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초 일제는 미국, 영국, 중국 그리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구성된 ABCD(America, Britain, China, Dutch) 연합에 의해 포위되었다. 절망감에 빠진 일본은 1941년 4월 13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동부에 대해서는 안심하고 서구에 대처할 수 있었고,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선 안심하고 태평양 지역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약 체결식에서 일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松岡洋右, 1880~1946)는 축배를 들면서 “우리는 아시아인”이라고 했고,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Iosif V. Stalin, 1879~1953)도 “우리 두 사람 모두 아시아인이지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도라 도라 도라 VS 진주만을 기억하라!
1941년 7월 일본군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수도를 장악했으며, 이어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동인도제도를 정복하고자 했다. 암호를 입수하여 해독한 미국은 이에 대해 엄중히 경고했지만, 일본은 듣지 않았다. 이에 미국은 7월 25일 미국 내의 모든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조치를 취했으며, 8월 2일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점점 참전 쪽으로 다가가는 미국을 과연 일본이 당해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은 일본 정부는 미국과 협상하려는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 내 강경파가 들고 일어났다. 1941년 10월 도쿄의 호전파는 온건파 수상을 축출하고 군부 지도자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1884~1948)를 내세웠다. 전쟁의 길로 일로매진하겠다는 발악이었다. 절망감으로 이성을 잃은 일제는 도박 심리에 빠져들었고, 이는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으로 나타났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7시 55분,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군사시설을 기습 공격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이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침몰된 전함 USS 웨스트 버지니아 호. 이날의 기습 공격으로 인한 미 해군과 육군 사망자는 2,897명이었고, 일반인 사망자도 68명이나 되었다.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비행기 350대는 기습 공격으로 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때 일본 항공 부대 총지휘관이 진주만 상공에서 “우리는 기습에 성공했다”고 전한 암호 전문이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 Tora! Tora! Tora!)’다. 미국의 전함 8척 중 4척이 침몰했고, 3척은 큰 손상을 입었다. 비행기 570대 중 475대가 완전 파괴되었다. 미 해군과 육군 사망자는 2,897명에 이르렀고, 시민 사망자도 68명이나 되었다.
다음날인 12월 8일, 미국 상하 양원이 합동으로 개회한 가운데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는 연설을 통해 의회에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당일 상원은 만장일치(82 대 0), 하원은 1표의 기권(388 대 1)만으로 선전포고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이 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고,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진주만 기습 직전까진 미국 여론은 전쟁에 반대했지만, 이젠 사태가 역전되었다.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라는 구호가 미국인을 단결시켰다.
태평양 전쟁으로 반(反) 파시즘 연합 전선이 형성되다
1941년 12월 11일,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선언에 서명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이제껏 참전하지 않았던 미국이 일본에 이어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은 ‘반 (反) 파시즘 연합 전선’이 형성되며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1874~1965)은 이제 “미국과 한 배를 탔다”며 기뻐했다. 그는 전시 내각의 동의를 가볍게 얻어 역시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도 환호했다. 그는 “우리는 질래야 질 수가 없다. 3천년 동안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나라를 동맹국으로 얻었다.”고 말했다. 일본이 참전하면 미국은 태평양에 발이 묶이게 되고, 극동에 식민지를 둔 영국도 심각한 타격을 받으리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3일 후인 1941년 12월 11일, 일본의 유럽 동맹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소련 침공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고민하던 히틀러도 절망감에 몸부림치다가 그야말로 ‘미친’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미 의회도 같은 날 대(對)독일 선전포고를 했는데, 상하원에서 각각 88 대 0, 393 대 1로 통과되었다. 대(對)이탈리아 선전포고 역시 상하원에서 각각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아시아 전선과 유럽 전선을 하나로 통합시켰으며, 이듬해인 1942년 1월 1일에는 미국ㆍ영국ㆍ소련ㆍ중국ㆍ캐나다 등 26개국의 ‘연합국 선언’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반(反) 파시즘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와 관련,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파시즘은 공공연하게, 다양한 종류의 자유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모든 종류의 민주주의 체제, 소비에트 체제를 똑같이 파괴해야 할 적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오래된 영국 격언의 표현을 빌리자면, ‘따로따로 교수형 당하지 않으려면 모두가 단결해야 했다(They had all to hang together if they did not want to hang separately).’”
미국은 과연 일본의 기습을 유도했는가
루스벨트는 진주만 피격 직후, ‘전쟁 정보국(OWI: Office of War Information)’을 만들어 방송 저널리스트 엘머 데이비스(Elmer Davis, 1890~1958)가 이를 이끌게 함으로써 이후 홍보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OWI는 모든 매체에 일종의 보도 지침을 내리는 한편 자체적으로 전쟁용 방송 프로그램, 영화, 포스터 등을 생산해냈다. 또한 여론 공학을 비롯한 각종 심리전을 위해 학계의 전문가들을 대거 활용하였다.
‘전쟁정보국(OWI)’에서 만든 포스터. OWI는 전쟁 홍보를 위한 방송 프로그램, 영화, 포스터 생산에 앞장서며 전 국민 총동원 체제를 자리 잡게 하는 데 일조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처럼 할리우드 스타들이 전쟁 채권을 파는 데에 앞장섰는데, 이들이 판매한 채권 액수는 1942년에만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어린이들도 이 운동에 동참해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채권을 사들여, 연간 어린이 한 명당 21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위 경영인들이 자원하여 연간 1달러의 급료를 받고 전시체제 전환에 열심히 일조한다고 해서 생겨난 ‘원 달러 맨(One Dollar Man)’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미국은 전 국민 총동원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
1942년 미국 정부에 의해 제작된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Dec. 7th!)” 선전 포스터. 이를 두고 미국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유도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모든 매체를 뒤덮다시피 한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슬로건의 위력은 컸다. 그런데 이게 바로 미국의 ‘기습 유도설’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을 설득해 미국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로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가능하도록 경계 태세를 허술하게 하였다.” 1948년 역사가 찰스 비어드(Charles A. Beard, 1874~1948)가 이런 주장을 편 이후로 다양한 ‘루스벨트 음모설’이 제기되었다.
피츠버그 대학 교수 도날드 골드스타인(Donald Goldstein)은 “루스벨트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당시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 재난이 필요했다. 그것도 작은 피해가 아니라 큰 피해가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해군 출신 언론인 로버트 스틴네트(Robert Stinnet)도 [거짓의 날(Day of Deceit)]이라는 책에서 루스벨트와 그의 참모들이 공습 전 하와이 주변 해상 정찰을 중지시킴으로써 일본의 대규모 공격을 유도했다고 주장한다.
“왜 당시 하와이 주둔 미 해군 사령관 허즈밴드 킴멜(Husband E. Kimmel, 1882~1968) 제독과 육군의 월터 쇼트(Walter C. Short, 1880~1949) 장군은 기습을 당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실제로 이를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세 차례나 열렸지만, 미국이 과연 일본의 기습을 유도했는가는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미국은 이미 한달 전인 11월에 일본의 암호문을 입수함으로써 전쟁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공격 지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하와이의 진주만과 필리핀의 마닐라 기지에 경계 명령만을 내리고 있었다는 게 그간의 정설이었다. 1961년 발행된 [웹스터 영영사전]이 ‘Pearl Harbor’에 ‘진주만을 의미하는 명사’ 외에 ‘경고 없이 갑자기 공격하는’이라는 동사의 용법을 덧붙여 소개한 것도 그런 의외성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공개된 비밀이 해제된 문건 등은 미국의 ‘기습 유도설’ 쪽을 더 뒷받침해주고 있다. 몇 가지 내용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루스벨트는 이미 11월 25일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1867~1950)에게 다음주 월요일 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어 너무 큰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부각시켜 국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전쟁 지지를 얻어낼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11월 26일 영국의 처칠 수상은 “일본 항공모함이 하와이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내용의 긴급 전문을 루스벨트에게 보냈으며, 같은 날 코델 헐(Cordell Hull, 1871~1955) 미 국무장관은 두 나라 사이의 호혜 평등을 요청한 일본 천황의 서신을 들고온 주미 일본 대사에게 의도적으로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일본의 전쟁 도발을 부추긴 게 아니냐는 것이다. 또 헐 국무장관은 11월 29일 처칠의 전문을 UP 통신 기자 조 레이브(Joe Leib)에게 보여주며,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12월 7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관해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다음날 보도한 “공격 미리 알았다”라는 헤드라인 기사에서, “미국 정부는 최소 1주일 전부터 일본의 진주만 공습 계획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며, 헐 국무장관으로부터 이 정보를 전해들은 사람이 레이브 기자 외에도 여럿이라고 보도했다.
12월 5일 프랭크 녹스(Frank Knox, 1874~1944) 해군장관은 국무회의에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임박했음을 전군(全軍)에 알려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루스벨트는 이미 다 알고 있다며 함구하라고 지시했다. 12월 6일 오후 9시 반, 루스벨트는 34명의 손님이 참석한 만찬 자리에서 “내일 전쟁이 터진다”고 밝혔다. 12월 7일 아침 진주만 공습 보고를 받은 루스벨트는 ‘위대한 구원(great relief)’이라며 반겼다. 루스벨트는 같은 날 오후 3시에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우리의 적은 일본이 아니라 히틀러인데, 일본이 우리에게 참전 기회를 주었다”고 말했다. 그날 밤 루스벨트와 회견을 가진 CBS 방송의 기자 에드워드 머로(Edward R. Murrow, 1908~1965)는 “국가적 재난과 다름없는 진주만 피습을 맞은 루스벨트의 태도가 상식 밖으로 태연했으며 오히려 환영하는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하는 사람에게 어찌 마키아벨리즘이 없는 걸 기대할 수 있으랴만서도, 루스벨트의 경우엔 그 솜씨가 발군의 경지에 이르렀다. 역사가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James MacGregor Burns, 1918~2014)가 자신의 책 제목을 [루스벨트: 사자와 여우(Roosevelt: The Lion and the Fox)](1956)라고 붙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여우’라는 표현은 좀 심하다고 생각한 걸까? 루스벨트에게 호의적인 역사가 토머스 베일리(Thomas A. Bailey, 1902~1983)는 “루스벨트는 진주만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 국민들을 여러 번 속여왔다. …… 그는 마치 환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의사와도 같았다.”고 말한다.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던 일본인들, 그리고 그 후
1941년 12월 8일 월요일 아침, 샌프란시스코의 시민들이 신문을 통해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 소식을 접하는 모습. 3천 명에 가까운 자국민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는 엄청난 사건 이후, 반전(反戰) 여론은 한번에 뒤집어졌다.
기습 유도설의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진주만 기습 이전엔 반전(反戰) 여론이 매우 높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1941년 6월의 여론조사에선 미국 국민의 29%만이 참전을 지지했다. 영국에 물자를 공급해준다든가 하는 다른 대안들과 함께 설문이 제시된 조사에선 참전 지지율이 6%로 떨어졌다.
그런데 ‘진주만’이 일시에 모든 걸 바꾸었다. 다른 파괴는 제쳐놓더라도 3천 명에 가까운 자국민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는 건 그 어떤 미국인도 묵과할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강력한 고립주의자였던 공화당 상원의원 아서 반덴버그(Arthur H. Vandenburg, 1884~1951)는 진주만 기습 직후에 쓴 일기에서 “오늘 모든 현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고립주의는 끝났다”고 말했다. 그건 곧 당시 절대 다수의 미국인이 갖게 된 생각이기도 했다. 몇몇 상원의원을 포함하여 많은 미국인들이 우선 모든 병력을 집중시켜 일본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는 게 국민 정서상 당연한 일이었지만, 루스벨트는 독일에 대한 전쟁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관철시켰다.
치욕은 이성을 멀게 하는 것일까?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에 분노한 미국의 한 하원의원은 “나는 현재 미국, 알래스카, 하와이에 살고 있는 모든 일본인들을 붙잡아서 강제수용소에 처넣는 데 동의합니다. 그들을 박멸합시다.”라고 외쳤다. 그의 외침은 다수의 정서였다. 1942년 2월 루스벨트는 군대에 서부 해안(태평양 연안)에 살고 있던 남녀노소를 불문한 일본계 미국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12만 명의 일본계 이민자들 가운데 4분의 3은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일본계 이민자들은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미국 쪽으로 한참 기울어진 1944년 12월 17일까지 감옥과도 같은 강제수용소에서 2년 반 동안 갇혀지내야 했다. 미국 정부는 이를 두고 나치 독일이 만든 유태인 강제수용소와 같은 표현인 ‘concentration camp’라고 불리길 꺼려 단순한 주거 이전이라는 의미가 강한 ‘relocation camp’라고 불렀지만, ‘강제수용소’인 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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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주만 공격 이후 한 일본계 미국인이 운영하는 식료품점 앞에 “나는 미국인이다(I am an American)”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사진작가 도로시아 랭이 1942년 3월에 찍었다.
2 1942년 2월,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계 이민자들을 붙잡아 강제수용소에서 생활하게 만들었다. 사진은 유타 주의 밀러드 카운티(Millard County)에 위치했던 토파즈 전쟁 재배치 센터(Topaz War Relocation Center)의 모습. |
1988년 로널드 레이건(Ronald W. Reagan, 1911~2004) 대통령은 생존한 일본계 피수용자들과 유족들에게 모두 16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사과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법안은 일본계 미국인들을 억류한 것이 “인종적 편견, 전쟁 공포, 그리고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에서 비롯된 미국 정부의 과오였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는 자발적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JACL(전국 일본계 시민협회)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여기에 비밀문서로 보관되었다가 1970년대 일본계 3세대 변호사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발견된 ‘먼슨 보고서’가 미친 영향이 컸다.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본 루스벨트는 일본과의 전쟁이 터지면 일본계 미국인들이 어느 나라에 충성심을 보일지 알고 싶어했다. 이에 대해 조사한 보고서가 ‘먼슨 보고서’인데, 진주만 기습 한달 전에 나온 이 보고서는 “일본계 미국인은 미국에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럼에도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감금했으니, 미국 정부로선 사과를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게 된 셈이었다.
미국 법무부가 당시의 피해자들을 찾아나선 결과, 약 6만 5천여 명이 아직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미 정부는 이들이 모두 고령임을 감안해 고령순으로 매년 약 2만 5천여 명씩 3년 동안 배상을 실시키로 하는 한편, 배상이 결정된 88년 이후 사망한 피해자에 대해서는 유족에게 배상금을 주기로 했다.
1990년 10월 9일 미 법무부 강당에서 열린 배상금 전달식에서 법무장관 딕 손버그(Dick Thornburgh)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만든 당신들은 미국을 더 강하고 긍지 있는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미국 국민들은 당신들에게 빚을 지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조지 부시(George H. W. Bush) 대통령도 사과문에서 “돈이나 몇 마디의 위로로 과거의 쓰라린 상처가 가실 수는 없을 것”이라며 “비록 우리가 과거에는 잘못을 저질렀어도 지금은 분명히 정의 편에 서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언론인 문창극은 “일제 때 강제징용당하거나 정신대로 끌려가 학대받았던 한국인들을 외면하고 있는 일본 정부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에게 생각할 능력은 있는 걸까?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에 대한 재판을 참관한 미국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아이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했는데, 일본 정부에게도 똑같은 평가를 내려야 하는 건 아닐까?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폭격이 일어난 지 70여년이 지난 오늘날, 미국 정부의 아시아 외교정책이 친일(親日) 일변도로 흐르는 것도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구호를 까맣게 잊은 ‘사고력의 결여’ 때문으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일부 역사가들의 주장대로, 진주만 사건은 사실상 미국이 만든 ‘기획 작품’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