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산은 서울 금천구(衿川區)와 관악구, 경기도 안양시에 걸쳐있는 산으로 산세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암산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금천구 시흥동(始興洞) 지역을 중심지로 삼았던 옛 금천(衿川), 시흥(始興) 고을의 듬직한 중심 주산(主山)으로 금지산(衿芝山) 금주산(衿州山)등의 별칭도 지니고 있다,
호랑이를 닮은 잘생긴 뫼이나 풍수지리 적으로 활활 타오르는 모습의 관악산(冠岳山)과 함께 서울을 위협하는 뫼로 인식되었다 하여 조선조정은 그들로부터 한양을 지키고자 비보풍수(裨補風水)에 따라 호암산 밑에 호암사을 세우고 관악산 정상 밑에 절을 짓고 연못을 팠으며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현판을 세로로 세우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처럼 호암산에는 호암산성과 석구상, 한우물, 제2한우물터 삼성산성지 등의 늙은 명소와 호암사, 약수사, 불영암 등의 오래된 절이 있으며, 시흥계곡과 삿나무산림욕장, 호암산폭포 등의 자연명소가 있다, 또한 칼바위와 신랑각시바위 등 잘생긴 바위들도 잔뜩 포진해 있으며 조망도 천하일품이라 서울의 상당수 지역과 안양, 광명, 부천, 인천, 서해바다, 북한산은 물론 공기가 좋을 때는 멀리 파주와 개성(開城) 지역까지 흔쾌히 시야에 들어온다, 호암산성은 산마루를 둘러쌓은 통일신라시대의 테뫼식 산성으로 둘레는 1,250m이며, 그 중 약 300m 구간에 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우물은
'큰 우물' 또는 '하늘 못(天井)'이라는 뜻으로 호암산성 안에 있는 2기의 연못 중 하나이다. 발굴조사에서 연못 2개 ·건물지 4개가 확인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의 한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이고 그 아래의 신라시대 석출지도 확인되었다. 다른 우물지에서는 ‘잉벌내력지내미(仍伐內力只內未)’라는 글이 있는 청동숟가락이 나왔다.
우물지 근처에서 개 모양의 동물상(석수상)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서울에 화재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는 설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우물 근처에서 석구지(石拘池)라고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는데, 아마도 이 연못이 석수상과 관련되어 석구지라고 불려진 것이라고 보여 진다.
※(한우물 및 주변산성지 → 서울 호암산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한 우 물
상술했듯, 1989년 ~ 1990년 발굴조사에서 우물터가 두 곳이 나왔다. 위 이미지는 제1우물터의 사진으로 겉모습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우물보다는 연못같다. 길이 22m, 폭 12m로 주변 석축의 재질은 화강암이다.조선시대에 조성한 석축이 있었는데, 발굴조사 당시 그 아래에서 통일신라 때에 쌓은 석축의 흔적이 드러났다. 연못 내부에 쌓인 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층위를 보면, 땅 표면 기준 30cm 아래까지는 백자 조각을 비롯한 조선시대 유물이 나왔다. 그러나 그 아래로는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굵은 모래층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래층 아래에 있던 뻘층에서 다시 유물(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철제 날을 끼운 월형도끼, 토기 등)을 발견했는데 거의 전부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축 구조는 문무왕 때 만든 안압지의 구조와 매우 비슷했다. 안압지의 석축은 맨 아랫단을 내어쌓고 위로 올라갈 수록 들여쌓은 모습인데 여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제2우물터는 제1우물터 아래에서 발굴된 우물터이다. 여기에서는 '仍伐內力只乃末(잉벌내역지내말)'이란 글씨가 새겨진 청동숟가락 유물이 발견되었다. 잉벌은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차지했을 때 붙였던 지명으로, 삼국통일 후인 757년(경덕왕 16년)에 '곡양현(穀壤縣)'로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에 호암산성의 축조 연대를 757년 이전으로 유추할 수 있게 한 중요한 유물이다.이밖에도 고려시대 유물도 발굴했다. 고려 문종 시기에 중국 북송에서 쓰던 화폐 희령원보(熙寧元寶)가 대표적인 유물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서울 호암산성 (서울 虎巖山城)
▶산행일ː 2024년 03월 18일(월)
▶산행지ː 호암산(392m) 장군봉(409.8m) 견우봉(148.9m) 서울 금천/관악
▶코스ː 석수역-호암터널위-석구상-찬우물-장군봉-호암산-호압사-관악산둘레길3코스-삼복터널-견우봉-서원역정류장
▶난이도ː AB+
▶누구랑ː 부산 번개 팀 5명(산마루 철인 큰형님 한덤)
▶시 간ː 11:42∼15:41(휴식.점심.목욕포함 03ː58분)
▶거 리ː 약 9.81㎞ (오르내림포함 약 11.07km)
▶날 씨ː 흐림고. 구름. (구름조금&미세먼지)
☞호암산숲길공원(들머리)ː 서울 금천구 삼성산길 28
☞서원역정류장(날머리)ː 서울 관악구 신림로 257
◈교통편◈
▶갈 때ː 구포역(08:16)→광명역(11:00)→광명역(6번출구3002번버스)→석수역(중)정류장(16분 소요)
▶올 때ː 서원역정류장(5516번)→관악산입구(8507번버스)→광명역(부산행 17:32)→구포역(20:00)도착
호암사 역사ː 사찰 이름 '호압'은 호랑이를 누른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하는데 아래와 같다,
삼성산(三聖山)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진산이다. 호암산(虎巖山)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범 모양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되었다. 윤자(尹慈)의 설(說)에,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巖)이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서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거기에서 북쪽으로 7리 지점에 있는 다리를 궁교(弓橋)라 하고, 또 북쪽 10리 지점에 사자암(獅子菴)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었다. (하략)"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0권 경기-금천현(衿川縣)조산의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듯하므로 산의 북쪽에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고, 다리도 궁교(弓橋, 활 다리)라 하고, 암자도 사자암(獅子菴)이라 하여 산을 억누르려 했단 것이다. 궁교는 활로 호랑이를 쏘려는 것이고, 사자암은 사자의 기세로 호랑이가 설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한국에는 흔한 비보풍수적인 전설이다.이와 비슷하지만 좀 더 극적인 다른 전설도 있다.
조선 태조 3년(1394) 무렵, 경복궁을 짓고자 공사를 하는데 진척이 되지 않았다. 태조가 대목(大木)을 불러 꾸짖으니 대목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낮에 공사를 진행하면 밤에 호랑이와 비슷하게 생긴 괴물이 나타나 세워놓은 것들을 전부 부숴버립니다."태조가 무장을 갖추고 병사들과 함께 밤을 기다리니, 정말로 두 눈에 불빛이 형형하고 모습이 호랑이 비슷한 괴물이 나타났다. 군사들이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둘렀으나 괴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공사현장을 망가트린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성계가 숙소로 돌아와 이를 어떡하나 고민하는데 홀연히 노인이 나타나더니 말하였다."한양은 더없이 좋은 도읍지로다."노인이 산자락을 가리켰다. 태조는 그제서야 그 산이 한양을 노려보는 범의 형상임을 깨달았다. 태조가 저 산의 기운을 누를 방도를 물으니, 노인은 범이란 꼬리를 밟으면 꼼짝하지 못하니, 꼬리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지으라고 알려주고 사라졌다. 태조가 들은 대로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호압사를 세우니 비로소 궁궐을 무사히 지을 수 있었다.위 이야기들은 물론 그저 전설일 뿐이다. 일제강점기인 1943년, 승려 안진호(安震湖)가 쓴 ≪봉은본말사지(奉恩本末寺誌)≫에 따르면, 조선 태종 7년(1407)에 창건되었으며, 태종이 호압사(虎壓寺)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태종은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과연 왕명으로 절을 창건하고 절에 이름까지 내려주었을지 의문이 남는다.[3] 또한 ≪봉은본말사지≫도 20세기의 기록이므로 신빙성 높은 자료라고 보기는 어렵다. 16세기 중종 때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왕실이 호압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으므로, 태조나 태종이 창건, 또는 창건에 관여했다는 전설은 그 후에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전설을 제외하면 창건역사는 이처럼 불확실하며 그 이후의 역사도 불명확하다. 옛 기록에 단지 호압사라는 절이 있다는 정도로만 언급될 뿐이다. 헌종 7년(1841)에 건물이 너무나 퇴락하여, 상궁 남씨(南氏)와 유씨(兪氏)의 도움을 받아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935년에 주지 만월(滿月)이 약사전 6칸을 지어 현대에 이른다.그러나 이렇게 중창하고 일제강점기에 약사전을 지었는데도 규모가 작다. 전설만 듣고 어느 정도 규모가 되는 절인 줄 알았다면, 실제로 보고 그 아담함에 놀랄 것이다.
♣.손바닥으로 해 가리기.♣
진실이 신비한 것은 논리를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이성이나 정신으로 다룰 수 없습니다.
영적 진실은 방해되는 것이 제거되면 스스로 드러납니다. 증거에 기반해 구성된 것이 아니므로
증명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서 구름을 제거하면 해가 빛납니다.
이게 다입니다. 구름 제거는해를 빛나게 만드는 원인이 아닙니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