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타스님과 ‘동사섭’ 관련 기사: 동사섭(출처: “지금여기(미내사)”, 2008년 7/8월호)
미내사 : 동사섭에 대해서는 오래전 부터 알고 있었으며 , 그 수련 결과들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좆아 뵌 것은 스님의 살아오신 길, 특히나 23세 때 얻은 큰 의식적 자각에 대한 것과,그것을 통해 동사섭을 이렇게 키워내시고,사랑들에게 일깨움을 주시는 것에 좋겠습니다. 먼저, 23제 때 스님이 얻으셨던 의식 변화의 체험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생생하게 살아있는 말씀을 듣고 싶군요. 진리는 언어가 경험을 통해 와 닿는다고 여겨지는데, 그 당시 스님에게 체험이나통해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걸 통해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결국 사람이 변해야 그 깨침에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용타스님 : 23세 때 운운하니까 마치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굉장히 새롭네요
미1 .그래도 그것이 스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고, 경험이어서 잊혀질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용 : 잊혀질 수가 없을 사건이기는 하지요. 그것은 내 인의 전환점이 되어준 하나의 커다란 의식적인 체험이에요. 그 체험을 떠올려 보면 참 드라마틱한 흐름이어서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대학 3학년 때가 되겠네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을 에 가지 않더라도 난 더 배울 것이 없다'라는 오만이 있었어요. 소설을 많이 읽다보니까 인생 문제가 달관되어 가는 듯 느껴지고 통찰들이 일어나 배울 것이 더 이상 없는 것 같은 정서적인 흐름이 있었지요.
농촌계몽 시 4H클럽을 만들어 운영하고, 성인교육에서는 연세가드셨지만 글을 모르시는 마을의 어른분들을 교육하는,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했어요. 그런데 4H 운영을 하면서 바로 한계를 본 거예요. 시골의 아이들을 40명 정도 회원으로 만들었는데, 이들을 통솔하는 것이 쉽지 않은 거예요. 거기에서, 이렇게 작은 일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로구나, 뭔가 나의 능력을 더 확보하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을 들어갔어요.그런데 거기서 나를 불교로 이끈 사건이 생깁니다.
내 전공인 전남대 철학과로 두 친구가 들어왔는데, 하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불교학생회 회원을 하면서 불교를 많이 공부했던 친구였고, 또 하나는 웅이라고, 후에 나의 스승 되신 청화 큰스님 밑에서 행자살이를 하다가 온 큰스님의 속가 제자였어요. 그런데 이 친구하고는 둘이 같이 자칠생활을 했지요. 불교학쟁회 친구는 고등학교 때 나를 동광사에 데려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동광사에서 윤주일 교수님이 설법을 하셨어요. 거기서 배처사라는 사람의 예화를 들었지요. 그것은 내게 놀라움이었습니다. 그때 윤주일 선생님 얘기를 지금 그대로 옮겨보면 이렇습니다.
옛날 동광사 옆에 조금 가면 형무소가 있었습니다 형무소 옆에 이엠학원이 있고,그 옆집에 배처사가 세 들어 삽니다. 배처사는 동광사를 가끔 나오는 처사님으로 역전에 나가서 지게 지는 짐꾼을 하던 분입니다. 그때는 리어카도 없는 시절이어서 지게로 짐을 날라야 했어요.
그분의 자녀들이 일곱인가 되는데 방 한 칸에서 모두 사는 거예요. 말하자면 극빈자지요.집 주인은 아주 부자여서 집이 몇 채나 있고, 논밭도 많은 사람인데, 주인이 보기에 놀라운 일은 찢어지게 가난한 배처사가 얼굴은 항상 평화로운 거예요.주인 입장에서 보면, '아이고,저 방한 칸에서 일곱,식구가 어떻게 살까' 하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더구나 처음 세 들어 왔을 때, 부인은 막내 낳고 산후조리가 잘 안되어 병을 앓고 있어 끙끙거리는 소리가 항상 나고 애들은 교육할 여건이 안되어 어디 식모로 나가거나, 모두들 무슨 일이라도 해서 생활을꾸려가야 되었지요.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내일 먹을 쌀을 걱정해야 될 정도로 아둥바둥 살면서도 그 배처사의 얼굴은 항상 평화로운 거예요 저 평화로운 얼굴이 어디서 나왔는가· . 그게 주인 할아버지의 관심거리였지요.그런데 잘 살펴보니 배처사 입에서 감사합니다 라는 소리가 늘 나오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하루는 토방에 앉아있는데 안에서 부인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니까 배처사가 '감사합니다' 이러더래요. 도저히 납득이 안되고 이상했지요. 이런 식으로 뭔가 속이 상할 만한 순간이면 감사합니다가 더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너무 신기해서 한번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요.어느 날, 키 큰 이 배처사가 방에서 나오다가 문지방에 머리를 울릴 정도로 세게 찧었어요. 그런데 또 '아이쿠.감사합니다' 이러더래요. 요즘은 지족철학, 감사철학이 많이 알려져서 신선할 것이 없는데, 당시만 해도 그 사건이 너무 신선하게 이 영감님에게 다가온 것이지요.
그 황노인이 "어이 배처사 나랑 얘기 좀 하세." 이러고 끝내 프로포즈를 했어요. 그러자 "아이고,감사합니다" 또 그러지요. 황노인이 며느리한테 말해 식사 대접도 잘 하면서 물었습니다. "자네한테 궁금한 것이 있네. 내가 보기에는 감사할 거리가 하나도 없고 그저 내팔자가 이 무슨 팔자냐 하고 원망할 상황인 것 같은데 무엇이 그토록 감사한 것인가? 부인이 앓고 있는 것이 왜 그리 감사하며 , 문지방에 머리를 탕 징은 것이 어찌 감사할 일인가? 실은 그것이 궁금해서 들어보려고자네를 불렀네."
이렇게 말하니, 배처사가 "아! 그거 신기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감사할 것이니까 감사한 것이지요.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파도 죽어버린다면 저 아이들 어쩌겠어요. 어미 없는 아이들로 만들 것 아닙니까, 감사하지요. 머리 찍은은 것도 너무 감사하지요. 머리 구조가 잘 되어있어, 잘못하면 깨져서 죽어버릴 수도 있는데,여기 혹이 나는 정도에서 끝나 주었으니 너무 감사한 일이지요. 그리고 제가 건강해서 지게 지고 나가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이렇게 감사론이 나오는데, 황노인이 그때 눈이 뜨인 거예요.
자기는 감사를 모르고 살아왔고, 지금 충분히 부자인데도 이것이 불만, 저것도 불만, 모두가 불만투성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때 배처사 이야기를 듣고 대조적인 상황을 접한 황노인 속에서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아,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구나 이 친구에 비하면 나는 감사를 억만 배를 하고 살아야할 사람인데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았느냐' 하면서 배처사로 인해 감사철학에 눈이 크게 뜨인 것이었습니다. 배처사와 황노인의 미담이 이어지는데, 황노인이 한참 있다가 감동이 목에까지 차 오르니까, 배처사 앞에 무릎을 탁 꿇으면서 '정말로 내가 자네한테 감사하네.자네는 내 아들 같은 나이지만 내가 스승으로 여기겠네.' 라며 절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식사를 다 하더니 , 며느리보고 먹물을 갈라고 하고선 붓으로 증서를 써주는데,어디에 있는 집 한 채를 주고, 어디에 있는 논을 주고‥‥ 마지막에 '오늘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준 내 보은의 뜻' 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배처사 "아니어요, 이거 천부당 만부당합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저의 복이 이 정도여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내 복이 아닌 것을 받으면 안 됩니다. 절대로 받지 않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황 노인이 "자네는 이것을 충분히 받아도 될 만한 사람이네 "라며 억지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의사한테 가서 약 한 재 들여 먹이니 부인은 나았고, 아이들 학교를 전부 데리고 다니면서 보내고, 취업도 시켜주었으며 현금도 얼마씩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주일 선생님이 하신 배처사 이야기예요. 그 얘기를 듣고나도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좋아서, '시어머니,감사합니다'와 '배처사 이야기'를 항상 감사의 얘기로 동사섭에서 사용하고 있지요.
배처사 이야기는 그 정도로 끝내고, 어쨌든 나를 동광사에 안내했던 그 고등학교 때 친구가 어느 날 잔디밭에 누워가지고 반야심경을 읊어대는데, 그 소리가 너무 환상적으로 들리고 아름다운 거에요
미1 : 무슨 내용인지 아셨습니까?
용 : 전혀 몰랐지요.그냥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조견오온‥‥하는 염불 곡에 반한 거에요. 내가 기독교에 들어갔던 것도 성가(랠쓸)에 반해가지고 들어갔는데 이렇게 불교와 접선이 된 그 순간도 노래 때문이었어요. 노래하고 인연이 깊었지요. 그때 나는 북동에 있는 침례교회를 다니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그 노래 , 아니 염불을 배우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지요. 그러니까 그러면 배워봐라 하더니, 한글로 써 줘요. 한글로 읽다 보니까 노래도 좋지만 뜻을 알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한자로 익힐란다 하니까, 한자로 써주더군요. 그래서 이제 또박또박 뜻을 익혀가는 과정에 걸려든 거예요. 그것이 나를 바꿔놓는 계기가 됐지요.
반야심경이라고 하면 색즉시공이 아주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반야심경의 키워드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하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입니다. 그것을 풀어서 설명하려면 색즉시공부터 얘기를 해야되지요. 그땐 뜻도 몰랐기 때문에 키워드가 조견오온이란 것도 모른 상태였고 오직 색즉시공에 탁 걸려든 거예요.그 말은 색(촌) 요것이 공(포)이라는 거예요. 얼마나 황당합니까. 아,이 색이 공이라는 거예요. 공은 텅 빌 공자 아닙니까 저것이 텅 비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왜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 텅 비었다고 하지? 라며 의문이 일어났지요. 그런데 이 의문이 내안에 들어와서는 떠나지를 않는 거예요. 그것이 나를 불교 쪽으로 전환시켜가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색인데, 왜 공하냐. 이것이 색인데, 왜 공하냐?이러고 산지 사방을 돌아다녔어요. 눈에 보이는 것, 』에 들려오는 것이 다 색(춘)인데 그것이 왜 공(초)이냐? 왜 공이냐, 저것이 왜 공이냐 라며, 놀랍게도 나의 모든 에너지가 그것 하나로 몰입되어졌던 것입니다. 사실은 내일모레 곧 시험이 있을 때였는데, 거기에 몰입되는 에너지 때문에 시험공부에 관심이 안 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칸트철학을 강의하신 서동익 박사 댁을 방문해 '반야심경을 아십니까?' 그랬더니 '아, 알지' , '거기 색즉시공이라는 말이 나오는데,색즉시공이 무슨 뜻이죠?', '아,이 사람아! 시험공부나 하지 그런걸 물어?' 이러더라고요 그 정도로 그것이 내게는 뿌리칠 수 없게 큰 부분을 차지했어요.
미1 . 왜 그랬던 것입니까? 보통은 그냥 지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용 : 내 기질인 것 같아요.원래 기질이 호기심이 많고,뭣 하나에 빠지면 쭉 들어가요. 그렇게 몰입을 하는 그 과정이 한 2개월 됐을 것 같아요.
미1 : 밥 먹을 때나 잠잘 때나 의문이 떠나지 않는 거네요. 하나의 화두군요.
용 . 화두지, 일종의 화두예요. 자동화두. 나는 불교가 무엇인지, 화두가무 엇인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가만히 보면 결국은 화두적 메커니즘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낮잠을 자고 있다가 꿈속에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예요. 꿈속에서 "프리즘을 없애라'라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어요. 프리즘을 없애라, 프리즘을 없애라 그때 나에게 프리즘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었다면,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되었을 수도 있어요. 이 말이 나에게는 신비한 의미로 다가왔고 커다란 통찰의 계기가 되었지요. 그 동안 이 표현은 아까워서 (웃음) 잘 표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군가 물어오면 꿈속에서 무슨 소리를 듣고 통찰이 왔다 라고만 했지 , 프리즘을 없애라는 소리를 들었다고는 안했지요. 어쨌든 프리즘을 없애라,하는 순간에 무언가 큰 의식의 전환이 있었어요. 프리즘은 무엇입니까. 빛이 오게 되면 프리즘을 통과해서 여러가지로 갈라지잖아요. 우리의 인체도 하나의 프리즘인 거예요. 어떤 실상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 즉 눈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는 수없이 여러 가지 것이 보이고, 귀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해서는 수 없는 소리가다양하게 들려오지 않습니까?그러면서 생각하기를, '그렇지, 보남파초노주빨이 더 본체인가, 프리즘을 통과하기 이전의 빛이 더 본체인가'등등의 수많은 생각들이 굉장히 짧은 시간에 지나가면서, 공(쏘)이라고 하는 것이 확 감으로 와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나로서는 영성적인 첫 체험이자, 대단히 큰 체험이었어요. 그러면 왜 그것이 그렇게 대단히 큰 체험이었을까? 딱 보니까 이제 모두가 공인 거예요. 이것도 공이고, 저것도 공이고, 이것들이 다 공이어서 색즉시공이 여지없이 진실인거라. 그래놓고는 '아, 공이로구나. 모두가공인 것을 프리즘을 통해서 이렇게 쪼개가지고 우리가 분별시비를 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이 몸으로 아주 확 와버렸거든요. 한 여름에 광주 시내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러고 돌아다녔어요. 그때 여름이었는데 겨울 잠바를 입고 땀이 속에서 흐르는지도 모르고 막 돌아다녔지요.
색즉시공, 보면 이제 다 공인 거예요. 눈에만 보이나, 공이라는 것을 알 것 같단 말이예요. 그래서 동광사를 갔지요. 해산스님이라고 하는 젊은 스님이 있더군요. '해산스님, 색즉시공을 알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색즉시공을 알면 견성입니다. ' 그러더라고. 그때 웅이라고 하는 내 친구가 도를 통하면 견성을 하게 되는 법인데, 그때 신통이 자재되고 대단하게 된다는 말이 기억났어요.그런데 나는 신통력이라 할 것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다만 신통은 못하겠는데, 색즉시공은 확실히 알겠는 거예요. 아니 , 견성을 하면 굉장하다고 하던데‥‥ 이러면서 내가 배우던 한 선생님을 또 찾아갔어요. 우리 철학과에 나오셔서 불교학 강의를 하신 분인데, 그분께 '교수님, 이 색이 왜 공합니까?' 그랬더니, '색이 조금 있으면 파괴될 것 아니냐? 파괴 된다면 사라질 것 아니냐? 그래서 공이다' 그러더라고.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이분이 공 문턱에도 가지를 못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색즉시공이잖아요. 색이 곧 공이어야지, 변해서 공이 되는 것이라면 변하기 전에는 공이 아니란 말이냐라는 생각에, '이 분 설법에 철학과로 왔는데, 정작 알아야 할 곳에서는 캄캄하신 분이네 .' 라고로 굉장히 실망해 나온 일도 있지요.
약간은 과장된 표현인 것 같은 감이 듭니다만, 내가 나중에 그 상태를 묘사하기를, 우주가 딱 쪼개진 것 같은 사건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이 그럴싸한 것이,그 이전 색즉시공을 알지 못한 상태의 내 의식과 비교해보니까, 과거에는 보이지 않는 비닐 보자기 같은 것이 나를 감싸고 있어도 그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이제는 그 보자기가 사라져버린 것 같은, 탁 트인 감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 무렵 우리 청화스님이 나타났습니다. 내가 미쳐가지고 아직도 정돈이 안 된 상태에서 멍하니 묘한 상태로 있을 때인데,
미1 .어떤 상태였습니까.그냥 멍하니 있었다는 게.
용 : 붕, 떴다 이말 입니다. 색즉시공에 대해 막혀있던 것이 뚫리면서 열린 상태가 되어 우주가 딱 쪼개진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여하튼 뭔가 에너지가 떠있었어요.
미1 : 그때 일상은 어떻게 느껴졌습니까.
용 . 일상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 그 치열도가 뚝 떨어져 버렸어요 정서적으로 기운이 이렇게 떠있는 상태로 사는 상태였지요.
미1 : 기간은 얼마나 지속이 되었나요?
용 ' 한달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큰 스님이 안 오셨더라면 그게 얼마나 더 갔을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러는 중에 큰 스님이 와서 그 에너지를 쏙 빼버렸던 것입니다. 큰 스님이 오신 것은 나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행자생활을 했던 웅이라는 제자를 보러 오신 거였어요. 이웅이는 소설가예요. 그때도 매일 소설만 쓰고 있었지요. 원고지 가득 써가지고 이것 좀 들어보라고 하면, 나는 그 지루한 얘기를 한참 듣고 있어야 되고 그랬는데 끝내는 현대문학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소설가로뻗어 나갔던 친구지요.그런데 큰 스님이 이 친구를 보러 오셨어요. '문안입니다' 밖에서 그러니까 웅이가 있다가, '청화스님 오셨네' 그러더라고. 그때까지 귀에 딱지가 들 정도로 이 친구에게 청화스님 얘기를 들어놔서 , 청화스님하면 사람이 묘하게 생긴 줄 알았어요. 나에게는 신비한 존재인 것으로 되어져 있었지요. 수염이 나도 다섯 자 정도나될 것 같고· 그런데 보자마자 실망을 해버렸어요. 한 중일 뿐이었던 게지요. 그날 저녁 셋이서 얘기를 좀 하다가, 웅이는 잠이 들고 나는 웅이한테 배운 결가부좌를 튼채 큰 스님 앞에서 꼿꼿하게 앉아 얘기를 하는 중에, 결국은 비장의 색즉시공을 내왔어요. 내 체험의 색즉시공 역사를 확 얘기했지요. "내가 현재 이런 상태에 있습니다. "라고. 그랬더니 큰 스님이 씩 웃으면서 , '그것은 증오가 아니고, 해오입니다' 이러셔요.
그래서 해오가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어감이 이상하잖아요. 그것은 아니고 요런 거야, 이렇게 들려오는데, 그때까지 붕 떠 있던 에너지가 쏙 꺼져버리는 것이에요. 정말 그 자체가 신비하더군요. 말 한마디에 이 위까지 이상하게 가득차 있던 기운이 쏙 빠져버리다니· 색즉시공을 알면 견성이라고 들어놓으니까 아닌 것은 같았지만 묘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상태였는데, 하늘 같은 어떤 대사님이 나타나서 '너 아니야' 하는 이 소리를 들은 데서 오는, 심리적으로 좌절되는 구조겠지요.그렇게 쑥 빠져버린 기운을 이 분이 느끼신 것 같더라고. 그래서 다시 살짝 끌어올리시는데, '그러나 우리 한국에서 색즉공을 그 정도라도 요해하신 분이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 또 이러시는 거예요. 기분을 요 정도 올려놓아 주시더군요(웃음) .
큰 스님께서 올라오셨던 것이 제자를 보러도 오셨지만 올라온 김에 광주 근교에서 도서관 출입을 하며 독서를 좀 하고 싶어 하셨어요. 그래서 유동 어디엔가 방을 얻어 혼자 자취 하시면서 광주 시내로 산책도 하시게 됐어요. 그 와중에 스님과 여러 날 만나는 상황이 됐지요. 그러다가 광주 근교에 절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큰 스님 모시고 돌아다니며 알아보던 중 좋은 곳을 발견했어요.그 자리는 조응원이라고 하는 그 당시 광주 극장 부사장의 별장이었어요. 그 별장이 아주 작품입니다. 현재도 그 건물이 그대로 무등산 약사사로 옮겨졌는데, 스님이 보시고 그것이 너무 좋으니까 아, 여기를 절로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불교학 교수인 전남대학교 정종구 교수님을 앞세워 조응원씨를 만났지요. 그때 큰 스님 연세가 41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새파란 젊은이지 . 그런데 큰 스님이 조응원씨에게 얘기를 하는데, 조응원씨가 반해버리더군요. 청화 큰 스님이 누구든지 얘기를 조금 주거니 받거니 해보면 안 반한 사람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절이 추강사예요. 그렇게 큰 스님과 교류가 깊어졌는데 우리 학교 철학과 교수님들과한 분 한 분 키재기를 해봤더니 , 어느 누구도 이 분 키를 당할 자가 없더라고요.그러면서 큰 스님 인품이 점점 크게 여겨지게 된 거예요.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가던 걸 그만두게 되었고 추강사에서 학교를다니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대학 3학년 때 중이 되어버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