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한국 게임 업계는 격동의 시대였다. 안으로는 패키지 게임에서 온라인 게임으로 접어드는 ‘과도기’였고, 밖으로는 [스타크래프트] 열풍이 몰아쳤다. 당시 게임은 IMF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찬란히 빛을 발하는 등대와 같은 산업이었다. PC방은 자영업 사업 아이템 1순위로 각광받았으며, 프로게이머는 가장 열망하는 직종으로 떠올랐다. 온라인 게임은 금방 폭발한 활화산처럼 맹렬한 기세로 솟아올랐다. IT산업의 선봉으로 떠올랐고, 수출 효자종목으로 인정받았다. 친구나 연인 혹은 직장 동료끼리 가볍게 '게임 한판' 하는 게 흔한 풍경이 됐다.
[포트리스]는 이런 격동기를 이끈 주인공이었다.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게임시장을 평정해 스타크래프트의 아성을 위협했고, 국내 게임시장에 캐주얼 게임 열풍을 일으켰다. 이 때부터 게임은 남녀노소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가입자 천만 명을 달성하며 ‘대한민국 첫 국민게임’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저작권 분쟁, PC방과의 마찰, 운영미숙, 서비스 중단, 시리즈 남발 등 그 어떤 게임보다 굴곡이 많았다. 그래서 [포트리스]는 한국 온라인 게임 황금시대의 주역이자, 굴곡의 게임사를 대변하는 게임이기도 하다. 15년이 지난 지금, [포트리스]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시들해졌다. 마치 젊은 시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노년에는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져간 은막의 스타들처럼 말이다.
한국 온라인 게임의 황금기를 가져온 첫 주인공은 아쉽게도 국산게임이 아니었다. 1998년 한국에 상륙한 [스타크래프트]는 마치 마른 들판에 불이 번지듯 사회 전반으로 급속히 퍼졌다. 당시만 해도 한국 게임시장은 혼자 즐기는 패키지 게임이 대세였다. 여러 명이 함께 멀티게임을 즐기는 스타크래프트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이후 RTS(Real-time strategy, 실시간 전략 게임)는 90년대말 한국 게임시장의 주류가 됐다. 너도 나도 스타크래프트의 아성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도전자들은 그저 그런 아류작들만 쏟아내다 결국 스타크래프트를 이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스타크래프크와 경쟁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국내 게임사들은 온라인 게임, 그 중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 플레잉 게임) 장르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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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PC방 붐을 일으킨 스타크래프트(좌)와 리니지(우). |
[스타크래프트]는 원래 패키지 게임이지만, 한국에선 거의 온라인 게임처럼 플레이 됐다. 게임시디를 사지 않아도 PC방만 가면 누구나 스타크래프트를 즐길 수 있었다. 엄밀히 말해 패키지 게임과 온라인 게임을 연결해 주는 과도기적 게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바람의 나라], [리니지] 같은 정통 온라인 게임도 나왔지만 대중적인 인기는 스타크래프트에 한참 못 미쳤다. 애초에 MMORPG 자체가 마니아 위주의 게임 장르인데다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MMORPG는 남녀노소 대중적으로 접하기에 쉽고 편한 게임이 아니었다. 그에 비해 스타크래프트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캐주얼한’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천하의 스타크래프트도 어쩔 수 없는 빈틈이 있었으니 바로 ‘여성’이다. 당시 게임시장에 있어서 여성층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엄청난 규모의 광맥과도 같았다. 당시 여성들은 게임시장에서 철저한 소외계층이었다. 치밀한 전략과 능수능란한 컨트롤을 요하는 스타크래프트도,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리니지도, 여성 유저들이 접하기엔 진입장벽이 너무 높았다. 보다 쉽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대중적인 게임이 필요했다. [포트리스]는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온라인 캐주얼 게임 전성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1997년 오픈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넷츠고’는 한국 온라인 게임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외국 거대 포털 야후에 맞서 SK텔레콤이 서비스한 넷츠고는 한국에 온라인 게임이 뿌리를 내리게 한 토양과도 같은 사이트다. 넷츠고는 [바람의 나라], [리니지] 등 초창기 온라인 게임을 서비스하며 게임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포트리스]도 넷츠고 출신의 게임이다. [포트리스] 개발사 CCR은 90년대 벤처붐을 타고 설립된 IT회사다. 다른 게임사들처럼 초창기에는 대기업에 솔루션 프로그램을 납품하는 하청업체로 시작했다.
“SK텔레콤은 넷츠고에 붙일 게임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했죠.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바둑 같은 게임 말이죠. 그래서 바둑처럼 턴 방식에 채팅기능을 강화한 게임을 구상했습니다. 그게 바로 포트리스죠.”-장상채 소프트닉스 이사(당시 포트리스 사업 담당자)-
CCR은 SK텔레콤의 하청으로 인터넷 검색사이트 넷츠고에 게임을 납품하는 일을 맡았다. 당시 CCR은 “바둑 같은 게임을 만들어 달라”는 SK텔레콤의 추상적인 요구에 처음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고민 끝에 탱크가 포탄을 쏘는 ‘턴(turn) 방식’의 게임을 만들기로 결정한다. 컨셉이 정해지자 개발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탱크전을 다룬 [스코치드 어스]나 각도를 조정해 상대를 맞추는 방식의 [웜즈]의 게임방식을 참고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작품이 [포트리스]다.
“(포트리스는) 집에서 혼자 하던 게임과 차원이 달랐죠. 인터넷 기반 시설이 부족해 접속이 자주 끊기고 느려지는 탓에 플레이 한번 즐기기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영감을 많이 얻었던 게임이었죠.”-모바일 게임사 네시삽심삼분 소태환 대표-
사실 우리가 ‘국민게임’으로 알고 있는 포트리스는 1997년 나온 포트리스 1편이 아니라, 그 다음에 나온 [포트리스2 블루]다. 포트리스 1편은 그다지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래도 초반 인기는 괜찮은 편이었다. 동시접속자 1,000명을 넘기면서 성공에 대한 가능성도 그만큼 커졌다. 사실 이때만 해도 온라인 게임 동시접속자 1,000명이면 성공한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 운영이나 개발 경험이 부족해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아직 국민게임으로 가기엔 준비가 부족했다. 게임은 각종 버그와 오류로 제대로 몸살을 앓았다. 열악한 인터넷 환경 때문에 게임 플레이가 더욱 어려웠다. 결국 넷츠고가 라이코스와 통합되고 네이트에 인수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포트리스]는 소리 소문 없이 서비스가 중단됐다. [포트리스]라는 게임이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다.
[포트리스] 1편에서 구축된 게임방식은 이후 시리즈의 원형을 제공했다. 또한 RTS나 RPG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주류 취급을 받았던 캐주얼 게임의 가능성을 입증시켰다. [포트리스]는 당시 수많은 게임 개발자에게 영감을 준 게임이기도 하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포트리스를 즐기며 온라인 게임 개발을 꿈꾼 개발자들도 많다. 아쉽지만 1편의 성과는 여기까지였다. [포트리스]는 잠재적 가능성을 남기고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리고 2년 후, 세상에 나온 [포트리스2]는 업계를 깜짝 놀라게 할만한 작품이었다.
국민게임으로까지 칭송 받게 되는 [포트리스2]도 처음부터 촉망 받는 기대주는 아니었다. 게임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1편이 서비스되는 상황에서, CCR은 독자적으로 후속작 개발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사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개발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돈이 되는 대기업, 증권사 솔루션 하청작업에 몰두해야만 했다. 희대의 명작이 개발자 컴퓨터 안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처지였다. 이때 [포트리스2]를 세상에 꺼내놓은 인물이 홍찬화 팀장(현 그라비티 개발부장)이다.
포트리스2 블루를 제작한 홍찬화 PD(현 그라비티 개발부장). 중단된 포트리스 프로젝트를 맡아 국민게임으로 만든 장본인.
당시 프로그래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일은 대기업 증권 솔루션 작업이었다.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사회적 인식도 별로고 돈도 안 되는 온라인 게임은 기피하는 분야였다. “게임 만들어서 밥벌이가 되냐”고 비아냥거리던 시절이었다. 진짜 좋아서 게임을 만드는 사람 외에 직업으로 게임사에 입사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역시 CCR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개발에 대해 생각조차 안 해봤다고 한다.
어느 날, 포트리스 1편 개발자 김명곤 팀장이 홍 팀장을 찾아왔다. 그는 “게임 하나 함께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흥미를 느낀 홍 팀장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마터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뻔한 포트리스가 다시 세상에 빛을 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홍 팀장은 게임기획과 서버구축 등 전반적인 프로듀서 역할을 맡았다. 초기 3명으로 시작한 프로젝트는 이후 10명이 더 투입되어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홍 팀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게임을 만들면서도 사람들이 과연 이 게임을 즐길까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습니다. 전작이 그리 성공한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2편은 동시 접속자수 50명만 넘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그간의 고생을 알아주었는지 동시 접속자수는 순식간에 100명을 넘었고, 솔직히 그때 눈물이 왈칵 쏟아졌죠.”-게임어바웃 인터뷰 중-
처음 [포트리스2]는 [스타크래프트]같은 리얼타임 방식으로 기획됐다. 개발자 자신들부터 스타크래프트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이다(개발자들이 하루 종일 스타크래프트만 하는 바람에 개발일정에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시시각각 움직이는 탱크와 포탄들을 실시간으로 구현하기에는 당시 네트워크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그때는 지금과 같은 초고속통신망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제작진은 개발방향을 수정했다. 전작의 턴 방식을 살렸고, 그래픽도 깔끔하게 다듬었다. 게임개발에서 가장 초점을 둔 부분은 안정성이었다. 서버 프로그램을 담당한 홍찬화 팀장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 비싼 초고속망을 쓰지 않아도 저렴한 통신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국민게임 포트리스는 1999년 서비스된 [포트리스2 블루]다.
전작의 큰 틀만 도입하고, 세세한 부분은 완전히 다시 만들었다. [포트리스2]는 기본적으로 탱크를 움직여 상대 탱크를 포격해 승부를 내는 방식의 게임이다. 턴 방식 게임인 만큼 느긋하게 채팅도 하고 작전도 짜고, 배고플 땐 라면도 먹을 수 있도록 게임에 여백을 주었다. 한 치의 방심도 허용치 않은 스타크래프트와는 확실한 차이점이다. 화려한 컨트롤과 임기응변 대신, 치밀한 계산과 정교한 조작이 필요한 게임이다.
가령 탱크가 포를 발사했을 때 포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데 각도와 거리를 정확히 계산해야 성공할 수 있다. 적의 탱크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서는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고려해 포를 발사할 세기와 각도를 정해야 한다. 바람의 세기가 강한 경우 일명 ‘백샷’이라는 기발한 방법으로 상대 탱크를 맞추는 플레이도 유행했다. 느리고 단순하지만 포탄의 거리와 힘을 정확히 조절해 상대방을 명중시켰을 때의 통쾌함은 스타크래프트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1999년 10월 [포트리스2]는 차별화된 게임성을 내세우며 시장에 도전장을 냈다. 하지만 당시 국내 게임시장은 온전히 [스타크래프트]의 독무대였다. 특히 게임시장 최대 승부처인 PC방은 스타크래프트 외에 다른 게임을 허용치 않았다. 다른 게임들처럼 [포트리스2]도 초반의 반응은 그저 그랬다. 빠르고 화끈한 스타크래프트에 비하면 너무나도 느리고 답답한 게임이었다. 당시 게임의 주 고객층인 성인 남성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하지만 하나로통신에서 [포트리스2]를 서비스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게임의 진가를 알아본 유저들은 여성들이었다. 여성 유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여성 유저가 늘어나니 남성 유저도 덩달아 늘었다.
동접자 200명만 되어도 성공이라는 개발자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게임의 인기는 치솟았다. CCR은 포트리스2 옐로, 블루, V500, V600, 포에버 등 버전별로 나누어 콘텐츠를 업데이트 했다. [포트리스2]는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의 자리를 위협하는 강력한 경쟁자가 되었다. 가장 잘나갔던 블루버전은 동시 접속자수 17만 명, 총회원수 1천만 명을 기록, ‘국민게임’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포트리스는 게임 문화를 변화시켰다. 가족이 함께 온라인 게임을 하거나, PC방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게임은 칙칙한 PC방에서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즐기는 문화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스타크래프트는 다른 RTS를 누르고 혼자 살아남았지만, [포트리스2]는 게임 하나의 인기로 끝나지 않았다. 포트리스는 캐주얼 게임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이끌며 다른 게임들이 도전할 시장을 만들었다. 캐주얼 게임은 게임 조작이 쉽고 플레이 타임이 짧아 초보자도 쉽게 할 수 있는 게임들을 통칭하는 장르다. 쉬운 조작법과 간단한 규칙, 포탄 한방으로 상대방을 물리쳤을 때의 짜릿한 느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통하는 재미였다. 이후 [크레이지 아케이드], [카트라이더] 등 다양한 게임들이 등장하면서 캐주얼 게임은 2000년대 중반까지 국내 온라인 게임시장의 주류 장르로 떠올랐다.
한편 게임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여러 가지 홍역도 치렀다. [포트리스2]는 넷츠고와 저작권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2001년 넷츠고는 ‘포트리스2 블루’가 ‘포트리스’를 무단복제 했다고 CCR을 상대로 프로그램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법원에 냈다. 결국 이 사건은 CCR이 넷츠고에 일정 로열티를 지불하는 선에서 양사가 타협을 봤다. 포트리스2 사건은 이후 게임 업계에 비숫하게 발생한 저작권 분쟁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포트리스는 2000년, 2001년, 2002년 상이란 상은 다 받았어요. 이런 게임을 가지고 사업이나 마케팅을 해보려 해도 주변인식은 이랬죠. ‘게임 가지고 무슨 사업을 해?’”-포트리스 사업당당 민용재 현 YJM엔터테인먼트 대표(NDC3014 강연내용 중, 인벤)-
[포트리스2]는 게임 마케팅 분야도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당시 [포트리스]는 파격적인 마케팅으로도 유명했다. ‘쉬운 게임 만들어서 게이머 아닌 인터넷 유저를 공략하자’라는 확고한 마케팅 전략을 세웠다. 당시 포트리스 마케팅 사업을 담당했던 민용재(현 YJM 대표) 이사는 게임사들이 하지 않았던 다양한 시도를 통해 게임을 알렸다. 먼저 글로벌 기업 코카콜라와 제휴를 맺었다. 그가 음료회사에 찾아가 설득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게임은 남녀노소가 즐기는 대중적인 문화가 아니었다. 코카콜라 쪽도 게임과 제휴를 맺은 사례는 일본의 [파이널판타지] 이후 [포트리스]가 두 번째였다.
코카콜라 제휴에서 재미를 본 CCR은 과자회사, 완구회사, 패스트푸드, 치킨 프랜차이즈 등으로 마케팅 범위를 확대했다. 게임과 상관없는 인터넷 유저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포트리스의 전략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관련 산업에도 활발히 진출했다. 게임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e-스포츠 리그도 열었다. 포트리스 애니메이션은 SBS, 대원C&A홀딩스, 반다이 등 최고의 파트너사들과 손잡고 제작됐다. 광고 모델도 화제가 됐다. 당시 TV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로 스타가 된 장나라가 게임모델로 발탁됐는데, 장나라가 출연한 광고포스터가 유저들 사이에서 돈을 받고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포트리스]는 일본의 유명 캐릭터 완구회사 반다이의 관심을 끌었다. 반다이와 합작법인(BandaiGV)을 설립해 [포트리스2 블루]를 일본에 서비스했다.
[포트리스]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PC방을 점령하고, 대기업과 제휴를 맺고, 해외에 수출되고, 심지어 게임의 금단의 구역인 군대까지 진출했다. CCR은 군부대 내 장병 메신저 사이트와 제휴를 맺고 [포트리스2 블루]를 서비스했다. 장병들의 전투력 증진과 여가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이유로 국방부에서도 환영했다. 이에 따라 전국 군부대의 화상 면회소 및 부대 PC방, 국군병원 등에서 장병들이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됐다. 군대에서도 [포트리스]의 인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특히 포병대에서는 게임을 장려할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포트리스는 게임의 금단의 구역인 군대까지 진출했다. 당시 부대 PC방, 국군병원, 면회소 등에서 포트리스를 즐기는 장병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진출처: 인벤> |
“처음엔 저희도 아이템 부분 유료화를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유저가 게임 아이템을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이 용납이 안됐죠. 그래서 PC방에서 돈을 받기로 했죠. 물론 회사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습니다.”-홍찬화 포트리스2 개발팀장(현 그라비티 개발부장)-
포트리스의 영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포트리스는 자기가 설 수 있는 최고의 정점에서 급격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외부의 경쟁자 때문이 아닌 스스로의 오만과 독선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포트리스의 영광 뒤에 숨겨진 그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서비스 1년을 맞아 기세등등했던 [포트리스]도 남모를 고민을 안고 있었다. 게임의 인기는 치솟는데 매출이 따라주질 않았다. [포트리스]는 무료게임이었다. [스타크래프트]는 CD를 팔고, [리니지]는 월정액제로 매출을 올리지만 처음부터 무료로 시작한 [포트리스]는 돈을 벌어들일 방법이 없었다. 서버 증설비용과 운영비는 천정부지로 솟고, 인기가 올라갈수록 부담만 커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계속됐다. 아무리 유저가 많아도 돈이 안 되면 망할 수밖에 없다.
CCR은 매출을 올릴 방법을 모색했다. 처음엔 탱크를 돈을 받고 팔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당시 인식으로 무형의 게임 아이템을 돈을 받고 판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다. 유저들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부분 유료화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이후 넥슨이 부분 유료화 모델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결국 남은 것은 PC방뿐이었다. CCR은 개인사용자에겐 무료로, PC방에는 정액제로 서비스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자 전국 PC방 업주들은 ‘현실을 무시한 행위’라고 거세게 반발했다. CCR은 밀어붙이기로 일관했다. 정액제에 가입하지 않은 PC방의 IP는 차단했다. 그럴수록 업주들의 항의도 빗발쳤다. PC방 이익단체들은 CCR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했다. 심지어 일부 PC방 업주들은 회사로 찾아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결국 포트리스의 PC방 사태는 게임업체와 PC방간 오랜 갈등의 씨앗을 심었다. 전체 산업을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할 파트너가 서로를 증오하고 무시하게 된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만약 이때 [포트리스]가 아이템 부분 유료화를 택했다면? 그래서 유저들에게 정당한 게임 값을 지불하게 했다면? 지금의 넥슨과 CCR의 운명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포트리스 유료화는 성공했다. 아니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감히 포트리스를 빼고 PC방을 운영할 수는 없었다. 90% 이상의 PC방이 포트리스 요금제에 가입했다. 업주 입장에선 고객이 요구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감히 포트리스를 빼고 PC방을 운영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CCR은 한 달에 수십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PC방 요금제는 회사 입장에선 그야말로 ‘철밥통’이었다. 업소가 망하지 않는 이상 돈은 계속 들어왔다. 아마도 CCR은 PC방에서 [포트리스]의 인기가 영원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때가 CCR의 최고의 전성기였다. 하루아침에 엄청난 수익을 얻자 회사는 오만에 빠졌다.
먼저 직원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가 내부 갈등으로 번졌다. [포트리스]를 국민게임의 반열에 올려놓은 직원들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 하는데, 회사는 그러지 않았다. 성과급 문제, 복지 문제 등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직원들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게임은 고공행진 하는데, 직원들이 받는 인센티브는 미미했다. 회사는 계속 앞으로 나가기만을 요구했다. 포트리스 신화의 주역들도 하나 둘 회사를 떠났다.
어쩌면 CCR은 1세대 온라인 게임 인재들의 산실이었다. 그들은 스타타크래프트라는 거물에 맞서 헝그리 정신으로 싸웠다. 열악한 환경에서 참신한 게임을 만들었고, 세상에 나오지도 못할 뻔 한 게임을 꺼내 국민게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대기업에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제휴를 맺었고 해외진출을 성공시켰다. 당시 포트리스 출신 인재들은 업계 영입대상 1순위였다. 다른 업체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올까 봐 인터뷰도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가 가장 잘나갈 때, 그들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핵심 인재들이 빠진 포트리스는 껍데기일 뿐이었다. 이 후에 포트리스 시리즈가 겪은 처절한 실패의 레이스가 이를 증명해준다.
2002년 12월 CCR은 포트리스2의 인기에 힘입어 후속작 [포트리스3 패왕전]을 내놓았다. 3편은 회사의 모든 역량을 쏟아 개발한 작품이다. 기존 슈팅 게임의 재미를 살리면서 MMORPG의 요소까지 가미했다. 특히 공성전과 길드전을 도입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공성전은 탱크끼리 편을 갈라 성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방식이다. 길드전은 한 턴에 최대 3명이 동시에 포를 발사 할 수 있으며, 양 팀당 각 9명까지 팀원을 구성할 수 있다. 공성전은 길드 단위로 참가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저들은 슈팅 게임을 즐기면서 MMORPG의 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패왕전은 전작의 인기에 힘입어 나름 시장반응도 좋았다. 방송사들과 연계해 e-스포츠 대회도 활발히 진행됐다. 여러모로 검증된 흥행가도를 달리는 듯 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게임은 각종 핵 프로그램과 버그로 몸살을 앓았다. 공성전이 도입되면서 유저간 경쟁이 심해지자, 쉽게 이기려고 핵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심할 때는 정상적인 플레이가 힘들 정도로 밸런싱이 무너지기도 했다. 하지만 CCR은 속수무책이었다. 신작 [RF온라인] 개발에 역량을 쏟고 있는 상황이라 포트리스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유저들은 게임을 제대로 관리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기다려달라는 말만 되풀이됐다. 참다못한 유저들은 게임을 떠났고, 회사는 서비스 종료라는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3년 만에 갑작스런 서비스 종료로 CCR은 엄청난 비난을 샀다. 그렇게 사라져 버린 패왕전은 아직도 유저들로부터 다시 서비스해 달라는 요구가 빗발치는 비운의 게임으로 남게 됐다.
CCR의 다음 작품은 서비스 6개월 만에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패왕전이 종료된 지 얼마 되지 않아 CCR은 [뉴포트리스]란 이름의 신작을 내놓았다. 하지만 [뉴포트리스]는 처음부터 잘못된 출발이었다. 제목 앞에 새롭다는 의미의 ‘NEW’를 달고 나왔지만 실상은 기존 포트리스2와 차별성도 없고, 오히려 퇴보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실시간 턴 방식으로 바꾼 것은 새롭지만, 이 정도로는 유저들의 불만을 잠재울 수 없었다. 포트리스가 아니더라도 [카트라이더], [스페셜포스], [서든어택] 등 할만 한 게임들이 차고 넘쳤다.
[뉴포트리스]는 최고 동접자 1만 5천명을 넘지 못한 저조한 성적을 보였다. 이런 게임 내놓으려고 패왕전을 종료했냐며, 게시판에 비난의 글이 넘쳤다. 국내 서비스를 등한시하고 무리하게 해외진출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두마리 토끼를 다 놓친 셈이었다. 이도 저도 못한 [뉴포트리스]는 6개월 만에 서비스 중단을 선언했다. 한때 국민게임으로 칭송받던 작품이 너무나 허탈하게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유저들이 [포트리스]에 완전히 등을 돌리자 PC방들도 더 이상 요금을 낼 필요가 없게 됐다. PC방 업주들로부터 계약해지가 줄을 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해외 수출마저 좌절됐다. 해외수출 계약위반으로 위약금까지 물어야 했다. 시리즈를 남발하는 문어발식 개발 관행이 게임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 후 포트리스의 모바일 버전인 [포트리스 제로]가 출시됐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2011년 3월, 국민게임의 대명사이자 캐주얼 게임의 화려한 전성기를 열었던 [포트리스2 블루]가 서비스 12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시리즈 [포트리스2 레드]가 나왔지만 블루에서 색깔만 바꿔놓은 그저 그런 재탕 게임에 불과했다. 여전히 랙과 버그, 그리고 유저들의 비난으로 몸살을 앓았다. 중간에 포트리스3D 프로젝트도 진행됐으나 이 또한 흐지부지 됐다. 그리고 2014년 현재, 그런 유저들의 비난마저도 뜸하다.
포트리스는 한때 온라인 게임 업계의 성공 모델이었다. 재미있고 독특한 게임성과 기발한 마케팅 전략으로 가는 곳마다 대박행진을 이어갔다. 모든 게임들이 포트리스의 성공을 벤치마킹하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포트리스는 ‘성공’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 고질적인 버그나 운영미숙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등한시하고, 위기 때마다 시리즈를 남발해 모면하기에 바빴다. 많은 인재들이 떠났는데도 해외 수출에만 매달렸다. 이런 포트리스는 사람들의 비난과 경쟁 게임의 도전 앞에 쉽게 흔들렸다. 뿌리가 썩어 가는데 가지만 친 결과였다. 결국 원조 국민게임 포트리스는 뿌리를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러나 [포트리스]의 실패는 후발 캐주얼 게임들에 반면 교사가 됐다. 부분유료화 방식의 과금제 도입이나, 안정적인 게임 서비스 운영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이처럼 [포트리스]는 한국 온라인 게임의 튼튼한 ‘나무’가 되지는 못하였으나, ‘거름’이 됐다.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통해 후배 게임들에게 진지한 교훈을 남겼으니 말이다.
참고문헌
· 좋은게임을 만드는 핵심원리/ 생생한 게임개발에 꼭 필요한 기본물리, 한빛미디어
· 콘텐츠 마케팅, 팜파스
· 홍찬화 CCR 개발팀장 인터뷰, 게임어바웃
· 강성욱의 게임산책 '뉴포트리스', 디지털타임즈
· 뉴포트리스, 실패원인은?, 게임메카
· 국민게임 뜨거운 지존대결, 경향신문
· 장병들 "게임 한판 할까" CCR 포트리스2블루 메신저 통해 서비스, 파이낸셜뉴스
· 민용재 YJM 대표 NDS2014 강연, 인벤
· 인터뷰 윤석호 사장 인터뷰,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