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서울문학기행
-2018년 제5회
일시: 2018년6월 7일(목)
주최: 서울특별시
주관:사)국제PEN한국본부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서울문학기행
(2018년 제5회)
■ 일 시: 2018년 6월 7일(목)
■ 장 소: 덕수궁, 이황 고택터, 김장생 생가터, 배재학당박물관,
안중근기념관, 김소월 시비, 정약용 동상
■ 참가자: 서울시민과 문인 45명
■ 강 사: 김경식 (시인)
1960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문학과 역사, 지리를 집중 탐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85년부터 '역사가 있는 문학기행'을 시작했으며,
학교 및 단체에서 수백 회의 인문학기행을 진행했다.
저서로 <사색의향기문학기행>,<서울문학지도>외 다수가 있으며,
중학교 1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지학사)에
문학기행 <이병기시인을 찾아서>가 게재 되었다.
2만권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에서 문학특강, 서울예술의전당에서 인문학 강의를 하였다.
몇 년간 서울문화재단 주최의 <서울문학기행>을 진행하였으며,
2013년부터 서울특별시가 주최하고, 국제PEN한국본부가 주관하는
<서울시민과 함께하는 문학기행>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진행 및 안전: 이애정 (시인, 국제PEN한국본부 간사)
이다경 (시인)
■ 문 의: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처
전화: 02)782-1337~8
메일: admin@penkorea.or.kr
주최:
주관:사)국제PEN한국본부
■ 세부일정표
2018년 6월 7일(목)
09:50~10:00 덕수궁 대한문 집결
-자료집, 명찰 제공
10:00~10:30 덕수궁 탐방
10:40~11:00 퇴계 이황 고택터/ 사계 김장생 생가터
11:10~11:50 배재학당박물관-배재 출신 문인 조명
12:00~12:40 점심식사- 할매보쌈 시청본점(02-754-4353)
12:40~13:00 시청역 2번 출구 버스(서울고려관광)탑승 남산으로 이동
13:00~14:30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소월시비
정약용 동상
14:30~15:00 서울역/ 광화문으로 이동 해산
■ 일정에 변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 문학기행 답사기
- 덕수궁, 이황고택, 김장생 생가터, 배재학당,
김소월 시비를 중심으로
김경식(시인. 국제PEN한국본부 사무총장)
■ 경운궁(덕수궁)과 월산대군
경운궁(덕수궁)은 조선왕조의 영광과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경운궁이 역사의 무대로 등장한 것은 임진왜란 때다. 임진왜란 직후 화마로 잿더미만 남은 한양에서 제14대 임금 선조(宣祖)는 월산대군의 옛집에 몸을 의탁한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곳도 이곳이다. 광해군은 궁을 넓히고 ‘국가의 운은 경사스럽다’라는 뜻으로 ‘경운(慶運)’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경운궁(덕수궁)은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곳이며,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장소다. 경운궁은 별궁과 정궁 사이를 오가며 왕을 모셨던 궁이다. 1907년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다. 이 무렵 경운궁은 ‘왕이 오래 살도록 기원한다’는 ‘덕수(德壽)’로 명칭이 바뀐다. 경운궁은 본래 월산대군 이정(1454~1488)의 저택이었다. 그는 덕종의 장남이며 성종의 친형이다. 자는 자미(子美)이며 호는 풍월정(風月亭)이다.
1460년(세조6년) 7세 때에 월산군에 봉해졌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면서 자을산군과 함께 현록대부에 임명된다. 그러나 예종은 즉위 1년 만인 1467년에 세상을 떠난다. 왕위는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과 예종의 형이었던 덕종의 아들 월산대군과 자을산군으로 압축된다.
이때 막후 실세였던 세조빈인 정희왕후는 자을산군을 선택한다. 제안대군은 너무 어리고 월산군은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월산군의 건강이 나쁘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자을산군의 나이는 13세였다.
나이도 어리고 장자가 아닌 자을산군이 왕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한명회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자을산군의 장인이 한명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명회는 신숙주 등과 함께 실세 중의 한 명이었다.
왕이 되지 못한 제안대군과 월산대군은 역적이 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비정치적으로 만들면서 궁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안대군은 바보처럼 행동하여 성종과 실세 정치에서 벗어났다. 월산대군은 그의 호 풍월정이 말해주듯 풍류객으로 살기로 작정하고 시와 그림으로 여생을 보낸다. 현재의 덕수궁터에 살다가도 많은 날들을 고양에 있는 별장과 망원정에서 세월을 보낸다. 월산대군은 유년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탐구한다. 성품이 침착하고 정직하였으며,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하였다. 특히 문학적으로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다. 그의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에 게재될 정도였다. 풍월정집(風月亭集)이라는 저서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월산대군의 어머니는 사극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 인수대비였다. 그는 더 없는 효자였다. 인수대비가 병이 났을 때에서 극진하게 병 수발을 든 일화는 유명하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월산대군의 묘소가 있다. 묘역은 왕릉 못지않고 석물도 제대로 격식을 갖추고 있다. 신도비에는 월산대군의 생애가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단지 하늘만이 조화(造化)를 만들고 선악(善惡)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이 덕(德)을 주셨다면、마땅히 수명(壽命)도 주셔야 하거늘
덕(德)과 수(壽)가 일치하지 않고, 그 이치 또한 알기가 어렵네。
조선 개국(開國) 이후에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계승하여 왔다。
훌륭한 왕족은 많았다.
그러나 월산대군처럼 재주와 덕을 겸비하였더란 말인가?
진실로 대군이었다. 몸가짐이 성결하였다.
근면 검소하였으며, 경적(經籍)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읽고,
문장(文章))을 지으면、옥을 꿰고 구슬을 이은 듯 솜씨가 대단했다.
임금(성종)께서 공(월산대군)에게만 글을 지어주셨는데
신하(臣下)들에게도 화답을 지으라 하시니、형제의 우애를 알만하지 않은가.
우애(友愛)는 견고하였으며、문장을 가지고 즐기며
은혜와 대우(待遇)가 돈독했다.
마음에는 외경(畏敬)을 간직하셨고、자랑을 하지 않았으며 교만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소문은 조정에 퍼졌고,
중국 사신도 감복하였도다.
벼슬살이를 세상에선 영화(榮華)로 여기지만
공(월산대군)은 이를 진심으로 사양하였도다.
덕(德)을 겸비한 선한 마음가짐은 역사에 빛나리라.
아름다운 태도와 곧은 행실은 고금에 우뚝하도다.
형제간의 우애는 더욱 빛나는 구나.
홀연히 돌아가시니 누가 그렇게 하였는가.
어찌하여 하늘로 떠나 가셨단 말인가.
유택은 어디인가 고양(高陽) 북쪽이다.
풀은 무성하고 나무는 빽빽하도다.
왕명으로 비(碑)를 세우니
살아 영광 죽어 슬픔、천만 년 동안 전해지리.
나의 글은 졸작이어서 어떻게 공의 덕(德)을 명(銘)할 것인가."
- 월산대군 신도비문 번역
월산대군은 조선 시대의 유명한 시조 강호한정가(江湖閑情歌)를 지은 작가이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우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배 저어 오노매라
- 월산대군 시조 <강호한정가> 전문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는 월산대군의 <강호한정가>는 가을 달밤의 풍류와 정취를 표현한 평시조이다. 세속적인 명예와 욕심을 초월한 자아를 '빈 배'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가을 달밤에 배에 올라 낚시를 하는 전경이다. 욕심과 명예를 버린 안빈낙도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월산대군의 한시를 읽어보면, 고독하였지만 사랑에 관한 서정이 잘 담겨 있다.
朝亦有所思 暮亦有所思(조역유소사 모역유소사)
아침에도 그리운 분 저녁에도 그리운 분
所思在何處 千里路無涯(소사재하처 천리로무애)
사모하는 분 어디 계시나 천릿길 아득히 먼 곳
風潮望難越 雲雁托無期(풍조망난월 운안탁무기)
풍랑으로 건널 수 없고 구름에 가
欲寄音情久 中心難如絲(욕기음정구 중심난여사)
기러기조차 소식을 전할 수 없네.
-월산대군 한시 <有所思>
월산대군이 서화에 취미를 가지며 세월을 보냈다. 특히 친동생 성종이 월산대군에게 왕위를 빼앗은 미안함 때문인지 어제어필(御製御筆)을 자주 하사했다. 어제어필은 왕이 손수 지은 글이나 글씨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성종)이 그린 사군자 그림을 월산대군에게 보이고 차운(次韻)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월산대군이 시문뿐 아니라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월산대군은 한강변에 있던 희우정에 거처를 옮겨 살기도 했다. 1484년 성종은 그를 위해 望遠亭(망원정)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먼 경치를 보면서 근심 걱정을 잊으시라"는 내용이다. 강 넘어 멀리 김포평야가 보이는 경관이 뛰어난 장소였다. 월산대군은 눈이 내린 양화벌의 겨울 경치를 양화답설(楊花踏雪)로 표현하며 한성십영(漢城十詠)으로 지정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당시 이곳의 분위기를 시로 표현하였다.
늦은 석양이라 높은 다락에 안 오르겠는가.
아름다운 풍광 오래 즐기며 웃는 소리 끊이지 않네.
난간에 의지해도 평생 꿈길 찾을 수 없는데,
촛불을 켜고도 밤 풍경 또한 좋구나.
■ 경운궁(덕수궁)과 선조
경운궁(덕수궁)의 석어당(昔御堂)은 선조 임금이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장소이다. 비록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복원하였지만 경운궁에서는 유일한 2층 건축물이다. 1608년 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이곳에 유폐시킨 곳이다.
인조반정 때에는 광해군이 석어당 앞마당에 끓어 앉아 심문을 받던 장소이기도 하다. 석어당(昔御堂)은 "옛날 임금이 살던 집"이란 의미를 가지며, 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석어당의 외부 현판은 김성근(1835~1918)이 썼다. 그는 홍문관, 도승지, 이조판서 전라 관찰사를 역임한 서예가였다. 그러나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 이후에 변절하여 일제의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석어당 천장 밑에 걸려있는 금색으로 쓴 <昔御堂>의 현판은 1905년 7월에 고종황제가 직접 썼기에 매우 의미 있다. 경운궁(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다리가 놓여있다. 금천교(錦川橋)다. 조선의 궁궐은 입구에 물이 흐르고 다리가 놓여있다. 경운궁의 금천도 이와 같다. 금천교는 ‘임금이 살고 계신 궁궐에 들어가기 전에 다리를 건너며 마음과 몸을 깨끗이 한다’는 정화(淨化)의 의미가 담겨 있다. 금천교를 건너 곧장 200m 쯤 걸으면, 오른쪽에 중화문(中和門)을 만난다.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의식을 거행하는 장소이다. 1904년 화제로 소실된 후 1906년 재건된다. 일제의 능욕과 탐욕으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던 대한제국의 재정은 궁핍했다. 중화전이 단층으로 축소 건립된 이유이다. 중화전 주변에 건축했던 행각들은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에 대부분 헐린다. 다행히 중화전 뒤로 건물 세 동은 살아남아 어깨동무를 하듯 서 있다. 즉조당은 덕수궁의 모태가 된 곳이며,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가 거처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때부터 즉조당은 1897년까지 경운궁의 정전이었다. 그러나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뒤 중화전을 건립하여 정전으로 사용한다. 현재 즉조당에는 고종이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다. 석어당(昔御堂)은 궁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2층 건물이다. 단청을 하지 않아 오히려 돋보인다. 준명당(浚明堂)은 황제가 업무를 보던 곳이다. 준명당은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 선조의 삶
명종이 1567년 후사(後嗣) 없이 세상을 떠나자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묘호(廟號)를 결정한다. 이때 국가를 건립하거나 발전시킨 분은 조(祖)를 붙이고, 그렇지 못한 왕은 종(宗)을 붙이는 것이 상례이다.
조(祖)를 붙인 조선 임금 중에 선조와 인조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은 왕처럼 보인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주까지 피난을 갔다.
조선을 왜군에게 아주 넘겨 줄 뻔 했던 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큰 발전을 이룬 왕에게 붙이는 조(祖)를 붙인 것은 후세 사람들이 동의할 수 없는 묘호이다. 그러나 선조가 죽자 신하들과 사관들은 그에게 조(祖)를 붙여 선조라고 했다. 선조는 처음 왕이 되어서는 아주 명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는 툭하면 왕위를 내려놓겠다고 했다. 선조가 임금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확률이었다. 선조의 부친 덕흥군은 중종의 9번째 아들이고, 선조인 하성군은 덕흥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왕이 되기에는 먼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인종은 아들이 없었으며, 명종은 하나뿐인 아들 순회세자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런 경우 왕손 중에 누군가가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성군은 여러 가지로 명종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곤했다. 명종이 마음속으로 자기의 후계자로 지목한 이유다. 하성군(선조)은 인종이나 명종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는 종실로서 무위도식 하면서 세월을 보냈을 사람이다. 어쩌면 조선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았을까? 선조는 운이 좋게 명종이 승하하자 하루아침에 임금이 된다. 그러나 선조는 서예에 능하고, 한시도 잘 썼다. 다음과 같은 한편의 시를 읽어보면, 선조는 틀림없는 시인이었다.
고운 복사꽃 한 송이도
두세 가지 빛깔로 변한다네.
식물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인심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라네.
물론 한시를 번역한 이 시를 읽으면,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시로 승하시키고 있는 선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당시 조정의 정사는 대부분 사림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사림들은 성종 때부터 중앙정치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선조는 주자학을 장려하고 사림들을 등용하며 강연에도 열정을 보인다. 이황, 이이, 성혼 같은 대유학자들과 토론하며 우대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1482~1519)를 비롯한 사림을 신원하기도 했다. 을사사화로 오랫동안 유배살이하던 노수신(1515~1590), 유희춘(1513~1577)등을 풀어준다.
유교사상 확립을 위해 명유들의 저술과 경서와 1575경의 음석언해를 완성하고,〈소학언해>를 간행한다. 4대 사화를 당하고 고향과 산속으로 은둔했던 사림들은 명종 때에도 중앙 정치 무대의 복귀를 포기하고 있었다.
선조가 즉위하자 정국의 주도권은 이제 사림으로 이전되어 갔다. 그러나 1575년 심의겸(1535~1587)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김효원(1542~1590)을 중심으로 하는 동인이 선조를 가운데 두고 이전투구가 시작된다.
서인의 주요 인물로는 박순(朴淳1523~1589), 정철(1536~1593), 윤두수(1533~1601) 등이고, 동인의 주요 인물은 유성룡(1542~1607), 이산해(1539~1609)였다.
1589년 정여립(1546~1589)의 역모사건으로 동인은 큰 타격을 입는다.
정철이 주도권을 잡고 동인을 축출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세력은 동인 세력에게 큰 타격을 가한다. 선조 묘의 지문(誌文)을 보면 우리가 아는 선조가 아니다.
"선조는 집권 초기부터 백성들에게 선정을 했다. 학문에 전념하여 매일 강연(講筵)에 나아가 경전과 사기를 토론하였다. 정사와 학문탐방으로 밤이 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이황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선조의 정성으로 돌아와 성학십도(聖學十圖)와 서명고증(西銘考證)을 지어 올렸다. 마음을 비우고 기꺼이 받아들여 모두 정서하여 병풍을 만들라 명하고 좌우에 놓아두고 아침과 저녁으로 성찰하였다."
그러나 선조 일행의 피난 기록을 읽어보면 참담하다. 왜군이 부산(동래)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서울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경운궁(덕수궁)과 고종
고종은 매우 불행한 왕이었다. 역사적으로 조선 왕조 망국의 책임을 대부분 그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고종은 무너지던 조선 왕조를 부활시키려 했던 노력들로 인해 재평가를 받고 있다. 경운궁(덕수궁)은 그가 집권 마지막 시기에 죽음을 맞이한 장소이다. 이곳은 고종의 고독과 한이 서린 통한의 장소이다. 일제에 의한 독살 설로 인해 고종의 죽음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주었다. 고종의 죽음은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분노의 화살이 되어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켰다. 1919년 1월21일 고종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3.1운동의 시작은 파고다공원이었다. 그러나 고종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덕수궁이 운동의 진원지였다. 그것도 덕수궁 대한문 앞이었다. 당시 3.1운동의 시위는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이 정점이었다. 이것은 고종을 향한 대한제국 백성들의 목숨을 건 절규였다. 고종의 죽음은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조선 왕조의 부흥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왕이다.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고 광무라는 연호까지 사용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이것은 조선 조정의 무능과 일제가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점령 정책과 친일 매국주의자들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내였던 명성황후의 죽음과 조선 왕조의 비극적인 최후에 분노를 인내해야 했던 고종은 흥선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은 1863년 12월 33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난다. 19세에 강화도의 나무꾼에서 졸지에 조선 제25대 왕이 되었다가 재위 1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인 명복(命福)을 왕으로 결정한다. 당시 12세 였던 고종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극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난지 5일 만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일이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는 혈통적으로도 쉽지 않았다. 대왕대비 조씨는 안동김씨를 숙청하기 위해 오랫동안 와신상담 했다.
흥선군과 의기를 투합하는 과정에서 명복이 왕으로 낙점되었다. 이명복은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후계이자 대왕대비 조씨의 양자로 입적된다.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이유였다. 그의 유년 시절 이름은 개똥이었다. 소년기에 명복으로 개명한다. 이명복에게는 형 이재면이 있었다. 그러나 조대비는 자신의 수렴청정이 가능한 어린 이명복을 선택한다.
12살이 된 고종의 정치적인 행보는 조대비에 의해서 수렴청정으로 허수아비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장악하고 외세에도 힘으로 대항했다. 쇄국정책과 서원철폐 안동김씨 척결은 대원군에게는 시대적인 사명이었다. 1866년에는 여흥민씨의 딸을 고종의 배필로 맞아들인다. 훗날 그녀는 대원군의 정치적으로 정적이 된 명성황후이다.
고종이 자신의 정치적인 행보를 선포한 해는 1872년이다. 그의 나이 21세 때다. 조정의 분위기도 대원군의 독주에 관료들은 불안감과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노론 유림세력들은 대원군의 기세를 꺽지 못하면 자신들이 입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무렵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최익현의 상소가 올라온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임명하여 대원군의 기세를 꺽기 시작한다. 고종은 반대원군파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부친과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고종은 권력을 상실했던 조대비의 권위를 높이고 정치세력을 재편한다. 대원군의 오른팔이었던 영돈녕부사 홍순목과 좌의정 강 로(남인), 우의정 한계원(북인)을 파직한다. 이유원을 영의정에 박규수를 우의정에 임명하여 고종의 심복으로 삼으며 자신의 세력을 키운다. 대원군의 무력적 기반이 삼군부였기 때문에 고종은 자신의 정치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삼군부를 약화시키고 무위소(武衛所)를 설치한다. 병조판서에 이재원을 임명하고 친위세력을 배치한다. 훈련대장, 금위대장, 어영대장에 고종의 사람들이 모두 임명된다. 병권을 장악한 고종이 임명한 암행어사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관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원군의 반격도 만만하지 않았다.
궁궐에는 자주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1874년(고종11)에는 민승호가 폭사하기도 했다. 영남 유생들이 대원군의 하야에 항의하는 시위로 조정은 불안했다. 고종은 급기야 대원군의 친형인 이최응을 대신으로 등용한다. 김병국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들과도 연합하며 조정을 안정시키려고 애를 쓴다.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 투쟁은 심각했다. 이 가운데 있던 고종은 실로 나약했다. 대원군의 10년 집권(1864~1873) 이후에는 명성황후 민씨가 조정을 좌지우지 한다.
고종은 아내인 명성황후를 의지하고 사랑했다. 1866년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렸지만 궁녀 이씨에게서 먼저 왕자 완화군을 얻는다. 궁녀 이씨는 고종의 첫 사랑이었다. 명성황후에게서 아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생후 5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항문이 막히는 장애자였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아들의 죽음이 시아버지 대원군 때문이라고 믿는다. 훗날 이 오해는 무서운 증오로 돌변한다.
1880년 완화군이 사망한다. 그의 나이 13세였다.
이번에는 대원군이 완화군의 죽음에 명성황후가 개입했다고 믿었다. 두 사람 간의 증오심은 돌아올 수 없는 칼날 같은 대립각으로 대립한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정치적 개입으로 대원군은 실각한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년)으로 대원군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명성황후는 피신을 한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사망하였다고 널리 알리기 위해 장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청나라의 군사력으로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대원군은 중국 천진으로 압송된다. 1895년(고종 32년)음력 8월20일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의 칼날에 시해당한다. 을미사변이다. 친러파 내각이 퇴각하고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이 입각한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불에 타 버렸기에 고종은 2개월이 지난 후에 명성황후의 죽음을 발표한다. 1907년 7월 18일 덕수궁 함령전에서 고종은 우왕좌왕했다. 통감 이토가 참정대신 이완용을 불러 “이(헤이그 밀사)는 조약 위반으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선전(宣戰)할 권리가 있다”고 협박한다.
이에 송병준은 고종의 면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日皇)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일제 사령관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에게 항복하든지 선택하라’고 대단히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오후 3시 이완용 등 내각 대신들은 회의를 하고, 오후 4시에 덕수궁으로 들이 닥쳐 고종에게 사태 수습책을 건의한다. 그것은 왕위에서 물러나라는 통보였다. 다급해진 고종은 통감의 의견을 듣겠다며 버틴다. 5시에 이토히로부미를 만나 밀사 사건을 설명한다. 이토는 ‘한국 황실의 중대 문제에 간섭할 수 없으며, 내각 대신들과 상의한 일도 없다’고 오리발을 내민다. 내각 대신들은 8시쯤 다시 고종을 찾아가 양위를 요구한다. 이런 분위기를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이완용이 칼을 빼어들고 고함을 지르며,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라고 협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밤 11시 고종은 마지막으로 원로 대신들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신기선(申箕善), 민영휘(閔泳徽), 민영소(閔泳韶)를 부른다. 신기선은 이듬해인 1908년 세상을 떠난다. 민영휘, 민영소는 1910년 일제로부터 자작과 막대한 상금을 받은 친일주의자였다. 7월19일 새벽 1시 “짐은 지금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고 물러났다.
1907년 7월 20일 오전 8시에 황태자 대리식이 거행되었지만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의 44년 정치가 끝나는 날이었다.
이완용의 친일 내각은 당시 대한제국이 살아나면 자신들은 죽는다고 생각했다.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李炳武:합방 후 자작 수여)가 군대 해산을 주도한다. 을사늑약은 외부대신이 체결하고 군대 해산은 군부대신이 주도했다.
1907년 8월 1일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당한 날이다. 하세가와의 지시를 받은 이병무는 10시에 군대해산을 명령한다. 이때 서소문에 주둔했던 시위대 제1연대 대대장 박성환이 항의해 자결한다. 이에 격분한 병사들은 영외로 뛰어나가 일본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한다. 남대문 주둔하고 있던 2연대 1대대도 이 소식을 듣고 동조 사격을 한다.
그러나 병사들은 기관총 등의 중화기로 무장한 일제의 병사들에게 진압당했다. 이날의 군대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의미한다.
고종은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주연집(珠淵集)이란 문집이 남아 전한다.
물론 그가 세상을 떠나자 출간되었다. 문집 속에 한시는 39수(首)가 수록되어 있다. 한시들은 대부분 20대에 지어졌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56세에 강제퇴위 당한 후 쓴 시들은 몇 편 되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범주 내에서 간행된 것으로 보여 진다.
고종의 시는 궁궐의 분위기와 백성들을 걱정하고 신하들을 격려하며 애정을 표시하는 내용을 담았다. 봄을 표현한 시가 12수로 가장 많다. 시의 형태는 칠언절구가 19수로 가장 많다. 율시(律詩)는 거의 없으며 20자에서 28자로만 지어지는 절구(絶句)로 주로 썼다. 적은 수의 한자로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대부분 궁궐에서 작품을 썼다.
■퇴계 한양 집터에서 단상
서울시청 별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사이는 퇴계 이황이 살았던 집터다.
이황(李滉, 1501~1570) 집터는 젊은 시절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할 때 생활하던 집이 있던 곳으로, 중구청의 자료에 의하면 지금의 중구 덕수궁길 15이다.
1552년 여름 사헌부에 근무할 때에 이곳에 살았으며, 1558년 이곳에서 퇴계와 고봉이 만났던 장소도 이 언저리가 될 것이다. 작년까지 있던 집터 표지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 이곳의 환경을 유추해 본다. 또 한편은 퇴계 고향 마을과 퇴계 묘소 탐사를 기억했다. 오래전에 이육사의 고향을 찾아가다가 퇴계고택에 들러 종손께 인사하고 퇴계묘소를 참배했던 일을 떠올렸다. 육사의 생가 육우당은 사뭇 시인에게 어떤 지조와 철학을 체득케 하였을 터이다. 지조는 아마도 퇴계의 후손이란 피의 내력인지 모른다. 가파른 퇴계묘소를 향해 약 10분 정도 올라서 소나무 숲속의 퇴계선생 묘소의 숲 우듬지 사이로 낙동강이 휘돌아 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봉분 앞에 서면 청량산을 빠져 나온 낙동강이 안동을 향해 흘러가는 모습이 아득하게 보였다. 또 산들이 동쪽으로 연결지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묘소 우측에 퇴락한 비석이 수 백 년 동안 서 있다. 빛바랜 비석에 음각된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란 글씨를 읽었다.
퇴계의 시조는 고려의 추봉밀직사(追封密直使) 석(碩)이다.‘진성’은 지금의 청송군 진보면이다. 조지훈 시인의 고향을 가기 위해 안동에서 영양읍을 가다보면 청송보호 감호소가 있는 마을이 진보면이다. 진성이씨는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58명을 배출하였고, 퇴계(退溪) 선생이 대표적인 분이다
그래서 1574년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을 숭모하는 제자들과 유림이 중심이 되어 건립된 도산서원을 탐방하는 일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일이다. 본래 도산서원은 이황 선생께서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이다.그 분의 사후에 제자들과 유림들이 떠받들고 사액을 받으며 조선의 학문의 최고봉 서원이 되었다. 오죽했으면 1575년 선조가 한석봉에게 지시하여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이란 현판 글씨를 사액(賜額)으로 내렸겠는가?
서당과 동서재(東西齋), 전교당(典敎堂) 이어지는 돌층계를 오르면서 매화를 유독사랑 했던 퇴계의 그 매화밭에 매화가 만발했었다. 정말 매화가 지천으로 핀 절묘한 호시절에 도산서원을 찾았던 기억이 선연하다. 아울러 퇴계를 사모했던 단양출신 기생 두향의 일편단심을 생각했다.
기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행운도 있는 것이다. 시사단(試士壇)이 보이는 도산서원 마당끝자락에서 낙동강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면서 옛 선비들의 과거시험 장면을 연상한다. 정조 때 앞에 보이는‘시사단’ 위치에서 약 7,000명의 선비들이 시험을 보았다고 하지 않는가?
이 산골까지 과거시험을 보러 온 당시 선비들의 정성과 고행을 생각해 본다. 퇴계(退溪)는 이황 선생님의 호다. 청량산인(淸凉山人)라고도 부른다. 퇴계는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지금 이곳에 도산온천이 성업중이니 이름값을 하고 있는 것이다. 퇴계는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12세 때 숙부인 이우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우는 중종 때 관찰사·안동부사 등을 지냈으며, 형 해(瀣)는 인종 때 예조참판·대사헌을 지냈다. 이들의 영향이 퇴계를 학문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퇴계는 1523년(중종 18년)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고, 1528년 진사가 되고, 1534년에야 비로소 소위 장원급제란 것을 한다.충청도 암행어사, 대사성(大司成) 역임,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삭직되었다. 1552년 대사성에 재임되었고, 1566년 공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예조판서, 1568년에 우찬성을 역임한다. 대제학을 끝으로 고향인 안동 도산으로 은퇴한다. 학문과 제자교육에 전력한 퇴계 선생의 일생을 몇 날 밤을 이야기해도 불가능하리라. 철학적으로 그는 이언적(李彦迪)의 주리설(主理說)을 계승하였으며, 주자(朱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켰다.고향 마을 근처인 도산서당에서 숱한 제자들을 키워내었는데 특히 퇴계의 학풍은 자신의 문하생인 서애 유성룡(柳成龍) 학봉 김성일(金誠一)등에게 계승되어 거대한 영남학파를 이루었다. 이이(李珥)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기호학파(畿湖學派)와 대립, 동서 당쟁으로 이 두 학파의 대립되기도 하였지만, 퇴계의 학설은 임진왜란 후 일본에도 소개되어 비록 적국이지만 그들의 유학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퇴계 선생의 묘소는 조선 유교의 성지임에도 불구하고 초라하다. 운명하시면서 결코 자신의 묘소를 크게 단장하지 말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역시 퇴계 선생님이다. 서울 정동 대법원이 있던 자리가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이 되었다.
이 터가 퇴계 이황 선생께서 한양에서 가끔 벼슬살이 할 때 살았던 집이
있던 장소이다. 물론 예전에는 지금처럼 정확한 번지가 없기 때문에 추정할 뿐이다.
아마 가로 세로 200m 정도 안에는 들지 안에 들어 있지 않겠는가? 정동 일대의 변천은 얼마나 많았겠는가? 퇴계의 고향에 있던 고택도 1907년 왜병의 방화로 종택은 잿더미가 되지 않았던가? 안동 답사 때에 퇴계고택 앞에 승용차를 주차하고 나서는데 개가 짖었다. 다가서면 달아나고 다시 몇 발짝 물러나면 따라왔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는 “退溪先生舊宅”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었다. 퇴계고택에는 마침 종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듯했다. 잠시 마당을 서성이면서 퇴계고택의 역사를 떠올렸다. 고택 앞으로 개울이 흐르는데 <토계>이다.퇴계종택(退溪宗宅)은 행정구역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486-2번지다. 봉화에서 안동으로 난 국도를 따라 가다 도산면 온혜파출소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개천을 따라 2.5㎞ 쯤 진입하면 개울 건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고택은 퇴계 선생의 손자인 동암 이안도가 건립하였다. 누대를 이어 살아오다가 1715년(숙종41)에 정자인 <추월한수정>을 지었다. 이 정자는 조선 후기의 유학자 권두경이 퇴계 선생의 학문을 추모해 건립했다.
현재의 종택은 1926~1929년에 걸쳐 퇴계 13대손인 이충호가 이곳에 살던 임씨들의 종택을 매입하고 건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도 이때 고증하여 재건하게 된다.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의 명당지형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퇴계 종택은 5칸 솟을대문과 ㅁ자형 본채가 있다. 우측으로 돌면 5칸의 솟을대문과 ‘한수정’이 있으며 뒤에 사당이 근엄하다. 본채인 ㅁ자형은 사랑마당을 면한 사랑채가 전면에 있고 뒤에 안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이다. 총34칸의 저택이다.
당시에 퇴계 17대 종손 이근필 선생이 많은 일행과 이야기중이라 말을 붙이지 못한 것이 아쉽다. 秋月寒水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정자에 한번 앉아 보지 못하고 급하게 나와야 했다. 종친들이 모여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는 것이 미안하여 슬그머니 고택을 나왔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한양에서 퇴계가 살았던 집터를 걷는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퇴계의 시중 백미인 도산 12곡 중의 몇 수를 읽는다.
연하(煙霞)로 지붕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늙어가네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피어오르는 연기와 저녁놀의 소담한 집을 지어, 바람 달을 벗으로 삼고, 평화의 좋은 시대에 노병(老病)으로만 늙어가기를 바라는 퇴계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는 시다.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 하는고우리도 그치지 말고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어린 선조 임금에게 성리학을 알기 쉽게 10개의 표로 만들어 놓은‘성학십도’를 만들어 나라를 통치하게 한 퇴계 선생이지만 이런 시조를 지을 줄 알았다.
푸르른 산은 어찌 영원히 푸르며, 흘러가는 물은 또 이토록 밤낮으로 흘러가는가. 우리들도 저런 물처럼 쉼 없고 저 산처럼 영원히 푸르게 살았으면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간혹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면서 살았던 집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지만 퇴계가 살았던 집터를 알지 못한다.
■ 김장생 선생 생가터에서
서울미술관을 드나들 때면 이곳에서 태어난 김장생 선생과 그의 아들 김집 선생을 생각하게 된다.
김장생(金長生, 1548년~ 1631년)은 이곳에서 태어나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으로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 아닌가?
또한 김집 (金集 1574∼1656) 역시 자신의 호 신독재(愼獨齋) 답게 18현의 명단에 들어 있으니 이 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부터 "정승(政丞) 10명이 죽은 대제학(大提學) 1명보다 못하고, 대제학(大提學) 10명이 문묘 배향자 1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이 터를 유심하게 살피자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문묘의 배향 자격은 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제정 당시 심의는 최고의 올 곧은 선비의 종주에 오른 유학자들이었다. 설 총, 최치원, 안 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 황, 김인후, 이 이, 성 혼, 김장생, 조 헌, 김 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문묘 18현의 명단속에서 이 터에서 태어났거나 살았던 이황, 김장생, 김집이다.
김장생의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본관은 광산이며 부친은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한 김계휘(金繼輝1526∼1582)이다. 사계는 운이 좋았던 분이다. 구봉 송익필(1534년~1599)에게 예학의 가르침을 받고, 율곡 이이(1536~1584)에게 성리학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예학과 유학의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김집 역시 아버지를 잘 만났기 때문에 결이 곱고 올곧은 선비가 될 수 있었다.
1578년(선조11년) 사계는 과거시험 없이 천거되어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역임한다. 이후에 자잘한 벼슬이 내려졌지만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최선을 다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단양군수, 남양부사),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과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에 은퇴하고 논산 연산으로 내려가 평생을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키웠다. 아들 깁집과 송시열이 제자로 조선 중기이후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런 인연으로 10년전에 사계와 신독재를 배향한 돈암서원을 탐방한 기억이 떠오른다. 당시에 답사기로 썼던 글을 읽으니 부끄럽다. 이곳 생가터에서 당시 답사기를 읽으며 옛 추억을 생각한다.
■ 아펜젤러와 배재학당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t 1858~1902)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이다. 1882년 뉴저지 주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입국한다. 때는 마침 부활절 아침이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조선에 도착하자 그는 조선선교회 및 배재학당을 설립한다. 그가 조선의 선교사가 된 것은 1884년 미국 감리회 해외선교부의 조선 선교 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근무하면서 학교와 병원 등을 통해 복음전도에 헌신한다. 1887년 서울에 벧엘예배당을 설립한다. 벧엘예배당이 지금의 정동교회이다. 정동교회는 한국에 설립한 최초의 개신교회이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주 수더톤(Soudert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루터파의 신앙의 소유자였으며, 어머니는 독일계였다. 그의 아버지는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으며, 루터적인 독일 경건주의 환경에서 성장한다. 1882년 아펜젤러는 Franklin and Marshall College를 졸업한다. Franklin and Marshall 대학은 랭카스터에 있는 명문 대학이었다. 재학중에 그는 웨슬리적 체험신앙에 감명을 받는다. 감리교회에 출석하는 결단을 내리고 드루신학교(Drew University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한다. 당시 3년 재의 드루신학교는 교양과 지성을 중시하는 목회자들을 배출하는 명문신학교였다. 아펜젤러의 조상은 스위스의 아피(Appie) 가문이었다. 마틴루터에 의해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아피 가문은 츠빙글리의 개혁운동에 참가한다. 그 중 몇 가정이 18세기 청교도 이민열풍을 타고 아메리카로 이주한다. 아펜젤러의 5대조는 1735년 펜실베니아에 도착하였을 때에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4대조 때에 이르러서야 서더튼에 자기 소유 농장을 갖게 된다. 그들은 교육과 신앙을 중시했다. 감리교회의 교리는 신약전서 사도신경의 예수의 행적에 근거한다. 당시 감리교는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아펜젤러가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던 이유이다. 신앙과 종교적 경험에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인정하며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다. 아펜젤러는 드루신학교 3학년 때인 1879년 2월 선교 강연을 듣는다.
2달러 50센트를 선교비로 헌금하면서 선교사의 비전을 간직한다. 1884년 11월 엘라 제이 닺지(Ella J. Dodge)와 결혼한다. 이어 그는 감리교 조선선교부(The Korea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첫 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기 위해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울러 감독에게 안수를 받는다. 1885년 2월 일본을 경유하여 1885년 4월 5일 부인과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마침 부활 주일이었던 그날 제물포에 도착한 사람이 있었다. 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이다. 아펜젤러는 한양의 정동에 한옥을 구입한다. 이곳에서 복음과 교육활동을 병행하기 시작한다. 1885년8월 4명의 학생을 가르친다. 아펜젤러는 학교를 세울 것을 결정하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을 부여 받는다. 배재학당의 설립이 시작된 것이다. 1887년 한국선교부 감리사로 근무하면서는 아펜젤러는 학교와 병원 등에서 복음을 전한다. 1887년 10월 29일 벧엘예배당을 설립한다. 정동교회의 전신이다.
1888년에는 H. G. 언더우드, G. H. 존스 등과 함께 당시 조선의 국토를 답사함녀서 전도활동을 시작한다. 1890년 종로서점을 개설하고, 한국성교서회(韓國聖敎書會)를 창설한다. 1887년 배재학당 신학과목을 강의한다. 이것이 협성신학교의 설립 계기가 되었다. 협성신학교는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전신이다. 아펜젤러에 의해서 배재학당이 설립되고, 협성신학교(감리교신학대학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이 되었고, 감리교신학대학교는 최초의 개신교 대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아펜젤러는 조선8도 중 6도의 고을들을 답사한다. 1902년 6월 11일 밤 목포에서 선교 기행 중에 세상을 떠난다. 17년간 조선에서 희생적인 선교와 봉사는 개신교의 선교역사의 밀알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1890년 한국성교서회를 창립하여 성서번역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1897년에는 한글로 발행한 최초의 종교 신문인 〈조선 그리스도인회〉를 창간한다. 조선이 외세에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민족계몽운동에도 최선을 다한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부탁으로 배재학당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서재필은 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부모와 형제들 처와 차식들이 자살을 하거나 모두 학살당한다.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주경야독으로 와신상담하며,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사가 된다. 1895년 조선에 입국한 서재필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통해 민족의 각성을 촉구했다. 이때 아펜젤러의 집에 머무르며 그는 배재학당에서 이승만, 주시경, 신흥우 등의 학생들에게 역사, 정치, 경제, 교회사 등을 가르친다. 학생 이승만이 대미주의자가 되는 기초를 서재필이 심어 놓은 것이다. 아펜젤러는 1902년(광무6) 그는 목포에서 개최 될 성서번역자회의에 참석하러 가기 위해 인천에서 배를 탄다. 불행하게도 군산 앞바다에서 아펜젤러가 탑승한 배와 일본 상선이 충돌하여 사망한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묻힌다. 이후 큰아들은 배재학교 교장을, 큰딸은 이화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 박세영의 삶과 문학
박세영(1902~1989년)은 경기도 고양 출신이다. 1922년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상해와 천진에서 생활했다. 1924년 귀국하여 염군사의 동인으로 참가했다. 염군사는 진보적인 문화단체였다.카프동인으로 활동했으며, 1925년 '해빈의 처녀' 이후 <타작>, <야습> 대표작 <산제비>를 1936년에 발표한다.
1926년 말부터 프롤레타리아 아동잡지 <별나라>의 편집을 맡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별나라> 가 폐간된다. 1935~1945년까지 중학교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1937년에 시집 산제비를 출간한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북한의 국가인 〈애국가〉작사하였으며, 〈림진강〉이 있다.〈림진강〉은 1950년대에 지어 유행가의 가사가 되었다. 남한에 두고 온 가족들과 벗들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노래이다. 1990년대에 가수 김연자가 텔레비전 음악회에서〈림진강〉을 노래했다.
대한민국에서도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북한에서는 이 노래를 성악가 조청미가 불렀다. 나는 그의 시 <산제비>를 좋아한다. 자유를 그리워하면 쓴 시이기 때문이다. 임진강 노래를 부를 줄 모른다. 다만 그 시를 옮겨 본다.
1,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흘러 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싣고 흐르냐
2, 강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벌 이삭마다 물결위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3, 내고향 남쪽땅 가고파도 못가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를 못하리라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들인 제비.
너희야말로 자유의 화신 같구나,
너희 몸을 붙들 자(者) 누구냐,
너희 몸에 알은 체할 자 누구냐,
너희야말로 하늘이 네 것이요, 대지가 네 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 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꿰어
마술사의 채찍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희는 장하구나.
하루 아침 하루 낮을 허덕이고 올라와
천하를 내려다보고 느끼는 나를 웃어 다오,
나는 차라리 너희들같이 나래라도 펴 보고 싶구나,
한숨에 내닫고 한숨에 솟치어
더 날을 수 없이 신비한 너희같이 돼보고 싶구나.
- 박세영 시 <산제비> 부분
■ 박팔양의 삶과 시
박팔양(1905~1988)은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1923년 동아일본 신춘문예에 <神의 酒>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카프와 구인회 동인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모더니즘과 계급적인 양면성을 지닌 작가로 보아야 한다. 식민지의 모순을 인식하고 저항성이 있는 작품을 발표했다
시집으로 1940년에 발간한 여수시초와 1947년 펴낸 <박팔양 시집>이 있다. 광복 당시 그는 만주에 있던 <만선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월북하여 로동신문의 전신인 <정로> 초대 편집국장과 로동신문 부주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 조선작가동맹 부위원장(1956)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에 북한의 종군 작가로 참전했다. 이후 그는 1958년 <황해의 노래> 1961년 <민족의 영예>를 발표했다. 비전향 장기수로 2000년 북으로 송환된 양자 '박문재'는 박팔양의 양자이다. 1988년 국내에서 해금되었으며, 시선집 <태양을 등진 거리>발간됐다.
나는 그대의 종달새 같은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러나 보다도 더 그대의 말없음을 사랑한다.
말은 마침내 한 개의 조그만 아름다운 장난감.
나는 장난감에 싫증난 커가는 아이다.
말보다는 그대의 노래를 나는 더 사랑한다.
진실로 그윽하고도 황홀한 그대의 노래여!
붉은 노을 서편 하늘에 비끼는 여름 황혼에
그대의 부르는 노래, 얼마나 나를 즐겁게 하느뇨.
노래에도 싫증날 때 그대는 들창가에 기대어 침묵한다.
아아 얼마나 진실하고도 화려한 침묵인고!
나는 말없이 서 있는 아름다운 그대의 창 너머로
여름 황혼의 붉은 노을을 꿈과 같이 동경한다.
-박팔양의 시 <失題>
날더러 진달래꽃을 노래하라 하십니까
이 가난한 시인더러 그 적막하고도
가냘픈 꽃을
이른 봄 산골짜기에 소문도 없이 피였다가
하루 아침 비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을
무슨 말로 노래하라 하십니까?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슬픈 사실이외다
백일홍처럼 붉게붉게 피지도 못하는 꽃을
국화처럼 오래오래 피지도 못하는 꽃을
노래하느니 차라리 붙들고 울것이외다
친구께서도 이미 그 꽃을 보셨으리라
다.
- 박팔양 시 < 진달래> 부분
■ 배재학당터에서 읽는 나도향의 <그믐달>
나도향(1902~1926)은 젊은 날에 요절한 작가이다. 정동의 배재학당터를 거닐다보면 중학교 때 읽은 그의 작품 <벙어리 삼용이>가 기억난다. 말 못하는 벙어리 삼용이가 자신의 여주인을 위해 몸을 바치던 기억은 선연하다. 나도향의 본명은 ‘경사스런 손자’의 뜻을 지닌 나경손(羅慶孫)이다. 호가 도향(稻香)이다. '벼의 향기"란 뜻을 가진 그의 호가 이름인 듯 불러지는 작가이다.
1918년 배재고보를 졸업한 나도향은 박영희와 김기진과 어울리며 문학의 꿈을 키운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그가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나도향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한 이유이다. 나도향은 의학에 관심이 없고 문학에 열정을 보였다. 1919년 집에서 돈을 훔쳐 몰래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려고 했지만 학비가 없어 포기한다. 귀국하여 1922년 홍사용, 현진건, 이상화, 박영희 등과 함께〈백조〉동인으로 참여한다.
1923년 경북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1924년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감옥생활을 하다가 출옥 후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집안은 순식간에 몰락하기 시작한다. 1925년 일본으로 갔다가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고 귀국한다. 1926년 8월26일 그는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겨우 24세였다. 그는 떠났지만 한국 문학에 그의 이름은 아직 당당하다. 그의 수필 <그믐달>을 읽고, 배재고보터를 거닐면서 그의 삶과 문학을 생각해본다.
나는 그믐달을 몹시 사랑한다.
그믐달은 너무 요염하여 감히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을 붙일 수도 없이 깜찍하게 예쁜 계집 같은 달인 동시에 가슴이 저리고 쓰리도록 가련한 달이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 버리는 초생들은 세상을 후려 삼키려는 독부(毒婦)가 아니면, 철 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怨婦)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여왕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애인을 잃고 쫓겨남을 당한 공주와 같은 달이다. 초생달이나 보름달은 보는 이가 많지마는, 그믐달은 보는 이가 적어 그만큼 외로운 달이다. 객창한등(客窓寒燈)에 정든 임 그리워 잠 못 들어 하는 분이나, 못 견디게 쓰린 가슴을 웅켜잡은 무슨 한 있는 사람 아니면, 그 달을 보아 주는 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내 눈에는 초생달빛은 따뜻한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뜻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빛이 있어 보인다.
내가 한 있는 사람이 되어서 그러한지는 모르되, 내가 그 달을 많이 보고 또 보기를 원하지만, 그 달은 한 있는 사람만 보아 주는 것이 아니라, 늦게 돌아가는 술주정꾼과 노름하다 오줌 누러 나온 사람도 보고, 어떤때는 도둑놈도 보는 것이다.
어떻든지, 그믐달은 가장 정 있는 사람이 보는 중에, 또는 가장 한 있는 사람이 보아 주고, 또 가장 무정한 사람이 보는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 많이 보아 준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날 수 있다 하면, 그믐달 같은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 나도향의 수필 <그믐달> 전문
■ 조연현
조연현(1920~1981) 문학평론가는 경남 함안 출신으로 배재고보를 졸업했다.
1945년 <예술부락>에서 본격적인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청년문학가협회를 창립했다. 1948년 문예사 편집장을 역임하였고, 한국문학가협회 발족에 기여했다. 1954년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1955년⟪현대문학(現代文學)⟫을 창간하면서 주간을 역임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의 한국신문학사를 정리하고 체계화한 대표저서『한국현대문학사』(1961)와『문학개론』(1951)에서『조연현문학전집』(1977)까지 20여권의 저서가 있다.
동국대학교 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부이사장과 한국문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 남산 김소월 시비 앞에서
-김소월 시인의 삶과 문학
2011년 문화재청은 <진달래꽃> 초판본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매문사>에서 1925년에 발행한 시집이다. 문화재로 등록 된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초판본은 1925년 12월 당시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과 ‘중앙서림’ 총판본 2 가지 형태로 간행됐다.
이제 돈으로 환산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일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수난사와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주택(아파트)구조의 변모도 책을 보관할 수 없었던 상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진달래꽃> 초판본은 시인 김소월(1902~1934)이 생전 발간한 유일한 시집이다. ‘진달래꽃’을 비롯해 <먼 후일> <산유화> <엄마야 누나야> 등 지금까지도 우리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작품들이 수록돼 있다. 이 시집은 소월의 사후에도 수많은 출판사에 의해 발간돼 왔다. 1925년 12월26일 간행된 초판본은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과 <중앙서림>총판본 두 종류이다. 두 판본은 간행 시기와 본문 내용은 일치하나 겉표지와 속표지가 다르고,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의 한글 표기 오류가 중앙서림 총판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등록 된 시집은 한성도서주식회사 총판본 3점(배재학당 역사박물관 1점, 개인 소장 2점), 중앙서림 총판본 1점(개인 소장)이다.
남산에는 1968년에 세운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새긴 시비가 있다. 이 시비가 세워지면서 일대를 소월길이라 불러왔다. 김소월의 이 시비는 1968년 한국의 현대시 60주년을 기념해서 세워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해가 최남선이 1908년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지 60주년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금년(2018년)은 시비 건립 50년이 된다.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은 우리 민족의 정서인 이별과 한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다. 시집<진달래꽃> 한 권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이것은 그가 우리의 전통적인 민족정서에 한의 가락을 섞어 서정시로 만드는 훌륭한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대부분이 노래가 되어 우리 겨레의 가슴을 울리며 불러지고 있다.
김소월 시인은 1902년 외가인 평북 구성군 서산면 왕인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가는 평북 정주군 곽산면 남단리로 공주 김씨 1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김소월 시인의 고향마을 남단리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뒤로는 평안도 8대 명산중의 하나인 능한산이 서 있고 앞으로는 기름진 논밭이 풍요롭게 펼쳐져 있었다. 이처럼 산과 들이 어우러진 고향의 자연은 소월의 맑은 영혼과 시적 서정을 구성하는 샘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큰 슬픔이 있었다.
김소월의 아버지 김성도는 1904년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다. 약 한달 동안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깨어난 후 정신병자가 되었다.
평생을 폐인처럼 살다가 슬프게 세상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를 유년의 김소월은 보면서 자랐다. 이런 슬픈 정서를 지니고 오산중학교와 배재고보를 다니면서 시창작을 한다. 오산학교에서 김억선생에게 배운 시창작은 그의 시세계의 지경을 넓히는 계기가 된다. 서울 정동에 있던 배재학당을 졸업한다. 김소월이 고향을 떠나 서울 정동 배재학당의 학창 생활도 외로움과 슬픔의 시기였으리라.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향 언어로 이별과 슬픔의 경험들을 자연과 민족의 그릇에 담으며 민족적인 슬픔과 동일시한다.
당시 문학적인 환경은 서구의 시상과 이국적인 언어 형식들이 난무하던 시대였다. 3.1운동의 실패로 모두가 절망의 늪에서 허덕일 때, 토속적인
이미지와 전통적인 7.5조의 민요풍 리듬 시를 만들어 민족의 가슴을 활짝 열었다.
이렇듯 김소월 시인은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삶의 이야기를 간결한 시로 표현하였다. 이별과 슬픔이 묻어 있는 당시 민중들의 삶을 시로 정화시켰다.
그의 시는 당시 사람들의 삶을 토속적인 언어로 만들어 엽서에 담아내는 듯 쉽고 정갈했다. 창작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150여 편의 주옥같은 그의 시들은 민족의 노래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소월 시인의 삶과 문학의 상징은 시비이다. 그가 졸업한 배재학당터에는 삶과 문학의 궤적을 탐구할 아무런 상징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 <진달래꽃>은 이별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동양적인 체념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 표현법은 우리 문학의 <공무도하가>, <가시리>, <서경별곡>, <아리랑>으로 계승되다가 김소월이 현대시로 발전시킨다.
결국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정서는 우리 조상들이 오래전부터 가져 내려온 한과 이별 정서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김소월 시인의 시 <진달래꽃> 전문
진달래는 참꽃 또는 두견화라고 불리며, 우리나라 전역의 산야에서 무리지어
자란다. 4월에 잎보다 먼저 자주 색꽃을 피우며 키는 약 1m~2m로 작다. 이 꽃은 김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상징적인 핵심어다. 진달래꽃에는 슬픈 전설이 스며있다. 두견새가 피를 토하며 슬프게 울었기에 그 피를 먹고 자란 꽃이 진달래라는 전설의 꽃이다. 김소월 시인이 당시에 이 전설을 모를 리가 없었으리라.
그가 설정한 이별의 한과 슬픔 등의 정서를 표현하고자 진달래꽃을 소재로 도입하였을 것이다. 4연 12행의 진달래꽃은 떠나는 임을 향한 애절한 사랑과 체념, 극기의 정신이 녹아있다. 진달래꽃은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꽃이다. 우리나라의 산 그 어디에나 피어나 누구에게나 친숙한 꽃이다.
김소월 시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 속에 녹아 있는 이야기를 흡수하였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지니고 왔던 정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다. 참담한 역사적인 비극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당연히 그의 시에서 위안을 받는다. 김소월 시인의 시가 출현한 1920년대부터 그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흔들었다. 이것은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들의 삶이 그만큼 슬프고 억울했음을 말해준다.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슬픔과 한의 정서를 우리의 언어로 기막히게 표현하였다.
그의 시를 읽으며 감동받았고 노랫말을 따라 부르며 함께 우는 동일체가 되었다. 이 동일체 의식이 있기에 김소월의 시로 민족의 카타르시스가 가능했다.
김소월의 시가 이렇듯 처절한 슬픔과 절망들을 시로 승화시키게 된 것은 시인 자신의 삶에 이유가 있다. 일제강점기 나약한 지식인으로 살아가면서 우리민족에 커다란 선물을 주고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라는 비참한 죽음을 하고 떠나갔다. 김소월 시인의 시는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때로 슬프고 외로울 때 접동새처럼 나타나 노래가 되어 우리의 심금을 울리곤 한다. 오늘 우리가 읽고 감상한 진달래꽃, 산, 접동새 외에도 100여 편이 넘는 김소월 시인의 시는 모두가 민족의 슬픈 정서가 토대이다. 김소월 시인은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작가로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배재학당은 그가 시심을 키웠던 문학의 산실이다. 배재학당 터를 답사하며 김소월 시인 시를 음미하는 일은민족의 서정적인 문학의 뿌리를 찾는 일이다.
1968년 남산에 세워진 김소월 시비가 세워진지 50년이 되었다. 지금 주변에 세워지고 있는 시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시비이다.
당시 1인당 소득이 미화 300불도 되지 않던 시기에 이 시비를 세웠다. 가난하던 시대에 이 시비 앞에서 <산유화>를 읽으며, 자신의 삶에 위안을 받았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