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 이에야스까지
모든 것이 정치력에 좌우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남자들의 이야기
[들어가면서]
하잘것 없는 평범한 남자에게 '정치'는 디게 낯설다. 정치는 구케의원이나 혹은 대방령을 꿈꾸거나, 아니면 작업반장을 좀 해볼려하거나 하는 마음이 일었을 때 비로소 주변의 인물들의 생태를 되재생해 보게 되는 하나의 기술적 파트라면 맞는 말일까. 나이 육십하고도 사세가 되어서 '정치'에 관심이 붙는 것은 어인 심사일까? 솔직히 아무리 하잘 것 없는 평범한 남자에게도 와이프는 있다는 것이 문제는 문제다. 아내와 자식과 등등의 관계가 바로 정치에 속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혼자서 산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도회지에서 직장생활 하는 사람은 '정치'의 노정에 발 딛고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끔 그래서 어떨 때는 전혀 내가 정치를 안하고 사는구나! 하면서 불안해질 때가 있다. 그러면 전화를 들고 안부전화부터 시작한다. 낯설어지면, 모르긴 해도 관계가 멀어지면 생기는 건 오해와 그로 인한 불편한 마음이다. 관계가 편해지면 그때부터는 또 잊어버려도 좋다고 무의식이 주장한다. 이러한 패턴의 반복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네 정치력은 십점 만점에 몇점이냐고. 내 경우 5.5점 쯤 주면 너무나 관대한 점수일까? 내가 좋은 것만 하고 사니 정치학점이 좋을리가 없다.
'정치'를 잘 하면 주위가 편안해진다. 정치를 못하면 사는 게 팍팍해진다. 갱제나 관계가 써먹써먹해진다는 말이다. 내 미약하고 게으르기만 한 정치력을 한탄하면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노부나가에서 히데요시, 이에야스까지
모든 것이 정치력에 좌우되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남자들의 이야기
1부
오다노부나가, 그를 향한 반란은 왜 실패했는가
1. 폭풍전야!
2. 오다노부나가라는, 남자의 등장
3. 탈당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실패
4.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천하를 얻지 못한 이유
2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노부나가 사후 대역전을 노리다
1. 정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2 <혼노지의 변> 전후 히데요시의 정치적 움직임
3. 노부나가 사후, 대역전을 노리다
4.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유일한 전투,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5, 말을 듣지 않는 꼭두각시 후계자를 향한 히데요시의 정치적 복수
3부
1.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어떤 남자인가
2.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
3. 도요토미 정권의 내분, 드디어 표출되다
4. 이에야스는 어떻게 도요토미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었나
4부 세키가하라 전투, 정치력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다
1. 정치가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부족한 것
2. 소외당한 히데요시 가신들의 정치적 선택
3. 모리 데루모토의 우유부단한 정치력
4. 아름대운 패배자 VS. 추악한 승리자
5부
노부나가 포위 작전의 실패,
공동의 목표가 없는 공동작전의 결말
1. 오다 노부나가가 가장 두려워한 남자, 다케다신겐의 정치적 실수
2. 노부나가 포위 작전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
3. 유력한 다이묘인데도 왜 천하를 얻지 못했을까
6부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란,
공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1.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두려워한 남자,
사나다 마사유키의 정치력
2. 영내 통치를 통해 드러나는 군주의 정치력
3. 스러진 공관에 핀 향기로운 꽃과 같은
일본의 전국시대란, 15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초까지의 사회적, 정치적 격동 및 계속된 내란의 시기로, 중앙의 정치가 불안하여 지방의 군웅이 할거하여 서로 다투던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에는 수많은 무장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가 한순간 사라지는가 하면, 그 중에 두각을 나타낸 무장들은 천하를 장악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정권에게 또 다시 권력을 빼앗기는 등 그 누구도 자신의 운명을 확신할 수 없는 정치적 불안정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시기에 수많은 무장들의 운명을 가른 건 바로 그들의 <정치력>이었다.
<정치>라는 단어는 본래 <힘(권력)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실현한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타인의 마음과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덧붙여 정치력이란, 사전적인 의미로는 정치적인 역량이나 수완을 말한다. 즉 <정치력>이란 정리하자면, 공공의 이익을 위한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행사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따라서 <정치력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에 민감해야 한다. <정치력>은 많은 사람의 힘을 결집하여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걸맞은 정치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적재적소에 제대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해 패배의 수순을 밟는 경우도 많다. 또한 조직 내에 정치력을 갖춘 리더가 없다면 그 조직은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리더의 정치력은 그 조직 구성원들의 운명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전국시대 3대 무장이라 할 수 있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그들의 혼란의 시대에 펼친 각기 다른 그들만의 정치력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정치력이란 권위의 인정을 받아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은 노부나가, 급성장한 급조정권의 수장으로서 굴욕적이더라도 정치적 완승부터 챙기며 대역전을 노린 히데요시, 도요토미 정권의 내분을 십분 활용하여 그 정권에서소외된 가신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이에야스. 그들은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급박한 정치적 상황에서 자신들만의 정치력으로 난국을 타개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들 세 명 외에도 노부나가를 향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동조 세력을 얻지 못해 실패한 아케치 미쓰히데, 약소 세력임에도 이에야스와 기꺼이 대적해 이에야스가 가장 두려워혔던 사나다 마사유키, 능력은 뛰어나나 포용력이 부족해 내부 세력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시다 미쓰나리, 우유부단한 정치력의 전형을 보여준 모리 데루모토, 학식은 뛰어나나 아들도 등을 돌릴 만큼 불의를 되풀이한 사이토 도산, 노부나가가 가장 두려워한 남자 다케다 신겐의 정치적 실수, 야망 대신 양심을 먼저 실천한 호조 소운 등 당시 정치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활동했던 수많은 무장들의 삶과 그들이 펼친 정치력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정치력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능력, 조직의 힘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 약소 세력이라면 거대 세력을 동요시킬 줄 아는 능력, 민심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 대의명분과 뚜렷한 비전을 제시할 줄 아는 능력, 자존심에 어울리는 실력 등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재적소에서 제대로 발휘되어야 한다.
혼자서는 권력을 얻지 못한다.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정치적인 세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하면 정치는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에서는 침묵하는 100명보다 단결해서 행동하는 5명이 더욱 강력한 힘을 갖는다. 따라서 사람을 움직이게 하려면, 정치를 움직이게 하려면 상황에 걸맞은 정치력을 갖춰야 한다. 이때 정치력은 반드시 <명분>과 <실리>를 갖추어야 실효를 거둔다.
꼭두각시 쇼군의 운명
조금 복잡한 상황이므로 전국시대 직전의 정치상황을 먼저 간략히 살펴보자. 우선 당시의 상황을 식당에 비유해보자. 요리를 만들고 있던 사람, 즉 정치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로부터 이어지는 아시카가 막부이지만 애초에 아시카가 식당, 즉 아시카가 막부(무로마치 막부)에는 유력한 요리사가 여럿 있어 만드는 요리마다 일일이 트집을 잡았다. 이에 화를 주체하지 못한 6대 쇼군(막부의 수장)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유력한 요리사들을 닥치는 대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음에 죽음을 당할 사람은 바로 나란 말인가?" 라며 두려움에 떨고 있던 슈고 다이묘(봉건 영주) 아카마쓰 미쓰스케는 죽음을 당하기 전에 죽이겠다는 듯이 식당 사장인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살해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오닌의 난의 도화선이 되는 <가키쓰의 난>이다.
즉 정치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싶었던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그에 반발하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인 아카마쓰 미쓰스케에게 살해를 당하고 만 것이다. 물론 아카마쓰 미쓰스케도 머지 않아 살해되고 만다.
애초에 추첨으로 쇼군을 정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은 하타케야마 미쓰이에를 비롯한 유력한 간레이(쇼군을 보좌하며 정무를 총괄하던 벼슬)들이었으므로 그 후의 요시노리 정권이 그들에 의해 움직여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요시노리는 <꼭두각시 정권>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요시노리는 매우 의지가 강한인물이었기때문에 자신이 꼭두각시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저리 간섭하려는 사람들이 그에게는 분명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정권을 만들어준 은인의 영향력만큼은 그 정권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측근정치,
무기력한 리더와 사리사욕에 바쁜 측근들
가키쓰의 난으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고 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도, 그에 반항한 아카마쓰 미쓰스케도 결국은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최악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정권이 탄생했다. 무기력하고 지도력이 없는 리더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를 가리킨다. 또 의욕적인 측근들이란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라는 유력 다이묘들을 가리킨다. 여기에 도시마사의 생모와 유모, 부인, 처남, 막부의 재정 담당자 들이 뒤엉켜 드디어 <측근정치>가 전개되었다.
상상해보기 바란다. 자신의 남편이나 여동생의 남편이 천하를 손에 넣었다고 하자.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먹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심지어 8대 쇼군 요시마사는 자신의 아버지인 6대 쇼군 요시노리와 크게 달라서 군사나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측근정치가 꽃피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를 둘러싼 친족과 측근들이 제멋대로 운영하는 정권이 시작되었다.
어느 시대라도 권력자는 대부분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측근뿐이다." 라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고 있다. 그런 측근이 권력자를 도와서 정권을 지탱하고 정상적인 권력이 행사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첫째,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가 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사욕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셋째, 자신이 달성한 성과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참으로 얄궂다. 강렬한 개성을 가진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뒤를 이어 쇼군에 오른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연약한 아시카가 요시마사였던 것이다. 요시마사는 은각사를 건립하고 꽃꽃이와 다도의 원류를 만든 뛰어난 문화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마도 당대 최고로 손꼽히는 문화적 소양을 가진 인물인 동시에 당시의 정권 내에서 가장 정치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정권을 담당했다.
통치할 의사가 없는 사람만큼 정권을 담당하는 자리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도 없다. 결국 요시마사의 등장은 전국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출발점이었다.
[얼굴에 욕망이 없는 사내라고 쓰여 있다]
중앙정치가 혼란한 틈을 타
지방 정치가 강해지다
이제 전국시대의 막을 연 사건으로 유명한 <오닌의 난>이 일어난다. 오닌의 난이 무려 11년에 걸쳐 일어난 이유는 대립하는 두 세력의 힘이 대등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중심을 잡아주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시카가 쇼군의 가문은 난이 일어나고 있는 내내 엄연히 존재했고, 심지어 쇽ㄴ 요시마사도 건재했는데도 웬지 드러나지 않았다.
유력 다이묘 가문의 후계자 문제에 쇼군 가문의 후계자 문제가 겹쳐서 일어난 사건이 오닌의 난이지만, 당사자 중에 가장 지위가 높은 만큼 본래 가장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 현직 쇼군 요시마사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다툼을 피해 도망쳤다. 이리하여 11년에 걸친 난으로 인해 정치는 혼란해지고, 전장이 되었던 기나이 지역만이 아니라 정치가 데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지방의 장원(지방 영주의 토지)도 황폐해지고 말았다.
이때, 전국시대가 탄생한 것이다.
<아시카가 막부>라는 정권의 브랜드는 완전히 힘을 잃었지만, 반대로 지방의 구석구석은 부흥하게 되었다. 즉 슈고 다이묘의 대리를 맡은 슈고다이를 비롯하여 아시카가 막부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영주와 호족이 힘을 얻고 지방에서 독자적인 정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더 이상 중앙에만 의존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점은 현대의 정치와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오다 노부나가라는,
남자의 등장
슈고 다이묘의 대리,
그 대리의 가신,
그 가신의 아들이었던 노부나가
일본에는 전국시대물이라고 불리는 소설이 실로 많다. 하지만 전국시대의 막을 연 오닌의 난을 소재로 한 소설은 의외로 적다. 아마도 소설의 소재가 될 만한 빛나는 영웅이 눈에 뜨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오다 노부히데는 오와리의 슈고 다이묘인 시바 가문의 가신의 가신이다. 오와리의 하부 4군(오와리 지방의 네 개의 군으로, 현재의 나고야시에서 지타 반도 부근이다)의 슈고다이인 오다 야마토노카미의 3명의 부교(행정이나 재판, 사무를 담당하는 무사의 직명)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벼락출세한 아버지 노부히데,
어리석은 아들 노부나가
오다 노부히데는 주군인 슈고다이 오다 야마토노카미를 쓰러뜨려 오와리의 하부4군을 자신의 지배 하에 두고 강대한 이웃나라 스루가의 이마가와와도 싸워서 승리했다.
그렇다면 노부히데가 주군을 쓰러뜨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원천은 어디에 있을까. 노부히데의 근거지인 쓰시마가 열쇠다. 쓰시마는 당시 이세만 무역의 요충지로 번성했다. 여기에서 상남되는 공물은 막대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노부히데의 군자금이 되었다.
노부히데는 이세신궁(일본의 3대 신궁 중 하나)이나 조정에 큰돈을 기부하고 있었다. "오다 노부히데의 경제력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주위에 이러한 생각을 심으려는 목표가 있었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여기에 더해 이세신궁이나 조정이라는 브랜드에 주목하고 싶다.
오다 노부히데가 슈고 다이묘인 시바 가문의 <가신의 가신>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언급했다. 소위 벼락출세한 인물이다. 벼락출세한 인물이 다른 사람을 탄복시키기 위해서는 경제력이나 군사력 이외에 <권위>가 필요하다. 이후의 노부나가와 같이 스스로 어마어마한 세력을 가진다면 관직의 등급은 의미가 없지만, 오와리 반국의 주인에 지나지 않았던 오다 노부히데는 거기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이세신궁이나 조정의 권위가 반드시 필요했다.
쓰시마라는 상업교역 거점에서 자란 노부나가는 사고방식이 유연했으므로 기존 권위도 필요할 때는 이용한다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자신이 지닌 본능이 그대로 외면에 드러난다. 노부나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리석은 사람으로 주위에 비쳐졌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아버지 노부히데의 사후에 오와리 반국을 물려받게 되지만, 어리석기로 유명한 아들이 대를 잇게 되자 너무도 간단히 와해되고 만다. 일족이나 부하 중에 노부나가를 떠나는 사람이 속속 나온 것이다.
노부나가는 정치가로서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노부나가는 기이한 차림과 기행이 두드러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노부나가 公記』는 물론 노부나가를 예찬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사료로써의 가치는 매우 높다. 그 자료에 의하면 노부나가가 <얼간이>라고 불린 이유는 길 한복판에서 말 위에 올라탄 채 밤이나참외를 볼이 미어지도록 입에 넣는 경박한 행동과 눈에 띄는 화려한 차림 때문이었다. 이유도 없이 사람을 죽인다든가 불의를 저질렀기 때문은 아니다.
특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노부나가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선대의 중신이거나 유력자인 일가친척이며, 노부나가를 따르고 있던 사람들은 노부나가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직접 법하는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인물은 리더로서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을 세습받은 2대째의 권력자가세력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선대에 신임을 받은 간부를 버리고 자신이 새로 고른 사람을 불러들이는 인사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일가친척이나 중신이 먼저 노부나가를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성격이 매우 별나기는 하지만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따르게 만드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인 노부히데의 사거 이후에 그 세력이 와해되어도 혼자가 되지 않고 도리어 자신에게 반기를 든 무리를 한 사람씩 섬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의 조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소한 <매력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투,
노부나가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사건
1560년 오다 노부나가가 단 2천의 병사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수만 대군을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2만 5천의 대군을 이끌고 연승을 거두며 오케하자마에 도착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전군에게 휴식을 명했다. 한편 오다 노부나가는 병력은 2천에 불과하지만 전군에게 결사의 각오를 구하고 휴식 중인 요시모토 군에 기습작전을 펴서 백병전을 벌인 결과 요시모토의 목을 벰으로써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는 일본 3대 야전 중의 하나로 꼽히며, 이를 계기로 노부나가는 그의 세력과 武名을 떨치게 되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말.
여하튼 도쿄로 가는 중간 경유지 역할을 하는 오와리를 소유한 노부나가는 항복하거나 혹은 섬멸되어야 했던 것이다.
노부나가의 천하통일 계획은
논리적으로 나온 결론이다
오다 노부히데가 세상을 떠나고 9년이 지난 후에 일어난 오케하자마 전투는 오다 노부나가라는 남자가 자신의 세력을 견고하게 다지는 최상의 기반이 되었다.
만약 노부나가가 항간에 일컬어지는대로 얼간이라면 더욱 많은 배반이 있어야 했다. 아무래도 얼간이보다는 우세한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거의 2~3천 명에 이르는 오다 군대는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오케하자마에 돌입하여 이마가와 세력과 싸웠다. 마루네나 와시즈라는 요새를 지키던 오다 세력이 이마가와의 대군에 둘러싸여도 저항의 의지를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는 점은 놀라운 결속력이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나기 전년도인 1559년에 교토로 올라가 아시카가 막부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한 것이다. 오와리를 통일했다는 보고를 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쇼군과 만난 목적은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역대 아시카가 쇼군 중에서도 뛰어난 인물이다. 그는 모리와 오토모, 호조, 우에스기, 다케다 가문의 평화로운 강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아시카가 막부의 구심력을 일시적으로 향상시킨 인물이다. 만약 그가 암살당하지 않고 오래 살았더라면 전국시대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부친의 사후에 열심히 발판을 다지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아시카가 가문마저 이용했던 상당히 훌륭한 다이묘였다.
규슈의 시마쓰나 도호쿠東北의 다이묘가 수도 입성에 대한 야심을 품지 않았던 이유가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설이 종종 제기되지만 그러한 경우에는 가까운 국경만 견고하게 지키면 된다. 반면 중앙으로 가는 통로에 자리잡은 다이묘는 그럴 수가 없다. 따라서 노부나가가 자신의 영토를 지키는 방법을 궁리한 끝에 천하를 호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던 것이다.
탈당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의 실패
정치력은,
권위의 인정을 통해 성장한다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으로 쓰러지기 직전에 <천하포무(천하를 무력으로 통일한다) > 라는 뜻을 실현하듯이 그야말로 일본의 지도자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오다 노부나가는 실질적인 적인 모리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했다. 동원된 병력 중 하나인 아케치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들여 주고쿠로 진군하던 중 갑자기 혼노지에 난입하여 여기서 숙소를 잡고 있던 자신의 주군 노부나가 일행을 공격했다. 노부나가는 소수의 수행원으로 1만여 명의 아케치 미쓰히데 병력과 분전하다가 자결했다. 이것을 <혼노지의 변>이라 한다.
긴키, 도카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간토(고즈케)에서 후쿠리쿠, 주부에 이르는 지역과 서쪽으로는 주고쿠 지방의 절반가량을 지배했다. 즉 혼슈의 중앙 대부분 노부나가의 세력 아래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수입은 동맹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하여 대략 8백만 석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노부나가의 관위나 관직은 어땠을까.
정2위라는 관위는 있었지만 우대신, 우근위대장이라는 관직은 1578년(덴쇼 6년)에 사임하여 前 우대신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현실의 노부나가는 조정의 최고 지위인 관백보다도 훨씬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부나가보다 큰 힘을 가진 사람은 당시의 일본엔 존재하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조정으로부터 1582년(덴쇼 10년) 5월에 태정대신(영의정에 해당하는 관직), 관백, 정이대장군의 세 가지 관직 중에 마음에 드는 하나를 고르라는 요청을 받았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기 직전의 일이다.
전년도에 좌대신이 되리라는 요청을 거절했으므로 이러한 요청도 거절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만 미처 회답을 하지 못한 채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죽음을 당했으므로 이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중요한 것은 조정에서 몇 차례나 노부나가에게 일본의 정치적 지배자가 되라고 강권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천하의 지배자>라고 주장한들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권력은 발효되지 않는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달랐다. 압도적인 군사력과 팽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조정으로부터 정권을 맡기겠다는 공식적인 의사를 전달받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오와리의 일국을 통일했다는 사실을 13대 쇼군 요시카가 요시테루에게 보고하고 그 영토를 경영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르려고 했던 노부나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정치력을 얻은 것이다. 정치력은 권위의 인정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다(노부나가의 경우, 그러면 뭐하나? 측근에게 살해되고 말았는데??).
왜 미쓰히데는
노부나가를 암살하려 했는가
우선은 <원한설>을 살펴보자. 많은 사람 앞에서 노부나가에게 발로 차였다거나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서 평화를 맺으려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거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접대할 때 사소한 실수로 노부나가에게 힐책을 당했다거나 하는 이유로 미쓰히데가 원한을 가졌다는 것이다.
정치란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비합리적이다. 이치에 맞지 않는 역우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본래 논리가 아니라 감정으로 움직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좋아한다든가 싫어한다는 감정은 의외로 매사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만약 이처럼 질책을 당하거나 창피를 당한 적이 있다면 미쓰히데가 노부나가에게 원한을 품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을 수 있다.
다만 원한설과는 별도로 노부나가가 돌발적인 행동을 하거나 부주의한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아네가와 전투가 끝난 후에 아사이 히사맛, 나가마사 부자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해골에 금박을 붙인 채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노부나게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기록한 자료에서조차 노부나가가 적을 가차 없이 살육하는 모습에 대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라고 표현했다.
노부나가는
부하에게는 매우 친절했다
<거역은 곧 죽음>이라는 공포만으로는 부하를 복종시킬 수 없다. 공포는 오래가지 않는다. 독재자라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라나 조직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수족이 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인심을 얻지 못한 정치가는 너무도 간단히 살해를 당한다. 그러므로 비정한 독재자에게도 온정을 표출하는 일화가 남겨져 있는 것이다.
노부나가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잔악무도한 행동을 많이 자행했다. 역사적인 사실로 확인된 것만으로도 폭동을 일으킨 잇코슈라는 교단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나 히에이산 엔랴큐지의 방화 사건, 고야산 신도 4천 명의 참살 등이 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나 죽인 것은 아니다. 단지 적대하는 사람을 가차없이 처단했을 뿐이다. 그와 달리 부하에게는 상당히 친절했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기 6년 전에 아케치 미쓰히데가 병으로 몸져누웠을 때는 일부러 사자를 보내서 병문안을 했다.
(그러나~ 필자의 이 다음 말은 좀 이해하기 어렵다) 예상대로 아케치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죽인 동기에는 극히 정치적인 요인이 존재하는 듯이 느껴진다. (6년 전에 병문안을 보낸 것으로 이런 안이한 평가를 내려도 좋은 것인가? 지금 노부나가는 많은 부하들 앞에서 미쓰히데를 부챗살로 쳐서 피를 흘리게 하였다. 그것이 하찮은 일일까? 필자의 '극히 정치적인 요인' 이 존재하는 듯이 느껴진다는 표현은 참으로 우유부단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동의하기 힘들다.)
(23.8.20, 04:09 어젯밤 목포홍어에서 국내산 무침(1.5만)을 사서 동흡이와 나눠 먹고 아홉시경부터 잤나본데, 깨보니 03:30이었다. 조금 꼬물락 거리며 미려관.녹로관.옥침관 등으로 기를 운행하다가 이윽고 일어나 앉았다. 먼 어떤 뇌리의 골짜기에서 아케치 미쓰히데에 대한 평론에 대한 필자의 해석에 대해 비판했던 것이 다시 수면위로 숨을 쉬며 올라옴을 느낀다. 생각을 해 보니 미쓰히데는 감정적으로 노부나가에게 혐오를 가졌기도 하였지만 왠지 자꾸 오다 노부나가와 엇박자가 나고 있었던 걸 기억해 낸다. 즉 '정치력',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치력에서 뭔자 뒤떨어지기 시작하고 구박 받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오다에 대한 관계에서 어떤 자각을 느끼고 이물질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미쓰히데는 오다 노부나가의 혼노지의 변 이전에 모리를 향해서 전쟁을 하고 있었는에 작전지역이 없었다. 히데요시의 병력지원 요청을 받고 오다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출병을 명령했고, 그것이 바로 '혼노지의 변'으로 발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필자가 주장한 '극히 정치력의 저하에 의한' 요인이라고 말한 부분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
2023/8/19, 토요일 20:12 계양산 뒤 그 계곡을 온통 카페로 만들어 놓은 그곳에서 오전을 보내고, 나는 해먹에서 잠들었던 것 같다. 귀엽고 이쁘고 흠 한점 없는 완전체의 얼굴을 가진 로아의 해맑음. 우리는 포도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자장면을 먹었다. 수타. 그리고 부평시장에 그 맛있던 홍어무침 집은 모래내시장으로 이전했다는 쪽지를 남기고 비어 있었다. 펠리세이드 차 안은 시원하다. 흰색 차량에서 나발을 불면서 동흡과 한잔을 나눴다. 정여사는 9월 5일 오후 2시에 계양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갖는다. 입장표를 두장 얻었다.
조직을 배반하는 것이
정치적 자살이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2가지
정치가에게는 <두 개의 죽음> 이 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설령 목숨이 남아 있더라도 정치적인 명맥, 즉 정치생명이 끊어졌을 때다.
2000년 일본에서 일어난 소위 <가토의 난>이라는 불발의 정변을 살펴보면 이와 같은 논리가 이해될 것이다. 모리 요시로 내각은 정권 말기에 보기 드물게 낮은 지지율을 얻었다. 모리 총리에 대해 야당이 불신임 법안을 제출한 가운데 여당의 중진의원인 가토 고이치가 이에 동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 '가토의 난'이다. 가토 고이치가 수상인 모리 요시로에게 반기를 들고 불신임안 가결에 찬성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로 끝났다. 가토파의 내부적인 분열에 의한 부조화가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적어도 그 청사진을 확실히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가토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반을 일으킨 후에 어떤 처우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청사진을 확실히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적어도 그 청사진을 최대한 매력적인 형태로 제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가토파 의원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반란을 일으키면 다음 선거에서 지원하지 않겠다"라는 집행부의 협박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선거에서 낙선한 자신들의 암담한 미래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파벌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미쓰히데가 호소카와 유사이, 다다오키 부자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나는 이미 나이가 많아서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전부 다다오키와 주고로에게 맡길 생각이오. 협력하기 바라오." 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노부나가를 공격한 훙의 정권 구상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은퇴하고 양보한다."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이래서는 동조하는 다이묘가 생길 리가 없다. 또한 편지가 극히 애원조이므로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후의 상황이 예상보다 나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래도 보장하지 못하고
대의명분도 미약한 반란은 실패한다
하지만 조정이 미쓰히데에게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다음에 교토의 치안유지를 명령한 적이 있다는 증거는 있지만 노부나가를 죽이라고 명령한 적이 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미쓰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듯 부하나 모반을 함께 한 동료들에게 장래도 보장하지 못하고 대의명분도 미약한 반란은 시대를 불문하고 실패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반란을 도모하려면
일단 조직의 품을 떠나야 한다
미쓰히데의 혼노지의 변을 정치적인 자살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미쓰히데가 소위 <탈당>을 하고나서 노부나가를 공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쓰히데는 탈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모시던 주군에게 <기습공격>을 시도했다.
(23.8.20, 04:17, 조~ 위의 아케치 미쓰히데의 정치력 저하에 의한 요인이라고 말한 필자의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고 말한 부분에 대한 재평가 후 다시 집자를 이어간다.
가토의 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토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
첫 번째로 파벌 안의 부하를 완전히 장악하고 파벌 밖의 아군에게도 보반을 일으킨 후의 보답과 지위의 보장을 구체적으로약속해야 했다. 특히 자신의 파벌에 속하는 젊은 의원들에게는 의원으로서의 지위를 지킬 수 있고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대책을 확실히 전달해야 했다.
두 번째로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배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느 시대나 다르지 않다. 가토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속한 자민당을 탈당해야 했다. 자민당에 남아서 총리를 자르는 것은 세를 살면서 주인을 내쫓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회주의자로 보이고 청렴한 인상을 줄 수 없다.
탈당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탈당하면 자신에게 찬성하는 의원이 얼마나있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여당을 이탈하는 것은 자신의 선거기반을 흔드는 일이기도 하다. 탈당은 후원잗들의 탈당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쓰히데의 혼노지의 변을 정치적인 자살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미쓰히데가 소위 <탈당>을 하고 나서 노부나가를 공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시던 주군에게 '기습공격'을 시도했다. 그렇다면 미쓰히데에게 탈당이란 무엇인가. 노부나가를 떠나 우에스기나 모리, 혹은 모리의 비호를 받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추대한 다음에 노부나가에게 도전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모반의 오명을 쓰지 않고 정치적으로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미쓰히데가 그 시기를 놓친다면 노부나가를 무찌르기 힘들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할 의도는 없다. 다만 탈당을 하지 않으면 정치적인 사정에 의해 주위는 좀처럼 납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다.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천하를 얻지 못한 이유
냉정하고 뛰어난 정치가가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는 4가지 이유
쉽게 말해서 노부나가를 죽이지 않으면 미쓰히데는 정치생명이 끊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미쓰히데의 연령은 미상이다. 선조나가계에 대해서도 정확하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한 그가 자신의 힘으로 다이묘가 되었으므로 상당한 실력자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미쓰히데와 같은 정치가가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그저 무시나 모욕을 당한 정도로 주군에게 모반을 일으켰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모반을 감행해야 하는 경우는 다음과 같은 때이다.
첫째, 신변의 위험을 느끼는 사태가 일어났을 경우다. 이때는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한다.
둘째, 주군의 그르친 정책을 시정하기 위해 주군의 생명을 빼앗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다.
셋째, 생명은 빼악기지 않더라도 정치생명은 빼앗길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했을 경우다.
넷째, 자신이 주군을 대신한다는 야망을 가진 경우이다.
(새벽 雲雨之樂이 끝나니 05:36, 눈이 침침하구나!)
노부나가가 미쓰히데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히에이산 엔랴큐지 방화를 비롯하여 노부나가의 무차별 살육에 가까운 행동에, 그 시점에 반기를 들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승려를 구할 수 없다는 모순이 생긴다.
조정을 무시하는 태도를 시정하려고 했다는 설, 앞서 언급한 대로 혼노지의 변을 기하여 조정과 확실한 형태로 손을 잡고 "노부나가를 죽이라."는 천황의 명령을 받아서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편이 싸움을 훨씬 유리하게 전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에게 외면을 당한 것이다!
노부나가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다니구치 가쓰히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노부나가는 도움이 되지 않는 중신을 아무렇지 않게 추방한다.(사쿠마 노부모리, 하야시 히데사다)
둘째, 노부나가는 시코쿠 정복 정책에서 미쓰히데를 제외했다.
셋째, 미쓰히데는 오다 가문의 중신 중에 유일하게 공략해야 하는담당 지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시코쿠 정복 정책에서 미쓰히데를 제외하도록 조치했고, 오다 가문의 중신 중에 유일하게 공략해야 하는 담당 지역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이 두 가지 요인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노부나가는 처음에 시코쿠의 조소카베 모토치가에게 "원한다면 시코쿠를 지배해도 좋다."는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도중에 "모토치카는 도사 일국과 아와 절반으로 만족하라."고 정책을 전환했다.
당시 조소카베 모토치카와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 미쓰히데였고, 미쓰히데의 중신인 사이토 도시미쓰의 차남이 조소카베 모토치카의 정실의 친정에 양자로 들어갔다. 외교정책의 전환은 종종 일어나는 일로 그 자체는 별다른 일이 아니지만, 모토치카에게 "영토는 이 정도로 만족하라."고 미쓰히데가 설득하고 있는 사이에 노부나가가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조소카베 모토치카를 공격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문제가 되었다. 자신이 설득하고 있는 중간에 노부나가가 다른 중신에게 시코쿠 공격을 지시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만약 노부나가가 미쓰히데를 신뢰하고 있었다면 그 교섭에 기대를 걸었을 것이고, 결국 토벌하게 되는 경우에도 미쓰히데에게 그 임무를 맡겼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본래 교섭 담장의 중신을 그 지역의 공격 담당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칙은 시코쿠 정벌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시코쿠 공략 담당은 교섭 담당이었던 미쓰히데가 아니라 히데요시가 맡게 되고 이후에오다 노부타카를 총대장으로 하여 시코쿠 공격군이 편성된다.
미쓰히데는 노부나가에게 외면을 당한 것이다.
나이와 정치력의 관계
오다 가문의 필두라고도 일컬어졌던 미쓰히데는 담당하는 지역이 없어서 어디든지 가세할 수 있는 <지원군단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때는 주코쿠의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사시바 히데요시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고 주고쿠로 가는 도중이었다. 자신이 가세하는 지역에서의 미쓰히데의 지위는 그 방면군의 아래이므로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대에 가세하면 자연히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가게 되는것이다. 전무까지 역임한 사람이 갑자기 임원에서 누락되어 부장이 되어버린 격이다.
여기서 다니구치가 지적하는 미쓰히데의 연령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자.
만약 미쓰히데의 연령이 67세였다고 하면 평균수명 50세 인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령이다. 따라서 다음 기회에 자신이 활약할 수 있을지가 불안해졌을지도 모른다.
다니구치는 아직 13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들의 장래까지 생각한 끝에 반란에 이러렀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고령임에도 강력한 정치력을 가지고 정권을 거머쥔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치력이 저하된 데다가 고령인 경우는 상당히 힘겹다.
반란을 일으킬 때는
신속하게, 단번에, 속전속결로.
그리고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것
요점은 <기세>다.
문제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정치력
저하된 정치력을 되살리기 위한 수단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타는 방법>이 유효하다.
미쓰히데는 저하된 정치력을 되살리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군대를 총동원하고 노부나가를 단숨에 죽여서 흐름을 만들려고 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노부나가의 죽음을 바랐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다이묘나 부대의 수장이 노부나가 체제라는 정권의 붕괴를 바랐는가이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바라는 적군은 모두 멀리 있어서 미쓰히데와 노부나가의 적군 사이에는 노부나가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중신의 두터운 세력이 가로막고 있었다. 따라서 미쓰히데가 아군으로 삼을 수 있는 군대는 본래 오다의 집안이나 체제 안에 속하기를 바란 사람들이고 노부나가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고) <단번에 흐름을 만든다>는 작전은 이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시대의 흐름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잘못 파악한 것이다.
정치력은 많은 사람의 힘을 결집하여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을 주장하면 권총으로 위협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바람이나 욕구를 실현해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힘을 주는 것이다.
노부나가 체제는 적어도 그 체제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그에 비해 미쓰히데의 구상은 자기중심적이었다. 오다 가문의 중신은 어째서 미쓰히데가 반란을 일으켰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아, 정치력을 빼앗기고 무모한 도박을 걸었구나."
아케치 미쓰히데가 혼노지의 변에 이르게 된 원인은 <정치력 저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노부나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데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원인 또한 <정치력 저하>에 있다. 미쓰히데는 정치력과 시대의 흐름을 오인했던 것이다.
(내 생각. 미쓰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죽이고 권력을 잡고 싶어서, 즉 정치력 복원을 위하여 모반을 획책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 책의 초반에 언급했던 것 같은데, 인간은 정치적 동물 이전에 감정적 동물이다. 왜 미쓰히데라고 모반이 실패할 가능성에 대하여 절치부심하며 고뇌하지 않았을 것인가. 아마도 수없이 고민하고 힘들게 방황했을 것에 백% 확증한다. 대장부 무사로써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실패의 뒤안에서 좌고우면하다가 결국 포기하는 것보다 그는 장엄하게도 모반을 실행에 옮겼다. 천박한 히데요시 아첨꾼에게 기우는 주군을 향한 '어처구니 없슴'과 더하여 부하들 앞에서 부채로 때리고 모욕주는 짓꺼리와 자신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주군을 향한 복수심 이외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부나가는 인간적인 면이 전무한 살인마이니 죽여야 할 인간말종이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모반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그 후에 대처하면 된다. 죽으면 죽었지 후회는 하지 말자! 아마도 그랬지 싶다.)
2부
도요토미 히데요시,
노부나가 사후
대역전을 노리다
ㅡ급성장한 <급조정권>의 수장
히데요시가 지닌
대역전의 정치력
히데요시가 정치가로서 가진 자질,
갖지 못한 자질
정치학자로서 뛰어난 정치학론을 남긴 나카무라 기쿠오 게이오 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정치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강한 에너지
건강하고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
둘째, 정확한 상황 판단력
여론이나 뉴스를 민감하게 간파하고 의견을 집약해야 한다.
셋째, 절충하고 교섭하는 능력
정책수행을 위한 조정력이 필요하다.
넷째, 언변이나 문장력 같은 뛰어난 표현력
계몽이나 설득, 민심을 장악해야 한다.
다섯째, 조직화 능력
사람을 모아서 활용하는 힘, 풍부한 인맥 등을 갖추어야 한다.
여섯째, 사교성과 위엄
사교성이 없으면, 즉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얻지 못하면 지지를 받을 수 없고 위엄이 없으면 무시를 피할 수 없다.
첫 번째 자질인 강한 에너지의 측면에서 보면 히데요시는 에너지가 넘친다. 다른 사람보다 열심히 일아여 상사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처음 가헤의 산하에 있을 때는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바람에 동료에게 시샘을 받았다. 노부나가의 짚신을 품에 넣어서 따뜻하게 만들어 새벽에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둘째, 상황 판단력으로 말하자면 히데요시는 누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했다. 너무 많은 공적을 차지하여 괜한 의심을 받지 않도록 일부러 주고쿠의 모리 가문을 공격하는 최종 단계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이 대목을 나는 주목한다. 혹시 히데요시가 모략을 꾸민 건 아닐까? 현재 미쓰히데는 아무 임무가 주어지지 않은 공격대기조 상태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지원을 요청하면 노부나가가 미쓰히데를 지목할 것이고, 미쓰히데가 전쟁터로 오는 길목에는 혼간지가 있다. 노부나가가 혼간지에 머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노부나가와 미쓰히데 사이의 반목을 그 누구보다도 훤히 꿰뚫고 있는 히데요시. 이 추측이 설사 빗나간다 하더라도 평소 자신을 탐탁찮케 여기는 미쓰히데놈을 지원군으로 받으면 히데요시 밑으로 배치되는 셈이니 정치적 위상이 앞서게 된다. 그야말로 꿩먹고 알먹고의 '원군지원요청'이 아닌가!)
셋째, 절충하고 교섭하는 능력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분명히 패배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비굴할 정도로 자세를 취하면서도 결국 강화를 밎은 후에 이에야스를 신하로 삼는다.
넷째, 히데요시의 표현력은 무시무시하다. 화려한 깃발이나 황금의 다실을 통해 사람을 놀라게 하거나 정실 오네에게 위안의 편지를 보내거나 노부나가에게 아첨한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다섯째, 조직화 능력에 대해서는 스노마타성 축조 때 그 지역의 호족을 동원해 인원을 보충하고 그들을 부하로 삼아 세력을 늘리거나, 다케나카 한페와 구로다 칸페를 비롯한 일급참모들까지 휘하로 끌어들인 것을 그 예로 들 수 있다(이 내용은 좀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ㅋ).
여섯째, 사교성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기타노 대다회>에 친족이나 다이묘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도 참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널리 알려진 예다.
다만 마지막으로 <위엄>에 대해서는 그다지 느끼지 못한다. 위엄이 있었다는 증언도 적다.
"우수한 기사로서 전투에 숙련되어 있지만 기품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당시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가 히데요시에 대해 내린 평가다.
<혼노지의 변 > 전후
히데요시의 정치적 움직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던
미쓰히데의 반란을 가로막은 사람은 누구인가
히데요시는 빗추 다카마쓰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오사카와 교토로 돌아왔는데 이는 당시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실은 여기에 히데요시의 정치력이 엿보인다.
이전에 노부나가가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죽인 사건에 의해 이마가와 군대가 퇴각했듯이,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오다 세력이 모든 전투지에서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실제로 간토에 진출한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혼노지의 변을 접한 무장들의 반란에 부딪혀 산산이 격파되었다. 오다 군대의 준 간부급이었던 하데타카는 죽음을 당했으며, 오다 가문의 시바타 가쓰이에는 호쿠리쿠에서 폭동세력의 역습을 받아 교토로 가지 못한 채 가로막혔다.
니와 나가히데는 노부타카와 함께 시코쿠를 정벌하기 위해 오사카에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을 접한 보졸들이 잇달아 도망치는 바람에 지리적으로는 미쓰히데와 가장 가까왔지만 단독으로 무찌를 수 없는 상태에 처했다.
나머지 군대 중 시바타, 니와, 다키가와는 때로는 움직이지 못하고 때로는 공격을 받았기때문에 남는 것은 히데요시뿐이다.
이러한 오다 군대의 상황을 보기만 해도 미쓰히데가 사태의 추이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반란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런가!). 시바타와 니와가 움직이지 못하므로 모리 가문을 한창 공격하고 있는 히데요시도 적을 정면에 두고는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재빨리 모리 가문과 화친하고 회군했다(히데요시는 어느 정도 어떤 낌새를 느끼고 대비하고 있었다는 기분이다. 지도를 보니 빗추와 교토의 거리는 4국쯤을 거쳐야 하는 먼 거리다).
화친하고 나서 혼노지의 변을 접한 모리 군대는 퇴각한 히데요시 군대를 뒤쫓으려고 했지만 히데요시와 화친을 위한 교섭을 담당한 모리 가문의 외교승 안코쿠지 에케이가 막았다고 한다. 모리가 만약 전력을 다해 히데요시를 뒤쫓았다면 어부지리로 이득을 보았을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모리가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받들고 교토에 깃발을 세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리를 저지한 안코쿠지 에케이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안코쿠지 에케이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기 10년전에 유명항 예언을 자필로 편지에 적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엄청난 출세를 하지만 그 후에 뒤로 넘어집니다." 노부나가는 천하를 손에 쥘 정도로 출세를 하지만 비탈길에서 미끄러지듯이 금세 물러난다는 의미다. 마치 혼노지의 변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내용이다. 하지만 실제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는 점이다. "도키치로는 놀라운 자입니다." 기노시타 도키치로(히데요시)는 대단한 인물이라는 의미다.
이 편지를 뜬 1573년이라면 히데요시가 <기노시타 도키치로>에서 드디어 <하시바>로 성을 바꾸었을 무렵이다. 무장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시기라고 해도 좋다. 안코쿠지 에케이는 히데요시라는 인물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편지를 쓴 것은 에케이가 히데요시와 첫 대면을 했을 때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는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성이 함락되어 도망치는 도중에 모리에게 도움을 받았는데,
모리 측과 오다 측의 외교 교섭을 위한 담당자로서 히데요시가 안코쿠지 에케이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이다.
그 후에 오다와 모리가 대립하여 싸움이 시작되고 안코쿠지 에케이는 히데요시와 내통한 우키타 나오이에의 인질이 되었다가 생환한다. 인질교환에 의해 생명을 구했지만 거기에 히데요시의 의도가 전혀 작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물론 히데요시와 내통하고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히데요시가 은혜를 베풀어서 언젠가 에케이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고는 생각할 수 있다.
결국 빗추 다카마쓰성을 공격하다가 급변하여 모리 측과 화친한데다가 혼노지의 변을 접하고도 히데요시 군대를 추격하지 않은 이면에는 모리 가문, 특히 외교를 담당했던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히데요시의 강력한 정치력이 작용하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히데요시가 과거에 적대했던 모리 가문의 평범한 외교승에 지나지 않는 안코쿠지 에케이를 다이묘로 내세웠다는 상황 증거를 보아도 둘 사이에 접촉이 상당히 빈번했을 것이라고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전도유망한 정치가를 알아본
거리의 상인들
빗추 다카마쓰성에서 히메지를 거쳐 오사카로 향하는 거의 180킬로미터의 노정을 2만에 가까운 병력이 6일 만에 헤쳐나간 것이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으므로 필사적으로 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히데요시의 <자금력>이다. 큰 길가에 횃불을 세우고 길마다 주먹밥과 물을 두어 지금의 마라톤 대회와 같은 형태로 배치했다. 물론 그 고장의 농민을 동원했다. 평소에 백성에게 베풀고 돈을 뿌리지 않으면 이렇게 할 수 없다. 히데요시는 금고를 열어서 안에 있는 금품을 자신의 무하들에게 두루 나누어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히데요시는 통이 크다. 통이 큰 히데요시가 미쓰히데를 죽이면 보상은 더욱 많을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했다. 그 돈은 대체 어디에서 변통한 걸까.
노부나가 생전에 히데요시는 사카이의 상인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히데요시가 사카이를 담당하고 있었던 시기가 있다. 히데요시는 사카이의 상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는 대가로 상인들로 하여금 노부나가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물론 교역에 의한 이윤도 노부나가에게 상납하게 했다.
('이윤을 상납하게 했다' 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하다. 행정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십억 가까운 공사를 할 때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고도 "나는 청렴하다" 라며 시치미를 떼던 그 행정실장놈. 그러나 낸중에 사장은 어떻게 뇌물을 행정실장이 받아먹었는지를 알고 말았다. 그 사장이 느끼는 배신감은 실로 클 수 밖에 없어서 내게 그 사실을 까발렸다. 실망감과 함께.
그렇게 이익을 노부나가에게 바쳤으니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를 사랑하고 아낄 수 밖에. 자금줄은 통치에 꼭 반드시 필요하니깐. 미쓰히데는 행정통은 될지언정 아부할 줄을 모르는 인간(막힌)이므로ㅎㅎ 마치 나를 보는 것 같다.)
간접적인 증거이기는 하지만 혼노지의 변을 히데요시에게 처음으로 알린 사람은 사카이의 거상 하세가와 소닌이었고, 사카이의 상인 출신 고니시 유키나가는 히데요시 정권 아래에서 다이묘가 되어 고관에까지 올랐다. 사카이의 이마이 소큐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지 1년 후인 1583년에 셋쓰에서 2,300석의 영지를 히데요시에게 받았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기 10년 정도 전에 이마이 소큐는 당시의 기노시타 도키치로에게 소총과 탄약을 보냈다. 물론 히데요시의 의뢰에 답한 행동이었지만 사카이의 상인들은 <선물거래>로 이데요시와 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인은 어느 시대에나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므로 판단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지 않다. 사카이의 상인들이 미쓰히데와의 일전을 앞두고 히데요시에게 상당히 많은 조력을 한 이유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지금으로 보면 유력 정치가에 대한 <사전 헌금>과 같다.
결국 이를 통해 <거리의 민중>을 아군으로 삼고, 보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 다음으로는 아군이 되어줄 동료를 확보했다. 2반의 대군을 이끌고 오다 군대의 간부인 히데요시가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이것이 혼노지의 변에서 야마자키 전투에 이르기까지의 정치력을 통해 본 히데요시의 움직임이다.
노부나가 사후,
대역전을 노리다
히데요시는 후계자 선정에서
대역전을 노렸다
다음으로 히데요시가 아마자키 전투에서 미쓰히데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장악하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누구보다 앞서 주군 원수를 갚은 히데요시. 하지만 노부나가에는 여러 명의 아들이 있었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될 수는 없었다.
히데요시가 처음으로 자신의 의사에 의해 천하를 장악하려고 움직인 것이 노부나가의 후계자를 정하는 <기요스 회의> 였다. 이는 첫번째로, 아직 반 오다 세력이 있으므로 집안싸움할 때가 아니다 라는 의미다. 두 번째로, 히데요시도 압도적으로 세력이 크지 않고 다른 오다 가문의 중신과 차이가 없으므로 회의에 응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 세 번째로, 회의의 결과를 일단은 존중할 수 있을만큼 통일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기요스 회의에서 오다가문의 의뜸 지위에 있었던 시바타 가쓰이에가 추천하는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가 아니라,
히데요시가 추천하는 니조성에서 전사한 노부나가의 장남 노부타다의 아들, 즉 겨우 3세의 산포시가 오다 가문의 대를 잇게 되고 히데요시가 산포시의 후견인으로서 실질적인 제1일자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된다.
노부타카는 미쓰히데 공격군의 명목상의 우두머리였고 인품도좋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결코 시바타 가쓰이에의 무리한 인사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노부타카가 후계자로 결정된다면 히데요시는 공헌에 따른 보상은 받겠지만 노부타카와 그의 후원자인 시바타 가쓰이에보다 뒤처지게 되는 것은 틀림없다.
당장의 손실보다는
미래를 위한 포섭으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시바타 가쓰이에, 니와 나가히데,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쓰네오키 등 총 4명이었다. 히데요시에게 유리했던 점은 시바타 가쓰이에와 사이가 좋았던 다키가와 가즈마스가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일설에는 간토에서의 패전을 책임지느라 참가가 보류되었다고도 한다.) 게다가 후계자 경쟁을 하고 있었던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쓰와 3남 노부타카는 당사자인 탓에 참가하지 못했다.
회의에 참가한 4명 중에 니와와 이케다 두 사람은 히데요시에게 호의적이었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따라서 설령 지금까지의 서열은 낮아도 회의에서의 발언력은 상당히 컸다. 이만큼 좋은 조건이 주어지면 다음에는 요리하기 나름이다.
가계에 따라 노부나가의 장남인 전사한 노부타다의 장남이 오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히데요시의 의견에 니와와 이케다가 찬성하여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노부나가의 남은 영지와 미쓰히데의 옛 영지의 분배도 히데요시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히데요시는 하리마 외에 야마시로와 단파를 획득하고 중앙을 장악했다. 시바타 가쓰이에는 히데요시가 소유하고 있었던 나가하마를 얻었다. 나가하마는 히데요시가 정성을 다해 가꾸고 있었던 영지인 만큼 이를 얻은 시바타 가쓰이에는 다소의 불만을 씻어버렸다. 이 회의에서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기요스회의 이후 세력지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회의에서 분명히 히데요시파가 된 니와 나가히데와 이케다 쓰네오키, 그리고 히데요시 측에서 활약한 노부나가의 예전 신하들을 만족시키는 포상이 얼마나 주어질지가 중요했다. 앞으로 히데요시가 천하를 장악하기 위해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사람은 모두 어제까지의 동료다. 이 부분을 히데요시는 무엇보다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설령 자신이 아끼던 영토인 나가하마를 빼앗기더라도 이는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항이 아니었던 것이다.
니와 나가히데는 기존의 영지인 와카사 이외에 오미의 다카시마군과 시가군이라는 요충지를 얻었고, 이케다 쓰네오키는 기존의 영지인 셋쓰에 더히 이케다, 아리마를 얻었다.
시바타 가쓰이에의 소유지가된 오미 나가하마의 백성들은 다음해에 일어난 히데요시와 가쓰이에의 결전인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음식을 운반하는 등 히데요시를 위해 일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결국 이런 미래의 상황까지도 다 내다보고서 히데요시는 영지를 분할했다는 예기가 되는가?? )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맞붙은
유일한 전투,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아래의 내용은 나무위키에서 모셔 옴]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 ||
시기 | 1584년 3월 ~ 11월 | |
장소 | 오와리 이누야마성, 코마키 나가쿠테 일대 | |
원인 | 혼노지의 변 이후, 하시바와 도쿠가와의 대립. | |
교전세력 | 하시바 군 |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
지휘관 | 하시바 히데요시 이케다 츠네오키(死) 모리 나가요시(死) |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츠 |
병력 | 20,000 ~ 40,000 명 | 10,000 ~ 16,000 명 |
피해 | 사상자 2,500 명 이상 | 사상자 550명 |
결과 | 하시바 군의 전략적 승리 | |
영향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국 지배 확립 |
小牧長久手の戦い. 1584년 3월부터 11월까지 하시바 히데요시군과 오다 노부카츠,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이 격돌한 전투. 북부의 코마키성, 이누야마성을 중심으로 오와리 남부, 미노 서부, 미노 동부, 이세 북부, 기이 이즈미, 셋츠 곳곳에서 전투가 진행됐다. 동시에 이 전투와 연계된 싸움이 호쿠리쿠 시코쿠 관동에서도 일어났다.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우세를 점하면서 이에야스도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2. 배경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정치적으로 공백상태였던 카이, 시나노 등 舊 다케다 가 영지에 세력을 확장했다. 오다 가의 중신 카와지리 히데타카가 다케다가의 영지를 받은 상황이었으나 이에야스가 사주한 다케다 잔당의 잇키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살해당했고, 다케다를 배신하고 영지를 보전했던 아나야마 바이세츠도 혼노지의 변 이후 영지로 귀환하는 길에 농민에게 살해당해, 바이세츠와 달리 운좋게 혼노지의 변에서 귀환한 이에야스는 아나야마 등의 다케다계 호족들을 쉽게 종속시킬 수 있었다. 이 당시 이에야스는 시즈가타케의 싸움 때 시바타 가쓰이에로부터 제안을 받긴 하였으나, 가쓰이에가 히데요시를 이길 가능성이 없다 생각하여 거절했다. 그렇다고 해서 히데요시의 편에 선 것도 아니라,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카츠와 은밀히 손을 잡고 히데요시를 견제하고 있었다. 1584년 3월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에 반기를 들고 이에야스와 기요스 성에서 강화를 체결하였고 이것은 히데요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3. 전개
이에 격분한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상대로 일전을 벌이게 되었고, 전투는 지구전으로 발전해 양측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때 이에야스는 코마키산(小牧山)에 진을 치고 맞서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군의 이케다 츠네오키와 그의 사위 모리 나가요시는 이에야스가 없는 틈을 타 미카와로 진격하는 전략을 세워 빈집털이 히데요시의 조카인 미요시 히데쓰구를 대장으로 세우고 공격을 개시했는데 이미 히데요시 군이 미카와를 칠 것이란 정보를 입수한 이에야스는 오히려 재빨리 이들을 뒤에서 추격하여 나가쿠테에서 이들을 전멸시켰다.
도쿠가와가 별동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된 히데요시가 이번엔 자신이 도쿠가와의 군대를 뒤쫓았으나 코마키산 본진에 남아있던 혼다 타다카츠가 소수의 기병대로 진군을 방해했다. 진군 경로를 살짝 벗어나서 돌격해 오다가 물러나는 식으로 얼쩡거리는 혼다 타다카츠의 부대에 신경을 쓰다가 결국 도요토미군은 소수인 기병 부대를 무시하고 진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혼다 타다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겁쟁이라고 놀리면서 '사슴이 표주박을 깨어먹었다'며 놀려댔고 히데요시는 이를 갈면서 주변의 가신들에게 '내 반드시 저놈을 내 수하로 거두겠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도요토미군의 본대가 추격에 방해를 받는 사이 이에야스는 자신있는 평지에서의 대회전을 통해 별동대를 박살낸 후 히데요시의 군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의 성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총대장 미요시 히데쓰구는 간신히 도망쳤고, 이케다 츠네오키와 적장자 이케다 모토스케, 사위 모리 나가요시는 나란히 전사하여 이에야스에게 수급이 바쳐졌다.
4. 결말
이렇게 히데요시의 별동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두어 코마키의 본 전선에서 이에야스와 노부카츠는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지만, 개전 전 노부카츠가 의심병이 돌아 세 가로를 주살한 결과 이가와 이세에서 반란과 배반이 잇따랐다. 결국 스스로 급해진 노부카츠는 히데요시와 단독강화를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노부카츠를 원조하기 위해 코마키에 주둔하던 이에야스도 더 이상 군대를 움직일 명분이 사라졌기에 군대를 이끌고 하마마츠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야스 본인은 히데요시를 쓰러뜨리고 천하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히데요시 역시 이에야스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자신의 여동생인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에 시집보내 인척의 관계를 맺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까지 딸을 보러 이에야스를 방문하게 한다.
이후 이에야스는 둘째아들 오기마루를 히데요시에 인질로 보내고, 자기도 오사카로 상경해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끝내 힘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이에야스를 신종하게 만든 히데요시는 정국을 장악할 수는 있었으나 이에야스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결국 도요토미 정권하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2인자 자리를 차지했다. 즉 이 전투는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를 세우고 일본을 지배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야스는 어째서
히데요시와 강화를 맺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려 했는가
다음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러는 도중에 히데요시가 최강의 적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벌인 싸움이다.
이에야스는 육상전에 능숙했다. 히데요시는 공성전의 명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전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로 끝난 듯이 보인다. 여기서 <전투>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싶다.
전쟁은 결국 승리에 의해 무언가 이익이 있으므로 실행한다. 그러므로 전쟁은 외교의 최종 수단이라고 불린다. 즉 아무리 전투에서 이겼더라도 본래 전쟁을 시작한 이유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이는 승리로 볼 수 없다. 3남 노부카쓰는 자신이야말로 오다 가문을 이어 천하를 장악할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오다 가문 최대의 동맹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힘을 합쳐 히데요시와 대립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이상할 것이 없다.
도쿠가와의 본거지인 오카자키를 노린 이케다 쓰네오키가 그의 움직임을 간파한 도쿠가와파에 의해 전사하는 등 타격을 받았다. 그 후에 두 진영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이세 방면에서 싸우고 있었던 오다 노부카쓰는 히데요시파에 의해 많은 압박을 받고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낙도 받지 않은 채 무단으로 히데요시와 단독으로 강화를 맺어버렸다. 이에야스 측이 애초에 이 전투를 일으킨 대의는 노부카쓰를 제쳐두고 천하를 탐내는 히에요시에게 정의의 철퇴를 내리는 것이었다. 즉 노부카쓰가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 대의다. 전투의 대의가 사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히데요시 측이 10만의 대군인 데 반해 자신은 1만 6천 정도의 군세에 불과했고 영토도 종합력도 차이가 역력했다. 서로 강화를 맺으면 이익이 되므로 수월하게 평화가 실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강화를 맺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반면, 히데요시는 왜 이에야스와
필사적으로 강화를 맺으려 했는가
한편으로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노력하면 이에야스를 짓밟을 수는 있겠지만 그때까지 몇 번의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군대가 피해를 볼 것은 분명했다. 이케다 쓰네오키와 같은 유력한 아군이 이 이상 전사한다면 최종적으로 히데요시 진영의 동요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고 이는 천하통일을 달성하는 과정에 큰 지장이 된다.
무엇보다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존재가 그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반드시 무찔러야 하는 상대일까. 히데요시의 뇌리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무리 어려운 문제를 맡겨도 꿋꿋이 인내하고 동맹군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한 이에야스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이에야스라는 남자는 한 번 휘하에 들어오면 비할 데 없는 충성심을 발휘하는 남자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
반드시 강화를 맺어야 한다는 결론. 단순한 정전이나 휴전은 앞으로 서쪽을 공격할 때마다 후방에 큰 불안을 안게 된다. 이때부터 수단을 가리지 않고 이에야스를 휘하에 넣으려는 히데요시의 작전이 시작된다.
이미 결혼한 자신의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굳이 이혼까지 하게 만들면서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아사히히메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에야스는 아직 히데요시의 휘하에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는 자신의 어머니를 딸을 방문한다는 명분으로 오카자키에 보냈다.
후세에는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그토록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나왔다. 실은 당시의 다이묘들도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경우에는 히데요시가 사거한 이후 이에야스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착용한 갑옷을 입는다는 이야기만 듣고도 상당히 위축되었을 정도라고 한다.
드디어 이에야스가 오사카성으로 향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만났을 때 모든 다이묘 앞에서 그의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나중에 천하를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이에야스는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다이코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라는 찬양을 받지만, 정치적으로 본다면 이에야스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분명히 패배했다고 할 수 있다.
굴욕적이더라도,
히데요시의 정치적 완승이다
이에야스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통해 달성하고자 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서일본을 다스리는 히데요시에 대항하여 동일본을 다스리는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노부나가의 차남인 노부카쓰를 옹립하여 히데요시와 싸우고 게다가 이에야스는 승리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시코쿠나 규수는 아직 히데요시를 따르지 않는 세력이 많았다. 기이와 이세, 도카이에 걸쳐서도 이에야스. 노부카쓰 연합군에 많은 세력이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런 예상이 서지 않았다면 이에야스가 나설 리가 없다.
노부카쓰가 히데요시와 단독강화를 맺는 바람에 이에야스는 전투의 대의를 잃었다. 히데요시는 왜 노부카쓰를 죽이지 않았을까. 죽인다면 그 원수를 갚는다는 대의가 에에야스 측에 남는다. 이에야스는 강화를 왜 끈덕지게 미루고 있었을까. 정치적인 패배에 의한 타격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기때문이다.
히데요시의 목적은 전국의 패권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를 복종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굴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쨌든 복종시키면 된다. 그런 다음에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말을 듣지 않는
꼭두각시 후계자를 향한
히데요시의 정치적 복수
히데요시,
권력을 집중시켜 전국시대를 끝내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이후 히데요시는 시코쿠, 규수, 간토, 도호쿠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 과정에서 <총무사령>이라고 불리는 법령을 발포했다. 간단히 말하면 "다이묘 간에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때까지는 무력으로 얼마든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법령의 탄생으로 사사로이 멋대로 영토를 확대할 수 없게 되었다. 바꿔 말하면 전국시대가 종언을 고했던 것이다. 1585년(덴쇼 13년)에 규슈에서 처음으로 발포. 그 후에 무기소지, 해적활동, 촌락 간 분쟁을 금지한 <싸움 정지령>이 같은 시기에 발포되었다.
물론 다이묘는 자치권이 확보되어 있었지만 의무도 부담해야 했다. 상경한다든가 중앙의 군역이나 공공사업을 담당하여 도요토미 정권에 반항할 수 없는 구조가 구축되면서 권력이나 군사력을 중앙정권으로 집중시키는 정책이 시행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전란의 세상도 종결시켰다.
전국시대는 전사자나 부상자를 내는 것만이 아닌 일반적인 농민이나 상인에게는 극히 불행한 시대이기도 했다. 애초 각자의 힘으로 각자도생해야 하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계속 싸워야 했다. 평화가 찾아오면 경제활동이 활발해진다. 나라가 풍요로워지면 사람들은 행복해진다. 전란의 세상이 끝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란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시대는 항상 <권력의 분산>에서 시작되고 <권력의 집중>으로 종식된다.
자식이 없었던 히데요시,
왜 양자에게 할복을 명했을까
<레임덕>이란 걸음이 불편하거나 다리가 부러진 오리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의미다. 히데요시는 1589년 처음으로 자식을 얻었다. 하지만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레임덕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양자로 삼은 누나의 아들, 즉 조카인 히데쓰구에게 즉시 관백의 자리를 넘기고, 자신은 은퇴한 <다이코>라고 칭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의 후계자로 히데쓰구를 확정했다. 이제 아이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일까. 히데쓰구가 관백이 된 지 2년후인 1593년에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났다. 나중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되는 히로이마루다.
히데요리가 태어난 지 겨우 2개월 후에 관백 히데쓰구의 딸과 히데요리의 혼약을 결정했다. 그리고 히데요리를 히데쓰구의 양자로 들여보내고 도요토미 정권을 <히데요시, 히데쓰구, 히데요리>로 계승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온건한 관계를 구축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은 1595년 7월에 히데쓰구는 고야산에서 히데요시에게 할복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죄 없는 처첩과
자식 30여 명까지 죽음을 당하다
자신이 내세운 대리인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히데요시는 참을 수 없었다
당시의 객관적인 상황을 살펴보자. 첫 번째로 히데요시가 관백 직위를 히에쓰구에게 양보한 이유는 정권의 레임덕을 막고 민코쿠의 외정에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대륙침공이 어려운 데다가 히데요리가 테어났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다시금 국내를 통치하는 권력을 회복하려고 했다.
두번째로, 히데쓰구는 히데요시가 전력을 다해 권력을 회복해야 할 정도로 훌륭하게 국내를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소위 <다이코 히데요시> 정부와 <관백 히데쓰구> 정부가 동거하고 있는 변칙적인 정치체제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세 번째로, 만약 히데쓰구의 권력이 증대하면 히데요시의 관료인 이시다 미쓰나리나 마시타 나가모리는 권력을 빼앗기게 된다.
1595년 2월에 가모 우지사토가 세상을 떠났다. 92만 석에 이르는 넓은 번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다이코인 히데요시는 우지사토의 아들 히에유키에게 상속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갑자기 관백 히데쓰구는 히데유키에게 상속해도 된다고 선언했다.
분명히 다이코는 관백이었던 인물의 존칭에 불과하며, 귀족정치의 정점은 어디까지나 관백이다. 따라서 정치제도론에서 말하자면 관백인 히데쓰구가 된다고 하면 되고 안 된다고 하면 안 된다. 반면 다이코는 대표권이 없는 회장과 같으므로 가모 우지사토의 남겨진 영토에 대해서도 관백 히데쓰구에게 결정권이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제도론에 따른 형식이다. 당시의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관백 히데쓰구가 다이코 히데요시에게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대전제가 있었다.
처음에는 꼭두각시로 추대된 정권이 결국 독자성을 발휘하여 권력의 확대를 도모하는 것은 별로 진귀한 경우는 아니다.
히데쓰구의 독단을 보고 이대로 내버려두면 권력을 빼앗긴다고 느낀 히데요시와 히데요시의 관료들(이시다 미쓰나리나 마시타 나가모리 등)이 갑자기 포위망을 배치하여 히데쓰구를 힐문하고 추방하여 결국 할복하게 만든 것이다. <관백 히데쓰구 할복 사건>은 도요토미 정권의 후계자 문제에 정치투쟁이 얽힌 결과였다.
두 권력이
공존할 수는 없다
3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정권의
내분을 이용해
천하를 장악하다
ㅡ자신의 반대파까지 끌어들인,
대중에게 인기 없었더
평범한 남자 이에야스의
묵직한 정치력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는 어떤 남자인가
1962년경에 일본에서는 <이에야스 붐>이 일어났다. 그 배경이 된 것은 아마오카 소하치가 발표한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책이 출간된 당시에는 그다지 팔리지 않아서 상당히 고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1962년에 어느 주간지에 "야마오카 소하치가 쓴 『도쿠가와 이에야스』야 말로 경영자와 리더의 거울." 이라는 취지의 기사가 실리면서 단번에 불이 붙었다.
최근에는 <노부나가 붐>이 일어났다. 쓰모토 요가 쓴 『대몽』이 <<일본경제신문>>에 연재되면서 비지니스맨을 중심으로 과단성과 통솔력이 있는 노부나가가 하나의 이상적인 리더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1962년에는 바야흐로 고도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경영자는 생산을 늘리기 위해 인재를 지방에서 열심히 모집하고 있었다. 그 전까지는 경영자 측이 노동자와 정면으로 대치하는 경우가 많아 큰 파업이 빈발하고 있었다. 1960년의 <60년 안보>이후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으로 인해 임금이 상승하고 대결경영에서 협조경영으로 이행한 것이다. 따라서 가신을 소중히 여기고 평화를 바란, 태평한 세상의 지도자로서 이에야스가 인기를 얻었던 것이다.
전란의 세상,
평범한 남자의 평범치 않은 개성
일본사 권위자인 구와타 다다치카 고쿠가쿠인 대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에야스에게는 일본인의 기호나 국민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일본인이 겸비하기 어려운 초일본적인 장점이 있는데 그 장점이 그대로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면 그 장점은 무엇인가.
"노부나가의 단기 결전에 대해 이에야스는 장기결전으로 대항했다. 장기결전의 경우에는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작전을 세울필요가 있는데 이는 오히려 일본인과 동떨어져 있는 부분이다."
구와타 다다치카 교수는 <보고 있지 않은듯하면서도 보고 있는 통찰력>과 <종잡을 수 없는 듯하면서도 적확한 결단력> 또한 이에야스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어느 개인의 빼어난 부분을 동경하는 동시에 모자란 부분에 매력을 느낀다. 특히 지도자의 모자란 부분은 중요하다. 따라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침식을 함께 할 정도로 개를 좋아했다든가 히데요시가 호색가였다(이게 무슨 모자란 부분인가 의아하다!)였다는 이야기는 대중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쓸데없는 빈틈이 없다. 어린 시절의 이에야스는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인질로 연금되어 있다가 겨우 해방되었지만(풀려났지만) , 오다 노부나가의 앞잡이나 마찬가지인 동맹관계에 의해 전쟁에서 오다 군대의 선봉으로 실컷 이용되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는 여행과 같다. 서둘러서는 안 된다. 부자유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부족하게 느낄 일이 없다. 또한 모자란 것이 지나친 것보다 낫다."
이는 1603년 정월에 썼다고 전해지는, 이에야스가 남겼다고 하는 인생에 대한 명언이다. 막부를 열기 직전, 즉 천하를 손에 넣기 전에 스스로를 다스린 말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이다.
큰 능력이 없어도
큰 성과를 달성할 수 있는 이에야스의 방식
이에야스에게는 참모가 많았던 점을 들 수 있다. 혼다 마사노부. 마사즈미 부자나 오쿠보 다다치카,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모략과 군무를 모두 갖춘 인재가 풍부했다. 또한 윌리엄 애덤스를 위시한 외국인, 곤치인 스덴이나 난코보 덴카이와 같은 고승에다가 하야시 라잔과 같은 학자도 있었다.
뇌과학자 사와구치 도시유키는 "자신의 뇌에 결정성 지성이 부족하다면 외측에 있는 뇌를 통해 보퉁하면 된다."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비추어 즉각적으로 적당한 결론을 도출하는 <결정성 지성> 이 있다. 만약 이 결정성 지성이 부족하더라도 그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 이외의 인간, 즉 다른 사람의 뇌를 빌리면 역사에 남을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리더 본인이 다른 사람의 지성을 이끌어낼 만한 <매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묵직한 조용함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평범함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최대의 이유는 "항상 권력의 유지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라고 앞서 소개한 나카무라 기쿠오 교수는 지적한다. 자세히 말하면 이에야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실제로 노부나가에게 의심을 받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정실과 장남을 (죽였다)이는 것도 묵인한 남자다.
긍정적인 면부터 지적하자면, 자신을 포장하거나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부하를 혼내거나 이유도 없이 사람을 괴롭히는 경우가 당시의 무장과 비교하자면 극히 적다. "모르니까 가르쳐주게." 라거나 "자네의 의견을 들려주게."라고 부하나 참모에게 아무렇지 않게 부탁했다.
설명서도 읽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듣지 않으면서 곤란할 때만 간지러운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는 상사와 같은 이런 인물은 어리석거나 의지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이에야스는 부하나 참모에게 믿음직하지 않다고 여겨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볍지 않고 말수가 적고 매사에 신중했다. 과묵하고 진중한 것이므로 그릇이 큰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 사람이 실은 아무생각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신비로운 얼굴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주위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고 궁금해 한다. 쓸데없는 일을 하거나 경솔한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진중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나도 이런 정도의 인생의 교훈쯤은 조금 알고 있다ㅎ)
이에야스는 적어도 가신에게는 성실하게 대응했고 전장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이처럼 언제나 과묵하고 진중한 주군에게 "모르는 게 있어서 자네의 의견을 듣고 싶네." 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오직 이에야스에게만 있는 <묵직한 조용함>을 나는 <위대한 평범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너구리 영감,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야스가 노부나가, 히데요시보다
더 지지와 공감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오다 노부나가는 국내를 통일한 이후에 외정을 시도한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중에 가로막혔다. 농병을 분리하고 부하의 소유지를 상당히 자유롭게 이동시켰던 것을 보면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후에 유력 다이묘의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과거의 아시카가 막부와 같은 체제가 되었다. 히데요시 자신이 장수했다면 혹시 노부나가와 같은 중앙집권을 지향했을지도 모른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와 같은 비약이 없었다. 외국에 쳐들어가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이묘에 대한 통제는 강화하지만 각지에는 어디까지나 다이묘의 자치권이 확립되어 있었다. 모든 토지를 도쿠가와의 소유로 하거나 대리 관리를 두도록 하는 중앙집권국가는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이상에서 간파할 수 있는 사실은 이에야스가 그저 권력만 유지하고자 한 결과로 도쿠가와가 일본국을 통치하는 입장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국가 목표가 없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는 다른 다이묘가 안심하게 된 요인이기도 할 것이다. <도쿠가와 가家에 의한 천하지배> 얼마나 알기 쉬운가. "아, 그렇구나." 라고 다이묘들도 쉽게 납득하게 된다. "최대의 영토를 가진 도쿠가와 가문이 일본을 지배한다." 힘의 논리로 움직였던 다이묘들에게 이보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는 없다. 게다가 모든 다이묘는 다이묘로서 계속 존재할 수 있었다.
이에야스는 그 보수적이고 평범한 성격과 능력 덕분에 다행히도 히데요시 사후에 다이묘 사이에 그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을 일으킬 수 있었다. 유별난 야망이나 발상도 없고 평범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지지를 받은 셈이다.
주도면밀함 때문에
음흉하고 음습한 인상을 남기다
노부나가, 히데요시도 책략.모략은 많이 실시되고 있었지만 이에야스는 그 성격으로 인해서인지 상당히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 싸움에 임했다. 즉 주사위를 던지기 전에 확실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에야스가 관련된 전투, 예를 들어 세키가하라 전투를 보면 실제의 싸움은 단기일에 끝나지만 그 결전에 뛰어들기까지 많은 시간을 들여 아군을 늘리고 적군을 와해시킨다.
물론 모든 전투가 그렇지는 않다. 예를 들어 오사카 전투는 겨울과 여름으로 나누어 한해에 걸쳐 펼쳐졌다. 하지만 그 오사카 전투에서조차 이에야스는 싸울 마음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도요토미 가문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기 위해 상당히 정교한 수단을 사용했다.
(23.8.20, 일요일 22:46 오후 낮잠에서 깨어 14:00 부터 지금까지 집자한 내용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왜 하나뿐인 이 인터넷 선은 가끔씩 모든 것을 날려버릴까?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울고 싶지만..., 처음도 아니어서 그리 괴롭지만도 않다. 다만 오늘 하루종일 '정치력'에 대하여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는 걸 위안삼으면 될까? 도중에 도중에 '확인' 클릭을 하자고 얼마나 맹세했던가. 하지만 조금 좋아지자 또 잊고 말아 아!!! 허무한 오후와 밤의 시간들이여~~~~ 나는 175 page <도요토미 정권에서 소외당하는 후다이 다이묘>까지 집자했었으나 다 날리고 말았다ㅜㅜ)
(오늘 23/8/22, 오작교 견우직녀가 만나는 날. 세알려보니 무려 40page. 허어~~~~ㅜㅜ
도요토미 정권의 내분,
드디어 표출되다
도쿠가와 vs. 도요토미가 아닌,
이에야스파 vs. 반反 이에야스파의 대립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 권좌를 두고 다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파와 이시다 미쓰나리파가 세키가하라에서 1600년 10월 21일 결전을 벌인 전투. 이날 하루만의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를 거두면서 사실상 확고부동한 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마련했다.
도요토미 정권의 5명의 다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도시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5명의 부교: 아사노 나가마사, 마에다 겐이, 마시타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나쓰카 마사이에.
우선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정권을 지속시키고 싶어 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제외한 9명이다.
정권의 핵심에는 없어도 중요한 히데요시의 후다이 다이묘(세습되는 다이묘) 들이 많이 있었고, 가토 기요마사나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같이 히데요시가 어린 시절부터 키운 다이묘도 많았는데 그들도 당연히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도요토미 정권의 지속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히데요시의 다이묘들 대부분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그 승리에 공헌했다. 즉 이에야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이묘는 도요토미 정권의 지속을 승낙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는데도, <이에야스파 vs. 반이에야스파>라는 다른 기준이 제시되면서 정확히 두 불류로 나누어지고 말아서 그것이 세키가하라 전투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도요토미 정권에는,
사람이 없었다
현실적으로 히데요리는 5살짜리 어린 아이다.
정치적 리더란 체제변경이나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사람이자 자원이나 보수를 분배하는 사람이다. 히데요시가 죽기 7년 전 사거한 도요토미 히데나가라면 충분히 그 역할을 완수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세상에 없다. 가능성이 높았던 건 마에다 도시이에. 하지만 그의 몸에 이미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위법행위를 한이에야스와 화해한 순간,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는 결정된 셈이다
히데요리의 성인식까지 10년간 현상만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한 경우에 반이에야스파는 제2의 <이에야스의 정치력 저하>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최고 법규, 혹은 헌법이나마찬가지인 히데요시의 유언에서는 다이묘 간의 왕래조차 제한되어 잇었으므로 다이묘 간의 혼인은 확실히 위법이었는데도 이에야스는 유력 다이묘와의 결연을 강행했다. 이때 문책사가 이에야스를 방문하였지만 이에야스는 잊어버렸다며 시치미를 뗐다고 한다. 뻔한 핑계를 댄들 위법은 위법이다. 결연은 백지로 만들고 이에야스의 책임을 묻는 것이 이에야스를 제외한 4명의 다이로와 5명의 부교가 취해야 할 태도였으나,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에야스 다이묘와 그리고 이에야스와 대치하고 있었던 생전의 마에다 도시이에파 다이묘가 후시미성과 오사카성에 집결하여 서로를 상대로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드디어 정권 내에 있던 세력들의 반목이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마에다 도시이에와 가깝고 이에야스와도 가까운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알선으로 둘은 만나서 화해했다. 이에야스는 위법행위 당사자이므로 화해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버티지는 않았을 것이나, 이미 죽음이 눈앞에 닥친 마에다 도시이에는 왕년의 패기가 없었으므로 애매한 결착을 수용헐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야스는 어떻게 도요토미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었나
위법행위를 한 권력자에게
모호한 처분을 내리면 그 권력은 더 세진다
그렇다면 그 밖에 이에야스의 정치력 저하를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는가.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이에야스의 죽음뿐이었다. 진즉에 톱니바퀴는 이에야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야스가 다이묘와 인연을 맺은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는 혼란을 일으켜서 도요토미 정권을 뒤흔들기 위해서고, 또 하나는 여차하는 경우에 대비해 자기편을 심어두기 위해서다. 그야말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다.
자신의 세력권 내에서 일어난 사건을 방관하면
권력을 잃게 된다
1599년 윤년 3월 반이에야스파의 우두머리격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거한 바로 그날 밤에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마사노리를 위시하여 7명의 무장에게 습격을 받았다.
미쓰나리는 후시미 성 안에 있는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미쓰나리를 쫓아온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한 무장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어 후시미에 있던 이에야스가 중재를 한 것이다.
이때 이에야스는 첫째, 미쓰나리를 방치한다.
둘째, 쌍방을 처분한다. 셋째, 중재하여 미쓰나리만 처분한다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
미쓰나리를 방치하면 미쓰나리가 사라져서 이에야스가 이득을 얻을 것이라고 예측하겠지만 실은 다르다. 방관하다가는 후시미성을 담당하는 수상으로서 한 일이 없다는 비판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미쓰나리를 죽이도록 두면 앞으로 이에야스는 그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잃는다.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후시미성에서 적군이든 아군이든 제멋대로 굴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정치력의 기본이다.
자신의 반대파까지 끌어들이는
이에야스의 복잡다단한 정치력
미쓰나리에게서 부교의 지위를 빼앗고 그의 영지인 오미 지역의 사와야마라는 산으로 은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처분은 매우 이상하다. 애초에 분쟁을 일으킨 것은 습격한 가토 기요마사측이고 미쓰나리는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이 없다. 그런데도 미쓰나리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다. 상당히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내려졌다. 예전에 내려진 어느 처분이 취소된 것이다. 과거 미쓰나리파인 후쿠하라 나가타카 측에서 조일전쟁의 상황을 보고했다. 요점은 가토 기요마사나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명령위반과 태만에 관한 부분이다. 히데요시는 격노하여 조선에 있던 가토와 구로다를 탄핵하고 견책했다. 하지만 미쓰나리가 은퇴한 후에 당시 히데요시의 견책은 착오였다는 이유로 처분이 취소되었다. 말하자면 가토 측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결정은 미쓰나리가 이에야스의 중재로 관직에서 물러난 지 10일 정도 후에 내려졌다.
반이에야스 측에는
이에야스를 능가하는 지도자가 없었다
(8/22일 21:51, 눈이 피곤하여 오늘 집자를 終하려 한다. 오늘새벽부터 일주일간 비가 온다고 했는데, 낮엔 비가 '오락가락' 왔다. 비오다가 맑다가ㅎ 지금 바깥엔 거의 소낙비 수준으로 폭우가 쏟아지더니 가랑비로 변하였다. 점심엔 흑미.보리.찹쌀밥을 참치찌개와 먹었다. 조금 싱거웠으나 투정부릴 계제가 못된다. 너무 고맙고 편했다. 내 휴게실 창 밖엔 도시의 야생복숭아가 제법 반주먹쯤하게 커서 색갈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다. 소방설비 작동점검 지적사항을 실행하고 있는데 2동 17~18라인 쪽 5층이나 6층은 한증막처럼 저절로 땀이 해어 흘러내렸다. 저층 아파트의 비애가 바로 이런 거 아닐까? 오늘은 또 범석이 영애 결혼식 축하메세지를 초딩 톡방에 올렸다. 칠월칠석 견우직녀가 만나는 날이라 비가 오는가! 옛 선인들은 참으로 아름다운 성정의 소유자인가 보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애타고 흡족한 스토리인가. 1년에 한번밖에 만날 수 없다니. 그리고 까치가 다리를 만든다하니....... )
(23.8.23, 수욜. 종일 소낙비와 일반비 뒤섞여 내림. 2F 탈의실에서 지붕위로 떨어지는 비비비빅~~~ㅎㅎ(처음엔 따닥따닥으로) 소리에 마음은 머언 곳의 해물파전네로 달음질치더라.
아침산책은 계양문화회관 위로 갔다. 숲의 데크를 통하니 장미공원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수량이 풍부한 옛 약수터에서 청수로 얼굴과 발을 씻는다. 7:55에 집 도착. 차려진 밥을 먹으면서 '오늘같은 날은 포천의 어디쯤을 걸으면 좋겠구나! 하는생각이 어렸하게 둥실 뜬다. 복숭아가 살빛을 띠어가면서 비를 맞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니 또 나는 내 몸을 떠나 어디론가로 떠나고 싶어지더구나. 어제는 칠월칠석.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었고, 오늘은 '처서'. 여름이 지나 더위가 한풀 꺽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 2주가 지나면 '백로'. 가을 기운이 완연하고 농작물에 이슬이 맺힌다는 뜻. 백로는 이슬을 아름답게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이에야스가 다음의 목표로 삼은 사람은 마에다 도시이에의 적자인 마에다 도시나가와 우에스기 가게카쓰다. 그들에게는 간단히 말해서 모반의 의심이 있다는 트집을 잡고, 모반의 의도가 없다면 증거를 내보이거나 태도로 표시하거나 인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마에다 도시나가는 이에 따랐다. 친모를 인질로 보낸 것이다. 반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이에야스에 반항했다.
이에야스가 마에다와 우에스기를 노린 이유는 그들이 도요토미 정권의 다이로이자 각각 80만석과 120만 석에 이르는 거대한 영지의 소유자이자 이에야스와 대적할 수 있는 다이묘였기 때문이다.
이에야스는 우에스기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아서 그를 토벌한다는 구실로 우에스기의 영지인 아지즈로 향했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이시다 미쓰나리를 중심으로 한 반이에야스파가 궐기했다. 드디어 세키가하라 전투로 돌입한 것이다.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를 통해 반이에야스파의 다이묘를 대량으로 숙청하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그 다음에는 도요토미 가문에 대해 거리낌이 없었다. 재빨리 정이대장군으로서 막부를 열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오사카성을 떠나 어디든 다른 나라의 다이묘로 살아가라." 고 명령했지만 이를 거절하자 '오사카 전투'를 벌였다.
"권력을 싫어하는 사람은 권력을 얻을 수 없다."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반이에야스 측의 정치세력 내부에 이에야스를 능가하는 <정치적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부
세키가하라 전투,
정치력의 다양한 모습이 드러나다
ㅡ사람을 움직이지 못한 우유부단한 정치력,
명분과 실리를 갖추지 못한 정치력
시바 료타로의 소설 『세키가하라』에서 이시다 미쓰나리는 지식인이자 충성스러운 무사로 그려지고 있다. 미쓰나리가 뛰어난 행정관이었다는 증거는 많다. 또한 패전한 탓에 처형되고 말았지만 위험을 무릎쓰고 이에야스를 무찌르려고 한 결연한 모습으로 인해 <미쓰나리 충의설>이 강력하게 주장되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분투하고 분전한 서군의 장수 중에서도 특히 활약한 사람은 우키타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오타니 요시쓰구, 그리고 이시다 미쓰나리의 군대였다. 싸움에 약하고 심지어 싸움을 경멸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어째서 그토록 싸울 수 있었을까.
미쓰나리의 롤 모델은
오직 도요토미 히데요시뿐
미쓰나리는 오케하자마 전투가 일어난 1560년에 오미 사카타군 이시다촌에서 태어났다. 출신은 토착무사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어린 미쓰나리는 어느 절의 동자승이 되었다.그때 매사냥을하다가 목을 축이러 절에 들른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다. 미쓰나리는 얼른 첫 번째 잔을 내밀었다. 미지근했다. 히데요시는 두 번째 잔을 청했다. 처음보다 살짝 뜨끈한 차가 절반 정도 있었다. 히데요시는 호기심이 생겨 세 번째 잔을 청했다. 이번에는 뜨거운 차가 조금 있었다. 히데요시는 절의 주지에게 부탁하여 미쓰나리를 자신의 시동으로 삼았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주코쿠를 정벌할 때의 일이다. 히데요시는 공훈을 세우고 하리마, 다지마의 2개 국을 얻었다. 그래서 자신의 가신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미쓰나리에게도 녹봉 500석을 늘려주었다. 그러자 미쓰나리는 히데요시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과분한 상에 감사합니다만, 가능하다면 우지가와, 요도가와의 두 강가에 자라는 갈대의 수확에 관한 징세를 맡고 싶습니다.만약 허락하신다면 지금 바로 녹봉 500석은 반환하겠습니다."
미쓰나리는 징세권을 받을 수 있다면 녹봉을 반환할 뿐 아니라 1만 석 상당의 군역까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 약속을 훌륭하게 지켰다고 한다.
단 하나,
미쓰나리가 히데요시에게 물려받지 못한 것
천하를 장악하고 오사카성에서 여러 다이묘에게 신년인사를 받을 때의 일이다. 여러 다이묘는 설날 미명부터 오사카성에 모였다. 정월에 천 다다미나 되는 드넓은 공간에 모였으므로 상당히 추웠다. 다이묘들이 거의 모였을 무렵에 히데요시가 잠옷 차림으로 등장했다.
"모두 상당히 일찍 왔군. 오늘 아침은 너무추우니 우선은 불을 쬐고 술을 마시면서 몸을 데우시게."
이렇게 말한 히데요시는 시동들이 준비한 따끈한 술을 직접 다이묘들에게 나누어주고 "이제 마저 준비하고 나오겠네." 라는 말을 남기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후에 정장으로 갈아입고 다시 나타나서 신년인사를 받았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이 된다. 잠옷 차림은 감각적으로 거의 나체에 가깝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옷을 갖추어 입는 것보다는 다이묘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히데요시에게는 갖추어져 있었다.
이러한 재주는 미쓰나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에게는 생기지 않았다.
한편에는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다른 한편에는 인간적인 유대를
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은 "어째서 이런 간단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지?" 라며 타인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조직에 충실한 수재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조직의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된다며 경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항하는 사람을 배제시켜 조직을 아무리 순화하려 해도 조직은 강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순화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반이 약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특히 정치적인 조직은 한편에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갖추고, 다른 한편에 <인간적인 유대>를 갖추어야만 강한 조직이 된다.
소외당한 히데요시 가신들의
정치적 선택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뛰어든 정치적 이유
첫째, 이에야스의 정치력이 저하되거나 세력이 사라져버리면 다시 중앙정권으로 돌아올 수 있다.
둘째, 이에야스가 천하를 손에 넣으면 미쓰나리의 정치력이 사실상 소멸되고, 도요토미의 후다이 다이묘에게 원한을 하고 있던 미쓰나리가 또다시 습격을 받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셋째, 도요토미 정권이야말로 미쓰나리의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무대이다.
(다시 또 '도요토미 정권에서 소외당하는 후다이 다이묘' 로 시작한다. 23.8.24 목요일. 어제는 종일 비. 점심 때 선풍기를 안 틀고 처음으로 밥을 먹었다. 지금 07:05, 역시 선풍기를 틀지 않고 문을 닫았다. '처서'의 위력인가!
출세는 못했어도 유능했던 가신들
도도 다카토라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이에야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제외.
호소카와 다다오키는 호소카와 유사이의 아들로서 당시의 다이묘 중에서는 정상급의 교양인이기도 했다. 마에다 도시이에가 살아 있었다면 그대로 도요토미 가문을 지탱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어릴 때, 아버지인 구로다 요시타카가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했다는 오해를 받아서 인질이 되어 죽음을 당할 뻔 했는데 히데요새ㅣ가 다케나카 한베에와 짜고 몰래 숨겨주었다.
아사노 요시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어린 시절부터 히데요시에게 키워져서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이시다 미쓰나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치스카 이에마사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담했지만 출정하지 않았고, 이후에 오사카 전투에서는 바다가거칠다는 이유로 다시금 영지인 아와에 틀어박혀 오사카 공성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즉 이들은 방치되어 있던 도요토미 후다이 다이묘라고 해도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데다가 앞뒤를 분간하지 못하는 보졸과 같은 무리가 아니라 문인으로서, 그리고 행정관으로서 영지 경영에도 탁월했다.
미쓰나리를 제거해야 우리가 산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목적이 자신의 정치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이에야스를 공격하는 것인데 반해, 도요토미 후다이 다이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이 참전한 목적은 자신들의 정치력을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미쓰나리와 그 파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에야스 측인 동군에 가담하는 것을 도요토미 후다이 다이묘는 그다지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만에 하나 미쓰나리와이 결전장에 적군의 대장으로 이데요리 공이 출마한다면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점에서 망설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는 기우로 끝났다. 정작 히데요리 측에서 만에 하나 히데요리가 출마하여 패전하게 된다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지를 걱정한 덕분에 전장에 출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청이 있어도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는 이기려 해도 이길 수가 없다.
모리 데루모토의
우유부단한 정치력
배신과,
적과의 내통으로 패전하는 반이에야스파
난구산에 포진한 병력의 선봉에 깃카와 히로이에가 위치했다. 즉 모리 전군의 선두에 깃카와 히로이에의 부대가 있었던 것이다. 개전 후에 모리 히데모토는 즉시 산에서 내려와 싸우려고 했지만 선두에 있었던 깃카와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미 이에야스와 내통하고 있었던 깃카와가 싸움을 방관했기 때문에 모리만이 아니라 후위에 있던 서군의 나쓰카 마사이에나 조소카베 모리치카의 군대도 움직일 수 없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개전 전에 이에야스에게 "모리 데루모토는 히데요리 공을 지키기 위해 오사카성에 들어갔으므로 이시다 미쓰나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에야스도 "데루모토가 전혀 관여하지 않아서 만족한다." 고 답했다.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이에야스는 2개 국을 주기로 했다.
모리 데루모토,
갈팡질팡 정치력의 소유자
무딘 통찰력이 초래하는 치명적인 결과들
많은 자료에서 모리가 크게 영지를 잃은 책임을 이에야스와 내통한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돌리고 그를 악인으로 취급하고 있지만 의문을 금할 수 없다. 적어도 히로이에는 데루모토의 미적지근한 부분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이에야스에게 조치를 강구하지 않았을까. 물론 전쟁 후에 자신의 공명을 포기하고 주군의 2개 국 보전을 우선한 히로이에는 만일 그런 경우가 있었다고 해도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전장에서 도망친 이유도 오사카성에 도착하면 거기에서 다시 한번 전투를 벌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루모토는 싸우지 않고 오사카성에서 철수했다. 8개 국이 안정되고 도요토미 가문이 평화롭다면 아직 천하를 노릴 기회가 있다고 예상한 탓이다. 이렇듯 정치적인 선견지명이 날카롭지 않으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리더가 뛰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출중한 부하라도 성공할 수 없다
리더는 어떻게 하면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반면 부하는 어떻게 하면 그런 리더를 지원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항상 "이 리더를 따라도 괜찮을까?" 라고 자문한다. (중국 초한지의 '한신'이 떠오른다)
그러므로 깃카와 히로이에가 이에야스를 따르도록 리더인 모리 데루모토를 유도한 것은 그야말로 부하로서의 판단이며 이 자체는 비난할 수 없다. 안코쿠지 에케이가 서군의 총대장으로 모리 데루모토를 추대한 것도 부하로서의 판단이므로 특별히 문제가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부하의 발상밖에 하지 못하는 리더,
모두를 망친다
"나는 천하를 장악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서군의 총대장이 된다." 이는 훌륭한 자세다.
"나는 천하를 장악할 만한 그릇이 아니다. 이번에는 일단 철수한다." 이도 훌륭한 자세다.
하지만 정치정세를 살피는 와중에 "천하를 얻고 싶지만 그럴 자신이 점점 없어진다. 역시 그만둘까?" 라는 자세는 최악이다.
모리 데루모토는 "이에야스에게 질 듯하면 그를 따라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이에야스가 뛰어나면 이에야스를 따른다."는 것이다. 이에야스라는 리더에게 순종할지 말지가 기준이 되어버려 자신이 천하를 지배할지 말지는 2차적인 문제가 되었다. 적군인 이에야스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가상의 리더가 된 것이다.
주장을 바꾸거나 정당을 바꾸는 등 여기저기 떠도는 정치가가 종종 눈에 띄는데 그런 정치가는 정치의 현장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난 지 3년후인 1603년에 이에야스는 에도에 막부를 열고 정이대장군이 된다. '실리'만이 아니라 '명분'으로도 천하를 장악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는 명분과 실리가 모두 갖추어지지 않으면 정치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아름다운 패배자 vs.
추악한 승리자
아름다운 약점; 오타니 요시쓰구
(23.8.24, 08:08 아침집자 終. 출근하자!ㅎ)
(23.8.24, 21:05 그렇다면 어째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친구라고 알려져 있으며 나중에 미쓰나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오타니 요시쓰구가 오래전부터 이에야스파일 수 있는가. 그리고 어째서 이에야스파인 오타니 요시쓰구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미쓰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친 걸까.
언젠가 오타니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데 사람의 생피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 직후에 교토에서 칼부림이 횡행하자 범인은 오타니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체포하여 자백을 받자고 진언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히데요시는 개의치 않고 웃어넘겼다. 그 이야기를 닫고 요시쓰구는 감격하여 히데요시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다며 조선 출병에도 자원했다고 한다.
무언가 기분이 상하는 일을 접하면 그 자리의 상황은 무시하고 불같이 화를 낸다. 이른바정신을 놓는 것이다. 이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때 종종 보이는 행동이다. 조직이나 사회, 주위 사람에게 응석만 부리는 매우 약한 인간은 정치적 리더에 가장 부적격한 유형 중 하나다. 연령이나 외견은 관계가 없다.
게다가 <신념의 정치가>라는 가면으로 위장하므로 구분하기가 더욱 어렵다. 무턱대고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고 걸핏하면 화를 내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요주의다. 그릇이 작은 정치가 중에서 정말로 이런 유형이 많다.
여담이지만 이런 정치가에게는 소수이지만 <팬>이라고 할 수 있는 숭배자가생긴다. 왠지 깊은 사고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듯이 미화되어 마치 세상을 바꿀 구세주와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냉정하게 돌아보면 정치를 이용하여 축재하고 그저 자기만족을 위해 권세를 휘둘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막상 가까이 있으면 눈이 머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차라리 귀여울 정도다.
"자꾸 말 안 들으면 진짜 화낸다!"
누구나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부모에게 들어보았을 말이다. 이를 언어가아닌 행동으로표출한 것이 히데아키 진지에 대한 이에야스의 일제사격이었다.
"이 이상 싸움을 방관한다면 혼쭐을 내주겠다!"
상대는 아이다. 즉효가 있었다. "아, 어떡하지. 내대신이 화가났다!" 라며 겁을 먹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눈앞에서 분전하고 있는 오타니 요시쓰구의 진지로 단번에 돌입했다.
다케다 신겐은 왜 그렇게
시나노 공략에 집착했던 걸까
가이의 주위에서 비옥한 토지를 찾아보면 이즈와 간토 방면에는 호조가 있고, 스루가와 도토미에는 이마가와가 있다. 그러므로중소 다이묘가 할거하는 시나노는 상대적으로 공략하기 쉬웠다. 다케다 가문이 시나노 공략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 시대부터다.
시나노공략에서 신겐이 아버지의 노선을 따른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당시 가이에서 교토로 향하는 노정 중에 동해측으로 빠져나오는 방법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겐페이 시대에는 교토에서 동쪽으로 향하는 주요 통로가 동해 경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당초 국력을 증대하기 위한 시나노 침략이 결과적으로 신겐의 <수도 교토를 향한 야망>과 합치되는 전략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나노를 제압하여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약한 이마가와를 침략하고 호조와 일시적인 동맹을 유지하여 후일의 불안을 없애면서 미카와의 도쿠가와를 쫓아버리고 서쪽으로 올라간다. 그렇다. 지금 생각해도 합리성이 있는 전략이다. 하지만 싸움은 항상 오판의 연속이었다. 다케다 신겐의 최대 오판은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자신의 소원에 스스로 구속되다
강하다. 우에스기 겐신은 싸움에 강한 데다 초자연적으로 느껴지는 카리스마도 있어서 용이하게 정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조차 단숨에 굴복시킨 다케다 군대가 우에스기 겐신만은 공략하지 못하고 끝난 것이다. 아마도 신겐은 상당히 시간이 지난 단계에 이르러 우에스기가 얼마나 강한지를 이해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다섯 번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도 손에 넣지도 못한 채 결국 방향을 전환하여 서쪽으로 올라갔다.
주위를 적이 둘러싸고 있으면 수도 입성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당한 이야기다. 오다 노부나가조차 배후를 걱정하여 다케다 신겐과의 우호관계를 필사적으로 연출했다. 신겐의 딸과 노부나가의 적자인 노부타다의 혼인 등.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미카와를 후진으로배치하고 오다 노부나가 자신은 얼른 상경했다.
신겐도 인재 중에 신뢰할 수 있는 가신에게 시나노를 맡기고 자신은 쇠약한 이마가와를 구축하여 재빨리 서쪽으로 향해야 하지 않았을까.
시나노 공략부터 북간토 진출까지 다케다의 비장한 소원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이것이 수도 입성이라는 목적에 합치한 정책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다소 비약이 있기는 하지만, 예를 들어 현대 일본에서 영구평화는 소망이자 이념이자 이상이다. 하지만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평화라는 이념이 아니라 전략적인 외교나 우호관계의 수립, 국제공헌, 방위 등의 정책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평화는 염원이며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외교, 방위와 같은 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다케다 신겐에게 시나노 공략은 소원이었는지는 몰라도 수도 입성이라는 목적과 합치한 정책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다케다 신겐의 시나노 공략은 실패로 가는 노정이었다.
노부나가 포위 작전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
과연 중소세력들이 동맹을 맺어
거대 세력 노부나가를 대적할 수 있을까
다케다 신겐이 교토로 가려고 한 직접적인 이유는 혼간지의 주지 겐뇨가 <노부나가 징벌>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히에이산 엔랴쿠지에서도 같은 요청을 해왔다.
다케다 신겐은 이미 반 노부나가 세력의 상징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그 이유는 가이, 시나노, 북간토, 스루가라는 거대한 영토를 획득한 실력파 다이묘로서 용맹을 떨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겐에게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도 "노부나가를 무찌르라." 는 밀서를 보내면서 싸움의 대의명분이 갖추어졌다.
<노부나가 포위망>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모략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알려져 있고 또한 이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다케다 신겐은 교토 입성에 즈음하여 독자적으로 호조와 동맹을 맺고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나 이세 나가시마의 잇코슈 교단 등에 공동작전을 촉구했다.
그러나 신겐이 상경 도중에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이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하나의 큰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중소세력이 동맹을 맺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성공과 실패의 열쇠도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리더가 실력과 지도력이 있는가.
둘째, 중소세력이 같은 방향을 향해 공동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셋째, 최종적인 정책 목적이 분명한가.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대항해야 하는 강적 A가 있다고 하자. 혼자서는 어려우므로 여럿이 A를 혼내주자고 합의한다. 드러나드디어 싸움이 시작되는 단계가 되면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
"가능한 나의 피해는 줄이고 싶다."
사전에 모여서 상세하게 합의했다면 그런대로 괜찮겠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움직이고 나면 그때 슬슬 움직여야지."라고 눈치만 살피다가는 A에게 각개격파를 당하고 만다.
침묵하는 100명보다
행동하는 5명이 강하다
하지만 다케다 신겐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반노부나가 진영의 대표가 되었던 우에스기 겐신은 계절로 인해 움직이지 못한다는 제약에 시달리고 있었다. 리더가 불규칙적으로 근무한다면 군대는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수 없다. 이렇듯 우에스기 겐신을 중심으로 한 제2차 노부나가 포위망은 신겐을 중심으로 했을때와 마찬가지로 군대의 지휘관인 우에스기 겐신의 사망으로 인해 사실상 끝이 나게 된다.
과연 전쟁이나 정권 탈취를 특정한 개인이 업적으로 찬미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 한 사람의 힘에 의해 나라를 움직인다는 것은 몽상에지나지 않는다. 책략을 세우는 인재, 수족이 되어 움직이는 인재, 그리고 찬동하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나라도, 정치도 움직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세력이나 조직도 그 축이 될 만한 인물이 없다면 기능을 발휘하지 못 한다.
노부나가를 다룬 소설에서도, 히데요시를 다룬 소설에서도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자존심만 센 무능한 쇼군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정치적인 움직임을 보면 무능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노부나가 포위망은 앞서 설명한대로 붕괴되고 말았지만 처음에 가케다 신겐을 주축으로 했을 때도, 다음에 우에스기 겐신을 의지했을 때도 오다 노부나가는 상당한 압력을 받고 그에대한 대응에 많은 힘을 사용해야 했다.
노부나가의 기세를 멈추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이 포위망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노부나가의 반대 세력이 일시적으로로도 결집하는 동시에 노부나가에게 대적하게 만든 정치공작은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자손심만 센 무능한 쇼군>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어느 총리대신처럼 재빨리 사직하고 도자기를 빚는 것이 아니라(호소카와 모리히로 전 총리는 정계 은퇴하고 도공이 되었다) 끈질길 정도로 정권탈취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한테는 정치가로서의 대단한 집념이 느껴진다.
유력한 다이묘인데도
왜 천하를 얻지 못했을까
애초에
천하를 노릴 마음이 없었다
전국시대 초기의 대표적인 다이묘로 호조 소운이 있다. 소운은 인간의 평균수명이 50세 정도라고 하는 시대를 살면서 55세에 시골의 작은 성을 지키는 성주가 된 인물이다. 소운은 젊은 시절에 교토에 있으면서 아시카가 쇼군 가문을 섬겼다고 한다. 소운의 여동생이 이마가와 요시타다에게 시집을 갔으므로 이를 연줄로 스루가에 왔다.
요시타다가 전사하여 후계 경쟁이 일어났을 때 소운은 여동생의 아들인 이마가와 우지치카를 이마가와 당주로 만들기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 공적에 의해 55세에 스루가 동부의 12군을 다스리는 고코쿠지성의 성주가 되었다.
61세가된 1493년에 호리고에 구보를 토벌하고 이즈를 평정했다.
63세가 된 1495년 오다와라성을 공략하고 사가미로 진출했다.
80세가 된 1512년에는 사가미 동부의 가마쿠라로 진출하고 4년 후인 1516년에는 사가미 전역을 평정했다. 이때 소운은 84세였다.
여기까지가 최선이었다고 여겨진다. 나이가 들었어도 전국시대의 다이묘로서 활동을 멈추지 않은 것은 기적에 가깝다. 소운은스루가 침략을 기도하지 않았고오로지 동쪽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이는 천하의 정권을 탈취할 의도가 없었다는 가장 좋은 증거일 것이다.
정치란,
타인의 마음과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마음을 장악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중요한 상황에서 얼마나 사람이 배신하지 않고 곁에 있어 주는지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호의를 가진 중간층을 늘려야 한다." 정치는 인간이 인간에게 실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타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소운의 경우에는 전국시대이 다이묘로서 출발이 늦었고 천하를 노릴 의도가 없었기때문에 천하를 장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에 반해 사이토 도산은 나라를 손에 넣는 과정에서 인심이 떠나갈 만한 불의를 되풀이했기 때문에 천하를 장악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순식간에 저지르는 속도감이
없었다
오슈의 패자 다테 마사무네는 몇 가지 불리한 조건을 안고 있었다. 마사무네가 천하를 지배하지 못한 이유로 자주 지적되는 점이 '늦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마사무네는 1567년에 태어났다. 그때 노부나가는 미노를 공략했고, 히데요시는 스노마타성을 축조한 후에 연대장 정도의 지위에 올랐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노부나가의 딸을 장남의 아내로 맞아들이고 스루가 침공에 착수했다. 마사무네가 15세였던 시점에는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무너지면서 단숨에 히데요시가 천하를 장악하기 위한 무대에 뛰어들었다.
마사무네가 19세였던 1585년 덴쇼 13년에는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어 천하를 수중에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마사무네는 아버지인 데루머네를 납치한 무리와 싸워 승리했지만 아버지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이즈 방면으로 드디어 진출하려고 하고 있었다.
회의에서 이기는 사람은 결론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다.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 본다는 느슨한 생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절대로 정권을 잡을 수 없다.
6부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란,
공공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실현하는 사람들이다.
ㅡ거대 세력에 순종하지 않았던 약소 세력들의 굳은 정치력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장 두려워한 남자,
사나다 마사유키의 정치력
1614년 게이초 19년 10월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사자가 급하게 찾아왔다.
"유폐되어 있던 사나다가 고야산에서 빠져나와 오사카성에 입성했습니다." 오사카 겨울 전투를 눈앞에 둔 긴박한 시기였다. 도쿠가와는 손으로 잡고 있던 판자문이 덜컹덜컹 소리를 낼 정도로 떨기 시작했다.
"오사카에 들어간 사람은 아버지인가, 아들인가?"
아버지란 사나다 마사유키이고, 아들이란 사나다 유키무라다.
"아들인 사나다 유키무라입니다."
대답을 들은 이에야스가 그제야 진정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사실 입성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고야산에 연금되어 있던 마사유키는 이미 3년전에 병으로 죽었기때문이다. 물론 이에야스도 마사유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나다'라는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었던 것이다.
(8월에 들어서서 두번째로 주 소장이 오늘부터 휴가를 갔다. 오전 11시경까지 한가롭게 범석과 영배 흉도 보면서 내년에 양덕총동문회장이 우리에게 정해진 예기 등등. 전주임은 은행에 가고 없었다. 깨끗한 사무실에서 범석에게 "경리주임이 은행에 갔기에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중이다 라고 은근 상황이 좋다는 언질을 주는 기분이랄까. 3초소의 박중길 대원은 본인이 사무실을 지키겠다고 나에게 제안을 어처구니 없게 했다. 안된다고 말했다. 뒷터에 복숭아가 익었네요!! 오늘 처음으로 따먹어봤는데 속이 붉게 물들어 마치 석양의 불타는 노을같았다. 도시에서 이렇게 맛있는 야생복숭아를, 더더구나 거의 독점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하다. 내일 우이령길을 예약했다. 생전 처음으로 예약하고 실행한다. 얼마 전 삿갓재 대피소 대기예약을 했다가 취소한 경험도 있긴 하다. 현재시간 21:52, 금일 집자 終)
(23..8.27, 일욜 09:40 '우이령'을 다녀와서 행운이었던 추억은, 나는 아내의 "도중에서 포기하면 자존심이 상해요~~." 라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넘어 우이동 골짝에 내려갔다고 올라왔고, 맨발로 우이동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산객을 만나 "맨발로 다니니까 혈압이 떨어졌어요." 라는 말을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다. 훌라후프로 성공한 남자의 성공담을 얘기하는 아내로부터 아내가 5킬로쯤은 뺄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보았고, 아내와 숲속의 적당한 물을 찾아 알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울대고개의 '도토리묵집' 의 묵밥이 참 시원하구나! 새삼 그 가치를 새길 수 있었다. 잠시 후면 무남이와 석하와 서울투어를 떠나는데 그 전에 열씨미 몇 자 집자하려고 컴앞에 앉았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젊은 시절에 다케다신겐의 최측근 시종으로서 친위대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있었다. 신겐은 마사유키를 상당히 아꼈다. 우에스기 겐신과 치른 전투 중에 가장 격렬했던 4번째 가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신겐이 있던 본진까지 공격을 당하여 무사들이 뿔뿔이 흩어졌을 때도 마사유키는 절대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며칭송을 받고 있다. 나중에는 다케다 군대의 보병 대장까지 되었다.
마사유키는 두 명의 형이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했으므로 1575년에 사나다 가문의 대를 이었다.
사나다마사유키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했을 때 다케다 가쓰요리를 은닉하려고 했지만 결국 가쓰요리에게 의심을 받았다. 사나다보다도 고관인 오야마다를 믿는 편이 낫지 않을까라는 이유로 오야마다노부시게에게 의지한 가쓰요리는 그러나 결국 배신을 당하여 덴모쿠산에서 자결했다.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에 마사유키는 때에 따라 호조, 오다, 도쿠가와 등으로 갈아타는 정교한 외교전을 통해 사나다 가문의 자주독립을 지켰다.
적의 적은 아군
마사유키는 다케다 가문이 멸망하자 오다 가문의 중신 중 한 명인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복종한다. 이어서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다음에는 호조 가문에 복종하여 그 선봉이 되어 시나노 공략을 진행한다.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제의를 받고 호조에서 도쿠가와로 갈아탄다.
하지만 그 후에 호조 우지나오는 도쿠가와와 화친을 맺는 조건으로 사나다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영지인 조슈의 누마타를 넘겨 받았다. 1585년의 일이다. 이제 불쾌한 사람은 사나다 마사유키다.
"싸울까, 순순히 따를까?"
마사유키의 결단은 빨랐다.
"누마타는 내 스스로 얻은 땅이다. 주군에게 받은 땅이 아니다."
그리고 싸움의 준비에 들어갔다. 누마타가 3만 석 정도이고 우에다가 에도시대의 수입으로 7만석 미만이므로 대략 10만 석의 사나다 마사유키. 그리고 138만 석의 도쿠가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된 듯했다.
사나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즉시 숙적인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동맹을 맺고 이에야스에 대한 전면대결 태세에 들어갔다. 전년도인 1584년에 이에야스와 싸웠던 히뎅시와 동맹을 맺으면 좋지만 당시 히데요시는 표면상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필사적이었다. 물론 히데요시는 내심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세력의 강화를 바라고 있었다.
여기서 다카다 가문 시대부터 사나다의 숙적인 우에스기 가문이 등장한다. 우에스기 겐신은 이미 병으로 사망하여 가게카쓰가 우에스기 가문을 계승하고 있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는 1586년에 히데요시에게 복종했으므로 그전년도인 이 무렵에는 이미 이에야스를 견제하는 의미도 포함하여 히데요시와 친밀해졌다고 생각해도 좋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적(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우에스기 가게카쓰)은 아군>이라는 논리로 오랫동안 적이었던 우에스기 가게카쓰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우에스기와의 동맹은 곧 이에야스의 적인 히데요시와의 동맹도 의미했다.
거대 세력과의 싸움은
버티기만 해도 이기는 것이다
이에야스는 "고작 시나노의 시골 다이묘가 이 도쿠가와에게 맞서겠다는 것인가!" 라며 화를 내고 있었다. "사나다 따위는 단숨에 해치운다."
때마침 도쿠가와는 43세였다. 고생 끝에 드디어 천하를 훔쳐보고 있었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38세였다. 야심이 흘러넘치는 이 남자는 강대한 세력에 <투신>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 즈음에 보기 흉할 정도로까지 이에야스에게 아양을 떠는 도도 다카토라와는 수준이 다른 장대한 기대가 느껴진다. 여보! 준비해~~~ 응 10:04 세수하고 옷 입고 가자. 10:30 북촌마을 무나미네와 출발약속
(23.8.29, 수요일 18:42 북촌ㅋ 은 오후에 가서 '한식'으로 비싸게(십육만원 비용) 먹었다. 석하가 예약하고 주문하고 했는데..ㅜ 역쉬 먹는 장소 섭외는 아내와 내가 했어야 했다. 이후에는 그런 먼 곳, 혹은 서울시내에 갈 때는 우리의 경험치인 '사람 많고 잘 꾸며진 집'을 잡아야 함을. 사육신묘를 들러 성삼문과 칠인에 위패에 묵념을 했다. 義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추모했다. 그리고 노량진 컵밥거리는 눈팅만으로 만족. 딱지 뗄 뻔 한것을 용케 보았기로 아내.석하.소소가 뜀박질을 했다눈ㅋㅋ 난 뭐했을까요? 중앙대학교의 청룡을 구경하다. 대학이라는 곳. 내가 서울에서 자랐다면 대학에 갔을 것인데 시골에서 자랐기에 대학을 몰라도 너무나 몰랐구나! 뒤늦게 대학의 면목을 아는 비애랄까. 하지만 대학 나와서 나보다 못하게 사는 인간들 만만찮을 꺼 생각하면 다소간에 위로가 된다. 입구에 죽어가는 고목에 약물을 주사하는 모습. 죽음의 길에 들어서면 여간해선 되돌릴 수 없다. 전쌤이 이곳 약대출신이기도 해서 평소에 궁금하였고, 중앙대 연영학과가 또 유명하지 않은가! 오가는 청년들이 이지적이고 개성적이며 자기고집부리게 생겼더라~~ 점심값 비싸고 나이 많은 노인의 받기 싫은 서비스를 가까스로 받은 후 낙원동 천도교 주차장으로 갔다. 거기서 '동경대전'을 이만칠천원에 관리실장으로부터 사고, 그 후엔 사람구경, 외국여인 구경, 광장동시장에 가서 또 외국인들 구경 그리고 종삼6번출구로 가서 종삼육에서 맥주에 갈매기살ㅋㅋ 소소와 석하와 부딪히고 아내가 운전해서 사직터널로 해서 귀가하다. 아이들과의 돈 쓰는 여행이 육십넘어서서 무슨 재미가 철철 날까? 그러나 내가 여유가 있으니 아이들과 이런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붙들수도 있는 것이다. 딸과 석하에게는... 나 어릴 때 열살 많은 형이 '소요산' 놀러갈 때 데리고 가기로 해놓고 막상 그 날이 오자 나를 불러 "너는 따라오지 말아라~" 했을 때의 서운함은 지금 생각하면 '비애'에 가깝다. 비극에도 끼일 수 있는 사건이다. 내 인생에. 나는 그것을 경험했으므로 자식들에게, 동생에게는 비애를 느끼게 하지 말자고..
도쿠가와는 43세, 마사유키는 38세.
마사유키는 허세로 전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명확한 정책 전쟁목적이 있었다. 사나다 발상지인 누마타의 사수다. 만약 무리라면 가능한 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지전이라도 좋으므로 여하튼 싸움에 이겨서 이에야스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누마타에서 손을 떼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까지 도쿠가와를 따라서 호조와 싸웠는데 그 보상도 충분히 받지 못한 채 자신의 소유지까지 빼앗긴다면 웃음거리가 된다. 설령 그렇게 되진 않더라도 도쿠가와의 가신도 아닌 자신이 이런 대접에 만족한다면 이후에도 무리하게 어려운 문제를 떠맡게 될 것이 뻔하다. 그것만은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거개 세력은 방심하고,
약소 세력은 거대 세력을 동요시킨다
마사유키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첫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일전을 치른 후에 그 지위가 탄탄하지 않았다.
둘째, 자신이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믿으면 이에야스의 최대의 적인 도요토미는 간접적으로 자신의 후원자가 되어 도쿠가와가 지면 그만큼 유리해지므로 그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셋째, 자신의 병력으로는 도쿠가와의 본거지를 공격할 수 없다. 그러나 이에야스라는 최대의 다이묘와 싸워서국지전이기는 하지만 승리를 거둔다면 사나다 마사유키라는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다. 즉 싸움의 목표를 우에다성의 공방으로 한정하여 쳐들어오는 적만 분쇄한다면 도쿠가와가 있는 본진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목표(이에야스의 위신 저하)를 달성할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리이 모토타다와 오쿠보 다다요 등에게 7천 명의 병사를 맡기고 우에다로 향하게 했다.
마사유키가 동원한 병사는 1천 명 전후에 불과했다. 여기에는 다수의 농민병도 가세하고 있었는데 이에야스 측은 거의 7배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했다.
마사유키는 성의 동남쪽에 있는 간가와 앞에 2백 명 정도의 병사를 배치하고 "도쿠가와 세력이 오면 적당히 싸우고 금방 철수하라." 고 명령했다. 도쿠가와 군대가 오자 마사유키가 명령한 대로 2백 명의 병사는 즉시 후퇴했다. 도쿠가와 측은 그 뒤를 쫓아왔다. 마사유키는 그 동안 성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적군은 점점 성 밑까지 들어왔다. 하지만 저항다운 저항이 전혀 없었다.
"성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기회다. 단숨에 밀어붙여서 성을 함락하자!" 저항이 없으므로 사람이 적다고오인한 도쿠가와 세력은 성 밑으로 깊숙이 침투했다.
지금도 성 아래 마을은 길이 복잡하여 전망이 좋지 않다. 심지어 당시에는 싸움을 위해 도처에 울타리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드디어 성에서 보앤 신호를 받고 숨어 있던 3천 명에 이르는 사나다 측의 무장 농민병이 불을 질렀다. 이에 도쿠가와 세력이 한풀 꺽이자 마사유키는 몸소 5백 명의 병사를 이끌고 혼란한 도쿠가와 세력 속으로 뛰어들어 전멸에 가까운 성과를 올렸다.
최대 권력자와 싸워 이름을 날리다
영내 통치를 통해 드러나는 군주의 정치력
두 번이나
도쿠가와 군대를 물리친 사나다 마사유키
선정을 베푼 영주가
전투에서도 승리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농병분리 정책
편하게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면 타국에서 인구가 유입된다.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보장하고 관문을 철폐하여 지금으로 말하자면 자유화를 추진한다. 이렇게 인구가 늘면 농병분리도 가능하다.
나중에 오다 가문의 중신이 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가키가와 가즈마스, 아케치 미쓰히데는 본래 떠돌이였다. 특히 히데요시나 다키가와 가즈마스는 그 출신도 사회적으로 낮았다.
스러진 공관에 핀
향기로운 꽃과 같은
정치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인간적으로는 이해되는
이에야스와 가까웠던 오타니 요시쓰구는 동군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 가문을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시다 미쓰나리와의 우정에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부교이자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 반이에야스파인 서군의 수뇌 중 한 사람이었던 마시카 나가모리는 동군의 이에야스에게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고하여 이른바 소극적으로 서군을 배신했다. 그 공적으로 목숨은 구했다.
다케다 가문의 멸망은 책 한 권의 분량이 나올 만큼 분석할 가치가 있는, 조직 붕괴에 대한 교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다케다 가쓰요리는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있던 장수라고 한다. 가신단은 나가시노 전투를 거쳐도 여전히 강호였고 영지도 마지막까지 가이 일국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외교도 적극적으로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82년 덴쇼 10년 정월에 가쓰요리의 매제인 기소 요시마사가 배신하면서 그때부터 눈사태라도 일어난 듯이 중신이나 친척들이 속속 배신했다. 다케다신겐의 조카이자 중신인 아나야마 바이세쓰와 역시나 중신인 오야마다 노부시게 등이 배신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사쓰요리를 위해 싸운 무장 중 한 사람이 다케다 신겐의 5남인, 다케다 가쓰요리의 남동생 니시나 모리노부다. 다카토성의 성주인 니니사 모리노부는 노부나가의 공격을 당해도 이를 저지하며 분전하다가 결국 자살했다.
아마코 가문의 가신이었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가 모리에게 무너진 아마코 가문의 부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도리이 스네에몬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하인 나가시노성이 성주 오쿠다이라 노부마사의 가신이다.나가시노성이 다케다 가쓰요리에게 공격을 받자 몰래 빠져나와 노부나가와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도중에 가케다 군대에 붙들렸다.
"원군이 오지 않는다고 성내에 전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
요구를 들었지만 그와 반대로 원군이 온다고 성내에전했기 때문에 책형에 처해졌다.
죽음이 눈앞에 닥쳐서 피할 수 없더라도 죽는 방식에는 의미가 있다. 만약 삶도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떨까. 무언가를 버리고 삶을 선택할까. 그렇지 않으면 삶을 희생해서라도 그 무언가를 수호할까.
<정치>라는 단어는 본래 "힘(권력)을 통해 공공의 이익을 실현한다."는 의미를 내표하고 있다.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면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는 것이 정치가가 가져야 하는 자세가 아닐까.
이해득실이나 생사를 초월하여 행동한 전국시대의 무장에게 우리가 끌리는 이유는 자신을 희생하여 공공의 이익을 실현하고자 한 그들의 고귀한 정신이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역사를 장식한 화려한 영웅이 아니라 스러진 공관에 늠름하게 핀 향기로운 꽃과 같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희생을 꺼리지 않았던 무장들이야말로 본래의 의미에서가장 정치적인 사람들이었는지도 모른다.
ㅡ2023년 8월 31일, 04:20 집자 終(곧 4일 휴가로 춘천을 향한다. 신숭겸과 183명의 박사를 배출했다는 '서면' 방동리 금산리 등을 돌아보고자 한다. 과연 명당은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연의 소산인가. 2주일 정도 오락가락 내렸던 비가 그친 오늘이다.).
<정치>는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 곁에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 그제는 형의 생일이라서 "생일이니까 좋네, 돈이 들어오고..." 라고 말하는 형과 통화하면서 포용심 좀 있으시라고 넌지시 말씀 드렸다. 동생들이 다소 밉더라도. 어찌보면 철없는 남자, 그는 삐짐이 늘 꿈틀이는 한 어린애다. 그 다음날인 어제 동생은 축하 카톡에 답글조차 없이 침묵하고 있다. 나는 명례누나에게 말했다. 누나는 "니가 내 생일에 축전이 없었으므로 나도 니 생일에 축전을 생략하련다." 고 그 전일인 형의 생일 때 카톡에 비정치적인 언어를 기입했었다. 그래서 내가 개입하여 누나는 결국 "막내야 생일 축하한다." 고 썼다. 그러나 아우의 답글은 끝내 없었다ㅜㅜ
아아, 이 책을 읽으니 정치는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동생이 지금 이런저런 실망으로 삐져 있으니 어케 수습하십시요.. 라고. 이 녀석이 이장 됐다고 누나.형을 우습게 보나? 벌써 그런 서운함이 먼저 표출되기도 한다. 나흘 후에 벌초하니 옥계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 정치로 풀면 되리라ㅎ.
첫댓글 또... 두번째로 또 날라갔네요~~
하지만
이걸 어캐 병원으로 데불고 가야하남
확실히 문제가 있긴 함을 내게 각인시키넹
오늘 하루 비가 많이 온 날,
탈의실 너머 도시의 복숭아빛이 훤해지고
비비비비빅~~~ 내리는 빗소리 따다닥따다닥 하기도 하는 듯하고
오늘 7년만에 민방위훈련의 날
다시 신 냉전이 오고 있음을 윤성열은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걸까?
후쿠시마 오염수도 일본의 나팔수가 되어주며
우리나라가 일본미국중국러시아와 비슷한 파워가있는줄로 아나베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가!
어찌보면 또 이 민주와 공산의 맞대결이 맞는 거 같기도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