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2/27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2014 - 대법, 줄기세포 논문 조작 황우석 유죄 확정 줄기세포 논문을 조작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황우석 박사에게 유죄가 확정됐다. 황 박사는 2004∼2005년 사이언스지에 조작된 논문을 발표하고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의 실용화 가능성을 과장해 농협과 SK로부터 20억 원의 연구비를 받아낸 혐의 등으로 2006년 5월 기소됐다. CBS노컷뉴스 김중호 기자 /노컷뉴스 2014-02-27 10:50 http://www.nocutnews.co.kr/news/1193209
- 김환기 '산' (공중전화 카드)
2013 - 김환기 탄생 100주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전시기간 : 2013-02-27 ~ 2013.06.09 전시작품 : 김환기 시대별 대표작 70여점 관람시간 : 오전 10:00 - 오후 6:00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 환기미술관 본관 전시내용 : http://whankimuseum.org/new_html/03_exhibition/index.php?checkPage=ex_01
김환기 탄생 100돌, 한국 추상미술의 ‘뿌리’ 환기 환기미술관서 기획전시회 수화 김환기(1913~1974) 탄생 100돌을 맞이한 기획전시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전이 6월9일까지 서울 환기미술관에서 열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미술가이자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손꼽히는 수화의 시대별 대표작을 모아 그의 삶과 예술을 돌아볼 수 있는 전시회다. 수화는 그 누구보다도 도전적이고 자유분방했던 예술가였다. 일찍이 추상미술을 시작해 한국 화단의 선구자가 되었고, 미대 교수가 되어 화단의 핵심에 올라섰다. 그럼에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만드는 데 앞장섰고, 그러면서도 한국의 정서와 특질을 작품에 담는 데 열성을 쏟아부었다. 화가 초창기 수화는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미술 동인 모임인 신사실파를 만들어 추상미술에 천착하며 국내에서 확실한 자리를 굳혔다. 그러다 불쑥 1956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로 유학을 다시 떠났고, 1960년대에는 또다시 새로운 미술 메카 뉴욕으로 간다. 자기 예술의 틀을 부수고 다진 그는 달과 산천 같은 한국의 풍경, 달항아리와 조선 목가구 같은 한국적 문화 아이콘들을 작품 소재로 삼아 추상미술로 표현하며 자기만의 화풍을 완성해갔다. 그의 이러한 도전정신과 집요함, 그러면서도 풍기는 풍류와 여유로움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꼽히는 대표작이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다. 탄생 100돌 기념전의 제목이 된 이 시리즈는 그가 지인의 얼굴 하나하나를, 자신의 생각과 영감을 모아 점으로 찍어가며 완성한 추상 연작이다. 수많은 점들이 모여 물결을 치면서 거대한 푸른 세상을 이루는 이 작품은 그가 빠져들었던 푸른색의 오묘함, 추상이면서도 구상처럼 무언가 이야기하는 듯한 김환기 추상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수화는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유명한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제목을 따왔다. 전시회는 수화의 예술 세계를 그의 인생 여정을 따라 ‘서울/도쿄 시대’, ‘파리 시대’, ‘뉴욕 시대’ 세 부분으로 나눠 수화가 남긴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전위적인 초기 구성작품들은 그의 열정적인 도전정신의 시작을, 후기의 대형 점그림들은 절정에 오른 대가의 원숙한 경지를 잘 보여준다. 어른 7000원, 청소년 5000원, (02)391-7701~2.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한겨레 2013.03.11 19:54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577554.html
2009 - 교통사고 처벌 ‘중상해 기준’ 나왔다 대검찰청 형사부(부장 김진태)는 27일 교통사고로 중상해를 입혔다면 자동차종합보험 가입자라도 처벌해야 한다는 전날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관련해, 이날 ‘중상해’의 기준을 정해 전국 검찰청에 하달했다. 검찰은 형벌 소급 논란을 피하기 위해 공소 제기가 가능한 사고 발생 시점을 헌재 선고가 내려진 지난 26일 오후 2시36분 이후로 잡았다. 검찰은 가해자를 처벌하는 중상해의 기준으로 △생명 유지에 불가결한 뇌 또는 주요 장기의 중대한 손상 △중요 부분의 상실이나 변형 △시각·청각·언어·생식 기능의 영구적 상실 △후유증으로 인한 중증의 정신장애, 하반신 마비 등 완치 가능성이 없는 질병을 들었다. 치료 기간이 길어져 중상해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울 때는 치료가 끝난 뒤 기소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박균택 대검 형사1과장은 “헌재 결정에도 달리 기준 제시가 없어 판례와 외국의 입법례, 학설 등을 참고해 중상해의 기준을 세웠다”고 말했다. 검찰의 기준 마련 때까지 유보됐던 경찰의 사고 처리도 이날 오후부터 재개됐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한겨레 2009-02-27 오후 10:01:27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41394.html
2008 - 로린 마젤 “청중들의 눈물환호 잊지 못할 것” [뉴욕필 평양·서울공연]로린 마젤 “청중들의 눈물환호 잊지 못할 것”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로린 마젤은 27일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우리는 외부의 많은 이들이 북한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북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고 방북소감을 밝혔다.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그는 기자들과 만나 "음악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본 것은 이번 방북의 최고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 Election of V. Putin as President, 2000 May 7
2001 - 푸틴 대통령 한-러 정상회담 [책갈피 속의 오늘]2001년 푸틴 대통령 한-러 정상회담 2001년 2월 26일 오후 10시. 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공항에 특별기 3대가 차례로 내려앉았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 70030000000134/20080227/8548875/1
1993 - 김영삼 대통령 재산 공개 김영삼 대통령, 재산 공개. 국무위원 재산공개 권유 ● 앵커: 김영삼 대통령은 오늘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공개하고 국무위원들도 빠른 시일 안에 재산을 공개해 줄 것을 권유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3241_6127.html
1991 - 쿠웨이트 탈환, 걸프전 종료 역사속 오늘[1991년 2월 27일] 쿠웨이트 탈환, 걸프전 종료 1991년 오늘! /YTN 2011-02-27 일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2250616155616&s_mcd=0422&s_hcd=
1990 - 울진 원자력발전소 1,2호기 준공 울진원자력발전소 - 울진 1, 2호기는 가압경수로형으로, 1982년 10월에 기공식을, 1990년 2월에 준공식을 가졌다. 핵증기공급계통은 프랑스의 프라마톰사가 공급했고, 터빈 발전기계통은 프랑스의 알스톰사가 공급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와 원전기술교류를 하게 되어 국내 원전의 표준화에 기여했다. 국산화율이 영광 1, 2호기의 34.9%에서 40.15%로 대폭 향상되었다. /국가기록포털
1990 - 소련최고회의, 고르비에 막강권력 부여 미국식 대통령제 승인 [책갈피 속의 오늘]1990년 옛 소련 ‘미국식 대통령제’ 도입 고르비 ‘영욕의 세월’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소련 사회에 대변혁을 초래했다.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90227/8701623/1
1989 -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Lorenz, Konrad) 사망 로렌츠 [Lorenz, Konrad, 1903.11.7~1989.2.27] [역사 속의 인물] 회색기러기 아빠, 콘라트 로렌츠 1937년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는 이색적인 동물 관찰실험을 한다. 인공부화로 갓 태어난 회색 기러기들이 처음 본 대상인 자기를 보고 마치 어미 기러기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본능적인 행동을 발견한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본 수염 난 과학자를 제 어미라고 '각인'(imprinting)해 버린 것. 이날 발견은 비교행동학이라는 다소 낯선 학문의 시초가 된다. 로렌츠는 '동물심리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비교행동학의 창시자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을 직접 찾아가서 연구하면서 동물행동에서 본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대 학계에는 '파블로프의 실험'처럼 동물의 행동은 학습된 것이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로렌츠는 이러한 학문적 풍토를 거부하고 자연 상태에서 동물을 관찰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게 되었다. 평생을 동물들과 함께해온 그는 1973년 프리슈, 틴버겐과 함께 동물행동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솔로몬의 반지' '인간, 개를 만나다' 등 수많은 에세이를 남기며 과학계뿐만 아니라 20세기의 지성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1989년 오늘 고향 알텐베르크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날, 그의 집 위로 같이 생활한 회색 기러기들이 꺼이꺼이 울며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배성훈 편집2부장 기자 /매일신문 2013년 02월 27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0083&yy=2013
1968 - 리우 카니발 브라질 공식 제정 [책갈피 속의 오늘]1968년 리우 카니발 브라질 공식 제정 커피와 축구, 그리고 삼바(Samba)의 나라.
1939 - 러시아의 혁명가, 교육학자 크룹스카야(Krupskaya, Nadezhda) 사망 크룹스카야 [Krupskaya, Nadezhda Konstantinovna, 1869.2.26~1939.2.27]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가 1939년 2월 27일 눈을 감았다. 남편 레닌이 세상을 뜬지 15년 뒤였다. 구소련의 신과도 같은 존재였던 레닌이 세차례나 뇌졸증으로 쓰러졌을 때마다 그의 병상을 지킨 이가 다름아닌 바로 그녀였다. 레닌은 혁명가답게 사랑에 있어서도 시원시원하고 단도직입적이었다. 그녀를 향한 사랑이 그랬다.
파블로프 [Pavlov, Ivan Petrovich, 1849.9.26~1936.2.27] [어제의 오늘]1936년 러시아 생리학자 파블로프 사망 ㆍ소화액 분비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 1936년 2월27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80대 중반의 생리학자 파블로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날 시간이군. 옷을 입게 도와주게.” 폐렴으로 투병 중이던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제자 한 명이 그의 세세한 변화를 기록하고 있었다. 파블로프의 마지막 실험이었다.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는 1849년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 라잔의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다윈의 <종의 기원>이나 세체노프의 <뇌의 반사> 같은 금서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는 멘델레예프 등 유명한 과학자들이 버티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는다. 동물해부 실험의 달인인 치온 교수 밑에서 파블로프는 탁월한 외과수술 기술을 터득하고 임피리얼 의학 아카데미에서 의사 자격을 얻는다.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2-26 17:58:32 201002261758325&code=100100&s_code=ap005
1933 - 독일 베를린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발생 1933년 2월 27일 밤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의문의 화재가 발생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당원 마리누스 루페가 자신의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했지만, 한편에선 나치스가 3월 실시될 총선거에서 반대세력의 진출을 막기 위해 방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일었다. 한달전인 1월 30일에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오스트리아 출신의 선동가 아돌프 히틀러를 총리로 지명해 독일에는 제3제국이라 불리게 될 나치스 체제가 막 출범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 [Taylor, Elizabeth (Rosemond), 1932.2.27~2011.3.23] [책갈피 속의 오늘]1932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출생 그녀의 여덟 번째 결혼식. 그녀는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신랑은 20세 연하의 건설 노동자였다. 건축현장에서 시간당 20달러를 받고 흙을 나르던 중장비기사였다. 그녀는 그를 알코올환자 치료센터에서 만났다. 팝스타 마이클 잭슨의 목장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과 제럴드 포드가 초대됐다. 식장은 빨간 장미와 자주색 난초, 노란 백합으로 뒤덮였고 꽃값으로 17만6000달러(약 2억원)가 지불됐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녀의 남성편력은 화려하다. 호텔 재벌 콘라드 힐튼 2세, 배우 마이클 와일딩, 영화제작자 마이크 토드, 가수 에디 피셔, 배우 리처드 버튼, 공화당 상원의원 존 워너…. 버튼과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그는 유일하게 ‘오래된 남자’였다. 일본에서는 그녀의 애칭을 따 ‘리즈’라는 이혼 전문지가 창간된다. “참지 말고 이혼하라.” 잡지의 슬로건이다. 스크린에서 그녀의 아름다움은 찬란하게 빛났다. 영화 ‘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 ‘클레오파트라’에서 그녀의 고혹적인 눈빛은 관객들의 혼을 빨아들였다. 그녀는 ‘미(美)의 상징’이었다. 오드리 헵번의 우아함, 그레타 가보르의 은둔자의 신비, 그레이스 켈리의 차가운 열정. 그녀는 그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영화와 동일시된다. 수많은 작품에서 그는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 나온 적이 없으며, 가사를 하는 모습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극중에서조차 노동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이 흐트러지는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미국 에이즈연구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테일러. 그녀의 주변에는 ‘동성애 남자’들이 들끓었다. 버튼은 로렌스 올리비에와 ‘사귄’ 양성애자였다. 그녀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록 허드슨, 제임스 딘, 테네시 윌리엄스, 몽고메리 클리프트, 로디 맥도웰도 동성애자다. “그녀는 동성애를 즐기는 남자들에게 편안함을 느꼈고, 잠자리를 함께할 수 없음에도 자신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많은 남자들에게 진한 연민을 느꼈다”.(전기작가 앨리스 앰범)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동아닷컴 2004-02-26 18:52: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40226/8033988/1
고종 31년(1895년) 갑오경장으로 '내무아문'에서 신식의 도량형제를 선포하였고, 광무 6년(1902년)에는 정식으로 도량형기의 제조 검정 기관인 '평식원'을 따로 설치하고 도량형규칙을 정하여 서구식의 도량형제를 도입하였습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고, 농상공부령으로 도량형기 판매규칙을 정하였습니다. 융희 3년(1909년) 9월 21일에는 도량형법을 개정하고, 시행규칙을 반포함으로써 일본식 도량형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때 일본식 도량형 단위인 돈, 관, 평이 쓰였습니다. 1926년 2월 27일 조선도량형령이 공포됨에 따라 일본식 미터법이 전용되었습니다. ... (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도량형" 중 일부) http://cafe.naver.com/ArticleRead.nhn?clubid=17098728&page=1&menuid=17&boardtype=L&articleid=110
조선도량형령시행기일의건 [시행 1926. 3. 1] [조선총독부령 제22호, 1926. 3. 1, 제정] 조선도량형령은 1926년 4월 1일부터 시행한다. 부칙 <제22호,1926.3.1> 이 영은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법령 상세조회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www.law.go.kr/LSW/LsInfoP.do?lsiSeq=70492
허블 [Hubel, David Hunter, 1926.2.27~ ] 온타리오주 윈저 출생. 존스홉킨스대학교 등에서 연구하고, 1959년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옮겨 뇌의 표피(表皮)가 눈의 망막으로부터 전달되는 정보를 분석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였다. 이 연구로 R.W.스페리, 스웨덴의 T.N.비셀과 공동으로 1981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다. /naver
- '날으는 새 두마리 1962'
김환기 [金煥基, 1913.2.27~1974.7.25] 호 수화(樹話). 전남 신안 출생. 1936년 니혼[日本]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1940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를 조직하는 한편 이과회(二科會)와 자유전(自由展) 등에 출품, 신미술(新美術:아르누보) 운동에 참여하였고, 8 ·15광복 후에는 신사실파(新寫實派)를 조직, 모더니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이후 미국에 정착하여 작품활동을 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구체적인 이미지 대신 연속적인 사각 공간 속에 점묘(點描)를 배열하였으며, 한국 근대회화의 추상적 방향을 여는 데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초기 수업시대는 미술학교 재학시와 연구과 시절, 귀국하기까지의 몇 년 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과회 ·백만회(白蠻會)를 조직하여 당시 일본 신감각파 대열에서 활발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광복 이후부터 프랑스로 건너가기까지의 청년시절은 한국적 모티프 발견으로 일관했다고 할 수 있다. 운학(雲鶴) ·달 ·산 ·나목(裸木) ·꽃 ·여인을 통해 한국적 풍류의 정서를 표출하려는 것이 이 시기의 지배적 경향이다. 한국적 모티프에 대한 탐닉은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1959년 귀국하기까지의 파리시절에서도 농도를 더하였다. 약 10년간 미국에 있을 때에는 외견상 지금까지의 경향에 비해 많이 변모하였는데, 우선 모티프 해소, 순화된 색감, 공간의 심화와 확대라는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실지로 작품상에는 어떠한 변모도 초래하지 않았으며, 작가 내면의 발전으로 여과시킨 심화현상일 뿐이다. 대표작으로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론도》《해와 달》 등이 있다. 한편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는 환기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세워져 1992년 개관되었다. 안좌면(安佐面) 읍동리(邑洞里)의 그의 생가는 지방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1907 - 미국의 재즈 가수 마일드리드 베일리(Bailey, Mildred) 출생 베일리 [Bailey, Mildred, 1907.2.27~1951.12.12] Mildred Bailey (February 27, 1907 – December 12, 1951) was a popular and influential American jazz singer during the 1930s, known as "The Rockin' Chair Lady" and "Mrs. Swing". Her number one hits were "Please Be Kind", "Darn That Dream", "Rockin' Chair" and "Says My Heart". Biography Born Mildred Rinker in Tekoa, Washington, her mother, Josephine, was half Coeur d'Alene Indian and a devout Catholic. Her father, Charles, played fiddle and called square dances. Her mother played piano every evening after supper and taught Mildred to play and sing. Her brothers were the vocalist and composer Al Rinker, and the lyricist Charles Rinker. Career http://en.wikipedia.org/wiki/Mildred_Bailey
스타인벡 [Steinbeck, John Ernst, 1902.2.27~1968.12.20] 스타인벡은 미국의 대공황을 배경으로 농지를 잃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온 빈농들의 참담한 생활상을 그려낸 소설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1939)로 큰 명성을 얻은 소설가이다. 그밖에 캘리포니아의 한 농부와 두 아들 사이의 도덕적 관계를 다룬 작품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1952)이 1955년 영화화(제임스 딘 주연)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크게 목가적 작품, 사회비판적 작품, 해학이 풍부한 작품으로 구분되는데, 그의 명성은 주로 프롤레타리아를 다룬 1930년대의 자연주의 소설들에서 비롯되었다. 196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브리태니커
"작가의 오랜 임무는 바뀌지 않았다. 작가는 모름지기 개선을 목적으로 우리의 많은 중대한 과실과 잘못들, 그리고 어둡고 위험한 꿈들을 드러낼 의무가 있다."
- 존 스타인벡
1899 - 캐나다의 생리학자 찰스 베스트(Best, Charles) 출생 베스트 [Best, Charles Herbert, 1899.2.27~1978.3.31] 미국의 웨스트 펨브로크 출생. 토론토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20년 동대학의 생리학 교실에서 F.G.밴팅 교수의 조수로 일하면서 1922년 인슐린 발견에 협력하였다. 그 결과 개의 이자로부터 항당뇨성을 가진 호르몬인 인슐린을 추출하는 데 성공하여 1923년 밴팅, J.매클라우드와 공동으로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다. 1923년 밴팅-베스트 의학연구소를 설립하고, 1926년 토론토대학 조교수를 거쳐 1929년 교수가 되었다. 당뇨병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면서, 히스타민의 발견 및 근육생리학에 대해서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1941년 밴팅-베스트 의학연구소장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수혈문제에 관하여 장기보존이 가능한 건조혈청을 고안하였다. 저서에 《인체 The Human Body》(1923)가 있다. /네이버
1897 - 미국의 가수 매리언 앤더슨(Anderson, Marian) 출생 앤더슨 [Anderson, Marian, 1897.2.27(1902.2.17)~1993.4.8] 미국의 흑인 알토가수. 필라델피아 출생. 가난한 흑인 얼음장수의 딸로 태어나 6세 때 가계를 돕기 위하여 성가대원이 되면서 악재(樂才)를 인정받고, 남의 도움으로 음악을 공부, 뒤에 이탈리아의 음악가 보게티에게 사사하였다. 1925년 뉴욕필하모니 주최 신인콩쿠르에서 1위를 하여 동년 필라델피아관현악단 독창자로 뽑혔으나 인종차별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자 런던으로 건너가 성공을 거두었다. 29년 장학금을 얻어 유럽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30년 이후 독일에서 연구, 35년 잘츠부르크음악제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흑인영가를 불러 “100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 후 북유럽 제국 ·러시아 ·남유럽 ·남아메리카 등 전세계를 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39년 미국으로 돌아와, 링컨기념회관에서 독창회를 열어 절찬을 받았다. 41년 출생지 필라델피아의 시회(市會)로부터 공적 있는 시민이라 하여 1만 달러의 상금을 받자 그 상금으로 “민족과 인종과 계급의 차별 없이 예술 일반에 노력한 젊은 사람들을 돕는다”는 취지 아래 앤더슨상을 제정하였다. 정열적이고 깊은 정취에 충만된 성질(聲質)의 앨토로, 연주곡목도 매우 다양하고 흑인영가의 제1인자로 불린다. 자서전 《My Lord, What a Morning》(1956)이 있고, 52년과 59년 한국에서 공연하였으며 65년에 은퇴하였다. /네이버
레만 [Lehmann, Lotte, 1888.2.27~1976.8.26] 독일 페를레베르크 출생. 베를린음악학교를 나온 뒤, 바그너 가수인 마틸데 마링거에게 사사하였다. 1910년 함부르크극장에서 데뷔하고 1913년 그 극장에서 쿨렘페러의 지휘로 《로엔그린》의 엘자를 불러 성공을 거두었으며, 1914년 빈국립극장에 출연, 바그너 가수로서 인정을 받았다. R.슈트라우스는 그녀를 위하여 《아라베라》를 작곡하였다 하며, 인테르메초의 크리스티네 외에도 많은 그의 작품을 초연하였다. 1938년 미국에 이주, 1945년 이후는 오페라를 그만두고 가곡가수로서 뉴욕을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1951년 가곡 고별 리사이틀을 열고 은퇴하였다. 극적인 표현과 풍부한 성량을 가진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가수로 알려졌다. /naver
- 'Prince Igor', by Borodin
1887 - 러시아의 작곡가, 화학자 알렉산드르 보로딘(Borodin, Aleksandr) 사망 보로딘 [Borodin, Aleksandr Porfiryevich, 1833.11.12~1887.2.27] 러시아의 작곡가, 화학자, 사회개혁자. 페테르부르크 출생. 러시아의 귀족 게데아노프공작의 사생아로 태어나 농노(農奴) 보로딘의 호적에 얹혔다. 그 때문에 충분한 교육을 받고도 사회활동을 규제당하였으며, 그와 같은 사회적 불공정이 그의 민주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악재(樂才)를 보였고, 화학에도 열중하여 1850년 페테르부르크의과대학에 들어갔으며, 58년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 유학하였다. 1862년 귀국 후는 모교의 조교수가 되고, 여기서 화학자 지닌의 제자가 되어 유기화학연구를 계속하였다. 작곡가로서는 신러시아악파(樂派), 즉 5인조에 속한다. 연구생활의 틈을 이용한 작곡활동이었으나 러시아의 유수한 실내악 작곡가로, 또 러시아 국민음악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첼로의 명수이기도 했다. 작품은 동방적(東方的)인 색채가 농후하며 대표작에 교향곡 2번(1876), 현악4중주곡(1881), 오페라 《이고리공》(미완성) 등이 있다. /네이버
블랙 [Black, Hugo La Fayette, 1886.2.27~1971.9.25] 미국의 변호사, 정치가, 연방대법원 판사(1937~71). 시민적 자유에 대한 보장규정인 권리장전을 철저히 옹호했다. 그가 미국 사법 전통에 기여한 가장 큰 공은 수정헌법 제14조는 원래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채택된 권리장전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주(州)의 권한까지도 제한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주장한 데 있다. 그는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고향인 앨라배마를 거의 떠나지 않았다. 터스컬루사에 있는 앨라배마주립대학교 법과대학을 다녔고, 졸업 후 1906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버밍햄에서 실무를 쌓았다. 1926년 전국적인 유명인사로 부상했으며 그해에 민주당 소속 연방상원의원이 되어 1937년까지 봉직했다. 당시 그는 공익사업 로비스트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뉴딜 입법을 확고히 지지함으로써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호감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1937년 그를 연방대법원 판사로 임명했다. 재직 초기에 블랙은 증가하는 법원 내 다수파와 더불어 뉴딜 입법에 대해 이전 법원이 내린 거부결정을 파기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연방정부의 경제규제권 강화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와 시민적 자유에 대한 절대주의자로서의 입장을 양립시켰다. 1940, 1950년대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입장으로 인해 법원의 다수파에서 자주 벗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자유에 대한 정부의 제한을 위헌이며 위험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1960년대에 그는 '학교기도 의무화 사건' 판결을 파기시키고, 형사피의자의 변호사 의뢰권을 보장한 대법원 내 자유주의 다수파 사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마지막 다수의견에서 1971년 정부의 공표제한 시도에 맞서 소위 국방부 기밀문서(Pentagon Papers)를 공표하려는 〈뉴욕 타임스 The New York Times〉의 권리를 지지했다. /브리태니커
비외손 [Bjornsson, Sveinn, 1881.2.27~1952.1.25] 아이슬란드의 정치가·외교관. 1944년에서 1952년까지 최초의 아이슬란드 대통령을 역임했다. 비외손은 1907년 이후 최고법원 판사로 재직했고 1912년 레이캬비크 시위원회 의원이 되었으며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시장으로 일했다. 1914~16년, 1920년 국회의원이 되었던 그는 주미국(1914), 주영국(1915) 특별공사로 일하면서 영국-아이슬란드 간의 무역협정을 성사시켰다. 그는 덴마크에서 장관으로 활약했으며(1920~24, 1926~41) 수많은 국제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비록 아이슬란드가 1918년 이래 독립국가였으나 아이슬란드의 외교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덴마크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나 1940년 5월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아이슬란드는 자치를 얻게 되었으며 비외손은 1941~43년에 3차례나 섭정관으로 선출되어 이전에 덴마크 국왕에 의해 이루어졌던 아이슬란드 문제에 관한 모든 권한들을 부여받았다. 1941년 미국 군대가 비외손의 요청에 의해 아이슬란드에 진주했고 전쟁 이후에도 축소된 규모지만 계속 주둔했다. 이에 따라 이 문제가 전후 아이슬란드 외교정책에서 핵심적인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는 1944년 아이슬란드 공화국이 건설되면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45년과 1949년 만장일치로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브리태니커
1869 - 미국의 병리학자 앨리스 해밀턴(Hamilton, Alice) 출생 해밀턴 [Hamilton, Alice, 1869.2.27~1970.9.22] 미국의 병리학자. 직업병에 관한 연구로 유명하다. 산업중독성 물질이 노동자의 건강을 해친다고 역설하면서 근로자 재해보상법 제정과 안정된 작업환경 조성에 기여했다. 그녀는 1893년 미시간대학교에서 의사자격을 획득하고 존스홉킨스대학교와 독일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19~35년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그후에는 일리노이 주정부, 연방정부, 국제연맹에서 연구를 수행했다. 저서로는 〈유해무역 탐구 Exploring the Dangerous Trades〉(1943)가 있다. /브리태니커
1846 - 독일의 역사가, 문예평론가, 사회주의자 프란츠 메링(Mehring, Franz) 출생 메링 [Mehring, Franz, 1846.2.27~1919.1.28] 독일의 역사가, 문예평론가, 사회주의자. 프로이센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나 베를린과 예나의 대학에서 수학한 후 언론기관에 관계하면서 문학 ·역사 ·철학 ·정치 등의 폭넓은 분야에서 문필활동을 하였다. 1878년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 탄압법에 반대하였으며, 1889년 이후에는 독일 사회민주당 기관지 《신시대 Neue Zeit》의 편집에 참가하여 정치적 주장을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제국주의 전쟁에 대해 항쟁하였고 스파르타쿠스단(團)과 그 후신(後身)인 독일공산당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레싱 전설》(1893) 등의 문학작품 외에 《독일 사회민주당사》(4권, 1897∼1898) 등이 있다. /네이버
- Cent. of Independence, 1944, Feb. 27
도미니카는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16세기 중에 원주민은 전멸하였고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사탕수수 재배에 혹사되었다. 1795년 바젤조약에 의하여 프랑스에 이양된 이래 아이티군(軍)에 의한 점령·독립, 에스파냐통치, 재독립, 아이티에 의한 재점령 등으로 고난의 역사를 거쳤으나 1844년 드와르테의 지도하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현재의 국가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후에도 군벌과 결탁한 토지귀족의 배신행위 때문에 1862∼1865년의 에스파냐 지배를 비롯하여 반란·독재의 반복으로 정치정세는 문란해지고 결국 19세기 말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미국은 1917∼1924년 ‘권익의 보호와 질서유지를 위하여’ 해군을 파견하여 1941년까지 세관을 관리하였다. (발췌) /네이버
- Longfellow, Henry W. - 'The Midnight Ride of Paul Revere...'
1807 - 미국의 시인 롱펠로(Longfellow, Henry Wadsworth) 출생 롱펠로 [Longfellow, Henry Wadsworth, 1807.2.27~1882.3.24] 미국의 시인. 메인주(州)의 포틀랜드 출생. 보든대학교 졸업 후 약 3년 동안 유럽에 유학하고, 귀국 후 모교의 근대어학 교수가 되었다(1829∼1835). 1835년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기 전에 또다시 유럽으로 갔으며, 이때 첫번째 부인을 잃었다. 스위스에서 프랑세즈 애플턴을 발견하고 그녀를 산문 이야기 《하이페리온》의 여주인공으로 묘사하였다가 그녀의 반감을 사기도 했으나 1843년 드디어 그녀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이 두 번째 부인도 1861년 불행한 사고로 불타 죽었다. 18년간 하버드대학 교수직에 있었으며, 그 동안 케임브리지에 살면서 많은 시작(詩作)을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도 식민지 전쟁을 배경으로 한 비련의 이야기 《에반젤린》(1847), 핀란드의 《칼레발라》의 영향을 받고서 쓴 인디언의 신화적 영웅 이야기 시 《하이어워사의 노래》(1855), 청교도 군인의 연애 이야기 《마일즈 스탠디시의 구혼》(1858) 등의 장시(長詩)가 유명하다. 이것 외에도 《인생찬가》를 포함한 《밤의 소리》(1839), 《마을의 대장간》을 포함한 《민요》(1842), 《화살과 노래》를 포함한 《블루주의 종루(鐘樓)》(1845) 《길가 여인숙 이야기》(1863∼1874), 단테의 《신곡》의 번역(1865∼1867), 《황금 전설》(1851) 《뉴잉글랜드의 비극》(1868) 《신성(神聖) 비극》(1871)으로 된 시극 《크리스터스》(1872) 등이 있다. 시는 독창성과 직감의 깊이가 없으나, 유럽의 시적 전통, 특히 유럽 대륙 여러 나라의 민요를 솜씨있게 번안·번역함으로써 미국 대중에게 전달한 공적은 크다. 오늘날 최대 걸작으로 높이 평가되는 작품은 단테의 《신곡》 번역에 붙인 소네트 《신곡》으로, 그의 다른 시에서는 볼 수 없는 사상의 깊이가 보인다. /네이버
1785 - 프랑스 화학자 라부아지에, 물의 분석과 합성에 대한 실험을 진행 물의 조성 1783년 6월 25일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의 협조 하에 라부아지에는 수소를 연소시킬 경우 물이 생성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이들은 정확한 물의 조성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1783년 6월 26일 조지프 프리스틀리는 왕립 학회에 플로지스톤의 정체는 수소라고 보고하였다. 그는 산화 납을 수소와 함께 가열시켰더니 산화 납이 납으로 환원되면서 수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였고, 이를 통해서 수소가 곧 플로지스톤이며, 이것이 산화 납과 결합하여 금속의 납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다. (사실은 수소가 산화 납의 산소와 반응하여 물이 된 것이었으나, 프리스틀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1784년 1월 15일에는 헨리 캐번디시가 물의 정량적, 정성적 조성을 발표하였으며,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할 경우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탈 플로지스톤 공기', 즉 산소가 된다고 발표하였다. 라부아지에는 산화 납을 납으로 환원시킬 경우 물이 형성된다는 사실을 토대로 물에서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것이 산소라는 설을 반박하였다.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은 30명 이상의 과학자들의 입회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하여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하여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하였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서 라부아지에는 물은 원소가 아니며,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 특히 당시 플로지스톤의 정체라고 추정되던 수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다. 이러한 연구로 인해서 라부아지에는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할 근거를 얻게 되었다. /위키백과
1700 - 영국의 항해가 댐피어, 뉴브리튼섬 발견 댐피어 [Dampier, William, 1651~1715] 영국의 해적·항해가. 서머싯출생.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1679년 다리엔 지협을 횡단하여 태평양 연안으로 나간 후 멕시코 ·페루 ·칠레 등의 해안을 탐험하였다. 더 나아가 태평양을 횡단하여 필리핀에 이르렀으며, 말레이제도를 거쳐 1688년 니코바르제도에 도달, 1691년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169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해안과 뉴기니 ·뉴브리튼섬의 탐험에 나서 댐피어제도 및 댐피어해협을 발견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저서로 《새로운 세계일주여행》이 있다. /네이버
- 'Adoration of the Shepherds'
- 'The Gate Guard' - 'The Goldfinch'
1622 - 네덜란드의 화가 카렐 파브리티위스(Fabritius, Carel) 출생 파브리티위스 [Fabritius, Carel, 1622.2.27~1654.10.12] 네덜란드의 바로크 화가. 초상화와 풍속화 및 문학적 주제를 다룬 그림으로 유명하며, 빛과 공간에 대한 그의 관심은 17세기 중반 델프트 미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 선생으로서 시간이 날 때에는 그림도 그렸으며, 그와 그의 동생 바렌트는 둘 다 화가가 되었다. 파브리티위스라는 이름은 그들의 원래 직업인 목공이라는 뜻의 라틴어 'faber'에서 따온 것이다. 1640년대초 그는 렘브란트 밑에서 공부했으며, 렘브란트의 제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1650년경부터 델프트에서 활동했으며 1652년 화가 길드에 가입했다. 그는 델프트의 화약고 폭발에 의한 부상으로 죽었는데, 그 사고로 많은 작품도 함께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초기의 작품인 〈나사로의 부활 Raising of Lazarus〉(바르샤바 국립박물관)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여전히 렘브란트적인 요소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1648년경 아브라함 데 포테르의 초상화(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서는 독창성과 정신적인 독립성이 나름대로 확립되었음을 볼 수 있다. 빛을 통해 인물을 묘사하고 특히 어두운 배경에서 인물을 대조적으로 드러내는 렘브란트와 반대로 그는 밝은 배경에 인물을 오히려 어둡게 나타냈으며, 자연광의 효과에 의한 미묘한 분위기가 특징적이다. 이런 면은 피테르 데 호흐와 얀 베르메르(그의 제자로 생각됨)에게 영향을 미쳤다. 환상적인 원근법의 효과를 자아내는 장식벽화를 그려 처음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악기 가게가 있는 델프트의 풍경 A View in Delft, with a Musical Instrument Seller's Stall〉(1652, 런던 국립미술관)도 그러한 효과를 보여준다. 한때는 이것이 투시 상자, 즉 구멍을 통해 볼거리를 보여주는 상자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다. 1654년의 〈오색방울새 The Goldfinch〉(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는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17세기 네덜란드의 회화 전통에서는 매우 독특한 구도로 되어 있다. 로테르담의 보이만스반 뵈닝겐 박물관에 있는 초기의 초상화와 런던 국립미술관에 있는 1654년작 초상화는 자화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
-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