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전쟁 17 -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에서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한 모로코!
"모로코!" 라 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모나코" 와 헷갈리기도 하는데, 우리에게는
1942년에 제작되어 전후에는 우리나라에도 상영된 마이클 커티즈 감독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카사블랑카를 배경으로 두 연인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영화 인 "카사블랑카" 일 것입니다.
2차세계대전때 유럽인들은 자유의 땅 미국으로 가려고 중립국 포르투갈 리스본에 가려고 하나 스페인이
막혀있어 지중해와 아프리카 오란을 거쳐 "모로코 항구 카사블랑카" 에 오지만 돈이 있는 사람들만
비자(통행증) 를 얻어 리스본으로 향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재산을 탕진하여 카사블랑카에 머물게 됩니다.
주인공 릭 블레인(험프리 보가트 분)은 카사블랑카에서 "릭의 카페 아메리카" 란 술집을 운영하는데, 그에게
통행증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서 통행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어느날
반나치의 리더인 라즐로(폴 헨레이드 분)와 아내 일자(잉그리드 버그만 분)가 릭의 술집으로 찾아온다는.....
그런데 당시에 모로코는 프랑스 식민지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에 모로코는 베트남 처럼
독일의 괴뢰정권인 페텡의 "비시 정부" 에 속해 있었으니 자연히 나치들이 이 도시에서
설치게 되고 비시정권하의 식민지 당국은 나치의 눈치를 살피는데..... 아니? 모로코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아니었어? 이런 의문은 프랑스와 스페인에 의해 분할점령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1970년대 가난했던 시절에 먹고 살기 위해 너도나도 "어부" 가 되어 머나먼 대서양의
"라스팔마스" 로 고기잡으러 떠났는데 이 섬에서 바로 동쪽이 모로코이며 또는 스페인령 서사하라를
차지하려 모나코 민간인들 수십만명이 떼를 지어 남쪽 서사하라로 행진한걸 기억하는 분도 있겠습니다?
십여년전 부터 모로코는 관광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니 바다와 산맥에 사막이 있어 텐트에서 자면서
낙타를 타고 사막을 여행하는게 유행이 되어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금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모로코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꺽고 4강에 올랐으니 이제 우리나라에서 모로코를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습니다.
국제축구연맹(FIFA) 은 카타르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4개국으로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비롯해
"크로아티아, 모로코와 일본" 을 꼽았는데..... 모로코는 E 조 1위 일본 처럼 FIFA 랭킹 2위인 벨기에
와 캐나다에 크로아티아가 속한 F 조에서 2승 1무로 조 1위로 진출해 4강에 올랐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피파 순위가 낮았던 모로코와 일본은 "언더독의 반란" 이라 불리니 영국 이코노미스트
에 따르면, 2002년 한일 월드컵 부터 카타르 대회 까지 6차례 월드컵에서 나온 10대
이변 중에 5개가 카타르에서 나왔으니 모로코의 포르투갈전 승리,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르헨
티나전 승리, 호주의 덴마크전 승리, 일본의 독일 및 스페인전 승리를 카타르의 이변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상금 배분 문제로 한국등에서 잡음이 나오는 가운데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아프리카 국가 최초로 4강 신화를 쓴 모로코가 상금 2500만 유로(338억원)
전액을 선수들이 서로 나눈게 아니라...... 모로코 빈민가 어린이들의 교육비와 생활비로
기부했다니 더욱 놀라운데 모로코의 1인당 GDP 3441 불은 한국의 10분지 1에 불과 합니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북서부 마그레브 지역에 위치한 국가로 동북쪽에는지중해, 서북쪽과 서쪽에 대서양
에 접한 아랍-베르베르 국가이며 수도는 라바트이고 입헌군주제 왕국으로 현 국왕은 알라위 왕조
의 무함마드 6세이며.... 아랍어로는 “마그립 왕국” 이라고 하고 베르베르어로는 “무라쿠시” 라 합니다.
마그립은 북아프리카 서부를 이르는 지명 마그레브에서 유래한 것으로 마그레브라는 말은 아랍어
로 "서쪽" 이라는 뜻이며, "모로코(Morocco) 는 크로아티아 처럼 영어 국명" 을 따온 것으로,
무라비트 왕조의 수도였던 마라케시(Marrakech) 에서 유래한 것이니..... 프랑스어 Maroc,
스페인어 Marruecos 등이며 터키어로는 Fas 라고 하는데, 옛 수도였던 페스에서 따온 것입니다.
모로코는 고대 로마시대에는 마우레타니아(Mauretania) 라 불렸으며 원주민은 베르베르인 계열인데
고대에 지중해 세게의 강대국이었던 카르타고, 누미디아와 교류가 활발했던 마우레타니아국은
3차례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강대국이 된 고대 로마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로마의 동서분할후 서로마 제국에 속하게 된 모로코 지역에서 길도라는 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스틸리코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게르만 반달족들이 모로코 일대를
지나쳐 튀니지를 중심으로 정착해 반달왕국을 세웠고,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가 반달 왕국을
쳐서 재수복하는 과정에서도 모로코는 일부 해안지대 외에는 재수복이 되지 못하고 방기 되었습니다.
8세기 무함마드의 후예인 이슬람제국의 대정복 이후 사라센(아랍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해 지는 곳"
이라는 뜻의 "마그레브" 라고 불리게 되었으니.... 711년 아프리카에서 사라센 이슬람 군이 바다를
건너 스페인에 상륙해 게르만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이슬람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의 땅이 됩니다.
그 계기는 모로코에서 시작되었으니 모로코 북부 지중해 세우타의 통치자인 훌리안 백작 은 자기
딸을 욕보인 스페인 서고트 왕국의 로드리고왕에게 원수를 갚기 위해 아라비아에서 일어난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이 다마스크스에 건국한 우마이야왕조의 사라센인들에게 도움 을 요청합니다.
마침 이집트와 튀니지 및 알제리를 지나 모로코에 접근하던 이슬람 사라센인들은 지중해를 건너 스페인땅을
침범해 711년 과달레테 전투 에서 톨레도 왕 로드리고를 전사 시키는 대승을 거둔후 서고트왕국을 멸망
시키고 스페인을 통치하는데 그치지 않고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침입해 파리 인근 투르와 푸아티에
사이에서 게르만 프랑크왕국과 전투 를 벌이는데 이때 처음부터 모로코인들도 상당수 병사로 참전했습니다.
모로코의 베르베르인들은 반세기에 걸친 저항 끝에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다마스커스) 에게 정복
되었으나 이슬람 개종 후에도 자신들을 차별하는 아랍인들에 대한 현지 베르베르인들의 분노가
축적된 결과 모로코에서 시작된 베르베르 대항거는 마그레브 전역의 실질적 독립으로 이어집니다.
이슬람화 이후에 최초로 모로코 주요부를 지배한 토착 왕조는 786년 들어선 아랍계 "이드리시
왕조" 로... 중세 모로코의 수도로 기능한 페스가 세워진 것이 이때인데 한세기간 번영을
누린 이드리시 왕조는 10세기 들어 북쪽 안달루스(스페인) 를 점령해 지배하던 이슬람
후우마이야 왕조와 동쪽 튀니지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 간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쇠퇴합니다.
그후 10세기 말엽 파티마 조의 속국인 지리 왕조가 패권을 잡는가 싶었으나 현지 베르베르 부족들의
반발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으며 11~14세기 들어 모로코를 기반으로 한 무라비트
왕조와 무와히드 왕조가 안달루스, 알제리, 튀니지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점유하고는 바다를
건너 이베리아 반도 진출을 시도하며 안달루스의 토후들을 도와 기독교 왕국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때 이야기로 11세기 스페인의 실존 인물인 로드리고 디아스 (Rodrigo Díaz 엘시드) 의 실화에
바탕을 둔 찰톤 헤스턴과 소피아 로렌 주연의 1961년 영화 “엘시드(El Cid)” 가 만들어졌으니
기독교 카스티야 레온왕국의 알폰소 6세에게서 추방된 엘시든느 이슬람 무어인과의 싸움에서
이름을 떨쳤으니..... 발레시아를 탈환할 때 모로코에서 바다를 건너 온 저 무어인들을 격파 합니다.
북쪽 피레네산맥 아래로 밀려났던 기독교 세력들인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이 남진한 레콘키스타
의 성공, 사막 유목민들의 침략, 결정적으로 내란과 내전으로 인해 쇠퇴했으며 이후 마린
왕조를 비롯한 모로코 왕조들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현재의 모로코 영토를 유지합니다.
서부 아프리카 모로코의 토착민족인 베르베르인 Berber 은 수니파 이슬람이고 2500-3500만명에 달하니
모로코에 1200만명 그리고 알제리에 900만명이 거주하는데 이에 비해 무어인 Moor 은 검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이베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에 사는 아랍계와 베르베르인의 후손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끊임없이 모로코 정복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해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 밖에 있었는데.... 다만 알제리 주둔 오스만군이 모로코의 여러 내전에
개입하였고 1554년과 1576년 페스를 점령한후 사드 왕조로 부터 연공을 얻어내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왕가인 알라위 왕조는 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입향조는 13세기말 인물인 알 하산 앗 다르킬(Al-Hassan Ad-Dakhil)이라는 인물인데,
메디나 근교 얀부로 부터 이맘으로 초청을 받은 모로코의 한 마을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이후 후손들은 아틀라스 산맥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가다가 사디 왕조의 혼란을 계기로 알라위
왕가의 사실상 시조로 여겨지는 샤리프 이븐 알리(Sharif ibn Ali)가 1631년 타필랄트의
술탄임을 선포해 즉위했고, 아들 물라이 알 라시드(Mulai Al-Rashid)는 1666년 페스를
점령해 왕조의 수도로 삼은데 이어 1669년 마라케시까지 점령해 모로코 통일에 성공합니다.
이후 역대 술탄들은 중앙집권화에 노력했고 1777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맺어 세계 최초로 미국을
승인한 나라가 되었으며, 모로코 역시 중세에는 지중해 연안인 이탈리아와 남 프랑스 및 스페인
등지를 휘저은 알제리, 튀니지 등과 함께 마그레브 해적들의 소굴이자 백인 노예무역의 거점
중 하나였는데, 19세기 아프리카 대륙 식민화가 시작되자 모로코의 안위도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천년간을 이슬람 해적들에게 시달리던 19세기 들어 프랑스가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
해서 식민화하자 알제리를 돕다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면서.... 모로코의 군사적
약세가 확연하게 드러났으니, 1860년에는 중세시절 부터 꾸준히 갈등을 거듭하던 스페인의
공격을 받고 테투안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와드라스 조약을 맺고 스페인의 진출도 허용하고 맙니다.
영국과 조약후 유럽과 미국의 영향력이 커지며 제국주의 시절 모로코 위기가 발생한 끝에 1912년 12월
수도 페스에서 조약을 맺어 프랑스 보호령으로 전락했으며, 북부 일부는 스페인 통치에 들어가 식민
지배를 당하는데 1921년 베르베르인들이 봉기하여 리프 전쟁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화학무기를 비롯한 당대의 각종 첨단무기들을 총동원하여 결국 패배합니다.
리프전쟁 Rif War 은 1차 세계대전 이후인 1921년~1926년에 있었던 스페인-프랑스 대
모로코 베르베르족이 세운 리프 공화국간의 전쟁으로.....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당시 최첨단 무기였던 탱크, 전투기에다가 "독가스" 까지
사용했으니 전쟁이 장기화되고 베르베르족도 격렬히 저항하여 수많은 피해를 낳았습니다.
중세 시절부터 꾸준히 있었던 스페인과 모로코의 분쟁은 19세기 후 스페인의 모로코 간섭과 지배라는
결과가 되는데, 스페인은 아메리카 식민지와 필리핀을 미국에 잃고 마지막 남은 아프리카 식민지
라도 지키고자 했으니 모로코를 식민화하는데는 실패했지만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는데 성공했고 스페인령 사하라와 스페인령 모로코 식민지를 설치하고 모로코 왕국에 간섭을 합니다.
모로코인들과 베르베르족은 몇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니 1차 리프 전쟁과 2차 리프 전쟁 봉기는 진압
되었지만 2차 전쟁 당시 스페인군을 크게 고전시킨 리프 지역의 베르베르족은 점차 강성해집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스페인군은 마누엘 실베스트레 장군을 총대장으로 모로코계 스페인 협력군인
아스카리와 스페인 외인부대를 중심으로 2만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베르베르족을 완전히
소탕하려 하였으니 이때 지휘관중에 훗날 스페인 총통이 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도 있었습니다.
이에 리프 베르베르 부족은 3천명의 부족 병사들을 동원해 이들을 요격하기 위해
"아브드 엘크림" (Abd el-krim)을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니 그는 교사 출신으로
스페인어에 능통했고, 유럽인들과 오랜 접촉으로 서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누알 전투(Battle of Annual)에서 실베스트레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군 주력은 기세좋게
진격했지만, 아브드 엘크림이 이끄는 리프 군대의 매복에 걸려 포위돼 완벽히
섬멸당했으니 '아누알의 재앙' 으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실베스트레 장군은 패주
중에 실종됐고 나머지 지휘관인 펠리페 나바로와 가브리엘 모랄레스는 포로로 잡힙니다.
베르베르 부족이 불과 3천명으로 2만명 스페인군에 대승을 두자 모로코에는 반 스페인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수많은 주변 부족들과 모로코인들이 열정적으로 리프에 가담했으니
이윽고 리프군은 8만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성장했고 리프군은 멜리야와 인근 스페인령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 까지 진격했지만 성벽 도시를 함락시키는데는 실패하고 퇴각합니다.
물론 멜라야로 진격할 즈음, 이미 엄청난 성과로 리프(Rif) 부족들간 동맹이 느슨해진
것도 있었고, 보급선 문제도 있었기 때문인데 엘크림은 그 뒤로도 멜리야를 함락
시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고 하며 스페인으로서는 그 사이에 호세
상후르호(Jose Sanjurjo) 의 36,000명 원군이 도착하여 동부지역은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전과로 인해 리프 부족은 1920년 9월 18일 리프 공화국을 세우고 아브드 엘크림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니 리프 공화국은 서구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지던 소련으로부터 국가로 승인을 받아 물자
원조를 약속받는등 국가 체제를 신속하게 갖추어 갔으며 반면 스페인은 대폭적인 증원을 파견해 공세
로 전환했지만 셰프샤우엔 전투에서 또 다시 대패하고 모로코에서 전면 철수의 위기까지 몰리게 됩니다.
한편 스페인과 리프 공화국간의 전쟁을 관망하던 프랑스는 예상외로 스페인이 대패하고
고전하자 프랑스령 모로코와 프랑스령 알제리에도 이 같은 반식민지 운동이 번질
것을 우려해서는 1924년 프랑스군이 전선의 국경부대를 동원해 스페인을 돕기 시작합니다.
이에 화가 난 아브드 엘크림은 1925년 프랑스령 모로코를 공격해서는 프랑스측에 많은
사상자를 내게 하자 이에 격분한 프랑스측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필리프
페탱을 사령관으로 삼아 프랑스 외인부대를 비롯하여 대규모 병력을 총동원하여 참전
하였고 스페인에도 압도적인 군수품 지원을 퍼부어서 다시 공세를 재개하도록 지원합니다.
프랑스군은 6만~15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하였고 스페인도 15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였으며
더해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개발되어 전간기 시기 완료되었던 최첨단 탱크와 항공기까지
동원하였고 그래도 리프 공화국군이 격렬히 저항하자 "독가스 공격" 도 퍼붓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일본이 3.1 운동때 한국인들을 대량 학살하기 위해 거리에서 독가스를 살포했다고 가정하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데.... 모로코에서는 프랑스군에 의해 이러한 만행이 "실제로 저질러졌던 것" 입니다?
이후 1925년 9월, 스페인군은 프리모 데 리베라의 지휘 하에 리프 공화국의 수도 악스디르 근처
였던 알 호세이마(Al Hoceima)에 대규모 상륙 작전을 개시하여 리프 공화국군을 분쇄하고
교두보를 확보했으며.....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스페인 외인부대 병력은 리프
공화국군과의 격렬한 전투를 치렀고 이때 독가스인 겨자가스 공격으로 다시 리프군을 격퇴합니다.
스페인군은 알 호세이마(Al Hoceima) 상륙작전 당시 에스파냐급 드레드노트 전함 2척과, 르노 FT 전차,
수상기 모함에서 함재기까지 동원해 폭격을 가했는데, 이는 최초로 육해공이 단일지휘 하에 전개된
상륙작전이란 평가를 받으며 이때 프랑스군도 쿠르베급전함 파리와 해군 보병대대를 파견해 지원합니다.
수도 악스디르의 함락으로 더 이상 항전이 힘들다고 판단한 아브드 엘크림은 최후
의 희망을 걸고 테투안(Tetuan) 시에 대공세를 가했으나 결국 도시 함락
에 결국 실패하고 전력을 소진한 리프 공화국군은 재기불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결국 1926년 5월 아브드 엘크림은 원래의 적이던 스페인이 아닌 프랑스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무장해제에 응했으니 프랑스 정부는 점령한 모로코 지역에 대해서는 스페인의 지배권을
인정했지만 아브드 엘크림을 넘기라는 요구는 거절하고 그를 레위니옹 섬에 유배시켰으며
막대한 희생을 낸 리프 전쟁후에 모로코는 사실상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리프 전쟁에서 보여준 독가스의 위력에, 1925년 6월 국제연맹 이사회
의 주관으로 독가스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가 작성되어 1928년 발효되었지만.....
이후에도 몇몇 국가들은 화학무기를 계속 비축해 두었고, 특히 이탈리아는 "제2차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전쟁" 에서 독가스를 살포하여 전시 독가스 금지규정을 어긴 첫 국가가 되었습니다.
리프 공화국은 오늘날 모로코의 공화주의 운동인 신 리프 공화국 운동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아브드 엘크림의 게릴라 전술은 당대의 게릴라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스페인 내전
당시 게릴라들의 전술로 이어졌으니 다시 후대의 파르티잔(공산 게릴라군)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니..... 현대적 게릴라 전술을 완성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스페인과 매우 밀접한 지역이니 중세시대에는 레콘키스타의
대상이었고 이후로도 기독교 세력과 충돌했으며 중남미 지역이 독립하고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 필리핀 등 나머지 스페인령 식민지까지 상실하는 와중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보유했던
곳이 이곳 모로코 지역이었는데..... 1925년에는 프랑스 통감에 의해 수도가 라바트로 천도 됩니다.
스페인의 모로코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으며 근대 이후 스페인군의 양적, 질적 주력 부대는 '아프리카
군단' 으로 불렸던 모로코 주둔 병력이었으니 때문에 모로코는 스페인 내전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되는데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이 모로코 주둔 병력의 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니 그는 반란을
일으켜 부대를 이끌고 스페인으로 쳐들어 가서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를 쳐부수고 정권을 잡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횃불 작전의 일환으로 영국군과 미군이 모로코에 상륙하여 비시 프랑스군, 독일군
과 혈투를 치른 장소인데..... 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주도하던 술탄 무함마드 5세가 1953년 코르시카로 유배를 당하고 프랑스가 괴뢰 왕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1955년에 무함마드 5세는 복위하였고 1956년 3월 2일 술탄국으로 되는데 프랑스령은 1955년 11월
그리고 스페인령은 1956년 4월 독립을 쟁취했으며.... 1957년 왕호를 술탄에서 왕(Malik) 으로
바꾸어 왕국이 되었고 1961년 하산 2세가, 1999년 무함마드 6세가 즉위하였는데 바레인에서
기존의 하킴 칭호에서 1999년 아미르, 2002년 말리크로 칭호를 격상한 것과 역순이라 할수 있습니다.
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를 덮친 민중혁명 여파가 자국에도 미칠지 왕가가 불안해했으니 그동안
친미 및 비공식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해 왔기에 이슬람교도들에게 반발을 받아왔고
이집트 처럼 여러 면에서 경제가 불안정하기 때문으로 모로코는 튀니지나 이집트와 다르게
나름대로 민주화가 진척되었기는 하나, 2002년 진행된 선거도 눈속임 이라는 비난이 많습니다.
2011년 1월 30일 시위가 발생하였고 분신을 통한 항의가 있었으나 금세 가라앉았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2월 20일의 시위가 조직되었으니 수도인 라바트에서 4천여명의 시위대가 모여서 국왕
(무함마드 6세)의 권한 축소, 총리 퇴진, 경제 평등 확보 등을 외치면서 튀니지와 이집트 국기도
흔들었으며 최대도시 카사블랑카에서는 4천여명이, 마라케시 등 20개 장소에서 시위가 열렸습니다.
21일 시위가 끝난후 불탄 시체 5구가 발견되었으며 백여명 부상자가 나왔다는데, 왕정에서 이를 의식한 듯
6월 19일에 왕권을 상당 부분 축소하는 입헌군주국 개헌안을 발표했고 7월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찬성으로 개헌안이 통과되었지만 생각보다 권력 축소가 안 되면서 시위가 계속 되었으나 결국 잦아듭니다.
2013년 8월 모로코 국왕이 스페인 국적 아동성범죄자를 사면하여 출국시키면서 2년만에 시위가 격화되자
국왕은 철회했는데... 현재 모로코는 아랍권에서 민주주의 국가로 손 꼽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중동 및
아랍과 유대인 문화권에서는 이스라엘 , 튀니지 다음으로 민주주의 지수가 높은 나라로 국왕이 계속
인권개선이나 사회개혁 행보를 걷고있어서 사실상 모로코의 아랍의 봄은 거의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