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3시간 ·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 196회 - 특강 강사 강연 후기
민족문제 연구소 구미 지회 주최 6월 시민 특강 강사로 초청을 받아 지난 6월 28~29일 1박 2일로 고향 구미를 다녀왔다. 6월 28일 오후 1시 30분 시외버스에 승차, 원주를 떠나 3시간이 지나자 차창 밖으로 눈에 익은 금오산이 바라보였다. 늙어지면 눈물도 흔해 지는가? 문득 내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박찬문 민문연 지회장의 따뜻한 영접을 받은 뒤, 늦은 오후 7시부터 9시가 넘도록 ‘6.25전쟁, 그 기억과 평화의 꿈’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의 주제는 어렸을 때 겪었던 6.25전쟁에 대한 회상과 내가 4차에 걸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과 맥아더기념관에서 수집한 사진 자료 중심 이야기였다. 내가 수집한 2천 여 점 가운데 50 여 점을 골라 파워 포인트에 띄운 뒤 6.25전쟁 발발 그 원인과 전개 과정, 휴전에 이르는 창자가 찢어지는 그 아픈 역사를 내가 공부한 사실 그대로 고향의 후배들에게 유언을 하는 심정으로 들려드렸다.
강연과 질의 응답, 그리고 좌담회가 있었다. 그 강연 장소(구미시청 앞 형곡동)가 하필 내 작품 <전쟁과 사랑>의 초반 하이라이트 장면이기에 창작집에서 그 부분을 찾아 원문대로 낭독해 드렸다.
두 사람(인민군전사로 다부동전전에 참전한 남쪽의 최순희 간호전사와 북쪽의 위생병 김준기)은 융단 폭격에 살아남고자 다부동 전선인 낙동강을 건너 무조건 북으로 탈출했다.
밤하늘의 하현 달이 반갑기보다 오히려 무서웠다. 그들은 달빛 때문에 가능한 몸을 낮춰 걸었다. 새벽녘이라 날씨가 몹시 찼다. 게다가 낙동강을 건너느라 젖은 옷도 완전히 마르지 않아 온몸이 덜덜 떨렸다.
달빛도 파랬지만 두 사람 입술도 파랬다. 그들은 북으로 도망을 가는 도중 오태동 산기슭 나무 그늘에서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서로 껴안았다. 그리고는 파란 입술을 포갰다. 곧 온 몸이 데워졌다. 그러자 굳었던 몸이 금세 펴지는 듯했다. 그들은 긴 입맞춤을 끝냈다.
“동생 고마워요.”
“뭘요. 같이 사는 길이디요.”
“나 혼자라면 도저히 엄두 낼 수 없었지요.”
“나두 마찬가디야요.”
준기가 일어나 앞장섰다.
“자, 순희 누이 이제 그만 갑세다.”
“네, 그래요. 날이 밝아올까 두렵네요.”
순희는 준기의 뒤를 따랐다.
“밤길은 방향 가늠이 어려우니까 일단 경부선 철길을 따라 북극성이 있는 쪽으로 가는 게 가장 좋을 거예요.”
“알갓시오. 하지만 털길(철길)은 위험하디요.”
“그럼, 철길로 가지 말고, 그 철길 밑 길로 가면 덜 위험할 거예요.”
“알갓시오.”
그들은 오태동을 벗어나 철길이 있는 상모동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가는 국도가 있었지만 위험할 것 같아 철길 밑 좁은 길을 따라 갔다.
하현 달빛은 있었지만 초행길인 데다가 사방을 경계하면서 걷다 보니 걸음 속도가 몹시 느렸다.
그들이 구미 상모동과 사곡동 마을을 지나 간신히 형곡동에 이르자 그새 동녘하늘에 새벽빛이 뿌옇게 밝아왔다.
“날이 밝아오는 게 두려워요.”
“나두 마찬가지야요. 우리 어디 가서 낮 시간은 숨어 지낸 뒤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북으로 갑세다.”
“그래요. 우리 저기 보이는 저 산 밑으로 가요.”
“기럽세다.”
그들은 거기서 북행을 중단하고 서쪽에 있는 금오산 쪽으로 향했다. 순희는 어쩐지 그 금오산이 그들을 숨겨주고 보호해 줄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경부선 철길이 가로 놓여 있었다. 다행히 이른 새벽이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재빠르게 철길을 건넌 뒤 곧 계곡에 숨었다. 그때까지도 옷이 마르지 않았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고 배도 고팠다. 가까운 곳에 희미하게 동네가 보였다. - 박도 지음 장편소설 <전쟁과 사랑> 96쪽
그 마을은 구미 형곡동이었다. 그 마을 들머리 한 집에서 그들은 낮 시간을 보내면서 밥도 해 먹고 두 청춘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잠을 자다가 정사를 나눴다.
그런 추억으로 준기는 휴전 협정 이후 포로 교환 때, 탈출 중 헤어진 순희를 만나고자 반공포로로 남쪽을 선택, 이곳(구미)을 다시 찾아와 하루 낮을 보낸 그 집 큰아들 김교준 구미가축병원 의사의 조수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 소설의 전반 부는 대체로 실화(논픽션)요, 그 후반부는 거의 픽션이다.
그날 모든 행사가 끝난 뒤 주최 측에서 마련해준 숙소에서 잠을 잔 뒤 이튿날 아침 모처럼 생가와 구미 일대, 특히 금오산 저수지와 금오산을 탐방했다. 헤어보니 고향을 떠난 지 꼭 63년으로 강산이 여섯 번 변하는 세월이 흘렀다.
생가 일대는 구미새마을중앙시장으로 변해 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이불 속에서 몰래 들려주시던 신문사 지국장 박상희 선생 얘기로 1948년 10.1 항쟁 당시 충북 영동에서 지원 나온 경찰 총을 맞고 끝내 사살됐다는 선산경찰서 밑 논은 이제는 그 흔적도 기억을 하는 이도 사라졌을 것이다.
거기 중앙시장에서 아침을 겸해 순대 국밥으로 요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 그 논에서 썰매를 타던 추억과 자치기를 하면서 당시 지나가던 양공주를 놀려주다가 화가난 양공주가 데려 온 미군이 쏜 총알을 피해 '걸음아 날 살라라'고 도망간 기억들이 되새겨졌다.
나의 생가는 그새 2층 상가로 아래 층은 농약 및 농자재 상회로 변하여 옛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웃 오거리에는 그 흔적이 여태 조금 남아 있었다. 다음 행선지로 구미 역으로 간 뒤 그곳에서 다시 택시를 타고 구름에 달 가듯이 금오저수지와 금오산 들머리를 한 바퀴 돌았다.
그곳을 갈 때 마다 내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하여 할머니와 어머니는 어느 탁발 스님의 말씀 대로 나를 금오산 저수지 둑에서 금오산에 팔았다는 부끄러운 얘기가 떠올랐다.
그때의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을 내 손으로 장례를 치러 드린 지도 그새 반세기 지났다. 그 시절 동네 사람들의 내 별명은 '죽고지비'였다고 한다. 그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현대사를 쓰는 작가가 된 것은, '미꾸라지가 용이 된'(옛 동네 어른들의 말씀), 아마도 금오산이 점지 하신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조금 든다. 앞으로 남은 삶 동안 고향 얘기를 아는 대로 들은 대로 남기고자 하는데, 하늘이 그마저도 허락해 주실지 미지수다.
그곳(금오산 탐방)에서 돌아오는 데, 문득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라는 시가 흥얼거려졌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 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 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흰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사진 설명 ;
위 왼편 - 구미역
위 오른편 - 구미 중앙시장
아래 왼편 - 농약, 농자재 상회로 변한 생가
아래 가운데 - 금오산
아래 오른편 - 금오산 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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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그랬습니다. 구미 하면 박정희 대통령이기에 그 이야기를 남기고 눈을 감을지 의문입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