 집어넣고 모세라는 인물을 등장시킨다. 모세는 여기서 나가겠다고 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 모세 : 죽는다? 좋다. 그래도 나가자. 죽음을 전제로해서 살 수 없다. 죽음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것이 인생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는가?
죽음을 전제로 해서 태어난 것이 인생이라면, 무슨 삶이 죽음을 전제로 해서 사는가? 그게 무슨 삶인가? 애초에 삶은 죽음이 있으면 안 된다. 죽음이 있으면 삶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죽음이 있는 삶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우리 삶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이 모세를 출현시키는데, 모세는 여기서 나가자고 한다. 이 때 하나님이 기억이 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니까. 그래서 여기서 나가자고 하는 용기가 모세이다. 그가 출현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는 모세의 토라를 기억하라고 한다. 이게 마지막 땐 모세의 토라가 가득하다. 모세가 여기서 나가자고 하는 용기를 가진다.
우리 속의 모세는 갈대상자에 담긴다. 그 갈대상자를 תֵבָה 테바라고 한다. 아 말은 ת와 ב, 토후 바 보후(혼돈과 공허)에서 나왔다. 이 말은 나중에 노아의 방주라는 말도 된다.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것이 비로소 출애굽기인데, 그 전제조건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라는 것이다. 깊은 곳에 어둠이 있다. 이게 니고데모의 모습이다.
혼돈하고 공허하다.
혼돈 תֺהוּ 토후 : 목적(ת) 을 모르는 것. ת를 볼 수가 없는 상태이다.
- 내 삶은 어디로 가고,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 내일은 왜 또 뭐하고 밥은 왜 먹냐. 내 삶의 목적과 나는 어디로 가고, 내가 존재하는 목적이 뭐냐는 것이다.
땅이 혼돈하다는 것은, 내 마음이 목적을 모르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 가운데 분명한 목적이 없는 상태이다. 이 목적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ת) 로 오신 것이다.
공허 בֺהוּ 보후 : 목적도 없을 뿐더러, 시스템(ב), 그것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건설해야 할지를 모른다.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보후라고 한다. 내가 할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도 모른다. 내가 도데체 무엇을 하는 존재인지 조차 모른다.
보후 바 보후, 인간의 모든 출발점은 삶의 목적과 그 목적을 어떻게 이루느냐, 나에게 이게 없구나, 이게 흑암 가운데 있구나를 깨닫는 것이 모든 주님의 영이 운행하시는 시초이다. 내가 정말 토후 바 보후구나. 이것을 깨달으면 모세가 살아난다.
내 삶의 목적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고, 내가 왜 존재하는것이냐,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그 목적은 다 육체에 속한 목적이 아니다. 육체에 속한 목적은 이미 다 해봤다. 그런데 그것은 사라지니까 나의 목적이 될 수가 없다.
Ex ) 내가 주부라도, 주부의 목적이 뭐냐? 얘 키우는거다. 얘를 다 키우면 뭐냐? 주부의 목적은 현모양처가 되는것인데, 남편이 죽으면 무엇인가? 누구의 처가 될 것인가?
내 삶의 목적이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이면, 아들이 당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고 하고 옆집 아버지가 더 좋다고 한다. 좋다라는 기준은 도데체 무엇인가? 나름대로 해도 좋은 아버지가 아닐 수가 있다. 도데체 뭐가 되는 것인가? 대통령? 대통령이 되서 무엇을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삶의 방법과 목적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것을 방주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면 모세를 거기에 담을 수가 있다.
이 세상과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데, 사라지지 않는 것, 영원한 것을 목적으로 해서 살아보자. 이것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 용기를 방주에 담을 수 있다. 어느 누구도 토후 바 보후의 상태를 나가지 않으면, 모세를 방주에 담을수가 없다.
방주에는 반드시 역청을 칠한다.
כֺפֵר 코페르 : 역청
아가서에서 주님은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송이와 같다고 한다. 코페르 = 고벨, 코페르라는 것은 속죄소 할 때의 속죄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역청, 코페르는 כ 카프라는 뜻을 갖는다. 이 카프는 굉장한 힘이다.
- 내가 너를 손바닥(= 카프)에 새겼다. 우리도 꼭 할 것을 손바닥에 새기곤 한다. 손바닥은 모든 것을 이루는 힘이다. 손바닥이 있어야 다섯 손가락이 연결되어 일을 한다. 이것은 모든 것을 적용하는 힘이다.
Ex ) 악수를 하는 것이 그 의미이다. 내가 이루어줄게. 악수를 할 때 손바닥을 마주대지 않으면 상당히 실례이다. 손바닥은 모든 것을 내가 이루어주겠다는 소리이다.
역청을 바르라 : 속죄한다. 주님이 그것을 이루어 주시겠다(כ)
- 네가 토후 바 보후,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했냐? 거기에 역청을 바르신다. 내가 목적을 알려주고 이르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것을 속죄한다, 코페르라고 한다.
우리의 방주에는 코페르가 발라져있다.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송이이다. 코페르를 바르고 거기에 모세가 태어난다. 모세가 나가자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나가려고 하는 모든 것 속에서 주님은 나가려는 용기를 살리신다. 그 용기가 계속 커나간다.
문제는, 모세, 그 용기가 힘이 쎄져서 이집트인을 하나 때려 죽인다. 이게 통할 줄 알았다. 자기가 데리고 나가야 되니 자기가 하나 때려죽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따라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네가 재판관이 되려고 하느냐고 하고 바로가 그 사건을 알아버려서 도망가게 된다.
모세는 반드시 도망가야한다. 이 용기는 자기 힘으로 이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 자아에서 나가는 것은 자기 의로 되지 않는다. 이게 우리가 첫 번째로 빠지는 함정이다. 자기의 의로 나가려고 한다. 자기의 의로 되지 않는다. 이 용기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한다. 그래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 동안 있게 된다.
40 מ : 물, 진리를 이야기한다.
-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한다. 모세는 우선 진리안으로 들어가야한다.
מִדְיָן 미드얀(미디안) 광야 : 진리(מ)에 철저히 종속(ד)되는 것
- 자기의 의가 아니라 진리가 철저해야한다. 진리가 철저하지 않고 광야에서 나갈 사람은 없다.
Ex ) 다들 옛 자아가 싫다고 한다. 그런데 아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으면 된다는 것 하나이다. 맨날 수련회가서 못 박기를 수십년을 하는데, 옛 자아가 무엇인지, 해산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리를 이야기 해보라고 하면 하질 못한다. 못 박는거 밖에 모른다.
어떤 과정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자아를 처리하는 것, 자아에서 나가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다. 정말 어려운 과정이다. 그런데 용기는 하여튼 끝내준다, 특히, 광신도일수록 말이다. 그래서 모세보다도 더 많이 이집트인을 때려죽인다. 육신의 속한 것을 볼 때마다 때려 죽인다. 그런데 그게 막 친구도 뭐든 자식도 때려죽인다. 얼마나 용기가 쎈지 모른다.
그런데 철저하게 진리에 종속되야한다. 미디안 광야로 가야한다.
우리는 토라포션을 통해 이 진리를 하나하나 배운다. 얼마나 디테일하고 철저하고 자세한지 모른다. 토라 안에 그 순서와, 디테일한 방법과 과정과 역작용, 부작용과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고 사단은 거기에 어떻게 역사하는지, 아주 자세하게 주님이 써놓고 가자고 한 것이다.
- 내가 그것을 이루어 줄께.
그런데 우리는 거기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주님이 다 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반드시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야한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있어야 한다. 진리(מ)에 철저하게 종속(ד)되어 하나님의 손(י)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진리에 철저하게 종속된 자만이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서 미디안 광야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난다. 진리에 종속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이게 오늘날의 우리의 딜레마이다.
많은 이들이 진리에 종속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스턴트를 좋아해서, 40년 동안 진리에 종속되는 것이 교회생활이라면 안 간다고 한다. 교회가면 한방에 주님이 막 역사하고 펑펑 터지고, 사업도 막 터져야 되는것이라고 한다. 교회 가서 지금부터 광야라고 하고 진리에 철저하게 종속되야지 하나님이 역사하신다고 하면, 잘못왔다고, 옆 교회로 간다고 한다. 이 출애굽기는 아주 기가막힌다. 우리의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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