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고무신
임순복
비가 개인 아침. 상쾌하고 산뜻한 가을의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던
날. 얼마만 이었는지 몰라도 남편과 동행을 한 외출은 아직 내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의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이곳저곳 볼 것도 많고, 지
나는 사람들의 모습도 구경해 가며 대학로 네거리 신호등에 멈추었을
때 우리 앞으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한 무리가 되어 건너오
고 있었다. 언제나 난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 한번 바라보는 쑥스러움
보다 그 사람의 신고있는 신을 바라보는 게 버릇이 있던 터이라서 자
연스레 젊은이들의 발에 나의 눈길은 멈추었다. 순간 난 '저것 좀 봐
요...'하며 남편의 손을 흔들었다. 참 요즘 신발 멋있네요. 어쩌면 저
렇게 끝이 뾰족하고도 길쭉하게 생겼을까? 하고 웃으며 그때부터 지
나는 사람들의 신발검사를 시작한다. 저기 또 있어요. 어디 보자 해가
면서.......
그러다가 문득 내 어릴 적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나의 신발에 대
한 변천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내가 기억하는 신발에 대한 기억은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가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소달구지
를 타고 장에 다녀 오시던 날. 저녁 늦게 오시다가 소달구지에 치였다
고 하시며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옆구리 깊이 끼워 있던 누런 종이 뭉
치를 내 놓으셨다. 여러 형제들 틈에 끼여 늘 새것 한번 가져 보지 못
한 우리 작은 딸 줄려고 사왔다고 하시며 어서 풀어 보기를 재촉하셨
다. 누런 종이 뭉치. 이 까짓게 뭐야 하며 반쯤은 입을 삐죽이며 아무
렇게나 벗겨 본 순간. 그 안에는 꿈속에서도 신어보지 못했던 푹신하
고 새하얀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 포개져 있었다. 그 날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기쁜 기억이 지금까지도 나의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음은 그 후에는 단 한번도 그런 횡재의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았
고 아버지의 이름 모를 병환으로 인하여 기울어 가는 우리 집의 살림
은 내 신발까지도 어렵게 만들었다. 언제나 학교 신발장 제일 아래 구
석진 곳에 한쪽 귀퉁이를 실로 얼기설기 꿰맨 검정고무신 만이 꼬리처
럼 나를 붙어 다녔다.
중학교 처음 입학 때엔 선배언니 신발을 물려 받아 신을 수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언제나 발이 너무 작다고 덜거덕 덜거덕
소리나는 투정을 들으면서 내 꿈을 키워 가야만 했다.
그렇게 어렵게 나의 유년 시절은 비록 검정 고무신이라도 새것 좀
신어 봤으면 좋았고, 까만 새 구두에 하얀 칼라가 반듯하게 달려있는
새 교복을 가지런 입어 보는게 꿈이었다. 그후 굽이 높은 뾰족구두
는 아니지만 싸구려 구두를 사 신던 날은 자갈길에 구두 굽이 벗겨질
까 조심했고 먼지가 묻을 새라 입으로 불고 손으로 털어도 보며 신을
신고 새 색시 되어 새 신랑 따라 시집 가던 날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나 두 다리를 꼿꼿이 새웠었고 기나긴 병환으로 우리 작은딸 시집가던
날 손잡고 예식장에 들어 가보고 죽어야 할텐데 하셨던 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시집가던 날엔 하얀 눈이 수북히 쌓인 길을 눈 만큼이나
새 하얀 고무신을 신고 새 신랑 따라 시집 가던 날이었다. 그리고 아직
도 나는 지금 내 앞의 젊은이들 처럼 유행 따라 멋진 구두는 신어 본
적은 없어도 내 유년 시절의 실로 꿰맨 검정 고무신의 소중한 기억을
가슴깊이 묻어 본다. 기나긴 시간 속의 가난에서 단 한발자국 이라도
멀리 벗어나기 위해 뾰족구두, 백 구두도 아닌 운동화의 주인이 되어
더 빨리 더 멀리 젊음의 발자국을 내딛어 본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서
라도 지금은 돌아 갈 수 없는 그 옛날 그리워하던 반짝반짝 빛나는 까
만 구두의 주인으로 머물 수 있는 꿈을 이루고 싶다.
2000. 6집
첫댓글 기나긴 시간 속의 가난에서 단 한발자국 이라도 멀리 벗어나기 위해 뾰족구두, 백 구두도 아닌 운동화의 주인이 되어 더 빨리 더 멀리 젊음의 발자국을 내딛어 본다. 그리고 내 아이에게서라도 지금은 돌아 갈 수 없는 그 옛날 그리워하던 반짝반짝 빛나는 까만 구두의 주인으로 머물 수 있는 꿈을 이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