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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 때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수녀원 정원에 아늑히 늘 울려 퍼지던 손으로 흔드는 낮은 종소리가 그 날 아침은 유달리 조용했다. 안데스 산맥의 급한 계곡을 타고 내려오던 조잘대던 담벼락 너머의 시냇물 소리도 심지어 산등성 넘어 들려오던 풀 뜯는 소들의 고느적한 울음 소리도 온데 간데 없다. 가느다란 아침 햇살만 커튼 틈으로 수줍은 듯 살그머니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깨여 고단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원래 6시 반에 수녀원을 출발해 봉사센터인 'Volver a Vivir'까지 가야 했는데, 매일 땔감나무 준비로 안 쓰던 몸을 많이 쓴 탓에 늦잠을 자다 보니 8시를 훨쩍 넘겨버렸다. 자연산 달걀도 제대로 못 낳는 밉상이라던 암닭 두 마리지만 일주일 내내 고맙게도 이른 새벽마다 아침을 알려줬던 녀석들은 이제서야 담장 아래의 닭장에서 "꼬끼오"하고 목놓아 울어댔다.
부랴부랴 세면을 마치고 수녀원 아래층 마당으로 내려가니 그 일주일 사이에 수녀님들보다 딸과 훨씬 더 가까워져 버린 애완견 Tony가 또 꼬리를 흔들며 몰골 형편없이 허둥거리는 나를 빤히 처다 봤다. 이곳 수녀원의 지킴이 목적으로 아랫 마을에서 얻어와 정성들여 키워놨더니 애당초 소기의 목적과는 달리 사람만 보면 꼬리만 살래살래 흔든다는 유수녀님의 푸념에도 아랑곳 않고 안데스 산맥의 흰구름 넉넉히 걸린 산봉우리가 내려다 보이는 수녀원 언덕의 잔디밭 명당자리를 꽤차고 누워 있었다.
봉사 센터까지는 가파른 언덕길의 연속이라 이 나라 수도 보고타의 현대자동차 지점에서 20여년 전에 기증 받았다는 에어콘은 고사하고 라디오조차 없는 "Atos"타고 내려가야 하지만, 수녀님왈 "이래봐도 이 깡통차가 당시에는 이 마을에 제일 처음 들어온 차" 였다고 숨겨놓은 전설을 말하듯 파리조차 잡지 못할 듯한 성격이지만 가차없이 차에 붙은 도롱룡을 손바닥으로 쫓으며 말한 수녀님의 일상이 묻어났던 모습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별 다른 큰 고장없이 달려줬고 이 차로 시내로 장보기도 하고, 마을 유지들을 만날 때도 사용하며 급한 환자가 생기면 빨리 달려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센터는 수녀원에서 차로 15분 정도의 거리인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평일에는 약 80여명 모이는데 대부분이 집이 없는 노숙자들이나 직장이 없는 사람들이라 점심 배급 시간보다 훨씬 일찍 이 센터에 와서 앉아서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고 어떤 이들은 저녁까지 챙겨갈 요량으로 남은 음식을 담을 그릇까지 가지고 왔다.
식단은 수녀님이 건강을 위해 그들이 싫어하는 야채 샐러드를 포함시켜 두세가지 반찬에 국과 밥이며 레몬으로 만든 음료수가 제공되는데 하루에 4~5명의 이웃 아주머니이 교대로 나와 음식을 만들고, 이곳에서 밥을 얻어 먹다가 스스로 봉사자가 남자들은 주로 힘을 필요로 하는 땔감 나무나 식재료 구하는 일, 그리고 식당의 테이블 세팅과 청소를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이 이외에 오후 프로그램으로 머리를 깍아 준다거나 의료 및 상담사역을 해주며, 이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옷만들기, 요리교실, 요가 등등이 이 센터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아침 6시 45분까지 봉사센터에 가서 아침을 준비하는 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데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Mariana(마리아나)라는 할머니가 늘 기다리고 있었다.
일찌기 아들을 잃고 조카 집에 얹혀사는 이 할머니는 센터까지의 한 시간 가까운 거리를 교통편이 없어 항상 걸어서 오는데 70이 넘은 고령을 고려해 수녀님이 화요일은 집에서 강제로 쉬게 하였지만, 할머니는 아직도 일할 수 있는 자기를 쉬게 한다며 투덜댄다고 한다. 하루 세 시간씨을 걸으며 빈자를 위해 자신의 노구를 헌신하는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한 없이 부끄러운 나이론 크리스찬이었다.
이처럼 그 봉사센터는 가게를 하는 사람들은 남은 물건으로 후원하고, 시간이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은 직접 와서 요리를 하며 몸으로 봉사하고, 직장을 다니기에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돈으로 후원을 하고,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동네 사람들은 오로지 기도로 이 봉사센터를 후원하고 있다.
보고타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충분한 금전적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 모든 약속을 유 수녀님이 거절했던 것은 아마도 그 지원의 뒤에 진심으로 이곳 콜롬비아의 빈자를 사랑하는 마음의 유무로 결정했지 않았나 싶다. 마음 없는 막대한 한국 정부의 지원금보다 진솔한 마음이 담겨진 이 마을 사람들의 작은 후원이 그곳 수녀님들에게는 더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한쪽 다리가 불편해 목발을 집고 무거운 배낭까지 매고 제일 일찍 이 센터로 오는 Carlos (까를로스) 아저씨는 한국에서 수녀님이 구해 준 피리로 직접 작곡을 했다며 우리들 앞에서 식기도를 하기 전에 연주를 해줘 안데스 산맥의 초록빛 만연한 산기슭을 마치 콘서트홀로 바꿔 버린 듯 했다.
식후에는 옆에 있던 딸을 위해 첫 날 만난 후에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며 손수 만들었다는 귀걸이를 선물로 건네 줬는데 가느다란 철사를 정교히 말고 돌리고 꺽어가면서 나선형을 그리며 만들어 가다고 중간중간 옥돌같은 작은 돌조각에 구멍을 파서 철사로 꿔멘 그의 작품에서 남들은 할 일 없어서 취미 삼아 만들었다고 할지는 몰라도 그 귀걸이를 선물 받은 우리로서는 그의 정성에 Gracias라는 감사의 말 이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인디오들이 외출시에 즐겨 쓰는 솜브렐라(남미풍의 차양이 넓은 모자)를 늘 쓰고 콜롬비아의 전통 문양이 새겨진 긴 칼집에 장도를 늘 옆에 차고 다니면서 땔목을 자르거나 센터의 길게 자란 잡초를 베는데 사용한다는 봉사자 Marcos(마르꼬스) 아저씨는 서부 영화에서 황야를 누비는 멋진 멕시코 인디안 역에서나 나올 법한 폼으로 늘 왕년에 잘 나갔다고 으시대는 게 재미라고 했다.
이 처럼 많은 마을 사람들의 조력으로 세 수녀님이 감당하기 버거운 일을 함께 이루어 가는 모습이 안데스산맥의 바위 틈에도 자랄 법한 에델바이스의 진한 꽃향기보다 더 고운 사람의 풋내나는 사람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고, 식사를 끝내면 때로는 남아 먹기 싫은 음식도 준비한 이들이 마음 상해할까봐 천천히라도 꼬박 씹으며 음식을 비우는 거으린 잔주름이 쌓인 얼굴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사실, 콜롬비아에 가기 전에는 케릴라들이 마약을 거래하고, 마을을 약탈해 가며, 좀도둑이 많고, 시끄럽기만 하다던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고 또 그렇게 상상했었는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나의 노파심이 너무 부질없었음을 그들의 말고 얼굴과 그리고 따뜻히 볼키스를 하는 가운데서 깨닭을 수 있었다.
수녀원이 산 중턱에 위치해 있지만 그들 대부분이 어려운 가정 형편이라 땅값을 내지 않아도 되는 산꼭대기로 올라가 살다보니 해가 중천에 작열히 뜬 점심 때 비탈진 산길을 걸어 점점 올라가다 고산병이 걸린 듯 숨이 가파 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 산을 오르기 한 시간여 만에 딸 레이첼은 어지럽다고 주저 앉더니 이내 속이 안 좋아 토해내는 고산병 증세를 보여 그늘에서 에콰도르 출신의 밀레암 수녀님과 쉬었다 하산하기로 하고,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의 산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정도의 고지대면 이 산골 사람들을 찾아오는 것은 생각컨대, 어른키의 반만큼 큰 날개를 가져 페루에서는 영웅이 죽으면 환생해서 "Condor (콘도르)" 가 된다고 하는 이 전설의 새들이나 유행가 가사처럼 구름도 쉬어 갈 만한 높은 지대라 하얀 뭉개구름 정도일 터인데 아무리 자연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곳에 평생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구름보다 멀리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 아랫마을이 살아서는 천국 만큼이나 그리운 곳인지 모르겠다.
문득 "가난보다 더 힘든 것은 외로움" 이라는 글귀를 그저 명제로만 여기고, 머리로만 이해했던 내가 당시의 방문을 통해 가슴으로 느끼고 보니, 사람이 천하보다 소중하고 한 영혼 한 영혼이 하늘보다 귀해야 함을 첨단이 지배하는 맨하탄의 사무실이 아니라, 바로 이 맑디 맑은 청명한 안데스의 하늘 아래에서 깨닭은 보람된 하루였다.
센터의 봉사를 마치고 수녀님들은 오후에 요리강습이 있어 우리는 숙소로 미리 돌아왔다. 식곤증 때문인지 오래간만에 방문과 창문을 열어 놓고 Teka라는 원목나무로 만든 결 좋은 침대에 누워 있으니, 산기슭에서 때를 기다렸다는 듯 살금살금 올라오는 산들바람이 자장가 소리로 내는 바람에 잠이 들고 말았다.
이곳은 적도에서 가깝기는 하나 고지대에 위치한 열대지방이라 사계절이 늦봄과 같은 에어콘도 필요없는 18~23도 정도의 온화한 기온이라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제법 센 바람 때문에 오히려 썰렁할 정도인데 한 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열대우림의 우두둑하는 소나기 소리에 낮잠을 깨 창문을 닫으려니 안데스 산맥의 봉우리들은 이미 구름 위에서 햇볕에 쬐고 있어 곧 그칠 것 같았다.
콜롬비아는 꽃수출국으로도 유명한데 특히 주요 품목으로 장미, 카네이션 그리고 양난이라고 한다. 가령, 장미 만으로도 색깔별로 30여종이 된다고 하는데 사랑을 표현할 때는 붉은 장미, 결혼식에는 흰 장미,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떠나 보내는데 쓰이는 노란 장미등 다양했다.
특히 양란의 경우 이 나라에서 자라는 난의 종류만도 4,000여종이 있다고 하는데 1,500여종은 콜롬비아에서만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종류가 많다 보니 특징이 있는 난 종류도 많은데 아쉽게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밤에만 피는 난이라든가 100년 가까이 사는 장수하는 난 등 종류 만큼이나 기이한 난들도 많다고 한다.
사철이 봄날인 관계로 일년에 두번 꽃을 피우는 나무들 많아 돈 많은 부자들 집의 정원수로 특히 인기가 많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렵게 사는 집이라도 늘 화분을 집에서 가꾸고 있는데 어떤 집은 화분을 살 돈이 없어서인지 병마개로 화분을 만든다든지, 큰 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잘라 화분대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많이 보았다.
워낙 꽃이 많은데 그 중 특이한 것은 아래의 진 핑크 꽃나무 경우 줄기부터 잎 그리고 꽃까지도 모두 같은 색을 하고 있는 것도 있고, 비가 적기에 자주 와 주는 덕에 뿌리가 묻혀 있을 필요가 없는 Air-plant들도 많이 있어 공기 중에 수분만으로도 서식이 가능해 높은 나무가지의 그늘이나 썩은 나무에 붙어 사는 열대 식물들도 있었다.
또 한가지 나무에서 같은 색계통이지만 다른 여러가지의 색을 가진 꽃이 같이 피는 나무들도 있는데 가령 연한 자주색과 진분홍의 교합이라든지, 노랑과 주황색이 같은 줄기이지만 다른 꽃봉우리를 만들어 내는 꽃나무도 있으니, 이런 꽃을 보는 이곳의 사람의 눈을 풍요롭게 해줄 뿐만 아니라, 꿀을 찾아 날아드는 벌이나 나비들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꽃을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집으로 돌아갈 때는 꼭 이곳에서 만든 꿀을 몇 병 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대지역이 강우량이 풍부한 덕에 적도 주변에만 서식하는 열대식물들도 많은데 꽃과 잎의 구별이 모오한 꽃부터 꽃봉우리를 수직으로 길게 나열한 꽃, 위에서 아래로 자라는 꽃봉우리, 그리고 꽃잎이 솜사탕마냥 수백가닥으로 나와 있는 것도 있었다.
관광여행으로 온 것이 아니었고 딱히 식물원이나 유명한 정원을 간 것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다 눈에 들어오는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을 폰카메라로 담았을 뿐인데 정말 프로의 사진 작가라면 가히 그 땅에서 기교를 부리며 찍을 수 있는 장면들이나 광경이 얼마나 많을지 상상이 가고도 남았다.
원시 밀림을 간 것이 아니기에 많는 동물들을 접 할수 있는 기회는 없었지만, 손바닥만한 황금빛의 날개를 가진 나비나, 오색으로 치장을 한 새들은 아쉽게도 역시 카메라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냥 길 가다 만나는 동물들로 자라, 공작, 조랑말, 그리고 박제한 사슴이었다.
그중에 종을 알 수 없는 애완견이라기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이 마을 사람들과 동거하는 개인데 얼듯 보이에는 늑대같기도 할 정도로 위엄이 있고 덩치도 어마어마했다. 평소 개를 좋아하는 것는 아니지만 이 정도의 개이면 데리고 거리를 활보하면 필시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견 같았다.
모처럼 콜롬비아까지 왔으니 이 나라의 유명한 커피산업을 한번 체험하자는 유 수녀님의 제의에 흔쾌히 응해 급커브의 연속인 차도를 운전해 가며 약 한시간 반 떨어진 커피농장을 다른 두 수녀님과 함께 방문했다.
수년 전, 한국에 갔을 때는 수도 없이 많은 산을 뚫은 터널을 달렸는데 그곳은 긴 터널을 파기에는 경제적 타산도 맞지 않고 차량 수요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아 왕복 3시간의 거리에서 터널은 단 한 곳, 그것도 백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커피 농장 관리인의 안내로 커피나무의 모종 재배에서 부터 식목, 성장, 수확 그리고 가공까지의 공정을 듣는 체험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커피는 모종에서 2년 정도면 첫 수확이 가능하고 5년이 지나면 키가 너무 크고 맛이 덜한 관계로 다시 가지를 잘라 새 가지가 나는 것을 반복해서 20여년 정도까지 커피 수확에 적정이라 했다.
그리고, 20%는 대기업이 커피재배 회사지만 나머지 80%는 가족이나 마을 조합 경영의 영세농으로 커피의 수확철이면 일손이 부족해 다른 마을 사람들도 동원된다고 한다. 그런데 커피 원두를 따는 것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이 나라에서 제일 힘든 일을 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워낙 맨손으로 원두를 따다보니, 손가락에 지문도 지워질 정도라 했다.
빨갛게 무르익은 열매를 쪼개면 두개의 원두가 나오는데 이 원두 표면을 둘러싼 달달한 점액을 탈수해 제거하고 이 원두를 말리면 일단 원두의 수출할 수있는 공정은 끝난다고 했다.
이렇게 바싹 마른 원두의 껍질을 다시 벗긴 후에 굽는 정도에 따라, 그 정도를 1에서 15까지 나누는데 11정도가 제일 좋지만 우리는 처음 원두를 냄비에 굽는지라, 그 정도를 몰라 15정도의 시커먼 원두커피를 굽고 말았다.
여행 중 주말에는 중소 도시에 있는 빈민촌을 방문할 예정이지만,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밝게 사는 듯한 그들의 모습 만큼이나 광활한 안데스 산맥의 산봉우리들과 기묘한 산들을 바라보면서 내 평생 이렇게 낮에는 구름과 하늘을 가까이 한 적이 없었고, 밤에는 무수히 밝게 빛나는 별들이 두 눈 앞에 하염없이 떨어지는 야경을 음미한 적이 없다. 마치, 고등학교 시절 앙퐁스 도데의 작품 '별'을 연상하는 아름다운 밤하늘은 평생 보아왔던 밤하늘 중에 제일 아름다웠는데, 그 맑고 밝은 별들을 따서 집으로 가지고 온 것처럼 지금도 눈 감고 침대에 누으면 그려질 정도였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여정이 끝을 향할수록 꽃도 그 꽃을 가꾸는 사람과 그 꽃을 만들어낸 자연이 하나가 되어 사는 그곳이, 그리고 그곳 산골 마을 사람들의 작은 일상이 어느 곳보다 고느적해 보여 미국 집으로 돌아가도 눈 앞에 아른 거릴 듯 했다.
-후기-
몇 년전 뉴멕시코주에서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선교하고 있는 선교사가, 자신의 잘 아는 미국 동료 선교사가 멕시코 산간 오지로 선교 여행을 떠나, 그 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준 내용입니다.
하루는 그 선교사가 멕시코의 가난한 시골 장터에 나가서 선교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노점상들이 길가에 들어선 곳으로 통역을 대동하고 갔는데, 그 노점상 중에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으며, 오후녘의 따가운 햇살을 등 뒤로 하고, 기력없이 퍼져 앉아 마늘을 팔고 있는 인디오 노인이 있었는데, 그 선교사는 그 노인에게 다가가 마늘 한 꾸러미에 얼마냐고 묻자, 미화로 50센트 정도이며, 이제 마늘 네 꾸러미가 남아 이것만 팔고 집으로 가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 마음씨 좋은 선교사는 그 불쌍해 보이는 노인을 돕기 위해 10불짜리를 덥썩 내밀며, 몽땅 다 사 주겠노라고 제안을 하자, 노인은 완강히 고개를 저였답니다. 그러자, 황당한 눈빛으로 그 까닭을 묻자, 그 노인은 나머지 셋 꾸러미는 벌써 살 사람이 정해져 있다며, 정 필요하면 나머지 한 꾸러미만 팔 수 있다고 대답하자, 다시 그 까닭을 물었답니다.
그러자, 노인은 하나는 고깃집을 하는 안드로 것인데, 그의 아내가 몇 주전 아들을 낳아 신바람이 났다며, 그에게 줄 선물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고, 또 하나는 조그마한 식당을 하는 까르로스 것인데, 그의 남동생과 최근 집안 일로 많이 싸워서 속이 상하며, 형제간에 우애는 금보다 비싸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고, 나머지 하나는 식구가 열이나 넘는 마리아 것인데, 남편이 일을 안하고 놀고만 있다고 불평이 많다며, 남자들은 일이고 뭐고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으니, 오늘 저녁녘에 사러 오면 낙심말라고 격려해 주고 싶다며...........
이 이야기를 통역을 통해 들은 선교사는 어떻게 살 사람들의 이름과 개개인의 신상을 그렇게 상세히 알고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노인은 자기는 하루하루 파는 양이 정해 놓고, 그의 오랜 손님들과 일상생활 이야기랑,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을 듣고 말해 주는 것이 즐거움이며, 만일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리면 그들과의 대화도 없어지는데, 무슨 재미로 장에 나와 물건을 파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은 찌는 무더워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마늘들을 다 비싼 값이라도 선교사에게는 팔아 줄 수 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인의 이야기를 들은 이 선교사는 참으로 한심한 자신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자본주의식 사고에서 생활해 온 그 선교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싸게 사 준다는 사람에게 단번에 팔고 이윤을 많이 남기는 것이 경제적으로 효율적일 수 있겠지만, 이 멕시코 인디오 노인은 자신의 오랜 손님과의 만남들 그 자체가 삶의 보람이며, 인생 경험을 서로 나누며 마늘을 건내 주는게 즐거운 일이지, 물건에 이윤을 붙여 남의 돈을 챙겨서 자신의 몫으로 하는 것에는 일말의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곳 장터는 돈이 거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생의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남으면, 이웃에게 돌려주는 사람들을 위한 장터였다는 것 입니다.
우리는 가진 자면 대부분 그렇치 못한 자들에게 교만하고 갑질을 하기 쉽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햐기 보다 자신의 삶과 생각을 마치 고귀하고 옳은 것 인양 가르쳐 들기 쉽습니다. 돌이켜 보니, 한없이 교만하고 거만하기 쉬운 저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좋은 여행이었음에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할 수 있었고, 그 보다 훌륭한 유위숙 수녀님의 사역을 먼 발치서나마 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자랑스러운 딸들은 유명한 여배우나 K-Pop의 걸 그룹 혹은 스포츠 선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회색의 단색 수녀복을 입고 한없이 가난한 자를 섬기는 그 모습이 그 어느 한국의 딸보다 아름다웠고 자랑스러워 양팔을 넓게 벌여 안아주고 싶은 분이였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이름도 없이 그 모습 알아 주는 이 없지만, 그 절대자의 눈에는 반듯이 아름답게 비췄기 때문이겠죠.
기행 기록을 줄여서 적을려고 했는데 적다 보니 지루하기 그지 없는 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밤낮으로 기온 차가 심합니다. 역이민카페 식구들 모두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는 주말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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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많은 깨달음을 주는 글이였습니다.
surfer님
깨달음을 주는 글이란 말씀에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그런 분들의 조건없는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밝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뀠으면 하는 바램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제가 실제로 가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수녀님의 사역이 앞으로도 계속되어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되길 기원합니다
세명의 연약한 여인들이지만, 그 존재감은 콜롬비아의 그 어느 유력자보다 크고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명성이나 금전적인 것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선한 영향력을 끼칠수 있음을 느꼈습니다.
아르테미스님도 그런 분이 되신 줄 믿습니다.
생생한 안데스 산맥으로 여행기 감사합니다
윤동주시인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구절이 생각납니다
안데스 밤하늘에 아름다운별과 사랑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안데스 산맥의 고산지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알토 섹스폰으로 inves님의 아름다운 연주를 들으면 그 또한 아름다운 밤하늘이 배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늘 혼인 담긴 연주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선한 목적의 의미를 담은 교양다큐를 보는 느낌이예요.
부족한대로 서로 아끼며 착하게 사는 사람들..
자생하는 식물들도 아름답고 흥미로와요.
라 로바님.
선한 목적 뒤에는 눈물로서도 표현하기 힘든 아픔과 외로움과 억울함이 있었음을 그곳에 계신 수녀님들과의 짦은 만남을 통해 듣고서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모릅니다.
반정부 게릴라에게 납치된 어느 수녀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목숨을 내 놓고 사역하는 그 분들에게 엄중한 삶의 여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음에도 그 아름다움을 가리게 하는 것들이 있어 참 안타까움을 더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반도 남단에서 최고 높다는 지리산 천왕봉이 2천 미터가 안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해발 2000미터의 그곳은 적도 근처이지만 덥지 않고 영원한 봄의 계절을 가졌습니다.
주 콜롬비아 대사관에서 많은 돈을 투자하여 가난한 콜롬비아인을 돕는데 수녀님이 동행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자신들의 사역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오히려 세상에 물들지 않을까 걱정해서 정중히 거절하고 오로지 현지인들의 십시일반으로 모은 재정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랑은 돈이 아니라 마음, 정성이 담긴 마음, 상대의 아픔을 함께 진심으로 아파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늘 귀한 댓글에 그저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릴 것이 없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그럼, 늘 강건하시길 빕니다.
가본 적이 없는 콜롬비아의 경치와 사람들, 평생 해본 적 없는 남을 위한 헌신과 봉사 그리고 에릭님의 글에서 제가 잠시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누군가의 선행을 본받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마음의 정화를 느끼시는 근본에는 엘에이조박님의 아름답고 넉넉한 마음밭이 분명히 있었음을 압니다.
함께 하는 것,
참 힘듭니다만, 작은 것에서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답겠지요.
그럼, 건강에 유의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