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2005 대한민국의 비극 /// 2004.5.1 노동절, 토요일 2004.6.6 현충일, 일요일 2004.7.17 제헌절, 토요일 2004.8.15 광복절, 일요일 2004.10.3 개천절, 일요일 2004,12.25, 토요일 모두다 2004의 비극은 2005년을 대비하기 위한 2005.5.1 일요일 2005.5.8 일요일 2005.5.15 일요일 2005.7.17 일요일 2005.9.18 일요일 2005.12.25 일요일 전조였다.
단기3960년 발틱해 대해협 신항 잠수함 기지를 출항한 잠수함 전대 소속 4891함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위험 해협을 다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이격거리 1킬로미터를 유지하며 뒤따라오고 있던 4571함은 4891함이 해협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 “모르겠습니다.” “아까 기분 나쁜 마찰음 때문에 기관에 문제가 생겼나 ?” 함장은 대해협을 지날 때 발생한 소음이 신경 쓰였다. 잠수함 밑바닥을 뭔가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지만 조금 후에 정상으로 돌아왔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사고에 함장과 기관장 모두 당황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수부를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상. 잠망경 올려.” 큰일이었다. 여기서 꼼짝달싹 못하면 대서양 봉쇄 뿐 아니라 빌라봉 지원에 차질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 대서양으로 나가는 해로가 막힐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배들이 없었다. “젠장. 슈체친으로 구조 요청하고 잠수부 투입해.” “선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습니다. 심해 잠항을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크루에 뭔가가 끼어 있습니다.” 늦겨울 발틱 해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잠수복이 방한 효과가 있다 해도 10분 이상 잠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10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자맥질을 하던 잠수부들이 보고를 해왔고 일부는 스크루에 낀 것을 빼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3시 방향 범선 출현” 함장은 통신장교의 외침에 3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돛대가 수평선 위로 너울거리며 넘어왔다. “4571함에게 저지시켜 달라고 해” “함장님. 범선들이 흩어집니다.” “9시 방향에 새로운 범선 출현” 새롭게 나타난 범선은 이쪽을 발견했는지 거의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4891함 퇴함하라. 우리쪽으로 넘어와라.” 후미에 대기하던 4571함장이 퇴함을 지시함과 동시에 9시 방향으로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 발사 후 속도를 높여 거리를 좁힌 4571함이 4891함 근처에서 부상했다. 3시 방향에서도 이쪽을 포착했는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 승무원에게 알린다. 즉시 퇴함 하라. 4571함으로 옮겨 탄다. 부장 자폭장치 가동시켜. 시간은 30분. 시간이 없다.” 승무원들이 갑판으로 나가는 통로를 통해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4891함과 4571함 사이에 얇은 철판이 깔리고 수병들이 조심스레 4571함으로 옮겨 타기 시작했다. “꽝꽝꽝” 적들이 함포를 쏘아댔지만 아직 사거리가 훨씬 모자랐다. 수병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며 4891함 승무원 100여명이 4571함으로 옮겨 탔다. “포반철수” 마지막으로 갑판에 설치된 포반원들이 포를 떼어내 철판을 건너오자, 4571함이 4891함에서 멀어져 갔다. “펑펑펑” 다가오는 범선은 계속해서 함포를 쏘아댔다. “저건 스웨덴 국기잖아 ?” 분명히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범선들은 스웨덴 국기를 달고 있었다. 선주나 영주의 휘장대신 배에 국기를 달고 다니는 배는 대한제국과 스웨덴이 유일했다. 터키 해군조차 제국을 상징하는 국기가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스웨덴을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끼이익” 4571함이 급선회를 하는 동안 4891함이 당했던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4891함장은 4571함도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겁을 집어 먹었지만 다행히 4571함은 무사히 선회를 마치고 신항으로 항로를 잡아갔다. 4891함과 안전거리를 확보하자 4571함 함장은 4891함 함장을 바라보았다. 4891함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함장은 지체 없이 어뢰 발사를 명령했다. “4891함으로 어뢰 2발 발사” “쿵. 쿠궁” 어뢰가 4891함에 도착하기 전에 자폭장치가 작동했는지 묵직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4891함 승무원들은 자폭음이 들려오자 비로소 자신의 잠수함이 침몰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위그노 빌라봉 성 고진영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들어온 스페인 사람의 숫자를 헤아렸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이동은 수만 명이 넘었다. 그렇게 넘어 온 사람들은 다시금 북쪽으로 이동하며 흩어졌다. 그라나다에 침입한 터키군을 피해 움직이는 피난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고진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 연합이 군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건가 ? 이곳을 내버려두는 것이 이상해.” 위그노는 분명 대한제국의 첩자국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드러난 첩자를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은 위그노 국경을 포위만 할 뿐 적극적인 공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야 ? 위그노가 이용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용가치라면 뭐가 있을까 ? 내부 반란을 우려하는 것인가 ? 아님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 ?” 위그노가 가지고 있는 이용가치라면 대한제국이 제공하고 있는 물품밖에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살라몽 장군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있어서 외부 유출이 쉽지 않았고, 핵심은 다 빌라봉 성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장님. 파리에서 급보입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고진영을 방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오는 오로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몽블랑 식구들을 처형한답니다. 그것도 몽마르뜨 언덕에서 공개 처형을 한다고 합니다.” “언제 ? 갑자기 처형이라니 ?” 고진영은 순간 마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던 글귀가 눈에 선 했다. “앞으로 5일 후 입니다. “당장 구조팀을 가동하고 잠자리를 띄워. 지중해 함대나 발틱함대에 지원 함을 보내 달라고 하고. 젠장. 파리에 나도 간다.” 서둘러야 했다. 5일이면 시간이 빠듯했다. 빌라봉성 옥상에 있는 잠자리는 만일을 대비해 배치되 있었다. 특수여단이 철수하면서 빌라봉성이 함락될 위험에 빠졌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남겨진 잠자리는 3대가 있었다. 배치된 이후 단 한번도 덮개를 걷지 않아서인지 잠자리를 덮고 있는 덮개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파리 몽마르뜨 언덕 언덕위로 스퀘델리와 그의 오빠 그리고 몽블랑 살롱 일꾼 2명과 다른 지방에서 잡혀온 사형수들이 줄줄이 끌려갔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양 옆으로 파리 시민들이 죄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창을 든 경비병들이 시민들을 밀쳐내고 있었다. 스퀘델리는 발목에 달린 쇠구슬이 힘에 부친 지, 언덕 마루를 얼마 남기지 않고 쓰러졌다. 발목에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머리는 치렁치렁 흐트러져 눈앞을 가렸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스퀘델리의 휑한 눈빛이 구경꾼들을 훑고 지나갔다. 스퀘델리가 쓰러지자 행렬이 멈춰 섰다. “마녀. 죽어라 !” 겁에 질린 사내아이 하나가 돌을 던졌다. 경비병들이 형식적으로 제지를 하자 날아드는 돌이 많아졌다. 쓰러져 있는 스퀘델리를 향해 온갖 욕설이 튀어나오고 더러는 막대기로 쿡쿡 찔러대기도 했다. 경비병 하나가 스퀘델리를 일으켜 세우자 행렬이 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묶어라. 정각에 화형에 처한다.” 이번 사형을 주관하는 파리 대주교의 명령에 붉은색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옷을 입고있는 병사들이 죄수들을 나무에 묶어 바닥에 세웠다. 나무 밑에는 장작들이 수북이 쌓였다. 횃불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횃불을 던져넣기만 하면 금새 화염이 죄수들을 집어 삼킬 준비가 다 되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던 대주교는 로트르담 대성당에서 사형집행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웅웅웅웅” “무슨 소리지 ?” 대주교는 기다리던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자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 남쪽에서 하늘을 날아오는 것들이 보였지만, 도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주교님 저것이 무엇입니까 ?” 대주교는 사제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빠른 속도로 몽마르트 언덕으로 다가왔다. 불현듯 두려움이 밀려든 대주교는 경비병들에게 외쳤다. “불을 질러라. 저기 다가오는 것에 총을 쏴라.” “타타타타타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몽마르뜨 언덕으로 날아온 잠자리들은 정지비행을 하며 횃불을 들고 있거나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경비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구경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잠자리들이 재빨리 병력을 내려 몽블랑 식구들을 태우고 몽마르뜨 언덕을 한바퀴 돌고 남쪽으로 멀어져 갔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이니라. 너희들이 내가 보낸 사자를 핍박했으니 너희들 또한 그렇게 당하리라.” 괴상한 물체에서 뿌려댄 전단지를 들고 읽어나가던 대주교가 멍하니 남쪽을 바라보았다. “땡 땡 땡” 센 강 중간에 있는 섬 시테섬에 우뚝 솟은 로트르담 대성당 종탑에서 시작된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며 몽마르뜨 언덕을 타고 넘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좀더 일찍 구출을 해드리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응급처치를 하고 흐르는 피를 멈추게 했지만, 몽블랑 식구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스퀘델리는 혼절해서 그나마 나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귀가 멍멍해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눈을 질끈 감고 뜨려 하지 않았다. “잠자리 하나, 옹달샘 나와라” 빌라봉이 가까워지자. 잠자리 조종사가 옹달샘을 불렀다. “의료진을 대기하라. 옹달샘 응답하라.” “대장님 ? 옹달샘과 교신이 되지 않습니다.” 잠자리 1호기 기장이 고진영을 보고 소리쳤다. “3호기는 주변을 한바퀴 돌며 정찰을 하도록. 고도를 낮춰서 통신을 요청해봐.” “네.” “옹달샘 나와라 옹달샘 나와라” 한참이 지나서야 옹달샘에서 응답이 왔다. “대장님. 연결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잡음이 들려옵니다.” 단거리 통신에서 잡음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전파 간섭을 생각했던 고진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 근처에 간섭할 전파를 발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고진영은 자리 왼쪽에 걸려 있는 송수신기를 꺼내 들고 직접 통신을 시도했다. “나 고진영이다. 기지에 무슨 문제가 있나 ?” “아닙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오로치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었지만 규칙적인 잡음이 들려왔다. 뭔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는 흡사 어떤 부호와 비슷했다. 통신을 유지한 체 머리 속에 남은 잡음을 떠올리던 고진영이 그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통신을 끝냈다. “알았다. 알았다. 잘 알았으니 이상.” “잠자리 2.3호기는 주파수를 바꾼다. 주파수 번호 1004” 긴급 발생을 알리는 암호 1004가 고진영의 입을 통해 나오자, 1호기 기장이 고진영을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하지만 고진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먼저 주파수를 돌리라는 시늉을 했다. "빌라봉성이 누군가에 의해 점령당한 듯 하다. 3호기는 착륙하지 말고 비상시 수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1호기부터 착륙한다. 모든 대원들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최우선적으로 통신실을 장악 해야 한다. 이상” 빌라봉성 공터에 마련된 착륙지점에 다가가자 고도를 낮춘 1호기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착륙지점 주위에는 평소에는 없었던 나무통들이 군데 군데 놓여져 있었고, 오로치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의료진으로 보이는 햐얀 옷을 입을 사람들이 들 것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1호기가 착륙하고 2호기가 착륙을 시도했다. 고진영과 함께 대원 3명이 따라 내렸다. 1호기에 거치 된 기관총사수는 총구를 땅을 향하게 하고 있었지만 총신은 의료진들을 따라 갔다. “정말로 무슨 일 없나 ?” “대장님. 왜 오셨습니까 ?” 그와 동시에 공터를 둘러쌓고 있는 건물 옥상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제국 소총을 들고 잠자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명했다. 에드몽은 빌라봉 성을 장악하고 파리에서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의료 요원으로 변장한 에드몽 병력이 고진영을 둘러쌓다. “다른 대원들은 ? 보고는 ?” “다 죽었습니다. 너무 창졸지 간에 당한 일이라 손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고진영이 느닷없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오로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오로치를 껴 안고 바닥으로 뒹굴었다. 그것을 신호로 잠자리 2호가 하늘로 떠오르며 사방으로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에드몽이 고개를 바짝 숙이고 사격을 외쳐대자, 옥상에 배치된 병력의 집중 공격이 시작되었다. “탕탕 드드드드 탕탕 펑” 착륙지점 주변에 흩어져 있던 나무통에는 잠자리용 연료가 가득 들어있는지 피탄 되면서 불꽃이 피어 올랐다. 불꽃에 휩쌓인 나무통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인 폭음이 떠오르려던 2호기를 휘감았다. 휘청이던 2호기가 1호기를 들이받고 한참을 미끄러져 벽에 쳐 박혔다. 어수선한 틈을 탄 고진영은 오로치와 함께 건물 안으로 잽싸게 뛰어들었다. 세상이 내일 망해도 고진영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어 든 고진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왼쪽 벽을 타고 비상통로를 열 수 있는 장치를 찾아 눌렀다. 벽이 비스듬히 돌아가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살아 남으면 나중에 보세” 자신의 권총을 오로치에게 주고, 비상통로로 들어간 고진영은 주머니에서 불티나를 꺼냈다. 빌라봉 성 건설당시에 설치된 자폭장치는 벽과 벽 사이에 있었다. 손을 더듬어 도화선을 찾아낸 고진영이 불티나에 불을 붙이고, 반대쪽 벽을 더듬었다. 원래는 안쪽 벽에서 들어와 바깥쪽으로 나가야 했지만 고진영은 거꾸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벽을 더듬어도 문을 열 수 있는 장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고진영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원래 안쪽 벽에는 개문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꽈광 펑펑펑펑” 연속음이 들려오며 화염이 벽과 벽이 만들어 놓은 좁은 공간을 달려 고진영을 집어 삼켰다. “그만 가셔야 합니다.” 3호기 부기장은 빌라봉 성이 주저앉는 것을 보며 기장을 재촉했다. 항속거리 500킬로미터가 약간 되지 않는 잠자리였기에 착륙해서 짐칸에 실려있는 연료를 채워야 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로 ?” 3호기는 갈 곳이 없었다. 한정된 연료로 대한제국이 관할하는 곳까지는 날아갈 수 없었다. “바다로 가시죠. 그곳에는 잠수함이 있을 지 모릅니다. 작전 개시 전에 요청한 지원함대가 가까이 와 있을 것입니다.” 부기장은 빌라봉 성을 지원하기 위해 대서양에는 잠수함이 항상 대기중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간다고 만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기장은 차마 말을 꺼내질 못 했다. 3호기의 마지막 희망을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작전로가 변경되지 않았기 만을 바라며 기장이 기수를 돌렸다. 단기3960년 오드리강 상류 브로츠와프 프라하에 모여든 유럽 연합군 10군단 병력 총 4만 명이 브로츠와프로 이동을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군과 보헤미안군으로 구성된 10군단은 이례적으로 한스 장군이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스가 10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데에는 보헤미안을 아우르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기병 이만에 보병 일만 포병과 기타 병과 일만으로 구성된 10군단은 브로츠와프에서 군을 재정비하고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오기 전에 폴란드를 해방시키고 여름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 공격에 나서야 하는데.” 한스 장군은 각군의 예상 진격로가 나와 있는 유럽 원정군 전략 지도를 안주머니에 꺼내 책상에 펼쳐 놓았다. 8번 접혀져 있는 얇은 가죽 지도 위에는 어지럽게 선들과 점들이 그려져 있었다. “똑똑똑” 군단장급에게만 제공된 전략 지도를 다시 곱게 접어 넣은 한스 장군이 문에 대고 소리쳤다. “들어 오게” “연합군 사령부에서 암호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내용은 ?” “이번 전문은 전문 해독 권한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유럽 연합군은 부대 정비를 끝내고 중요 명령서를 암호문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전문은 해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지정되어 있었다. 권한이 없는 자가 암호문을 해독하려면 키워드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명령서의 빠르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 각 제대에 전령을 따로 관리하는 소규모 부대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암호문을 건네 받은 한스는 온갖 기호들, 알파벳 그리고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문을 해독해 나갔다. 이번에 온 전문은 프랑스어로 암호화 되어 있었다.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 한 한스 장군이 숨을 참았다 길게 뱉었다. “각 사단에 암호문으로 보내게” “네. 사령관님” 10군단에 이동 개시 및 공격 명령이 전달 되었을 즈음, 신성로마제국군으로 구성된 유럽 연합군 제9군단 역시 오드리강 상류에 있는 크라코프를 공격하기위해 움직였다. 오드리강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유럽 연합군의 이동이 바르샤바에 사령부를 설치한 대한제국군 4군 원정군에 속속 보고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 겨울에 공격을 감행하다니. 몰살되려고 작정한 모양입니다.” 새롭게 발견된 유럽군의 이동로가 전황판에 표시되었다. 작전참모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당혹함이 잔뜩 베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겨울 전투를 상정해 놓지 않은 원정군 사령부로써는 겁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적의 행태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크라코프에 병력을 증파해야 합니다.” “크라코프뿐 아니라, 브로츠와프, 오스트루프, 포즈난, 아니 전 전선에 병력을 증파해야 합니다.” 크라코프에는 우크라이나 일대를 관장하고 있는 4군단 예하 기병사단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6군단 전 병력은 오드리강 주변에 산개해 있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유럽 연합군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대부분이 10배 이상의 병력차를 보이고 있었고, 크라코프는 20배가 넘었다. “작전상 후퇴를 권고합니다. 현실적으로 증원이 불가능하고, 고립될 경우 막대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전선을 축소해서 비스와니 강을 중심으로 방어전에 임해야 합니다. 작전 참모진에서 마련한 동면 작전은 단치히와 비드고슈치 그리고 우치, 체스토호바, 라돔, 루블린을 연결하는 반원형 방어선을 형성하고, 3군단과 우크라이나 지원병력을 리보프와 루블린에 집결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전선을 1000킬로미터에서 500킬로미터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봄까지 시간을 끌면 그 다음은…”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그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 5군단장 고수석 중장이 작전 참모의 말을 끊고 나섰다. 비록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적병 10만을 와해시키고 바르샤바에 무혈입성하는 데 전공을 세운 5군단이기에 그의 발언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에 아랑곳 않고 고수석 중장이 말을 이었다. “40만이든 50만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투지만 있다면 적이 아무리 많아도 대한제국군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괜히 우리를 천군이라 부르겠습니까 ? 천군을 이길 군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령관님. 저는 오히려 진격할 것을 건의합니다. 베를린과 빈을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파리로 밀고가면 이번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수에즈 운하가 사고로 봉쇄되면서 흑해나 대서양을 통한 지원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저희가 이용할 수 있는 보급로는 기껏해야 발트해를 통한 보급로와 육로를 통한 것이 전부입니다만 계절적 요인을 감안하면….” “그러길래 누가 보급품을 날려 먹으라고 했습니까 ?” 보급참모의 말에 5군단장이 나섰다. 예하 부대들은 보유 보급품으로 그럭저럭 겨울나기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번에 당한 공격으로 원정군은 유류 보급품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었기에, 진격에서 필수적인 포병과 기계화 사단의 기동이 극히 제한되고 있었다. “천군부에서는 별다른 명령은 없나 ?” 사령관이 착찹한 심정으로 통신 참모를 바라보았다. 통신 참모 옆에 있던 정보 참모가 사령관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정보 참모는 내년 봄에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원정군은 겨우내 지역 민심 확보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한참 빗나가고 있었다. “없습니다.” 천군부에서는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간 4군 사령관에 대한 무언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다가오는 40만의 병력은 원정군 병력 15만에 비하면 그렇게 위협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은 집중되어 있고, 대한 제국군은 분산되어 있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고 대한제국이 갖은 화력의 우수성을 활용하기위해서는 적을 집중시켜 격멸 하는 것이 최선인 듯 보였다. “봄까지 전선을 유지하면 폭격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퇴하면 북부 영주들이 동요하게 됩니다. 폴란드 내 저항 세력들이 남부 집결할 것이 뻔하고, 이번 전쟁을 주시하고 있는 터키나 스웨덴이 오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참은 후퇴를 반대하십니까 ?” 작전참모의 질문에 대답하는 정보참모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이지요.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내. 그럼 말을 마시던가요 ?” 고수석 중장이 정보참모를 쏘아보더니 이내 군수 참모와 작전참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후퇴할 수 있으면, 당연히 공격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 왜 병력 지원을 못 합니까 ? 5군단 병력은 어떤 악천후에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번 기회에 유럽전을 끝내겠습니다. 우리가 힘들면 적은 더 힘들지 않겠습니까 ? 후퇴는 말도 안됩니다.” 후퇴하자는 의견과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사령관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적들은 시시각각으로 오드리강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일부 부대는 꽁꽁 언 강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보란 듯이 건너도 있었다. “수에즈 운하는 언제 개통할 수 있다던가 ?” “빨라야 6개월입니다. 기존 운하를 보수하는 것 보다 새롭게 파는 것이 더 빠르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완벽한 후퇴가 가능하긴 한 건가 ?” 오랜 회의시간동안에 처음으로 사령관이 후퇴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사령관은 이미 예하 부대에 보급된 겨울나기 보급품을 고스란히 이동시킬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전부 가져갈 수 없습니다만 2/3정도는 가능합니다. 중화기를 우선적으로 이동시킨다면 3/4까지도 가능합니다.” 5군단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작전 참모부에서 올린 후퇴 건의안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김상태 사령관은 눈을 감았다. 지금껏 천군 역사에 후퇴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하다못해 작전상 후퇴라는 것을 한 적도 없었다. “크라코프를 포기해야 한단 말이지 !” 유럽 최대의 소금광산이 있는 곳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키기는 더욱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슈체친은 포기 못 하겠군. 그곳은 보급 걱정을 덜 수 있으니 포위당해도 걱정 없겠지. 퇴로도 확보된 거나 마찬가지니. 4111 사단에게 슈체친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방어하라고 하고, 기병사단에게는 단치히로 후퇴하라고 해. 오드리강에서 비스와니강까지 후퇴하도록. 4511사단과 4611사단이 후퇴를 엄호하고 이 일은 고수석 중장이 김한석이와 함께 맡아주었으면 좋겠군.” “사령관님 ?” “그렇게 해주게. 자네밖에 없어!” 김상태 사령관은 한사코 후퇴를 반대하는 고수석 중장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원정군 후위를 맡아주길 바랬다. 어쩌면 사령관은 고수석 중장처럼 진격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간절한 눈빛을 떨쳐버리지 못한 고중장이 마침내 후위를 책임지겠다고 하자, 전격적인 후퇴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민간인들에게는 후퇴사실을 알려야 합니까 ?” “숨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동요를 막고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대한제국을 믿고 따라준 도의를 져버리면 나중에 믿음을 줄 수 있겠습니까 ?” “그렇다고 후퇴한다고 광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건 말도 안됩니다.” 확실히 민심을 잡지 못한 원정군으로서는 후퇴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호의적인 집단과 호전적인 집단이 혼재해 있는 폴란드는 원정군에게 거대한 복마전이 따로 없었다. “원칙대로 하는 게 좋아. 일단 우리의 후퇴사실을 사실대로 알리도록 하게. 누구에게, 언제 알리느냐는 지역 특성에 맞게 부대장과 민정참모에게 전권을 일임하도록 하고. 그리고 후퇴도 작전임을 잊지 말게.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비스와니 선까지 이동한다. 민스크에 새로운 보급창을 건설하도록. 이번 작전을 지급으로 천군부에 승인 요청하고 천군부에서 반대하지 않는 한 내일 정오를 기해 작전을 시작한다. 이상. 다들 나가봐.”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사령관이 의자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회의에 참석한 참모진과 장성들이 회의실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한두 송이씩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크라코프 폴란드 제2의 도시,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크라코프를 담당하고 있는 4421사단 3연대장 조봉민 대령은 후퇴 명령서를 신경질적으로 꾸깃꾸깃 꾸겼다. 다시 펴서 읽은 명령서의 내용은 토씨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라고 ? 적 그림자도 못보고 무서워 꽁무니를 빼란 말이지 ?” “똑똑똑” “뭐야 ?” 연대 민정 참모가 크라코프 시장과 함께 연대장 집무실로 들어섰다. 크라코프 시장은 조봉민의 고함소리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지그문트에 충성을 맹세하고 대한제국을 적대시한 영주와 군소 귀족을 몰아내고 새롭게 크라코프를 책임지고 있던 엘브롱그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어서 오십시오. 이리로 앉으십시오.” 엘브롱그가 앉기를 기다린 조봉민은 차를 내오지도 않았지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령부에서 내려보낸 후퇴 명령서대로 부대를 이동시키자면 한시가 모자를 판이었다. “우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 말씀 잘 들으십시오. 유럽 연합군이 오드리강을 넘어 이곳으로 오고있습니다. 사령부에서는 저희 부대에게 비스와니 강 이북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작전상 후퇴입니다. 봄이 되면 반드시 되돌아 옵니다. 그때는 오드리강을 너머 피레네까지 단숨에 달려갈 겁니다.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적들에게 이곳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양의 탈을 쓴 놈들이 무슨 헤꼬지를 할지 모르니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시장은 어떻습니까 ?” “네 ? 지금 후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버리신다는 ?” 조봉민의 예상 그대로 엘브롱그는 거의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말을 제대로 잊지도 못했다. “버리다니뇨 ?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가지만 기필코 돌아옵니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약속합니다.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난 이 자리에 지금 있는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시장님께서는 잠시 여행을 하신다고 생각하시고 이곳을 떠나있으시면 됩니다. 가실 데가 없으시면 저희랑 같이 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도 이곳을 잠시 피해 있으라 하십시오. 저희는 3일 후에 떠날 예정입니다.” 엘브롱그는 소치니의 설교에 감복을 받아 소치니 제자로 광부들과 농민들을 위해 교회를 열고 집회를 주관하며 봉건영주와 대항해 왔었다. 모진 탄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소치니 파 교도들은 대한제국군을 자신들의 해방군으로 받아드리고 크라코프 일대를 장악해 나갔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중대한 때에 자신들의 버팀목이 사라진다면 자신들은 보헤미안에서 벌어질 대학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건. 이건…. 이건 소치니 선생님과 의논해봐야 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오 하나님 !” 엘브롱그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연대 본부 건물을 빠져나가는 것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충격이 심했는지 그는 모자를 쓰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오른손에 털모자를 움켜지고 시청사로 힘겨운 발길을 떼어 놓았다. “젠장 ! 개새끼들.” “부관 ? 허우긍이 들어 오라고 해” 책상을 세게 내리친 조봉민은 연대 보급을 맡고 있는 허우긍 소령과 실랑이를 벌였다. 조봉민은 리보프까지 가는데 필요한 보급품과 화기를 제외한 여분의 보급품을 크라코프 시민들에게 나눠주길 명령했고, 허우긍은 보급품 전용은 사단장 허가가 나지 않으면 불가하다며 맞섰다. “하라면 해. 내가 책임진다. 크라코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란 말야. 우릴 믿고 따르는 사람은 곧 대한제국민이나 다름없어. 알았어 ? 우리 대한제국민이라고.” “하지만. 보급품전용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재판을 받아도 내가 받으니까. 넌 걱정말고 다 풀어. 최소한 삼천 명이 한달간은 먹고 살 수 있겠지. 얼마나 살아 남을지 모르지만.” “알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삼일이 지났지만 엘브롱그는 끝내 조봉민을 다시 찾지 않았다. 이미 연대 보급창고를 열어 시민들에게 물품을 나눠주면서 후퇴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조봉민은 부관이 크라코프를 떠나기 위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오자 털모자를 둘러쓰고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그가 말 위에 올라타려는 데, 엘브롱그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같이 안가십니까 ?” “예. 선생님께서는 여기 남길 바라십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시겠답니다. 차마 저도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여기 있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데. 그래도 남으시겠답니까 ?”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을 위해 애쓰신 것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꼭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살아만 계십시오.” 엘브롱그의 두 손을 꼭 잡은 조봉민이 말 위에 올라 손짓을 했다. 이천여명의 연대병력이 크라코프를 떠나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대한제국 기병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브롱그는 서둘러 시청으로 달려갔다. 그는 달리면서 피식 웃었다. 진짜 시장이 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시민들을 위해 비로소 자신이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단기3960년 오드리강 하구 스위노우치에 해병대대 방어선 슈체친에 가해지는 유럽 연합군 1군단의 압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단치히에서 스위노우치에로 옮겨온 해병 대대원들은 주야간을 가리지 않는 전투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드리강 하류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가 있고, 이 호수를 통해 발틱해로 연결되는 수로가 4개가 있었다. 해병대가 맡고 있는 것은 북쪽에서 3번째 수로로 가장 넓고 수심이 깊어 발틱함대가 이용하는 수로이기도 했다. 이 수로를 통해 슈체친과 발틱해가 연결되었고, 슈체친은 스위노우치에에서 30킬로미터 상류지점에 있다. “지원병은 언제 오는 겁니까 ?” “그 하룻밤이 벌써 며칠짼 줄 아십니까 ? 3일 입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지원병을 보내주시던지 후퇴를 허락해 주십시오. 보급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안됩니다. 네 ?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버텨보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안종순 중령이 4111사단 지휘부와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통신병에게 건넸다. 방금 전에 끝난 전투에서 또다시 15명의 사상자가 새로 발생했는지 칠판에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사면초가에 놓인 4111사단의 유일한 보급로는 이제 오드리 강줄기 밖에 없었고, 오드리강 하구에 스위노우치에가 있었다. 이곳이 유럽 연합군에 넘어가면, 슈체친은 유일한 보급로를 잃어버리는 거와 같았다. “지원병이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는 군.” “천마도 옵니까 ?” 대대 작전참모가 지원병이란 말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천마를 이곳까지 운반할 선박이 슈체첸에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로 천마를 끌고 오겠나 ? 중대장들에게 오늘 밤만 버티라고 알려. 4111사단도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모양이야. 지원병력이 오면 한동안 쉴 수 있겠지. 그나마 저 놈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안종순은 하구에 떠있는 300톤짜리 소형 해안 순시선 2척을 바라보았다. 50미리 포 한문이 유일한 무장이었지만 6614함과 6620함은 대대가 믿을 수 있는 듬직한 대형화기였다. 6614함과 6620함은 발틱해와 오드리 하구에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를 오가며 흩어져 있는 해병대대를 지원했다. “발틱함대가 보급품 수송에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이곳을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작전 참모가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원래 이곳 방어는 자신의 부대와 함께 발틱함대가 같이 맡아야 했다. 하지만 부족한 보급품을 단치히를 거쳐 바르샤바로 나르기 위해서 발틱 함대가 총 동원되고 있었기에 이곳에는 달랑 두 척만이 남겨져 있었다. “오늘 밤은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지뢰지대 다시 확인하고, 정찰병 내보내. 오늘은 보름달이 빵빵하게 뜨려나 ?” 안대령의 바람이 통했는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걸렸다. 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지며 북쪽에서부터 차가운 밤공기가 대지를 뒤덮었다. 바람소리 가득한 호수 위를 6620함이 떠다니며 초계임무에 나서고, 섬 안에서는 대대 전 병력이 참호에 투입되어 선잠을 청했다. “기관장입니다. 아무래도 잠시 정선을 해야겠습니다.” 회귀 점을 지나 북상을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날 무렵 6620함 기관장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어디가 문제야 ?” “윤할유만 교체하면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내일도 보급품이 오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내일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한시간 동안 휴식이다. 모두들 편히 쉬도록.” 함장의 휴식 명령에 10명의 승무원들이 갑판 위에 그대로 널부러 졌다. 일부는 좁은 선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기도 했고 50미리 기관포를 책임지고 있는 수병들은 마른 헝겁으로 포신을 닦으며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6614함이다. 전방에 다수의 범선 출현. 계속해서 늘어난다. 수십 척이 넘을 것 같다. 6620함 지원 바란다. 현재까지 60여척.”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을 즐기고 있는 6620함 갑판에 공용주파수로 6614함 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 “여기는 물개다. 주파수 308. 지금 다수의 국적 미상 범선이 오드리강 하구로 다가오고 있다. 6620함은 현 위치를 알려달라.”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삼각주에 주둔중인 해병대대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주파수를 308로 바꾸고 물개와 통신을 마친 6620함 함장은 함에 비상을 걸고 최고 속도로 북북진을 시작했다. 6614함은 계속해서 수평선을 넘어오는 범선의 숫자를 세고 있었고, 그 숫자가 벌서 100을 넘어섰다. “완전 개 떼처럼 몰려오는구만. 힘들겠어.” 새까맣게 몰려드는 유럽 연합 함대는 발틱 해를 가득 메우고 오드리 강 하구로 다가왔다. 150까지 숫자를 세다 그만 둔 함장은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연신 떠들어댔다. 때를 같이해서 육지에서도 해병대대 방어선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해상과 육지에서 동시에 시작된 공격은 해병대대의 능력을 한참 상회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놈부터 조준.” 기관포 사정거리에 연합 함대의 선두가 들어왔다. 연합 함대 선두에 배치된 함에서도 6614함을 발견했는지 진형을 넓혀가며 포위하려는 행태로 움직였다. ‘펑펑펑’ “충격에 대비하라. 기관포 발포” ‘둑둑둑’ 해전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전투가 연합함대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와 6614함을 위협하며 바다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지근탄이 발생하며 바닷물을 갑판으로 쏟아부었다. 6614함장은 6620함이 올 때까지 버틸까 했지만, 6620함이 온다고 해도 별 수가 없을 듯 보였다. 저지해야 할 적선은 너무 많았고, 보유하고 있는 포탄은 한정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50미리 기관포로는 적선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어도 침몰 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천천히 후퇴하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준다.!” 함을 뒤로 천천히 물러나게 하면서 함장은 물개를 급히 호출했다. 자신만으로는 도저히 적 상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우린 천천히 수로 입구까지 후퇴하겠다. 적 상륙에 대비하라.”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 바란다. 가급적 남쪽 해안으로 유도하라. 한시간 안에 6620함이 지원할 수 있다.” ‘꽈과과광’ 물개와 통신을 마치고 6614함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을 때, 유럽 연합 함대 중간에서 연속음이 들려오며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폭음에 휩싸이며 서너 척이 단번에 침몰하고 있었다. “잠수함이다. 모두들 힘을 내라.” 함장은 폭발의 강도로 봐서 잠수함에서 발사된 대구어뢰가 폭발한 것이라 생각했다. 신항을 모항으로 하고 있는 발틱함대 잠수함 전대 소속 잠수함들은 대서양으로 나가는 해로가 봉쇄되자, 오드리 강 주변에 몰려 있었다. 안종순 중령은 6614함과 통신을 끝내고, 적의 예상 상륙지점을 생각해 봤다. 하구 삼각주라 어디라도 상륙이 가능했다. “병력이 없어. 전방의 공격을 막기도 급급한데, 상륙까지 허용한다면 끝장이다. 동쪽 해안을 맡고 있는 3중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그나마 가장 압력이 덜한 3중대를 해안 방어선으로 옮기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명령이 전달되기도 전에 3중대에서 비명 섞인 보고가 들어왔다. “대대장님. 호수에 배가 나타났습니다. 50척이 넘습니다. 지원 바랍니다.” “무슨 소리야 호수에 배가 어떻게 들어와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청 몰려옵니다.” 안 중령은 머리가 멍 해졌다. 유럽 연합 함대 일부가 호수에 들어왔다면 만일의 경우 이용할 후퇴로조차 위협 받고 있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든 막아. 상륙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알겠나 ?” 서둘러 무선을 끊은 안중령은 4111사단를 호출해 지금 상황을 설명하며, 후퇴 준비를 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버렸다. 4111사단장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안중령이 보기에 이곳을 사수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적은 수천문의 포대를 보유한 대규모 병력이었다. 안중령은 어차피 지키기 힘들다면 부하들의 목숨이라도 챙겨야 하는 게 자신의 의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되는 데. 참모장은 후퇴로를 찾아봐. 상륙를 저지하는데 실패하면 대대 전체가 후퇴를 해야 할 지도 모르니까 ?” 대충 어림잡아도 대대 전방에 수천 명이 포진하고 있었고, 발틱 해에서 오는 대규모 함대에는 적어도 일만 명이 상륙할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잠수함 전대가 공격을 하고 있지만 서서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동쪽 호수에서도 오천명 남짓 될 듯 했다. 이스탄불 황궁 김원중 신임 주터키 대한제국 대사가 무라도 4세의 은밀한 연락을 받고 하렘에 숨어 들었다. 하렘은 철저히 외부인과 단절된 곳이기에 김원중 대사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무라도 4세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를 보시고자 하셨사옵니까 ?” “그렇소. 일전에 전임대사께서 한 말이 생각나서 말이요.” “어렵지 않겠습니까 ? 저희 대한제국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천륜지간의 일에 끼여들만한 명분도 없거니와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럼 전임대사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엇입니까 ? 지금 대한제국이 나를 가지고 희롱하는 것 입니까 ? 일전에 반역자를 하와이로 보낸 것을 뭐라 말하겠습니까 ?” 말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말소리를 죽였지만 황제의 목소리에 무거운 노기가 짙게 깔렸다. 코에 걸면 코거리요,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되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분이라면 내가 곧 명분이 아닙니까 ? 비록 허수아비이긴 하지만 엄연히 제국의 황제이며 이슬람 교도의 수장이 누구입니까 ? 내가 원하는 것 보다 더 큰 명분이 필요하십니까 ?” “정녕. 어머니와 반목하실 생각이십니까 ?” “그렇소 !” 황제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한 제국이 부추긴 점도 있지만 황제는 스스로가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만 친정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재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도 한몫하고 있었는데 무라도 4세는 이번 기회에 재상을 없앨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친정을 위해 힘을 모으던 황제는 세상이 온통 전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황궁을 장악할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고, 대한제국이 협력자로 끼여들면서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황제와 밀담을 나누고 관저로 돌아가는 길 내내 김원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태후 타라한이 유럽과 접촉을 강화하고 대한제국을 멀리하면서부터 대한제국은 황제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운하가 봉쇄되고 보급로가 막히면서 새로운 보급로를 찾아야 했고, 대한제국은 그 대안으로 아프리카 남단에 보급기지를 건설하는 것과 흑해와 아조프해를 장악하는 것을 동시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재상이 황후를 만나는 날만 알아내면 되는 건가 ? 무라도 4세도 급하긴 급했군. 작은 미끼에 덥썩 물어버리다니. 그나 저나 정말로 이번 사건에 태후가 관련되었을까 ?”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서 이번 운하 사고의 보고서 내용을 떠올렸다. 보고서는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방향타가 망가졌으며, 가해진 힘은 화약 폭발로 추정된다라고 사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었다. 또한 정보 내부 문건은 유럽 연합측에 협조하는 세력이 터키내부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 배후에 타라한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포함하고 있었다. 지중해 함대 흑해 분함대 사이레 기지 사이레 대한제국 해군 기지 부근에서 잡일을 하던 압둘 하지즈는 매일 아침 새벽이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 왔다. 하지즈는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한시간 이상을 언덕에서 머물곤 했다. 끼룩거리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쫓아가던 하지즈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이 들어오자 유심히 바라 보았다. 너무 멀어서 조그맣게 보였지만 기지를 출항한 대한제국 함대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깜짝 놀란 하지즈는 구석에 삐죽 솟아난 바위 밑을 파내고 망원경을 꺼내 바닥에 엎드렸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함대의 숫자를 세던 하지즈는 서둘러 망원경을 접고 언덕을 내려왔다. 이스탄불 “대한제국 사이레 함대. 새벽에 기지를 떠남. 방향 불분명.” 무할라비 재상이 뒷짐을 지고 집무실을 서성댔다. 엉덩이에 닿아 있는 오른손에는 사이레에 심어놓은 첩자에게서 넘어온 암호 해독문이 들려져 있었다. 한참을 서성대던 재상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똑똑똑” 문 두드리던 소리와 함께 터키제국의 정보와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황궁 친위 정보 장교가 들어왔다. 무할라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정보장교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그래, 추가 정보가 들어왔나 ?” “네. 사이레 함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한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리고 크레타 기지에서도 거의 전 함대가 기지를 떠났습니다. 지금 크레타 기지는 소형함만이 외항을 순찰 중입니다.” “크레타 기지에서도 ? 움직일 여력이 없을 텐데 ?” “북유럽 상황이 많이 불리한 모양입니다. 대한제국이 발틱해를 상실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재상은 운하가 봉쇄되면서 대한제국 지중해 함대가 움직일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중해 함대가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대한제국이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봐야 했다. 대한제국이 드디어 마지막 카드를 빼들었지만 불안하기만 했다. 지중해에서 발틱까지는 자그마치 15일 이상이 걸렸다. 왕복 한 달이고 크레타 함대가 발틱해에서 머무르는 기간까지 합치면, 크레타 기지는 앞으로 최소 두 달은 속빈 강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대한제국 대사가 황제 폐하를 만나고 갔습니다.” “그래 ? 무슨 일로?” “확인 중입니다. 그런데 황제폐하 처소에서 은밀이 만가고 가서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알았네. 토마스 로 경에게 적당히 포장해서 전달하게. 아무래도 황태후 폐하를 만나러 가야겠어.” 재상은 대한제국이 유럽 연합에 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대한제국 육군은 거의 500킬로미터를 후퇴하고 있었고, 막강한 해군 전력은 전쟁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유럽 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괜찮으려나 ?” 무할라비는 타라한이 유럽 연합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들은 그라나다 지역을 터키제국에게 넘겨주는 대신 대한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유럽 연합에 들길 요청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의 두 아들이 그라나다를 통치할 가능성이 높았다. 재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지만, 먼저 타라한을 확실히 설득해야만 했다. “좋긴 합니다만, 대한제국이 호락호락하게 물러나겠습니까 ? 대한제국과 우리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지금처럼 양쪽에 협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타라한은 재상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그라나다와 대한제국을 저울질 하던 타라한은 유럽 연합보다는 대한제국에 무게를 더 주어야만 했다. 그만큼 대한제국은 타라한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는데 협조를 했던 것은 대한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지, 대한제국과 완전히 등을 돌리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패하면 그때는 그 화살이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폴란드 전투에서 대한제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름 안에 모스크바까지 밀린다는 소문이 파다 합니다.” “설사 모스크바까지 밀린다 해도 대한제국은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고도 모르십니까 ? 대한제국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요. 유럽 연합측에는 그냥 중립으로 남겠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유럽 연합과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싸우면 우리에게는 이익이죠. 유용한 정보를 계속 제공해서 유럽 연합이 좀더 오래 끌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사이 우리도 힘을 키워 나간다면 대한제국도 제국을 무시하지 못 할 겁니다. 대한제국이 유럽연합을 제압해 나간다 싶으면 우리도 동맹군의 일원으로 유럽을 치고 나가면 됩니다. 그리 아시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술상을 봐두라 일렀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재상은 타라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보다 한수 위임에 틀림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두사람은 그들만의 은밀한 일을 위해 밀실로 자리를 옮겨 작은 술잔을 마주보고 앉았다. “너무 늦었사옵니다.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재상이 침실에서 일어나며 타라한을 바라보았다. 양 빰으로 열기가 올라와서 빨갛게 달아올랐다. 속이 훤히 보이는 망사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던 타라한 역시 홍조를 띄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주섬 주섬 들어올리던 재상은 밖에서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옷을 떨어뜨릴 뻔 했다. “황태후 폐하 ? 황제 폐하 납시셨습니다.” 야심한 밤에 황제가 황태후 침소에 올 일이 없었다. 그보다 황태후 처소는 황제라 하더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황태후 처소를 지키는 경비병은 황태후의 허락이 없이는 설령 황제라 해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잠시 후 시녀의 떨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황태후 폐하 ? 황제 폐하 납시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 보고,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아침에 오시라 여쭈어라.” 일순 당황했던 타라한은 침착하게 말을 하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옷을 챙겨 입기도 전에 황제를 막고 있던 시녀 몸뚱이가 밀실 문을 뚫고 들어왔다. 밀실 문이 와장창 뜯겨져 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비상통로로 다가가던 재상이 너무 놀라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황제는 반쯤 올라간 재상의 바지자락과 어머니의 옷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타라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썩 나가지 못할까 ? 감히 어머니의 침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내 이 일을 묵과하지 않을 터. 황제는 썩 물러나라” 평소 같으면 황태후의 작은 소리에도 움츠러들었을 황제의 두 눈이 활활 불타 올랐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들어선 황제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 지금 무슨 죄를 범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 과부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와 정분을 통하면 사형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 여봐라, 저 죄인을 당장 끌고 가라.” 황제가 소리치자, 황제 뒤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재상을 묶으려 했다. “내 이놈들 ! 당장 물러서라. 난 이 나라의 재상이다.” “황태후 폐하 ? 황태후 폐하 ?” 아직도 사태파악이 되지 않은 재상이 고래 고래 소리쳤지만 이내 잠잠해 졌다. 병사 하나가 긴 창으로 재상의 머리를 휘갈겼기 때문이다. 피보라가 밀실 사방으로 튀었다. 황제에게 밀려들어온 시녀는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에게 넘겨 주십시오. 그럼 이일은 불문에 붙이겠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이곳을 벗어나실 순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내일 조례 때, 발표하시겠습니까 ?” “누구냐 ? 누가 너를 도왔더냐 ?” 자신의 정인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아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켰음에도 타라한은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를 몰아세웠다. “상인 연합입니다.” “그래 ? 상인 연합이 너를 도왔단 말이냐 ?” 한동안 무라도 4세를 쏘아보던 타라한이 눈을 감았다. “그래. 상인 연합이란 말이지 ? 대한제국만 아니면 되었다.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컸구나. 그만 나가거라. 내 너의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내일 아침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물러가거라 ?” “안됩니다. 어머니는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타라한은 지금 상황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인 줄 알았던 아들이 어엿한 제국의 황제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에 어머니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아들에게 황제로서의 통치권을 넘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신뢰나 존경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황제가 움직인 병력은 기껏해야 100여명이 넘지 않았고, 대한제국군이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황후전을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켜야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황후전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놓았고, 대한제국군이 날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때 황태후를 여기에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웅웅웅웅 타타타타’ 모두들 단잠에 빠져있을 이른 새벽, 언제나 그렇듯 교황은 똑 같은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을 마친 교황은 4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 정문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기둥을 지나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 때 멀리서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황이 멈추자 일행 역시 그자리에서 멈췄다. 우르바누스 8세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교황의 눈에 각 기둥 꼭대기에 올려져 있는 12성인의 조각품이 들어왔다. 맑은 하늘은 고요했지만 은은하게 들려오던 소리는 점점 요상하게 들려왔다. 바닥에서 성당 꼭대기 십자가 상까지 높이가 자그마치 133미터에 달하는 모든 기독교인의 총 본산인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 웅장함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 너무 오랫동안 고개를 저치고 있어서 인지 교황은 목에 오른 손을 갖다 댔다. “무슨 소리지. 환청인가 ? ” 궁금증이 발동한 교황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내려섰다.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며 하늘을 바라보던 교황은 뭔가를 찾으려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소리가 소음으로 다가와 새벽 광장을 시끄럽게 울려댔다. 성당 지붕 반대편에서 밝은 빛을 뿜으며 이상한 물체가 불쑥 솟아오른 것은 순간이었다. 불빛 몇 개가 교황을 비추자, 교황은 일순 눈앞이 멍해지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회오리치며 광장을 휘감아 돌아나갔다. 교황 일행 바로 위에서 굉음을 내며 정지한 물체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더니, 대한제국 특수 부대원들이 광장으로 뛰어 내렸다. “2소대는 왼쪽 건물을 확보한다. 옥상에 저격병 배치하고, 3소대는 광장에 저지선 깔아.” 교황은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에 실눈을 떴다.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비행체에서 내린 악마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까만 두건을 쓰고 두 눈만 반짝거리는 대한제국 전략 기동군 공수여단 병력들의 모습은 교황에게 악마 그 자체로 보여졌다. “주여 ! 사탄아 물러가나 ! 어찌 저희에게 저런 악마를 보내셨나이까 ? 주여 ? 불쌍한 어린 양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사탄아 물러가라 !” 묵주와 성경을 앞세우며 공수여단 3대대 2중대장에게 다가간 교황이 십자가를 들이 밀었다. 절대선의 상징인 십자가와 자신의 믿음이 악마를 물리칠 것이라 확신하는 듯 교황의 발걸음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노인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 이곳 사람들은 잠도 없나 ? 어이 소하리 병장, 이 사람들 한쪽으로 치워.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교황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체 2중대장은 작전에 걸리적 거리는 노인네들을 한쪽으로 치워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2중대 병력을 내려 놓은 잠자리들은 대성당을 너머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이번 작전에는 크레타 기지에 주둔중인 전략 기동군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잠자리들이 동원되었지만, 여단 병력을 한번에 실어 나르기에는 60대의 잠자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티레니아 바다에 떠있는 항모와 바티칸을 앞으로도 십여 번을 왕복해야만 했다. “대대장이다. 2중대는 현지점을 3중대에게 넘기고 교황 신변을 확보하라. 교황은 아직 침실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가급적 살상을 피하고 획득한 포로들은 광장으로 이송 시키도록” 12개 건물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투입된 3대대 병력은 바티칸의 핵심 건물을 장악하고 내부를 수색해 나갔다. 광장은 추기경들과 주교들 그리고 하인들로 금세 가득 찼다. 건물 수색이 끝나 갈 무렵 여단장과 함께 1대대 병력이 바티칸으로 내려와 로마 시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충성” “고생했어. 차가운 바닥에 저렇게 내버려두면 병 생겨. 건물 안으로 수용하지 ?” 여단장은 광장에 무릎 꿇려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3 대대장의 경례를 받았다. 끌려 나오면서 병사들에게 구타를 당했는지 몇몇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어떤 이는 속옷차림으로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소낸스키 대위 ? 저 사람들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고 잘 감시해.” “근데 교황은 어디 있나 ?” 대대장은 여단장의 물음에 머뭇거렸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교황을 사로잡는 데 있었지만, 아직까지 교황을 잡기 못 했기 때문이다. “아직 찾지 못 했습니다. 침실에는 없었습니다. 지금 수색 중이니 조만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외부로 빠져나간 흔적은 없습니다.” “그래 ? 해뜨기 전에 꼭 찾아내게. 이곳은 오랜 역사가 깃든 도시야. 비상통로 하나쯤은 다 있을 거라고. 지하실을 다시 한번 수색해 보도록. 어디 포로들 심문이나 한 번 해볼까 ?” 여단장의 말투에서 오랜만에 소풍 나온 어린아이의 들뜬 기분이 느껴졌다. 바티칸의 경비는 의외로 허술해서 지금껏 총소리 한방 나지 않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선 여단장은 사람들이 모두 십자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에 눈살을 찌뿌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위해 헛기침을 했지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단하군.” 여단장은 성당 내부의 화려한 조각에 감탄사를 연신 내 뱉었다. 원형 천정과 벽화들을 둘러보던 여단장은 무리 중에 확연히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나 저나 저기 저 사람은 누구야 ?” “네. 가장 먼저 붙잡힌 포로입니다. 신분은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 먼저 저 사람부터 심문할 테니 대려오게” “알겠습니다.” 부관이 경비병에게 손짓을 하자, 병사 둘이 여단장이 지목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이 노인에게 다가가자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병사들을 가로막으며 노인을 둘러쌓다. “형제들이여 성하를 보호하라.” “물러가라 악마의 자식들아 ? 하나님의 노여움이 두렵지 않느냐 ?” 기도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노인을 가운데에 두고 병사들의 접근을 방해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병사들이 총을 고쳐 들자 여단장이 급히 소리쳤다. “총은 쏘지마. 새벽부터 피보기 싫으니까 ?” 부관이 라틴어를 여단장에게 번역하며 성하라는 말을 강하게 발음하자, 여단장의 얼굴이 몰라보게 환해졌다. 그 범상치 않은 노인네가 교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문을 해봐야 하겠지만, 그 노인을 성하라고 지칭했다면 거의 틀림 없었다. 부관은 그 중 유독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누가 교황인지를 물었고, 겁에 질려 오줌을 질질 싸고 있던 사람은 여단장이 지목한 노인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항모 전단장에게 지급으로 연락하도록 내용은 일단계 임무완료. 이단계로 돌입한다. 확보한 물건을 인수해 가라.” “일이 너무 쉽게 끝나버렸네. 소풍치고는 밋밋해. 나머지는 3대대에게 맡기고 옥상으로 한번 올라가 볼까 ?” 일차 목표는 싱겁게 끝났지만 정작 지금 부터 시작이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바티칸이 대한제국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주위에서 이곳을 구원하기위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성베드로 대성당 옥상 위에 올라간 여단장은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보았다. 1200년의 고도 로마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서쪽 통로만 열어두고 나머지 도로는 주변 건물을 폭파해서라도 다 막아. 이곳 성당에 여단 지휘부를 설치하고 해뜨기 전에 옥상에 잠자리 착륙장을 하나 만들어. 대충 정리가 끝나면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이제부터 시작이야. 적 심장부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한번 보자고.” 여단장은 나침반을 들어 동쪽이 어딘가를 찾았다. 아직 해가 뜰 시간이 아닌지, 동쪽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린 여단장이 난데없이 고함을 질러댔다. ‘아아아아’ 여단장의 고함소리가 로마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며 아침을 재촉했다. 출처 : http://cafe.daum.net/2091-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겁게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