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대학교 교수이자 월정사 교무국장인 자현 스님이라는 자가 현각 스님에 대하여 조목 조목 반박을 한 글을 보고 도저히 묵과하고 넘어갈 수 없어 감히 글을 올립니다.
원래는 자현이란 자의 페이스북에 직접 올리려고 하였으나
‘ 제 얼굴에 침뱉기 ’ 가 되기에 참고 또 참아 이곳에 올려봅니다.
조계종 홈피도 생각을 해봤으나, 조계종을 인정하지 않기에 올릴 수 없어 이곳에 올리니 만약 이 글을 조계종에 옮겨 주시거나 하실 법우님이 계시면 언제든지 올리셔도 됩니다.
제가 우선 이 자현 스님이란 자를 호칭을 스님이 아닌 ‘ 스님이란 자 ’로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고통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을 보시고 나서 당신이 가지고 누렸던 모든 부와 명예와 영광과 편안함을 버리시고 출가를 하셨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그 모든 걸 스스로 버리시고 45년 고행 길에 오르셨단 말입니다.
그러며 하셨던 일 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인도의 ‘ 카스트 제도 ’ 라는 제도의 철폐이셨습니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 카스트 제도 ’ 속의 하층은 말 그대로 인간이 아닙니다.
지금도 국민을 4가지 계급으로 분류하여 하층 천민은 온갖 괄시와 핍박과 고통 속에 살게 하는 제도입니다.
조상이 하던 백정 짓은 현재의 후손이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카스트 제도이고
조상이 하던 빨래 빠는 직업은 지금도 그 후손이 하고 있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카스트 제도입니다.
그런데 자현이란 이 자가 이번 페이스북 글에서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 자현 스님은 형식주의, 유교적 관습 등에 대해 “한국 불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더구나 (한국에서)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밝혔다. “
즉, 우리의 전통이 ‘ 유교 ’인데 그걸 따르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현각 스님의 잘못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네 ‘ 유교 ’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에서 공자에 의해 시작된 ‘ 유교 ’는 고려쯤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 유교 ’라는 개념은 조선 초기에 ‘ 유교 ’에서 ‘ 성리학 ’이라는 학문으로 변화되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만.
애초 공자가 시작한 유교의 근본 개념은 인본 사상에 기초를 둔 인의예지 등이 그 핵심이었는데, 이는 ‘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모든 사람을 덕으로 대하자 ’ 표현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 유교 ’가 조선시대 초기에 성리학으로 변질되며 기초 사상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금의 시대에는 ‘ 유교 사상 ’ 의 반대는 ‘ 민주주의 ’ 라고 주장되기도 하는데
이 이유는 바로
특히 조선 초기의 유교로 인하여 백성의 계급이 ‘ 양반 ’ 과 ‘ 쌍놈 ’ 으로 크게 분류가 되기 시작하였고, 서자를 괄시하고 핍박하는 것도 모자라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까지도 ‘ 장사치 ’ 라는 중인 계급에 집어넣어 천대 하였던 것이 바로 우리나라 ‘ 유교 ’ 의 속성 중 하나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국민 중 나이 좀 먹었다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천민 성씨 ‘ 천 방 지 축 마 골 피 ’ 라는 개념도 이 ‘ 유교 ’ 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우리네 불제자 입장에 있어서 ‘ 유교 ’ 는 내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와도 다름없는 사상입니다.
조선 시디에 벌어졌던 ‘ 승유 억불 ’ 정책이 그 이유이니
당시의 ‘ 승유 억불 ’ 정책으로 인하여 팔도강산 수많은 사찰의 불상이 목이 잘린 체 버려져야 했었고, 경주의 남산에서는 지금도 당시에 목이 잘린 체 훼손 되었던 불상이 발견되기도 하니 당시 스님네들은 얼마나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하셨는지 굳이 듣고 보지 않아도 그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불제자 입장에서는 당시에 행해졌던 ‘ 승유 억불 ’ 정책을 탓해서도 욕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 승유 억불 ’ 정책으로 인한 고통을 딛고 일어섰기에 지금의 우리네 불자들이 있을수도 있기에 그렇기도 하거니와, 이해하고 용서하며 당시의 그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 우리 불자들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자라서 이해하고 용서해야 할지라도 절대 인정하면 안 되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 바로 중생을 계급으로 분류하는 신분제도입니다.
바로 우리의 근본 스승이라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깨뜨리려 하셨던 것이 바로 이 신분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현각 스님의 그런 “ 유교적 권위주의 ” 에 대해서 비판을 했더니
동국대학교 승가대학 교수이며 월정사 교무국장이라는 자현스님이라는 자가 되려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는 현각 스님을 비판합니다.
이 자가 과연 스님 맞습니까?
우리네 근본 스승인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깨뜨리려 하셨던 그 신분제도를 불제자로서 수많은 재가 불자들의 시줏돈을 받아먹는 스님이라는 자로서 석가모님 부처님의 제자로서 그런 유교적 권위주의를 부정하고 깨뜨리려 노력해도 부족할 터인데 되려 그것을 비판한 현각 스님을 비판합니다.
스님 맞습니까?
스님 아닙니다.
불제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석가모님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근본 이유도 모르는데 어찌 스님이라 할 것이며
중생들을 위하기보다는 스스로의 권위와 돈과 명예를 좇기 바쁘니 어찌 불제자라 하겠습니까?
자현 이자는 스스로 유교적 권위주의에 빠져 권위주의와 우월감에 빠져 신도들 보기를 아랫사람 보듯이 보며 평소 “기복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등은 모든 종교에서 확인되는 부분으로 조계종만의 문제적 특징은 아니다”라며 “세상 어느 종교에서 성직자와 신도가 평등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라고 떳떳히 자기 소신을 밝히는 이 자현이란 자는 스님이라 호칭을 절대 사용해서도 들어서도 안 되는 그냥 땡중, 아니 땡중도 아까운 사이비 중인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가사장삼을 입었다 해서 다 스님이면 세상 스님 아닌 자 그 누구일 것이며,
이런 사이비 중이 교수로 있는 승가 대학은 과연 제대로 된 곳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자를 월정사의 교무국장이란 직책에 앉혀 놓은 조계종은 과연 온전한 집단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에 자현이라 이 자는 또 이와 같은 글을 올립니다.
“이분(현각 스님)은 특별한 능력이 없이 하버드라는 한국인의 저급한 환상 덕분에, 처음부터 조계종의 상위 1%에 속했던 사람”이라며 “25년 동안 조계종에 빨대만 꽂고서 가장 좋은 조건 속에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 조건을 비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몇 년 전 불현 듯 마음이 일어나 평소 알고 지내는 스님께 가사 장삼을 선물해드리려 했었습니다.
주변의 보살님들이 말리시더군요.
“ 지금 스님이 입고 계신 가사장삼이 얼마짜린줄 알고나 그러세요? ”
“ 얼마나 하는데요? 가사장삼이 그렇게 비싼가요? ”
“ 저거 천만 원짜리에요~ "
그렇다 고해서 그 천만 원짜리 가사장삼이 아주 비싼 편에 드는 것도 아니랍니다.
마음을 접었습니다.
아팠습니다.
자현. 그대에게 묻는다.
현각 스님이 1%에 속했던 사람이라면
천만 원짜리 가사장삼을 입는 스님은 몇 %에 속한 사람인가?
그대는 아는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살한 송파 세 모녀의 고통을 아는가?
오늘도 어디선가 생활고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들의 고통을 아는가?
그대는 머리를 깎고 스님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쓴 그 이후로 지금까지 돈이 없어 시달리거나 고통스러웠던 적은 과연 있었는가?
현각 스님을 1% 에 속해 특혜를 누렸던 사람이라고 한다면
십 원 백 원 아껴서 시주한 그 돈으로 편하게 돈 걱정 않하며 지금도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그 어느 곳에 앉아 ‘ 나 스님인데~ 나 교수인데~ 나 교무국장인데~’ 라고 거들먹거리며 우월감에 빠져 있는 이 시간에도 수많은 중생은 이 더위에 땀을 비 오듯 쏟아내며 일을 하고 있는 중생들의 고통은 아는가?
그대는 지금까지 과연 몇 번이나 밥을 직접 지어 공양 했었는가?
그대는 지금까지 공양하기 위하여 육체적 노동을 몇 번이나 해봤는가?
중생들은 더위에 지쳐 열사병으로 죽어나가는 그 시간에 ‘ 하안거 ’ 라는 미명하게 시원한 곳에 들어 앉아 ‘ 참선 ’ 하던 그대는 1% 가 아닌 몇 % 인가?
중생들은 살을 에는 추위에 손과 발이 얼어터지는 고통 속에서도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 시간에 ‘ 동안거 ’ 라는 미명하게 따뜻한 방에 들어 앉아 ‘ 참선 ’ 하던 그대는 1% 가 아닌 과연 몇 % 인가?
0. 1 % 인가 아니면 0.01 % 인가?
지구상에 입을 옷은커녕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주는 중생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대는 지금 얼마짜리 가사장삼을 입고 있으며, 천만 원짜리 가사장삼을 입은 그 스님네는 대략 0.0000000000000000000001 % 쯤 되는 사람인가?
현각 스님께서는 조계종에 빨대를 꼽았다고 한다면
그대는 어디에 꼽았는지 아는가?
그대에게 빨대를 꼽혔던 수많은 중생들은 보이지 않는가?
수많은 중생들에 빨대를 꼽아 호가호위하며 편하게 먹고 살고 있는 그대가 나쁜 것인가 그런 그네들의 종단인 조계종에 빨대를 꼽고 살아온 현각 스님이 나쁜 것인가?
그대는 글에 “더구나 (한국에서)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였다.
자현 그대에게 또 묻는다.
현각 스님은 한국에서 25년을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도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이라고 평가하자.
그렇다면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는 승려로서 단 한 번이라도 돈을 받지 않고 신도들 병문안을 가본적 있는가?
그대는 승려로서 단 한 번이라도 돈을 받지 않고 신도의 극락왕생을 빌어본적 있는가?
내 어머님 생전에 주변 교회 목사님께서 몇 번 전도를 오셨으나, 당시 내가 녹음해드린 108 참회문을 늘 들으시는 모습도 뵙고 하더니 전도를 포기하셨던 목사님이 계셨다.
그런데 어머님이 지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계실 때 이 목사님은 사모님과 함께 병원비에 보태라며 돈까지 들고 병문안을 오셨었고,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도 거액의 부조금을 들고 머나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오셨더이다.
그대는 가까운 친인척인 아닌 신도를 위하여 중생을 위하여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적이 있는가 말이다?
하긴, 그동안 내가 접했던 수많은 스님들은 돈을 받아야만 움직이셨으니 그대도 그랬으리라 생각되는데,
우리 전통문화 그 어디에 돈을 받아야만 병문안을 가고 돈을 받아야만 상갓집을 방문해 명복을 빌어줘야 한다고 되어 있는가?
더군다나 그대는 그대의 주장대로 스님 아닌가?
그런데 어찌 그대는 그러하지 않았는가?
이런 그대가 과연 우리 전통 문화를 논할 자격이 있는가?
이것은 아는가?
일요일 교회 예배에 가보면 예배당 입구에 목사님과 장로님 또는 다른 성직자들이 입구에서 예배를 보러 오는 신도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하고, 예배가 끝난 후에도 교회 입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신도들을 배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네.
그럼 그대는 과연 법회에 오는 신도들을 향해 단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맞이하며 인사 한적이 있는가?
법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신도들을 진심으로 배웅하며 인사한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십 원 백 원, 한 푼 두 푼 아껴서 시주한 시줏돈으로 먹고사는 그대는
공양하며 시주한 불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을 단 한 번이라도 가져본적 있는가?
알래스카에 사는 에스키모 인들은 귀한 손님이 이글루를 방문하면 아내와 동침하게 했다고 한다네.
그렇듯 손님은, 그것도 귀한 손님은 귀하게 대접을 하는 것이 세상 모든 인간들의 평균적인 사고일터이고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특이하다면 특이한 문화를 가진 민족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현각 스님이 누구인가?
수 억 만 리 머나먼 미국이라는 땅에서 가족이며 친구며 모든 것을 버린체 한국 불교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귀한 손님중의 손님 아닌가?
그 손님이 귀해 다른 수련 승들과 달리 특혜를 주었다고 하자.
그것이 그렇게 문제인가?
말도 통하지 않고 글도 모르는 현각 스님에게 뭘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손짓 발짓으로 가르칠 수 있는게 불교인가?
평생 토굴에 앉아 수행만 해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 불교의 참 진리인데
말도 통하지 않고 글도 모르는 현각 스님에게는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 그대가 말하는 특혜가 아니였겠는가?
그대는 또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런데 현각처럼 25년이 지나도 한국말이나 한글이 제대로 안 되는 사람들을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보시게 자현.
난 이곳에서 50년을 넘게 살았다네.
그런데 나는 지금도 불경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다네.
뭐 독경을 해봤자 뭔뜻인지도 모르는 한문 불경이다 보니
굳이 불경을 읽으려 한다면 한글 불경을 찾아서 읽어야 하고
그나마도 한글화가 제대로 되지 않는 불경은 읽을 엄두조차 못내고 있다네.
거기에 이동하면서라도 불경을 가까이 하고 싶어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독경 파일도 구해서 들어봤으나 이게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알수가 없어
내 일부러 내 핸드폰에 내가 직접 한글 불경을 녹음해 듣고 다닌다네.
그런데 그대는 현각 스님은 25년을 살아도 한국말이 안 되니 현각 스님 잘못이라고 지적하는데
이곳에서 50년을 살았어도 불경 읽기가 어려운 나는 도대체 뭔가?
내 이리 글을 올리는 것을 보니 한글을 읽고 씀에는 문제가 없음을 알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경 읽기가 너무나 어려우니 이 어찌 된 것인가?
나도 머리가 모자란 중생인가?
그럼 그대 자현에게 묻겠네.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이미 천 년 이상이 지났고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 반포 하신지도 수백 년이 지났으며
조계종이 우리나라 불교계 대표 종단으로 자리 잡으며 지난 백 년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불제자들에게 빨대를 꼽아 수 조원 아니 수십조 원의 시줏돈을 받아왔을 터인데
그동안 제대로 된 한글 불경 하나 제대로 없는 현실을 어찌 설명할 것인가?
들어온 지 2백년도 안 되는 기독교는 이미 오래전에 한글 성경이 제작 되었고, 지금은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성경이 있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는가?
평생 자식들을 위해 입에서 “ 나무 관세음보살 ”을 떼지 않으려 노력하셨던 내 어머님은
당신께서 읽으실 수 있는 불경이 없어 평생 불경을 읽지 못하시다가
그나마 내가 어머님이 듣기 편하게 번역하고 해석한 불경을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들을 수 있었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동안 반평생 이상을 절집에 다니시며 한푼 두푼 아끼신 돈을 절집에 가져다 바쳤지만, 정작 그런 어머님은 제대로 된 한글 불경이 없어 단 한 번도 직접 불경을 읽으신 적이 없다는 현실에 대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말이다.
자식으로서 불자로서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데 그대는 어떤가?
미국에도 한국 불교가 전파된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그곳에도 불경이 읽혀지고 있을 터인데
그대는 영어 불경을 본적이 있는가?
만약 우리네 한국 불교의 상황을 그대로 따른다면 영어 불경은
Yeosiamoon 이라고 시작하는가?
그대는 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가?
중생을 위하여 출가를 하였는가 아니면 그대를 위하여 출가를 하였는가?
그대가 어떤 마음으로 출가를 하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나
그래도 승가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교수라면
월정사 교무국장에 앉아 있는 스님이라면
그래도 중생들이 겪고 있는 최소한의 아픔과 현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대를 보라.
보이지 않거든 에어컨이 틀어진 시원한 선방에 앉아보시게.
불제자라하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출가한 이유조차도 모르는 그대가 진정 스님인지 살펴보시게
우리네 문화를 제대로 모르면서 우리네 문화를 말하는 그대를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는 대한민국 국민 중 몇 % 에 들어가는 사람인지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는 8만 4천경 중 과연 몇 경이나 제대로 뜻이나 알고 읽는지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가 권위적이지 않은지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시게
과연 그대는 “ 귀의승 중중존 ” 의 그 ‘ 승 ’ 이 맞는지 살펴보시게~
울분을 참을 수 없어 글 올립니다.
짧은 지식을 총 동원하였으나 일부 틀린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틀렸거든 가르침을 주시기 바라며,
다양한 의견 환영하지만 ‘ 그런 스님 ’ ‘ 그러지 않는 스님 ’ 등의 댓글은 정중하게 사양하겠습니다.
한국 불교를 위해 충정 아닌 충정의 마음으로 쓴 글이니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두서없는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첫댓글 하버드의 힘 *생각과 미디어힘()()()♡
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관세음보살()()()...............
장문 글 잘 읽었습니다.
맞습니다.
제대로 된 한글경 하나없는 스님네나 현각스님이나 까막눈은 마찬가지입니다.
자현 스님 글을 보고 저도 반박글을 적을까 하다가 멈췄는데 고맙습니다.
자현스님의 글을 읽고 순간 느낀점 한 가지를 적어라면
"불교가 힌두교인가" 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운 합장()
이런 스님이 많이 계신다면~~ _()_
♡ 감사합니다.
정말 깊은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
법여성님^^의 글을 읽고 나니, 그동안 우리 불교의 답답해 한 마음을 속이 시원하게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참 좋은인연*
나무관세음보살님()()()
한 번도 스님의 길을 가보지 않으신분이 스님들을 무엇라 말 할수는 없습니다!!
현각스님은 스님이시고, 또 현각스님의 글을 무엇라 하실 수 있는분도 스님들입니다!!
서울을 가보지 않고 서울을 보았다 할 수는 없습니다!!
말을 아낄 때가 아닌가 합니다!!
감사 합니다.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