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외 1편)
황규관
아홉 살 때 만난 의부의 집은 홀로 초가집이었다
밤이면 흐릿한 호롱불이었고
뿌연 담배연기가 꼰 새끼줄이었고
멍석이었고, 바작이었고, 삼태기였다
정지 앞에는 암소 한 마리가 더운
숨을 푸푸 쉬고 있었다
재를 덮어 괭이로 쓸어낸 칙간이었고
산기슭에 매달려 있는 옥수수밭이었다
마당 아래로 돌돌돌 흐르는 또랑물이었고
달빛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었고
가난과 전쟁의 상처가 남긴 폭력이었고
어머니가 밭에서 김매다 돌아와 낳은
동생의 울음이었다
생활보호대상자라 잠깐 눈치 보며 얻어먹은
빵과 우유였고, 까만 콜타르를 뒤집어쓴
국민학교 교사였고 외우지 못해
놀림감이 된 구구단이었다
평생, 아니 죽어서까지 화해를
거부했던 그 시간들은
그가 본의 아니게 나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영악한 내가 그에게서 빼앗은
숨소리 거친 목숨이었다
화장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이제
재앙뿐인가 늦눈이 그치고
수줍은 바람이 불자
냇물이 조금 맑아졌다
지금껏 목소리가 너무 컸다
나는 좀 더 작아져야지
그리고 골짜기처럼 어두워져야지
대출을 받아서라도 검은 밭뙈기를
어머니께 사 드려야 했는데
거리에는 적막이 반, 그래도
파도처럼 자동차 소음은 그치지 않는다
우리를 멈추게 하는 것은 꿈꾸는 고독인데
잘려진 나무의 비명에게서
엄마의 피를 채 씻지 않은 아이의 주먹이
시작될 수 있을까
이제 비극 앞에서 배회하지 않기로 했다
바깥으로 자라던 말을 꺾어
아궁이에 던져 넣기로 했다
윗목에서는 콩나물시루의 콩나물이
밤새 두런거리고
무화과나무는
꿈속에서 점점 익어갈 것이다
⸺시 전문 계간 《딩아돌하》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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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 1968년 전주 출생. 시인, 출판인. 〈삶이 보이는 창〉의 대표. 1993년 「지리산에서」 외 9편으로 전태일 문학상 당선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